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83-285화 합본. 태어나기 전날의 직인에서 부재 확인 도장의 반송 주소까지 일러스트

283-285화 합본. 태어나기 전날의 직인에서 부재 확인 도장의 반송 주소까지

283화. 태어나기 전날의 직인

서류 위로 떨어진 직인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종이의 결을 따라 스며들어야 할 잉크는 번뜩이는 광택을 머금은 채 표면을 맴돌았다. ‘성자가 태어나기 하루 전’이라는 문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오기가 아니라, 채 마르지 않은 검은 성유처럼 끈적하게 번져나가며 하얀 여백을 오염시켰다.

로웬은 그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시각의 질서가 무너진 기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모순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현재의 종이 위에 박제되어 있었다. 창구 너머의 서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새로운 서류 한 장을 밀어 넣었다.

“발행 시각에 중대한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서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깃펜을 들어 올리며 로웬의 시선을 유도했다.

“이것은 행정적 결함입니다. 정정 신청서에 서명하십시오. 시각 산정의 착오를 인정하고 정정 절차를 밟지 않는다면, 이 서류는 정식 기록으로 수리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네스가 로웬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제지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조심하세요, 로웬 님. 저들이 내미는 정정 신청서는 단순한 수정안이 아니에요. 지금 저기에 서명하는 순간, 당신은 이 시각 오류를 목격한 유일한 ‘증인’으로 등록됩니다.”

“증인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증인은 그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는 뜻이죠. 정정이 완료될 때까지, 혹은 그 ‘성자’가 태어날 때까지 당신의 신변은 이 기록국에 귀속될 겁니다.”

이네스의 경고는 차가웠다. 창구의 서기는 대답 대신 서류를 조금 더 로웬 쪽으로 밀어붙였다. 마치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그는 로웬의 손가락이 깃펜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피핀이 고개를 갸웃하며 직인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댔다. 소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들려요. 아직 울리지 않은 종소리예요.”

피핀의 중얼거림에 로웬의 시선이 다시 직인으로 향했다. 직인의 검은 테두리 안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먼 미래에서 들려오는 예행연습과도 같았다. 탄생을 축하하는 성당의 종소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미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각의 축이 뒤틀린 탓에 기록의 틈새로 미래의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서기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정정 신청서를 로웬의 손 아래가 아닌, 바닥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 근처로 가져갔다. 서류의 모서리가 로웬의 그림자에 닿는 순간, 바닥에 고여 있던 어둠이 움찔거리며 서류 쪽으로 빨려 들어가려 했다.

“안 돼!”

베라가 신속하게 끼어들었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붉게 타오르며 로웬의 그림자를 강하게 짓눌렀다. 서류의 끝단이 타들어 가듯 말려 올라갔다.

“그림자에 서명을 찍으려 하다니, 비겁한 수를 쓰는군.”

베라의 일갈에도 서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로웬을 압박했다.

“시각 정정 없이는 이 ‘축복 인도 기록’은 유효한 상태로 남습니다. 만약 이대로 기록이 확정된다면, 수취인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축복을 가로챈 범죄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압박은 거셌다. 기록의 유효성을 볼모로 잡은 협박이었다. 로웬은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절차와 규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로웬이 스스로 서명하게 만들어, 이 기묘한 시간의 뒤틀림을 개인의 실수나 증언으로 덮어버리려는 것이다.

로웬은 깃펜을 잡는 대신, 서류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정정 신청은 하지 않겠습니다.”

서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대신 청구권을 행사하겠소. 직인 원장(元帳)과의 대조, 그리고 이 시각이 산정된 기준의 공개를 요구합니다.”

“원장 대조라니요? 그것은 하급 열람자가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기록의 정합성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취인은 원본과의 대조를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규정집 제14조에 명시되어 있을 텐데요. 시각이 ‘태어나기 전’으로 찍혔다면, 그것을 계산한 산정 근거가 기록국 원장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정정은 그 근거를 확인한 뒤에 판단하겠습니다.”

로웬은 정체의 혼란이나 기억의 파편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절차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서기는 한참 동안 로웬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체념한 듯 무거운 장부를 꺼내 들었다. 기록국의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금색 사슬이 감긴 원장이었다.

먼지가 자욱한 장부의 첫 페이지가 펼쳐졌다. 서기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록국 내부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네스와 베라도 숨을 죽인 채 장부를 주시했다.

마침내 로웬의 시선이 장부의 첫 줄에 닿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직인에 찍혀 있던 불길한 문구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행정적 주석이 적혀 있었다.

[제1항 : 탄생 예정자에게 선지급.]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지급.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미리 할당된 신의 배려인가, 아니면 결코 태어나서는 안 될 자를 붙잡아두기 위한 구속인가. 기록의 첫 줄은 그렇게 모든 상식을 부정하며 빛을 내뿜고 있었다.

284화. 선지급 축복의 수령 조건

직인 원장의 첫 줄에 떠오른 문구, ‘제1항 : 탄생 예정자에게 선지급’이라는 글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종이의 질감은 이제 가죽보다도 더 질겨 보였고, 그 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로웬이 그 문장을 응시하는 사이, 첫 줄 바로 아래에 새로운 칸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수령 조건 : 미기입]

비어 있는 칸은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괴물처럼 기괴한 압박감을 뿜어냈다. 정적을 깨고 창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낮고 집요했다.

“조건을 비워두는 것은 현장 보관자에게 관리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뜻으로 간주합니다. 수령 조건이 확정되지 않은 축복은 그 즉시 보관자의 영혼에 귀속될 것입니다.”

창구의 목소리는 로웬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이 거대한 ‘선지급 축복’이 로웬의 것이 된다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그 달콤한 제안 뒤에 숨겨진 서늘한 칼날을 느꼈다.

“로웬, 조심해.”

이네스가 한 걸음 다가서며 차갑게 덧붙였다. 그녀의 눈은 원장 위에 새겨진 마력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보관자 등록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야. 그건 이 축복이 수취인에게 전달될 때까지 발생하는 모든 손상과 변질에 대해 보관자가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계약이야. 만약 탄생 예정자가 이 축복을 거부하거나, 받는 순간 조금이라도 흠결이 발견된다면 그 대가는 보관자의 존재 자체로 치러야 해.”

그것은 축복의 탈을 쓴 저주나 다름없었다. 보관자가 되는 순간, 로웬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저당 잡히는 셈이었다.

그때, 옆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는 원장 종이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요.”

피핀이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미기입’이라고 적힌 빈칸의 여백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손이 안쪽에서 종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아주 작고 규칙적인 박동 소리요. 마치 누군가 저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피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장을 감싸고 있던 금속 사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풀려나기 시작했다. 뱀처럼 매끄럽게 바닥을 타고 흐르던 사슬 끝이 로웬의 발치까지 닿았다. 사슬은 로웬의 그림자를 향해 날카로운 끝을 겨누었다. 그림자에 보관인의 낙인을 찍어 강제로 귀속시키려는 시도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사슬의 진로가 꺾였다. 베라가 검집을 채 뽑지도 않은 상태로 사슬의 머리를 쳐낸 것이었다. 베라의 서늘한 기운이 로웬의 그림자 주변을 감싸 안으며 사슬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함부로 인장을 찍으려 들지 마라. 이 자는 아직 동의한 적이 없다.”

베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창구의 목소리는 태연하게 이어졌다.

“지금 수령 조건을 기입하신다면, 향후 발생할 탄생 기록과 대조하여 자동으로 축복이 인도될 것입니다. 이는 보관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가장 합리적인 절차입니다. 성자의 탄생은 예정된 미래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자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공기 중의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 로웬은 창구 안쪽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창구가 유도하는 대로 빈칸을 채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위험한 물건을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웬은 깃펜을 들었으나, ‘수령 조건’ 칸 위에 촉을 가져다 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원장의 여백, 행정과 절차의 빈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석진 곳을 지목했다.

“절차에 이의를 제기하겠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수령 조건을 확정하기 전에, 이 계약의 전제 조건들을 먼저 명시할 것을 청구한다. 지급 근거가 무엇인지, 반환 조건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그리고 보관자가 져야 할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동시에 공개하라. 이 세 가지 정보가 누락된 상태에서의 조건 기입은 원천 무효다.”

창구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웬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대상이 아니라, 계약의 허점을 짚어내어 대등한 협상가로서 규정을 들이밀고 있었다. 정체 모를 힘에 휘둘리는 대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언어인 ‘절차’로 맞서고 있었다.

이윽고 원장의 종이가 거칠게 파르르 떨렸다. 로웬이 요구한 정보들이 강제로 인출되는 듯한 진동이었다. 검은 잉크가 허공에서 응집되더니, 수령 조건 아래쪽으로 새로운 문장들이 거칠게 써 내려가 지기 시작했다.

글자들은 마치 고통에 찬 비명처럼 일그러진 채로 나타났다. 로웬의 시선이 빠르게 정보를 훑었다. 지급 근거는 불분명했고, 책임 한계는 여전히 모호했다. 그러나 가장 아래쪽, ‘반환 조건’이라고 적힌 칸에 떠오른 문구가 로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없었던,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서늘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반환 조건 : 성자 부재 시 심부름꾼이 직접 인도.]

심부름꾼. 그 단어가 나타나는 순간, 로웬의 등 뒤로 소름 끼치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등 뒤에서 원장을 함께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창구의 목소리가 끊기고, 도서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다. 이제 선택의 주도권은 다시 로웬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문구는 단순한 조건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초대장처럼 보였다.

285화. 부재 확인 도장의 반송 주소

반환 조건 칸이 마치 늪처럼 일렁였다. 종이 위로 스며들었던 잉크가 역류하듯 솟아오르더니, 이내 차가운 금속 광택을 머금은 덩어리로 변했다. 그것은 허공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갔다. 육중한 손잡이와 정교하게 조각된 인면(印面)을 가진 ‘부재 확인 도장’이었다.

도장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마치 숨을 쉬듯 규칙적으로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이 한 번씩 번쩍일 때마다 창구 주변의 공기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성자의 부재가 확인되었습니다.]

도장이 내뱉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것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기계적인 소음이 섞인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수취인 불명. 수취 거부. 혹은 부재. 확인된 사실에 의거하여, 본 물품의 처우를 결정합니다. 성자 부재 시 심부름꾼이 직접 인도해야 합니다. 심부름꾼이 직접 인도해야 합니다…….]

도장은 기괴한 주문처럼 같은 문장을 반복하며 천천히 로웬의 손등을 향해 내려왔다. 마치 그곳에 낙인을 찍어 영원한 구속을 완성하려는 태세였다.

“잠깐, 로웬!”

이네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로웬의 팔을 붙잡아 뒤로 끌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가 서류의 빈칸을 훑었다.

“부재 확인권자 칸이 비어 있어. 로웬, 저 도장이 네 손등에 찍히는 순간 너는 단순한 운반자가 아니게 돼. 증인과 운반자의 역할을 동시에 떠맡게 되는 거라고. 저들이 성자의 부재를 증명할 책임을 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어.”

이네스의 경고는 차가운 현실을 꿰뚫고 있었다. 확인권자가 공석인 상태에서 도장이 찍힌다면, 성자가 정말로 부재하는지, 혹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모든 입증 책임이 로웬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배달의 굴레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핀은 도장 아래의 빈 주소 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창구의 소음 너머로 다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들려요. 아직 쓰이지 않은 울음소리가.”

피핀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유영하는 도장의 그림자를 쫓았다.

“반송 종소리도 들려요.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대요. 주소 칸이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주소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의 목방울 소리가 저 빈칸에서 울리고 있어요.”

피핀의 말은 모호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물리적인 위협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존재하지 않는 주소로의 반송. 그것은 곧 영원한 미아(迷兒)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 도장이 급격하게 하강했다. 목표는 로웬의 오른손등이었다.

찰나의 순간, 베라가 품 안에서 낡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휘둘렀다.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기록해 온 ‘낡은 심부름 장부’였다. 수많은 의뢰와 배달의 기록이 담긴 장부가 도장과 로웬의 손등 사이를 가로막았다.

콰앙!

금속과 종이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육중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장부의 책장이 거세게 펄럭이며 로웬의 시야를 가렸다. 도장은 장부의 표면을 짓누르며 억지로 인장을 새기려 들었지만, 베라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건 담당 구역의 기록이야! 함부로 네 마음대로 도장을 찍게 둘 순 없지!”

베라의 선언에 창구 너머에서 서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체 없는 창구의 목소리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어리석은 심부름꾼들이여. 지금 그 손등에 확인장을 받게나. 그러면 향후 발생할 모든 부재 확인 절차를 자동으로 통과시켜 주지. 성자를 찾기 위해 헤맬 필요도, 문 앞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너희가 닿는 곳이 곧 성자의 거처가 될 것이니.]

그것은 달콤한 독이었다. 절차의 간소화라는 명목하에 로웬을 성자의 종속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로웬의 손등에 찍힐 도장은 단순한 확인인이 아니라, 그를 ‘성자의 대역’ 혹은 ‘영원한 추적자’로 고정하는 쐐기가 될 터였다.

로웬은 베라의 등 너머로 보이는 도장의 인면을 응시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창구 너머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직접 인도 조건에 승낙할 수 없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절차의 선후가 뒤섞였다. 당신들은 지금 부재 확인권을 강제하려 하지만, 이 서류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필수 항목들이 너무 많아.”

도장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로웬은 베라가 버티고 있는 장부 옆으로 손을 뻗어, 공중에 떠 있는 서류의 빈칸들을 하나하나 지목했다.

“반송 주소, 부재 확인권자, 그리고 보관 기간 만료 조건.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기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도인은 무효다. 심부름꾼으로서 정당한 절차를 청구한다. 이 빈칸들을 먼저 채워라.”

그것은 정체의 각성도, 숨겨진 힘의 발현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가진 집요한 원칙주의가 만들어낸 빈틈없는 방어였다. 규정을 무기로 휘두르는 창구에게, 로웬은 더 철저한 규정으로 맞선 것이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구 안쪽의 어둠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도장이 뒤로 물러났다. 베라는 숨을 몰아쉬며 장부를 거두었다. 장부의 표면에는 깊은 압인 자국이 남았지만, 로웬의 손등은 깨끗했다.

[청구를 수락한다. 절차의 완결성을 위해 빈칸을 채우도록 하지.]

창구의 목소리에 서린 기운이 일순간 바뀌었다. 불쾌한 가시가 돋친 듯한 웃음소리가 다시금 실내를 채웠다.

허공의 서류 위로 보이지 않는 펜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잉크가 번지는 소리가 마치 살이 타는 소리처럼 치익, 하며 들려왔다. 피핀은 귀를 막으며 몸을 떨었고, 이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문구들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가장 먼저 변한 곳은 ‘반송 주소’ 칸이었다. 그곳은 물건이 돌아가야 할 기원을 적는 자리였다.

검은 잉크가 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이 밑바닥에서부터 배어 나오듯 글자가 떠올랐다. 로웬의 눈동자에 그 기괴한 문장이 선명하게 박혔다.

<첫 배달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음.>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멈췄다. 반송 주소라고 적힌 칸 아래에서, 태동하는 생명력과 죽음의 악취가 동시에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로웬은 직감했다. 이 배달의 끝에는 성자뿐만 아니라,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태어나지 않은 주소'가 바로 그가 풀어야 할 거대한 매듭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