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282화. 임시 대리 접수번호 / 첫 배달 중 소실 기록 / 부재 수취인의 인도 확인
280화. 임시 대리 접수번호
철컥, 육중한 쇳소리가 반품 창구의 사방을 메웠다. 기름기가 말라붙은 톱니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자 상단에서 내려오던 강철 셔터가 바닥에 닿기 직전 멈춰 섰다. 틈새는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그 어두운 틈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미끄러지듯 튀어나왔다.
원신청서의 하단, 마치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억지로 밀려 나온 듯한 그것은 일반적인 서류와는 질감부터 달랐다. 누런 빛이 감도는 종이 위에는 검은 잉크가 번진 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임시 대리 0번]
그것은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직후, 대기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로웬의 발치로 다가왔다. 종이 가장자리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종이 결들이 로웬의 장화 끝을 타고 올라와 손등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손대지 마십시오.”
이네스가 로웬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갑게 경고했다. 그녀의 시선은 로웬의 손등을 노리는 대기표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해당 번호표를 수령하는 행위는 행정상 ‘임시 대리 책임’의 개시로 간주됩니다. 지위를 수락하는 순간, 전임자가 완수하지 못한 모든 과업과 그에 따른 연대 책임이 본인에게 귀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접수는 거부해야 합니다.”
로웬은 이네스의 뒤편에서 대기표를 내려다보았다. 0번이라는 숫자는 고정되지 않은 채 액체처럼 일렁였다. 그때, 곁에 서 있던 피핀이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허공이 아니라, 바닥에서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그 종이 조각을 향해 있었다.
“들려요….”
피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년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건조했다.
“저 종이 안에서 누군가 말하고 있어요. 아주 작고, 메마른 목소리예요. 진짜 대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배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보낸 이도 받는 이도 사라져 버렸다고 말이에요.”
피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기표에서 검은 실 같은 끈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로웬의 손가락을 향해 채찍처럼 휘감겨 들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기를 갈랐다. 베라가 단검을 휘둘러 로웬의 검지에 감기려던 검은 끈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잘려 나간 끈들은 바닥에서 잠시 뒤틀리더니 연기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창구 안쪽의 기계장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게 증기를 내뿜으며 압박을 가해 왔다.
[경고: 접수번호 미수령 시 원신청서 열람 권한이 영구 폐기됩니다.]
[대기 시간 종료 10초 전.]
창구의 좁은 틈 사이로 붉은 안광 같은 빛이 번득였다. 번호를 받지 않으면 지금까지 추적해 온 모든 단서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로웬의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의 메카니즘은 집요했다. 그것은 로웬이 ‘자발적’으로 그 책임을 떠안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로웬은 잘려 나간 검은 끈의 잔해를 내려다본 뒤, 시선을 들어 닫힌 셔터 너머를 직시했다. 손을 뻗어 번호표를 잡는 대신, 로웬은 서류함 옆에 비치된 외부 입력 장치 위로 손을 올렸다.
“임시 대리인의 지위 수락은 원대리인의 유고가 행정적으로 증명된 후에야 검토 가능하다.”
로웬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1인칭의 주관을 배제한, 오로지 논리만을 앞세운 응대였다.
“해당 번호표의 발급 근거를 제시하고, 원대리인의 부재 사유를 명시할 것을 청구한다. 절차상 공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한 폐기는 행정 오류로 간주, 상급 기관에 소거 무효화를 신청하겠다.”
창구 안쪽에서 끼익, 하는 기괴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로웬의 요구는 규격 외의 것이었으나, 동시에 시스템이 무시할 수 없는 정당한 절차적 이의제기였다. 붉게 점멸하던 경고등이 잠시 멈칫하더니 노란색으로 바뀌며 느리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청구 수락. 원대리인 상태 확인 중….]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네스는 로웬의 곁에서 검 손잡이를 쥔 채 주변을 경계했고, 베라는 잘려 나간 검은 끈이 다시 뭉치지 않는지 감시했다. 피핀은 귀를 막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했다.
잠시 후, 셔터 틈새로 새로운 문서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그것은 번호표가 아니었다. 로웬이 청구한 ‘부재 사유’에 대한 답변서였다.
종이의 중앙, ‘부재 사유’라고 적힌 칸에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유: 첫 배달 중 소실(消失).]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로웬의 가슴 한복판을 날카로운 송곳이 꿰뚫는 듯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은 아니었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적인 거부반응에 가까웠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귓가에는 수만 명의 속삭임이 겹쳐진 듯한 이명이 들끓었다.
소실.
단순한 실종이나 죽음이 아닌, 존재 자체가 지워졌음을 뜻하는 그 단어가 로웬의 시야 속에서 검게 타들어 갔다. 창구 너머의 기계 장치가 다시 거칠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야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았다는 듯이.
281화. 첫 배달 중 소실 기록
서고의 창구 너머에서 육중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가운 금속음이 수십 번 반복된 끝에, 좁고 긴 틈새로 얇은 종이 뭉치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듯 누렇게 변색된 기록철이었다.
로웬은 창구 선반 위로 완전히 밀려 올라온 그 기록을 응시했다. 가죽 표지 위에는 소유주나 작성자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낡은 금박으로 새겨진 두 줄의 문구만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원대리인]
[첫 배달]
그 아래에는 붉은 잉크로 ‘소실’이라는 도장이 거칠게 찍혀 있었다. 로웬이 손을 뻗으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다급하게 그 손등을 눌러 제지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평소보다 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기다리십시오. 이 기록철을 직접 펼치는 행위는 관리국 규정상 해당 물품에 대한 ‘추적 의무’를 수락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소실된 물건의 행방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서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네스의 경고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로웬은 뻗었던 손을 멈추고 기록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지 틈새로 새어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스치는 듯했다.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피핀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로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년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재 향이 풍깁니다. 아주 오래전에 불이 꺼진 자리에서 날 법한 그런 향요. 그리고 귀 옆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맑게 울리기도 전에 뚝 끊겨버립니다. 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아요.”
피핀의 말대로 기록철은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배달의 시작과 끝을 기록해야 할 지면이 대부분 소실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때, 기록철 표지 위에 붙어 있던 검은 밀랍 봉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봉인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로웬의 손목을 향해 미끄러지듯 옮겨가려 했다. 그 찰나, 베라가 허리춤의 검을 뽑지 않은 채 검집째로 기록철을 강하게 눌러 고정했다.
“로웬, 물러서게. 이 봉인은 자네의 흔적을 먹고 자네에게 귀속되려 하고 있네. 함부로 접촉했다가는 원치 않는 계약에 묶일 수 있어.”
베라의 묵직한 검집이 봉인을 짓누르자, 기록철 내부에서 억눌린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구 안쪽의 어둠 속에서 감정 없는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 원신청서에 대한 이의제기를 접수하려면 마지막 수취 확인 기록이 필수적이다. 기록이 부재할 경우, 신청인의 모든 권리는 각하되며 해당 기록은 영구 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전체 기록을 열람하여 소실 원인을 규명하겠는가?
창구는 로웬을 압박했다. 기록 전체를 열람한다는 것은 곧 그 위험한 기록철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겠다는 뜻이었다. 이네스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로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창구 안쪽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체 기록을 열람할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관리국 절차에 따라, 이 물품이 ‘소실’ 판정을 받게 된 행정적 근거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증명할 마지막 수취 확인자의 직인만 확인하면 충분할 터다.”
로웬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기억이나 거창한 진실을 쫓는 대신, 철저히 절차상의 허점을 파고드는 대응이었다. 창구 안쪽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톱니바퀴가 역방향으로 회전하며 거친 마찰음을 내뱉었다.
— …요청이 접수되었다. 소실 판정 근거 및 마지막 확인자의 직인 항목에 한해 부분 공개를 허용한다.
베라가 검집을 거두자, 기록철의 갈라진 틈 사이로 한 장의 종이가 펄럭이며 튀어 올랐다. 기록철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였다. 본문 내용은 타버린 듯 검게 그을려 보이지 않았으나, 하단의 수취인 서명란만은 이상하리만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웬을 비롯한 일행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 비어 있어야 할 칸 위로 서서히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름도, 날인도 아니었다. 배달의 끝에서 누군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었다.
[수취인 부재, 그러나 축복은 인도됨]
로웬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배달물은 사라졌고 수취인은 없었으나, 배달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기묘한 기록. 로웬은 이 짧은 단서가 품고 있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직감했다.
282화. 부재 수취인의 인도 확인
'수취인 부재, 그러나 축복은 인도됨.'
허공에 떠오른 비현실적인 문구 아래로,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빛이 꿀렁이며 쏟아졌다. 빛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평면으로 펼쳐지며 한 장의 종이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은 명백한 서식이었다. 상단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박혀 있고, 그 아래로는 읽는 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고대어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이네스가 신음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시선은 종이의 가장 하단, 뻥 뚫린 것처럼 비어 있는 칸에 머물렀다.
"인도 확인서……."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물건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하지만 기이한 점이 있었다. 수취인 기입란은 마치 도려낸 듯 하얗게 비어 있는데, 그 옆의 '인도 완료' 직인만큼은 금방 찍은 듯 선명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 받았다는 도장은 찍혀 있으나, 정작 받은 이가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은 기괴한 모순이었다.
피핀이 홀린 듯 손을 뻗으려 하자, 이네스가 거칠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안 돼, 피핀! 건드리지 마!"
"하지만, 저기 이름을 적어야 일이 끝날 것 같아서……."
"그게 함정이야. 저 빈칸에 이름을 적는 순간, 너는 이 정체 모를 '축복'의 대체 수령자로 묶이게 돼. 수취인이 부재중이니 네가 대신 받겠다고 서명하는 꼴이라고."
이네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서류가 지닌 행정적 강제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인과를 뒤트는 축복의 무게를 필멸자가 대리 수령했을 때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했다.
그때였다. 피핀의 귓가에 마른 낙엽이 굴러가는 듯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받은 자가 없으면, 받은 것으로 만들라.
그것은 창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고, 종이 자체가 내뱉는 악의적인 명령 같기도 했다. 피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환청은 집요했다. 누군가 받아야만 이 배달 사고가 종결된다고, 그러니 아무 이름이나 저 빈칸에 채워 넣으라고 재촉했다.
동시에 확인서의 가장자리가 기분 나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종이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일행의 발치에 닿은 그림자를 베껴내기 시작했다. 잉크가 부족하다면 수취인의 그림자라도 뜯어내 칸을 채우겠다는 서슬 퍼런 의지였다.
"물러서!"
베라가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외쳤다. 그녀의 갈기 세운 기세가 밀려드는 그림자의 침식을 잠시 저지했다. 그러나 서류 자체를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세계의 법칙이 구현된 결과물이었으니까.
정적을 깬 것은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일행이 마주한 거대한 '창구'의 어둠 속에서 압박감이 전해졌다.
[수취인을 특정하지 못하면, 축복의 반품 사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도는 완료되었으나 수취인이 명시되지 않은 상태. 이 행정적 공백은 대리 수령자의 존재를 요구한다.]
창구는 사무적인 태도로 일행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밝혀내 반송하든, 아니면 너희 중 누군가 대신 받아 파멸하든 선택하라는 강요였다.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웬에게 향했다. 이런 궤변과 법리적 함정을 타파할 수 있는 이는 그뿐이었다. 로웬은 창백한 안색으로 확인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명멸했다.
"……대리 수령자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빈 수취인 칸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옆에 찍힌 '인도 완료' 직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들은 절차의 완결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이 확인서에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빠져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도가 완료되었다는 직인이 찍혀 있다면, 당연히 이 직인을 찍은 '발행자'와 그 '발행 시각'이 명시되어야 합니다. 수취인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인도가 완료되었다고 판정한 주체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판정은 정확히 언제 내려진 것입니까?"
로웬의 요구는 정체를 밝히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서류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인도 완료 직인이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에 의해, 정당한 시점에 찍힌 것인지부터 검증하자는 논리였다.
창구 너머의 기운이 일렁였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시스템 자체가 계산을 멈춘 듯한 기괴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로웬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수취인을 특정하기 전에, 이 유령 같은 직인의 정체부터 밝히십시오. 발행인이 불분명한 서류는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당연히 수취인 불명에 따른 대리 수령 요구 또한 무효입니다."
공간이 진동했다. 종이 위의 고대어들이 미친 듯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붉은 직인 아래로 보이지 않던 미세한 문구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로웬의 지적이 정당했음을, 시스템이 강제로 증명해내고 있었다.
이네스는 침을 삼키며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로웬의 이성적인 대처가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이윽고, 직인 바로 아래에 작은 글자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이 '축복'이라는 이름의 저주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리는 기록이었다.
로웬의 시선이 그 글자에 닿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늘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이건……."
베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발행인이 누구죠?"
로웬은 대답 대신 발행 시각이 적힌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연대기적 모순이 박혀 있었다.
[발행 시각: 성자가 태어나기 하루 전.]
성자가 존재하기도 전부터, 성자에게 전달될 축복의 인도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이 지독한 배달 사고의 시작점은, 인과율조차 닿지 않는 머나먼 과거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