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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4화 합본. 불멸왕 군수국 잔여 계정에서 연체 웃음 징수관까지

72화. 불멸왕 군수국 잔여 계정

창고 B-14의 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나온 것은 곰팡이 섞인 냉기와 굴뚝 그을음 냄새였다.

로웬은 코끝을 맴도는 매캐한 공기를 무시하며 품 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성국 납품장 7번과 연동된 창고 B-14 군수품 전환표. 폐쇄 명령서가 내려진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서류상의 잉크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건 무효입니다. 이미 멸실 처리된 계정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창고 입구를 가로막은 잔여 회계관이 신경질적으로 장부를 내던지듯 덮었다. 성국과 왕궁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살아남은 노회한 관료의 눈에는 로웬 일행이 그저 보상금이나 노리고 찾아온 뜨내기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로웬은 대답 대신 전환표의 하단, 수령인 확인란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배달 실패, 수령인 부재, 반송처 불명. 회계학적으로 이 세 가지가 겹치면 해당 물자는 ‘소멸’이 아니라 ‘미결제 잔여 자산’으로 분류됩니다. 성국 회계 규정 제4조 11항에 따르면, 미결제 자산의 처분권은 최종 배달 증명서를 소지한 대리인에게 일시 귀속되죠.”

“그건… 이론상으로나 그렇고! 여긴 불멸왕의 군수국 계정이 얽힌 곳입니다. 당신 같은 심부름꾼이 건드릴 영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역을 따지는 건 세관원들이나 할 일이죠. 저는 지금 실무를 보는 겁니다. 이 물건들이 여기 계속 ‘잔여’로 잡혀 있으면, 당신들 이번 분기 결산 때 중앙 회계실에 보고서 어떻게 올릴 생각입니까? 유령 계정을 안고 죽을 건가요, 아니면 저한테 넘기고 장부를 깨끗하게 닦을 건가요?”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회계관의 명치를 찔렀다. 관료가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리던 그때, 창고 안쪽의 어둠 속에서 묵직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맞군. 장부는 깨끗할수록 좋지.”

회계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남자는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듯한 압박감을 몰고 왔다.

남자는 겨울 바다처럼 깊고 어두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옷자락은 창고의 희미한 빛마저 집어삼키며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련된 듯한 단단한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턱선까지 깊게 팬 흉터는 그것이 훈장이 아니라 가혹한 생존의 기록임을 증명하듯, 그가 침묵할 때마다 주변의 공기에 물리적인 무게를 더했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품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울리는 금속제 기구들의 마찰음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시계 장치가 누군가의 수명을 측정하는 소리처럼 규칙적이고 서늘했다. 로웬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죽은 태양의 재를 닮은 회색이었으며, 그 눈은 상대를 산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장부 칸에 적힌 영혼의 행정 가치를 계산하는 회계사의 무심함만 담고 있었다.

“오르센… 발크 경.”

회계관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뱉었다. 왕궁 군수 잔여 계정 관리국장, 오르센 발크. 살아있는 자들의 물자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남긴 유산을 정리하는 ‘사후 회계’의 정점에 선 사내였다.

오르센은 로웬이 들고 있는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훑었다.

“성국 납품장 7번. 창고 B-14. 그리고 군수품 전환표라.”

그의 시선이 잠시 로웬 뒤에 서 있는 피핀에게 머물렀다. 피핀은 평소처럼 헤벌쭉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긁고 있었다.

“아저씨, 저 상자들 안에서 소리가 나요. 금속 상자가 덜그럭거리는데, 그게 꼭 배고픈 사람들이 숟가락으로 빈 그릇 긁는 소리 같아. 슥, 슥, 하고 굶주림의 리듬이 들려요.”

피핀의 뜬금없는 소리에 이네스가 검 자루를 꽉 쥐었다. 이네스는 창고 구석에 쌓인 상자 하나에 새겨진 기사단 문장을 발견했다. 오염되고 찌그러진 문장. 보통의 기사라면 수치심에 그것을 지우려 했겠지만, 이네스는 오히려 그 문장이 잘 보이도록 먼지를 닦아냈다.

“지우지 않으시는 겁니까?”

모르그가 기록판을 넘기며 묻자, 이네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죄목의 증거다. 기사단이 불멸왕의 군수국과 결탁해 무엇을 빼돌렸는지, 이 문장이 박힌 채로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기사도다.”

모르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웬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오르센이 들고 있는 장부와 자신이 대조하던 기록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로웬 씨, 이 잔여 계정 번호 104-B는 통상적인 화폐 단위가 아닙니다. ‘죽은 태양 세금 장부’에 기재된 사망 처리 단위와 일치합니다. 즉, 여기 쌓인 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으로 치환된 가치들입니다.”

오르센 발크가 낮게 읊조렸다.

“정확하군. 여긴 창고가 아니라 무덤의 부속실이지.”

그는 로웬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덧붙였다.

“가져가라. 어차피 이 계정은 이미 누군가에게 ‘보관료’로 지불되고 있었으니까.”

“보관료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로웬의 물음에 오르센은 대답 대신 창고 깊숙한 곳, 중앙 회계실로 통하는 문서함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엔 번호도, 이름도 없이 오직 기묘한 문양만이 새겨져 있었다.

“중앙 회계실 0호 문서함. 그 안에 ‘피핀의 기억 보관료’라는 항목으로 매달 결제가 올라오고 있더군. 심부름꾼, 네가 배달해야 할 진짜 수령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 문서함일지도 모르지.”

로웬은 피핀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텅 빈 눈으로 굶주림의 리듬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금속 상자들이 마치 그녀의 노래에 응답하듯, 일제히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불멸왕의 군수국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긴 잔여 계정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을 먹으며 숨 쉬고 있었다.

73화. 피핀 기억 보관료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중앙 회계실 깊숙한 곳, 그늘진 구석에 자리 잡은 ‘0호 문서함’은 그 자체로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로웬의 손가락 끝이 차가운 함의 표면에 닿았다. 잿불 아래 가라앉은 진실이 그 안에 담겨 있을 터였다.

“형, 그 안에…… 내 이름이 적힌 뭔가가 있는 거야?”

피핀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라면 ‘와, 내 이름이 0순위네? 나 좀 대단한 듯!’ 하고 실없는 소리를 던졌을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피핀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 포기한 채,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제 손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 후보로서, 그리고 이번 사건의 목격자를 확보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 함을 열어젖히고 싶었을 것이다. 피핀의 기억은 성국의 부패를 증명할 결정적인 열쇠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다그치는 대신, 피핀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한 걸음 물러났다.

“피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보지 않아도 괜찮아.”

모르그는 문서함 주변의 마력 흐름을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보관료 납부 기록과 사망 장부의 누락분을 대조하고 있었다. 기록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건 섬뜩하게 정갈한 공백뿐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하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가로채고 있다는 증거였다.

로웬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에는 0호 문서함이 들려 있었지만, 자물쇠를 부수거나 억지로 열 생각은 없었다.

“심부름꾼의 규칙 제1조.”

로웬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수취인 본인의 확인이 없는 한, 물건은 절대 개봉하지 않는다. 피핀, 이건 네 물건이야. 네가 주인이고, 네가 열람권을 가진 수령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열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이 짐을 지켜주는 것뿐이야.”

피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려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이 로웬의 얼굴을 훑었다. 그가 무거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어둠 너머에서 낯선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일정한 박자로 다가오는 소리는 기계적일 만큼 정확했다.

“거기, 무단 점거자들은 비켜주시죠. 업무 방해입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자는 대뜸 서류판을 내밀었다. 이름도, 소속도 밝히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마치 길 가던 잡상인을 대하듯 로웬 일행을 훑어보더니, 피핀에게 깃펜을 들이밀었다.

“연체되었습니다. 기억 보관료. 여기 서명하세요. 서명하지 않으면 압류 절차에 들어갑니다.”

“보관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피핀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여자는 대답 대신 서류판을 툭툭 쳤다. 로웬이 한 걸음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여자는 고개를 들어 로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 끝까지 단단히 채운 검은 사제복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빳빳하게 세워진 깃은 마치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한 올의 잔머리도 허용하지 않고 뒤로 넘겨 묶은 머리카락은 창백한 이마를 드러냈고, 그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는 오래된 양피지와 싸늘한 얼음 냄새가 섞인 기묘한 체취가 풍겼으며,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된 채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낭독기처럼 서늘했다.

“중앙 회계실 징수 보조원, 로사 말렌입니다.”

여자는 무미건조하게 제 이름을 뱉었다. 그녀의 직함은 보조원이었으나, 뿜어내는 기세는 이 회계실 전체를 통제하는 관리자와 같았다.

“이 아이는 기억을 예치했습니다. 공짜가 아니죠. 세상에 공짜 보관은 없습니다. 특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기억’이라면 더더욱.”

“피핀은 기억을 맡긴 적이 없어. 뺏긴 거지.”

로웬의 말에 로사 말렌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작동 오류가 난 기계의 경련에 가까웠다.

“뺏긴 것이든 맡긴 것이든, 장부상으로는 ‘위탁’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관료는…… ‘웃음’으로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죠. 하지만 이 피시험체는 최근 웃음을 정지했습니다. 연체군요.”

모르그가 옆에서 낮게 읊조렸다.

“기록 독점의 끝이 이런 거군. 죽음조차 연체금으로 환산해서 산 사람의 목을 죄는군.”

피핀은 로사의 말에 억지로 입을 벌려 웃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는 입가에는 비명보다 못한 신음만이 걸려 있었다. 피핀은 웃으려다 실패하고, 결국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농담조차 나오지 않는 진짜 절망이었다.

로사 말렌은 서류를 거두어들였다.

“본인 확인 거부, 보관료 납부 지연. 절차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녀가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연체 웃음 징수관을 파견하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가’를 받아낼 분이죠. 곧 뵙게 될 겁니다.”

회계실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로웬은 손에 든 0호 문서함을 더욱 꽉 쥐었다. 로웬은 문서함 이음새 위에 구겨진 운송표를 눌러 붙이고, 그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수취인 본인 확인 전 개봉 금지.]

이제 이 상자는 단순한 기억의 보관함이 아니었다. 피핀의 생존을 담보로 한 잔혹한 채무 증서였고, 동시에 피핀이 직접 열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미완료 심부름이었다.

74화. 연체 웃음 징수관

침묵이 내려앉은 무덤가 위로 서늘한 종잇조각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허공에서 실루엣을 갖춘 남자는 그늘진 얼굴로 품 안에서 길게 말린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서 뜯어낸 감정의 부채 증명서였다.

그가 피핀을 향해 손가락바람을 튕기자, 보이지 않는 갈고리 같은 규정 문구가 피핀의 목울대 근처에서 바스락거렸다.

“기한은 이미 삼백 일을 넘겼습니다. 지연 이자가 본금을 추월했으니, 지금 즉시 수납하시죠.”

남자의 목소리는 건조한 낙엽이 쓸리는 소리 같았다. 피핀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비명이 아닌,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려 했다. 횡격막이 경련하고,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즐거움의 산물이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반사 작용이었다.

피핀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가락톱날이 입술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금 여기서 한 번이라도 터져 나오면, 남은 기억조차 모두 연체금으로 압류당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다. 침묵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처절한 저항이었다.

“거부권은 없습니다. 웃으세요. 당신의 웃음은 이미 행정상 ‘공공의 것’으로 분류되었으니까.”

남자가 다시 한번 손을 뻗으려던 찰나,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로웬의 구두 굽이 땅을 박찼다. 로웬은 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자의 눈앞에 떠 있는 투명한 청구서를 가로챘다.

로웬의 손끝에 닿은 청구서가 파르르 떨리며 잿빛 연기를 내뿜었다. 성자라면 이 상황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악의를 단죄했겠지만, 로웬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저 서류의 공백과 모순을 찾아내는 사냥개처럼 청구서의 조항들을 훑어 내렸다.

“잠깐, 집행관. 절차부터 따져야지.”

로웬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청구서의 수취인은 ‘무덤에 귀속된 자’로 되어 있군. 하지만 피핀은 지금 내 심부름꾼이다. 즉, 소속이 변경되었다는 뜻이지. 게다가 발송인 명의는 멸망한 이전 행정국인데, 지금 그 권한을 누가 승계했는지 증명할 서류가 이 장부 어디에도 없어.”

집행관의 고개가 기우뚱하게 꺾였다.

“징수 물품인 ‘웃음’의 소유권도 불분명해. 피핀의 웃음은 본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외부 압력에 의한 반사 작용인데, 이걸 어떻게 온전한 납부물로 인정하지? 수취인 본인 확인 실패, 징수 물품 소유권 불명. 이 건은 반송 처리한다.”

로웬이 손가락을 튕기자 청구서가 돌연 불꽃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물리적인 파괴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를 부정당한 행정적 소멸이었다.

남자는 그제야 피핀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쓰고 있던 낡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림자 속에서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노엘 그린. 행정국 특별 추심팀 소속입니다. 법리적 허점을 찌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군요, ‘성자’님.”

노엘 그린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정갈했다. 짙은 녹색의 코트는 마치 말린 식물의 잎사귀를 이어 붙인 듯 질감이 독특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숲속의 썩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인 기묘한 체취가 풍겼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피부 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금색 안경이 걸쳐 있었으며, 그 너머의 눈동자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물빛처럼 일렁였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대신 입가의 떨림부터 세는 버릇이 있는지, 피핀이 숨을 삼킬 때마다 안경 너머 시선을 아주 조금씩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거의 없었으나, 한 번 내뱉을 때마다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주변을 바짝 마르게 만드는 압도적인 건조함을 품고 있었다.

“기사단장 이네스. 당신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노엘이 시선을 돌리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이네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피난민들의 웃음, 노래, 그리고 소중한 기억들까지 전부 ‘행정 자료’라는 명목으로 우리 쪽에 넘겨준 건 바로 당신들 기사단이었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말이야.”

이네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울 수 없는 죄책감과 참담함이 서려 있었다.

“……부정하지 않겠다. 우리가 그들의 영혼을 담보로 평화를 샀지. 이 무덤은 적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지키겠다고 맹세한 우리가 판 것이다.”

이네스의 고백은 무거웠다. 65화부터 이어져 온 기사단 무덤의 진실이 그녀의 입을 통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기사단은 수호자가 아니라, 관리하기 쉬운 군중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의 감정을 팔아넘긴 중간 관리인이었을 뿐이다.

그 혼란을 틈타 모르그는 바닥에 떨어진 징수 장부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지독한 탐욕과 호기심이 번뜩였다. 이 장부 전체를 손에 넣는다면, 세상 모든 사람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모르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로웬의 서늘한 시선이 자신의 뒤통수에 박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부 본체를 훔치는 대신,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해 장부의 내용을 빠르게 복사해내기 시작했다.

“전부 가져가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말이지. 사본이면 충분해.”

모르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자, 그의 그림자 속으로 수만 개의 글자가 각인되어 사라졌다.

노엘 그린은 반송된 청구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렸다. 어둠 속으로 녹아내리는 그의 등 뒤로 로웬의 마지막 경고가 날아갔다.

“가서 전해라. 이 구역의 청구서는 수취인 확인 실패, 소유권 불명, 발송 권한 미증명으로 전부 반송이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 피핀은 그제야 막았던 손을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술엔 웃음 대신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모르그는 품 안의 그림자를 갈무리하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앞에 시스템의 알림처럼 차가운 문장이 떠올랐다.

[진실 독점 열람 허가: 모르그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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