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77화 합본. 모르그의 진실 독점 열람권에서 죽은 태양 인장 보관소까지
75화. 모르그의 진실 독점 열람권
[진실 독점 열람 허가: 모르그 라인]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문장이 모르그의 망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그것은 단순한 권한의 부여가 아니었다. 평생을 정보의 뒷골목에서 타인의 치부와 국가의 기밀을 주워 먹으며 살아온 그에게, 이 선언은 마치 세상 모든 갈증을 해소해 줄 단 한 모금의 성수처럼 다가왔다.
‘독점.’
모르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곳에 저장된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숨긴 치욕, 역사 아래 매장된 진실, 그리고 제국을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부정의 기록들이다. 그것을 ‘혼자’ 소유한다는 감각이 모르그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손끝이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검은 서가로 달려가 모든 장부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망이 이성을 잠식하려 들었다.
“착각하지 마, 모르그.”
낮게 깔린 로웬의 목소리가 환상처럼 피어오르던 독점욕의 안개를 찢었다. 모르그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게 허락된 건 ‘열람권’이지 ‘배달권’이 아니야. 여기서 본 걸 밖으로 실어 나르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소리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보고도 말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보관료를 내지 않았으니까. 넌 지금 공짜로 남의 일기를 훔쳐볼 기회를 얻은 것뿐이야. 그걸 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넌 그 정보가 가진 무게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다.”
성자의 엄숙한 훈계라기보다는, 물건을 배달할 때 지켜야 할 철저한 계약 조항을 읊어주는 심부름꾼의 말투였다. 모르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등 뒤에서 피핀이 킁킁거리며 코를 씰룩였다.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형아, 여기 냄새 이상해. 텅 비어 있는데 가득 찬 냄새가 나.”
“비어 있는데 가득 차?”
“응. 내 웃음을 가져갔던 아저씨들이 장부를 넘길 때 났던 냄새야. 종이는 하얀데, 그 안에 내 웃음이 갇혀서 소리 지르는 냄새.”
피핀이 겁에 질린 듯 로웬의 옷자락을 꽉 쥐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의 본능적인 거부감은 모르그에게 차가운 경고등이 되었다. 이곳의 정보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누군가의 삶에서 도려낸 일부분이 박제가 되어 꽂혀 있는 것이다.
이네스 역시 서가로 다가가려다 멈춰 섰다. 그녀의 눈에는 정의가 실현될 장소로 보였을 터였다. 제국을 썩게 만드는 이들의 죄목이 적힌 장부. 그것을 모두 공개하면 세상은 정화될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장부 표지에 적힌 수많은 이름과 날짜를 보고 손을 멈췄다.
“이 죄목들을 다 밝히면…… 이 기록에 얽힌 피해자들의 이름도 같이 세상에 던져지겠군요.”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 피해자의 상처를 다시 난도질해야 하는 모순. 모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선이 아님을, 그녀는 결벽에 가까운 정의감 너머에서 직시하고 있었다.
“안내를 시작하지.”
어둠 속에서 실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르그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꽂혔다. 검은 열람실의 어둠을 헤치고 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르그의 옆에 섰다.
“모르그 라인.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저들처럼 망설일 필요 없습니다. 저 어리석은 기사는 명예에 묶여 있고, 저 아이는 공포에 떨고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만이 이 거대한 진실의 바다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림자 같은 안내자는 모르그의 귓가에 독처럼 달콤한 말을 흘려넣었다. 다른 이들은 배제한 채, 오직 모르그만이 이 권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모르그의 눈에 다시금 탐욕의 불꽃이 일렁였다.
그때, 열람실 바깥쪽에서 로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접수번호 075번, 오류 확인. 거기 당신, 안내 절차 건너뛰었잖아.”
로웬의 지적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시스템 창이 붉게 점멸했다. 안내자의 형체가 잠시 일렁이더니, 이내 명확한 색채를 띠며 실체화되었다.
칼리오 베른. 검은 열람실의 독점 열람 사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닥까지 길게 내려오는 칠흑 같은 벨벳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재질이 마치 빛을 빨아들이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는 오래된 양피지의 질감을 연상시켰고, 깊게 패인 눈등선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잉크병을 엎질러 놓은 듯한 진득한 검은색으로 빛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른 종이가 서로 스치는 듯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기묘한 압박감을 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수만 권의 장부가 한꺼번에 닫히는 듯한 둔탁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사소한 오류를 잡아내는 눈썰미가 좋군, 심부름꾼.”
칼리오 베른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모르그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선택해라. 이 열람실 전체를 베껴 가겠나? 아니면 단 한 줄의 진실을 새기겠나?”
모르그는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었다. 열람실 전체를 복사하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모든 것을 가져간다면 제국의 밤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일 것이다. 하지만 피핀의 겁에 질린 눈망울과 이네스의 멈춰 선 뒷모습이 자꾸만 그의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로웬의 말이 비수처럼 박혀 있었다. 보관료를 내지 않은 정보는 독이 된다.
모르그는 서가 전체를 훑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장의 빈 봉투 위에 펜을 가져갔다. 그는 정보를 ‘독점’하는 대신, 자신이 확인한 가장 이질적인 진실 하나만을 적기로 했다.
[피핀의 웃음은 납부물이 아니라, 본인 확인 전 미개봉 물품이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줄의 문장이 새겨졌다.
그것은 정보의 탈취가 아니라, 아이의 빼앗긴 조각에 대한 정당한 권리 주장이었다.
글자를 마친 순간, 모르그가 쥐고 있던 봉투가 차가운 냉기를 내뿜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반송’이었다.
콰아앙!
열람실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흔들렸다. 서가에 꽂혀 있던 수만 권의 장부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펄럭였다. 칼리오 베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건…… 열람의 범주를 벗어난 기록이다!”
요동치는 어둠 속에서, 정중앙에 놓인 거대한 황금 장부의 표지가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끗했던 첫 페이지 위에, 붉은색 잉크가 마치 피처럼 배어 나오며 문장을 써 내려갔다.
[거짓 순례 명부 자동 작성기 가동 — 대상: 모르그 라인]
불길한 붉은 광채가 열람실을 가득 메웠다. 76화로 이어질 거대한 폭풍의 전조였다.
76화. 거짓 순례 명부 자동 작성기
[거짓 순례 명부 자동 작성기 가동 — 대상: 모르그 라인]
허공에 뜬 청동 톱니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맞물렸다. 모르그 라인의 발치에서부터 솟아오른 증기 압력식 필경 팔(筆耕 臂) 네 개가 잉크 냄새를 풍기며 요란하게 관절을 꺾었다. 깃펜 끝이 양피지를 긁는 소리는 마치 굶주린 짐승이 뼈를 갉아 먹는 소리처럼 날카로웠다.
“이, 이게 무슨……!”
모르그가 뒷걸음질 쳤지만, 바닥에서 뻗어 나온 금속제 고정 장치가 그의 장화 굽을 단단히 붙들었다. 필경 팔들은 기괴한 속도로 움직이며 양피지 위에 문장을 채워 내려갔다.
[서기 924년, 성자께서 모르그 라인의 죄를 사하시니, 그 증거로 성스러운 미소를 내리셨도다.]
“아니야!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어!”
모르그가 비명을 지르자, 기계 장치는 기다렸다는 듯 톱니를 한 칸 더 회전시켰다. 끼릭, 소리와 함께 문장이 수정되었다.
[모르그 라인은 성자의 자비에 감복하여 자신의 목격담이 거짓이라 울부짖으며 참회하였다.]
“이 미친 기계가!”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부정할수록 기록을 더 화려하게 수식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로웬이 무심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 같은 기만극을 보면서도 감탄은커녕, 잘못 배송된 소포를 확인하는 택배 기사처럼 건조한 표정이었다.
로웬은 허공을 휘젓는 필경 팔 하나를 가볍게 쳐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성자를 증명하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그냥 잘못된 주소로 배달된 ‘반송 물품’이지요. 수취인란에 제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해서 그 내용물이 전부 제 것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모르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로웬이 성자라는 사실을 폭로해 그 힘을 이용하려 했으나, 지금 눈앞의 기계는 로웬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르그가 본 모든 것’을 성스러운 기적으로 박제하고 있었다. 진실을 독점하려던 욕망은 어느새 공식 기록이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네스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충성해온 성기사단의 공식 인장과 양식들이, 지금 로웬의 말 몇 마디와 기계의 소음 속에서 ‘거짓된 신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신성해야 할 기록이 사실은 누군가의 편의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공포가 그녀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로웬, 정말로…… 이게 옳은 일인가요? 기록은 기사단의 명예이자 신들의 흔적입니다. 그런데 저 장치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잖아요.”
“이네스 경, 기록은 물류와 같습니다. 출발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죠. 하지만 가끔은 배송 사고가 납니다. 내용물이 파손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물건이 상자에 담기기도 하죠. 지금 이 장치는 ‘오배송된 진실’을 적절한 ‘거짓’으로 포장해서 반송지로 돌려보내는 중일 뿐입니다.”
로웬은 피핀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기계 팔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필경 팔은 ‘천사의 화음’이라느니 ‘강림의 징조’라느니 하는 수식어를 양피지에 덧칠했다.
“저 웃음은 성자의 증거품이 아닙니다. 그냥 피핀에게 돌아가야 할 소중한 일상이죠. 개봉되지 않은 채 본인에게 전달되어야 할 물건을 누군가 가로채려 한다면, 당연히 반송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증기 구름 사이로 규칙적인 금속성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필경 팔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취인 불명, 혹은 주소지 오기. 심부름꾼치고는 꽤나 철학적인 비유로군.”
자동으로 재생되는 듯한 건조한 음성이 들려온 직후, 기계 장치 너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반 틱.
그는 마치 낡은 도서관의 서가 자체를 의인화한 것 같은 기이한 압박감을 풍겼다. 먼지가 내려앉은 짙은 감청색 연미복은 어깨선이 날카롭게 서 있었고, 그 위로 수십 개의 정밀한 태엽 태엽 장치가 달린 확대경이 안경 대신 오른쪽 눈에 박혀 있었다. 길게 기른 백발은 기름칠한 기계 부품처럼 정갈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으며, 그의 피부는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기록사 특유의 창백함을 넘어 차가운 대리석 같은 질감을 띠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구두 굽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의 시선은 로웬의 얼굴이 아니라 로웬의 발치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기록의 궤적’을 훑는 것처럼 기괴하게 번뜩였다.
“제국 직속 제4 기록보관소장, 오르반 틱이라고 합니다. ‘거짓 순례 명부’에 서명할 증인이 한 명 부족하던 차에 아주 적절한 분들이 오셨군요.”
오르반은 무심하게 손을 뻗어 모르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모르그의 품속에 있던 가문의 인장을 낚아챘다.
“모르그 라인 경. 당신의 욕심이 이 기록의 잉크가 되었습니다. 축하드리지요. 당신은 이제부터 성자를 직접 친견하고 그 기적을 공인한 ‘거짓된 증인’으로 역사에 남을 겁니다.”
“이, 이봐! 난 그런 적 없어! 저놈은 성자가 아니라 그냥 심부름꾼……!”
“기계가 이미 성자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제 인장이 그것을 보증했죠. 기록된 사실 앞에 인간의 기억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오르반의 서늘한 선언에 모르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진실을 무기로 휘두르려던 자가, 자신이 휘두른 무기에 박제되어 버린 꼴이었다.
로웬은 오르반의 확대경 너머로 보이는 차가운 안광을 마주했다. 이 남자는 로웬이 성자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기록의 완결성, 그리고 그 기록이 가져올 파급력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송지는 어디입니까?”
로웬의 질문에 오르반이 입가에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검은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이 오배송된 신화의 종착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거짓된 인장들이 태어나는 곳, 그리고 모든 잊혀진 진실이 화형당하는 곳이죠.”
오르반이 가리킨 방향, 안개 너머로 거대한 석조 건물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죽은 태양 인장 보관소(死日 印章 保管所). 그곳이 당신들이 갈 다음 배송지입니다.”
77화. 죽은 태양 인장 보관소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무덤의 입구를 봉하는 낙인처럼 보관소 내부에 울려 퍼졌다. 사방을 메운 것은 서늘한 냉기와 눅눅한 밀랍의 향, 그리고 이미 시효가 만료되어 권위를 잃은 수만 개의 인장들이 내뿜는 침묵이었다. 죽은 태양 인장 보관소.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명령과 축복들이 이곳에서는 단지 처분을 기다리는 금속 조각에 불과했다.
모르그는 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보관소 중앙에 놓인 두꺼운 장부, ‘폐인장 관리 목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성자로 추앙받던 이들의 마지막 흔적과,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된 성유물들의 처분 기록이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 장부 전체를 손에 넣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그것만 있다면 교단 내부의 권력 지형을 단숨에 뒤흔들 패를 쥘 수 있었다.
“성자라는 호칭은 과합니다, 모르그 위원님.”
로웬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모르그의 탐욕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마치 아주 사소한 서류상의 오류를 지적하듯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신학적인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단지 수취인 불명으로 인한 오배송, 그리고 그에 따른 반송 절차일 뿐이죠. 성자의 기적이라느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는 폐기물 처리 대장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로웬은 이 사태를 ‘기적’의 영역에서 ‘행정’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사건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순간 통제권을 잃는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부를 가볍게 두드리며 모르그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장부 전체를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수취인 보호 원칙에 따라, 오늘 우리가 확인해야 할 ‘그 물건’의 폐기 기록만 챙기시겠습니까?”
모르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장부 전체를 탐내는 욕망보다, 그 장부를 통째로 들고 나갔을 때 감당해야 할 ‘보관소 관리 규칙 위반’이라는 올가미가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정보의 가치보다 그것을 소유했을 때 지불해야 할 비용이 더 컸다. 결국 모르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부의 첫 장만을 조심스럽게 찢어냈다. 나머지 수천 장의 비밀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는 안전과 명분을 택한 셈이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움직였다. 그는 로웬과 모르그 사이에 놓인 수취인 명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곳은 아직 아무런 이름도 적히지 않은 빈칸이었다.
“이건 공공의 물건이 아니에요.”
피핀이 특유의 멍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르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빈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내 웃음은 나라의 것이나 교단의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돌아와야 할 내 물건인걸요. 여기 이름이 비어 있는 건, 아직 주인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증거품이라느니 하는 딱지는 붙이지 말아 주세요.”
어린아이의 생떼 같은 논리였으나,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본질이 담겨 있었다. 피핀의 손가락이 머무는 곳에서 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바로 그 순간, 보관소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철컥.
누군가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인장 보관함을 거칠게 밀어 넣는 소리였다. 뒤이어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 거대한 무덤의 관리자이자 산 자들의 기록을 지우는 집행자였다.
“폐기 장부를 훼손하는 건 내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금속을 긁는 듯 건조했다. 모르그가 황급히 찢어낸 종이를 등 뒤로 숨겼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셀레나 모르트입니다. 이 버려진 이름들의 감옥을 지키고 있죠.”
이름이 불린 순간, 그녀의 존재감이 보관소의 공기를 단번에 압도했다. 셀레나 모르트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피부를 가졌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된 흑색 제복은 그녀의 마른 체구 위에서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춤에 매달린 수십 개의 열쇠 꾸러미가 기괴한 화음을 만들어냈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채색의 눈동자는 마치 죽은 이의 인장을 감별하듯 눈앞의 사람들을 서늘하게 훑어 내렸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은 보관소의 희미한 촛불을 머금어 기묘한 안광을 뿜어냈으며,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은 마치 산 자의 구역과 죽은 자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단호하고 무거웠다.
셀레나는 로웬에게 다가와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이 로웬이 들고 있는 서류 뭉치를 향했다.
“반송 절차라고 했나? 우리 보관소는 접수되지 않은 물건은 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네들이 찾는 그 ‘웃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녀는 품 안에서 낡은 청동 인장을 꺼내 보였다. 인장에는 빛을 잃은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지금 이 시간, 성자를 사칭하는 자들의 원본이 모이는 곳으로.”
셀레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성자 사칭 원본 접수대 — 심야 개방 시간이군. 가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