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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309화 합본. 선택권자의 빈 도장에서 미수령 축복의 반송장까지 일러스트

307-309화 합본. 선택권자의 빈 도장에서 미수령 축복의 반송장까지

307화. 선택권자의 빈 도장

서류의 하단, 서늘한 여백 위에 새겨진 문장은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다.

[ ……아직 선택되지 않았다. ]

그 문장 바로 아래에는 마땅히 찍혀 있어야 할 도장 칸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기이할 정도로 깨끗했다. 단순한 종이의 질감이 아니라, 마치 그 부분만 세상의 색을 잃어버린 듯한 인위적인 공백이었다. 존재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기괴한 부재 증명이 서류 전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정적을 먼저 깨뜨린 것은 창구 너머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코끝에 걸친 안경을 치켜올리며 비릿한 코웃음을 쳤다.

“보시다시피입니다. 선택권자의 날인이 없군요. 이건 규정상 명백한 서류 미비입니다. 대리 수령권은 무효입니다.”

관리인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거두어들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네스의 서늘한 손길이 서류의 끝단을 짓눌렀다. 종이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잠깐. 무효를 주장하기 전에 명확히 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분하고 정교했다. 관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 공란이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인지, 아직 기재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찍혔다가 회수된 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날인 대장과 위임 기록을 제시하십시오. 절차상의 결함이 서류 자체에 있는지, 아니면 이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내부 기록은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보안 규정 위반입니다.”

관리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자, 옆에 서 있던 피핀이 귀를 움찔거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듯 감싸며 서류의 빈 칸을 노려보았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잠깐만요. 저 빈 칸, 조용한 게 아니에요.”

“무엇이 들리는 거지?”

로웬이 낮게 묻자 피핀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도장이 안 찍힌 침묵이 아니에요. 찍혔다가…… 억지로 벗겨진 소리예요. 살갗에서 딱지가 뜯겨 나갈 때 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파열음이 들려요.”

그 순간, 서류 위의 빈 도장 칸이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이 위의 공백이 안쪽에서부터 기묘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하얀 잉크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관리인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창구의 철창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맞물리며 도망칠 틈을 차단했다.

“규정 위반 감지. 선택권자 공란. 대리 수령자 지정 불능.”

창구 상단에 박힌 낡은 판독 장치가 녹슨 쇳소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책임 표식 전사 절차를 개시합니다.”

빈 칸에서 뻗어 나온 하얀 선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을 유영했다. 그것은 서류 밖으로 흘러나와 기류를 가르더니 곧장 로웬의 손등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로웬의 손등에는 그동안 수많은 사건과 계약을 거치며 남은 희미한 흔적들이 얽혀 있었다. 공백의 선은 마치 그곳이 원래 자신의 자리였다는 듯, 망설임 없이 파고들려 했다.

“안 됩니다!”

베라가 로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은 채 검집째로 하얀 선의 궤적을 쳐냈다. 선이 검집에 부딪히는 순간, 금속음이 아니라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충격의 여파로 베라의 팔이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지면을 지탱했다. 검집 위로 하얀 문양이 스치며 낙인을 새기려 시도했으나, 베라가 갈무리한 기운에 막혀 연기처럼 흩어졌다.

“물러나십시오, 로웬 님. 저건 단순한 기록의 파편이 아닙니다. 강제로 소유권을 전이시키려는 일종의 저주에 가깝습니다.”

로웬은 베라의 등 뒤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공백은 그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었다. 이름도, 정체도, 선택의 근거도 없는 빈자리. 누군가 고의로 빠져나간 흔적을 대신 떠안으라고 강요하는 허무의 구멍이었다.

그러나 로웬은 손등을 감추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창구 너머에서 공포에 질려 있는 관리인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선택권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실내 전체를 울릴 만큼 단단했다.

“요구하는 것은 사실뿐이다. 도장이 회수된 시각, 회수자, 그리고 회수 사유. 그 세 가지를 지금 즉시 기록에서 확인해라.”

관리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건 보안 등급이 너무 높아서…… 접근 자체가…….”

“보안 등급으로 덮어두기엔 이미 기록이 물리력을 행사했다. 이것은 더 이상 행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의 문제다.”

로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 선이 다시 요동치며 움직이려 했지만, 베라의 검집이 그 앞을 철벽처럼 막아섰다.

“서류 미비라고 주장했지. 그렇다면 미비가 발생한 경위를 규명하는 것 또한 관리인의 의무다. 공란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삭제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경위를 확인하지 않고 무효만을 선언하는 행위야말로 명백한 절차 위반이다.”

이네스가 로웬의 말에 힘을 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날인 대장 원본을 제시하십시오. 사본이나 요약본이 아닌, 회수 이력이 상세히 남는 원천 기록이어야 합니다.”

관리인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책상 아래에 숨겨진 은밀한 레버를 당겼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창구 뒤쪽의 벽면이 갈라졌고, 오래된 철제 서랍 하나가 미끄러지듯 밀려 나왔다. 서랍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검은 가죽 표지의 대장이 놓여 있었다.

이네스가 대장을 펼치자, 페이지들이 외부의 바람도 없이 스스로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는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들렸고, 피핀은 귀를 강하게 틀어막은 채 신음했다.

“소리가 멈췄어요…… 아니,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한 줄만 남았어요.”

대장의 마지막 페이지, 가장 아래쪽의 여백에 먹물 같은 글자들이 천천히 부상했다. 종이 위로 글자가 스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이 자체가 글자의 형태로 변해가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 회수 시각: 기록 봉인 ]

그 아래에 또 한 줄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 회수 사유: 선택권자 보호 절차 ]

그리고 마지막 줄이 나타나는 순간, 빈 도장 칸에서 뻗어 나오던 하얀 선들이 일제히 생명력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들은 공기에 닿자마자 미세한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 회수자: 제1수취 보관인 ]

실내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관리인은 그 문구를 확인하자마자 입술을 파르르 떨며 주저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책의 명칭이 아니라, 이 체계 안에서 금기시되는 성역을 건드린 것과 다름없었다.

로웬은 대장에 새겨진 글자들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선택권자의 이름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대신 그 이름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회수한 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류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제1수취 보관인.

그 직책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 로웬의 손등을 노리던 하얀 선보다 더 선명하고 압도적인 무게로 일행의 눈앞에 실체화되었다.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인과를 비틀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의 흔적이었다.

[ 회수자: 제1수취 보관인 ]

308화. 보관인이 잠근 첫 수취함

‘제1수취 보관인.’

그 다섯 글자가 원천 대장의 누런 종이 위로 떠오르는 순간,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단순히 기온이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간 전체를 지탱하던 인과율의 무게가 한순간에 뒤바뀐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대장 그 자체였다. 잉크가 번지듯 나타났던 글자들이 별안간 날카로운 금속성 광택을 띠기 시작했다. 촤르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멋대로 넘어가더니 양 끝에서 솟아오른 투명한 쇠사슬이 책등을 가로질러 단단히 옭아맸다.

“이게 무슨…….”

관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마치 보지 말아야 할 재앙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허겁지겁 책상 뒤로 물러났다. 로웬이 손을 뻗으려 했으나, 관리인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가로막았다.

“접근 금지입니다! 원천 대장이 봉인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건 시스템상의 강제 조치입니다. 제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봉인이라니요? 방금 뜬 이름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입니다.”

이네스가 서늘한 눈매를 가늘게 뜨며 관리인을 압박했다. 하지만 관리인은 떨리는 손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이 아닙니다! 보관인은…… 그래요, 그건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관리 권한의 등급을 의미하는 겁니다. 최고 순위의 열람 제한 구역에 접근할 수 있는 직책일 뿐이라고요.”

“직책이라고 하기엔 ‘회수자’ 항목에 적혀 있었지 않습니까. 수취함에 든 물건을 가져간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겁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관리인은 완강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거부라기보다 거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자의 발악에 가까웠다. 그는 더 이상의 열람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 뒤로 숨었다.

이네스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집무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관리인님,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저희는 지금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이 공간에서 물리적인 전사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기록 소실과 공간 왜곡으로 인한 피해가 명확한 상황이지요.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관련 기록을 열람하는 것은 피해 당사자로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사고라고 하셔도 법적 근거가 없으면…….”

“근거라면 충분합니다. 만약 여기서 협조를 거부하신다면, 이 사건을 상위 관리국에 ‘고의적인 기록 은닉 및 안전 관리 소홀’로 정식 회부하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보관인이니 뭐니 하는 직책 뒤로 숨는 게 가능할까요?”

이네스의 차분하면서도 서슬 퍼런 협박에 관리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찰나였다.

“……소리가 나.”

낮게 가라앉은 피핀의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관리인의 책상 뒤편, 두터운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벽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피핀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거리며 허공의 파동을 잡아내고 있었다.

“무슨 소리 말이냐?”

베라가 묻자 피핀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로웬 역시 숨을 죽이고 피핀이 가리킨 곳에 집중했다.

탁. 타악.

아주 미세하고 불규칙한 소리였다. 마치 단단한 상자 안쪽에서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벽면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혹은 목적지에 닿지 못한 신호가 갈 곳을 잃고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반송음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창구 바로 뒤, 보관소의 심장부라 불리는 ‘첫 수취함’의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히익!”

관리인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로웬의 왼쪽 손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해묵은 흉터, 혹은 낙인처럼 남아 있던 빈 도장 자국이 욱신거리며 붉은 빛을 내뿜으려 했다.

“로웬!”

베라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로웬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마력을 주입했다. 차갑고 단단한 마력의 막이 로웬의 피부를 감싸 안았다. 수취함의 봉인과 로웬의 손등에 남은 잔흔이 공명하려는 것을 억지로 차단한 것이다.

“……괜찮다. 고맙군.”

로웬이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관리인을 향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저 수취함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대한 감상적인 의문을 뒤로 밀어두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체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증거와 절차였다.

로웬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관리인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관리인. 보관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겠다. 그게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이라면 더더욱.”

“아, 아…….”

“대신 다른 걸 요구하지. 첫 수취함을 마지막으로 연 주체가 누구인지, 그 시각이 언제인지, 그리고 어떤 사유로 다시 봉인되었는지만 밝혀라. 이건 관리 일지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는 항목이지 않나?”

관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로웬의 요구는 정당했다. 관리자가 숨길 수 없는, 아니 숨겨서는 안 되는 공적인 기록이었다. 로웬의 서늘한 압박과 이네스의 날카로운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던 관리인이 결국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건, 그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셔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관리인이 기어가듯 벽면의 장식물을 조작했다. 육중한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첫 수취함의 외벽을 감싸고 있던 금속판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양식만이 떠 있었다. 종이가 아닌, 투명한 마력의 판 위에 새겨진 글자들. 그것은 수취함의 내용물이 배달되지 못하고 되돌아왔음을 알리는 최후의 통보였다.

로웬의 눈동자에 그 문구들이 하나씩 박히기 시작했다.

[ 수신인: 부재 ]

[ 발신인: 기록 말소 ]

그리고 가장 아래쪽,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떠오른 마지막 문구가 집무실 안의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 반송 대상: 첫 배달자의 미수령 축복 ]

그 문장이 공중에 완전히 고정되는 순간, 피핀이 듣고 있던 두드림 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그 글자가 읽히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로웬은 자신의 손등을 덮은 베라의 손 위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을 느끼며, 굳게 닫힌 수취함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309화. 미수령 축복의 반송장

붉은 낙인이 찍힌 것처럼 선명한 글자가 수취함의 반투명한 덮개 위로 떠올랐다. [반송 대상: 첫 배달자의 미수령 축복]. 그 문구는 단순한 안내라기보다 서늘한 선고에 가까웠다. 수취함 내부에서 새어 나오던 은은한 빛은 순식간에 탁하게 변질되었고, 함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낡은 쇠테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검붉은 색으로 달아올랐다. 기묘한 열기가 지하 저장고의 서늘한 공기를 밀어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미수령 축복……?”

피핀이 작게 중얼거렸다. 보드라운 귀가 미세하게 떨리며 불안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눈동자가 수취함의 변화를 쫓았다.

그 순간, 관리인이 기다렸다는 듯 창구 옆에 설치된 투박한 무쇠 레버를 힘껏 잡아당겼다.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바닥 아래에서 검은 철제 레일이 솟아올랐다. 레일은 거미의 다리처럼 수취함 밑바닥을 파고들더니, 그것을 천천히 창구 안쪽의 어둡게 입을 벌린 통로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비명처럼 고요한 공간을 찢었다.

“미수령 축복은 규정에 따른 폐기 대상입니다. 반송 처리 기한이 이미 한참 지났으니 소각 라인으로 이동합니다.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물러나십시오.”

관리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마치 기계적인 암송과도 같은 말투였다.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까?”

이네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나아가 레일 앞을 막아서며 관리인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폐기 전 고지 의무는 어디로 갔습니까? 수령자 확인 기록은요? 반송 대상이라 명시되었다면 최소한 최초 수취 예정자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수령을 거부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일련의 확인 과정도 없이 소각을 서두르는 건 명백한 증거 인멸입니다.”

관리인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네스의 논리 정연한 압박에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워낙 오래된 축복이라 기록이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보관소의 지침을 따를 뿐입니다.”

“기록이 불완전한 물건을 확인도 없이 태워 버리는 게 더 큰 결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보관소의 지침이 언제부터 무단 소각을 정당화했는지 묻고 싶군요.”

이네스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관리인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무정한 레일은 멈추지 않았다. 수취함은 검은 통로를 향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각로의 불꽃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피핀이 두 손으로 귀를 꽉 감싸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채로 신음하듯 내뱉었다.

“잠깐만요. 안에서 우는 소리가 아니에요. 이건…….”

“뭐가 들리는 거지?”

로웬의 물음에 피핀이 파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수취함을 가리켰다.

“빈 봉투가 접히는 소리예요. 누군가 편지를 써서 넣기도 전에, 봉투부터 미리 접어서 단단히 봉해 버리는 소리……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로 끝나는 소리가 들려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취함의 덮개 안쪽에서 희미한 종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사각, 사각. 형체 없는 보이지 않는 손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접고 구기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동시에 로웬의 손등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빈 도장의 잔흔이 화상을 입은 듯 따끔거리며 기괴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반송장 하단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번호들이 허공으로 피어오르더니, 로웬의 손등 위로 자리를 잡으려는 듯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것은 일종의 구속구이자 낙인이었다.

“로웬 님!”

베라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뽑아 레일의 틈새에 거칠게 내리꽂았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며 격렬한 비명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레일의 구동축이 일그러지며 수취함의 이동이 멈췄지만, 기계는 여전히 굉음을 내며 저항했다. 베라는 악물린 턱 끝에 힘을 주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로웬의 손등을 덮어, 반송장의 번호가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이건 단순한 관리 번호가 아닙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분류하고 처리하려는 낙인 섞인 꼬리표입니다.”

베라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녀의 눈에는 주군을 지키겠다는 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로웬은 자신의 손등을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빈 도장의 잔흔 위로 반송장 번호가 톱니바퀴처럼 억지로 맞물리려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이 정체 모를 미수령 축복의 ‘수령 거부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만 한다는 듯이, 세계의 의지가 강요하는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로웬은 손을 빼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서 요동치는 반송장의 기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며, 수취함을 집어삼키려던 레일의 움직임을 향해 서늘한 안광을 쏘아보냈다.

“이 안에 담긴 축복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어떠한 영광이든, 혹은 저주든 수령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겠다.”

로웬의 목소리는 지하 저장고 전체를 울릴 만큼 무게감이 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그는 통증이 가시지 않은 손끝으로 반송장의 빈 여백을 단호하게 가리켰다.

“요구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 이 반송장을 처음 발행한 존재가 누구인지 밝힐 것. 둘째, 이 축복을 최종적으로 수령 거부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공개할 것. 만약 정당한 절차를 생략하고 서둘러 소각하려 했다면, 그 행정적 실책과 책임 소재 또한 문서에 반드시 명시해야 할 것이다.”

관리인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로웬이 뿜어내는 기세에 압도당해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듯 보였다. 대신 수취함의 덮개 안쪽에서 들려오던 보이지 않는 봉투의 마찰음이 마지막으로 크게 사각거렸다.

그 소리와 함께 반송장 하단, 검게 번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던 마지막 항목이 서서히 일그러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잉크가 번진 듯 희미했던 글자들이 로웬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선명한 검은색으로 고착되었다. 마치 숨겨져 있던 진실이 억지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것과 같았다.

[ 발행자: 첫 이름 보관소 ]

그 명칭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소음이 일시정지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것은 성역의 그 어떤 지도에도, 그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금기된 장소의 이름이었다. 허공을 감돌던 반송장의 기운이 일순간에 얼어붙으며, 차가운 공포만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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