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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4화 합본. 로웬의 손에서 베라 표식의 빈 배달함까지 일러스트

112-114화 합본. 로웬의 손에서 베라 표식의 빈 배달함까지

112화. 로웬의 손을 반납하라는 통지

장갑이 찢겨 나간 자리에는 정적이 감돌아야 했다. 위조된 필체, 가짜 손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세관 제4구역의 공기는 여전히 날카로운 종이 날에 베인 것처럼 서늘했다.

지익,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복도 끝 공압 전송관에서 붉은 원통이 떨어졌다.

모르그가 조심스럽게 원통을 열어 종이를 꺼냈다. 내용을 훑던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평소 평정심을 유지하던 기록관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로웬 씨. 이건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모르그가 내민 종이 상단에는 세관 시스템의 검인과 함께 ‘회수 통지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분류: 대체 가능 업무 도구]

[대상: 서명자 로웬의 오른손]

[사유: 장기적 반복 업무에 의한 기능의 시스템 귀속화. 해당 신체 기관은 개인의 소유물보다 관세 행정 시스템의 부속물로서의 가치가 높음으로 판단됨. 즉시 반납 절차를 밟을 것.]

로웬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손을 반납하라고? 이건 뭐, 쓰다 남은 볼펜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농담조로 내뱉었지만, 로웬의 뒷덜미에는 소름이 돋았다. 평소 자신을 ‘굴러가는 부속품’이나 ‘심부름꾼’이라 자조하며 낮춰 부르던 말이, 적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논리적 근거가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이네스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통지서를 향해 검기를 날리려던 찰나였다.

“안 돼, 이네스!”

로웬이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검 끝이 종이의 모서리를 살짝 스친 뒤였다. 그 순간, 로웬이 비명을 참으며 자신의 오른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네스가 베어낸 종이 조각의 수만큼, 로웬의 손목 주위에 시뻘건 ‘회수 도장’이 낙인처럼 찍혀 올라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손목을 파고드는 듯한 선명한 통증이었다.

“물리적인 파괴는 곧 강제 회수 절차로 이어집니다.”

모르그가 다급히 기록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펜촉이 멈췄다. 기록관으로서 이 부조리한 상황을 적어 내려가야 했지만, 그의 기록은 곧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지금 이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는 순간, 로웬의 손이 ‘업무 도구’라는 사실을 공인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개인 소유라는 증거가 부족하고, 기록하면 시스템의 부속물이라는 증거가 견고해진다. 지독한 모순이었다.

그때,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피핀이 앞으로 나섰다.

“그, 그건 도구가 아니에요!”

피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이 손은……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단단하게 잡아줬던 손이란 말이에요. 내가 무서워서 울 때마다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딱딱해서 잘 안 뜯어지는 사탕 봉지도 매번 투덜거리면서 뜯어주던 손인데!”

피핀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도, 행정적인 무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떨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의 살벌한 행정 마력을 아주 미세하게 흔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나흐라가 팔짱을 낀 채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감정적인 호소는 관세 행정에서 쓰레기통에나 던져질 논리지. 하지만 실무적으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달라져.”

나흐라는 로웬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냉정한 시선으로 통지서를 훑었다.

“업무 도구라면 마땅히 ‘표준화’되어 있어야 하고, 감가상각표에 따라 관리되어야 하지. 시스템이 탐내는 건 너의 ‘완벽한 필체’와 ‘서명 능력’이라는 기능이다, 로웬.”

“그래서?”

“역설적으로 증명해. 그 손이 시스템에 편입되기엔 너무나 오염되고, 불량하며, 사적인 흔적이 가득해서 도저히 ‘공적 도구’로 쓸 수 없다는 걸.”

로웬은 나흐라의 조언 속에 담긴 빈틈을 포착했다. 시스템은 효율을 숭상한다. 그렇다면 효율성을 해치는 ‘불량품’이 되면 그만이다.

로웬은 즉시 움직였다.

먼저 모르그의 기록판 옆에 놓인 잉크병을 손바닥 전체에 들이부었다. 검은 액체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서명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지저분하고 성의 없는 오염이었다.

다음은 피핀이었다.

“피핀, 아까 먹다 남은 사탕 가루 있어?”

“네? 아, 여기요.”

로웬은 끈적한 사탕 가루를 잉크가 묻은 손에 사정없이 문질렀다. 달큼한 냄새와 잉크의 비릿한 냄새가 뒤섞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웬은 이네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검집 끝에 묻은 잿가루를 긁어내 손등에 발랐다. 마지막으로 모르그의 기록판 가장자리에 묻은 낡은 종이 먼지까지 손톱 밑에 채워 넣었다.

“자, 봐라.”

로웬이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이게 어디가 업무 도구지? 잉크 얼룩에, 사탕 가루에, 동료 검집에서 묻은 재까지. 이건 시스템이 관리하는 깨끗한 부속품이 아니라, 그냥 내 지저분한 삶이 묻어있는 신체 일부일 뿐이야.”

그 순간, 로웬의 손목을 조여오던 붉은 낙인들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오류: 대상 기관의 오염도 심화.]

[가치 하락 판단. 표준 업무 도구로서의 적합성 상실.]

[회수 명령을 보류하고 반품 처리함.]

손목을 파고들던 통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통지서가 검게 타들어 가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로웬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손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비로소 제 것이라는 감각이 돌아왔다.

“……살았네.”

“지저분하긴 하군.”

이네스가 짧게 평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로웬은 낄낄거리며 그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려다, 문득 발치에 떨어진 장갑의 잔해를 발견했다.

필체를 훔치려 했던 장갑은 이제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찢어진 가죽 사이로 낯익은 종이 쪼각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로웬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지도였다.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로웬이 지난 수년간 심부름꾼으로서, 운송자로서 지나갔던 골목과 지름길, 숨겨진 통로들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문제는 그 경로들 위에 그려진 붉은 선들이었다.

마치 누군가 로웬의 발걸음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것처럼, 붉은 선들은 로웬이 경험한 모든 동선을 완벽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손 다음에는…… 내 길인가.”

로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세라프 벨은 포기하지 않았다. 손을 통한 서명권을 훔치는 데 실패하자, 이제는 로웬이 다져온 ‘길’ 그 자체를 통째로 복제하려 하고 있었다.

장갑 안에서 발견된 지도 조각 위로, 새로운 붉은 선 하나가 실시간으로 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로웬의 다음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113화. 복제된 심부름길의 첫 배달

손을 지켜낸 것이 어제의 일인데, 이번에는 발밑이 문제였다.

세관 제4구역 뒤쪽, 낡은 건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심부름 골목. 로웬의 품 안에서 꿈틀대던 지도 조각이 기어코 붉은 선을 길게 뽑아냈다. 생명체처럼 맥동하는 그 선은 로웬의 구두 끝을 앞질러 골목 안쪽으로 매끄럽게 휘어져 들어갔다.

“꼭 제집처럼 앞서가는군.”

로웬이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을 잃을 뻔한 감각이 아직 생생했다. 이제는 그가 평생을 걸어온 길이 통째로 도난당할 판이었다.

“로웬? 방금 지나가지 않았나?”

골목 입구, 짐 수레를 정리하던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로웬의 걸음이 멈췄다.

“방금이라니요. 저는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그럴 리가. 5분 전에도 내 앞을 지나가면서 이 봉투를 전해주지 않았나. 자네 특유의 그… 딱딱한 걸음걸이로 말이야.”

노파가 내민 것은 익숙한 심부름 영수증이었다. 로웬의 필체가 분명했고, 배달 완료 도장까지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 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귀신 곡할 노릇이군. 로웬은 우리와 계속 같이 있었다.”

“복제된 경로군요.”

모르그가 기록판을 띄우며 분석에 들어갔다.

“장갑이 로웬 씨의 필체를 훔치려 했다면, 이 지도는 로웬 씨의 ‘동선’을 복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느 모퉁이에서 속도를 줄이고 어디서 가속하는지까지요. 저기 찍힌 서명을 보십시오. 너무 정교해서 오히려 소름 돋을 정도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영수증은 결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로웬은 단번에 위화감을 찾아냈다. 그는 노파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켰다.

“빵 기름 얼룩이 없군요.”

“응?”

“전 늘 이 골목을 지나기 전에 갓 구운 빵을 한 봉지 삽니다. 배달을 마칠 때쯤이면 손가락 끝에 묻은 기름기가 영수증 구석에 묻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건 지나치게… 청결하네요.”

복제된 로웬은 효율적이었다. 오탈자도 없고, 불필요한 군식구도 없으며, 간식을 사 먹느라 동선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오직 배달이라는 목적만을 수행하는 완벽한 기계의 경로였다.

이네스가 참지 못하고 불꽃을 일으켰다.

“이까짓 지도, 태워버리면 그만 아닌가? 길이 사라지면 복제고 뭐고 끝날 테지.”

“안 됩니다, 이네스 님.”

모르그가 급히 가로막았다.

“이 지도는 이제 로웬 씨의 과거 기록과 동기화되어 있습니다. 이걸 태우면 로웬 씨가 그동안 이 구역에서 쌓아온 ‘배달 신용’ 자체가 소멸할 가능성이 커요. 증거를 없애려다 경력까지 지워버리는 꼴이 됩니다.”

일행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로웬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피핀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가짜 길은… 냄새가 안 나요.”

로웬이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를 맞췄다. 피핀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로웬이 사준 사탕 봉지를 꼭 쥔 채 말을 이어갔다.

“진짜 아저씨랑 다닐 때는요. 저기 벽 모서리에서 사탕 봉지 뜯어줄 때 종이 냄새가 났고, 저기 뒷문에서는 탄 빵 냄새가 났어요. 가끔 길 잃은 애기들 있으면 같이 기다려주느라 다리도 아팠는데…. 저 붉은 선은 그냥… 그냥 쌩하고 지나가 버려요.”

로웬은 잠시 침묵하다가 피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피핀, 무리해서 기억해내지 않아도 된다. 네가 무서워하면서까지 나를 도울 필요는 없어.”

“아니에요! 저도 도울래요. 가짜 아저씨는 싫어요.”

피핀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로웬은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나흐라를 보았다. 그녀는 해결사다운 친절함 따위는 생략한 채, 벽에 기댄 채 툭 던지듯 말했다.

“길을 훔치는 건 쉬워 보여도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남의 영업 경로를 통째로 가져가려면, 그 길 위에 얽힌 통행료 장부랑 외상값도 같이 떠안아야 하거든. 저 복제된 놈은 ‘효율’만 챙기느라 ‘부채’는 계산에 안 넣었을 거야.”

로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건조하지만 날카로운, 실무자의 미소였다.

“그렇군요. 정답을 알 것 같습니다.”

로웬은 붉은 선이 안내하는 정방향 경로를 이탈했다. 그는 목적지로 향하는 대신, 일부러 길 건너편의 구멍가게로 향했다.

“아저씨? 거긴 배달지랑 반대 방향인데….”

“압니다. 하지만 어제 저기서 잔돈 500원을 덜 받았거든요. 그리고 저 앞 골목의 화분 주인에게는 내일 비가 올 테니 미리 들여놓으라고 말해두기로 약속했었죠.”

로웬은 완벽한 배송 루트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부러 발을 헛디뎌 구두에 흙탕물을 묻혔고, 아는 척을 하는 상인들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지체했다. 복제된 경로가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불량한 개인의 변수’를 덧칠해 나갔다.

심지어 그는 길가에 주저앉아 피핀과 함께 사탕을 까먹으며 10분을 보냈다. 효율성 제로, 오차 범위 극대화.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로웬의 발치에서 빳빳하게 뻗어 나가던 붉은 선이 갈지자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로웬이 사적이고 창피한 실수들을 경로에 추가할수록, 복제된 지도는 정보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흐릿하게 점멸했다.

“지금입니다, 모르그.”

로웬의 신호에 모르그가 기록판을 지도 위에 덮었다.

“확인했습니다! 시스템이 ‘원본’의 불규칙한 오염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로 소유권을 포기하고 있어요. 이제 이 길은 다시 로웬 씨의 것입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선이 힘없이 풀어졌다. 지도는 다시 평범한 종이 조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려는 찰나, 이네스가 지도의 끝부분을 가리켰다.

“잠깐, 저건 뭐지?”

붉은 선이 사라진 자리,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낡은 문구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복제된 장갑의 흔적도, 세관의 낙인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 손으로 정성스럽게 적어 넣은 듯한 필체였다.

[원본 길 안내인: 베라]

로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베라’라는 이름이 드러나자마자, 지도는 마치 소명을 다했다는 듯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베라…?”

이네스가 그 이름을 읊조렸지만, 로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종이 가루를 응시하며, 제 손바닥에 남은 끈적한 사탕 가루와 빵 기름의 감각을 되새길 뿐이었다.

길은 되찾았으나, 그 길의 시작점에 서 있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발끝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114화. 베라 표식이 가리킨 빈 배달함

손바닥에 눌어붙은 지도 가루가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세라프 벨의 복제 지도를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얻어낸 전리품치고는 감촉이 조악했다. 로웬이 손을 가볍게 털자, 흩어지던 회색 가루가 공중에서 자성을 띤 것처럼 한데 뭉쳤다. 가루는 이내 투명한 흐름을 만들더니 로웬의 손등 위에서 날카로운 화살표 모양으로 굳어졌다.

그 끝이 가리키는 곳은 세관 제4구역의 가장 깊숙한 뒤편, 이미 수십 년 전 폐쇄된 배달함 보관소였다.

“저쪽이군요.”

이네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앞장섰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한때는 수만 개의 사연이 오갔을 장소였으나, 지금은 녹슨 철문과 썩어가는 나무함들이 묘비처럼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던 로웬이 낡은 나무 배달함 하나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함들처럼 번호가 매겨져 있지도, 수취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도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빛바랜 필체로 생소한 호칭이 새겨져 있었다.

[첫 심부름꾼]

로웬이 그 글자에 손을 가까이 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맥없이 풀렸다. 로웬의 이름이 아닌데도 함은 마치 주인을 알아본 것처럼 반응했다.

“조심하게. 기록상으로는 이미 폐기된 구역이야. 존재하지 않는 함이 열렸다는 건, 누군가 장부를 조작해 숨겨두었다는 뜻이지.”

모르그의 경고에 로웬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바닥에 눌어붙은 종이 한 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첫 심부름 수령 확인서]

종이 위에는 날짜도, 보낸 이의 이름도 없었다. 오직 수령인의 서명란만이 공백으로 남아 로웬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아.”

로웬이 읊조렸다. ‘베라’라는 이름이 원본 길 안내인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면, 그녀와 함께했던 첫 심부름의 기억이 이 상자 안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지워진 장부처럼 하얗기만 했다.

모르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저 확인서에 서명하면 위험하네. 이곳의 법칙은 가혹하지. 서명하는 순간, 자네의 ‘시작’은 저 문서에 기록된 내용으로 확정되네. 세라프 벨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야. 자네의 출발점을 장부상으로 점유해서, 로웬이라는 존재의 소유권을 가져가려는 거지.”

이네스가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반쯤 뽑았다.

“서명할 필요 없다. 이 함을 통째로 부수면 그만이다. 네가 누군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지, 이런 낡은 종이 쪼가리가 정하는 게 아니야.”

“잠깐만요, 이네스 님.”

로웬은 이네스를 만류하며 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조용히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로웬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냄새나요. 아주 조금이지만.”

“무슨 냄새니?”

“아까 길에서 났던 냄새랑 비슷해요. 달콤한 빵 냄새랑, 따뜻한 장작이 다 타고 남은 잿불 냄새…….”

피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이는 무언가 더 알고 있는 듯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로웬의 눈치만 살폈다. 로웬은 피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피핀. 네가 느낀 게 정답일 필요도 없고.”

로웬은 다시 텅 빈 함을 응시했다. 서명을 하면 과거를 되찾을지 모르지만 세라프 벨에게 빌미를 준다. 서명을 하지 않으면 이 단서는 사라진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벽에 기대어 상황을 관망하던 나흐라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실무적으로 보자고, 실무적으로. 세관 규정 제8조 몰라? 빈 배달함이라도 반송표랑 보관 책임자가 없으면 수령 처리를 할 수 없잖아.”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나흐라였다. 친절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시스템의 틈새를 찌르는 조언이었다. 로웬은 펜을 꺼내 서명란이 아닌, 종이 하단의 여백에 날카로운 필체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수령 보류: 내용물 없음. 냄새 잔흔 존재하나 실체 확인 불가. 반송 책임자 불분명으로 인한 인수 거부.]

그것은 ‘심부름꾼’으로서의 서명이 아니라, ‘세관 직원’으로서의 행정 처리였다.

순간, 종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괴한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기록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절묘한 회피였다. 서명란은 여전히 공백이었지만, 로웬이 휘갈긴 문구 덕분에 이 배달함은 이제 ‘미결 상태’로 시스템에 묶이게 되었다. 세라프 벨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공무상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과연, 서류로 싸우는 법을 아는군.”

모르그가 안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로웬은 반송 처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종이가 붙어 있던 바닥 안쪽에서,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오래된 기름종이 위에 휘갈겨진 문구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베라에게 돌려주지 말 것.]

누군가 베라의 눈을 피해 몰래 남겨둔, 아주 오래된 반송표였다.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화살표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무엇을 돌려주지 말라는 것인지, 그리고 베라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빈 상자는 무언가 보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웬은 쪽지를 주머니에 갈무리하며 어두운 폐쇄 구역을 돌아보았다.

“돌아가죠. 여긴 이제 빈 방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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