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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17화 합본. 이름표에서 베라가 아니었던 세 번째 목소리까지 일러스트

115-117화 합본. 이름표에서 베라가 아니었던 세 번째 목소리까지

115화. 베라에게 돌려주지 말라는 이름표

손끝에 닿은 종이의 질감이 기묘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빳빳하고 거친 반송표였는데, 임시 보관 봉투에 넣으려는 순간 흐물거리며 형태를 바꿨다. 기름종이처럼 얇아진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살갗을 얇게 저며낸 것처럼 창백하게 펴졌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메모지가 아니었다. 가늘고 긴, 이름을 적어 고정하는 ‘이름표’의 형상이었다.

표면 위로 희미한 글자가 배어 나왔다. 마치 먹물이 종이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반송 대상: 이름 조각]

글자를 읽는 것과 동시에 발밑의 공기가 뒤틀렸다. 폐쇄된 배달함 구역, 켜켜이 쌓인 먼지 사이로 검은 구멍이 입을 벌렸다. 자동 반송 투입구였다.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을 강제로 수거해 발송지나 폐기처로 보내는 그 차가운 기계 장치가 로웬의 발치에서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그 구멍은 탐욕스러웠다. 그것은 로웬의 손에 들린 이름표만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윽.”

로웬은 미간을 찌푸렸다. 투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력이 이름표를 넘어 로웬의 전신을 훑었다. 단순히 몸을 끌어당기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방금 내뱉은 목소리의 잔향, 서류에 서명할 때 손목을 까닥이는 버릇, 오늘 아침 작업실에서 배어든 고소한 빵 냄새. 심지어 손등에 남은 낡은 잿불의 흔적까지. 로웬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사소한 파편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구멍을 향해 쏟아지려 했다.

이름표가 베라에게 돌아가는 순간, 그 이름에 엉겨 붙은 로웬의 ‘현재’까지 함께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로웬!”

이네스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푸른 검기가 일렁이며 당장이라도 저 기괴한 투입구를 베어 넘길 기세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모르그가 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 멈춰요! 저건 단순한 장치가 아니야. 지금 저걸 훼손하면 안에 든 이름표가 파손돼요. 기록의 주소지가 영원히 소실될 수 있다고!”

모르그의 눈동자가 갈증 어린 지식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이름표에 적힌 내용을 미칠 듯이 읽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을 떼지 못했다.

“내가…… 내가 읽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읽고 인식하는 순간, 이건 공적인 장부에 기록으로 고정돼 버려요. 그러면 수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고. 로웬, 당신이 직접 결정해야 해.”

기록의 권력을 쥔 자가 느끼는 공포였다. 확정되지 않은 과거를 함부로 활자화했다가,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모르그를 멈춰 세웠다.

그때, 로웬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피핀이 작게 몸을 떨었다. 아이는 이름표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피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들려요……. 누가, 자꾸 불러요.”

로웬은 투입구의 인력을 견디며 몸을 낮췄다. 떨고 있는 피핀과 눈을 맞췄다. 아이에게 공포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피핀,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들은 게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것 같으면 그냥 잊어버려.”

로웬의 건조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피핀이 심호흡을 했다. 아이는 로웬의 손등 위에 남은 잿불 흔적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아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세 번…… 세 번 불렀대요. 아주 뜨거울 때.”

그 말은 단서였다. 하지만 당장의 상황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검은 투입구는 점점 더 거세게 로웬의 ‘속성’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망하던 나흐라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평소처럼 친절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실무적인 어조였다.

“이름은 물품이 아니잖아.”

로웬이 고개를 돌려 나흐라를 보았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씹으며 덧붙였다.

“일반 반송 규정 제4조. 물성(物性)이 증명되지 않은 대상은 표준 화물 경로에 태울 수 없다. 저 투입구는 지금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거야. 이름표라는 ‘물건’과 이름이라는 ‘개념’을 구분 못 하고 통째로 삼키려 드는 거지.”

나흐라는 해결책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시스템의 빈틈을 가리킬 뿐이었다. 하지만 로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로웬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관리용 인장을 꺼냈다. 그리고 투입구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이름표 가장자리에 거칠게 인장을 찍어 눌렀다.

[주소 불충분]

[물품성 불인정]

[본인 대면 확인 필요]

세 가지 항목에 체크를 마친 로웬이 이름표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듯 눌러 고정했다.

“이건 화물이 아니다. 배달 사고로 인한 정체 불명의 잔류물이지. 따라서 자동 반송 절차를 거부하고 임시 보관 처리를 요청한다.”

그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미친 듯이 날뛰던 투입구의 진동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검은 구멍은 항의하듯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힘없이 닫히며 먼지 덮인 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로웬의 목소리도, 빵 냄새도, 손등의 열기도 더 이상 끌려가지 않았다.

로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이름표를 주워 들었다. 반송이 중단되자 이름표의 뒷면에 감춰져 있던 마지막 문구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첫 이름 1/7]

그리고 그 아래, 마치 누군가 절박하게 손톱으로 긁어 쓴 것 같은 문장이 이어져 있었다.

[재가 식기 전에 세 번 불렀다.]

로웬은 이름표를 꽉 쥐었다. 베라.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과 어떤 관계였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재 속에서 불러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돌려주어서는 안 될, 빼앗겨서도 안 될 로웬 자신의 조각이었다.

116화. 재가 식기 전 세 번 부른 이름

손끝에 닿은 이름표는 미적지근했다. 뜨겁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누군가의 체온이 남긴 온기보다는 길게 이어지는 열이었다. 마치 다 타버린 화로 구석에 남은, 아직 붉은빛을 완전히 잃지 않은 재처럼.

“무슨 냄새 안 나?”

로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피핀이었다. 피핀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 타는 냄새 같아요. 아니, 종이가 탄 건가? 아주 오래된 서류 뭉치를 태울 때 나는 그런 텁텁한 냄새요.”

“재 냄새군.”

모르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덧붙였다.

이름표 안쪽에 적힌 구절, ‘재가 식기 전에 세 번 불렀다’는 문장이 흐릿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그 문장에서 시작된 냄새는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연기가 되어 폐쇄 구역 뒤쪽으로 흘러갔다. 마치 길을 안내하는 유령의 손짓 같았다.

일행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폐쇄 구역에서도 가장 구석진, 납으로 봉인된 보관함 앞이었다. 관리 번호조차 매겨지지 않은 그 보관함은 외부의 간섭을 거부하듯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웬이 조심스럽게 보관함의 빗장을 풀었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자욱한 회색 재가 쏟아져 나왔다. 바닥으로 흩어진 재는 분명히 차가워야 할 시각적 질감임에도 불구하고, 공기를 후끈하게 달구고 있었다.

“이 안에 있군. 호출의 기록이.”

모르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재가 소용돌이치더니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 속에서 첫 번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엔.

어디선가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따스하고 포근하며, 아무런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던 시절의 환각. 아주 어린 시절의 로웬을 부르는 듯한 다정한 음성이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이름 부분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로웬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기억에 없는 다정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들어왔다.

두 번째 목소리는 곧이어 터져 나왔다.

— 로웬! 어디 있어, 대답해!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다급하고, 절박하며,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 베라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지만, 로웬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는 베라 특유의 냉소 대신 가공할 만한 공포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로웬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면, 대답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그를 지배하려 했다.

그때, 어깨 위로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이 전해졌다. 이네스의 손이었다.

“대답하지 마세요.”

이네스는 로웬을 대신해 대답해주지도, 그를 뒤로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스스로 멈춰 설 수 있도록 고정해주는 말뚝처럼 곁을 지킬 뿐이었다.

“로웬 씨, 주의하게. 여기서 응답하는 순간, 이 이름표는 ‘수령 확인’ 절차로 넘어가네. 자네의 신원이 이 기록과 완전히 동기화된다는 뜻이지.”

모르그의 경고는 차가운 이성으로 로웬의 정신을 깨웠다. 기록하는 자로서, 모르그는 이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이름이 확정되는 순간, 그 이름에 얽힌 모든 채무와 저주 역시 로웬의 것이 될 터였다.

세 번째 목소리가 흘러나오려 할 때, 피핀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어……? 이상해요. 방금 그 목소리들이랑 달라요.”

로웬은 피핀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호기심보다는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억지로 설명 안 해도 돼, 피핀. 들리는 대로만 둬.”

로웬은 피핀이 느꼈을 위질감을 차단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망하던 나흐라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실무적으로만 따져볼까요? 저 재는 열원(熱源)이죠. 그런데 이 열원을 누가 만들었는지, 보관 기한이 언제까지인지 적힌 서류가 없네요.”

로웬이 나흐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철저하게 규정의 빈틈을 훑고 있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열원은 관리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어요. 아니, 오히려 위험물로 분류해서 격리해야 하죠. 본인이 직접 대면해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정’ 지을 수 없는 미확인 증언으로 묶어버리면 그만 아닌가요?”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행정의 빈틈을 찾아내는 데에는 이만한 조력자가 없다.

로웬은 즉시 품 안에서 업무용 단말기를 꺼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새로운 기록을 생성했다.

[물품 분류: 미확정 음성 기록]

[상태: 수령 보류]

[사유: 무응답 청취 기록. 열원 책임자 불분명. 본인 대면 확인 전 확정 금지.]

“이건 수령 확인서가 아니야. 그냥 ‘이런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에 대한 미확정 기록일 뿐이지.”

로웬의 선언과 함께 보관함에서 뿜어져 나오던 재의 열기가 급격히 식어내렸다. 소용돌이치던 공기는 다시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고, 납 봉인함의 문이 무겁게 닫혔다.

이름표의 빛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 표면에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첫 이름 2/7>

로웬은 차갑게 식어가는 이름표를 갈무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는 기억나지 않는 다정함.

두 번째는 베라일지도 모르는 절박함.

그리고 피핀이 감지했던, 앞선 둘과는 완전히 이질적이었다는 세 번째 목소리.

그것은 확실했다.

세 번째 목소리는, 결코 베라가 아니었다.

117화. 베라가 아니었던 세 번째 목소리

식지 않는 재 보관함 바닥에서 검은 액체가 끓어올랐다. 그것은 끈적한 밀랍처럼 솟구치더니, 이내 단단하게 굳으며 기괴한 인장을 형성했다. 보관함 내부의 열기가 일순간 서늘하게 식었다. 아니, 열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기록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 번째 목소리였다.

앞선 두 번의 부름이 애절하거나 혹은 다급한 '호명'이었다면, 이번 것은 달랐다. 그것은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아니었다.

― ……그 이름을 밖에 두지 마.

서늘한 명령조였다. 로웬을 직접 부르는 소리도, 로웬의 존재를 긍정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마땅히 지켜져야 할 금기를 확인시키는 흔적에 가까웠다.

모르그의 깃펜이 멈칫했다. 평소라면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양식에 기입했을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모르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로웬과 기록지를 번갈아 보았다.

“기록하지 마십시오, 로웬 님.”

모르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특정하고 신원을 기록하는 순간, 이 익명의 목소리는 당신의 ‘첫 이름’에 대한 정당한 권리자로 등록될 위험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이 자가 누구인지,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 모릅니다.”

기록은 곧 확정이다.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로웬의 이름 조각에 간섭할 권한을 부여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이네스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서늘한 검기가 재 보관함 주위를 감싸 돌았다. 당장이라도 그 불길한 밀랍 인장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이네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뽑는 대신 로웬의 눈을 응시했다.

“단서를 훼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끊어내지.”

이네스는 선택권을 로웬에게 넘겼다. 보호하되 침범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네스가 로웬의 '이름'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로웬은 가만히 굳어버린 밀랍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언저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감정에 휘둘릴 단계는 아니었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평소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부르는 게 아니야. 로웬을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숨기라고 하고 있어. 꼭 묻어버리라는 것처럼.”

피핀의 감각은 정확했다. 세 번째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것은 보관이라기보다 유폐에 가까운 명령이었다. 로웬은 더 이상 피핀에게 자세한 것을 캐묻지 않았다. 아이에게 더 큰 짐을 지울 순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나흐라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혹은 지극히 업무적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실무적인 빈틈이 하나 있긴 하네요.”

나흐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익명 증언은 보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신원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에선 그 어떤 권리 주장 근거로도 쓸 수 없죠. 즉, 누군지 모르는 채로 기록만 해둔다면 저 목소리는 이름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소음'일 뿐이라는 소리예요.”

도움이 되는 건지, 방관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로웬에게는 그보다 더 명확한 해결책이 없었다. 로웬은 펜을 들어 서류의 여백을 채워 나갔다.

[처리 사항: 신원 미확인 익명 증언. 권리 주장 근거로 사용 불가. 본인 대면 확인 전까지 해당 이름 조각의 확정을 전면 금지함.]

로웬은 건조하게 덧붙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목소리에 내 이름을 내줄 순 없지. 공무 수행 중에 모르는 사람 말을 덥석 믿었다간 시말서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사무적인 농담이었다. 그 말에 이네스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모르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웬은 조심스럽게 이름표 안쪽을 살폈다. 검은 밀랍이 솟아오르며 밀려난 자리, 그곳에 새로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첫 이름 3/7

그리고 그 옆에, 세 번째 목소리의 잔향처럼 남겨진 문장이 로웬의 눈을 찔렀다.

그 아이를 성자라 부르지 말라.

로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자.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 단어가 부정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이름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 번째 목소리는 베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베라보다 더 깊은 곳에서 로웬의 근원을 옥죄고 있었다. 로웬은 이름표를 덮었다. 아직 찾아야 할 조각이 네 개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모두 모였을 때, 자신이 마주해야 할 진실이 단순한 '과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다음 조각으로 가죠.”

로웬이 먼저 발을 뗐다. 아직 식지 않은 재의 냄새가 복도 끝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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