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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499화 합본. 빈 이름 당사자성 예비 심문서에서 빈 봉투 발신 주체 대면 기록까지 일러스트

498-499화 합본. 빈 이름 당사자성 예비 심문서에서 빈 봉투 발신 주체 대면 기록까지

498화. 빈 이름 당사자성 예비 심문서

심문실의 공기는 눅눅한 젖은 재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천장의 높은 구석마다 걸린 등잔들은 불꽃을 제대로 틔우지 못한 채 휘발되는 기름의 비릿한 향만을 사방으로 흘렸다. 사방이 두꺼운 돌과 오래된 나무로 막힌 폐쇄적인 공간이었으나, 바닥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서는 끊임없이 서늘한 한기가 올라와 발목을 휘감았다. 긴 탁자 위에는 오직 한 장의 서류만이 놓여 있었다. 상단에 적힌 제목은 서늘할 정도로 명료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빈 이름 당사자성 예비 심문서’.

로웬은 그 제목을 세 번이나 입 안에서 곱씹어 읽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종이의 거친 섬유질이 미세하게 들뜨며 희미한 연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 서류 하단의 이름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칸은 마치 누군가의 지문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이 근처에만 가도 잉크 자국 같은 습기를 머금으며 검게 물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에 성명을 적으면 됩니다.”

맞은편에 앉은 회색 서기관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자체는 메말라 있었으나, 서류를 고정하고 있는 그의 손끝은 눈에 띄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서기관은 그 공포를 감추려는 듯, 깃펜 하나를 로웬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놓았다. 깃펜의 촉에는 검은 잉크 대신, 아주 곱게 갈린 잿가루가 눅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것은 글자를 쓰는 도구가 아니라, 죄인의 살에 낙인을 찍는 형구처럼 보였다.

로웬은 깃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만약 저 펜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이 모든 소동의 종착지가 자신으로 확정될 것임을 직감했다.

“성명만 적으면 끝나는 일입니까?”

“당사자 본인임을 증명한다면, 성명 하나로 모든 절차가 수렴됩니다.”

“본인이 아니라면요?”

서기관은 즉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마른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 서류의 두 번째 줄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글자를 스스로 수정했다. ‘수취 의사 확인란’. 그 아래로 개미 떼 같은 작은 글씨들이 돋아났다. 「본인이 수취를 거절할 경우, 대리 수취인은 즉시 성자 직무를 승계하며, 이에 따른 모든 소급 책임은 공동체 전체로 확산됨.」

그 문장을 읽은 베라가 낮게 혀를 찼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자 장갑의 단단한 질감이 나무를 짓눌렀고, 탁자 표면의 정교한 나무결 사이로 잉크 얼룩 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말이 길구나. 결국 네 이름을 쓰지 않으면 네 뒤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굴레에 엮어 넣겠다는 협박이잖나.”

이네스는 탁자 옆에 서서 서류의 행간을 조용히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종이의 젖은 기운이 조금씩 걷히는 듯했으나, 이름 칸의 공백만큼은 완강하게 검은 빛을 유지하며 버텼다.

“이것은 단순한 심문서가 아닙니다. 빈칸을 사람의 형상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산 자를 박제하려는 덫에 가깝군요.”

피핀은 로웬의 등 뒤에서 대기표 꾸러미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수많은 번호가 적힌 종이 뭉치들은 이제 낡고 해져서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했다. 피핀이 힘을 주어 쥘 때마다 종이끼리 부딪히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심문실의 무거운 적막을 깼다.

“형이 저기에 이름을 쓰면, 저 칸이 형을 먹어버리는 거야? 그동안 모은 이 표들도 다 형의 이름이 되는 거고?”

피핀의 물음과 동시에 심문실 안쪽의 등잔들이 일제히 크게 휘청였다. 불꽃도 없는 등잔 아래로 기묘하게 길쭉한 그림자들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모르그는 안경테를 고쳐 쓰며 서류의 왼쪽 여백에 점처럼 박힌 미세한 주석들을 읽어 내려갔다.

“전부는 아닐 겁니다. 상황은 더 조악하군요. 로웬이 모든 권한을 가져갔다고 기록에 남긴 직후, 실질적인 부채와 책임만 분리하여 남은 동료들에게 배분하는 구조입니다. 즉, 로웬은 이름뿐인 성자로 박제되고, 주변 사람들은 그 성자의 허물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이 되는 셈이죠.”

“그게 더 나쁜 거 맞지?”

로웬이 무심결에 중얼거리자, 엘드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로웬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엘드의 손등에는 수많은 훈련으로 다져진 굳은살과 미세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고, 그 투박하고 단단한 온기가 로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동료들 모두가 네 이름으로 거대한 빚을 지게 되는 구조다. 서명하는 순간, 너는 일행의 주인이 아니라 곁에 선 이들에게 빚진 채무자가 되는 거야.”

로웬은 깃펜으로 향하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서기관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성자께서… 거절하시는 겁니까? 이 자리를?”

“애초에 성자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요.”

대답은 나직했으나 파급력은 작지 않았다. 벽면에 꽂혀 있던 수천 장의 서류철들이 일제히 부스럭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마치 이 세계의 기록 체계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오답을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빈 이름 칸 가장자리에 묻어 있던 젖은 재는 더욱 짙고 축축하게 번져 나갔다.

서기관은 식은땀을 닦으며 서둘러 다음 항목을 펼쳤다. ‘당사자성 보충 질문’. 첫 번째 질문이 로웬의 눈앞에 붉은 잉크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신은 첫 배달의 수취인가.」

로웬이 입을 다물자, 기다렸다는 듯 심문실 문밖에서 일정한 박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누군가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으나, 문고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복도에 서 있는 누군가의 방문이 아니라, 이 공간의 인과율 자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베라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차갑게 일갈했다.

“대답하지 마라. 저 소리는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네 목소리의 파동을 저 이름 칸에 맞추려고 유도하는 중이니까.”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위의 글자들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첫 배달은 수취인을 남기지 않았어요. 오직 배달된 경로만을 남겼죠. 만약 수취인이 단 한 명으로 확정된다면, 지금까지 일행이 겪어온 그 모든 반송과 재배달의 기록이 전부 허위가 됩니다. 이 서류는 그 모순을 어떻게든 덮으려 하고 있어요.”

피핀이 품속에서 유독 심하게 구겨진 표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최종 선택 대기표였다. 번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번호 대신 누군가의 눈물인지, 혹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 자국만이 얼룩져 있었다.

“여기에도 이름은 없어요. 다른 사람 이름도 없고요. 그냥 이 종이도 젖어 있을 뿐이에요.”

모르그가 조심스럽게 그 대기표를 서류 옆에 바짝 붙여놓았다. 그러자 서류에서 번져 나오던 젖은 재가 대기표 쪽으로 침식해 들어가려다, 표의 가장자리에서 거부당한 듯 멈칫하며 검게 굳어버렸다. 엘드는 그 찰나의 멈춤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빈칸이 이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름으로 닫히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군. 저 칸 자체가 이미 ‘부재’라는 이름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인가.”

서기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는 책상 밑으로 손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 그런 자의적인 해석은 승인된 절차가 아닙니다. 기록은 오직 확정된 인격만을 수용합니다.”

“승인된 절차라는 명목하에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이 젖은 재 아래 깔려 죽었는지 잊었나 본데.”

베라의 서늘한 말에 심문실 천장에 매달린 마른 종이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종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 종소리가 오히려 고막을 압박하는 기묘한 중압감이 방 안의 숨통을 조였다.

서기관은 마지막 수단인 듯, 서류의 최하단 항목을 강제로 밀어 올렸다. ‘최종 선택 전 예비 확인’. 빈 이름 칸의 당사자는 아래의 세 범주 중 하나로 반드시 확정되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었다.

성자 본인.

성자 권한의 대리인.

성자 부재 시의 무한 책임자.

세 가지 선택지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로웬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종이 자체가 물리적으로 휘어지며 로웬의 손가락 끝을 향해 구걸하는 것 같았다. 셋 중 무엇을 골라도 결국 ‘성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외통수였다.

로웬은 한참 동안 그 기울어진 글자들을 응시했다. 그러다 탁자 구석, 아까 베라가 장갑을 벗으며 흘린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아주 작은 빵가루 하나를 발견했다. 로웬은 검지 끝으로 그 보잘것없는 빵가루를 천천히 밀어냈다.

빵가루는 세 가지 선택지 중 그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끄러지듯 이동하여, 검게 번진 젖은 재의 경계선이자 빈 이름 칸의 가장자리에서 딱 멈춰 섰다.

“없네요.”

로웬의 말에 서기관이 눈을 치켜떴다.

“무엇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선택지는 분명히 세 개가….”

“배달자요.”

로웬은 서두르지 않고, 마치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성자도 아니고, 그 권한을 대신 휘두를 대리인도 아니고, 남은 짐을 다 짊어질 책임자도 아니고. 애초에 이걸 가져온 사람 말입니다. 물건을 가져온 사람이 있는데, 왜 받는 사람한테만 이름을 쓰라고 독촉합니까? 가져온 사람한테 다시 돌려주거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닙니까.”

순간, 문밖의 박자가 한 템포 늦게 울렸다.

똑.

그 마지막 타격음과 동시에, 빈 이름 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젖은 재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접혔다. 이름을 강제로 받아 적으려던 종이의 결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접히더니, 그 자리에 아주 작은 여백을 남겼다. 그 여백에는 아무런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수취 확인란 가장 밑바닥에 오래된 비석에서나 볼 법한 마모된 문장이 서서히 떠올랐다.

「수취인은 반드시 단일한 인격체일 필요가 없으며, 배달의 경로 자체가 당사자성을 증명한다.」

이네스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베라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고, 피핀은 대기표 꾸러미를 품 안에서 조금 느슨하게 고쳐 잡았다. 모르그는 새로 나타난 문장을 머릿속에 각인하려는 듯 입술을 무성음으로 움직였으며, 엘드는 처음으로 서기관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로웬만을 바라보았다.

서기관은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잿가루 묻은 깃펜이 탁자 위에 떨어지며 검은 가루를 흩뿌리는 순간, 서류에 적혀 있던 세 가지 선택지가 비정상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성자 본인’, ‘대리인’, ‘책임자’라는 단어들이 차례로 젖은 재에 잠식되어 형체를 잃어갔다.

그러나 서류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빈 이름 칸 역시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전보다 더 또렷하고 투명하게 그 자리에 존재했다. 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어떤 이름으로도 ‘닫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확정판결처럼 심문실을 지배했다.

“예비 심문은… 보류되었습니다.”

서기관의 목소리는 이제 모기 소리만큼이나 작아져 있었다. 그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로웬은 그제야 뻣뻣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손끝의 떨림은 멈추었으나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서늘했다. 성자로 인정받아 추앙받는 길을 택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 지독한 운명에서 완전히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타의에 의해 억지로 끼워 넣으려던 이름이 아주 잠깐 동안 그 거대한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 사이에 걸려 멈춘 것뿐임을 알았다.

문밖의 박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굳게 닫힌 문틈 아래로, 그림자처럼 시커멓고 축축한 재 한 줄기가 가늘게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바닥을 가로질러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가, 심문서의 가장자리에 조용히 똬리를 틀었다.

예비 심문서는 빈 이름 칸을 아직 닫지 못한 채 젖은 재의 가장자리에서 멈췄지만, 그 칸은 로웬의 이름을 끝내 빈 당사자의 대답으로 읽지 못했다.

499화. 빈 봉투 발신 주체 대면 기록

두꺼운 양증지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문실 내부의 공기는 서늘했으나, 탁자 위에 놓인 예비 심문서 옆으로 새로운 서류 뭉치가 펼쳐지자 기묘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새로 열린 기록지의 제목은 ‘빈 봉투 발신 주체 대면 기록’이었다. 장부에 기록된 글자들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아 희미한 광택을 머금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칸들은 창백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발신 원장란은 가느다란 가로줄만이 그어져 있었고, 봉투 이동 기록란과 최초 접수 시각란 역시 어떠한 필적도 허락하지 않은 채 백색의 여백을 고수했다. 심지어 반송 도장 보관자란조차 기입된 이름이 없어, 마치 이 서류 자체가 갈 곳을 잃은 유령처럼 보였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지독하리만큼 건조한 종이 냄새였다. 오래된 기록 보관소에서나 날 법한 그 냄새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젖은 재의 매캐한 잔향이 가늘게 섞여 들었다. 누군가 화로에서 갓 꺼낸 잿더미를 물에 적셔 바닥에 뿌린 듯한 습한 탄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와 동시에 서기석 옆에 놓인 나무 상자 안에서 마른 도장함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목재와 금속이 부딪히는 그 건조한 파찰음은 심문실 내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기록의 공백이 주는 압박은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그곳에 모인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서기가 마른침을 삼키며 기록지 상단에 적힌 규정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낭독되는 문장들은 공허하게 실내를 맴돌았다. “발신 주체가 비어 있는 경우, 가장 오래 응답한 사람이 임시 발신 확인을 보조할 수 있습니다.” 서기의 목소리가 끝맺음을 맺자마자 실내의 공기가 급격히 일렁였다. 그 문장은 법적 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편리한 변명처럼 들렸다. ‘보조할 수 있다’는 모호한 표현은 해석의 여지에 따라 얼마든지 ‘확정해야 한다’는 강요로 뒤바뀔 수 있는 위험한 성질을 품고 있었다.

서기의 낭독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이 지루하고 기괴한 절차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낭독된 규정은 그들에게 가뭄 끝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규정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어떤 법적 오류가 발생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누군가에게 이 ‘빈 봉투’의 책임을 지우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인 듯 보였다. 서기의 오독을 유도하는 듯한 발언은 대기자들의 조바심에 불을 지폈고, 심문실은 순식간에 날 선 비난과 재촉의 장으로 변모했다.

대기자 중 한 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탁자를 내려쳤다. “받지도 않았으면 보낸 것으로라도 처리하란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 빈 종이 쪼가리를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셈입니까?” 그의 외침을 신호탄으로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습니다. 로웬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봉투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름을 발신란에 넣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닙니까!” 군중 심리는 순식간에 광기로 번졌다. 그들은 로웬이라는 존재가 봉투와 맺어온 기나긴 응답의 시간을 근거로, 로웬을 발신인으로 확정 짓고자 혈안이 되었다. 빠른 종결을 향한 욕망은 논리를 집어삼켰고, 그들은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집단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들의 눈에는 로웬이 발신인이 되든 수취인이 되든 상관없어 보였다. 오직 이 기분 나쁜 봉투의 행방이 결정되고, 자신들이 이 공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희생양으로 삼을 기세였다. 로웬을 향한 시선들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쏟아졌고, 기록지의 빈칸을 로웬의 이름으로 채우라는 요구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집단의 불안이 개인에게 투사되는 과정은 잔인할 정도로 신속했다. 그들은 로웬이 침묵을 지킬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며, 존재하지 않는 발신인의 자리에 로웬을 강제로 앉히려 들었다.

그 순간, 닫힌 문 너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지만 생경한, 문밖의 박자였다. 길게 한 번, 그리고 잠시의 간격을 둔 뒤 짧게 두 번. 마치 누군가 입구에서 입장을 허가받으려는 듯한, 혹은 안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자 탁자 위에 놓인 빈 봉투 안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봉투 틈새로 스며 나와 있던 젖은 재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더니, 서명란을 향해 가늘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흡사 누군가의 이름을 휘갈겨 쓴 필적처럼 보였고, 기괴한 형상을 그리며 종이의 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검게 젖은 흔적은 점점 더 뚜렷한 형태를 갖추어 갔으나, 그것이 결코 특정한 문자로 읽히지는 않았다. 보는 이에 따라 누군가의 이름처럼 보일 수도, 혹은 그저 우연히 발생한 얼룩처럼 보일 수도 있는 모호한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젖은 재의 번짐은 발신자의 서명이라는 물리적 형태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그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문밖의 박자가 잦아들 무렵, 봉투 안의 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확정되지 않은 존재의 흔적이었으며, 동시에 누구에게도 귀속될 수 없는 침묵의 서명이었다. 사람들은 그 기괴한 광경에 압도되어 잠시 숨을 죽였다.

이네스가 차갑게 식은 공기를 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은 흐트러짐 없이 서기 앞에 놓인 빈 기록지를 향했다. “질문하겠습니다. 발신 원장에 기입된 주체가 있습니까?” 서기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의 뜻을 밝히자, 이네스는 멈추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봉투의 이동 경로를 증명할 기록이 단 한 줄이라도 존재합니까? 최초 접수 시각은 확인되었습니까? 반송 도장을 관리하는 보관자의 인장이 이곳에 찍혀 있습니까?” 이네스의 물음이 이어질 때마다 서류의 빈칸들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질문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기록지의 허점을 파헤쳤고, 그곳에 모인 이들이 외면하려 했던 행정적 공백을 강제로 직시하게 만들었다.

이네스는 마지막으로 문밖에서 들려온 박자 소리를 가리켰다. “방금 들린 문밖의 박자가 발신 주체의 호출이라는 근거가 법전 어디에 명시되어 있습니까?” 그녀의 반문에 심문실 안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 이네스는 매 질문 끝에 서류의 칸들이 비어 있음을 재차 확인시켰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추측만으로는 서류의 빈칸을 채울 수 없음을 그녀는 명확히 하고 있었다. 대기자들의 소란은 이네스의 냉정한 논리 앞에 힘을 잃고 흩어졌다. 그녀의 질문은 감정에 호소하는 군중의 요구를 차단하고, 오직 기록된 진실만을 남기기 위한 엄격한 장치였다.

베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갔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소독된 천을 꺼내 봉투 주변에 번진 젖은 재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종이의 표면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불순물만을 걷어내는 그녀의 동작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어 그녀는 발신 인장란 부근에 붙어 있던 미세한 마른 종이 흔적을 핀셋으로 떼어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조각이었으나, 이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다. 베라는 젖은 재가 묻은 천을 작은 유리병에 담고, 마른 종이 흔적은 별도의 봉인 봉투에 넣었다.

두 개의 증거물이 각각 다른 용기에 담기자, 베라는 그것들을 탁자 위에 나란히 놓아 보였다. “이것은 젖은 재이고, 이것은 마른 종의 흔적입니다. 발생하는 위치도, 성질도, 물리적 상태도 전혀 다릅니다.” 그녀의 행동은 두 증거가 결코 동일한 출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젖은 재를 닦아낸 자리는 여전히 축축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으나, 마른 종의 흔적이 있던 자리는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버석거렸다. 베라는 두 증거를 결코 섞지 않은 채 각각 다른 봉인 인장을 찍음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다른 주체 혹은 사건의 파편일 가능성을 엄격히 분리해 냈다.

잠시 침묵하던 대기자들이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럼 누가 남는다는 말입니까? 증거가 다르든 말든, 결국 이 봉투에 반응한 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의 목소리에는 이제 당혹감과 더불어 막연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로웬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분노로 치환되고 있었다. 이때 이네스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 군중의 시선을 모았다. “절차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응답하는 행위와 수취를 거부하는 행위, 발신을 확인하는 절차와 반송 도장을 적용하는 것은 모두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네스는 탁자 위에 네 개의 구역을 설정하듯 손짓하며 말을 이어갔다. “로웬이 응답했다고 해서 그것이 수취 완료를 의미하지 않으며, 수취 거부가 곧 발신 확인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반송 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먼저 발신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확정되어야만 합니다. 이 순서를 뒤섞어 임의로 발신란을 채우는 행위는 행정적 기만일 뿐입니다.” 그녀는 응답, 수취 거부, 발신 확인, 반송 적용이라는 네 가지 단계를 날카롭게 분리해 냈다. 각각의 단계가 논리적 근거 없이 연결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로웬을 발신자로 몰아가려는 군중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심문실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수취 거부와 발신 확인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은 오류인 점. 대리 발신의 기록이 부재한 상태에서 응답자에게 발신인의 지위를 부여할 근거 또한 존재하지 않음.” 로웬의 말은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마치 이미 정해진 법전의 조항을 읊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이었다. 빈 이름의 주인이라는 명칭이나 성자라는 수식어는 로웬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절차적 정당성에 근거한 분리만이 강조되었다.

“빈 발신란이 비어 있어야만 하는 이유. 그것이 채워지는 순간, 이후의 모든 선택은 강제로 오독될 위험을 내포함. 반송 적용의 조건은 수취 거부권의 행사 이후, 발신인의 실체가 증명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 로웬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운 채, 오직 봉투와 기록지 사이의 관계만을 서술했다. 1인칭 대명사는 배제되었고, 로웬이 하는 말은 사건을 관조하는 제3자의 기록처럼 들렸다. 빈칸을 비워두는 것이야말로 다음 단계에서 발생할 실제 당사자의 선택을 왜곡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였다. 사람들은 로웬의 정연한 논리 앞에 압도되어, 자신들이 가하려 했던 억지스러운 주장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아야만 했다.

피핀이 깃펜을 들어 기록지의 여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펜촉의 소리가 적막한 실내에 울려 퍼졌다. ‘발신 주체 미확인. 수취 거부 의사는 발신 확인의 근거가 될 수 없음. 대리 발신에 관한 기록 부재. 이에 따라 반송 도장 적용을 일시 보류함.’ 피핀의 글씨는 정갈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기록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단순히 비어 있다는 사실을 적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그 칸이 비어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절차적 근거를 명시한 것이다.

이어 피핀은 기록지의 가장 넓은 여백에 보조 문구를 덧붙였다. ‘응답 사실은 발신 근거 아님.’ 이 문장은 로웬을 발신자로 몰아가려던 모든 시도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문구였다. 누군가가 부름에 답했다고 해서 그가 부른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자명한 진리가 종이 위에 새겨졌다. 피핀은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고운 모래를 뿌려 말린 뒤, 기록지를 정리했다. 이제 서류상으로 로웬은 발신자도, 수취인도 아닌, 그저 절차의 정당성을 감시하는 목격자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기록은 차갑고 냉정하게 정리되어, 더 이상의 우회적인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로웬은 탁자 한편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임시 표지를 세웠다. 나무로 된 작은 판에는 ‘비어 있는 봉투는 답한 사람을 발신자로 삼지 못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 심문실 내에서 내려진 잠정적인 결론이자, 향후 이어질 500화 이후의 논의를 결정짓는 이정표였다. 로웬의 행동은 단호했다. 응답한 자를 발신자로 우회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 표지 하나로 차단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봉투의 실제 발신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빈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마지막 과정뿐이었다.

심문실의 열기는 식었으나, 긴장감의 질감은 변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로웬이 아니라, 여전히 비어 있는 발신란과 그 안의 젖은 재를 향하고 있었다. 정체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범위는 좁혀졌다. 젖은 재의 발생 지점과 마른 종 흔적의 귀속처, 그리고 문밖의 박자가 가리키는 실제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만이 공중에 남았다. 로웬은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비어 있어야 할 곳을 비워둠으로써 진실이 들어설 자리를 지켜냈다. 대면 기록은 봉투 안쪽의 젖은 재를 아직 닫지 못한 채 멈췄지만, 그 빈 발신란은 로웬의 대답을 끝내 보낸 사람의 서명으로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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