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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주먹 일러스트

가벼운 주먹

4월 3주 오후,

B반 훈련장 공기가

평소보다 묵직했다.

태산은 링 바깥에서

손목 보호대를 조였다.

오른손 엄지 밑이

아직도 뻣뻣했다.

어제 백 회 루틴의 잔여 통증이

관절 틈에 남아 있었다.

남궁현이 기록패드를 들고

태산 앞에 섰다.

"표정 보니

확인하고 싶어졌냐."

태산이 고개를 들었다.

"사부.

진짜로 먹히는지

붙어보고 싶어요."

"연습장에서 숫자 맞추는 거 말고,

실전에서요."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붙어라.

단, 조건 하나."

"금강불괴 50%,

끝까지 유지."

태산이 입술 안쪽을

한 번 깨물었다.

쉽게 이기려면

조건을 버리면 된다.

근데 그럼 다시 원점이다.

"지키겠습니다."

남궁현이 링 반대편을 향해

손을 들었다.

"쁘아카오.

테스트 매치 들어가."

훈련장 문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가볍게 팔을 돌리며 걸어왔다.

쁘아카오였다.

정강이 보호대를 차는 손길이

익숙하고 빠르다.

몸이 이미 싸움을 즐기는 리듬이었다.

"좋지!"

"네 주먹,

요즘 소문 많더라."

태산이 웃었다.

"소문 말고

직접 맞아봐."

쁘아카오의 눈이

반쯤 가늘어졌다.

"좋아.

맞아보고 판단하지."

관전석에 학생들이 몰렸다.

B반, 1학년, 지나가던 A반까지

링 둘레를 채웠다.

수군거림이 번졌다.

"오늘은 진짜 빡세겠다."

"태산 선배 50% 제한 걸고 붙는대."

"그럼 쁘아카오가

그냥 밀어버리는 거 아냐?"

링 가장자리,

홍천무가 팔짱을 낀 채 섰다.

그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태산의 발끝만 보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경로를 쓰는지

보겠습니다."

작게 내뱉은 말.

그 말은 도발이 아니었다.

관찰자의 선언에 가까웠다.

남궁현이 중앙으로 들어왔다.

"규칙 공지."

"3분 2라운드.

판정은 내가 본다."

"태산은 출력 제한 50%.

넘기면 경고 누적."

"정면승부다.

핑계는 경기 끝나고 해."

태산과 쁘아카오가

링 중앙에서 주먹을 가볍게 맞댔다.

쁘아카오가 씩 웃었다.

"힘 참는 네 얼굴,

좀 궁금했거든."

태산도 마주 웃었다.

"나도.

네가 안 참는 얼굴."

시작 비프음이 울렸다.

첫 라운드.

쁘아카오의 발이

스위칭 스텝으로 리듬을 바꿨다.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

반 박자마다 축이 뒤집힌다.

태산은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중앙에서 반 걸음씩 각도를 틀며

거리만 측정했다.

세게 치고 싶다.

근데 오늘은 참고 간다.

안 그러면 다시 원점이다.

쁘아카오가 먼저 들어왔다.

낮은 로우킥 페인트 뒤

상체를 붙이며 클린치 각을 만든다.

태산은 왼팔 전완으로

들어오는 어깨를 받치고,

오른손 직권을 짧게 찔렀다.

툭.

소리는 가벼웠다.

쁘아카오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오?

간지럽게 치네."

곧바로 무릎이 올라왔다.

쁴아카오의 바이오 무에타이.

나노 강화 타격 특유의

단단한 충돌감이 갈비 옆을 스쳤다.

태산이 한 걸음 물러났다.

숨이 짧아졌다.

아프다.

근데 버틸 만하다.

문제는 통증이 아니라 리듬이다.

링 중앙 2미터 거리.

두 사람 모두 다시 발을 맞췄다.

태산이 진입했다.

발.

골반.

허리.

어깨.

주먹.

직권이 쁘아카오의 전완 방어에 걸렸다.

딱.

표면으론 막혔다.

그런데 쁘아카오의 어깨가

반 박자 늦게 떨렸다.

쁘아카오가 이를 드러냈다.

"가벼운데…

왜 안쪽까지 울리지?"

관전석 뒤에서

남궁현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경로가 맞기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태산 선배 주먹,

소리가 달라졌어."

"쾅이 아니라

딱인데,

맞은 사람이 흔들려."

태산은 숨을 정리했다.

맞다.

무게가 주먹에 있는 게 아니다.

연결된 길에 있다.

쁘아카오가 웃음을 지우고

자세를 낮췄다.

"좋네.

그럼 속도 올린다."

그가 두 발을 크게 벌리며

리듬을 틀었다.

와이크루를 축약한 전투호흡.

정식 발동은 아니어도,

몸 전체의 박자가 한 단계 빨라진다.

왔다.

왼 잽.

오른 팔꿈치.

클린치 진입.

무릎 연타.

태산이 첫 두 타를 막고

세 번째를 흘렸지만,

네 번째 무릎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욱.

공기가 빠졌다.

태산은 곧바로 뒤로 빠지지 않고

클린치 팔을 잡아 비틀었다.

파성호위진(破城護衛陣)의

돌파 각을 1대1 근접에 맞춰

축소 적용한 움직임.

정면으로 부수지 않고,

상대 중심축을 반 칸 비켜

틈을 만든다.

쁘아카오의 체중이

잠깐 옆으로 쏠렸다.

태산이 그 틈에

짧은 바디 직권을 꽂았다.

딱.

딱.

두 번 다 소리는 가볍다.

그러나 쁘아카오의 갈비가

안쪽에서 진동하듯 떨렸다.

쁘아카오가 혀를 찼다.

"이거,

겉은 약한데

속이 불편하네."

태산은 대답 대신

다시 중심을 잡았다.

호흡이 무겁다.

오른쪽 갈비도 욱신댄다.

출력을 올리면 편해질 거다.

올리면 안 된다.

비프음.

라운드 종료.

태산은 코너로 걸어가다

잠깐 휘청였다.

무릎 위에 손을 짚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남궁현이 물병을 던졌다.

"눈 올라간다.

출력 올릴 생각하지 마."

태산이 물을 삼켰다.

"티 나요?"

"너는 티가 잘 난다.

그래서 고치기 쉽다."

태산이 피식 웃었다.

"그 칭찬,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

반대편 코너,

쁘아카오는 어깨를 돌리며

짧게 호흡을 정리했다.

그의 전완이 붉게 달아올랐다.

방어는 했는데 충격이 남았다.

그가 태산을 보며 엄지를 들었다.

"좋아.

두 번째 간다."

두 번째 라운드 시작.

이번엔 쁘아카오가 더 가깝게 붙었다.

장거리 탐색을 버리고

클린치 파괴 각을 강제로 만든다.

왼손 목깃 잡기.

오른 무릎.

팔꿈치 전환.

다시 무릎.

태산은 두 번 막고

한 번 맞았다.

맞을 때마다

팔과 갈비가 둔하게 울렸다.

전투의 대가가

몸에 차곡차곡 쌓였다.

태산이 한 걸음 물러난 순간,

쁘아카오가 추격 스텝으로

거리 1.5를 지웠다.

태산은 뒤로 빠지지 않았다.

발바닥을 고정하고,

골반을 짧게 접는다.

허리가 축으로 돌고,

어깨가 늦게 따라온다.

직권.

이번엔 쁘아카오의 턱이 아니라

명치 옆 보호대 경계에 꽂았다.

딱.

쁘아카오의 눈이 커졌다.

호흡이 한 박자 끊겼다.

"하…

진짜네."

"가벼운데,

아프네."

관전석이 들썩였다.

"방금 유효다!"

"태산 선배,

예전처럼 크게 안 치는데

더 묵직해 보여!"

홍천무의 시선이

한 점에 고정됐다.

태산의 발.

골반.

주먹 도착 타이밍.

그는 속으로 짧게 정리했다.

순서를 바꿨다.

그래서 질감이 달라졌다.

태산은 한 번 더 들어갔다.

이번엔 정면 직권이 아니라

잔상분격(殘像分擊) 리듬을

짧은 1대1 교전용으로 축소했다.

고속 보법으로 잔상을 만드는

전태산식 교란 타격.

원래 다수전에서 쓰는 결을

단발 교차에 맞춰 잘라낸다.

왼 사선.

오른 사선.

반 박자 지연.

쁘아카오의 시선이

첫 잔상에 반응하는 순간,

태산의 실제 주먹이

반대쪽 복사근을 스쳤다.

딱.

쁘아카오가 낮게 웃었다.

"이건 또 뭐냐."

"빠르게 보였는데,

맞은 건 늦게 오네."

태산의 숨이 거칠어졌다.

효과는 있다.

대신 소모가 크다.

억제한 출력으로 속도까지 쓰니

호흡이 급격히 짧아진다.

남궁현의 목소리가

링 밖에서 날아왔다.

"속도에 취하지 마.

축 풀리면 바로 무너진다."

태산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중심을 세웠다.

발바닥 압을 확인한다.

골반 각도를 고정한다.

허리 회전 폭을 줄인다.

그리고 다시.

발.

골반.

허리.

어깨.

주먹.

직권이 쁘아카오의 가드 안쪽으로

절반쯤 파고들었다.

표면 충돌은 작다.

내부 진동은 확실하다.

쁘아카오가 뒤로 반 걸음 물러났다.

처음으로 스텝이 끊겼다.

관전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밀렸다!"

"태산 선배가

쁘아카오를 밀었어!"

남궁현이 즉시 소리쳤다.

"흥분하지 마!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쁘아카오의 리듬이 바뀌었다.

그는 정면 교환을 멈추고

하체를 집요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로우킥.

로우킥.

몸통 훼이크 뒤 다시 로우킥.

태산의 왼쪽 허벅지가

점점 무거워졌다.

보폭이 미세하게 줄었다.

쁘아카오의 계산이었다.

상체 타격보다 먼저

태산의 바닥을 흔든다.

태산이 이를 눈치채고

직선잠입 보법으로 각을 틀었다.

정면 대신 사각을 파고들어

클린치 시도를 비껴간다.

한 번 성공.

두 번 성공.

세 번째에서 늦었다.

쁘아카오의 팔꿈치가

가드 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태산의 광대 아래를 긁었다.

태산의 시야가

순간 하얗게 튀었다.

그 틈에 무릎이 복부를 찍었다.

욱.

태산의 등이

로프에 닿았다.

관전석이 조용해졌다.

태산은 로프 반동을 이용해

다시 중앙으로 튕겨 나왔다.

넘어지지 않는다.

호흡만 다시 붙인다.

졌다 해도,

이 라운드는 끝까지 본다.

쁘아카오가 다가왔다.

"좋아.

그 눈이다."

"끝까지 와."

태산이 턱을 당겼다.

"가자."

하지만 후반은 냉정했다.

태산의 억제 호흡이

빠르게 떨어졌다.

팔을 올리는 속도가

조금씩 늦어졌다.

쁘아카오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왼쪽으로 흔들어 시선을 빼고,

오른 무릎을 복부로 찔러 넣는다.

클린치에서 팔꿈치를 겹쳐

가드 틈을 계속 두드린다.

태산이 두 번 카운터를 넣었지만,

체급 압박 자체를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다.

라운드 종료 비프음.

둘 다 숨이 거칠었다.

태산의 오른팔은 무거웠고,

갈비 옆은 열감으로 뜨거웠다.

주먹을 쥐자

손가락 끝이 조금 떨렸다.

쁘아카오도 멀쩡하진 않았다.

전완과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씩 눌러 확인했다.

남궁현이 중앙으로 들어왔다.

"판정.

쁘아카오 승."

관전석에서 박수가 섞인 탄성이 나왔다.

태산은 숨을 정리한 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졌다.

근데 전보다 덜 억울하다.

내가 뭘 고쳤는지

오늘 몸으로 확인했으니까.

쁘아카오가 장갑을 벗으며

태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주먹,

진짜 바뀌었다."

"뭐가 달라진 거야?"

태산이 손을 마주 잡았다.

"힘이 아니라

전달로 쳤어."

쁘아카오가 웃었다.

"좋다.

다음엔 그 전달,

내가 먼저 끊어본다."

태산도 웃었다.

"해봐.

나도 더 고쳐올 테니까."

링 밖으로 내려오자

남궁현이 짧게 말했다.

"졌는데 표정이 좋네."

태산이 어깨를 돌렸다.

"네.

처음이에요."

"그럼 제대로 가는 중이다."

남궁현이 태산의 옆구리를

손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타박이다.

뼈는 멀쩡."

"오늘은 아이싱하고,

내일은 하체 루틴부터."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링 아래에서 쁘아카오가

보호대를 풀며 웃었다.

"태산.

다음엔 조건 바꿔."

"네 50%가 아니라,

내 리듬 제한 걸고 붙자."

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네가 스스로 족쇄를 건다고?"

"그래야 공평하지.

오늘은 네 실험이었다."

쁘아카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은 내 실험."

태산이 손을 들어 답했다.

"좋다.

받아줄게."

그때 링 계단 아래,

홍천무가 태산 앞을 가로막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방금 세 번째 교차.

왜 잔상분격 리듬을 끊었지?"

태산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왼 허벅지가 죽어서.

더 가면 축이 무너졌어."

천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판단이네.

억지로 이어갔으면

카운터 맞고 끝났겠지."

태산이 수건을 내렸다.

"칭찬이냐."

"관찰 결과 전달이다."

천무가 돌아서며 한마디를 더 남겼다.

"네가 고친 건 힘이 아니라

판단 순서였다."

"그 순서,

다음에 내가 깨본다."

훈련장 출구 쪽에서

1학년 둘이 또 수군댔다.

"홍천무가 인정한 거 아냐?"

"인정은 인정인데,

더 무서워진 거지."

태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한 번 폈다 쥐었다.

주먹이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통증이 남아 있다.

그래도 방향도 남아 있다.

간이 처치실에서

얼음팩을 갈아 붙일 때,

태산은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패배 장면이 아니라

적중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딱.

그 짧은 소리.

막혔는데 전달되던 감각.

그 감각을

다음에 한 번 더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다음엔,

더 자주 만들면 된다.

처치실 문을 나서기 직전,

남궁현이 다시 태산을 불렀다.

"내일부터 체크 항목 세 개."

"첫째, 왼 다리 축 유지.

둘째, 호흡 끊김 시점 기록.

셋째, 50% 넘기고 싶은 순간의 이유."

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이유까지 적어요?"

"그 순간에 네 습관이 드러난다.

기술은 동작으로 고치고,

습관은 이유로 고친다."

태산은 수건으로 목을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남궁현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오늘 판정은 졌다.

근데 방향 판정은 이겼다."

태산은 잠깐 멈췄다가

작게 웃었다.

"그 판정이

더 듣기 좋네요."

훈련장 불이 하나둘 꺼지고,

학생들이 흩어졌다.

홍천무는 마지막까지 남아

빈 링을 한 번 보고 돌아섰다.

그의 손등 정맥이

아주 옅게 도드라져 있었다.

읽어야 한다.

저 경로를.

같은 날 밤,

기숙사 옥상 난간에

초봄 바람이 얇게 걸렸다.

태산은 후드 지퍼를 반쯤 올리고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붙인 파스가

차갑게 식어 갔다.

문이 열리고

은명이 올라왔다.

그는 태산 얼굴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졌네.

표정이 밝아서 더 티 난다."

태산이 웃었다.

"졌는데 기분 좋은 건

처음이야."

은명이 난간에 나란히 섰다.

"데이터가 나왔다는 얼굴이네."

태산이 두 손을 펴 보였다.

"같은 주먹인데,

길이 달라지니까

타격이 완전 달라지더라."

"세게 치는 거랑

깊게 닿는 거,

완전 다른 문제였어."

은명의 눈빛이

짧게 바뀌었다.

"경로가 바뀌면

결과가 바뀐다…"

"도술도 똑같네."

태산이 은명을 흘끗 봤다.

"너 말투 보니까

이미 머리속에서

뭐 하나 더 돌리고 있네."

은명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네 경기 보면서

확인한 게 하나 있어."

"세게 치는 것과

정확히 전달하는 건 다르다."

"도술도 마찬가지야.

크게 펼치는 것과

정확히 꽂는 건 다른 문제."

태산이 난간 위로

주먹을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근데 난 아직

정확히 꽂아도 진다."

은명이 바로 받았다.

"당연하지.

방법을 바꾼 첫 주에

결과까지 바뀌면

그건 소설이지 훈련이 아니야."

태산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지금 소설 속인데?"

은명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더 천천히 바꿔야 돼.

급한 성장은

항상 대가를 미뤄놓거든."

태산이 잠깐 말이 막혔다.

그 말이 묘하게 정확했다.

오늘 몸이 욱신대는 이유.

예전 방식이면 가렸을 통증.

지금은 숨기지 않고 남겨둔 결과.

태산은 난간에서 등을 떼고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내일 아침부터

하체 다시 잡는다."

"오늘 로우킥 세 번에서

왼 다리 죽는 게 느껴졌어."

"그거 고치기 전엔

전달이고 뭐고

후반에 다 무너진다."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패배에서 항목 뽑는 속도,

생각보다 빠르네."

"그 속도면

다음 패배는 더 비싸질 거다."

태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위로가 칭찬인지 협박인지

항상 헷갈려."

"둘 다."

짧은 대답 뒤,

둘 사이에 잠깐 웃음이 흘렀다.

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너도 뭔가 찾았냐?"

은명이 단말기를 꺼냈다.

화면엔 승인 코드가 떠 있었다.

C-7 접근 권한.

유효 시간 내일 19:00.

하단 메모가 한 줄 붙어 있었다.

C-7 서가 / 홍·전 교차 문헌.

태산이 화면을 읽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내일 들어가냐."

"응.

제한구역."

태산이 바로 물었다.

"혼자 가도 돼?"

은명이 화면을 끄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도서관은

주먹보다 조용하니까

괜찮아."

잠깐 멈춘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그래도 같이 와.

내가 문장에 빠지면,

넌 현실 쪽이 빠르잖아."

태산이 피식 웃었다.

"그건 인정."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은명이 다시 단말기를 켰다.

승인 코드 아래에 붙은

주의 문구가 작게 떠 있었다.

열람 중 복제 금지.

외부 전송 금지.

열람 로그 자동 기록.

은명은 그 문구를

천천히 훑었다.

기록은 남는다.

삭제는 어렵다.

즉흥적으로 읽을 문제가 아니다.

태산이 옆에서 물었다.

"너 긴장하냐?"

은명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긴장 안 하면 거짓말이지."

"근데 긴장이 싫진 않아.

긴장할수록

질문이 선명해지거든."

태산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긴장하면

주먹부터 나가는데."

은명이 짧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머리,

네가 주먹인 거야."

태산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테이프를 꺼내

손목을 다시 감았다.

오늘 경기는 끝났다.

근데 다음 경기는 이미 시작됐다.

링이 아니라,

도서관 복도에서.

태산은 난간에서 등을 떼며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팔이 묵직하다.

갈비가 욱신댄다.

근데 오늘 통증은

패배의 잔여물만은 아니다.

고친 흔적이 남은 통증이다.

은명은 주머니 속 손을

천천히 폈다 쥐었다.

질문을 미루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기록을 읽을 차례다.

옥상 문을 닫고 내려가는 길,

은명의 단말기가

짧게 한 번 더 떨렸다.

도서관 자동 안내 알림.

내일 18:50,

C-7 구역 입구 대기.

신원 재확인 필요.

은명은 화면을 끄지 않고

끝 문장을 다시 읽었다.

홍·전 교차 문헌.

단어 네 개가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태산은 은명의 옆걸음에 맞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훈련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도서관의 정적이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주먹으로 답을 찾던 하루가 끝나고,

글자로 답을 찾아야 할 밤이 온다.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걸음 속도가 묘하게 맞아 있었다.

오늘 태산은 패배를 데이터로 바꿨고,

은명은 예고를 좌표로 바꿨다.

방법은 달라도

둘 다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하나는 주먹의 문법을,

하나는 기록의 문법을

막 배워낸 얼굴이었다.

그리고 두 문법이

언젠가 같은 문장으로

맞물릴 거라는 예감이

바람 사이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직

반쯤만 읽힌 문장이다.

나머지 반은

내일 밤 C-7에서

처음 소리 내어 읽히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그 문장을 아직 모른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질문은 준비됐고,

답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공백이,

이번 주를 끌고 간다.

곧 메워질 공백이다.

다음은 서신이다. 곧

내일 밤,

그 네 글자의 순서가

두 사람의 다음 싸움을

조용히 바꿔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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