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의 주먹
4월 1주 새벽,
B반 훈련장 전등이
반쯤만 켜져 있었다.
남궁현은 중앙에 서서
기록패드를 켰다.
"오늘부터 50%다.
넘기면 전부 무효."
태산이 장갑을 조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약하게 치는 훈련이
진짜 도움이 돼요?"
남궁현의 시선이
태산의 어깨를 스쳤다.
"네가 약하다는 걸
배우는 훈련이다."
짧은 정적.
태산의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약해지는 훈련.
처음 듣는다.
근데 피할 생각은 없다.
남궁현이
충격측정 표적주를 가리켰다.
"직권 100회.
하나마다 출력 찍는다."
태산이 첫 자세를 잡았다.
왼발 반 보.
무릎 고정.
골반 잠금.
어깨 수축.
주먹.
쿵.
패드에 숫자가 떴다.
72%.
"무효."
태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째.
힘을 눌렀다.
팔꿈치 궤도를 짧게 접고,
손목 스냅을 죽였다.
68%.
"무효."
셋째.
넷째.
다섯째.
66.
70.
63.
"무효.
무효.
무효."
관찰석에 있던 B반 학생 둘이
작게 속삭였다.
"태산 선배가
출력 제어를 못 한다고?"
"못 하는 게 아니라
몸이 먼저 나가는 거지."
태산이 이를 물었다.
몸이 먼저 나간다.
맞는 말이라 더 거슬린다.
주먹이 먼저라는 건,
머리가 비어 있었다는 뜻이니까.
남궁현이 다가와
태산의 전완을 손끝으로 눌렀다.
"봐라.
넌 조절이 아니라
의존으로 싸워왔다."
"금강불괴가
네 빈틈을 다 덮어줬지."
"오늘부터
그 덮개 뜯는다."
태산이 숨을 길게 뱉었다.
"몸이 먼저 나가요."
"그게 습관이다.
오늘부터 부순다."
남궁현이 손을 들었다.
"다시."
열두 번째 타격.
태산은 발바닥 압을 줄였다.
골반 회전을 반 박자 늦췄다.
어깨를 끝까지 열지 않았다.
툭.
소리가 바뀌었다.
49%.
패드에
처음 유효 표시가 떴다.
태산이 표적주를 보다가
남궁현을 봤다.
"이게 맞아요?"
"맞다."
남궁현이 내부 그래프를 띄웠다.
"겉충격은 약한데
내충격이 깊지."
"100%에선
힘이 빈틈을 덮는다."
"50%에선
빈틈이 네 눈을 찌른다."
태산은 침을 삼켰다.
보이는 거랑
고치는 건 다르다.
그래도 보이면,
적어도 도망칠 핑계는 사라진다.
오십 회를 넘자
손목이 뜨겁게 저렸다.
육십 회를 넘자
어깨 뒤가 묵직하게 굳었다.
예전 같으면
출력을 올려 밀어붙였을 통증.
오늘은 그 선택지가 없다.
백 회가 끝났을 때,
유효 타격은 스물아홉 회였다.
태산의 손가락이
주먹을 완전히 쥐지 못했다.
미세하게 떨렸다.
남궁현이 패드를 끄며 말했다.
"내일도 같다.
못 맞춰도 계속 간다."
태산은 고개만 끄덕였다.
"네."
훈련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확실히 느렸다.
이건 패배가 아니다.
근데 승리도 아니다.
딱 시작점이다.
4월 1주가 그렇게 흘렀다.
출력을 낮추면
손목이 먼저 꺾였고,
손목을 세우면
보법이 늦었다.
보법을 맞추면
타이밍이 어긋났고,
타이밍을 맞추면
호흡이 흔들렸다.
태산은 새벽 훈련 뒤에도
빈 강당 한쪽에서
같은 동작만 반복했다.
발끝 각도.
무릎 잠금.
골반 궤도.
허리 회전.
어깨 개방.
느리게.
더 느리게.
주먹 하나에
숨을 세 번 쪼갰다.
4월 2주,
남궁현이 타이머를 멈췄다.
"지금 속도는
네 게 아니었다."
"금강불괴가 만든 속도였어."
태산이 땀을 털며 웃었다.
"그럼 진짜 제 속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요."
"그래.
빌린 걸 걷어냈으면
네 걸 세워야지."
빌려온 걸 걷어내면
초라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시작점이다.
4월 3주,
충격측정 패널이 바뀌었다.
겉반응과 내충격을
분리해서 보여주는 모델이었다.
태산이 자세를 잡았다.
발.
골반.
허리.
어깨.
주먹.
직권이 들어갔다.
표면 흔들림은 작다.
그런데 내부 그래프가
길고 깊게 내려간다.
태산이 모니터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
약한데 더 묵직해."
남궁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힘이 아니라
전달경로가 맞은 거다."
"보이는 순간이
반은 끝난 거다."
태산이 바로 되물었다.
"보이는 거랑
고치는 건 다르잖아요."
"맞아.
그래서 남은 반이
더 어렵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표적 앞에 섰다.
완성은 멀다.
근데 빈칸은 안 보이던 때보다
훨씬 선명하다.
그날 저녁,
훈련장 문 바깥 난간에
익숙한 그림자가 섰다.
홍천무였다.
천무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틀에 기대
태산의 마지막 세트를 지켜봤다.
태산이 시선을 돌리자
천무가 먼저 말했다.
"일부러 약해지는 수련.
비효율처럼 보였는데,
결과는 반대네."
태산이 물병을 들었다.
"비효율 맞지.
죽을 맛이거든."
천무가 짧게 웃었다.
"죽을 맛인데
계속하네."
"안 하면
더 죽을 맛이라서."
잠깐 침묵.
천무가 태산의 손목을 보고,
패널 수치를 본 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저 방식,
무시하면 안 되겠군."
태산이 눈썹을 올렸다.
"관찰 끝났냐?"
"아직.
다음엔 내가 먼저 친다."
도발보다 예고에 가까운 말.
태산도 웃었다.
"좋지.
근데 그때는
봐주는 거 없다."
천무가 돌아서며 던졌다.
"봐주는 쪽은
원래 네가 아니지."
문이 닫혔다.
복도 쪽에서
1학년 학생 둘이 수군댔다.
"천무가 태산 선배 훈련
계속 보고 있대."
"둘 붙으면
체육관 바닥 갈리겠다."
태산은 손을 쥐었다 폈다.
손끝이 떨린다.
근육은 무겁다.
근데 방향은 맞다.
다음 날 새벽,
남궁현은 보조 실습을 열었다.
정식 대련이 아닌
제어 검증용 모의전.
규칙은 간단했다.
출력 제한 유지.
과출력 즉시 중단.
연계 실패는 재시작.
남궁현이 첫 조를 불렀다.
"전태산.
전서린.
보조 관찰 홍은명."
서린이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호흡이 조금 빨랐다.
은명이 바깥 라인에서
계측창을 켰다.
"서린.
처음부터 크게 펼치지 마."
"네!"
"대답 말고 수치.
지금 자기 제어 확률?"
서린이 잠깐 멈췄다.
"…육십 퍼센트요."
태산이 피식 웃었다.
"정직하네.
나머지 사십은
내가 버텨주면 되나?"
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넘길게요."
남궁현의 손이 내려갔다.
"시작."
서린이 먼저 움직였다.
손끝에서 부적광이 튀고,
육정육갑 결계운용의 기초식이
바닥 위로 겹겹이 깔렸다.
얇은 장막 두 겹.
첫 겹은 유도.
둘째 겹은 제동.
태산이 진입했다.
직선잠입(直線潛入) 보법.
은신 대신 사각을 관통하는
전태산식 최소 경로 돌입.
왼발.
골반.
허리.
어깨.
주먹이 뻗는다.
첫 겹이 밀렸다.
둘째 겹이 버텼다.
태산의 주먹이
결계 경계에서 떨렸다.
힘을 밀면 깬다.
멈추면 읽힌다.
태산이 어깨 각도만 바꿔
힘의 벡터를 옆으로 흘렸다.
직권이 아닌 반권으로
결계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명이 계측창을 읽었다.
"50.8.
경계선."
남궁현이 짧게 끊었다.
"리셋."
두 번째 재시작.
서린이 이번엔
결계를 너무 빠르게 접었다.
순간 출력이 치솟으며
장막 끝이 불꽃처럼 튀었다.
은명이 바로 외쳤다.
"서린, 과출력!
호흡 끊어!"
서린이 이를 물고
명령어를 반절에서 멈췄다.
장막 붕괴 직전에
진동이 가라앉았다.
태산도 주먹을 거둬
두 걸음 물러났다.
"잘했다.
멈춘 건 성공이야."
서린이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멈추는 게
치는 것보다 어려워요."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게 치는 건
재능으로도 된다."
"멈추는 건 기술이다."
세 번째 재시작.
은명이 서린 옆으로 반 걸음 붙어
낮게 말했다.
"네 결계는 지금
방어가 아니라 공포 반응이야."
"막겠다는 생각 말고,
멈추게 한다고 생각해."
서린의 호흡이 한 박자 느려졌다.
수인 속도도 같이 느려졌다.
장막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엔 흔들림이 작았다.
태산이 진입했다.
발.
골반.
허리.
어깨.
직권이 나가다
둘째 겹에서 멈춘다.
태산은 힘을 더 싣지 않았다.
오른발 축을 틀어
장막 바깥 사선으로 빠졌다.
곧바로 빈 공간에
왼손 바디샷을 가볍게 꽂았다.
결계가 깨지지 않은 채
공격선만 우회됐다.
남궁현이 손뼉을 쳤다.
"좋다.
지금이 오늘 정답이다."
주변 학생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전태산 선배가
안 부수고 지나갔어."
"저게 더 어렵지."
서린은 물병을 받으며
태산을 올려다봤다.
"선배,
아까 왜 안 밀었어요?"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밀면 깨지지.
근데 그럼 또 옛날 버릇이다."
"난 지금
이기는 법보다
고치는 법 먼저 배우는 중."
은명이 로그를 저장하며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핵심.
태산은 50% 유지율 상승."
"서린은 과출력 임계에서
자기 차단 성공."
남궁현이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숙제 공지."
"태산은 전달경로 고정.
서린은 종료 명령 고정."
"기술은 시작보다
끝내는 법이 중요하다."
실습이 끝난 뒤에도
태산은 훈련장에 남았다.
출력계 패치를 손목에 붙이고,
직권을 스무 회 더 쳤다.
51.
49.
52.
50.
수치가 오르내릴 때마다
팔꿈치 근막이 당겼다.
견갑 안쪽이 불처럼 뜨거웠다.
태산이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금강불괴를 조금만 올리면
통증이 사라질 걸 안다.
그래서 더 올리고 싶다.
근데 그 선택이
지금껏 나를 막아온 선택이었다.
태산은 손등을 문지르며
다시 중앙으로 나왔다.
한 번 더.
딱 한 번 더.
오후엔 은명이
운소하 연구실을 찾았다.
문고리에 뒤집힌 부적.
면담 가능 신호였다.
운소하는 고문서를 넘기다 말고
은명을 봤다.
"표정 보니
오늘은 질문이네."
은명이 태블릿을 올렸다.
허실역전(虛實逆轉) 단계표와
실패 로그가 먼저 떴다.
"C-7 추천장,
요청드립니다."
"근거."
"500년 맹약 단서.
전씨-홍씨 병기 기록 확인."
운소하가 로그를 훑었다.
성공 6.
실패 11.
역류 징후 2.
"실패 로그를 앞에 두네?"
"성공만 들고 오면
설득은 쉬워집니다."
"대신 판단이 틀어집니다."
운소하가 소형 실습 원판을 켰다.
"말 말고
직접 보여줘."
은명이 수인을 맺었다.
1단계.
거짓전장 프로토콜.
표적 주변 좌표에
인지 노이즈를 얇게 덮는다.
2단계.
사각전이.
카메라 블라인드 스팟으로
반 박자 위치 이동.
3단계.
육정육갑 결계운용.
퇴로를 반원형 장막으로 잠근다.
4단계.
봉인형 전자부적.
부적광이 떨렸다.
밀면 성공할 수도 있다.
무리하면 역류한다.
은명은 출력을 한 칸 내렸다.
부적광이 안정됐고,
표적 구동선이 한 박자 늦게 멈췄다.
완전 정지는 아니다.
그래도 명백한 제동이다.
운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완성은 아니고,
가짜 완성도 아니다."
은명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신력 소모가 빠르다.
장기 난전에 취약하다는 사실도
여전하다.
운소하가 전자서명을 찍었다.
"추천장 승인."
"하나 더.
원문은 답안지가 아니다."
"읽는 순간
네가 더 흔들릴 수도 있어."
은명이 짧게 답했다.
"흔들리더라도
근거 없는 확신보다 낫습니다."
운소하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출처가 아니라 목적.
그 원칙은 유지해."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도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은명은 연구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손을 폈다 쥐었다.
세 번.
괜찮다.
아직 버틸 수 있다.
그날 밤,
태산은 기숙사 복도 끝
공용 스트레칭 룸에 혼자 남았다.
벽거울 앞에서
주먹을 천천히 내질렀다.
빠르게 치면 익숙하다.
느리게 치면 어색하다.
어색한 쪽이 지금 필요한 쪽이다.
거울 속 태산은
예전보다 약해 보였다.
그 사실이 기분 나빴다.
기분 나쁘다고
사라지는 문제는 아니다.
태산은 어깨를 푼 뒤
발끝을 다시 세웠다.
파성호위진(破城護衛陣)의 돌입 자세를
개인 수련용으로 축소했다.
본래는 포위선을 찢으며
아군 퇴로를 여는 돌파 진입.
지금은 단 한 걸음의 축만 남긴다.
왼발이 축을 박고,
골반이 비스듬히 열린다.
허리가 짧게 돌며
어깨가 그 뒤를 따른다.
주먹은 마지막에 따라간다.
순서를 지키면
힘이 덜 들어간다.
순서가 어긋나면
어김없이 팔만 무거워진다.
태산이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볍게 치는 게 아니라,
가볍게 새는 걸 막는 거구나."
다음 날 새벽,
남궁현은 태산에게
충격패널 대신 줄자를 건넸다.
\"오늘은 거리부터 잰다.\"
\"거리는 맞아요.\"
\"네가 맞다고 믿는 거리 말고,
네 몸이 실제로 쓰는 거리.\"
태산은 줄자를 들고
열 번 연속 스텝을 밟았다.
왼발 진입 폭이
매번 2~3센티씩 흔들렸다.
눈으로는 안 보이던 오차였다.
남궁현이 바닥에 선을 그었다.
\"네 주먹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네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태산이 턱을 문질렀다.
\"이걸 맞추면
진짜 달라져요?\"
\"아니.\"
남궁현은 바로 잘랐다.
\"이걸 맞춰도
당장 이기진 못 한다.\"
\"대신 안 무너진다.\"
태산은 그 말을
가만히 받아 삼켰다.
당장 이기는 법이 아니라,
안 무너지는 법.
요즘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은
늘 후자였다.
셋째 주 중반,
태산은 백 회 루틴을
두 세트로 늘렸다.
첫 세트는 출력 고정.
둘째 세트는 호흡 고정.
오십 회를 넘기면
오른손 엄지가 굳었다.
칠십 회를 넘기면
견갑 안쪽이 뻣뻣해졌다.
통증이 올라올 때마다
태산은 의식적으로
금강불괴 출력을 더 내렸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통증을 눌러버렸을 선택.
지금은 통증을 읽어야 한다.
남궁현이 기록패드 없이
태산 앞에 섰다.
\"오늘은 수치 보지 마.
감각만 기억해.\"
태산이 고개를 기울였다.
\"수치 없이 어떻게 확인해요?\"
\"수치는 나중에 확인해.
넌 맨날 결과부터 보잖아.\"
\"오늘은 과정만 본다.\"
태산이 눈을 감고
한 번 숨을 들이켰다.
발바닥이 바닥을 미는 감각.
골반이 도는 축의 각도.
허리에서 어깨로 넘어가는 시간.
주먹이 늦게 도착하는 타이밍.
눈을 뜨고,
직권.
소리는 작다.
진동은 길다.
남궁현이 그제야 패드를 켰다.
\"50.1.\"
태산이 짧게 웃었다.
\"소수점으로 사람 괴롭히네요.\"
\"네가 소수점에서 무너져서 그렇다.\"
점심 쉬는 시간,
홍천무는 개인 훈련 시간을 줄여
태산 루틴을 멀리서 반복 관찰했다.
직접 끼어들진 않는다.
대신 메모만 남긴다.
진입 폭.
허리 선행각.
충격 전달 지연.
1학년 학생 둘이
천무 뒤에서 속삭였다.
\"태산 선배 따라 하려는 건가?\"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읽는 거 같아.\"
천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짧게 말했다.
\"읽어야 넘는다.\"
그 말에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저녁 자율훈련 끝,
태산과 천무가
복도 자판기 앞에서 마주쳤다.
천무가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네가 바꾼 건 힘이 아니네.\"
태산이 캔을 받았다.
\"그럼?\"
\"순서.\"
천무가 태산의 손목을 봤다.
\"전엔 힘이 먼저였어.
지금은 발이 먼저더라.\"
태산이 캔을 따며 웃었다.
\"관찰 제대로 했네.\"
\"관찰 못 하면
다음엔 못 이기니까.\"
태산은 한 모금 마시고
천무를 똑바로 봤다.
\"좋다.
다음에 붙자.\"
\"붙어.
근데 아직은 아니다.\"
천무는 짧게 대답하고
먼저 돌아섰다.
태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을 한 번씩 폈다 쥐었다.
예전보다 느리다.
예전보다 답답하다.
근데 예전보다 정확하다.
정확한 주먹은
느리게 만들어진다.
4월 3주 저녁,
활빈당 아지트엔
컵라면 냄새와 파스 냄새가 섞여 있었다.
태산은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
손목에 냉찜질 팩을 올렸다.
리오가 그걸 보고
입을 벌렸다.
"형,
몸이 새 사람 같아 보여."
태산이 웃었다.
"나도 알아.
나쁜 쪽으로 새 사람."
올가가 캔을 던졌다.
"입은 멀쩡하네.
그럼 아직 버틴다."
태산이 캔을 받아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팔은 멀쩡한 척 중.
내일 아침 되면
나부터 배신할 예정."
짧은 웃음이 돌았다.
그 틈에 은명이
태블릿을 위노나 쪽으로 밀었다.
"제한구역 조건,
다시 확인해줘."
위노나가 권한 트리를 열었다.
"중앙도서관 C-7은
추천장 + 성적 상위권.
둘 다 있어야 열려요."
"당일 임시키는
출입만 가능.
원문 스캔은 별도 승인.
로그는 자동 저장."
은명이 질문을 붙였다.
"추천장 발급자 제한은?"
"담당 교수,
학생회 집행부,
교감실 직인 중 하나요."
아르준이 노트에
체크리스트를 적었다.
"동행 1인.
비상 호출 코드.
열람 시간 제한.
기록 남기고 진입."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추천장부터 뚫는다."
태산이 냉찜질 팩을 내리고
은명을 봤다.
"넌 책으로 싸우고,
난 주먹으로 싸우네."
은명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결국 같은 싸움일 수도 있지."
"넌 몸으로 틈을 만들고,
난 기록에서 틈을 찾는 거니까."
태산이 그 말을
속으로 굴려봤다.
같은 싸움.
아직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
은명의 단말기에
교내 전자우편이 도착했다.
발신자 운소하.
제목은 짧았다.
[추천장 승인]
아지트가 조용해졌다.
은명이 메일을 열었다.
본문은 한 줄,
메모가 한 줄.
C-7 열람 승인.
그리고 메모.
C-7. 오래된 서신.
네 성씨와 그 아이 성씨가
같이 적혀 있다.
은명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리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좋은 소식 아니야?"
은명은 답하지 않았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지금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위노나가 화면을 흘끗 보고
아주 작게 물었다.
"문구까지 왔네요?
C-7이면 꽤 깊은데."
은명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깊은 곳이니까 간다.
얕은 데엔 답이 없었으니까."
태산이 냉찜질 팩을 내려놓고
은명 옆으로 의자를 끌었다.
"내일 같이 간다.
네가 글자 속으로 너무 들어가면
내가 끌어낼게."
은명은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말은 짧았는데,
그 짧은 말이
아지트 공기의 결을 바꿨다.
리오도 장난을 멈추고
조용히 컵라면 뚜껑을 덮었다.
올가는 아무 말 없이
빈 캔을 한쪽으로 밀어뒀다.
아르준도 메모를 덮었다.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숨을고른다
확실한 건 하나다.
내일 밤,
문 하나가 열린다.
그리고 그 문 뒤에서
오래된 맹약이
두 사람의 성씨를
같은 줄에 올려놓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