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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계 더 일러스트

한단계 더

방과 후,

A반 교무동 끝방은

유리 대신 목재문이었다.

운소하 연구실.

문패는 비어 있고,

문고리엔 작은 종이 부적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은명이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쪽에서 느슨한 목소리가 흘렀다.

"들어와."

문을 밀고 들어가니

낡은 고문서 옆에

최신형 연산패드가

나란히 열려 있었다.

향 냄새와 전자기기 열이

묘하게 섞인 공간.

운소하는 의자에 기대

반쯤 감긴 눈으로

은명을 올려다봤다.

"표정 보니,

오늘은 질문 가져왔네?"

은명은 대답 대신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전날 적어둔 두 줄.

페이지 모서리가

이미 몇 번 접혀 있었다.

"사부."

"제 도술은

전씨에서 왔습니다."

"이걸 제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운소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 번 툭 쳤다.

농담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이번엔 웃음이 없었다.

"좋다."

"네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중요해."

은명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목소리를 낮췄다.

"답을 듣고 싶습니다."

"근데,

답이 무서울 것도 압니다."

"그래도 묻겠습니다."

운소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서운 질문을

끝까지 들고 오는 건,

대부분의 학생이 못 해."

"일단 그것부터

통과야."

은명은 노트를 펴

허실역전 단계표를

보여줬다.

1단계 인식 역전.

2단계 사각전이.

3단계 결계 봉쇄.

4단계 봉인형 부적.

체크 박스는

세 칸까지 채워져 있고,

네 번째 칸은 반만 채워져 있었다.

은명이 페이지를 넘겼다.

실패 로그가 빽빽했다.

봉인 지연 0.7초.

결계 닫힘 불완전.

역류 징후 2회.

"결국 여기서

자꾸 막힙니다."

"속도 올리면

봉인이 헐거워지고,

봉인을 조이면

전체가 느려집니다."

"그래서

아직 제 기술이라

말을 못 하겠습니다."

"허실역전은

거의 완성입니다."

"그런데도

천기 생각만 하면,

여전히 모자랍니다."

운소하가

의자에서 상체를 세웠다.

"당연하지."

"천기를 상대하려면

한 단계 더 올라와야 해."

"기술 하나 완성했다고

전쟁이 끝나는 판이 아니거든."

연산패드 화면이 바뀌었다.

실습 로그 세 장이

겹쳐진 그래프.

정통선.

은명 변형선.

전서린 실습선.

"네 문제는

출처가 아니야."

"목적이지."

은명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운소하가 손가락으로

정통선을 눌렀다.

"이건 정통.

안정적이고,

재현 가능해."

다음으로

은명 변형선을 눌렀다.

"이건 네 변형.

빠르고,

실전 반응이 좋지."

마지막으로

서린 실습선을 눌렀다.

"그리고 이건,

아직 흔들리는 정통."

"세 개 다

가짜가 아니야."

"누가 주인이냐는

출생신고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잠깐 정적.

연산패드 냉각팬 소리만

조용히 돌았다.

운소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출처가 아니라,

목적이 주인을 만든다."

그 문장이

실내 공기를

딱 고정해버렸다.

은명은 시선을 내렸다.

정답은 안 줬다.

그런데 도망갈 틈도 안 줬다.

답 하나보다,

방향 하나가 더 무겁다.

"그럼 제 목적은

어떻게 검증합니까."

운소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거울을 써."

"전서린을 봐."

"정통을 가진 후배를

옆에 두고,

네 변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매번 확인해."

"네가 정통을

버리려고 변형한 건지,

살리려고 변형한 건지."

은명은 곧장 메모했다.

정통 비교 루틴 고정.

서린 로그 동시 검토.

"그리고 하나 더."

운소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음 주까지

허실역전 4단계,

실전 로그 세트로 가져와."

"머리로만 완성했다는 말

이제 안 먹혀."

"조건은 세 가지."

"첫째,

서린 정통 로그와

동일 조건 비교."

"둘째,

오류가 난 구간을

좋아 보이는 문장으로

포장하지 말 것."

"셋째,

네가 왜 이 기술을

완성하려는지

한 줄로 적어올 것."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한 줄이면 됩니까."

"한 줄이라 더 어렵지."

운소하가 웃었다.

"길게 쓰면

대충 숨길 수 있어."

"한 줄은

숨을 데가 없거든."

은명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을 나서려던 순간,

운소하가 뒤에서 불렀다.

"홍은명."

은명이 돌아보자

운소하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아까 펼쳐둔

질문 노트였다.

"질문은 지우지 마."

"답이 늦어도 괜찮아.

근데 질문을 지우는 순간,

네 도술은 남의 것이 돼."

은명은 노트를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지우지 않겠습니다."

운소하가 손목을 털자

연구실 바닥에

작은 결계 원이 떠올랐다.

"그럼 마지막으로

지금 한 번만 해봐."

"허실역전 1단계.

대상은 나."

은명이 숨을 고르고

두 손가락으로

짧은 결인을 맺었다.

공기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운소하 어깨선이

반 치 어긋나 보였다.

성공이다.

그런데 2초를 못 버텼다.

화면처럼 파형이 찢겼다.

운소하가 손바닥으로

잔광을 쓸어냈다.

"기술은 맞아."

"근데 지금 넌

내 인식을 속이려 했다."

"목적을 바꿔."

"날 속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적의 판단을 틀리게 만든다."

"주어가 바뀌면,

도술도 바뀐다."

연구실 문이 닫히고,

복도 형광등이

반 박자 늦게 깜빡였다.

은명은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깐 봤다.

아직도 확신은 없다.

그래도 방향은 생겼다.

가방 안 노트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답을 받지 못한 무게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늘어난 무게였다.

*

같은 날 오후,

B반 훈련장 바닥엔

분필선이 격자로 그어져 있었다.

남궁현은 중앙에 서서

출력 계측 팔찌를

태산 손목에 채웠다.

삑.

숫자창이 켜졌다.

"전태산."

"오늘부터

금강불괴 출력,

오십."

"넘기면 실패다."

태산이 팔찌를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사부,

그럼 질 수도 있는데요."

남궁현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져라."

"배우는 쪽이

이기는 날이 온다."

남궁현이

훈련봉 하나를 던졌다.

태산이 반사적으로 받자,

남궁현이 바로 들어왔다.

짧은 견제.

왼손 손날.

무릎 압박.

태산은 힘으로 밀어냈다.

봉 끝이 크게 흔들렸다.

남궁현이 뒤로 빠지며

말을 잘랐다.

"봐라."

"넌 막는 게 아니라

부수고 있다."

"부술 수 있을 땐

좋은데,"

"못 부수는 날엔

그 자세 그대로 무너져."

훈련장 가장자리에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오십?

태산 선배가?"

"저 형은

항상 칠십 이상 아니었어?"

"오늘은 진짜

기본기 날이네."

남궁현이

격자선 앞을 발로 쳤다.

"파성호위진,

직선 진입 열 번."

"각 진입마다

오십 고정."

"힘으로 밀지 말고,

축으로 밀어."

태산이 자세를 잡았다.

왼발 반 칸 전진.

오른발 뒤축 고정.

어깨 낮춤.

출력창 32.

"시작."

첫 걸음.

발이 바닥을 누르자

골반이 따라 돌고,

허리가 밀어올린다.

원래라면 여기서

폭발시킨다.

태산은 이를 악물고

어깨 회전을 억눌렀다.

출력 48.

49.

51.

삐삐.

경고음 두 번.

"실패."

남궁현 목소리는

기계처럼 짧았다.

태산이 머리를 긁었다.

"아,

올라가버리네."

"다시."

둘째 진입.

이번엔 발을 천천히 넣고,

허리를 늦게 돌렸다.

출력 44.

46.

47.

끝점에서

중심이 무너졌다.

격자선 밖으로

발끝이 반 칸 밀렸다.

"실패."

"오십을 지켰지만,

축을 잃었다."

태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해서 생략한 게 많다.

후배도 찌르고,

사부도 찌른다.

그럼 답은 하나다.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다시.

셋째.

넷째.

다섯째.

오십 밑으로 붙이면

속도가 죽고,

속도를 살리면

오십을 넘긴다.

숫자와 몸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여섯 번째 진입 끝에서

태산 팔뚝 근육이

잘게 떨렸다.

출력을 내릴수록

충격이 밖으로 안 나가고

관절 안쪽에 남는다.

힘을 못 쓰는 게 아니라,

힘을 흘리는 법을

아직 모른다.

훈련장 뒤쪽에서

리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형 표정,

처음 본다."

"힘센 게 아니라

참는 게 더 빡센 얼굴."

핫토리 렌이

팔짱을 끼고 받았다.

"저게 진짜지.

출력은 누구나 올려.

내리는 건 기술이야."

쁘아카오가

턱을 쓸며 끼어들었다.

"태산,

지금이 더 위험."

"힘 풀리면

몸이 먼저 조급해진다."

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 한국말로

긴 문장 하는 거

처음 본다."

핫토리 렌이

피식 웃었다.

"그만큼

상황이 진짜라는 뜻이야."

태산은 여섯 번째에서

아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작정 누르면 안 된다.

누르기 전에

흐름을 바꿔야 한다.

발.

골반.

허리.

어깨.

연쇄는 유지하되,

진폭만 줄인다.

일곱 번째.

진입각 15도.

왼무릎 탄성 유지.

허리 회전 반 박자 지연.

출력 45.

47.

49.

끝까지 50 미만.

축도 안 무너졌다.

남궁현이 처음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다."

"다시."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여덟 번째는 성공.

아홉 번째 막판,

태산이 욕심을 내며

가속을 붙였다.

50.

52.

삑.

"실패."

태산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

거의 됐는데."

남궁현이

태산 바로 앞까지 와서

눈높이를 맞췄다.

"거의는 없다."

"전장에선

넘겼으면 넘긴 거다."

"네 몸이 강하다고,

기준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태산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태산은 돌진 대신

진입을 접었다 펴는

짧은 전환을 넣었다.

직선잠입식 보폭.

상체 흔들림 최소.

출력창이

46에서 49 사이를

왕복했다.

끝.

경고음이 울리지 않았다.

훈련장 뒤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됐다."

"진짜 오십에 묶었어."

남궁현이

팔찌를 풀어내며 말했다.

"좋아."

"근데 끝난 거 아니다."

"당분간 전부 오십.

스파링도,

실습도.

넘기면 무효."

태산이 눈을 크게 떴다.

"실전에서도요?"

"그래."

"그럼 제가

맞을 수도 있는데요."

남궁현이 돌아서며

짧게 던졌다.

"오늘도 맞았잖아."

"근데 배웠지."

태산은 잠깐 멈췄다가,

이내 웃었다.

"맞네요."

"오늘은

지는 쪽으로 이겼네."

남궁현 입꼬리가

거의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됐고,

다시."

태산이 다시 격자선 위에 섰다.

약해지는 훈련이

이렇게 어렵냐.

근데,

이걸 못 하면

다음 판은 못 연다.

팔찌 없는 손목이

묘하게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오늘의 무게였다.

남궁현이

출력판을 접으며 말했다.

"오늘 기록,

네가 직접 써."

"성공 횟수만 쓰지 말고

실패 원인도 옆에 붙여."

태산이 받아 적었다.

1회 초과출력.

2회 축 붕괴.

9회 욕심 가속.

"사부."

"이거 쓰니까

변명할 데가 없네요."

남궁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복기다."

"내일부터

아침마다 검사한다."

태산은 훈련봉을 어깨에 걸고

격자선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여기서 도망치면

언젠가 크게 꺾인다.

오늘은 오십.

내일도 오십.

오십을 내 걸로 만들면,

그다음은 내가 고른다.

남궁현이

멀리서 마지막으로 외쳤다.

"전태산."

"내일은

오십으로 파성호위진,

그리고 잔상분격 반속."

"빠른 기술을

느리게 정확히 못 하면,

빠르게도 못 한다."

태산은 고개를 돌려

엄지를 치켜들었다.

"네.

느리게 부숴보겠습니다."

남궁현이 즉시 잘랐다.

"부수지 마.

잇는 거다."

태산은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삼켰다.

"…네.

잇어보겠습니다."

*

저녁,

활빈당 아지트의

천장 팬이 느리게 돌았다.

테이블 위엔

지도 두 장과

경유지 로그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

위노나가 헤드셋을 벗고

눈을 찌푸렸다.

"경유지는 잡았는데,

본체는 전부 비어 있어요."

"미끼 서버만 남기고

껍데기를 갈아치웠어."

은명이

모니터를 당겨봤다.

점선으로 찍힌 경로가

중간에서 세 번 끊긴다.

위노나가

끊긴 지점을 확대했다.

첫 경유지는

동남아 공용 노드.

둘째는 북해 케이블 허브.

셋째는 학교 내부 더미망.

"거리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끊기는 타이밍은

완전히 같아."

"접속 43초 뒤,

반드시 껍데기만 남겨."

은명이 손가락으로

세 지점을 연결했다.

점이 아니라,

리듬이다.

천기는 장소를 숨기는 게 아니라

행동 리듬을 고정한다.

그 고정이 습관이면,

언젠가 잡힌다.

"좋아.

실패 로그는 저장해."

"실패도 패턴이다.

남겨."

위노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통은

지우자고 하지 않나?"

은명이 파일명 끝에

직접 태그를 붙였다.

decoy_repeat_v3.

"천기가 같은 수를

다시 쓰진 않겠지."

"근데,

비슷한 성격은 남겨."

"우린 그 성격을

잡아야 해."

위노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케이, 보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은명이 의자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한쪽에

짧은 목록을 붙였다.

1. 추적 리듬 복제.

2. 도술 비교 로그.

3. 출력 제한 루틴.

위노나가 목록을 보고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오늘 하루가

전부 숙제로 바뀌었네."

은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그런 날이

가장 위험하고,

가장 많이 남겨."

위노나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말했다.

"내일 회의 때

사람들 떠들면?"

"떠들게 둬."

"대신 마지막 10분은

내가 잡을게."

아지트 문이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어왔다.

전태산이었다.

훈련복 소매가

땀에 젖어 있었고,

오른손등엔 얇은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야,

라면 있냐?"

은명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있어."

"물은 네가 올려."

태산이 냉장고를 열며

웃었다.

"명령이 아주 자연스럽네."

"오늘 너도

명령 많이 들었지?"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냐."

태산이 냄비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 얼굴이랑

내 얼굴이 비슷하거든."

"사부한테

한 대 맞은 날 얼굴."

은명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맞진 않았어.

대신 문장 맞았다."

"출처보다 목적."

태산이 수도꼭지를 틀며

잠깐 멈췄다.

"오,

그거 좋다."

"나도 오늘

비슷한 거 들음."

"강해서 생략한 거,

이제 대가 낸다고."

냄비 바닥에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퍼졌다.

태산이 덧붙였다.

"금강불괴 오십 제한 걸렸어."

"넘기면 실패래."

은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한테 오십은

거의 족쇄네."

"그러니까.

거의 족쇄 맞지."

태산이 웃다가,

이번엔 진짜로 진지해졌다.

"근데 이상하게,

오십에 맞추니까

내 몸이 뭘 생략했는지 보이더라."

"힘으로 덮어둔 구멍이

다 튀어나와."

은명은 그 말을

바로 노트에 적었다.

힘이 구멍을 가린다.

제한이 구멍을 드러낸다.

은명은 메모 옆에

작은 화살표를 그었다.

천기 추적.

도술 검증.

체술 복기.

서로 다른 과제처럼 보여도,

결국 같은 줄기에 매달려 있다.

위노나가

지도 한 장을 접어 건넸다.

"내일 저녁,

영입 회의 한다며?"

"사람 모이면

이 로그도 같이 보자."

은명이 지도를 받아

테이블 구석에 놓았다.

"그래.

장난처럼 떠들어도 좋고,

가볍게 시작해도 좋아."

"근데 결론만큼은

가볍게 안 간다."

위노나가 모니터를 끄며

가방을 둘러맸다.

"난 먼저 간다.

로그는 새벽에 다시 돌릴게."

"그리고 두 사람.

라면 냄새로 서버실 점거 금지."

태산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약속 못 함."

위노나가 웃으며 나가고,

아지트엔 팬 소리와

가스불 소리만 남았다.

은명은 노트를 펼쳐

새 페이지를 열었다.

상단에 제목 없이,

질문 세 줄만 적었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

내 도술은

진짜 내 것인가.

내 몸의 힘을

내 기술로 증명하려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나.

은명은 질문 옆에

체크 박스를 세 개 그렸다.

첫째 박스는

천기 추적 로그.

둘째 박스는

허실역전 4단계.

셋째 박스는

태산 오십 루틴.

채워진 박스는

아직 하나도 없다.

은명은 펜을 멈추고

세 문장을 나란히 봤다.

문장은 셋.

근데 뿌리는 하나다.

빌려온 걸

내 것으로 만드는 법.

태산이 옆에서

컵 두 개를 내려놨다.

"뭐 적냐?"

은명이 노트를 반쯤 덮었다.

"숙제."

"공유는 아직 보류."

태산이 피식 웃었다.

"오케이.

보류는 인정."

"근데 너,

혼자 너무 오래 붙들면

노트부터 태우는 타입이잖아."

은명이 눈썹을 올렸다.

"사람을

방화범으로 보냐."

태산이 컵라면 뚜껑을

반쯤 열며 말했다.

"아니.

완벽주의자로 본다."

"완벽주의자는

가끔 불부터 붙여."

"그래.

너 원래 숙제 숨겨놓고 하잖아."

"근데 라면은 공유해라."

"면 불기 전에."

은명도

짧게 웃었다.

"그건 공유하지."

태산이 라면 그릇을

은명 쪽으로 밀며 물었다.

"내일 회의,

누구부터 부를 건데."

은명이 국물 온도를

한 번 확인하고 답했다.

"떠들어도

끝까지 남는 애들."

"그리고,

결국 책임을 지는 애들."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준 명확하네."

"난 힘 필요한 구간 맡고,

넌 판 짜."

은명이 젓가락으로

면을 짧게 끊었다.

"이번엔 판만 안 짠다."

"기준도 묶고,

실패 로그도 같이 묶어."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팀 전체의 질문으로 올릴 거다."

냄비가 끓어오르며

작은 증기가 천장 쪽으로 올랐다.

면이 풀리는 소리.

수프가 녹는 소리.

젓가락이 냄비 벽을 치는 소리.

평범한 저녁 소리 위로,

노트 속 세 질문이

은명 머릿속에서 다시 겹쳤다.

왜 인간인 채로

살아야 하나.

내 도술은

진짜 내 것인가.

내 몸의 힘을

내 기술로 증명하려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나.

아직 답은 없다.

대신,

다음 수련의 방향은

선명해졌다.

태산이 젓가락을 들고

면을 한번 들어 올렸다.

"야.

내일 사람들 모이면

결국 또 싸우겠지?"

은명이 라면 국물을

한 모금 삼킨 뒤 답했다.

"싸우겠지."

"근데 이번엔

누가 이기느냐보다,

뭘 기준으로 묶느냐가 먼저야."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준은

네가 정해."

"몸으로 확인하는 건

내가 할게."

은명은 대답 대신

노트를 완전히 덮었다.

아직 말할 때는 아니다.

하지만 곧,

같은 질문으로 앉게 된다.

그건 확실했다.

창밖 복도에서

야간 자율훈련 종이 울렸다.

누군가는 출력을 올리고,

누군가는 출력을 내린다.

은명은 그 소리를 들으며

노트 위를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오늘 붙잡은 질문 셋은,

내일부터 행동 셋이 된다.

끓는 물 소리와

펜 긁는 소리가 겹치는 밤.

둘의 수련은

이제 같은 축으로 돌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방향만큼은 정확했다.

둘은 말없이

라면을 끝까지 비웠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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