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이는 사람들
3월 마지막 주,
방과 후 아지트 창문엔
해가 길게 걸려 있었다.
활빈당 테이블 위에
태블릿 다섯 대와
종이 지도 두 장이 펼쳐졌다.
은명이 화이트보드에
세 줄을 먼저 적었다.
관찰.
분류.
합류 타이밍.
리오가 의자에 거꾸로 앉아
팔을 번쩍 들었다.
"오늘 안건이
벌써 무서운데?"
올가가 곧장 잘랐다.
"무서워도 들어.
네가 제일 필요해."
위노나가 헤드셋을 벗고
화면을 메인 모니터로 넘겼다.
신입 관찰 로그.
색깔 태그가
인물별로 나뉘어 있었다.
은명이 첫 항목을 눌렀다.
"전서린.
즉응력 높고,
제어 불안."
"현장 대응은 빠르다.
대신 출력 상한이
자주 깨진다."
아르준이
수치를 읽어 내려갔다.
"실습 기준,
입력 속도 상위 12%."
"과출력 발생 빈도,
동학년 평균의 2.4배."
리오가 손을 들었다.
"요약하면
천재형 폭탄?"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방치하면 사고,
붙잡으면 전력."
은명이 두 번째 항목을 열었다.
홍천무.
프레임에 고정된 동작들이
연속 사진처럼 떴다.
정자세.
짧은 호흡.
낭비 없는 축.
"홍천무.
완성도 높다.
그리고 독자 노선."
"권유하면 흔들릴 타입이 아니라,
스스로 증명할 때
움직이는 타입이야."
올가가 팔짱을 낀 채
영상 끝점을 짚었다.
"보법이 깔끔해.
힘으로 미는 게 아니라
축으로 자르는 쪽이네."
위노나가 세 번째 창을 띄웠다.
엘레나 관찰 로그였다.
"엘레나는
정보 수집 속도가 빨라요."
"질문 방식이
겉으론 예의인데,
실제로는 추출형."
"경계 대상."
아르준이 패드를 돌려
리스크 매트릭스를 띄웠다.
"단기 변수는 셋.
감정 유입,
정보 누수,
출력 폭주."
"세 축 다
동시에 관리해야 합니다."
은명이 숫자를 훑으며
짧게 덧붙였다.
"엘레나는 접촉해도 되지만,
주도권은 넘기지 않는다."
"질문을 받으면
답은 짧게."
"질문 세 번 넘어가면
대화 종료."
태산이 화면을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천무는
지금 안 온다."
모두 시선이
태산 쪽으로 모였다.
태산이 의자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친 채 이었다.
"저 녀석,
누가 불러서 들어오는 타입 아냐."
"스스로 해내고,
스스로 인정받아야
넘어오는 성격이야."
은명이 펜으로
보드 옆에 원을 그렸다.
"동의."
"성급히 당기면
깨진다."
"지금 필요한 건
속도보다 타이밍."
잠깐 멈춘 뒤,
작게 덧붙였다.
"사람도 전술이다."
리오가 눈을 굴렸다.
"문장이 멋있으면
왠지 무섭다니까."
올가가 웃음을 눌렀다.
"무서울 만해.
저 말 나온 날은
항상 바빴어."
은명은 보드에
결론 두 줄을 적었다.
홍천무: 영입 보류.
전서린: 비공식 참여.
아르준이 손가락으로
항목을 확인했다.
"비공식 참여의 범위는?"
"회의 청취,
보조 실습,
제어 루틴 동행."
"작전 최종권은
아직 없음."
위노나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짧게 받았다.
"권한 레벨 2.
읽기 가능,
집행 제한."
아르준이 회의록 아래
운용 항목을 더 붙였다.
"비공식 참여자는
작전 코드 접근 불가."
"실습 로그는
실명 기록 원칙."
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규칙이 있어야
사고가 줄어."
리오는 손을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질문 하나 있었는데
왠지 하면 혼날 분위기라
취소."
은명이 건조하게 답했다.
"잘했어.
분위기 파악도 능력이다."
그때,
문밖에서 의자 다리 긁히는 소리와
숨 고르는 소리가 겹쳤다.
은명이 문 쪽을 봤다.
"들어와."
문이 벌컥 열렸다.
전서린이 거의 뛰어들 듯
문턱을 넘었다.
"정식이든 비공식이든
저 참여해요!!!"
말끝의 느낌표가
공기를 통째로 흔들었다.
리오가 입을 막고
속삭였다.
"저 텐션으로
회의 들어오네……"
올가가 팔꿈치로 찔렀다.
"좋아.
우리가 없는 에너지다."
은명이 이마를 짚었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야."
전서린이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홍천무 영입 보류'부터요!"
"그리고
'사람도 전술'도요!"
"그리고
'권한 레벨 2'도요!"
위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문 방음,
내가 오늘 아침에 분명 고쳤는데."
전서린이 양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근데 진짜 열심히 할게요!"
은명이 의자를 돌려
서린과 눈높이를 맞췄다.
"열심히는
기본값이다."
"질문.
출력이 튀면 어떻게 할 거지?"
전서린이 즉답했다.
"멈추고,
호흡 네 박.
상한 재설정."
"실수 보고는?"
"즉시 공유.
숨기지 않겠습니다."
은명이 보드 아래에
짧게 체크를 그었다.
"좋아.
비공식 참여 승인."
"단,
조건 세 개."
전서린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은명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무단 청취 금지."
"로그 누락 금지."
"폭주 조짐 보이면
즉시 중지."
전서린이 곧장 끼어들었다.
"네! 네! 네!"
리오가 속삭였다.
"반성문보다
대답이 빠른데?"
은명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멋있어 보이려고
버티지 마."
전서린 표정이
잠깐 진지해졌다.
"……네.
안 버티고 말할게요."
전서린 눈이
진짜로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저 사고 안 내겠습니다!"
리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문장,
전 화에서도 들은 것 같은데."
전서린이 리오를 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이번엔 진짜예요!"
올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제일 불안해서
오히려 믿음 간다."
은명은 회의록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좋아.
오늘 결론은 셋."
"천무는 기다린다.
서린은 붙인다.
엘레나는 경계한다."
태산이 한 번 더 덧붙였다.
"그리고,
천무는 내가 본다."
"끌어오지 않고,
지켜본다."
은명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해."
은명은 보드 맨 아래에
내일 일정을 적었다.
점심 전,
서린 상한 루틴 체크.
점심 후,
합동훈련 변수 반영.
야간,
천기 경유지 재탐색.
위노나가 항목 옆에
작은 별표를 붙였다.
"야간 탐색은
내가 먼저 열어둘게."
"대신 둘 다
새벽 두 시 넘기면 꺼."
태산이 웃었다.
"그건 은명한테
효과 없는 경고잖아."
은명이 펜 뚜껑을 닫았다.
"그래서 너도 포함이야."
리오가 박수를 한번 쳤다.
"좋다.
회의 끝났으면
밥부터?"
올가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너는 하루 종일
밥 생각뿐이냐."
리오가 당당하게 답했다.
"전술에도 연료가 필요하지."
아르준이 웃으며
테이블 중앙에
간이 시뮬 화면을 켰다.
"그럼 연료 먹기 전에
3분 점검."
"비공식 참여자 테스트,
지금 해볼까요?"
전서린이 의자에서
바로 허리를 세웠다.
"가능합니다!"
화면에 가상 거점 두 개와
적 표식 세 개가 떴다.
아르준이 설명했다.
"조건.
네 출력 상한 60."
"아군 한 명이
중간에 호흡 깨짐."
"너는 15초 안에
선택해야 해."
전서린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우측 거점 포기."
"중앙 보호 먼저.
호흡 깨진 아군을
제어 루틴으로 고정."
"그다음 좌측 역습."
은명이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전서린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지금은 승점보다
붕괴 방지 우선."
"한 명이 무너지면
남은 둘도 흔들려요."
위노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좋네.
폭주형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보호 판단이 먼저다."
태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맞아.
힘 센 놈 한 명보다
안 무너지는 셋이 오래 가."
은명이 테스트 창을 닫았다.
"좋아.
비공식 유지."
"다음 주까지
같은 조건에서
판단 속도 2초 줄여."
전서린이 노트를 펴
굵게 체크했다.
"네!
2초 단축,
해볼게요!"
아지트 천장 팬이
느리게 한 바퀴를 돌았다.
진지한 표정들 사이로
전서린의 반짝이는 눈만
유난히 밝았다.
회의는 끝났고,
판은 한 칸 움직였다.
*
다음 날 점심,
A반 복도엔 도시락 냄새와
훈련복 땀 냄새가 같이 돌았다.
은명은 사물함 앞에서
태블릿을 읽고 있었다.
도술 실습 상한 루틴,
오전 데이터 요약,
오류 구간 표시.
그때,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탄환처럼 날아왔다.
"은명 선배!
오늘은 김치찌개예요!"
전서린이 양손 도시락 가방을 들고
거의 미끄러지듯 멈췄다.
뚜껑을 여는 순간
매운 향이 복도 공기를 밀어냈다.
은명이 한 걸음 물러섰다.
"……왜 매일 오는 거야."
전서린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밀었다.
"선배는 바빠서
점심 자주 거르잖아요."
"그리고 오늘은
두부 비율도 맞췄어요!"
은명은 도시락을 보다가,
전서린 얼굴을 보다가,
결국 한숨을 삼켰다.
존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존경치고 너무 가깝다.
설명이 안 되는 후배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드론 소리가
아주 작게 파고들었다.
제갈린이었다.
한 손엔 얇은 파일,
다른 손엔 데이터 패드.
"합동훈련 데이터.
확인해."
전서린이 바로 끼어들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에요!"
제갈린은 표정도 안 바뀐 채
파일을 한 칸 더 밀었다.
"도시락도 업무는 아니잖아."
전서린이 도시락을 들어
자기 쪽으로 끌었다.
"이건 회복 루틴입니다!"
"선배가 밥 안 먹으면
오후 효율이 떨어져요!"
제갈린이 짧게 답했다.
"효율 얘기라면,
데이터가 먼저야."
전서린이 즉시 반박했다.
"효율이면 더더욱
밥이 먼저죠!"
"빈속으로 회의하면
결론도 삐끗해요!"
제갈린의 드론 하나가
전서린 도시락 위에서
짧게 정지했다.
"메뉴 확인.
탄수 비율 높음."
"오후 집중도엔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어."
전서린이 도시락칸을
탁탁 가리켰다.
"그래서 단백질도 넣었어요!"
"오늘은
계란말이 두 줄!"
복도 뒤편에서
1학년 둘이 작게 수군거렸다.
"도시락 vs 보고서
또 시작이다."
"오늘은 누가 이겨?"
은명은 양손에
도시락과 파일이 동시에 들어온 걸 보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건조하게 말했다.
"둘 다 받을게.
도시락도,
데이터도."
"이제 끝."
전서린이 먼저 반응했다.
"그럼 한 입 먼저!"
제갈린이 즉시 잘랐다.
"그 전에 3페이지.
오전 팀 배치 변경 건."
은명이 미간을 눌렀다.
"제발 순서 좀……"
그때 복도 모서리를 돌던
태산이 장면을 보고 멈췄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오,
오늘도 삼각 도시락이네~"
은명이 눈을 감았다 뜨며
짜증을 눌렀다.
"지나가."
태산은 더 가까이 와서
도시락 뚜껑 안을 들여다봤다.
"김치찌개면 인정이지."
제갈린이 태산에게
파일 한 장을 건넸다.
"네 것도 있어.
오십 루틴 관찰표."
태산이 종이를 받아 들고
휘파람을 불었다.
"와,
점심에 칼로리랑 데이터
동시 섭취네."
전서린이 젓가락을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둘 다 중요하죠!"
"근데 지금은
한 입이 먼저예요!"
제갈린이 반박했다.
"한 입 전에
우선순위 확인."
전서린이 턱을 들었다.
"우선순위 1번은
선배 배고픔 해결."
제갈린이 패드를 접었다.
"우선순위 1번은
오후 훈련 변수 제거."
복도 양쪽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오가 멀리서 손뼉을 쳤다.
"좋아!
오늘 주제 토론
꽤 치열한데?"
올가가 리오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었다.
"불 구경 그만하고
너 점심이나 먹어."
은명은 결국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파일도 다시 폈다.
"정리."
"서린,
10분만 기다려."
"린,
핵심 세 줄만 말해."
둘이 동시에 답했다.
"네!"
"좋아."
은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회의실을 복도에 깔지."
태산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은명아,
너만 몰라."
"이미 복도가
회의실이야."
은명이 짧게 째려봤다.
"너도 말만 하지 말고
저 김치찌개 좀 덜어."
태산이 바로 숟가락을 집었다.
"명령 접수."
전서린이 행복한 얼굴로
국물칸을 내밀었다.
제갈린은 그 틈에
파일 첫 장을 넘기며
딱 필요한 말만 던졌다.
"오전 A반 합동,
도술 상한 위반 두 건.
둘 다 수정안 있음."
은명은 국물 한 숟갈을 뜨며
파일을 스캔했다.
"좋아.
이건 오후 전에 반영."
전서린이 맞장구쳤다.
"네! 제가 보조할게요!"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는 허용.
최종 결정은 은명."
전서린이 살짝 볼을 부풀렸다가
곧바로 풀었다.
"알겠어요.
대신 선배 밥은 제가 챙겨요."
은명이 결국 웃음을 새어 놓았다.
"그건……
적당히 해."
제갈린이 파일 끝장을 넘기며
짧게 말했다.
"오후 A반 실습 끝나면
10분 브리핑."
전서린이 바로 받았다.
"그럼 브리핑 전에
선배 간식 타임 5분."
태산이 양손을 들었다.
"잠깐.
누구 허락 받고
은명 일정표를 짜는 거냐?"
전서린과 제갈린이
동시에 말했다.
"제가요."
태산이 웃다가
은명을 툭 건드렸다.
"축하한다.
이제 너 일정은
민주주의로 굴러간다."
은명은 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작게 중얼거렸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밀화다."
존경이라고 했다.
효율이라고 했다.
이유는 다른데,
결과는 매번 내 앞에 모인다.
복도 종이 울렸다.
점심은 끝나가고,
도시락 냄새와 데이터 숫자가
이상하게 한 장면에 섞였다.
은명은 양손에
빈 숟가락과 파일을 든 채
자기 결론을 다시 확인했다.
정리하려 했고,
절반쯤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판은 더 단단해졌다.
*
같은 날 밤,
B반 훈련장 조명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환한 구역 밖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홍천무는
훈련장 중앙 선 위에 섰다.
교복 상의를 벗어
옆 의자에 반듯하게 접어 두고,
손목 권갑을 한 칸 조였다.
숨 하나.
자세 고정.
활빈팔식(活貧八式)
제1식·쇄(碎).
발바닥이 바닥을 붙잡고,
충격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
골반을 세운다.
허리 회전.
어깨 전개.
직선 정권.
퍽.
샌드백 표면이
한 박자 늦게 움푹 들어갔다.
홍천무는 멈추지 않았다.
제2식·절(截).
제3식·전(轉).
제4식·벽(壁).
제5식·추(追).
제6식·산(散).
제7식·인(引).
제8식·합(合).
형을 하나씩 바꾸면서도
호흡 길이는 일정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바닥에 땀이 떨어져도
리듬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흔 번째에서
호흡이 반 박자 밀렸다.
홍천무는 즉시 멈췄다.
변명 없이 초기 자세로 복귀.
다시 1식부터.
정석은 지루하지 않다.
지루함을 못 버티는 쪽이
먼저 무너질 뿐이다.
훈련장 벽 시계가
11시를 넘겼다.
홍천무는 손등의 땀을 닦고
손목 권갑 안쪽에
기공을 짧게 모았다.
철권무영·연.
피부가 은빛으로 빛나진 않았다.
대신 손마디 아래쪽이
무광 철처럼 단단해졌다.
그 상태로,
샌드백 옆에 세운
목재 말뚝을 쳤다.
탕.
말뚝 표면이 갈라지고,
홍천무 손목도
아주 작게 떨렸다.
권갑 안쪽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홍천무는 물병을 열어
손등에 한 번 붓고,
다시 권갑을 조였다.
금강불괴가 아니면
반동이 남는다.
그 반동을 견디는 게
내 수련이다.
홍천무는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낮 장면이 다시 올라왔다.
전태산의 웃음.
가벼운 농담.
무심한 어깨.
그리고,
자기 말.
순수 기술로도
넘을 수 있습니다.
홍천무가 눈을 떴다.
"다음에는,
체질 핑계를
못 대게 해드리겠습니다."
짧고 단호한 문장.
대답은 없었고,
그게 오히려 좋았다.
홍천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패배는 기록이다.
기록은 다음 수련의 지도다.
지도대로 올라간다.
제1식·쇄.
이번에는
발끝 각도를 반 치 바꿨다.
제2식·절.
팔꿈치 접힘을
한 박자 늦췄다.
작은 수정.
같은 반복.
하지만 누적은
결국 다른 결과를 만든다.
홍천무는 샌드백 줄을
정확히 중앙에 맞춰 세우고
마지막 세트를 시작했다.
제7식·인으로 빈틈을 열고,
한 박자 멈춘 뒤
제8식·합으로 마무리.
첫 시도는 타점이 높았다.
샌드백이 위로만 흔들렸다.
홍천무는 바로 기록했다.
타점 과상.
골반 회전 지연.
두 번째.
어깨 각을 낮추고
발뒤꿈치 접지를 늘렸다.
이번엔 수평으로 터졌다.
샌드백이 옆으로 길게 밀렸다.
홍천무는 짧게 숨을 내쉰 뒤
기록 끝에 한 줄을 더 붙였다.
체질이 아니라
축과 타점으로 깬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주먹 소리만큼 또렷했다.
훈련장 출입문 바깥,
복도를 지나던 발소리가 멈췄다.
전태산이었다.
아지트에서 돌아오던 길,
훈련장 불빛을 보고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홍천무의 반복이 보였다.
화려하진 않다.
대신 조금도 비지 않는다.
태산은 문을 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짧게 웃었다.
"좋은 후배네."
근처 순찰 경비가
태산을 보고 말했다.
"또 밤연습이야?
대단하네, 저 친구."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런 애가 오래 가요."
경비가 웃으며 덧붙였다.
"선배들도
옛날엔 저랬겠지?"
태산이 잠깐 생각했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난 저렇게는 못 했어요."
"저건
독한 성실 쪽이라."
"나는
독한 돌진 쪽이거든."
태산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복도 모서리를 돌 때,
오른손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오십 루틴의 잔진동.
낮에는 감췄고,
밤에는 남는다.
태산은 손을 한 번 쥐었다 펴고
주머니에 넣었다.
같은 시간,
기숙사 방에서
은명도 노트를 펼쳐 두고 있었다.
세 질문 옆,
체크 박스 세 개.
천기 추적.
허실역전 4단계.
태산 오십 루틴.
여전히 빈칸.
은명은 펜 끝으로
첫 칸 가장자리를 따라 그었다.
오늘은 못 채웠다.
대신 기준은 잡혔다.
은명은 노트 하단에
세 줄을 더 붙였다.
서린: 과출력 전 징후 단축어 정리.
태산: 오십 루틴 실패 지점 공유.
천무: 관찰만, 개입 금지.
말을 건 순간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
지금은 본다.
필요할 때만 당긴다.
창밖에서
야간 훈련 종료 종이
멀리서 울렸다.
홍천무는 주먹을 갈고,
태산은 손의 떨림을 숨기고,
은명은 질문 노트를 붙든다.
같은 밤,
다른 준비.
누군가는 기본기를 갈고,
누군가는 제한을 견디고,
누군가는 질문을 붙든다.
방식은 달라도
향하는 곳은 비슷했다.
빌려온 힘을
자기 언어로 바꾸는 일.
그 숙제가
다음 챕터의 첫 수업이 될 거다.
누가 먼저 답을 쓰든,
이번엔 서로의 등을 보게 된다.
그게,
이 밤의 조용한 합류였다.
웃음도 있었고,
이 갈림길도 있었다.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루지도 않는다.
간다.
그리고 모두,
한 단계 더 올라오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