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의 차렸더니 황녀가 책임지래
샹들리에가 머리 위에서 쏟아질 것처럼 빛났다.
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부터 했다.
저거, 떨어지면 대형 사고다.
그다음 생각은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여긴 어디지.
바닥은 얼굴이 비칠 만큼 반들반들한 대리석이었다. 천장에서는 금빛 촛대가 겹겹이 내려와 있었고, 사방에서는 바이올린과 플루트 소리가 흘렀다. 향수 냄새는 꽃밭에 머리를 박은 것처럼 진했다.
“……손님?”
유진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달랐다.
낯설게 낮고,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하얀 장갑. 길고 마른 손가락. 은실 자수가 박힌 소매. 검은 예복과 금장 단추, 목을 조이는 크라바트까지.
결혼식장 알바를 오래 하다 보면 옷차림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온다. 하객인지, 혼주인지, 신랑 친구인지, 축가 부르러 온 사람인지.
그런데 지금 자기 차림은 어디에도 넣기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신랑 입장 전 대기실에서 길 잃은 왕자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릿속이 찌릿했다.
기억이 밀려들었다.
루카스 에버렛.
에버렛 남작가의 차남.
사교계에서는 예법을 모르는 촌놈 영식으로 불리고, 원작에서는 황실 무도회에서 사고를 친 뒤 수도에서 쫓겨나는 인물.
그리고 지금 그 몸 안에 들어온 사람이 진유진이었다.
“아.”
루카스는 작게 숨을 삼켰다.
아주 정중하게 망했다.
원작의 루카스 에버렛은 첫 무도회에서 술을 흘리고, 황녀 앞에서 실언하고, 어느 공녀의 드레스 자락을 밟는다. 며칠 뒤에는 예절위원회에 끌려가 사교계 추방 판정을 받는다.
그 후로는 이름만 남는다.
‘그 무례한 에버렛 영식처럼 굴지 마세요.’
귀족 자녀 예절 수업의 나쁜 예시.
그게 지금 자기 이름이었다.
루카스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무도회장은 둥글었다. 중앙에서는 귀족 남녀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춤을 추고 있었다. 벽 쪽에는 부채를 든 숙녀들과 잔을 든 신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화는 낮고 웃음은 작았다. 모두가 서로를 보지 않는 척하면서, 사실은 전부 보고 있었다.
웨딩홀보다 심했다.
거기서는 최소한 밥 먹으러 온 사람이라도 있었다. 여기는 모두가 남의 실수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루카스는 입술을 얇게 눌렀다.
일단 조용히 있자.
튀지 말자.
누가 말을 걸면 웃고, 모르면 사과하고, 길 막으면 비켜 주고, 절대 술잔 근처에 가지 말자.
서비스직 생존 원칙은 시대와 세계를 가리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투명한 글자가 떠올랐다.
완벽한 예절서는 첫 줄부터 불길했다.
황실 무도회장에서는 작은 실수도 크게 번진다. 숙녀가 사람들 앞에서 곤란해지면 바로 도울 것.
뭐가?
“……친절하긴 한데.”
완벽한 예절서.
루카스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이름만 지나갔던 에버렛 가문의 낡은 유물. 예절을 모르는 영식에게 붙어 있었지만 끝내 제 역할을 못 했던 물건.
아무래도 지금은 제 역할을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한 줄이 더 떠올랐다. 사람들 앞에서 곤란한 숙녀를 모른 척하면 큰 결례라고 했다.
큰 결례라니.
얼마나 큰데.
누가 판단하는데.
루카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잔을 든 척했다. 잔은 비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술이 있었으면 원작대로 누군가에게 쏟았을지도 몰랐다.
숙녀가 사람들 앞에서 곤란해지는 일.
그 말이 걸렸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도회장 중앙, 붉은 장미 장식이 늘어진 계단 아래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 흰 장갑을 낀 손. 황실 문양이 박힌 연분홍 숄.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방식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높은 사람이다.
아니, 너무 높다.
세라피나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녀.
원작에서 루카스 에버렛이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
루카스는 즉시 시선을 내렸다.
보지 말자.
황녀는 보기만 해도 일이 된다.
그런데 세상은 왜 늘 보지 말아야 할 쪽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걸까.
세라피나가 계단을 내려오던 순간, 그녀의 숄 끝이 난간 장식에 살짝 걸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음악은 계속 흘렀고, 주변 귀족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보았다.
웨딩홀에서 신부 드레스가 의자 다리에 걸리는 장면을 서른 번쯤 본 사람의 눈이었다.
그 상태로 한 걸음 더 내려오면 중심이 무너진다.
그리고 황녀가 공개석상에서 넘어진다.
예절서가 이번에는 더 짧게 못을 박았다.
넘어지기 전에 받치고, 소란이 커지기 전에 막을 것.
‘즉시 접근?’
미쳤나.
저 사람 황녀잖아.
내가 접근하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망설이면 모른 척한 것이 된다.
아니, 나한테 왜 이렇게 박해가 심한데.
루카스는 속으로 울면서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은 잘 따라왔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지 않고, 웨딩홀 알바 시절 익힌 동선 감각으로 가장 덜 눈에 띄는 틈을 밟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라피나의 발끝이 다음 계단을 딛는 순간, 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황녀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사람들이 숨을 들이키기도 전이었다.
루카스는 손을 뻗었다.
먼저 숄 끝을 난간 장식에서 빼냈다. 그다음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 아래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팔꿈치 부근을 가볍게 지탱했다.
세라피나의 몸이 흔들림 없이 멈췄다.
부채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탁.
그 작은 소리가 무도회장 전체를 멈췄다.
음악만 남았다.
루카스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황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목 아래를 받치고 있었지만, 아무튼 너무 가깝다.
세라피나의 푸른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위험했다. 미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눈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눈이었다. 장난감인지, 적인지, 새로 발견한 재밌는 사고인지 금방 구분할 것 같은 눈.
루카스는 즉시 손을 떼려 했다.
아직 손을 떼면 다시 휘청일 수도 있었다.
왜 지금까지는 맞는 말만 하는데 전부 위험한 말이지.
그는 이를 악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난간 장식에 숄이 걸렸습니다.”
세라피나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걸 봤다고?”
“네. 넘어지실 뻔해서…….”
말끝을 흐리자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정말 너무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부채 뒤에서 웃던 숙녀들도, 잔을 기울이던 신사들도, 춤추던 사람들도 모두 멈춰 있었다.
웨딩홀이었다면 여기서 누군가 “괜찮으세요?” 하고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귀족들은 달려오지 않았다.
대신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세라피나는 아직 그의 손을 빼지 않았다.
아니, 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손끝에 힘을 조금 주었다.
“루카스 에버렛 경.”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는 심장이 한 번 내려앉았다.
이름을 안다.
이름까지 불렸으면 모르는 척도 못 한다.
“네, 전하.”
“내 이름은 알겠지?”
“세라피나 전하이십니다.”
“그럼 내가 무도회장에서 넘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알겠네.”
모른다.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다.
루카스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전하의 체면에 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주변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왜.
이것도 틀렸나.
세라피나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처음에는 아주 얇은 미소였다. 그러다 장난기가 섞였다. 조금 전까지 무도회장 전체를 지루하게 바라보던 얼굴이, 꼭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한 관객처럼 변했다.
“내 체면을 걱정했다라.”
“공개석상이니까요.”
말하고 나서 루카스는 바로 후회했다.
공개석상이니까요.
사무적이다. 그래도 괜찮다. 사무적인 말은 안전하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세라피나는 바닥에 떨어진 부채를 힐끗 보았다.
루카스도 따라 보았다.
주워야 하나? 주우면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안 주우면 무례인가?
부채를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역시 주워야 한다.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세라피나의 팔을 놓고,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부채를 주웠다. 완전히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그 정도 감각은 있었다. 웨딩홀에서도 신부 부케 주워 줄 때 과하면 이상하다.
그는 부채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전하의 부채입니다.”
세라피나는 바로 받지 않았다.
부채 아래를 받친 그의 두 손을 보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손으로?”
“소중한 물건으로 보여서요.”
이번에는 무도회장 여기저기에서 작은 술렁임이 번졌다.
루카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소중한 물건을 소중하게 드린다는데 왜.
세라피나는 마침내 부채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스쳤다. 루카스는 예의상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세라피나가 먼저 말했다.
“그대는 방금 내가 넘어지는 걸 막고, 내 체면을 지키고, 내 부채를 두 손으로 돌려주었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실 무도회장에서?”
“그 장소라서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라피나는 웃음을 참듯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더더욱.”
그녀가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루카스 경은 말을 참 위험하게 해.”
“죄송합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까지?”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루카스는 한 걸음 물러나고 싶었지만, 뒤에 누군가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원을 만들고 있었다. 춤의 원이 아니라 구경의 원이었다.
도망칠 틈이 없다.
“그럼 루카스 경은 내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도왔을까?”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죽는다.
루카스는 빠르게 계산했다. 전하의 체면은 살리고, 자신이 손댄 일은 인정하되, 더 이상 이상하게 들릴 말은 피해야 했다.
“전하께서 다치실 상황이었다면, 허락을 구할 시간이 없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세라피나의 부채가 멈췄다.
“허락보다 내 안전이 먼저였다?”
“그런 뜻이라기보다…….”
아니, 그런 뜻이 맞나?
하지만 그걸 이렇게 말하면 왜 이렇게 이상해지지?
루카스는 목이 말랐다.
“저는 그저, 오늘 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전하께 불편한 일이 없도록 수습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끝.
말이 끝나자마자 알았다.
이건 끝났다.
무도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음악을 연주하던 바이올린 한 대가 삑, 하고 아주 작게 미끄러졌다. 연주자는 바로 수습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 작은 삑 소리마저 모두가 들을 만큼 정적이 깊었다.
루카스는 속으로 두 손을 들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오늘 밤.
전하께.
불편한 일이 없도록.
제가 책임지고.
수습.
문장만 놓고 보면 고객 응대의 정석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고객센터가 아니었다.
황실 무도회장이었다.
세라피나의 눈이 둥글어졌다가, 곧 휘어졌다.
그녀는 부채를 접었다.
탁.
“루카스 경.”
“네, 전하.”
“방금 그 말, 무도회장에서 숙녀에게 해도 되는 말인지 알고 했을까?”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누가 좀 알려 주세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쯤 되면 예절서도 답을 못 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여기서 황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면 끝장이었다.
쓸모가 너무 정석이라 더 화가 난다.
루카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제가 무례를 범했다면, 그 책임도 제가 지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누군가 잔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루카스는 눈을 감고 싶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왜 또 썼을까.
세라피나는 깨진 잔 쪽을 보지도 않았다.
“재밌네.”
그 말은 작았지만, 무도회장 전체가 들었다.
“대부분은 내 앞에서 책임이라는 말을 피해. 책임은 무겁고, 황실 앞에서는 더 무거우니까.”
“전하, 오해입니다.”
“오해?”
“저는 정말로 전하께서 다치실까 봐 그랬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말하고 나니 이것도 이상했다.
다치실까 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처럼 들리지?
세라피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다른 의도 없이 황녀의 손을 잡고, 부채를 바치고, 오늘 밤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표현이 부적절했습니다.”
“아니. 꽤 적절했어.”
“네?”
“내가 오늘 밤 지루했거든.”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런데 방금부터 조금도 지루하지 않아.”
“그건 다행……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다행이라고 해도 돼.”
“전하.”
“왜? 또 그런 뜻이 아니었나?”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다.
맞다.
또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하면 더 망할 것 같았다.
세라피나는 그 침묵마저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흰 장갑을 낀 손.
무도회장에서 황녀가 손을 내민다.
그 의미를 모를 만큼 루카스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춤 신청.
아마도.
아니, 이 세계에서는 그보다 더할 수도 있다.
예절서가 없어도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황녀가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게 하면 끝장이었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라는 거잖아.
거절하면 무례.
받으면 오해.
가만히 있으면 숙녀를 기다리게 한 죄.
이건 선택지가 아니라 덫이었다.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세라피나의 손가락 아래에 자신의 손을 받쳤다. 잡는다기보다 모신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아마도.
세라피나의 눈이 다시 휘었다.
“끝까지 예의 바르네.”
“전하를 불편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을 책임지겠다고?”
“그 표현은 취소하고 싶습니다.”
“숙녀에게 한 말을 그렇게 쉽게 거두면 무례 아닌가?”
루카스는 예절서를 노려보고 싶었다.
예절서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배신자.
세라피나는 그를 무도회장 중앙으로 이끌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그녀의 손을 받치고 걸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그를 끌고 갔다.
사람들이 길을 열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황녀가 추방 예정 영식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영식은 방금 황녀의 밤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누가 봐도 공식 파트너 선언처럼 정리할 상황이었다.
제발 아무도 정리하지 말아 주세요.
루카스는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장미 장식 옆의 귀족 아가씨 하나가 이미 부채 뒤에서 입 모양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황녀의 밤을 책임진 신사.’
아니야.
제발 아니야.
세라피나가 중앙에 멈춰 섰다. 음악은 아직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다. 모두가 두 사람을 기다렸다.
“전하, 저는 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세라피나가 가볍게 말했다.
“오늘 밤은 루카스 경이 책임진다며.”
“그건 넘어지실 뻔한 상황에 한정해서…….”
“내가 다시 넘어질 수도 있잖아?”
그녀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또 잡아 줄 건가?”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황녀를 방치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루카스는 결국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답을 골랐다.
“전하께서 다치실 위험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세라피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들었지?”
그녀가 주변을 향해 말했다.
무도회장 전체가 아주 작게 술렁였다.
루카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방금 대답은 주변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황녀가 물었고.
그가 답했다.
모두가 들었다.
도망칠 구멍이 하나 더 사라졌다.
세라피나는 한층 가까이 섰다. 춤을 추기 위한 거리였다. 루카스는 예절서가 알려 주는 기본 자세를 따라 움직였다. 허리에 손을 대지 않고, 허공에 가까울 만큼 조심스럽게 위치를 잡았다.
“그렇게 멀리 잡으면 내가 또 넘어질 텐데.”
“가까이 잡으면 무례할까 봐…….”
“멀리 잡아 넘어지게 하는 건 예의고?”
루카스는 잠시 침묵했다.
세라피나가 웃었다.
그 웃음에 무도회장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누군가는 작게 웃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부채 뒤로 입을 가렸다.
루카스는 깨달았다.
황녀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그가 당황할수록 더 즐거워하고 있다.
“전하.”
“응.”
“혹시 저를 놀리고 계십니까?”
“이제 알았어?”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아. 늦게 알아차리는 사람도 귀엽거든.”
루카스는 발을 헛디딜 뻔했다.
세라피나가 손끝에 힘을 주어 그를 바로 세웠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잡았다.
무도회장에 다시 작은 술렁임이 퍼졌다.
“이번엔 내가 루카스 경을 구했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도 책임져야 하나?”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오면 끝장이다.
세라피나는 그 침묵까지 즐기는 듯 부드럽게 한 바퀴를 돌았다. 루카스는 거의 끌려가듯 따라갔다. 몸은 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못 따라갔다.
음악이 점점 커졌다.
멈춰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두 사람에게 붙어 있었다. 누구도 대놓고 보지는 않았다. 대신 모두가 보지 않는 척하며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황녀와 루카스 에버렛.
추방 예정 영식과 제국의 황녀.
첫 곡.
책임.
원작에서는 술잔 하나로 쫓겨났다.
이번엔 황녀의 밤을 맡은 사람처럼 보인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루카스는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낮게 말했다.
“전하, 정말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어떤 오해?”
“저는 전하께 특별한 의미를 담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의를 지키려 했을 뿐입니다.”
세라피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음악에 맞춰 걸음을 옮기며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장난기만 있던 눈이 아주 잠깐 차분해졌다.
“그저 예의라.”
“네.”
“루카스 경은 모르는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이곳에서는 모두가 예의를 말해. 그런데 정말로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어.”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장난기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누가 보는지부터 살피지. 내게 손을 내밀면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먼저 따져. 그런데 루카스 경은 먼저 움직였어. 내가 황녀라서가 아니라, 넘어질 것 같아서.”
루카스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사실이었다.
그 순간엔 황녀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넘어질 것 같아서 움직였다.
웨딩홀에서 신부가 넘어지려 하면 누구든 잡는다. 혼주가 쓰러지려 하면 바로 달려간다. 어린아이가 케이크 테이블에 부딪히려 하면 몸으로 막는다.
그게 일이었고, 습관이었고, 상식이었다.
세라피나는 그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봐. 또 대답을 아끼네.”
“아끼는 게 아니라…….”
“내 체면을 지켜 주는 거지?”
“전하.”
“알아. 루카스 경은 끝까지 내 체면을 지켜 주겠다는 거지.”
아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황녀는 이미 그렇게 들은 얼굴이었다.
음악이 마지막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세라피나는 한 바퀴 더 돌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무도회장 중앙에 멈췄다.
박수가 터졌다.
처음에는 예의상 박수였다. 곧 조금 더 커졌다. 황녀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웃어도 되는 순간이 되었다.
루카스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한다.
정중히 인사하고, 벽 쪽으로 빠지고, 가능하면 문 근처까지 이동해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
그는 손을 놓으려 했다.
세라피나가 놓아주지 않았다.
“루카스 경.”
“네, 전하.”
그녀는 무도회장 전체가 들을 만큼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나는 당신의 책임이에요.”
박수가 멎었다.
루카스도 멎었다.
세라피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도망치면 무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