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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은 청혼서가 아니잖아 일러스트

손수건은 청혼서가 아니잖아

“그러니 도망치면 무례겠죠?”

세라피나의 말이 무도회장 한가운데에 또렷하게 떨어졌다.

루카스는 웃지 못했다.

주변 귀족들도 웃지 못했다.

아까까지 박수를 치던 손들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누군가는 부채를 조금 내렸고, 누군가는 잔을 든 채 숨을 죽였다.

루카스는 세라피나가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황녀의 손.

자신의 손.

방금 끝난 춤.

그리고 도망치면 무례라는 말.

원작 루카스는 무례해서 추방당했다. 지금 루카스는 예의를 지키다가 도망도 못 가게 생겼다.

세상 참 균형 있다.

“전하.”

루카스는 최대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전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물러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했다.

아마도.

적어도 웨딩홀이라면 이 정도 말은 안전했다. 신부 측 어르신을 모시고 나서 한 걸음 빠질 때 쓰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라피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 명예를 위해 물러나겠다?”

“그렇게 말씀드린 뜻입니다.”

“루카스 경은 참 이상해.”

“말씀을 잘못 골랐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지 마. 칭찬이니까.”

칭찬이면 더 무섭다.

루카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자세는 숙인 고개였다. 눈을 마주치면 대화가 이어지고, 대화가 이어지면 말실수가 나온다.

그런데 세라피나는 고개 숙인 루카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처럼 한 걸음 가까이 왔다.

“내 신사님.”

무도회장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새었다.

루카스의 등줄기가 식었다.

내.

신사님.

호칭이 방금 한 단계 더 위험해졌다.

“전하, 그 호칭은…….”

“왜? 오늘 밤 나를 책임지기로 한 사람에게 너무 가벼운가?”

“그 표현은 제가 부적절하게 사용한 말입니다.”

“알아.”

세라피나가 웃었다.

“그래서 더 재밌어.”

루카스는 대답을 포기했다. 해명은 해명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해명이 장작이고, 귀족들의 시선은 불씨였다.

그때, 눈앞에 익숙한 글자가 떠올랐다.

예절서는 이번에도 정석만 말했다. 황녀의 체면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중히 물러날 것.

그걸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

루카스는 예절서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허공을 노려보는 영식은 무례한 영식보다 더 위험해 보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잠시 벽 쪽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바로 응하겠습니다.”

세라피나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필요하면 바로 온다?”

아.

왜 또 그렇게 들리지.

“무도회 예법상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법상.”

“예법상으로는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좋아. 그럼 예법상 세 걸음만 봐줄게.”

세라피나는 마침내 손을 놓았다.

루카스는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뛰면 끝이다. 귀족 무도회장에서 뛰는 남자는 범인 아니면 신랑이다.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정말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보지 않는 척 보고 있었다. 부채 뒤, 잔 너머, 파트너의 어깨 위, 장미 기둥 그림자 사이. 시선들이 얇은 실처럼 루카스의 어깨에 감겼다.

웨딩홀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신랑이 축가를 망쳤을 때가 아니었다.

그걸 친척들이 전부 들었을 때였다.

지금 무도회장은 그 친척이 백 명쯤 있는 느낌이었다.

루카스는 벽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최대한 중앙을 피하고, 사람 사이를 가르지 않고, 누구의 드레스 자락도 밟지 않으며, 술잔을 든 팔꿈치와 팔꿈치 사이 빈틈을 통과했다.

몸은 생각보다 잘 움직였다.

원래 루카스 에버렛의 몸이 귀족 교육을 아예 안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문제는 원작의 루카스가 그 교육을 써먹지 못했다는 점이고, 지금의 루카스는 써먹을수록 사건이 커진다는 점이었다.

“저분이 그 에버렛 영식?”

“황녀 전하께서 직접 손을…….”

“오늘 밤을 책임진다고 했다죠?”

“쉿. 들립니다.”

다 들립니다.

루카스는 못 들은 척했다. 서비스직의 기본은 귀가 있어도 없는 척하는 것이다. 손님이 흘린 말, 어르신이 틀린 이름, 신부 친구의 전 남자친구 얘기. 듣고도 못 들은 척해야 살아남는다.

그는 장미 장식이 늘어진 벽 쪽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이제 숨만 고르면 된다.

그때였다.

시야 끝에 흰 드레스 자락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귀족 영애의 드레스라고 생각했다. 무도회장에는 흰색, 분홍색, 연보라색 드레스가 넘쳤다. 하지만 그 드레스는 달랐다.

너무 완벽했다.

어깨선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치맛자락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정확했다. 목걸이의 진주 간격마저 일정해 보였다. 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었다.

아이리스 로제하임.

공작가의 장녀.

원작에서 완벽한 예법과 차가운 품위로 유명한 공녀.

루카스 에버렛이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사람 목록에 방금 세라피나 바로 아래로 들어갈 인물이었다.

루카스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려 했다.

보지 말자.

공녀도 보기만 해도 일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이리스의 허리 뒤쪽, 은실로 묶인 작은 장식 리본 하나가 장미 기둥의 가느다란 금속 잎에 걸려 있었다. 아주 살짝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드레스 장식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알았다.

저건 한 걸음만 잘못 움직이면 풀린다.

풀리면 드레스의 옆선이 흐트러지고, 뒤쪽 장식이 축 늘어진다. 큰 사고는 아닐지 몰라도, 완벽하기로 유명한 공녀에게는 충분히 큰 흠이었다.

웨딩홀에서 신부 허리 장식이 풀릴 때와 비슷했다.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은 친절해지지 않는다. 먼저 본 사람이 입을 가리고, 두 번째로 본 사람이 옆 사람을 찌르고, 세 번째로 본 사람이 평생 기억한다.

아이리스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아니, 조금 이상했다.

그녀의 손끝이 부채를 든 채로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어깨는 그대로인데, 시선만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

직접 손을 뒤로 가져가면 모두가 본다. 하녀를 부르면 더 눈에 띈다. 그대로 있자니 누군가 먼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루카스의 머릿속에 예절서가 켜졌다.

공개적으로 지적하지 말 것. 시선을 가리고, 당사자가 직접 정돈할 수 있게 도울 것.

허락 없이 손대면 큰 결례.

알겠다.

손대지 말고, 가리고, 알려 준다.

간단하다.

문제는 상대가 공녀라는 점뿐이다.

루카스는 잠깐 멈췄다. 여기서 그냥 지나가면 안전하다. 적어도 자기한테는 안전하다. 아이리스가 난처해져도 그건 아이리스의 문제고, 자신은 이제 막 황녀 사건에서 빠져나온 참이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장식이 조금 더 팽팽해졌다.

공녀가 한 걸음만 움직이면 모두가 보게 된다.

루카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서비스직 생존 원칙 두 번째.

사고가 보였으면 못 본 척하지 말 것.

못 본 척한 사고는 꼭 더 크게 돌아온다.

그는 품 안쪽을 더듬었다. 다행히 손수건이 있었다. 새하얀 천, 모서리에 에버렛 가문의 작은 은색 문양이 수놓인 손수건.

원작 루카스가 왜 이런 걸 들고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쓸모가 있었다.

루카스는 아이리스에게 곧장 다가가지 않았다. 먼저 옆에 있던 장미 장식 아래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러고는 주변 시선을 가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이리스의 뒤쪽 장식을 정확히 가릴 만큼 가까운 위치에 섰다.

아이리스의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차갑다.

정확하다.

그리고 지금 굉장히 불편해 보인다.

“에버렛 경.”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깨끗했다.

“무슨 용건이시죠?”

루카스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로제하임 공녀님.”

“실례하겠다는 말로 모든 실례가 허락되지는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무섭게 맞는 말이다.

루카스는 손수건을 펼쳤다. 그리고 아이리스와 장미 기둥 사이, 딱 장식이 걸린 부분을 자연스럽게 가렸다. 마치 벽 쪽 촛농이 튀지 않게 막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뒤쪽 장식이 장미 잎에 걸렸습니다. 직접 움직이시면 더 눈에 띌 수 있습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정말 아주 작게.

다른 사람이라면 못 봤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봤다. 웨딩홀 알바는 신부가 웃으며 화났는지, 혼주가 웃으며 울고 있는지, 축가 가수가 웃으며 도망치고 싶은지 구분해야 했다.

아이리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품위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걸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공개되기 전에 정돈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 사람으로 보였나요?”

“아닙니다.”

루카스는 즉시 대답했다.

“알고 계신데 움직이기 어려우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리스의 부채가 멈췄다.

주변의 공기도 멈춘 것 같았다.

루카스는 뒤늦게 자신의 말을 되짚었다.

알고 계신데 움직이기 어려우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말, 괜찮나?

상대의 곤란을 알아봤다는 말이다. 동시에 곤란을 봤지만 떠들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섬세한 것 같기도 하다.

아이리스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에버렛 경은 방금 전까지 황녀 전하와 춤을 추고 계셨습니다.”

“네.”

“그런데 지금은 제 드레스 뒤쪽을 보고 계셨군요.”

끝났다.

문장만 놓고 보면 변태다.

루카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뜻입니까?”

“시선이 갔다기보다, 장식이 걸린 게 먼저 보여서…… 아니, 이 말도 이상합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본 겁니다.”

말할수록 더 이상하다.

아이리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막고 싶었습니다.”

“제 드레스가 문제였나요?”

“아닙니다. 공녀님의 드레스는 완벽했습니다. 그래서 더 눈에 띌까 봐 말씀드렸습니다.”

주변에서 누군가 부채를 탁 접었다.

왜.

칭찬하면 안 되나.

루카스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아이리스는 손수건을 보았다. 루카스가 펼쳐 든 하얀 천이 장미 장식과 자신의 허리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그 손수건은 무엇입니까?”

“가림막입니다.”

“가림막.”

“네. 공녀님께서 직접 장식을 빼실 동안, 사람들이 덜 보게 하려던 겁니다.”

아이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루카스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뒤로 움직였다. 루카스는 시선을 완전히 옆으로 돌렸다. 절대 보지 않는다. 보는 순간 다시 문제가 된다.

손끝이 장식에 닿는 작은 소리가 났다.

사락.

은실 리본이 금속 장미 잎에서 풀려났다.

아이리스는 드레스 옆선을 자연스럽게 정돈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우아했다. 만약 루카스가 손수건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 동작마저 완벽한 춤의 일부처럼 보였을 것이다.

“끝났습니다.”

루카스는 그제야 손수건을 접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리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수건.”

“아, 필요하시면 사용하십시오.”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뒤, 루카스는 바로 후회했다.

필요하시면 사용하십시오.

너무 편하게 말했다.

공녀에게.

가문 문양이 있는 손수건을.

아이리스의 시선이 손수건 모서리에 닿았다. 에버렛 가문의 은색 문양. 작고 낡았지만 분명히 가문 표식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이것이 에버렛 가문의 손수건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네. 제 손수건입니다.”

“그걸 제게 주시겠다고요?”

“임시로 빌려드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 사람들 앞.

루카스는 무도회장의 눈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공녀님께서 곤란하신 상황이었으니까요.”

“제 곤란이 에버렛 경의 손수건을 꺼낼 만큼 중요했나요?”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귀끝이 아주 희미하게 붉었다.

루카스는 그것을 보고 더 혼란스러워졌다. 화난 건가. 부끄러운 건가. 둘 다인가. 웨딩홀에서는 보통 신부 어머니가 저런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티 내기 싫을 때.

“공녀님의 체면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안전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데 아이리스가 숨을 멈췄다.

주변의 몇몇 귀족도 함께 멈췄다.

세라피나가 멀리서 부채 뒤로 웃는 것이 보였다.

루카스는 그 웃음을 보고 확신했다.

망했다.

아이리스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끝은 차분했지만, 천을 쥔 힘은 조금 강했다.

“제 체면이 먼저라.”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의 밤을 책임진 직후에, 제 체면까지 먼저 챙기시는군요.”

“그 표현은 연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결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해가 생길 수 있어서입니다.”

“이미 생긴 오해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앞으로 생길 오해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둘 다요.

루카스는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는 공녀님의 명예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리스의 눈빛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이상하다.

분명 방금 말은 좋은 말이다. 명예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말. 누구에게 해도 무난한 말. 고객에게는 물론이고, 하객에게도, 혼주에게도, 사회자에게도 쓸 수 있는 말.

그런데 이곳에서는 왜 모든 말이 결혼식 축사처럼 들리는 걸까.

아이리스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에버렛 경.”

“네, 공녀님.”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그럼 정말 모르고 계시는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아이리스는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흰 천 위의 은색 문양이 촛빛을 받아 작게 빛났다.

“사교계에서 가문 문양이 있는 손수건을 숙녀에게 건네는 일은 가볍지 않습니다.”

루카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예절서.

이건 왜 안 알려 줬냐.

위험하다는 건 알겠다.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지만 예절서가 알려 준 건 하나뿐이었다. 이미 건넨 물건을 성급히 회수하지 말 것.

그건 나도 알아.

숙녀가 쥔 손수건을 빼앗는 짓은 더 큰 결례라는 것쯤은.

강제로 뺏을 생각 없었다.

정말 없었다.

루카스는 침착하려 애썼다.

“공녀님, 저는 정말로 다른 뜻을 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장식을 가리려던 겁니다.”

아이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드레스 장식을 가리기 위해, 가문 문양이 있는 손수건을 꺼내셨다.”

“잠시 빌려드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능하면 사람들이 보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 보게 만들었습니다.”

루카스는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다.

왜 이 사람들은 맞는 말만 무섭게 할까.

그때 뒤쪽에서 빠른 속삭임이 들렸다.

“황녀의 밤 다음은 공녀의 손수건이라니.”

“장미일보 기자는 어디 있죠?”

“이미 적고 있습니다.”

루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장미 장식 옆, 작은 수첩을 든 남자가 있었다. 그는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에버렛 경. 사실만 씁니다.”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제목도 정중하게 뽑겠습니다.”

“제목을 뽑지 말아 주십시오.”

“부정하실수록 제목이 좋아집니다.”

루카스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기자의 미소가 칼보다 날카로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아이리스는 기자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을 곱게 접었다. 돌려주려는 동작이라고 생각한 루카스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손수건을 자신의 부채 위에 올렸다.

돌려주지 않았다.

“공녀님?”

“빌려주신 것이라 하셨지요.”

“네.”

“그럼 이 일이 정리되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 것 아닙니까?”

“아직 아닙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아직 장미일보가 눈앞에서 제목을 고르고 있으니까요.”

루카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런 뜻은 없다.

정말로 없다.

손수건은 손수건이다. 웨딩홀에서 손수건은 눈물 닦고, 커피 닦고, 급하면 드레스 얼룩 가리는 천이다.

그런데 이 세계의 손수건은 왜 혼자 혼인신고서까지 겸하려 드는가.

세라피나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아이리스와 루카스를 번갈아 보며 즐겁게 웃었다.

“루카스 경.”

“전하.”

“세 걸음보다 멀리 갔는데, 나는 봐줄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대신 공녀의 손수건 사건은 내가 못 본 척하기 어렵겠네.”

“그런 일은 아닙니다.”

“그럼 뭐야?”

“예절상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세라피나가 활짝 웃었다.

“또 예절.”

아이리스의 시선이 세라피나에게 향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얇은 긴장이 생겼다. 웃는 황녀와 차가운 공녀. 한쪽은 장난스럽고, 한쪽은 완벽하게 꼿꼿했다.

루카스는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왜 나는 항상 중앙에 서게 되는 걸까.

아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보셨습니까?”

“응. 아주 잘 봤어. 내 신사님이 공녀의 체면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가려 주는지.”

“내 신사님이라 하셨습니까?”

“오늘 밤은 내 책임이라고 했거든.”

“에버렛 경.”

아이리스가 루카스를 보았다.

“그 말도 의미 없이 하신 겁니까?”

“그 말은 정말 수습하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루카스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세라피나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이리스의 눈매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아무 뜻 없이 황녀 전하의 밤을 책임지고, 제 체면까지 가리셨다.”

“말씀만 들으면 제가 굉장히 이상한 사람 같습니다.”

“말씀만 들으면 그렇습니다.”

정확해서 더 아프다.

루카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손수건은 편하실 때 돌려주셔도 됩니다. 다만 정말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아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접힌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흰 천은 그녀의 부채 위에서 작게 빛났다. 손끝이 문양을 한 번 스쳤다.

차갑던 표정이 아주 조금 흐트러졌다.

완벽한 사람이 실수 직전에 구해졌을 때의 표정.

고맙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있고, 화내기엔 상대가 너무 조심스러웠고, 모른 척하기엔 이미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불필요한 배려입니다.”

아이리스가 말했다.

“불필요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손수건을 조금 더 단단히 접었다.

“다음부터는 제게 먼저 말씀하십시오.”

루카스는 잠깐 안도했다.

통했다.

이번에는 정말 통했다.

“다음부터는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미일보 기자가 그 순간 펜을 멈췄다.

“좋습니다. ‘다음부터는 먼저’라면 후속 만남을 약속하신 셈으로…….”

“그렇게 쓰지 마십시오.”

“정중한 부정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안 끝났구나.

아이리스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주변 사람들은 듣지 못한 척하며 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손수건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보관이요?”

“가문 문양이 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돌려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세탁해서 돌려주신다는 뜻입니까?”

아이리스의 귀끝이 조금 더 붉어졌다.

“에버렛 경은 정말…….”

그녀는 말을 멈췄다.

루카스는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세라피나는 아주 즐거운 얼굴로 기다렸다.

장미일보 기자는 펜 끝을 종이에 대고 기다렸다.

아이리스는 손수건을 가슴 가까이에 두었다. 드레스 장식은 이제 완벽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큼은 조금 전보다 완벽하지 않았다.

그 작은 흔들림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에버렛 경.”

“네, 공녀님.”

아이리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장미일보 기자가 숨도 쉬지 않고 펜을 들었다.

“정식 확인, 들어갑니다.”

루카스는 그제야 손수건 한 장이 사람을 이렇게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아이리스가 말했다.

“이 의미를 알고 주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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