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기 완료 딱지
강유찬은 등 뒤로 손짓해 인부들을 물렸다. 냥믹의 맑은 흰빛이 금빛 대신 보관함 테두리에 머물렀다. 위험 신호는 옅었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선명했다.
“오염 농도는 낮습니다. 그래도 안전거리 확보하죠.”
박성준 대리가 한서 인력들을 통제했다. 모두의 시선이 강철 보관함 하나에 쏠렸다. `한서 폐기 완료`라는 붉은 딱지가 선명했다. 그걸 발견한 직후, 냥믹은 보관함 전체에 맑은 흰빛 테두리를 둘렀었다. 유찬은 일단 `[보류 후 확인]` 라벨을 붙여두었다.
이제 확인할 시간이었다.
“포포.”
유찬의 부름에 젤리 같은 몸이 가볍게 떨렸다. 며칠간 이어진 제2구역 정화 작업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유찬은 보관함의 육중한 잠금장치를 가리켰다.
“저기만.”
다른 곳은 손댈 필요 없었다. 잠금장치 표면에만 거무죽죽한 오염의 잔재가 굳어 있었다. 포포가 통통 튀어 가 잠금장치에 몸을 붙였다. 포포는 혀를 내밀어 표면을 핥듯, 검은 찌꺼기만 얇게 걷어냈다.
뽀글.
작은 기포 소리와 함께 오염물이 정화되자, 굳어 있던 금속 걸쇠가 제 색을 드러냈다.
철컥.
유찬이 직접 걸쇠를 당겼다. 무거운 강철 뚜껑이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안쪽을 확인한 현장 인부들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스쳤다.
“……뭐야, 이게 다야?”
“장비잖아. 그것도 구형인데.”
보관함 안에는 화려한 보물이나 희귀 재료가 없었다. 낡고 투박한 기계장치들뿐이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가득한 접이식 차단막 발생기, 낡은 방벽 릴레이 몇 개, 머리가 닳아빠진 고정핀 세트가 전부였다.
한서의 폐기물 관리 담당인 서기태 부장이 코웃음 쳤다.
“허. 나는 또 뭐라고. 이런 고물들 때문에 그 난리를 친 겁니까?”
서기태는 유찬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비아냥거렸다.
“이걸로 돈이 되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구형 장비를 돈 주고 삽니까? 운반비가 더 나오겠네.”
그 말대로였다. 시장에 내다 팔아봤자 제대로 된 값을 받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폐기 완료` 딱지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찬은 보관함 안쪽을 천천히 훑었다. 냥믹의 신호는 고철 더미 전체에 머물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어.’
그때 냥믹의 맑은 흰빛이 다시 나타났다. 빛은 보관함 안의 다른 부품들을 지나쳐 접이식 차단막 발생기 테두리에만 얇게 머물렀다. 유찬의 시선도 그쪽에서 멈췄다.
유찬이 차단막 발생기를 유심히 살피려는데, 등 뒤에서 까악스의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까악, 까악.
까악스가 보관함 뒤편의 바닥으로 날아들어, 검은 깃털 하나를 떨어뜨렸다. 깃털은 바닥의 한 지점에 박히지 않고, 먼지 위를 짧게 쓸며 빠져나온 길처럼 미끄러졌다.
유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돌아온 길이야.’
까악스가 짚어준 길. 냥믹이 지목한 장비. 두 가지 단서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유찬은 시선을 돌려 제2구역의 경계선을 보았다. 지금은 임시 방벽과 통제선으로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는 구역.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오염 문제 때문에 한서가 골치를 앓고 있는 제외구역들.
‘팔아서 끝낼 물건은 아니야.’
이 장비는 이 현장에서 직접 써야 했다. 제2구역의 운영비를 줄여줄 장비였다.
유찬은 한서 측이 들고 온 제2구역 운영 비용 계획서를 떠올렸다. 그중에는 ‘제외구역 오염 확산 방지 및 격리 비용’ 항목이 매달 900만 원씩 책정되어 있었다.
‘저 차단막 발생기를 제2구역과 제외구역 사이에 설치하면…….’
오염 확산을 막고, 그 비용을 고스란히 줄일 수 있다. 더불어 골치 아픈 4, 7, 11구역의 오염 책임을 제2구역 작업과 섞으려는 시도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경계선이 될 수 있었다.
시장 판매가는 600만 원 선에서 멈추겠지만, 제대로 세우면 월 900만 원짜리 지출을 막을 수 있다.
서기태가 다시 빈정거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 없던 가치라도 생깁니까? 시간 없으니 빨리 결정하죠. 저런 고물은 다시 폐기장으로 보내는 게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박 대리님?”
박성준 대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유찬을 바라봤다. 유찬은 대답 대신 몸을 숙여 보관함에서 차단막 발생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새 라벨을 꺼내 붙였다.
`[판매 보류 / 현장 장착 확인]`
서기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제2구역 작업이 끝난 뒤, 4구역과 7구역, 11구역의 오염 폐기물 일부를 이곳의 회수품과 섞어 처리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저 낡은 차단막이 두 구역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 버리면, 그 꼼수는 불가능해진다.
“강유찬 씨, 지금 뭘…….”
서기태가 말을 끊고 바로 몰아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4구역이랑 7구역, 11구역 폐기물도 이참에 같이 처리합시다. 어차피 다 우리 한서 책임 구역이고, 차량 한 번 더 부르는 것도 돈 아닙니까.”
제2구역 회수품과 다른 구역 오염물을 한데 묶어 책임을 희석하려는 속셈이었다. 인부 한두 명이 트럭 적재 동선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유찬은 서기태를 무시했다. 그는 차단막 발생기를 팔 생각이 없었다. 이걸 제2구역과 제외구역을 나누는 임시 경계선에 설치해야 했다.
유찬은 박성준 대리를 향해 말했다.
“박성준 씨, 지금부터 현장 기록을 부탁드립니다. 이쪽은 `제2구역 회수품`, 저쪽은 `제외구역 오염물`. 그리고 제 손에 있는 이 장비는 `한서 자산 현장 사용`으로 명시해주시죠.”
라벨을 붙여 물리적으로 구역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공식 기록을 남겨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박성준이 즉시 휴대용 카메라를 켜고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서기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박성준은 못 본 척했다.
유찬은 까악스가 깃털로 그었던 자국을 따라 걸었다. 깃털 자국은 위험한 쪽을 가리키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처럼 먼지 위에 남아 있었다. 그는 먼지 쌓인 바닥에 발뒤꿈치로 선을 그었다.
“이 선 안쪽으로만 물건을 옮겨 주십시오. 저 차단막을 여기에 설치할 겁니다.”
유찬이 차단막 발생기를 내려놓자, 서기태가 길길이 날뛰었다.
“당신 멋대로 한서 자산에 손대지 마! 그거 폐기 딱지 붙은 고물이야! 작동도 안 될 텐데, 여기서 오작동이라도 일으키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
낡은 장비는 처음에는 버벅거렸다. 유찬이 전원을 연결했지만, 방벽 릴레이에서 미세한 스파크만 튀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서기태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죽 웃었다. 그는 턱짓으로 자기 인부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시간만 버렸구먼. 어이, 거기 김 씨, 박 씨. 4, 7구역 상자부터 실어. 어차피 다 폐기물인데 순서가 뭔 상관이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부 두 명이 나섰다. 한 명은 노란색 라벨이 붙은 상자를, 다른 한 명은 적색 라벨이 붙은 상자를 제2구역 수거 트럭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지정 구역이 다른 폐기물을 한데 섞어버리려는 속셈이었다.
유찬은 소리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가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상자를 손으로 꾹 눌러 멈췄다.
“아직 제2구역 작업 안 끝났습니다.”
그는 품에서 ‘손대지 않음’이라고 적힌 비닐 라벨을 꺼내 상자에 다시 붙였다. 질긴 공업용 접착테이프였다. 그러고는 박성준을 돌아보았다.
“박성준 씨. 저 라벨하고 트럭 번호판, 영상으로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박성준이 허둥지둥 휴대 단말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 렌즈가 붉은색 경고 라벨과 제2구역 수거 트럭의 번호판을 차례로 화면에 담았다. 증거가 기록되고 있었다.
유찬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까악스가 소각로나 폐기물 더미를 오갈 때 남긴 짧은 발자국이 흙먼지 위에 선명했다. 그 자국은 지금 인부들이 상자를 밀어 온 방향과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트럭이 폐기물 더미에 더 가까이 붙었다는 뜻이다.
바로 그때 유찬의 어깨에 올라탄 냥믹이 가느다란 빛을 토했다. 맑은 흰빛이 방벽 발생기의 낡은 접점 둘레에 얇게 머물렀다. 냥믹은 접점 위치만 알려주듯 꼬리 끝을 작게 흔들었다.
‘이 장비가 켜지든 말든 상관없어.’
유찬은 생각했다.
‘지금 저놈들이 하려는 ‘섞기’부터 막아야 한다. 이걸 막지 못하면, 정제할 권리도, 책임을 물을 근거도 전부 사라진다.’
장비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현장에서의 분리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서기태가 유찬의 단호한 눈빛과 박성준의 카메라를 번갈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계획이 틀어지자 짜증이 솟구쳤다.
“거 보라고!”
서기태의 고함이 폐기장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현장을 휘저었다.
“시간만 날렸잖아! 이딴 고물에 대체 얼마나 더 매달릴 거야! 당장 폐기장으로 돌려보내!”
그의 고함에 작업자 한 명이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 부장님. 그럼 구역별로 상자에 붙여 둔 임시 테이프는 도로 뗄까요?”
작업자의 손끝이 4구역, 7구역, 11구역으로 나뉜 상자 더미를 향했다. 저 표시가 사라지면, 몇 시간에 걸친 분류 작업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폐기품을 다시 원상 복구할 방법은 없다. 현장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모두의 시선이 다음 지시를 내릴 서기태와 박성준에게 향했다.
박성준은 태블릿을 든 채, 서기태의 독단을 정면으로 무시했다. 그는 유찬에게 한 걸음 다가가 정중히 물었다.
“강유찬 씨, 현장 상황 기록은 계속 진행할까요? 그리고 입구에서 대기 중인 운송 트럭 라인은 어떻게 할까요?”
서기태의 어깨가 노골적으로 움찔거렸다. 자기 권한을 건드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성준은 유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현장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누구인지 못 박는 질문이었다.
유찬은 대답 대신 먼저 행동했다. 그는 조용히 무릎을 굽혀 차단막 발생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의 흙먼지가 작업복 바지에 묻어났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트럭 라인, 그대로 대기.”
모두의 움직임을 붙드는 낮은 목소리였다.
“작업자분들도 테이프 안쪽으로 절대 넘어오지 마십시오. 제가 먼저 접점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그 말에 서기태가 뭐라 반박하려 입을 열었지만, 유찬의 단호한 뒷모습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유찬의 시선은 이미 전력이 끊긴 연결 포트의 어두운 내부를 향해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냥믹은 그 지점 위에 얇은 흰빛 테두리를 머물게 했다. 까악스는 근처 상자 위에서 먼지 경계선 바로 앞에 멈춰선 거대한 트럭 바퀴를 쪼아댈 듯 노려보고 있었다. 기운이 빠진 포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겨우 고개만 들어 유찬을 볼 뿐, 몸체에서 나오던 푸른빛이 약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유찬은 연결부 하우징의 고정핀 배열 순서를 눈으로 좇았다. 오래된 기종이라 핀의 수가 많았다. 그의 시선이 릴레이 접점부로 옮겨갔다. 대부분의 접점에는 오래 방치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독 한 군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금속 혀 하나가 미세하게 휘어 제자리를 이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냥믹이 비추는 빛이 그 부분 위에서 유독 얇게 떨리는 듯했다.
서기태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유찬은 릴레이 접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포포가 지친 지금, 큰 정화는 무리였다.
“포포. 저기 접점 부분, 기름때만 살짝.”
포포가 날아가 접점 표면에 붙어 기름막만 작게 걷어냈다. 뽀글. 아주 작은 소음.
그 사이 유찬은 16번 코어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순서와 접점. 그는 릴레이를 다시 분리하고, 아래쪽 고정핀부터 바닥에 단단히 박았다. 그 후에야 방벽 릴레이를 다시 연결했다.
“멈춰! 당장 그거 멈추라고!”
서기태가 소리쳤지만, 유찬의 손가락은 이미 작동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박성준의 카메라는 그 모든 과정을 담고 있었다.
위이이잉-
낮은 기계음과 함께 바닥에서부터 반투명한 에너지 막이 스르륵 솟아올랐다. 차단막은 제2구역과, 서기태가 섞어버리려던 4, 7, 11구역 쪽에서 불어오던 먼지 흐름을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까악스가 남겼던 깃털 자국이, 차단막 안쪽에 그어진 안전선과 정확히 겹쳐 보였다. 돌아오는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인부들이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칼칼하던 공기가 차단막 하나를 두고 확연히 달라졌다. 그들은 군말 없이 트럭 라인을 바꾸고, 유찬이 그은 선 안쪽으로만 제2구역 회수품을 옮기기 시작했다.
박성준이 들고 있던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현장 장비 ‘접이식 차단막 발생기’ 정상 가동 확인.]
[‘제외구역 오염 확산 방지 비용’ 월 9,000,000원 절감 효과 발생.]
시장에 팔면 600만 원도 받기 힘든 폐기 장비가, 매달 900만 원씩 새던 지출을 막기 시작했다. 박성준은 곧바로 제2구역 회수품과 제외구역 오염물의 적재표를 분리해 각각 결재를 올렸다. 이제 누구도 제2구역 회수품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트럭 라인과 라벨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서기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섞으려던 폐기물들은 이제 온전히 자기 책임 구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벌게졌다.
그때, 유찬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임시 차단막 설치로 인한 구역 안정성 증가.]
[일부 후보지의 예상 손실액이 재산정됩니다.]
제2구역에서 얻은 장비 하나가 다음 구역을 고를 선택지를 바꾸고 있었다. 화면에는 새로운 알림이 떠 있었다.
`[후보 손실액 재산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