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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번호 0001 일러스트

직원번호 0001

직원번호 0001

아델린 케스트가 황실 인사팀장으로 부임한 첫날,

복도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새 팀장이 오면 어디서든 비슷한 소리가 난다.

발 빠른 아첨, 늦은 인사,

책임을 남에게 넘기려는 서류철 소리.

그런데 황실 인사원은 그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제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가도

그녀가 시선을 주면 바로 앉았고,

서기관들은 문서 뭉치를 품에 안은 채 길 가장자리로 비켜났다.

마치 누가 칼을 들고 지나가는 것도 아닌데,

베일까 봐 먼저 몸을 접는 사람들 같았다.

황실은 지금 조직 전체를 갈아엎는 중이었다.

직전 쿠데타 진압 이후,

발령과 좌천과 파면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졌다.

원래라면 새 팀장 책상 위에 올라와야 할 것은 긴급 인사안,

숙청 명단, 결원 보충 요청이어야 했다.

아델린의 책상 위에 맨 처음 놓인 것은 축하 난초도,

환영 연회 초대장도 아니었다.

밀랍 냄새가 짙게 밴 서류철 하나였다.

황실 인사원 발령국은 새 팀장이 오면

대개 세 종류의 문서를 올렸다.

인수인계 목록, 인사 청원서, 그리고 미뤄 둔 골칫거리.

그중 마지막이 제일 두꺼웠다.

문제는 골칫거리에도 종류가 있다는 점이었다.

예산 누수, 허위 발령, 실종자 직위, 귀족가 압력.

평범한 조직이라면 당연히 그런 순서여야 했다.

그런데 이 서류철 첫 장에는 황금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리 우선 대상 1호.

그 아래 이름이 있었다.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

재직 기간 612년.

아델린의 시선이 딱 한 박자 멈췄다.

그러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회색 장갑 끝을 한 번 반듯하게 맞추고 서류를 넘겼다.

“오타입니까?”

맞은편에 서 있던 파면심사실 서기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아닙니다.

기록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왕조 창건기부터…….”

“기록상으로만 612년입니까, 실제로도 612년입니까?”

“실제로도요.”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제정신인지 의심은 안 합니까?”

서기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다들 의심했습니다.

세 번째 왕이 바뀔 때쯤엔 포기했고요.”

아델린은 다음 장을 넘겼다.

직위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왕좌가 존재하는 한, 검일 것.

직무평가서도 기묘했다.

근무 불성실, 지시 불이행, 무단 이탈, 불경, 상급자 조롱,

비협조적 태도.

평범한 문제 직원에게 붙을 법한 평가들이 빼곡한데,

결론만 매번 같았다.

파면 불가.

그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백 년 전 파면 시도.

반려.

오십 년 전 임시 직무정지 시도.

반려.

십이 년 전 무보직 전환 검토.

반려.

사흘 전 팀장 직권 파면 시도.

반려.

심지어 반려 문구조차 제각각이었다.

“계약 구조 불일치.”

“원계승 조항 미확인.”

“직명 원문 거부.”

“결계축 영향 우려.”

이유는 달랐는데 결론은 늘 같았다.

누군가 일부러 설명을 흩어 놓은 흔적이었다.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아무도

진실에 닿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

아델린은 마지막 장을 빛에 비춰 보았다.

반려 도장 위로 검은 그을음이 가늘게 남아 있었다.

종이는 멀쩡한데,

마력이 한 번 어긋나고 지나간 자국만 남아 있었다.

“사유.”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면 누가 매번 반려했죠?”

“직명록 해석실, 파면심사실, 때로는 결계국까지요.”

“한 사람 자르는데 결계국이 왜 끼죠?”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늦다는 것 자체가 대답이었다.

“말해 보세요.”

“공식 기록에는 없습니다.”

“비공식 기록을 물었습니다.”

서기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국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 두 번,

그분 해고 시도 직후 황궁 외곽 결계가 출렁였습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경보가 울렸고,

실무자 셋이 계약 반동으로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표정은 치우세요.

저는 부서원이 반쯤 죽는 구조를 다행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기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델린은 서류철을 덮었다.

부임 첫날부터 황실 전체가 일부러 떠넘긴

쓰레기 더미를 안겨 준 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 직원이 아니었다.

인사원 전체가 알아서 외면하고, 결계국이 슬쩍 발을 걸치고,

기록은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었다.

즉, 누군가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숨기는 방식이 형편없었다.

“어디 있습니까?”

“예?”

“카시안 렘브란트요.”

“보통은 기록보관실 서고 쪽에서 발견됩니다.”

“발견된다는 표현을 쓰는 직원은 처음 보네요.”

“팀장님.”

서기관은 이번엔 정말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식으로 말씀드리면,

그분을 자르려다 다친 사람이 몇 있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다치는 편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아델린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그녀가 사무실을 나서자 주변 책상들이 일제히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시선은 따라붙었다.

새 팀장이 첫날부터 직원번호 0001을 보러 간다.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가 실제가 되는 순간의 공기였다.

복도 끝에서 막내 서기가 품 안의 서류를 떨어뜨렸고,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성호를 그었다.

아델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황실 기록보관실은 낮에도 어두웠다.

오래된 문장들이 빛을 먹는다는 미신 때문에

창을 크게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도 끝까지 늘어선 장서와 봉인함 사이로

먼지 대신 마력의 잔광이 엷게 떠다녔다.

종이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고,

그 밑에 아주 오래 말라붙은 피와

철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문 앞에 이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봉인 장치가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누군가 정식 절차 없이 드나든 흔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에서 너무 오래 거주한 사람

때문에 경첩이 체념한 것 같은 상태였다.

문 아래에는 검집 끝이 바닥을 긁고

남긴 듯한 흠집이 얕게 이어져 있었고,

한쪽 모서리에는 아주 최근에 갈아 둔

찻잎이 담긴 빈 잔이 놓여 있었다.

기록보관실에 사는군.

혹은 이곳 말고는 머물 곳이 없거나.

그녀는 문을 열었다.

사람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천장 끝까지 닿는 서가, 수백 년치 직위 장부, 철제 봉인함,

해제된 적 없는 인장 상자.

정리되지 않은 듯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동선은 깔끔했다.

누군가 오랜 세월 여기서 같은 길만 반복해 걸은 흔적이었다.

벽 쪽에는 낡은 외투 한 벌이 걸려 있었고,

창 아래 좁은 탁자에는 찻잔 둘, 펜촉 하나,

누군가 던져 둔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장갑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가장 높은 서가 위에 누군가가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자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책등 사이로 흘러내렸다.

빛을 거의 받지 못하는 방인데도 그의

눈썹뼈와 콧대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갑옷인지 제복인지 애매한 차림은 군데군데 낡아 있었고,

소매 끝에서 드러난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겹쳐 있었다.

바로 옆에는 검집 없는 장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직무가 잠들어 있는 광경 같았다.

아델린은 바로 이름을 불렀다.

“카시안 경.”

위쪽의 남자가 눈을 뜨는 데는 느린 한 박자가 걸렸다.

금빛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너무 오래 견딘 사람처럼 피곤하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맑은 시선이었다.

“새 팀장님이군.”

잠에서 막 깬 사람답지 않게 목소리는 또렷했다.

“보통 첫 인사는 문을 두드리고 하는데.”

“보통 직원은 기록보관실 천장 가까운

서가 위에서 취침하지 않습니다.”

카시안이 작게 웃었다.

“그건 공감합니다.”

그는 서가 위에서 아주 가볍게 몸을 내렸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가까이 선 순간,

아델린은 그에게서 금속과 종이와 오래 묵은

겨울 냄새가 동시에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보다 컸고,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오래 버틴 무언가에 가까웠다.

아델린은 들고 온 서류를 펼쳤다.

“황실 인사팀장 아델린 케스트입니다.”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

그가 시선만 내리깔며 덧붙였다.

“아직 퇴사 불가.”

“자기소개가 아니라 반려 사유 같군요.”

“대체로 둘 사이 차이가 없어서.”

아델린은 그를 훑어보았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문장을 너무 많이 반복해 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지겨움과 체념이 지나치게 오래 쌓이면 오히려 매끈해진다.

카시안의 표정이 딱 그랬다.

“기록보관실을 숙소로 쓰는 이유는 뭡니까?”

“서류는 거짓말을 덜 하거든.”

“사람은 많이 하나 보죠.”

“육백 년쯤 보면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흥미롭네요.

저는 서류도 충분히 거짓말한다고 배웠는데.”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약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팀장님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아뇨.”

아델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을 자르러 왔습니다.”

그 말에 그가 처음으로 그녀 손에 들린 인장을 봤다.

눈빛은 여전히 느긋했지만,

아주 짧은 찰나 경고인지 체념인지 모를 그림자가 스쳤다.

“보통은 대리인을 보내던데.”

“보통 팀장은 첫날부터 육백 년

근속 직원을 떠안지 않으니까요.”

“안타깝게도 그건 맞는 말이군.”

아델린은 시선을 들지 않고 문서 첫 장을 읽었다.

“황실 인사 규정 제4조 및 파면심사실 예비 승인안에 따라,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를

임시 파면 절차에 회부합니다.”

“아.”

카시안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번엔 팀장님 본인이 오셨네.”

“문제가 있습니까?”

“언제나처럼요.”

“늘 같은 대답이면 더 쉽게 정리됩니다.”

“그건 유감이군.”

그는 비웃듯 말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인장 쪽을 아주 잠깐 보고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아델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반동을 예상하고 있습니까?”

“예상이라기보다 경험이라고 해야지.”

“좋습니다.

그럼 이번엔 정확히 기록하겠습니다.”

그녀는 임시 파면 인장을 문서 위에 가져다 댔다.

손끝으로 흐르는 마력이 인장 테두리의 룬을 깨웠다.

은빛 선이 번지며 종이 위 직위명이 떠올랐다.

직원번호 0001.

왕좌가 존재하는 한, 검일 것.

이상했다.

일반 파면 문구가 물 위의 기름처럼 미끄러졌다.

새 인장을 받아들여야 할 종이가,

이미 다른 문장을 품고 있다는 듯 거부 반응을 보였다.

아델린은 곧장 마력을 더 세밀하게 조정했다.

결을 읽듯, 틈을 찾듯.

규칙대로라면 여기서 적어도 반려 사유나

상위 승인 요청이 떠야 했다.

그런데 종이는 침묵했다.

그녀는 눈썹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침묵은 오류가 아니라 은폐였다.

누군가 읽히지 않도록 봉합해 둔

계약문을 건드릴 때만 나타나는 정적.

아델린은 문장의 층을 한 겹 더 벗겨내려 했다.

그때 카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아델린이 눈을 들었다.

그가 이번에는 웃지 않고 있었다.

“저를 자르시려면,

먼저 제가 왜 죽지 않는지부터 읽으셔야 할 겁니다.”

다음 순간이었다.

문서가 타오른 것은 불꽃 때문이 아니라 그림자 때문이었다.

인장 아래에서 검은빛이 피어올랐다.

불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용했고, 연기라기엔 너무 또렷했다.

새까만 화염이 종이 위 문장만 골라 핥더니,

방 안의 봉인함들이 일제히 낮은 울림을 냈다.

콰앙.

아주 멀리서 쇠종이 한 번 울린 것

같은 진동이 황궁 전체를 스쳤다.

천장 위 먼지가 아니라 마력의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벽면에 잠들어 있던 경보 룬이 붉게 번쩍였고,

닫혀 있던 창틀이 덜컥거렸다.

기록보관실 밖 복도에서 비명이 터졌다.

“결계 반응이다!”

“누가 또 0001 건드렸어?”

아델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타오르는 문서 한가운데 손을 뻗어 결을 읽었다.

뜨겁지 않았다.

차가웠다.

죽은 밤의 물처럼 차가운 불이었다.

“미쳤군.”

그 말은 카시안이 아니라 아델린 입에서 먼저 나왔다.

검은 불꽃 속에서 숨겨져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원래 직무 설명 아래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두 번째 문장이었다.

너무 오래된 계약문이라 잉크가 아니라 상처처럼 보였다.

이 검은 오직 스스로 고른 주인의 명령으로만 놓일 수 있다.

아델린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스스로 고른 주인.

즉, 이 남자를 해고하려면 황제의 인장도, 파면심사실의 승인도,

직명록의 절차도 충분하지 않았다.

카시안 렘브란트 본인이 먼저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육백 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검은 불꽃이 문서의 마지막 모서리를 핥고 사라졌다.

타버린 것은 임시 파면 문구뿐이었다.

직원번호와 이름, 그리고 오래된 직위명은 멀쩡하게 남았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방 안만 조용했다.

바깥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뛰어오는 발소리,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지시,

경보 룬이 깜빡이는 소리.

서기관 몇 명이 문밖까지 왔다가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멈춰 선 기척이 느껴졌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팀장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지만, 어딘가 지독하게 지쳐 있었다.

“제 퇴사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아델린은 남은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회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훑었다.

문제 직원.

골칫거리.

정리 대상.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분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이 남자는 인사 대상인 동시에,

누군가 수백 년 동안 직위 안에 가둬 둔 증거였다.

그리고 방금 황궁 결계가 반응했다.

단순한 개인 계약이 아니다.

시스템 어딘가가 이 남자와 묶여 있다.

아델린은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밖에 있는 사람.”

문틈 너머에서 화들짝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네, 네!”

“경보를 기록보관실 단독 반응으로 분류하세요.

결계국에는 즉시 보고하되,

원문 열람 전까지 0001 관련 문서를

누구도 폐기하지 못하게 봉인 조치하십시오.

발령국, 파면심사실,

직명록 해석실의 과거 반려본 전부 제 책상으로 옮기고,

누가 열람했는지도 명단을 붙이세요.”

짧은 침묵.

“지, 지금 바로요?”

아델린은 시선 하나 흔들지 않았다.

“제가 내일 아침에 다시 말해 줘야 합니까?”

“아닙니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카시안이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내렸다.

“경보가 울리면 보통은 다들 저부터 묶으려 들던데.”

“당신을 묶으면 문장이 풀립니까?”

“아니.”

“그럼 비효율적이군요.”

그는 아주 잠깐 웃었다.

이번에는 조롱이 아니라, 정말로 예상 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아델린은 남은 서류를 품 안에 넣었다.

차가운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부임 첫날부터 황실이 그녀에게

떠넘긴 것은 쓰레기 더미가 아니었다.

시체를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이다.

아니, 더 나빴다.

아직 숨 쉬는 사람을 시체 취급한 채

제도 속에 박제해 둔 것이었다.

“좋습니다, 카시안 경.”

“좋다는 건, 안 자르겠다는 뜻입니까?”

“아뇨.”

아델린은 단호하게 잘랐다.

“이번엔 당신을 자르는 방식부터 다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카시안의 눈이 아주 잠깐, 놀란 듯 흔들렸다.

그 짧은 틈을 본 사람은 아델린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었다.

하지만 문턱을 넘기기 직전,

뒤에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따라왔다.

“팀장님.”

아델린이 반쯤 돌아보았다.

“왜죠?”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입 밖에 내지 않은 문장을

지금 꺼내도 되는지 가늠하는 사람처럼.

“이번에도 포기하실 겁니다.”

아델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전임자들도 그랬고, 그 전임자들도 그랬죠.

다들 처음엔 저를 정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엔 무시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고 들었지.”

아델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냉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굳이 읽으려 들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포기될 것이라고 너무 당연하게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감이군요.”

아델린이 말했다.

“저는 셋 중 아무것도 안 합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처음으로 완전히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럼 뭘 하시는데요?”

아델린은 문을 열었다.

“읽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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