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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반동 일러스트

해고 반동

기록보관실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는 아델린 손에 들린 문서를 봤고,

누군가는 그녀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카시안을 봤다.

둘 다 충분히 공포의 이유가 됐다.

붉은 경보 룬이 천장 가장자리를 따라 번쩍였고,

멀리서 종각이 짧게 세 번 울렸다.

평소 같으면 황궁 외곽 침입이나 결계 누수 때나 나는 소리였다.

“길 비키세요.”

아델린이 말하자 사람들은 정말로 갈라졌다.

다만 길을 비키면서도 시선은 떼지 못했다.

어떤 서기관은 카시안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고,

어떤 경비기사는 본능처럼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곧바로 뗐다.

그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스스로도 아는 표정이었다.

카시안이 아델린 옆에서 낮게 말했다.

“환영이 뜨겁군요.”

“정확히는 공포에 가깝죠.”

“그건 익숙합니다.”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아델린은 잠깐 그를 보았다.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도, 상대를 떠보려는 말도 아니었다.

단지 오래전에 결론 난 사실을 읽는 목소리였다.

복도 반대편에서 빠른 걸음 소리가 들렸다.

검은 제복 위에 은색 결계실 인장을 단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짧게 잘린 흑갈색 머리, 밤샘 근무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

손에는 측정용 수정판.

그녀는 사람들 틈을 가르듯 다가오더니

바닥에 남은 잔광과 아델린 손의 문서를 번갈아 보았다.

“결계국 수석 실무관 세린 베일입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자기소개는 필요 최소한이었다.

“누가 파면 인장을 눌렀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상위 승인 라인?”

“예비 승인까지.”

세린은 대답 대신 수정판을 꺼내 문서 위에 가져다 댔다.

투명하던 판 위로 붉은 선 세 개가 갈라졌다가 다시 겹쳤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결과를 읽었다.

“황궁 제삼 결계, 북서축 흔들림 확인.

반동은 현재 진정 중.

손상은 경미하지만 기원층이 이상합니다.”

“기원층?”

“현재 황제 계통 인장과 맞지 않습니다.

더 오래된 명령 계층입니다.”

복도가 더 조용해졌다.

누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창건기 계약…….”

세린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카시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객관적인 실무자가 표본을 보는 눈이었다.

“직원번호 0001과 직접 연동된 반응으로 추정합니다.”

카시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

“듣기 좋으라고 하는 보고가 아닙니다.”

세린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아델린은 그 짧은 공방만으로도

이 여자가 쓸모 있겠다고 판단했다.

“파면심사실 긴급 소집이 필요합니다.”

아델린이 말하자 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국도 참관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죠.”

그녀는 문서를 가리켰다.

“그 인장을 같은 방식으로 다시 누르면 다음엔

경미하게 끝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열 겁니다.”

“합리적이군요.”

세린은 딱 그 말만 남기고 먼저 돌아섰다.

아델린도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두 걸음쯤 지나서야 뒤에 있는 카시안을 돌아보았다.

“왜 따라오죠?”

“팀장님이 저를 중심으로 회의를 여신다는데,

당사자가 없으면 허전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당사자이기 전에 사고 원인입니다.”

“상처가 되는 표현이군.”

“안 다친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팀장님도요.”

파면심사실 회의실은 원래도 냉랭한 곳이었지만,

긴급 소집이 걸리자 분위기가 거의 시신안치실에 가까워졌다.

긴 타원형 회의 탁자 위에 각 부서 인장이 놓였고,

벽면의 기록 룬은 자동으로 켜져

방 안의 모든 발언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파면심사실장, 발령국 차석, 결계국 대표로 온 세린,

그리고 인사원장 대리가 자리를 채웠다.

직명록 해석실장은 불참이었다.

원문 열람 허가를 받으러 갔다는 짧은 보고만 도착해 있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파면심사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임 첫날부터 이런 일을 내시다니, 팀장님.”

비난과 농담 사이 어딘가에 걸친 말투였다.

아델린은 문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 승인 라인은 적법했습니다.

문제는 적법한 절차가 왜 창건기 반동으로 튀었느냐는 겁니다.”

“그 문제 직원을 건드렸기 때문이겠죠.”

발령국 차석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문서보다 문가 쪽을 의식하고 있었다.

닫힌 문 바깥에 카시안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눈이었다.

“우린 수십 년 전부터 그 건을 사실상 동결해 왔습니다.”

“동결이 아니라 방치였겠죠.”

아델린이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 방치 때문에

저는 첫 출근과 동시에 결계 반동을 맞았습니다.”

인사원장 대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지금 필요한 건 책임 공방이 아니라 재발 방지입니다.”

“좋습니다.”

아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발 방지부터 합시다.

직원번호 0001 관련 과거 반려 문서

전부를 원본 기준으로 다시 모으고,

파면 시도와 결계 반응의 상관관계를 공개 검토합니다.

누가 언제 어떤 사유를 붙여 덮었는지도 같이요.”

발령국 차석이 얼굴을 굳혔다.

“그건 너무 큰 일입니다.”

“육백 년 근속 직원이 해고될 때,

황궁 결계가 흔들리는 일보다 큽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린이 수정판을 탁자 위에 세웠다.

푸른빛 화면에 조금 전 기록보관실에서 포착된 반응선이 떠올랐다.

중심부에서 갈라진 세 가닥의 선은

현재 인장 체계와 다른 각도로 얽혀 있었다.

“결계국 소견을 말하겠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이번 반응은 단순한 공격 반사나

방어 결계의 오작동이 아닙니다.

행정 인장이 특정 개인 계약을 해제하려고 했고,

그 결과 궁정 결계 일부가 자기 보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일부라면 얼마나 일부죠?”

파면심사실장이 물었다.

세린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현재는 북서축 외곽선 흔들림 수준입니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두세 번 더 건드리면 중앙

허브까지 파동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의실 안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발령국 차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더 이유가 명확하군요.

0001 건은 영구 동결해야 합니다.”

“왜죠?”

아델린이 물었다.

“이 나라 결계를 위해서요.”

“아니요.”

아델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건 이유가 아니라 변명입니다.

결계 때문에 누군가를 육백 년 동안 직위에 박아 두었다면,

더더욱 구조를 확인해야죠.

모르는 걸 영구 동결하는 건 해결이 아니라 겁먹은 관성입니다.”

파면심사실장이 미간을 눌렀다.

“팀장님, 표현을 순화하세요.”

“표현이 불편하십니까, 실체가 불편하십니까?”

이번엔 인사원장 대리가 헛기침을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0001을 사람처럼

다뤄야 한다는 주장만큼은 시기상조입니다.”

그 한마디에 아델린은 처음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인사원장 대리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직원번호 0001은 황실 소속 기사입니다.

귀하들은 방금 황실 직원을 물건처럼 표현했습니다.”

짧은 침묵.

발령국 차석이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물건이 아니면 뭡니까.

제도에 묶인 무기지.”

아델린은 그 말을 머릿속에 따로 적어 두었다.

발언 그 자체보다,

아무도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세린이 문서 잔재를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결계국 입장에서는 사람인지 무기인지보다 구조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동의합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구조를 모른 채 동결만 반복하는 방식은 위험합니다.

반동이 누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즉?”

아델린이 물었다.

“원문 계약을 읽어야 합니다.”

“해석실 허가가 떨어질까요?”

세린이 시선을 들었다.

“안 떨어지면 누군가 일부러 안 떨어뜨리는 겁니다.”

회의는 그 말 이후로 방향이 바뀌었다.

공식 결론은 간단했다.

`직원번호 0001 관련 모든 파면 절차 일시 중지`,

`과거 반동 기록 전수 수집`,

`직명록 해석실 원문 열람 요청`.

깔끔한 문장이었지만,

아델린이 보기에는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한 행정어에 불과했다.

문이 열리자 밖에 기대 서 있던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회의 내내 안으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이런 식으로 배제되는 일쯤은 너무 익숙하다는 듯이.

“결론이 뭡니까?”

“당신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델린이 말했다.

“당분간은.”

카시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익숙한 결말이군.”

“마음에 안 듭니까?”

“마음에 든 적이 없어서 비교가 안 됩니다.”

그 대답은 농담처럼 흘러갔지만,

마지막 단어가 너무 평평해서 아델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세린이 회의실에서 나오며 카시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진 않았지만 짧게 말했다.

“당신 계약은 결계와 얽혀 있습니다.

최소한 그건 사실에 가깝습니다.”

카시안이 눈썹을 들었다.

“축하라도 해야 하나?”

“아니.”

세린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당신도 위험 요인이라는 뜻이니까.”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복도에는 잠시 셋만 남았다.

아델린, 카시안,

그리고 아직 다 꺼지지 않은 붉은 경보 룬의 잔광.

아델린이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습니까?”

“무얼.”

“자기 직위가 황궁 결계 일부와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걸.”

카시안은 잠시 침묵했다.

대답을 고르는 침묵이 아니라,

너무 오래된 기억을 얕게 건드리는 사람의 침묵 같았다.

“정확히는 몰랐어.”

그가 결국 말했다.

“다만, 내가 잘못 건드리면 언제나 궁이 먼저 소리를 질렀지.”

“잘못 건드린다는 건?”

“떠나려고 할 때.”

아델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떠나려 한 적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카시안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부정도 긍정도 아닌,

질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팀장님.”

그는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 질문은 나중에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죠?”

“답이 마음에 안 들 테니까.”

그리고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델린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지금 억지로 캐내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대신 그녀는 제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잠시 후,

서기관 둘이 무거운 보관 상자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발령국, 파면심사실,

해석실에서 각각 끌어모은 과거 반려 문서였다.

“여기 두고 나가세요.

아무도 들이지 말고.”

서기관들이 도망치듯 물러난 뒤, 방 안은 조용해졌다.

아델린은 가장 먼저 파면심사실 상자를 열었다.

정리 상태는 형편없었다.

반려본 사이에 결재 초안이 끼어 있었고,

누군가 급히 뜯어낸 흔적이 남은 인장 종이도 보였다.

그녀는 하나씩 날짜순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백 년 전.

칠십삼 년 전.

오십 년 전.

삼십일 년 전.

사흘 전.

패턴이 보였다.

파면 시도는 완전히 무작위가 아니었다.

대체로 황실 권력 재편기,

왕이 바뀌었거나 숙청이 일어난 직후에 집중되어 있었다.

누군가 혼란을 틈타 카시안을 정리하려 했고,

그때마다 계약이 튀어 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몇몇 시도는 사유가 지나치게 허술했다.

근무태만, 지시 불이행, 무단 이탈.

육백 년 묵은 고대 계약을 끊으려는

문서치고는 이유가 너무 얕았다.

마치 일부러 실패하게 만들기 위한 핑계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델린은 눈을 좁혔다.

누가 실패를 원했지?

아니면.

문득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실패해도 좋은 사람이 있었던 건가.

그녀는 다음 상자를 열었다.

발령국 자료는 더 어수선했다.

파면 대신 보직 이동, 명목상 휴직,

임시 직무정지 검토안이 섞여 있었다.

그중 오래된 양피지 봉투 하나가 손에 걸렸다.

겉면에 아무 표시도 없었지만 봉인 흔적이 유난히 낡았다.

아델린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반쪽쯤 탄 신청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상단 양식은 낡은 형식이었다.

현행 황실 문서보다 네 세대는 이전의 서체.

그러나 제목은 분명했다.

직위 해제 청원서.

그녀의 손끝이 멈췄다.

본문 첫 줄을 읽는 순간,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는 본인의

직위를 스스로 해제받고자 청원함.

아델린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읽었다.

오독이 아니었다.

문서 하단에는 오래전에 번진 피자국과 함께 서명이 남아 있었다.

거칠고 단정한 필체.

지금도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카시안 렘브란트.

그 아래에 찍힌 결과 인장은 더 선명했다.

반려.

사유는 단 한 줄.

본인 의사만으로는 해제 불가.

아델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행정 문구 한 줄처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황실은 그를 떠나지 않는 충성의 화신처럼 다뤄 왔다.

아무도 그 반대 가능성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기록 안에는 전혀 다른 진술이 있었다.

카시안도 나가려고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문서 묶음 두께로 봐서는 여러 번.

그녀는 봉투 바닥에 남은 다른 종이 조각들을 꺼냈다.

같은 서식, 다른 날짜, 같은 이름, 같은 결론.

어떤 것은 완전히 타버렸고 어떤 것은 서명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모아 두었지만, 다시는 들춰보지 않으려던 흔적이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델린은 본능적으로 문서를 덮지 않았다.

대신 가장 위의 청원서를 똑바로 펴고,

그 서명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끝내 떠나지 않은 기사.

아니.

끝내 떠나지 못한 기사.

그리고 황실은 그 차이를 알고도 감춘 것 같았다.

노크 소리가 났다.

“팀장님.”

문 너머에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주무십니까?”

아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눈앞의 서명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문장 위의 피자국은 오래 말라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해 보였다.

카시안 렘브란트는 스스로 잘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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