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봉인 없는 서가
봉인 없는 서가
계단 아래는
생각보다 더 깊었다.
지상에서 내려온 공기와
완전히 다른 냄새가 났다.
젖은 돌,
오래 닫혀 있던 철,
그리고 종이가 아니라
문장 자체가 썩지 않고
쌓여 온 자리에서만 나는 냄새.
아델린은 걸음을 늦췄다.
“시간.”
카시안이 바로 답했다.
“열한 분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적군요.”
“원래 금지된 곳은
들어가는 데보다
망설이는 데 시간이 더 걸립니다.”
“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적게 남았죠.”
그 대화는 짧았지만,
둘 다 웃지는 않았다.
지금은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되돌아갈 이유가
너무 많아지는 밤이었다.
계단 끝은
낮은 아치형 복도로 이어졌다.
복도 양옆에는
보통 서고처럼 책장이 늘어서 있지 않았다.
대신 벽마다
돌판이 세로로 박혀 있었고,
그 사이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큼의 틈이
미로처럼 갈라져 있었다.
돌판 표면에는
번호 대신 문장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창건.
즉위.
직명.
순종.
선택.
그중 마지막 글자 앞에서
아델린의 시선이 멈췄다.
“선택.”
그녀가 낮게 읽었다.
카시안은 그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갑시다.”
“확신이 있습니까.”
“확신이라기보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싫은 예감이
항상 맞는 편입니다.”
아델린은 그 말도
기억해 두었다.
카시안은 아치형 복도를 지날 때마다
한 번씩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시선을 반드시
앞이 아니라 옆과 위로 먼저 돌렸다.
처음엔 단순한 경계로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갈림길,
세 번째 낮은 천장,
네 번째 꺾이는 돌벽을 지나자
패턴이 보였다.
그는 늘
아델린이 선 쪽과 반대편을 먼저 확인했다.
왼쪽이 트이면
자기가 왼쪽으로 섰고,
천장이 낮으면
먼저 손을 뻗어 걸리는 구조를 확인했다.
좁은 틈을 지날 때도
그녀가 벽에 등을 보이지 않게
반걸음 앞을 걸었다.
아델린은 마침내 물었다.
“늘 그렇게 움직입니까.”
카시안이 돌아보았다.
“어떻게요.”
“제가 다칠 만한 쪽을
먼저 가져가는 식으로요.”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습관입니다.”
“누구에게 배웠죠.”
카시안은 시선을 거두었다.
“배운 적은 없습니다.
오래 하다 보니 남은 쪽이죠.”
“오래.”
“전장에선
누가 먼저 칼을 맞을지
서 있는 위치로 정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아델린은 그 안에
너무 오래 반복해서
몸에 새겨진 사람만이 갖는 무게를 들었다.
그는 보호하려고 한 게 아니라
보호하는 쪽으로 굳어 버린 사람이었다.
아델린은 짧게 말했다.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카시안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 말 듣는 쪽은
대개 필요하더군요.”
“저는 대개가 아닙니다.”
그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그 점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복도 끝,
막다른 벽처럼 보이는 자리에
서가 하나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서가의 형상을 한
문이었다.
나무도 철도 아니었다.
돌처럼 단단한데
책등처럼 층층이 결이 나 있는 재질.
수백 권의 장정본을
한 번에 눌러 굳혀 만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가 중앙에는
봉인 인장도,
자물쇠도 없었다.
대신 사람 손바닥만 한 홈 두 개가
나란히 파여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아델린이 가까이 다가갔다.
“봉인이 없군요.”
“대신 자격을 묻는 구조 같습니다.”
카시안은 홈 주변의 마모를
손끝으로 훑어 보았다.
“오래 쓴 흔적은 없는데,
아예 처음 만든 것도 아닙니다.”
아델린은 장갑을 벗어
한쪽 손에 쥐었다.
“눌러 봐도 되겠습니까.”
“잠깐.”
카시안이 그녀 손목을
아주 짧게 잡았다.
잡았다기보다
멈춰 세운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피부를 사이에 둔 감각은
예상보다 선명했다.
둘 다 동시에 멈췄다.
그 짧은 정적이
이상할 만큼 길게 느껴졌다.
먼저 손을 놓은 건
카시안이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아델린은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손목 끝에 남은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카시안은 홈 아래쪽의
미세한 홈선을 가리켰다.
“여길 보세요.
한쪽만 누르면 안 열립니다.
둘의 압이 거의 동시에 들어가야 합니다.”
“손을 맞추라는 뜻이군요.”
“아마도.”
아델린은 서가를 올려다봤다.
“기분 나쁜 방식이네요.”
“동의합니다.”
“황궁이 가장 싫어하는 건
둘이 합을 맞추는 상황일 텐데.”
“그래서 이런 데 숨겨 두었겠죠.”
두 사람은
서가 앞에 나란히 섰다.
거리는 가까웠다.
회랑에서 계산한 거리보다
더 가까웠다.
좁은 틈 안쪽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스칠 만큼.
아델린은 장갑을 완전히 벗었다.
카시안도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등엔
오래된 흉터가 겹겹이 남아 있었다.
칼날.
화상.
찢긴 자국.
오래 버틴 사람의 몸에는
대개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여러 시대가 남는다.
아델린은 그 흔적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다 보게 되었다.
카시안이 낮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거짓말입니다.”
“당신 손이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군요.”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오래 썼으니까요.”
그 말은 지나치게 평온해서
오히려 불편했다.
아델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홈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셋에 맞추죠.”
“네.”
“하나.
둘.
셋.”
두 손이 동시에 홈을 눌렀다.
차갑다.
돌을 만진 감각과는 달랐다.
마치 서가가
손의 온도보다 먼저
맥박을 읽는 것 같은 냉기가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처음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홈 사이에 가늘게 새겨져 있던
문장선이 빛났다.
서가 전체가
낮은 숨을 들이마시듯
한 번 떨렸다.
쿵.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래 닫혀 있던 의미가
자리에서 밀리는 소리였다.
책등처럼 보이던 층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한 줄은 왼쪽으로,
한 줄은 아래로,
가장 가운데 줄은
아예 안쪽으로 꺼졌다.
그 틈 사이로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만한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봉인을 푸는 장치가 아니라,
둘이 동시에 선택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
아델린은 손을 떼며 말했다.
“취향이 나쁘군요.”
카시안도 손을 뗐다.
“왕조 창건기 취향은
대개 그랬습니다.”
“직접 겪은 사람처럼 말하네요.”
“직접 겪었으니까요.”
그 단순한 문장이
통로 안 공기보다 차갑게 남았다.
아델린은 아주 잠깐
그를 보았다.
그는 또다시
대수롭지 않게 말해 버렸다.
육백 년을
한 줄 설명으로 눌러 담는 사람처럼.
통로 안은
더 좁고 복잡했다.
바깥 복도가 미로였다면,
이 안쪽은
기억을 쌓아 만든 벌집에 가까웠다.
서가와 서가 사이가
사람 어깨너비만큼만 벌어져 있었고,
어떤 칸은 막혀 있고
어떤 칸은 빙 돌아
같은 자리로 이어졌다.
돌바닥에는
희미한 선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선.
금선.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잇는
흰 선.
카시안이 먼저 무릎을 굽혀
그 선을 들여다봤다.
“아무 선이나 밟으면 안 됩니다.”
“왜죠.”
“흰 선만 밟으세요.
나머지는 위치를 바꿉니다.”
아델린이 눈을 좁혔다.
“서가가 움직인다고요.”
“네.
미로형 탐색 장치입니다.”
“설명은 친절하군요.”
“몇 번 당해 봤으니까.”
아델린은 그 말을 듣고
그를 똑바로 봤다.
“여길 와 본 적이 있습니까.”
카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끝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어디까지.”
“입구와 첫 외곽 서가 정도.”
“언제.”
“아주 오래전.”
또 그 대답.
아델린은 이번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당신이 그 오래전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범위가 지나치게 넓습니다.”
카시안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가진 시간 단위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그 농담 아닌 농담에도
아델린은 웃지 않았다.
대신 그가 흰 선 위에 발을 놓는 방식을
유심히 보았다.
카시안은 늘
왼발부터 내딛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꿀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엄지로 검지 마디를
한 번 쓸었다.
한 번.
또 한 번.
긴장을 감추는 사람에게서
아주 드물게 남는 신호였다.
아델린은 그제야 알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지독하게 익숙할 뿐,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버릇.”
아델린이 말했다.
카시안이 멈췄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른손 엄지로
검지 마디를 쓸어 넘기는 거요.
방향 바꿀 때마다 하더군요.”
카시안은 아주 드물게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보고 계셨군요.”
“보였습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오래전부터 있던 버릇입니다.”
“전장 때문입니까.”
“아마.”
짧은 대답.
그러나 이번엔
아델린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아마가 아니라.”
카시안은 서가 사이 어둠을 본 채
낮게 말했다.
“예전엔 명령을 기다릴 때
자주 그랬습니다.
다음에 죽는 사람이
누굴지 모르던 순간마다.”
그 한 문장에
통로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아델린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지금은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 말,
쉽게 하시는군요.”
“지키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로는
오른손을 쓸어 넘기는 버릇이
조금 줄어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아델린이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한 사람처럼.
세 번째 갈림길 끝에서
그들은 드디어
다른 서가와 다른 서가를 만났다.
이쪽 서가는
봉인 장치도,
손 홈도 없었다.
대신 책등마다
하나의 글자씩만 새겨져 있었다.
산.
자의.
선.
택.
아델린의 심장이
한 박자 세게 뛰었다.
“있군요.”
카시안은 가까이 다가가
책등 사이 빈 틈을 살폈다.
“전부는 아닙니다.
문장 일부만 따로 빼 둔 흔적입니다.”
“빼 갔다는 뜻이겠죠.”
“네.
그리고 남긴 사람은
이 네 글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된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아델린은 손을 뻗다가
멈췄다.
“건드려도 됩니까.”
카시안은 서가 아래쪽을 보았다.
거기엔 아주 작은 글자가 있었다.
읽는 자는 둘일 것.
혼자 읽으면 닫히고,
같이 읽으면 남는다.
아델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까지
취향이 나쁘군요.”
“그래도 일관성은 있습니다.”
“전 그 일관성이 제일 싫습니다.”
아델린은 그 문장을
한 번 더 눈으로 훑었다.
읽는 자는 둘일 것.
짧은 규정인데도
이상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왕조 초기에 만들어진 장치가
둘을 요구했다는 뜻이다.
증인 한 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의지를.
황궁이 지금까지 해 온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한 사람을 묶고,
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한 사람만 남겨 책임지게 만드는 구조.
그런데 가장 오래된 층위는
오히려 둘이 함께 읽어야
남는다고 적어 두었다.
아델린은 아주 잠깐
카시안을 보았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카시안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델린이 먼저 한 권을 잡았고,
그는 그 옆 칸에 손을 얹었다.
둘이 동시에 당기자
책등처럼 보이던 판이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안쪽에는 종이가 아니라
얇은 금속판이 끼워져 있었다.
금속판 표면에는
거의 닳아 사라질 만큼 희미한 글이 남아 있었다.
왕좌를 세우는 것은
죽은 자의 충성이 아니라,
산 자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 아래는
뜯겨 나간 자리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문장의 절반을
의도적으로 떼어 간 흔적.
아델린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 읽었을 때는
말로 꺼내지 않아도
의미가 너무 분명했다.
왕조는 처음부터
산 사람의 선택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궁이 붙들고 있는 건
죽지 않는 충성과,
끝내 놓아주지 않는 계약이었다.
즉,
누군가가 초대의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 쓴 셈이었다.
카시안이 아주 낮게 말했다.
“그래서 돌 없는 문이
제게 반응했군요.”
“당신이 죽지 않아서가 아니군요.”
아델린의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아직 선택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겠죠.”
카시안이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아델린은 그 침묵을
정면으로 받았다.
“시간.”
그녀가 다시 물었다.
“사 분.”
“충분합니까.”
“문장을 외우는 데는.”
“도망치는 데는?”
카시안이 아주 옅게 웃었다.
“그건 지금부터 해 봐야죠.”
멀리서
서가 하나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안쪽 구조를 건드렸거나,
시간 제한이 끝나기 시작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델린은 금속판 문장을
빠르게 눈에 담았다.
그리고 바로 아래,
뜯겨 나간 문장 끝에 남은
흠집 하나를 보았다.
일반적인 파손 자국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떼어 낼 때 생기는
비뚤어진 흔적이 아니라,
정확히 알고 잘라 낸 사람의
매끈한 절단면.
누군가는 이 문장의 뒷부분이
무엇을 바꿀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숨긴 것이다.
말이 아니라
선택의 조건을.
그리고 카시안을 향해
짧게 말했다.
“갑시다.
이건 여기서 다 읽을 문장이 아닙니다.”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순간,
그는 또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엄지로 검지 마디를 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델린이 먼저 그의 손목을 가볍게 눌렀다.
아주 짧게.
“지금은 아닙니다.”
카시안의 손이 멈췄다.
그는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아델린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살아서 나간 다음에
긴장하세요.”
그 순간만큼은
카시안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늦게,
정말 아주 늦게
입꼬리를 올렸다.
“명령으로 받아들이죠.”
둘은 동시에 몸을 돌려
흰 선 위를 따라 바깥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서가가 움직였다.
검은 선과 금선이
조용히 자리를 바꾸는 소리가
짐승의 숨소리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나 아델린 머릿속엔
이미 다른 문장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죽은 자의 충성이 아니라,
산 자의 선택.
왕조의 첫 명령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카시안 한 사람을
다르게 읽고 있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