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고 봉인인
황제가 개혁 속도를
늦추라고 말한 다음 날,
황실 인사팀은
놀랄 만큼 조용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델린이 일부러
조용하게 만들었다.
전날까지 사무실 책상 위를 점령하던
GP-001, GP-002, GP-005 문서 묶음은
전부 평범한 결산 감사 파일 사이로
흩어 넣었다.
도로시에게는 문제 장부를
지급 정정 대기 표식 아래로
잠시 숨겨 두라고 지시했고,
카시안에게는 오전 내내
책상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엔
개혁이 아니라 정리 작업처럼
보여야 했다.
도로시는 아침부터
그 결정이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팀장님,
제가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말하세요.”
“조용히 있는 거
생각보다 더 스트레스예요.”
아델린은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효과는 있겠죠.”
“네,
감찰조정팀이 복도 지나가다
저희 방 보고
“드디어 정상화되나” 하는 표정을
짓긴 하더라고요.”
카시안이 창가 쪽에서 말했다.
“그건 꽤 모욕적인 표현이군.”
“조직 생활은 원래
모욕과 절차의 반복입니다.”
아델린이 담백하게 잘랐다.
“그리고 오늘은
그 반복이 필요합니다.”
도로시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순한 양처럼 있고,
속으로는 더 깊이 파겠다는 뜻이죠?”
아델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쓸모 있는 비유는
기억해 두겠습니다.”
“팀장님은 사람 칭찬을
진짜 이상하게 하네요.”
그때 사무실 문이 반쯤 열리고,
감찰조정팀 완장을 찬 서기관 하나가
복도 안쪽을 힐끗 들여다봤다가
지나갔다.
의도적으로 보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도로시가 작게 혀를 찼다.
“봐요.
감시 중이라니까.”
카시안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부팀장 본인은 안 오고
눈만 보내는군.”
“기디온은 지금 우리가
급하게 뛰어다니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델린이 대답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안 뛰어다닙니다.”
“한동안은.”
카시안이 그 단어를
느리게 반복했다.
“정확히는 오늘 낮까지.”
아델린은 그제야
도로시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받은 거.”
도로시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얇은 기록 목록 한 장을 꺼냈다.
“기록보관실 창구에서
몰래 받아 왔어요.
어제 팀장님이 신청하신
케스트 가문 파일 열람 요청 이력 일부.”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델린은 그 종이를 펼쳤다.
대부분 평범한
기록원 내부 확인 도장이었지만,
두 줄이 문제였다.
하나는 오래전
초기 인사조정 특별 보안 이관 기록.
다른 하나는
훨씬 기묘했다.
열람 경로:
황제 친위 서고 보류함 이동.
담당 권한:
친위 서고 봉인인.
아델린의 시선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GP-009.”
도로시가 바로 맞장구쳤다.
“네.
황제 친위 서고 봉인인.
실체 열쇠는 없고
봉인 권한만 살아 있다는
유령직위.”
카시안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가족 기록까지
그 서고로 움직였군.”
아델린은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케스트 가문 기록 일부가
대시종장 승인 하에 제한 열람으로 묶였고,
그 뒤 보류함 이동 경로가
친위 서고로 향해 있었다.
즉,
가족 기록 봉인과 유령직위가
이제 분리된 사건이 아니었다.
“친위 서고는
황제 직속 아닙니까?”
도로시가 물었다.
“명목상은요.”
아델린이 답했다.
“문제는 명목과 실제가
다르다는 거죠.”
카시안이 문득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황궁은 늘 그렇습니다.”
아델린은 그를 보았다.
“친위 서고 위치를 압니까?”
카시안은 잠시 침묵했다.
이번엔 회피가 아니었다.
정확한 기억을 꺼내는 얼굴이었다.
“현행 도면엔 안 나올 겁니다.”
“그건 예상했습니다.”
“황제 집무동 뒤쪽,
의전실과 친위 회랑 사이에
숨은 문이 하나 있습니다.
원래는 밤에만 열렸죠.”
도로시가 바로 손을 들었다.
“잠깐.
그러면 오늘 밤이에요?”
“왜죠.”
아델린이 묻자
도로시는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낮엔 안 뛴다면서
밤엔 뛴다는 거잖아요.”
“표현은 과격하지만
사실이군요.”
“팀장님은 자기 이상한 결론
인정할 때가 제일 무서워요.”
아델린은 기록 이력서를 접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낮 동안은
정상 업무처럼 움직입니다.
기디온이 보기엔
속도 늦춘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카시안이 느릿하게 물었다.
“그럼 밤엔.”
아델린은 그를 똑바로 봤다.
“같이 가시죠.”
짧은 침묵.
도로시가 제일 먼저
눈을 깜빡였다.
카시안도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변화였지만,
아델린은 분명히 느꼈다.
명령이 아니라
동행을 청하는 문장을 들었을 때,
그가 잠깐 호흡을 멈췄다는 걸.
“부탁처럼 들리는군요.”
그가 낮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델린은 즉시 잘라냈다.
“당신이 친위 서고 구조를 아는
유일한 인력이니까요.”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말도 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델린은 그가 방금
호출이 아니라 동행 요청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차이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기록 이력서만 접어 넣었다.
도로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
저는 남아서 감찰 눈 돌리고
장부 숨기고
거짓말도 적당히 하겠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아델린이 말했다.
“그럼?”
“사실의 일부만 말하세요.”
“와, 그게 더 무섭네.”
낮 동안 아델린은
실제로 아무 일도 안 하는 척했다.
지급 정정 결재,
일반 보직 이동 검토,
파면심사실 질의서 회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유령직위 사건에 비하면
일부러 숨 고르기처럼 느껴졌다.
기디온은 점심 무렵 한 번
사무실 앞을 지나가며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도로시는 그걸 보고
더 짜증 난 얼굴을 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궁정 등불이 한 단계 낮춰졌을 때
아델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안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사전 지시는 없습니까?”
그가 묻자
아델린은 짧게 답했다.
“하나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오늘은 멋대로
앞서지 마세요.”
카시안이 작게 웃었다.
“그건 팀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위 회랑은 밤이 되면
이상할 만큼 정돈되어 보였다.
낮엔 지나가는 사람과 문서와 보고서가
뒤엉키는 자리인데,
밤이 되면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 제자리에 돌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사람이 사라진 공간은
권한만 남기 쉽기 때문이다.
카시안이 앞장서서
의전실 뒤 회랑 끝 벽면까지 걸어갔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초상화와 촛대,
대리석 벽,
틈 없는 바닥.
그는 촛대 아래 금속 장식 하나를 누르고,
초상화 모서리를 아주 조금 밀었다.
소리 없이
벽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났다.
“진짜 있네.”
아델린이 낮게 말했다.
“실망하셨습니까?”
“황궁이 상식적일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습니다.”
안쪽은 생각보다 좁았다.
계단은 아래로 이어졌고,
벽면마다 작은 봉인문이
박혀 있었다.
숫자 대신
직위명이 적힌 형태였다.
친위 경호기록 보류.
전시 조달 원본.
황태자 교육계 정리본.
봉인 열람 대기.
아델린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여긴 단순한
황제 개인 문서 창고가 아니었다.
공식 문서 흐름에서 밀려난 것들,
너무 위험해서 바로 폐기 못 한 것들,
누군가 감추고 싶어
잠가 둔 것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카시안이 가장 안쪽 문 앞에 멈췄다.
친위 서고 봉인인 관할
문 손잡이는 없었다.
대신 중앙에
얇은 금속판만 박혀 있었다.
아델린이 손을 대자
차가운 울림이 올라왔다.
살아 있는 권한이었다.
담당자는 없는데 권한은 남아 있어
밤마다 문서를 옮기는 종류의,
지독히 황궁다운 잔재.
“열 수 있습니까?”
카시안이 묻자
아델린은 금속판 위 결을 읽었다.
“정식으론 불가능.”
“비정식으론?”
“문장을 속이면 됩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현행 인사팀장 권한으로는
안 열리지만,
위치 이탈 문서 원위치 확인 조항을 쓰면
봉인인 권한의 이동 흔적을
추적할 순 있어요.”
카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피 냄새 나는 규정이군.”
“당신 말투를 이해하게 된 건
불쾌하지만, 네.”
아델린은 인장을 꺼내
금속판 가장자리에
아주 얕게 눌렀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결을 비틀어
옆문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금속판 아래 숨어 있던
옛 글자들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동된 문서는
봉인인이 기억한다.
“기억을 따라가겠다는 건가.”
카시안이 중얼거렸다.
“네.
그러니 제가 멈추라고 하면
멈추세요.”
이번엔 그가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금속판이 한 번
차갑게 떨리더니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친위 서고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대신 구조가 이상했다.
서가가 일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둘러서 있었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얇은 철제 레일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밤마다 위치를 바꾼다는 문서 답게,
실제로 서가 전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구조였다.
지금도 그렇다.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서가 하나가 왼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숨처럼 났다.
아델린과 카시안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살아 있군요.”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직위가요, 서고가요.”
“둘 다.”
원형 서가 중심에는
작은 받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얇은 장부 하나가
홀로 놓여 있었다.
야간 이동 기록.
아델린이 장부를 펼치자
날짜와 문서 분류만 적혀 있었다.
가족 기록 보류 이동.
황태자 교육계 이관.
북서 결계 보류 원문.
친위 서고 봉인 유지.
그리고 가장 최근 줄.
초기 왕명 단편 보류.
아델린의 시선이 멎었다.
“왕명.”
카시안도 그녀 옆으로 다가와
장부를 내려다봤다.
늘 느슨한 표정이던 얼굴이
이번엔 아주 조용하게 굳었다.
“첫 명령일 가능성이 높군.”
“왜 그렇게 보죠.”
“초기 왕명이라고 적을 때,
보통 저 표현은 하나뿐이니까.”
서가 한 칸이 다시
미세하게 움직였다.
카시안이 먼저 시선을 올렸다.
“저쪽입니다.”
“근거.”
“종이 냄새가 달라졌어요.”
아델린은 그 비논리적 설명에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따라갔다.
놀랍게도 그쪽 서가에만
다른 칸보다 두꺼운 봉인띠가
겹쳐 있었다.
그녀는 금속표를 읽었다.
열람 불가.
왕좌 직속.
카시안이 한 걸음 앞서려 하자
아델린이 손목을 잡아 막았다.
“멋대로 앞서지 말라고 했죠.”
그는 잠깐
그녀 손을 내려다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번엔 누구도 그 손을
먼저 떼지 않았다.
아델린이 먼저 손을 거두며 말했다.
“봉인 결이 얕습니다.
물리력으로 열지 말고,
이동 흔적을 따라 틈을 열죠.”
카시안은 별말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건 미세하지만
분명한 신뢰였다.
이전 같으면
자기가 먼저 열려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는
아델린이 봉인 결을 읽는 동안
옆에서 주변만 살폈다.
아델린은 그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이 남자는 늘 먼저 움직이거나
먼저 포기하는 쪽이었는데,
지금은 자기 손을 멈추고
그녀 쪽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린은 서가 옆면의
얇은 틈에 인장을 댔다.
현행 권한으로 열람은 못 해도,
이동된 위치를 확인할 권리는 있다.
규정의 아주 좁은 틈이었다.
금선 하나가 틈새를 따라 번졌고,
숨겨져 있던 작은 서랍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안에는 낡은 양피지 반 장과
봉인띠 조각,
그리고 케스트 가문 기록 이관표가
함께 들어 있었다.
아델린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가족 기록이 정말로
여길 거쳐 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을 붙잡은 건 양피지였다.
너무 오래돼
가장자리가 거의 재처럼
부서지고 있었지만,
중앙 몇 줄은
아직 읽을 수 있었다.
왕실 원문에서만 쓰는 옛 필식.
그리고 첫 줄 머리의 문장.
첫째,
왕좌를 세운 날의 검은
그 아래가 찢겨 있었다.
다음 줄엔
더 짧게 남아 있었다.
왕좌가 존재하는 한
놓이지 아니한다
아델린의 손끝이 굳었다.
카시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오히려 방 안 침묵이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양피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얼굴엔 늘 있던 냉소가 없었다.
놀람이라기보다는,
너무 오래 전
잃어버린 문장을
다시 마주친 사람의 표정에 가까웠다.
“이게.”
아델린이 낮게 말했다.
“당신 직위의 원형입니까?”
카시안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적어도 시작은 되겠죠.”
그는 손을 뻗다 말고 멈췄다.
“더 읽히지 않습니까?”
아델린은 찢긴 결을 살폈다.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떼어 낸 흔적이었다.
단순 훼손이 아니라
분리 보관.
누군가 문장을 나눠
여러 곳에 숨겼다.
“아니요.
일부러 잘라냈습니다.”
“누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사람들.”
아델린은 케스트 가문 이관표와
양피지를 함께 챙겼다.
그때 바깥에서
금속이 맞물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 계단을 밟고 있었다.
카시안의 시선이
즉시 문 쪽으로 튀었다.
“누가 옵니다.”
“기디온?”
“아니면 서고 자체가
주인을 부른 거겠죠.”
설명은 건조했지만
판단은 빨랐다.
아델린은 곧장 양피지를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카시안은 더 묻지 않고
주변 등불 하나를 꺼
서가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둘이 함께 움직이는 속도가
이제는 처음보다
눈에 띄게 빨라져 있었다.
계단 위에 그림자가 비치기 직전,
그들은 다시
비밀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회랑에 도착해서야
아델린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카시안이 옆에서 물었다.
“후회합니까?”
“무엇을.”
“황제 폐하 명을 받은 바로 다음 날 밤,
친위 서고를 턴 것.”
아델린은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표현은 과격하지만,
아니요.”
카시안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군.”
“대신.”
아델린이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고,
가족 기록과 왕명 단편을
같은 서고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제법 불길했죠.”
“불길한 정도가 아니라
구조적입니다.”
그녀는 안쪽 주머니 위로
손을 얹었다.
왕좌를 세운 날의 검은
왕좌가 존재하는 한
놓이지 아니한다
카시안의 직위명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왕조 첫날부터 사람을 부품으로 박아 넣은
명령의 잔재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이
이제 그녀 손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