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리 대신 선택
정리 대신 선택
회색 보관함 바퀴는
청문장 바닥을 오래 긁었다.
멈춘 뒤에도
그 소리가 귓속에 남는 종류였다.
사람 하나를
번호로 부를 때와 비슷했다.
한 번 울리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운반대 맨 위 상자엔
여전히 검은 먹글씨가 선명했다.
`제7선봉대 유족 보상 심의부`
그 아래엔
가계 이름들.
살아남은 사람보다
더 넓게 번지는 약점들.
청문장 안의 시선이
카시안에게서
상자들로 옮겨 갔다.
그 순간 아델린은 알 수 있었다.
라우렌스는
처음부터 이 청문을
사람 하나의 처리 문제가 아니라
가문 단위 관리 문제로 키울 생각이었다.
사람을 하나씩 보지 않고
줄 단위로 보는 방식.
황궁이 가장 익숙해하는 폭력이었다.
라우렌스는
운반대 앞에 선 채
정중하게 말했다.
“이제야 자료가 갖춰졌군요.”
정말 좋은 소식을 맞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지나치게 평온했다.
“대시종장.”
아델린이 먼저 끊었다.
“가족 자료는 즉시 봉인해야 합니다.
피해자 보호 절차 없이
공개석에 둘 사안이 아닙니다.”
라우렌스는
그 말에도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보호라.”
그는 상자 하나 위에 손끝을 얹었다.
“케스트 팀장께선
오늘 유독 그 단어를 자주 쓰는군요.
하지만 국정은
보호만으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정리도 필요하지요.”
정리.
그 단어가
청문장 안에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아주 작은 고개 끄덕임이 생겼다.
피곤한 사람들은
대개 정리라는 말을 좋아했다.
빨라 보이니까.
누군가 덜 다치는 것처럼 들리니까.
실제로는
누가 대신 다칠지만.
라우렌스는
미리 준비해 둔 기록판을 펼쳤다.
빛글자가
공중에 줄 단위로 떠올랐다.
`임시 정리안`
`1. 기동 잔류자 및 가족 연동 가계 전원 이동 제한`
`2. 유족 지원 및 배급 권한 중앙 봉인`
`3. 관련 가계 기록 전수 재검토`
`4. 직원번호 0001 임시 봉인축 복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문장 뒤쪽 몇 자리가
안도에 가까운 숨을 내쉬었다.
문장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장은
언제나 사람을 안심시킨다.
그 결과가
누군가의 인생을 찢어 놓더라도.
세린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도로시는
욕설을 겨우 삼킨 얼굴로
상자와 빛글자를 번갈아 봤다.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이제는 그 정도 문장에
비웃음조차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라우렌스가 계속 말했다.
“가족 연동이
실제 기동 위험과 결부된 이상,
개별 사정에 매달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원은 일시 봉인하고,
이동은 제한하고,
핵심 축은 안정화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안입니다.”
아델린은
그 마지막 문장에서
문득 자기 가족 기록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빠르고 안전한 안.
그 말로 밀린 발령 하나가
집안을 얼마나 오래 망가뜨리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입을 열 수 있었다.
“반대합니다.”
짧았고,
그래서 더 명확했다.
청문장 안의 시선이
다시 그녀 쪽으로 몰렸다.
아델린은
자기 앞에 든 문서를
이번엔 숨기지 않았다.
`산 자의 규정`
그리고 그 뒤에
한 장을 더 펼쳤다.
새 제목이
은빛 봉인 아래 드러났다.
`기동 계약 피해 구조개편 임시안`
몇몇 기록관이
바로 펜을 들었다.
라우렌스는
웃지도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아델린이 뭘 내놓을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델린은
증인석 옆 자리에서
단상 전체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정리안은
피해자와 가족을 다시 장부에 묶는 안입니다.
위험을 줄이는 게 아니라
통제 대상을 넓히는 방식입니다.
전 그 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문서를 한 장 넘겼다.
“대신 구조개편안을 제출합니다.
첫째,
가족 연동 문구와 유예 코드는 즉시 효력 정지.
둘째,
기동 잔류자와 가족은 위험군이 아니라
보호 증인군으로 재분류.
셋째,
인사팀,
결계국,
회계국 공동 조사반을 신설해
휴면 충성 계약 라인을 해체.
넷째,
직원번호 0001에 대한
동의 없는 축 복귀 및 봉인 전환 금지.”
도로시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말은 길지만
이번이 더 사람답네.”
세린이 바로 받았다.
“기술적으로도 맞습니다.
잔류선을 끊으려면
사람 묶을 게 아니라
호출 경로를 해체해야 합니다.”
라우렌스가
부드럽게 시선을 돌렸다.
“세린 실무관.
그 해체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완전 해체는 길죠.
하지만 그래서 사람을 묶자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진 않습니다.”
세린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시간이 든다는 것과
다시 목줄을 채운다는 건
같은 말이 아닙니다.”
뒤쪽 실무석에서
`정리안이 낫다`는 중얼거림이 먼저 나왔다.
반대편에선
상자 맨 위 먹글씨를 본 누군가가
말을 삼켰다.
라우렌스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비용을 묻죠.”
그는 일부러
아델린 쪽 문서를 보며 말했다.
“가족 연동을 모두 정지하면
배급 체계부터 흔들립니다.
공동 조사반을 꾸리면
타 부서 권한도 건드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번호 0001을 다시 축에 세우지 않겠다면
황궁 중심결계의 불안을
누가 책임집니까.”
아델린은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책임집니다.”
청문장 안이
한 번에 조용해졌다.
그건 모두가 기다리던 문장이면서
정말 들을 줄은 몰랐던 문장이었다.
라우렌스는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웃음을 거두었다.
“어떤 권한으로요.”
“황실 인사팀장 권한으로
구조개편안을 올립니다.
필요하다면
개혁 실무 책임까지 함께 겁니다.”
“그건 행정 책임이지
결계 책임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동 조사반을 구성하자는 겁니다.”
아델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다시 묶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껏 묶어 온 구조를 끊는 방식으로.”
라우렌스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궁이 다시 흔들리면요.”
아델린은
그 질문 속에 숨은 진짜 뜻을 알았다.
결국 묻는 건
황궁이 아니라 카시안이었다.
그를 다시 묶지 않겠느냐.
그 한 문장을
더 길게 포장해 놓은 것뿐.
아델린은
문장 하나하나를
더 또렷하게 끊어 말했다.
“직원번호 0001을
다시 봉인축으로 돌리는 안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아델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이 사건 실무에서
저를 배제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 결론엔 반대하겠습니다.”
이번엔 술렁임이
아예 공개적으로 번졌다.
기디온이
기록판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이해충돌 기재는
들어가겠군요.”
귀족석 뒤쪽에선
“배제해야지.”
하는 낮은 말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카시안은
증인석에 앉은 채
아델린의 옆모습만 봤다.
그녀는 지금
옳은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손해 나는 쪽을
직접 고르고 있었다.
그 차이를
카시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람들은 늘
좋은 말은 쉽게 했다.
문제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뭘 버리느냐였다.
“그렇게까지 하지 마십시오.”
카시안이
아주 낮게 말했다.
아델린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번엔 합니다.”
라우렌스는
곧장 다음 화살을 꺼냈다.
“그 발언,
개혁 실무 책임자가 아니라
사적으로 연루된 사람의 감정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하셨습니까.”
아델린은
그가 결국 이쪽으로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놀란 건 오히려
청문장 뒤쪽 사람들이었다.
이제야
다들 구경하던 싸움이
사람 얼굴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라우렌스는
운반대 맨 뒤쪽의 얇은 서류철을
시종에게 집어 들게 했다.
`케스트 가계 좌천 및 발령 조정 기록`
그 먹글씨가
청문장 중앙에 들리는 순간,
아델린은
숨을 한 번 고르게 쉬었다.
피할 수 있는 순간은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안건에서 손을 떼고,
권한을 잠시 내려놓고,
카시안 문제와 구조개편안을 분리하면
적어도 자기 자리 일부는 지킬 수 있었다.
실제로 자기 집안을 무너뜨린 순서도
늘 비슷했다.
먼저 외곽 발령.
그다음 보상 유예.
마지막이 기록 열람 제한.
아델린은
그 끝을 이미 봤다.
그래서 이번엔
같은 순서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라우렌스가 물었다.
“케스트 팀장.
본인의 가계 기록이
유사한 발령 조작과 좌천 문제를 포함한다는 사실,
부정하십니까.”
아델린은
시종 손에 들린 서류철을 봤다.
낡은 종이.
오래된 먹.
자기 집안을 무너뜨린 기록이
이제는 남을 묶는 도구로 다시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에 모욕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도 조금 차분해졌다.
너무 익숙한 방식이라서.
“부정하지 않습니다.”
청문장 안 숨소리가
낮게 흔들렸다.
라우렌스는
그 반응을 충분히 즐긴 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케스트 팀장의 판단은
공적 기준이 아니라
개인적 복수심에 근거한 것 아닙니까.”
그 질문은
청문장 전체가 대신 던지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럽고,
그래서 강했다.
아델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종 손에 든 서류철을
직접 받아 들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라
복도 쪽 기록관 하나가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델린은
서류철을 펼쳤다.
낡은 문장들이
눈에 익을 만큼 잔인했다.
`이의 제기자 외곽 발령`
`가계 보상 심사 유예`
`기록 열람 제한`
단어만 바뀌었지
방금 라우렌스가 내놓은 정리안과
거의 같은 구조였다.
아델린은
그 문장을 공개석 앞에서 그대로 읽었다.
일부러 또렷하게.
누구도
나중에 다르게 요약하지 못하게.
그리고 서류를 덮었다.
“네.
제 가족도 같은 방식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압니다.
이 문장들이
사람을 밖으로 밀고,
보상을 끊고,
이름을 지운다는 걸.”
라우렌스가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아델린이 끝까지 밀어붙였다.
“제 가계 기록까지
안건에 포함하십시오.
이걸 제 편파의 증거로 적고 싶다면
그렇게 적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청문장 전체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제 결론은 바뀌지 않습니다.
전 정리안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카시안 렘브란트를
다시 봉인축으로 돌리는 안에도 반대합니다.”
이름.
이번에도 숫자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카시안은
그 한 문장을 듣는 순간
자기 안 어딘가 오래 굳어 있던 게
아주 조금 금 가는 걸 느꼈다.
누군가 자길 지키겠다고 말하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쓸모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아델린이 지키는 건
그보다 훨씬 번거로운 쪽이었다.
쓸모보다 사람을 남기는 쪽.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고,
그래서 더 믿고 싶어졌다.
라우렌스는
그 미세한 기류 변화까지도
그냥 두지 않았다.
“좋군요.”
그는 오히려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스트 팀장은
자기 가계 기록이 걸린 상태에서도
사건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청문은
편향된 실무 책임자의 공개 고집쯤으로
정리해도 되겠군요.”
“안 됩니다.”
이번엔
아델린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가 끊어들었다.
에드윈 벨노아가
상단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그가 직접 일어나자
청문장 전체가
뒤늦게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는 입회자였던 사람이
비로소 황제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에드윈은
천천히 청문장 아래를 내려다봤다.
운반대,
상자들,
증인석 번호판,
아델린 손에 든 낡은 가계 기록,
그리고 카시안의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어깨까지.
그는 모두를 본 뒤
낮게 말했다.
“오늘 들은 건
둘 중 하나를 정리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라우렌스가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공안상 결론은 빠를수록…”
“빠른 결론이
항상 옳은 결론은 아니지요.”
에드윈은
아델린이 준비실에서 했던 말을
조금 다른 형식으로 되돌려 주었다.
“한쪽은 사람을 다시 묶자고 하고,
다른 쪽은 묶어 온 구조를 해체하자고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확인해야 할 건
누가 더 두려운가가 아니라
원문이 어디에 묻혀 있느냐입니다.”
그 말에
아델린과 도로시가 거의 동시에
운반대 상자들의 봉인을 봤다.
회색 보관함 측면,
거의 지워질 만큼 흐린
옛 금박 표식 하나.
마티아스 렌의 보상 서류 봉투에서 봤던
그 낡은 봉인 계통과 같았다.
황제 친위 서고 봉인인의
금박이었다.
도로시가
거의 숨처럼 말했다.
“저거,
마티아스 렌 봉투에 있던 거랑 같아요.”
아델린이 먼저 알아봤고,
카시안도 바로 눈을 좁혔다.
라우렌스의 표정이
그제야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에드윈은
그 반응 하나로 충분하다는 얼굴이었다.
“답은 청문장에 없군요.”
그가 말했다.
“제0서고 최심부에 있겠지.”
청문장 안에
처음 듣는 단어처럼
침묵이 번졌다.
제0서고.
황궁 안에서도
이름만 남고 실제로는 닫혀 있다고 여겨지는 곳.
오래된 직위와
첫 명령의 잔흔이 묻혀 있다는 소문만 있는 곳.
에드윈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정리안과 구조개편안은
둘 다 보류한다.
원문부터 본다.”
“황제 직명으로 명한다.”
그 한마디에
기록관들 펜이 다시 일제히 움직였다.
“황실 인사팀장 아델린 케스트.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
숫자와 이름이
이번엔 같은 문장 안에 놓였다.
“즉시 제0서고 최심부에 진입해
휴면 충성 계약과
왕조 첫 명령의 원문 잔흔을 회수하라.”
청문장 누구도
곧장 말하지 못했다.
너무 급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 명령이
결국 아무도 피해 가지 못할 방향으로
판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라우렌스는
정리안을 밀어붙이던 손을 잠시 멈췄고,
아델린은 손안 서류철을 더 세게 쥐었고,
카시안은 처음으로
오늘의 끝이 청문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끝은
둘이 함께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