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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면 계약실 일러스트

휴면 계약실

휴면 계약실

공식 보고는

늘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증거를 없앴다.

아델린은 전날 보존고에서 가져온

비공식 복사본을

아침 내내 세 번 정리했다.

원본 문구,

봉인 흔적,

헤일 가문 분류기호,

부친의 재청원 사본.

문장은 짧았고

증거는 엉성했다.

하지만 방향은 명확했다.

케스트 가가 무너진 방식은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인 제거였고,

그 구조는 유령직위 사건들과

같은 뿌리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한 가족을

잘라 냈는가.

아델린은 책상 위에

얇은 투명판을 펴고,

가족 기록 속 문구들을

지금까지 쫓은 사건 코드 옆에

하나씩 옮겨 적었다.

상위 유지 직위 관련 항목.

가계 전체 인사 노선 정리.

대시종가 내규에 따라

추가 열람 금지.

그리고 그 옆에,

GP-001 종각.

GP-002 북문.

GP-008 전몰 보상.

GP-012 왕좌의 영원한 검.

이 선들이 어디에서 만나는지 찾는 건

결국 행정 작업이었다.

감정은 방향을 가리킬 수는 있어도

증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그녀는 같은 단어를

여러 번 겹쳐 읽었다.

유지.

보존.

전환.

표현은 달라도

의도는 비슷했다.

한 번 묶인 사람을

제도 바깥으로 보내지 않고,

다른 형태로 붙들어 두려는 의도.

카시안은 창가 쪽에서

그 과정을 한참 지켜보다가 말했다.

“오늘은 다른 의미로

무서운 얼굴입니다.”

“유용한 얼굴이라고

표현해 주세요.”

“지금은 칭찬이

잘 안 어울리는데.”

아델린은 투명판 위

마지막 빈칸에

물음표를 적었다.

“빠진 고리가 있습니다.”

“남서 쪽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카시안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말했다.

“어제 문서에 있던

상위 유지 직위라는 표현.

왕조 초기엔 결계 유지선,

보급 유지선,

명령 유지선을 다 묶어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북문과 종각이 이미 나왔으니,

남은 축은 남서 결계선일 가능성이 높죠.”

아델린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왜 그걸 이제 말합니까.”

“확신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있습니까.”

“팀장님 가족을 잘라 낸 문장까지

보고 나니,

추측으로 넘길 수는 없어졌습니다.”

그 답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따지기 어려웠다.

문이 벌컥 열리며

도로시가 들어왔다.

손에는 낡은 대장 세 권과

새벽에 빼 온 듯한

급행 봉투가 들려 있었다.

“두 분 다 표정이 살벌해서

좋은 소식 같진 않지만,

어쨌든 찾았습니다.”

그녀는 대장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오래된 결계 유지 물품 반입표예요.

이상하게도 남서 구역만

감시 수정구 교체 비용이

세 배로 잡혀 있어요.

그런데 실제 교체 기록은 없습니다.”

아델린이 바로

책을 당겼다.

황궁 남서 결계 청지기 명의

특별 반입.

그 줄이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돼 있었다.

담당자 이름은 없음.

승인란은 비어 있고,

눌린 흔적만 남아 있었다.

“GP-007.”

아델린이 낮게 말했다.

도로시가 눈을

깜빡였다.

“이미 알고 계셨어요?”

“이제 알았습니다.”

카시안이 대장 옆 장부를

넘기며 물었다.

“반입 물품 종류는.”

도로시가 페이지를 짚었다.

“봉인 수액,

기억 완충제,

결계 절연포,

장기 보존용 은사 가루.”

잠깐 정적이 생겼다.

아델린이 시선을 들었다.

“결계 청지기가

왜 기억 완충제를 씁니까.”

도로시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목소리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죠.

유지 물품 목록인데

사람한테 쓰는 약제가 섞여 있어요.”

카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굳었다.

“휴면 처리군.”

아델린이 그를 봤다.

“설명해 주세요.”

“전쟁 막바지에

잠깐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명령을 걸어 두되

당장은 쓰지 않고,

필요할 때 깨우는 계약 방식.

공식 채택은

안 됐어야 맞습니다.”

“안 됐어야.”

“네.

당시에도 반대가 심했습니다.

사람을 창고 물품처럼

보관하는 발상이었으니까.”

도로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황궁은 정말 가끔

인간을 대단히

물건처럼 다루네요.”

아델린은 장부를

더 빨리 넘겼다.

뒷장에는 출입 시각이 적혀 있었다.

거의 모두 밤중.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같은 표기가 반복됐다.

감시 일시 정지.

남서 3구역.

7호 계단.

그 아래 승인자란 역시 공란.

“감시가 꺼지는 구간까지 있군요.”

도로시가 기다렸다는 듯

봉투를 열었다.

“이건 세린 실무관이 보낸 거예요.

아까 새벽에 살짝 물어봤더니

바로 답을 주더라고요.”

짧은 쪽지에는

세린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남서 3구역 감시선은

명예직화된 청지기 권한이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이상 구간임.

현 시각 기준

야간 2시 13분부터 8분간

시야 단절 발생.

비권장.

그래도 가겠다면

결계 반동을 각오할 것.

아델린은 종이를 접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오늘 밤 갑니다.”

도로시가 바로 물었다.

“정식으로요.”

“아뇨.”

“이젠 놀랍지도 않네요.”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요.

정식으로 움직이면

기록이 먼저 사라집니다.”

카시안은 조용히

대장을 덮었다.

“저 혼자 들어가는 편이 낫습니다.”

아델린은 즉답했다.

“안 됩니다.”

“남서 결계선이면

오래된 반응이 남아 있을 겁니다.

팀장님은 또

편두통이 올 거고요.”

“그래서 같이 갑니다.”

카시안이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논리가 반대 아닌가요.”

“아니요.

혼자 보내면 당신은

중요한 걸 혼자 판단할 겁니다.”

그는 잠시 웃지 않았다.

아델린은 이어 말했다.

“이제 당신 일과

제 가족 일을 따로 부르지 않겠습니다.

같은 구조를 쫓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정보도

따로 보관하지 마세요.”

말이 끝나자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도로시조차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아델린은 스스로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방금 한 말은

업무 지시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선을 하나 지운 말이었다.

당신 쪽과 내 쪽을

따로 두지 않겠다는 선언.

도로시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업무 협조라기보다

공동 범죄 같은데.”

“메모는 하지 마세요.”

“네.

대신 두 분 알리바이는

제가 만들게요.”

도로시는 금세

실무자다운 얼굴로 돌아왔다.

“야간 급여 대조 오류가

하나 생긴 척 해 둘게요.

팀장님은 기록실,

감시관님은 보안 점검.

겹치지 않게 남겨 두면

적어도 아침까진 버팁니다.”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카시안이 도로시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돕습니까.”

도로시는 코웃음을 쳤다.

“죽은 사람 월급에서 시작했더니

이제 살아 있는 사람을

창고에 넣어 둔 흔적까지 나오잖아요.

여기서 발 빼면

제가 밤에 잠이 오겠어요?”

그 말은

도로시다운 방식의 성실함이었다.

밤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

남서 3구역은

황궁의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이쪽은 오래전에 사용이 줄어든

보조 회랑과 외벽 유지 통로가 이어져 있어

야간 순찰도 드물었다.

돌바닥은 차가웠고,

천장 가까이에 박힌 감시 수정구는

세린의 말대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아델린은 손목 안쪽에 묶은

얇은 해석띠를 조정했다.

마력 반응이 올라갈 때

두통을 미리 경고하는 간이 도구였다.

카시안은 그녀보다 반 걸음 앞서 걷다가,

감시 수정구가

완전히 어두워지는 순간 멈췄다.

“지금입니다.”

그들은 7호 계단으로

꺾어 들어갔다.

계단 아래는

예상보다 더 좁았다.

낡은 유지 통로라

성인 둘이 나란히 지나가기 어려웠다.

아델린이 앞장서려 하자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갑니다.

바닥 문양이 죽지 않았습니다.”

“어두워서 보입니까.”

“어둠보다 오래 살아 봤습니다.”

아델린은 그 말에

더 반박하지 않았다.

카시안이 앞에서

낡은 금속판과 마모된 봉인선을

하나씩 확인하며 길을 열었다.

통로는 몇 차례 꺾였고,

중간쯤부터는

공기 냄새가 달라졌다.

오래된 먼지 냄새 속에

약품과 금속과 밀랍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카시안이 손을 들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앞쪽 벽면이

막다른 길처럼 보였지만,

중앙의 돌 무늬 하나만

닳는 방향이 달랐다.

아델린이 가까이 다가가

해석 마력을 얇게 흘리자,

표면 아래 숨은 문장이 떠올랐다.

유지자는 잠든 충성을

점검할 권한을 가진다.

아델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걸 권한 문장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군요.”

카시안이 벽에 손을 댔다가

곧 떼었다.

“단독으론 안 열립니다.”

“왜죠.”

“증인과 해석자가

같이 있어야 해요.”

아델린은 그를 봤다.

“처음 듣는 조건입니다.”

“처음 보는 방이니까요.”

둘은 잠깐

서로를 마주봤다.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었지만,

동시에 둘이 함께 있어야만

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델린은 조용히 말했다.

“좋습니다.

저는 해석자로 접근합니다.

당신은 증인으로.”

카시안이 입꼬리를

살짝 움직였다.

“명령입니까.”

“아뇨.

협정이죠.”

그 한마디 뒤에

이상하게 짧은 정적이 생겼다.

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벽면 낮은 홈 위에 얹었고,

아델린은 그 위 문장을

읽어 내렸다.

“직명록 대조.

숨은 권한 확인.

현장 증인 입회.”

차갑던 돌벽이

낮게 울렸다.

금 가듯 희미한 빛이

선을 따라 번지더니,

막다른 벽 일부가

소리 없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열린 건 방이 아니라

오래된 복도였다.

안쪽 공기는

바깥보다 더 차가웠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결계 특유의

얇은 진동이 있었다.

아델린은 한 발 들어서는 순간

해석띠가 짧게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복도 끝에는

둥근 문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 손바닥만 한 동판이

붙어 있었다.

남서 유지 보존실 2.

비상시 외부 명령 전환 가능.

카시안의 목소리가

전과 달리 딱딱해졌다.

“보존실이 아닙니다.”

“네.”

아델린도

같은 결론에 닿아 있었다.

“실험실이군요.”

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둥근 방 안에는

벽을 따라

낮은 석관 같은 장치가

열둘 놓여 있었다.

관이라고 하기엔 얕고,

침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단했다.

각각의 머리맡에는

금속 고정대와 얇은 인장판이 달려 있었고,

팔을 얹는 부분에는

은사로 짠 고리가 남아 있었다.

중앙 작업대 위에는

마른 약병,

주입관,

계약 문장 시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벽면에는

큰 판이 세워져 있었다.

휴면 충성 계약 전환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델린은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정말 있었군요.”

카시안은 방 안을 둘러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늘 가볍게 넘기던 사람이

이번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석관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조금씩 무거워졌다.

“이런 설계 초안은

본 적 있습니다.”

아델린이 고개를 돌렸다.

“실물은요.”

“없어야 했습니다.”

그 답은 거의

이를 악문 소리에 가까웠다.

작업대 위 문서들은

절반쯤 삭아 있었지만,

핵심은 읽을 수 있었다.

충성 대상 부재 시

휴면 유지.

명령 갱신 시

재기동 가능.

기억 저항 강한 대상은

완충제 증량.

장기 보관을 위해

결계선 인접 구역 사용.

아델린은 문서를

한 장씩 넘기며 말했다.

“이건 대체 인력을

보관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비 충성체를

만드는 거죠.”

카시안의 대답은

건조했지만,

그 속엔 노골적인 혐오가 섞여 있었다.

아델린은 석관 옆 인장판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칸은 모두

긁혀 지워져 있었고,

직위 칸에도 대부분

먹칠이 돼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장치 아래,

지워진 글자 밑으로

일부가 남아 있었다.

봉인 보조기사.

그 아래 더 희미한 줄.

제7.

카시안의 손이

순간 멈췄다.

“제7선봉대.”

그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아델린은 곧장 물었다.

“당신 부대 사람들입니까.”

“확신은 못 합니다.

하지만 계통은 맞아요.”

그는 석관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오래된 은사가 바스러졌다.

“전쟁 끝 무렵,

부상당한 기사들 일부가

재배치 검토 대상이 됐습니다.

다들 치료나 퇴역 얘기인 줄 알았죠.

설마 이런 식일 줄은.”

아델린은

그 표정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보게 됐다.

냉소도 농담도 없는 얼굴.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

오래된 배신을

다시 만났을 때의 표정.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이후로,

아는 건 전부 말해 주세요.”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도 꽤 말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당신 기준이겠죠.”

아델린은 방 안 중앙 작업대에

가족 기록 사본과

방금 찾은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제 가족 기록,

당신 계약,

전몰기사 보상,

남서 유지선.

전부 같은 구조입니다.

누군가 사람을 보관하고,

필요할 때 다시 쓰기 위해

기록을 잘라 냈어요.”

카시안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 이제 선택하세요.

계속 반만 말할 건지,

아니면 저와 같은 쪽에 설 건지.”

그는 조금 웃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같은 쪽.”

짧고 빠른 대답이었다.

아델린은 미세하게

숨을 골랐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혼자 사라지지 마세요.

혼자 결정하지도 말고.”

카시안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건 기사에게

꽤 어려운 요구입니다.”

“기사로 받지 마세요.”

아델린이 또렷하게 말했다.

“이번엔 제 협조자도,

제 정리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는

당신을 이런 구조의 부품으로

남겨 둘 생각도 없습니다.

동맹으로 받아들이세요.”

방 안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카시안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조건 하나.”

“뭡니까.”

“팀장님도

혼자 책임지지 마십시오.”

아델린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가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한 적 없는

방식의 말이었다.

책임은 늘

자기 몫이라고 생각해 왔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카시안이 덧붙였다.

“케스트 가 기록도,

제 계약도,

이제는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니 무너지더라도

반씩 합시다.”

아델린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비합리적이고,

너무 감정적이고,

이상하게도 너무 정확했다.

“무너질 계획은 없습니다.”

“좋군요.

그럼 버티는 것도 반씩.”

이번에는 그녀도

아주 잠깐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한 번

다른 리듬으로 나간 정도였지만,

카시안은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보다 더 오래

아델린에게 머물렀다.

가벼운 농담으로 넘길 수 없는 말을

들었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방 가장자리 석관 하나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꺼져 있던 인장판 아래

작은 선이 붉게 켜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델린은 즉시

작업대 위 주기표를

낚아채 읽었다.

외부 명령선 감응 시

예비 기동.

카시안이 욕설을

아주 짧게 삼켰다.

“우리가 건드려서가 아닙니다.”

“그럼.”

“바깥에서

누가 깨우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번째 석관,

세 번째 석관,

다섯 번째 석관에서

차례로 희미한 진동이 일었다.

중앙 벽면 큰 판에

잠들어 있던 룬 문자가

하나둘 살아났다.

대기.

대기.

감응.

준비.

아델린은 곧장 계산했다.

남서 3구역 감시 단절 8분.

누군가 같은 시간에

명령선을 밀어 넣고 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방을 찾은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쪽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시안은 방 중앙으로

한 걸음 나섰다.

검은 불꽃은 아니었지만,

그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오래된 명령선이

그를 알아보는 반응이었다.

“팀장님,

뒤로.”

“안 됩니다.

기록부터 챙겨야 합니다.”

“깨우는 데 성공하면

기록보다 먼저

사람이 나옵니다.”

아델린은 벽면 판을 훑었다.

최하단에 작은 추가 문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동시 기동 조건 충족 시

전 구역 예비 충성체

순차 각성.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남서 구역 한 방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황궁 어딘가에

같은 구조로 잠들어 있는 계약들이 더 있고,

지금 누군가가

그것들을 한꺼번에

깨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석관 여섯 번째 인장판에

불이 들어왔다.

일곱 번째도.

방 안에

오래된 심장들이 다시 뛰기 직전 같은

진동이 번졌다.

휴면 계약들이 동시에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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