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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와 해방 일러스트

해고와 해방

깨어나는 걸 막는 일과,

깨어난 뒤 책임을 따지는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업무였다.

남서 유지 보존실의 석관들이

하나둘 빛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

아델린은 그 차이를

아주 선명하게 느꼈다.

여기서는 기록보다

사람이 먼저 일어날 수 있고,

사람이 일어나면 기록은 곧바로

누군가 손에 들어간다.

카시안이 중앙으로 나아가자

가장 가까운 석관 하나가

그 반응을 따라

더 강하게 울렸다.

오래된 명령선이

같은 계통의 권한자를

알아본 것이다.

“팀장님,

작업대 오른쪽.”

그가 짧게 말했다.

“정지문 있을 겁니다.”

아델린은 곧장

종이와 인장판이 뒤엉킨

작업대 위를 훑었다.

오래된 약병 아래 깔린 얇은 철판에

작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예비 기동 시

현장 증인은 유지선을

잠정 동결할 수 있다.

그 아래 더 작은 글씨.

단,

원축 보유자가

반응선 내부에 있을 것.

아델린은 읽는 동시에

의미를 이해했다.

원축 보유자.

카시안이다.

“카시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석관들 사이에 서 있었다.

검은 불꽃이 아니었다.

대신 오래된 금속이 식을 때 나는

소리 같은 것이

공기 속에 낮게 퍼졌다.

석관 가장자리의 붉은 선들이

카시안을 향해

미세하게 꺾였다.

아델린은 철판 문장을

크게 읽었다.

“현장 증인 명의로

유지선 잠정 동결.

예비 기동 보류.

반응축 정지.”

방 전체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여섯 번째 석관까지 올라오던 불빛이

일시에 탁해졌고,

벽면 룬들도 절반쯤 죽었다.

하지만 완전히 꺼지진 않았다.

어디선가 계속

명령선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시안이 이를 악물 듯 말했다.

“잠깐뿐입니다.”

“충분합니다.”

아델린은 즉시 서류를 추렸다.

휴면 충성 계약 절차서,

기동 주기표,

명령 갱신 조건,

석관 배치도.

전부 다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만 골라

얇은 복사 필름에 눌러 옮겼다.

카시안의 어깨 위로

붉은 선 하나가 튀자,

아델린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카시안이 낮게 웃었다.

“그 말은

제가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제 차례입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중앙 판의 추가 문장을 떼어냈다.

동시 기동 조건 충족 시

전 구역 예비 충성체

순차 각성.

그 문장만은

반드시 필요했다.

이 사건이 단순히

남서 구역 한 방의 비리가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나갈 때는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통로 뒤쪽에서 다시 진동이 올라왔고,

감시 수정구가 꺼졌다 켜지는 간격도

짧아졌다.

카시안은 막다른 벽이 닫히기 직전까지

뒤를 지켰고,

아델린은 마지막으로

해석띠를 눌러

반응 수치를 기억시켰다.

벽이 닫히고 나서야

둘 다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다음엔

저 혼자 보내십시오.”

카시안이 말했다.

아델린은 즉시 잘라냈다.

“다음도 같이 갑니다.”

“방금 거의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더 그렇습니다.

혼자 보냈으면 당신은

문서를 안 챙기고

석관부터 부쉈을 겁니다.”

카시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사실상 긍정이었다.

새벽이 밝기도 전,

그들은 인사팀 사무실 안쪽 잠금서고에

사본을 숨겼다.

도로시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가

종이 묶음을 보자마자 말했다.

“좋네요.

두 분 다 살아 있군요.

저는 그걸로

일단 만족할게요.”

아델린은 서류를

책상에 올렸다.

“남서 구역은 진짜였습니다.”

도로시 표정이 굳었다.

“얼마나요.”

카시안이 건조하게 답했다.

“사람을 보관하는 정도로.”

도로시는 아주 잠깐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곧장 손을 뻗어

기동 주기표를 집어 들었다.

“이건 숨겨야 해요.”

“압니다.”

아델린은 피곤한 손끝으로

장갑을 정리했다.

“하지만 완전히 숨길 수는 없습니다.

남서 결계 반응이 올라갔으니

이미 결계국과 감찰이

움직였을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이 세 번 두드려졌다.

전달관이었다.

그는 황실 인사원의

은빛 소집패를 내밀었다.

파면심사실 긴급 적법성 심의.

대상.

직원번호 0001 카시안 렘브란트.

안건.

고대 직위 정리 가능성 검토.

도로시가 먼저

욕을 삼켰다.

“빠르기도 하네요.”

아델린은 소집패를

내려다봤다.

빠른 게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남서 구역이 흔들리기만 하면

곧바로 카시안 직위를

정리안에 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파면심사실 회의장은

늘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람을 잘라 내는 문장들이 오가는 방치고는

너무 흠이 없어서

오히려 불쾌할 정도였다.

중앙 긴 탁자 양편으로

인사원 실무자들과 해석실,

결계국,

감찰조정팀 인원들이 앉아 있었다.

상석 한쪽에는

라우렌스 헤일이

참관 명목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델린은 그 사실만으로도

오늘 회의의 방향을

대강 알 수 있었다.

기디온 마르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 남서 구역 감시 단절과

결계 진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직원번호 0001의 현장 반응이

측정됐죠.”

그는 일부러

숫자와 문장만으로 말했다.

이름보다 직원번호가 먼저 나오는 순간,

사람은 이미 안건이 된다.

미리엔 솔트가

차갑게 덧붙였다.

“직전 확인된 고대 직위는

왕좌의 영원한 검.

남서 구역 전환실 반응도

같은 계열로 추정됩니다.”

세린은 손가락으로

자료 한 귀퉁이를 두드렸다.

“결계 실무 입장에서 말하겠습니다.

남서 구역의 기동 징후는

단독 사고가 아닙니다.

원축 계열과 연결돼 있습니다.”

라우렌스는 여느 때처럼

느리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국의 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안건은

단순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탁자 위 첫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직원번호 0001

고대 직위 정리안.

카시안은 아델린의

오른편 끝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회의상 정식 발언권도 없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방 안의 시선 절반 이상은

그에게 걸려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위험한 구조물 하나를

바라보는 눈들이었다.

아델린은 그런 시선이 싫었다.

그러나 싫다고 해서

회의를 망칠 수는 없었다.

심사실장이 말했다.

“인사팀장 아델린 케스트.

당신은 현재 0001 관련 조사의

실무 책임자입니다.

새벽 현장 보고를 제출하세요.”

회의장 공기가

미세하게 조여 왔다.

여기서 그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틀릴 수 있었다.

하나는 카시안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줄이는 것.

다른 하나는 공정함을 증명하려고

필요 이상으로 그를

위험 요소로만 말하는 것.

둘 다 싫었다.

아델린은 일어서서

준비해 온 보고서를 펼쳤다.

“새벽 남서 3구역에서

숨겨진 휴면 충성 계약 전환실을

확인했습니다.”

회의장 여기저기에서

낮은 숨소리가 났다.

“현장에는 석관형 보존 장치 열둘,

명령 갱신 문서,

기동 주기표가 있었습니다.

다수의 휴면 계약이

외부 명령선에 감응해

예비 기동 상태로 진입했습니다.”

기디온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0001이

그 반응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죠.”

아델린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직접 연결이 아니라,

현장 정지문을 발동시키는 데 필요한

원축 보유자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말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델린의 목소리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위험을 일으킨 것과

위험을 멈춘 것은

행정적으로 같은 항목이 아닙니다.”

짧은 정적.

미리엔이 아주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세린은 말없이

자료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그게 동의인지,

단순 사실 확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아델린에게는 충분했다.

라우렌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럼 팀장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같은 계열의 고대 계약이

연쇄 기동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심에 왕좌의 영원한 검이 있다면,

그 직위를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막는 길일 수도

있겠지요.”

해방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대신 정리라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잔인한 선택일수록

가장 단정한 단어를 골랐다.

아델린은 그를

똑바로 봤다.

“정리와 해방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회의장 공기가

한 번 더 멎었다.

라우렌스는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해방을

원해 온 인물 아닙니까.”

이번엔 카시안이 먼저 말했다.

“원한 적은 있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카시안은 여전히

벽에 기대지도 않고,

손도 꼬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죽고 싶은 건 아니죠.”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무거웠다.

아델린은 손 안의 종이가

살짝 구겨지는 걸 느꼈다.

그는 늘 자기 문제를

지나치게 간단한 문장으로

줄여 버렸다.

오래 묶인 사람에게는

그게 버티는 방식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디온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객관적 절차로 가면 됩니다.

직위 정리안 상정,

원문 대조,

결계 영향 평가.

결과가 가능이면 집행,

불가면 보류.”

그 말은 표면적으로는 공정했다.

그래서 더 성가셨다.

아델린이 침착하게 답했다.

“동의합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도로시였다면 당장

표정 관리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델린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감정으로 막으면,

언젠가 다시 같은 안건이

더 불리한 자리에 올라온다.

막아야 하는 건

회의 자체가 아니라,

틀린 절차였다.

“단.”

아델린이 말을 이었다.

“고대 계약직 파면은

일반 징계와 다릅니다.

원문계약 정확 해석,

증인 조건,

반동 방지 결계,

결계 영향 시뮬레이션까지

전부 선행돼야 합니다.

삭제가 해방인지,

사형인지,

제국 단위 재난인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세린이 곧장 받았다.

“결계국도 같은 의견입니다.

현재 정보량으로는

집행 판단이 불가합니다.”

미리엔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문계약 단편과

남서 전환실 문구를 합친 해석이

먼저입니다.”

심사실장이 서류를 넘겼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1차 시뮬레이션을 진행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아델린의 심장이

아주 잠깐 잘못 뛰었다.

바로 지금.

결과가 나온다.

세린과 미리엔은 준비해 온

휴대식 해석판과 결계 계산반을

중앙 탁자로 끌어왔다.

카시안은 증인 자격으로

판 가장자리에 서야 했다.

심사실장은 정리안 표제만큼은

이미 써 둔 듯한 얼굴이었다.

라우렌스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지켜봤다.

아델린은 시뮬레이션 투입값을 제출하기 위해

직접 사본을 올렸다.

남서 전환실 문구,

왕명 단편,

현재 반응 계열,

기동 주기표.

마지막으로,

카시안 직위명.

왕좌의 영원한 검.

그 네 글자를

삭제 가능성 평가서 위에 올려놓는 순간,

그녀는 기묘한 현기증을 느꼈다.

공정하려면

이 문장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하지만 끝까지 읽은 문장이

사람 하나를 죽이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면,

그것도 공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카시안이 아주 작게 말했다.

“팀장님.”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겠습니다.”

그 위로라면 위로였고,

허락이라면 허락이었다.

아델린은 이상하게

그 말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는 벌써

자기 몫의 상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멋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아델린이 낮게 말했다.

카시안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명심하죠.”

세린이 계산반을 활성화했다.

푸른 격자선이 판 위로 올라오고,

미리엔이 계약 문장들을

하나씩 읽어 넣었다.

왕좌를 세운 날의 검은.

왕좌가 존재하는 한

놓이지 아니한다.

다만 검은 처음과 끝에 있어

스스로 다음 명을 고를 권리를

잃지 아니한다.

남서 전환실 문장도

뒤따랐다.

유지자는 잠든 충성을

점검할 권한을 가진다.

비상시 외부 명령 전환 가능.

판 위 격자선이

황궁 전체 축소 모형으로 변해 갔다.

북문,

종각,

서고,

남서 결계선.

그리고 중앙 깊은 곳,

아주 어두운 축 하나가

길게 연결됐다.

카시안이 선 위치를 보는 순간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

세린이 빠르게 수치를 읽었다.

“원축 연동 확인.”

미리엔이 뒤이어 읽었다.

“상위 직위 제거 가정 투입.”

격자선 중앙에서

검은 점 하나가 지워지는

가상 연산이 시작됐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북문 선이 꺾였다.

종각 축이 흔들렸다.

남서 구역 격자가 두 번 깨졌다가 이어붙었고,

친위 서고 봉인선까지

같이 뒤틀렸다.

계산반 위 작은 수치가

순식간에 붉게 치솟았다.

세린이 욕설을 삼켰다.

“붕괴 연쇄.”

기디온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수치화.”

세린이 차갑게 답했다.

“1차 결계 손실률 43.

2차 연쇄 붕괴 예측 71.

봉인축 불안정 임계치 초과.”

미리엔은 해석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마지막 판정 문구를 읽었다.

“고대 직위 GP-012

왕좌의 영원한 검 제거 시도는

황궁결계 핵심 축 손상과

동시 다발적 휴면 계약 기동을

유발할 가능성 높음.”

심사실장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최종 판정은.”

세린이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삭제 불가.”

미리엔이 그 위에

공식 문장을 덧붙였다.

“적법 파면 검토 이전에

구조 재설계 필요.

현 상태 해제 집행 금지.”

회의장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카시안을

잘라 내면 문제가 정리될 거라

믿고 있던 얼굴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숫자를 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위험 인원이 아니었다.

제국이 자기 손으로

뽑아 버릴 수 없는 축이었다.

아델린은 그 문장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안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나쁜 종류의

명확함이었다.

카시안을 지금 방식으로는

해고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해방도,

폐지도,

대체 계약도

전부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라우렌스 헤일이

그 침묵 속에서

아주 조용히 웃었다.

“흥미롭군요.”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불길했다.

아델린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판 위 마지막 문장을 내려다봤다.

황궁결계 붕괴 시뮬레이션 결과.

직원번호 0001 삭제 불가.

그 문장이

오늘 회의의 결론이었고,

앞으로 닥칠 더 큰 반격의

시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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