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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은 특수요원

넥타이는 600초 컷! "윽, 목 졸려." 거울 속에 비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검은색 뿔테 안경. 일부러 도수 없는 알을 끼워 넣은, '어리숙한 연구원' 코스프레용 아이템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내 얼굴이 낯설었다. 평생 입어본 옷이라곤 늘어난 티셔츠 아니면 국방색 전투복, 그것도 아니면 피 냄새 배긴 전술 조끼가 전부였던 내게 이 '문명인의 구속구'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교살용 와이어는 3초면 묶는데, 이놈의 넥타이는 10분이 걸리냐."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아니, 풀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입장권이자, 내 인생 2막을 여는 성스러운 봉인이다. [서준혁 연구원] 목에 건 임시사원증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파브르곤충기술연구소.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정점이자, 전 세계 곤충학자들의 꿈. 그리고 무엇보다… 초봉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 "그래, 준혁아. 참자. 이 넥타이 하나만 참으면 연봉이 찍힌다. 통장에 0이 하나 더 붙는다고." 나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애써 넥타이 매듭을 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실크의 감촉이 낯설었다. 손바닥에 남은 흉터. 소총의 반동을 받아내고, 정글도를 휘두르며, 때로는 맨손으로 적의 목을… 아니, 그만 생각하자. "나는 이제 지성인이다. 나는 박사다. 나는… 민간인이다."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서준혁. 한국대학교 곤충생명공학 박사. 비록 학비 벌려고 군대에 말뚝 박을 뻔했고, 남들 도서관에서 책 펼 때 나는 진흙탕에서 작전지도 펼쳤지만, 어쨌든 박사는 박사다. "출발하자. 돈 벌러." 현관을 나서자 눅눅한 지하 단칸방의 곰팡이 냄새 대신,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반겼다. 이제 이 냄새와도 작별이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할 출근길에 올랐다.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처럼 지옥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인파조차 사랑스러웠다.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죽이려 들지 않으니까. '3시 방향 할아버지, 지팡이 짚고 계시지만 무게 중심이 왼발에 쏠려 있음. 다음 역에서 내리겠군. 9시 방향 여학생, 스마트폰 보느라 주변 경계 제로. 가방 열려 있는데 물건 쏟기 딱 좋네.' ...망할 직업병.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위협 요소를 분석하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안 해도 된다. 여기는 전장이 아니다. 강남역에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연구소의 전경은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유리 온실과 최첨단 연구동이 어우러진 캠퍼스. 정문 앞에는 거대한 장수풍뎅이 조형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신분증 보여주십시오." 정문의 보안 요원이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내 오른쪽 어깨가 움찔했다. 그의 왼손이 허리춤으로 가는 궤적. 호신용 테이저건을 뽑는 데에 3초 정도 걸리려나? 내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낮추고, 상대의 왼손을 움켜쥐고 팔꿈치 안쪽으로 꺾고 사각인 왼쪽 겨드랑이로 파고들며 팔목을 꺾어 제압할… "아, 여기 있습니다." 나는 0.01초 만에 살기를 '사회생활용 미소'로 바꿨다. 보안 요원은 내 어색한 동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무심하게 임시사원증과 신분증을 확인하고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통과하십시오." "수고하십니다!" 나는 씩씩하게 인사하고 정문을 통과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큰일 날 뻔했다. 출근 첫날부터 보안 요원 팔을 부러뜨리고 경찰서로 출근할 뻔했어. '힘 좀 빼자, 서준혁. 제발.' 나는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연구동 로비로 들어섰다.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 은은한 클래식 음악, 커피 향기. 지나가는 연구원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흙먼지와 화약 냄새 대신, 샴푸 향기와 종이 냄새가 났다. "이게… 중산층의 냄새인가." 감동의 눈물이 날 뻔했다. 행복하다. 진짜로. 사실, 내가 여기에 합격한 건 기적이었다. 아니, 기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2주 전, 최종 면접장. 압박 면접으로 악명 높은 파브르 연구소답게 분위기는 살벌했다. "서준혁 지원자." "네!" "군 복무 기간이 꽤 기네요? 부사관으로 오래 근무하셨고. 박사 학위는 전역 후에 따신 겁니까?" 면접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가운데 앉은 중년 남성. 명패에는 [팀장 한승우]라고 적혀 있었다. 전형적인 '심문관' 스타일 눈빛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멘탈을 흔드는 기술.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저는 진짜 심문도 받아봤거든요. 물고문만 없으면 다 친절한 대화죠. "네, 그렇습니다. 가정 형편상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업 군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곤충에 대한 열정은 군 생활 중에도 식지 않았습니다. 비무장지대 수색 작전 중에도 희귀 딱정벌레 생태를 관찰하며 꿈을 키웠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로 관찰했으니까. 물론 그 딱정벌레가 내 식량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흠. 특이하군요. 보통은 학업 공백이 생기면 따라가기 힘들 텐데, 학위 논문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초소형 곤충의 비행 메커니즘을 응용한 정찰 드론'? 이건 국방부 쪽에서 더 좋아할 주제 같은데요." "하하, 순수한 생물학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입니다. 곤충의 효율성을 기술에 접목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 드론 피하는 법 연구하다가 역으로 깨달은 건데.' 면접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이력서는 묘하게 언밸런스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같은 완벽한 학점과 논문, 하지만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투박한 군 경력. 그들이 보기에 나는 '독종' 아니면 '천재', 둘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은 그냥 '생계형 독종'이다.) 그때였다. 한승우 팀장이 서류를 넘기려다 책상 위의 커피잔을 툭 쳤다. "앗!"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가득 담긴 머그잔이 테이블 끝으로 넘어갔다. 이대로라면 팀장의 바지와 그 비싼 카펫은 검은 물로 엉망이 될 터였다. 그 순간. 내 몸이 뇌를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슈욱- 탁. 나는 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스프링처럼 숙여,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인 머그잔을 낚아챘다. 커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완벽한 착지, 완벽한 회수. 마치 날아오는 수류탄을 받아 되던지던 훈련처럼 자연스러웠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면접관 세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정적. 면접장이 싸해졌다. 아, 망했다. 민간인은 이런 반사신경 없지? 보통은 "어어?" 하다가 쏟고 "죄송합니다, 휴지 좀…" 하는 게 정석이지? 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머그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멍청하고 순박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하하. 운이 좋았네요. 제가 예전에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을 좀 해서… 손이 좀 빠릅니다. 하하." 배드민턴? 미친놈아, 배드민턴으로 그게 되면 국가대표를 했겠지. 내 거지 같은 변명에 한승우 팀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내 얼굴과, 방금 올려놓은 커피잔을 번갈아 보았다. "…배드민턴이라." "네. 셔틀콕 잡는 느낌으로… 하하." "재밌는 친구네." 그가 피식 웃었다. 다행이다. 웃었다. 살았다. "그런데 서준혁 씨." "네." "아까부터 자꾸 제 넥타이 쪽을 쳐다보시던데. 뭐 묻었습니까?" 예리하다. 역시 팀장급은 다르군. 나는 잠시 고민했다. 모른 척할까? 하지만 이왕 '특이한 놈'으로 찍힌 거, 그냥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게 낫지 않을까? 무엇보다 저게 너무 거슬렸다. "아, 그게… 실례가 안 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보세요." "팀장님 넥타이 핀 말입니다." 나는 검지로 내 넥타이 위치를 가리켰다. "그거, 도청기 같습니다." "……뭐라고요?" "정확히는 초소형 고성능 마이크가 내장된 송신기요. 핀 뒷면 장식 고리 쪽에 미세한 구멍 두 개. 그리고 고주파 신호가 3초 간격으로 들리고 있는데, 그건 송신 주기거든요. 시중에서 파는 싸구려는 아니고, 용산 전자상가 뒷골목이나 해외 직구로 구할 수 있는 '스파이더-3' 모델이랑 비슷해 보입니다." 또다시 정적. 이번엔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옆에 있던 다른 면접관들이 기겁하며 팀장의 넥타이 핀을 쳐다봤다. "이, 이게 무슨…!" 한승우 팀장이 급히 넥타이 핀을 풀어 뒷면을 확인했다. 깨알 같은 구멍.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이번엔 웃음기가 없었다. "이게… 여기서 보입니까? 거의 5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아, 네. 제가 시력이 좀 좋습니다. 양쪽 2.0이라서요." "시력 2.0이면 저게 보인다고요?" "그리고 제가 곤충 다리털 세는 게 취미라… 작은 게 눈에 잘 들어옵니다." 거짓말이다. 물론 시력이 좋은 건 맞지만, 저건 '패턴'으로 보인 거다. 부사관 시절 폭발물 처리반 교육을 받을 때 지겹도록 봤던 회로 패턴. 넥타이 핀의 곡선과 어울리지 않는 미세한 직선의 이질감. 내 눈은 본능적으로 '위장된 사물'을 찾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한승우 팀장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마치 새로운 실험체를 발견한 과학자의 눈빛처럼. 그리고 입꼬리를 묘하게 올리며 말했다. "합격." "…네?" "내 넥타이 핀에서 벼룩을 잡았으니, 합격이라고요. 우리 팀엔 그런 눈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나는 합격했다. 도청기를 찾아내서. 그리고 커피를 안 쏟아서. …이게 무슨 바이오 연구원 면접이야?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12층. [바이오솔루션팀]. 나는 목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코끝까지 살짝 흘러내리게 하고, 어깨 펴지 말고, 약간 구부정하게. 눈빛은 초롱초롱하지만 약간 맹해 보이게. 말투는 공손하게. 완벽한 '신입 서준혁' 모드 온.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신입 연구원 서준혁입니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여 우렁차게 인사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잠시 멈췄다. 넓고 쾌적한 사무실. 하얀색 파티션 너머로 연구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 왔어요? 반가워요." 가장 먼저 다가온 건, 면접 때 봤던 그 한승우 팀장이었다. 여전히 중후한 인상. 오늘은 넥타이 핀을 안 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일찍 왔네요. 긴장 풀어요. 우리 팀 그렇게 빡빡한 곳 아니니까." "네! 감사합니다!" "목소리 좋네. 자, 잠깐 주목. 다들 알겠지만 오늘 새로 온 서준혁 박사입니다. 앞으로 우리 팀 막내이자 핵심 전력이 될 테니 잘 챙겨주세요." 팀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나는 빠르게 사무실 전체를 스캔했다. [목표 A: 창가 자리 여성] 특징: 긴 흑발, 창백한 피부, 왠만한 세계 전쟁터에서는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을만큼 세계 최고 엄청난 미인. 태도: 나를 1초 쳐다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 복귀. 위협도: 낮음? 아니, 높음. 저런 타입이 화나면 제일 무섭다. 책상 위에 날카로운(?) 볼펜이 3개나 나와 있다. [목표 B: 중앙 자리 남성] 특징: 안경, 깐깐해 보임. 나와 비슷한 또래. 태도: 흥미롭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봄. 위협도: 경쟁심? 텃세 가능성 있음. [목표 C: 구석 자리 청년] 특징: 헤드셋, 게임 방송 화면이 작게 띄워져 있음. 태도: 해맑게 웃으며 손 흔듬. 위협도: 제로. 그냥 좋은 녀석 같음. "반갑습니다! 박지호입니다. 동기네요. 저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잘 부탁해요." 중앙 자리의 남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박지호. 명패에는 '대리'라고 되어 있었다. 나와 같은 입사 기수인 모양이다. 손이 부드럽다. 펜만 잡은 손이군.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박 대리님. 제가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많이 부족합니다." "하하, 동기끼리 무슨 격식을 따져요. 편하게 해요." 박지호 대리는 사람 좋아 보였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낙하산인가? 실력은 얼마나 되나?' 하는 탐색전의 기운. 그래, 이런 건 익숙하다. 적당히 바보처럼 보여주면 경계심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제가 사실 공부만 하느라 좀… 허둥댑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쇼." "아유, 명문대 박사님이 겸손하시네. 저쪽은 윤채린 대리님." 그가 가리킨 곳에는 창가 자리의 냉미녀가 있었다. 윤채린. 그녀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윤채린입니다. 모르는 건 메신저로 물어보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싸늘하다. 영하 20도 혹한기 훈련장이 떠오르는 온도다.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했다. 저렇게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즉, 내가 숨기려는 '과거'를 들킬 확률이 가장 낮은 사람이다. 아주 훌륭한 동료다. "자리는 저기, 지호 대리 옆자리 쓰면 되고. 짐 풀고 오전에 OT 좀 합시다." 팀장의 지시에 나는 배정받은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최신형 듀얼 모니터, 인체공학 의자, 넓은 책상. 환상적이다.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보았다. 끼익. 어라? 엉덩이가 닿자마자 미세한 소음이 났다. 가만히 무게 중심을 옮겨봤다. 끼익, 끽. 왼쪽 팔걸이 하부, 가스 실린더 연결부 유격 2mm. 나사가 풀린 건 아니고 와셔가 마모된 소리다. 앉는 데는 지장 없지만, 예민한 내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거슬렸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안 본다. 슬쩍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이 정도는 도구 없어도 되지.' 책상 서랍에 굴러다니는 클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일자 모양으로 펴서 틈새에 끼워 넣고, 손가락 힘으로 꽉 조였다. 그리고 의자 높낮이 조절 레버를 발끝으로 툭 쳐서 유격을 맞췄다. 철컥. 완벽하다. 소음이 사라졌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 나왔는데. 박지호 대리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박사님…?" "네?" "지금 책상 밑에서 뭐 하신 거예요?" "아, 의자가 좀 삐걱거려서요. 고쳤습니다." "클립으로요?" "네. 헐거워서 꽉 끼우니까 되던데요?" 박지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의자와 내 손에 들린 휘어진 클립을 번갈아 봤다. 아차. 또 튀었나? 그냥 "먼지 털었어요"라고 할걸. "하, 하하. 제가 손재주가 좀 있어서요. 자취 생활을 오래 해서… 가구 조립 같은 거 좋아합니다." "…아, 네. 대단하시네요." 박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벌써 위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평범하게 살기' 난이도가 높은데? 오전에는 보안 교육과 사내망 아이디 생성 같은 행정 처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 파브르 연구소의 구내식당은 '미슐랭급'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식판을 받아든 내 손이 떨렸다. 불고기, 연어 스테이크, 샐러드바, 그리고 디저트로 케이크까지. 이게… 한 끼라고? 짬밥이 아니라? 이걸 돈 내고 먹는 게 아니라 공짜로 준다고? "여기 밥 괜찮죠?" 맞은편에 정민재 사원이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아까 헤드셋 끼고 있던 막내다.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여긴 천국입니다." "키킥, 형님 리액션 좋으시네. 저는 하도 먹어서 좀 물리던데." 물린다고? 이 배부른 자식. 나는 앞으로 10년은 매일 먹어도 안 질릴 자신 있다. 나는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아니, 우아하게 포크를 들었다. 그때였다. 식당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죄송해요!" 조리실 아주머니가 카트를 밀고 나오다가 바닥에 쏟아진 물기를 밟고 미끄러졌다. 카트 위에는 거대한 국통이 실려 있었다. 기울어지는 카트. 쏟아지기 직전인 뜨거운 국물. 그 앞에는 식판을 들고 지나가던 윤채린 대리가 있었다. "……!"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이었다. 윤채린은 멍하니 서 있었다. 피하기엔 늦었다. 내 뇌리에 경고등이 켜졌다. [거리 5m. 도착 예상 시간 2초. 위험도 높음.] 내 몸은 이미 의자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따당- 나는 식탁을 짚고 일어나 왼쪽으로 뛰었다. 허공을 날아서 카트와 윤채린 사이로 파고드는 게 정석… 이지만!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슈퍼 히어로'가 되어버린다. 나는 '평범한 신입'이어야 한다. 순간적인 판단. 나는 일어나는 관성을 이용해 바닥에 엎어지듯 앞으로 넘어졌다. 일종의 '헐리웃 액션'을 섞어서. 그리고 발로 카트 바퀴를 살짝 걸어서 중심을 다시 맞췄다. 동시에 손을 뻗어 윤채린의 어깨를 밀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놀라서 떨어뜨리는 식판을 받아… 아니, 이것도 너무 과해. 그냥 단순하게 가자. 콰당! 나는 요란하게 바닥에 넘어지며, 내 몸으로 윤채린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쏟아지는 뜨거운 국물 줄기를 내 등짝으로 받아냈다. 다행히 카트가 기울다가 멈춰서, 대참사는 면했다. "앗!" "저기요! 괜찮으세요?!"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 신음했다. 등이 따끔했다. 뜨겁긴 한데, 화상 입을 정도는 아니다. 방탄조끼 위로 총알 맞은 것보다 덜 아프다. "괜찮… 으세요?" 내 위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윤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 서준혁 박사님? 괜찮으세요?" "아… 네. 바닥이 좀 미끄럽네요. 하하."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셔츠 등판이 국물로 얼룩져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낫다. '날렵하게 구한 영웅'보다는 '얼떨결에 몸 개그 하다가 구한 신입'이 훨씬 덜 의심받으니까. "빨리 의무실 가세요! 화상 입었으면 어떡해!" 윤채린이 내 팔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지만, 잡는 힘은 꽉 들어차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감정이 보였다. 미안함, 놀람, 그리고… 묘한 호기심. '아, 계획대로… 된 건가?' 평범하게 밥 먹고 싶었는데. 첫날부터 셔츠 버리고, 관심 집중되고. 역시 내 인생에 '평화'는 사치품인가 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무실로 가기로 했다.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신입 뭐야? 몸개그?" 망했다. 아무래도 '비실비실한 박사' 컨셉은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몸은 둔하지만 튼튼한 바보 신입' 정도로 타협할까. 의무실로 가는 복도 창밖으로 평온한 연구소 풍경이 보였다.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뭐, 총알 날아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국물 좀 뒤집어쓰면 어때. 나는 살아 있고, 월급날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씩 웃었다. 파브르 연구소에서의 첫날. 우당탕탕 시끄럽게 시작했지만, 예감이 나쁘지 않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이 연구소의 비밀을, 그리고 내 몸속에 잠재된 진짜 능력을 깨닫게 되는 건… 아주 조금 더 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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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rain111/3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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