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보직
"흐음... 몸이 꽤 좋네? 신입?"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끈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마치 꿀에 젖은 비단이 피부를 스치는 듯한 감각.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뉘앙스는 공기의 흐름마저 미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긴장으로 인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 청진기가 내 등판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진료라기보다는 차라리 탐색에 가까웠다.
"아, 저기... 선생님? 화상 진료 맞죠?"
"그럼 화상 보지 뭘 봐요? 1도 화상이네. 피부가 빨갛게 익기만 했어. 근데..."
나를 진료하고 있는 건 평범한 직원은 아니었다. 명찰에 [의무실장 신혜림]이라고 적힌, 누가 봐도 '내공'이 느껴지는 연상의 미녀 의사였다. 의무실의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살짝 헝클어진 듯한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선 위에서 자유분방하게 춤을 추고 있었고, 답답하다는 듯 단추를 두 개쯤 푼 셔츠 사이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소독약 냄새와 섞여 기묘한 자극을 주는——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내 등짝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해부학 실습실의 개구리를 보는 듯한, 혹은 희귀한 표본을 발견한 수집가의 눈빛으로.
"등에 칼자국... 아니, 흉터가 많네? 요즘 대학원생들은 실험하다가 맹수랑 싸우나 봐?"
그녀의 시선이 내 왼쪽 견갑골 아래에 남은 자상을 집요하게 쫓았다. 9년 전, 시리아 국경에서 반군이 휘드른 녹슨 마체테에 스쳤던 훈장이다.
"아, 하하. 제가 좀 험하게 자라서요. 어릴 때 시골에서... 장작 패다가 나무 파편에 좀 긁혔습니다."
나는 최대한 어수룩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시골 청년의 순박함을 연기하기 위해 눈꼬리를 휘게 만들었다.
"거짓말."
그녀가 픽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아픈 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 때문에. 그녀의 눈빛은 장난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맹수 조련사가 채찍을 숨기고 있을 때의 예리함이 번뜩였다. 그녀는 알고 있는 걸까? 이 상처들이 단순한 사고의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생존의 기록이라는 것을.
"뭐, 사연 없는 남자는 재미없으니까 넘어가 줄게. 그나저나..."
신혜림 실장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내 셔츠를 가리켰다. 국물 범벅이 되어 처참하게 젖어버린, 나의 불쌍한 첫 출근용 셔츠. 붉은 국물이 하얀 셔츠 위에 추상화처럼 번져 있었다.
"그거 입고 나가게? 냄새 장난 아닌데. 우리 연구소 청정 구역이라 쫓겨날걸?"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갈아입을 옷 없습니까? 환자복이라도."
"없는데."
"네?"
"환자복 다 세탁 갔어. 남은 건 내 여벌 가운뿐인데, 이거라도 빌려줄까?"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의자에 걸린 하얀 의사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가운 자락이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문제는 내 안에 입은 런닝셔츠도 땀과 뜨거운 국물에 젖어버려 찝찝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그 축축한 천 조각을 계속 입고 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즉,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상체 탈의 + 여성용 오버핏 가운]
이 조합이 불러올 파장을 나는 잠시 계산해 보았지만, 계산기는 곧바로 에러를 띄웠다.
"저기... 실장님. 제가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알아. 그래서 더 재밌잖아?"
그녀는 명백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표정이 저럴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복도를 걸어가며 '김치 국물남'이라는 오명을 쓰고 쫓겨나느니, 차라리 '의사 가운 변태'가 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게 낫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젖은 셔츠를 벗어 던졌다.
훌러덩.
드러난 상체. 자잘한 흉터들이 훈장처럼, 혹은 낙인처럼 박힌 단단한 근육질 몸매가 의무실의 백색 조명을 그대로 받아냈다. 크고 작은 흉터들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기묘한 요철을 그렸다.
"어머, 감상비라도 내야겠네."
신혜림 실장이 휘파람을 불며 가운을 던져주었다. 나는 날아오는 가운을 낚아채듯 받아 재빨리 걸쳤다. 품은 넉넉했지만, 내 어깨가 넓어서인지 가운의 깃이 벌어지며 쇄골 라인이 훤히 드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가운 사이로 단단한 흉근과 복근의 실루엣이 보일락 말락 했다. 마치 삼류 에로 영화의 도입부 같은 꼴이다. 내가 봐도 좀... 그렇다.
"잘 어울리네, 신입. 그거 입고 복도 나가면 인기 좀 끌겠어. 야성미 넘치는데?"
"놀리지 마십쇼. 저 심각합니다."
나는 가운의 빈약한 끈을 생명줄처럼 꽉 묶었다.
"다음에 커피나 한잔하러 와. 옷 돌려주러 올 때."
그녀는 내게 윙크를 날렸다. 그 윙크는 매혹적이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나는 도망치듯 의무실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그녀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닫히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위험한 여자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내 '어설픈 위장' 따위는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뱀의 눈을 가진 여자. 조심해야 한다. 절대 가까이하지 말자. 이 평온한 직장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런 변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앞으로 다치거나 피를 볼 때마다, 결국은 그 '위험한 여자'에게 제 발로 찾아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 유일한 피난처가 되리라는 것을.
"어머, 저 사람..." "아까 식당에서 넘어진 그 신입 아냐?" "옷이 왜 저래?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거야?" "어머머, 몸 봐. 야해라." "근데 가운이 여자 거 같은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예상했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연구소의 복도는 평화로웠고,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눈부셨지만, 내게는 가시밭길이었다. 지나가는 연구원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수군거림이 서라운드 입체 음향으로 귓가를 때렸다.
아, 망했다. '평범하고 조용한 신입' 컨셉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저 멀리 사라졌다.
"윤채린 대리 보고 놀라서 넘어졌다며?" "역시 천하의 윤 대리 미모 앞에서는 장사 없구나."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미인 앞에서는 뚝딱거리는 스타일인가 봐. 순진하네." "근데 몸은 안 순진한데?"
귀엽긴 개뿔. 나는 '미모에 홀려 다리 풀린 몸개그남'에 이어 '의무실 누나에게 옷 뺏긴 노출광'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회사의 가십 생산 속도는 5G보다 빨랐다. 나는 가운 깃을 최대한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바닥의 대리석 타일에 비친 내 모습이 처량했다. 마치 실험실을 탈출한 실패작 키메라 같았다.
제발 팀장님만은 보지 말기를. 제발.
사무실에 들어서자 공기가 일순간 멈췄다. 타자기를 두드리던 소리, 웅성거리던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특히 내 옆자리의 박지호 대리는 내 가운 차림을 보고 턱이 빠질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박사님... 그... 파격적인 패션은 뭡니까? 시스루 룩인가요?"
"아, 셔츠가 장렬히 전사하셔서요. 패션의 완성은 자신감 아니겠습니까. 하하."
나는 너스레를 떨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끽 소리도 안 내고 튼튼하게 나를 받아줬다. 아까 오전에 몰래 클립으로 수리해둔 보람이 있었다. 내 엉덩이를 받아주는 건 이 의자뿐이구나.
그때, 한승우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공문 한 장이 들려 있었고,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음, 다들 주목. 총무팀에서 협조 요청이 왔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팀원들의 반응속도는 빛보다 빨랐다. 이소연 과장은 갑자기 모니터 속 엑셀 표에 코를 박았고, 정민재 사원은 꺼져 있는 전화기를 들고 "네, 여보세요? 아, 거래처시라고요?"라며 열연을 펼쳤다. 불길한 징조다. 이것은 본능이다. 군대에서 다들 피하는 '주말 작업 차출'의 냄새가 난다. 똥 치우기 아니면 제초 작업급의 기피 업무가 분명하다.
"지하 1층 제3자료실... 서류 정리 및 창고 청소 지원자 1명이 필요하다네. 우리 팀 막내가 가야 할 것 같은데..."
팀장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제3자료실. 이름만 들어도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다. 30년 묵은 서류들이 귀신처럼 쌓여 있을 그곳. 정민재 사원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막내인 그가 가야 하는 게 조직의 쓴 순리겠지만, 그는 지금 도살장 끌려가는 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박지호 대리도 헛기침하며 애써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다들 싫어하는 눈치군.'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지하 창고다. 즉, 사람이 없다. 나만의 공간이다.
상사의 감시가 없다. 잔소리도 없다.
먼지 좀 마시는 건 일도 아니다. (사막의 모래 폭풍 속에서도 라면 낋여 먹던 나다.)
무엇보다... 지금 이 꼴(맨몸에 가운 하나)로 환한 사무실 조명 아래 앉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을 받는 것보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짱박혀 있는 게 심리적 안정을 위해 백배 낫다.
결론: 개꿀. 이것은 유배지가 아니라 휴양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사무실의 정적이 와장창 깨졌다. 한승우 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어... 서 박사가? 오늘 첫 출근인데? 거기는 한 번 들어가면 퇴근할 때까지 못 나오는데?"
"신입의 패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옷도 버린 김에 먼지 뒤집어쓰는 건 제가 하는 게 낫죠. 다른 분들는 바쁘시지 않습니까."
나는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나라를 구하러 가는 독립투사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정민재 사원이 감동한 눈빛으로, 거의 울먹이며 나를 쳐다봤다. '형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커피 쏠게요!' 하는 텔레파시가 들리는 것 같았다.
"허, 거참. 다들 기피하는 덴데 자원하다니. 역시 서 박사는 다르구만. 그래, 부탁합니다."
팀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승인했다. 나는 속으로 킬킬거렸다. 다들 모르시는군요. 진짜 꿀보직은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힘든 척하면서 혼자 노는' 자리라는 걸. 행정반에서 펜 굴리며 간부 눈치 보는 것보다, 탄약고 경비 서면서 몰래 초코파이 까먹으며 별을 세는 게 훨씬 행복하다는 걸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지하 1층, 제3자료실. 육중한 철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먼지가 훅 끼쳐왔다. 그것은 단순히 더러운 먼지가 아니었다. 시간의 입자였다. 종이가 삭으면서 내뿜는 쿰쿰한 냄새, 잉크가 산화된 비릿한 향, 그리고 오랫동안 갇혀 있던 공기 특유의 정체된 무게감.
"콜록, 콜록! 와, 이건 뭐... 30년 숙성 먼지인가?"
창고는 운동장만큼 넓었다. 그리고 난장판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몇 개는 수명을 다해 파직거리며 깜박였고, 그 불안한 조명 아래로 수천 개의 박스가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서류 뭉치들이 토사물처럼 쏟아져 있었고, 거미줄이 천장과 박스 사이를 잇는 다리처럼 얽혀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아니 결벽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멘탈이 나가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아. 작전 개시."
나는 가운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거대한 무질서를 보니 오히려 피가 끓었다.
전장에서 매복 탐사의 기본은 무엇인가? 사람의 눈은 가로로 보는것이 자연스럽다. 그 가운데 세로로 놓인 물체가 눈에 더 띄게 된다. 이때 세로로 놓인 물체들의 규칙성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피로해지고 그 반대의 가로로 놓인 물체는 감춰지게 된다. 이때 그 피로 가운데 반대의 무질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 기본이다.
즉 **'자연이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미세한 인위적 무질서를 찾아내는 것'**이다. 나뭇가지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꺾인 각도, 풀잎이 바람 반대 방향으로 눕혀진 흔적, 흙의 미세한 색깔 차이.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스카우트의 생존 법칙이었다.
청소는 그 정반대다. '혼돈이라는 무질서를 인위적인 질서 속으로 역배치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나의 통제권을 회복하는 의식이다.
"자, 놈들의 배치를 파악한다."
나는 고글... 은 없으니 맨눈으로 창고를 스캔했다. 박스의 크기, 종류, 연도별 라벨 색상. 내 머릿속에서 테트리스 블록이 3D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간 지각 능력이 극대화되며, 이 난장판이 하나의 거대한 그리드로 보이기 시작했다.
후욱- 탁!
박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볍다. 98년도 영수증철. 종이가 바스라질 듯 건조하다. 가장 안쪽 상단 배치. 휙- 쿵! 이건 무겁다. 2005년 연구 장비 매뉴얼. 전공 서적만큼 두껍다. 하단 지지대용으로 배치.
내 몸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맨몸에 걸친 하얀 가운 자락이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이며 먼지 구름을 갈랐다. 박스들이 허공을 날아 제자리를 찾아갔다. 착! 착! 하는 경쾌한 소리가 텅 빈 창고에 울려 퍼졌다. 먼지 입자들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춤을 췄다. 그 사이를 누비는 나는 이 공간의 지휘자였다. 지루한 노동? 천만에. 이건 스포츠다. 아니, 예술이다.
"흐아압! 거기 너, 각도가 틀렸잖아!"
나는 발로 슬라이딩하며 삐져나온 박스를 미끄러지듯 걷어차서 라인을 맞췄다. 오와 열. 완벽한 직각. 군대에서 관물대 정리하며 각 잡던 가락이 여기서 호화롭게 빛을 발한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지만 상관없다. 내 호흡기는 이미 시리아의 모래바람과 정글의 습기를 견뎌낸 강철 폐활량이다. (사실 마스크가 절실하긴 하다. 내 폐는 소중하니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쓰레기장 같던 창고가 거대한 도서관처럼 변해 있었다.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던 박스들은 연대기 순으로, 그리고 색깔별로 완벽한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정렬되었다. 붉은색 라벨에서 푸른색 라벨로 이어지는 라인은 마치 무지개떡 같았다.
"후우..."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가운 소매로 닦으며 결과물을 감상했다. 아름답다. 이 완벽한 정렬.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이 기하학적인 쾌감. 강박증 환자가 보면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릴 광경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해지자,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오스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라 눈에 띄지 않았던, 배경에 묻혀 있던 미세한 '이질감'이, 완벽한 질서가 잡히자 백지의 먹물처럼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한 **'카모플라주 벗겨내기'**다. 질서를 부여하면, 숨어 있던 놈이 튀어나온다.
저기 구석. 가장 어두운 곳. 깜박이는 형광등 바로 아래. 완벽하게 정렬된 2010년 구역 뒤편에 있는, 녹슨 2단 철제 캐비닛. 저 녀석만 미묘하게 각도가 틀어져 있다. 바닥의 회색 타일 선을 기준으로 약 3도 정도 오른쪽으로 전진 배치. 마치 누군가 급하게 건드렸다가 대충 밀어 둔 것처럼. 그리고 캐비닛의 쇠 다리 밑에 난 미세한 스크래치. 그 주위에만 먼지가 덜 쌓여 있다.
"누군가 최근에 저걸 옮겼어."
30년 된 창고에서 '최근'의 흔적이라. 흥미롭다. 나의 호기심 레이더가 윙윙거리며 작동했다. 나는 청소 도구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는 건 습관이다. 아무도 없는 지하 창고에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무게 중심을 발가락 끝에 실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마치 유령처럼.
캐비닛 앞. 문은 잠겨 있다. 뭐 따려면 굴러다니는 클립 하나면 3초 컷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 목표는 캐비닛의 '안'이 아니라, 그 '밑'이었으니까. 누군가 급하게 캐비닛을 밀다가, 혹은 다시 원위치시키다가 실수로 떨어뜨렸을 법한 무언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의 파편.
나는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하얀 가운이 더러워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먼지 구덩이 속에 뺨을 대고 캐비닛 밑바닥의 어둠을 들여다봤다. 빛이 닿지 않는 그 깊은 곳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금속성 물체가 보였다.
"찾았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닿았다. 먼지를 헤치고 끄집어낸 물건은 명함 크기의 네모난 금속 카드였다. 얼핏 보면 그냥 굴러다니는 고철 조각 같았지만,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과 특수 합금 특유의 매끄러운 질감. 이것은 시중의 싸구려 스테인리스가 아니었다. 내 손끝이 기억하는 '군용 스펙'의 감각.
손가락으로 카드의 표면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스으윽. 회색 먼지가 걷히자, 카드 뒷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가 드러났다. 정육각형이 빽빽하게 연결된 문양. 벌집(Honeycomb).
'벌집...?'
어디서 본 것 같다. 내 뇌 속의 시각 데이터베이스가 빠르게 검색을 시작했다. 필름이 감기듯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2주 전 면접 날. 긴장된 공기. 엘리베이터. 한승우 팀장이 12층 버튼을 누를 때, 그의 손가락 옆에 잠시 스쳤던 버튼 패드. 그 패드 하단에 있던 아주 작은, 열쇠 구멍도 아닌, USB 포트도 아닌 기묘한 홈. 거기에 쌓여 있던 미세한 먼지의 패턴이, 지금 이 카드의 정육각형 무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건 단순한 ID 카드가 아니야. 키같던데..."
그 순간.
징-
무거운 정적을 깨고 미세한 기계음이 들렸다. 내 머리 위, 천장 구석 거미줄 사이에 달려 있던 낡은 CCTV 카메라가 움직였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계가 깨어나는 소리. 먼지 쌓인 렌즈가 위잉 소리를 내며 회전하더니, 정확히 나를 향해 멈췄다. 마치 거대한 곤충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치직... 치지직... 서준혁 연구원?]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노이즈 섞인 인터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안실? 아니면 총무팀? 아니면...
[벌써 끝났습니까? 방금 화면 보고 있는데... 그 정리 속도, 사람이 아니신데요?]
목소리는 놀라움 반, 그리고 깊은 의심 반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금속 카드를 가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운 안은 맨몸이라 카드의 차가운 감촉이 옆구리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예! 제가 정리 정돈 자격증이 있어서요! 정리계의 전설이었습니다! 하하하!"
자격증은 개뿔. 하지만 내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감각이 예민해졌다. 이 카드의 정체. 그리고 나를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의 시선.
단순히 꿀 빨려고 내려온 지하 창고였는데.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것은 '편안한 휴식'이 아니라, 거대한 비밀의 입구였다. 이거 왠지... '지뢰밭'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깐 기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