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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죽음 일러스트

비오는 날의 죽음

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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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

그 소리는 단순히 빗소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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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창고의 양철 지붕을 두들기는, 마치 미친 드러머의 솔로 같은 불규칙한 타악기 소리였다.

​

또한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리는 거대한 백색소음이었으며, 침묵 그 자체를 날카롭게 긁어내는 칼날의 비명 같았다.

​

인천항 근처의 버려진 냉동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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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빗물은 천장의 깨진 구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맞춰 음산한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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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고 병적인 불빛을 반사하는 그 물웅덩이는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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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에는 쇠가 녹스는 비릿한 냄새와 십수 년은 묵었을 법한 짙은 곰팡내, 그리고 항구 특유의 짜고 비린 바닷바람 냄새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불쾌하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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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냄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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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하게 쏟아진 생명의 향취. 이질적일 만큼 선명하고,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는 끈적하고 두터운 피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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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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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는 등 뒤의 차가운 철제 컨테이너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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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체 안치소의 석판처럼 느껴지는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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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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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벌겋게 달군 인두를 그대로 쑤셔 넣어 영혼까지 갉아먹는 듯, 모든 신경을 태워버리는 깊고 끈질긴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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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격렬한 몸싸움의 여파로 찢어진 옆구리에서는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배어 나와 짙은 색의 수사관 점퍼를 더욱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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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상처를 필사적으로 막아보았지만, 뜨거운 피는 생명력 그 자체인 양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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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윤곽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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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과다출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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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해지는 감각, 손끝부터 차갑게 식어가며 생명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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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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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악령처럼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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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흠뻑 젖은 싸구려 점퍼를 입은 남자. 윤아가 지난 3개월간 잠도 줄여가며 쫓았던 바로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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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그림자 살인마’라 부르던 연쇄살인범, 정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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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이구···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 김윤아 팀장님. 꼴이 영 말이 아니시네, 천하의 김윤아 팀장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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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가 썩은 미소를 흘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깃든 것은 승리감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열등감의 비틀린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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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는 윤아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들려 있었다. 싸구려 등산용 칼. 그의 범행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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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저 칼에 스러져 간 여섯 명의 피해자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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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피해자의 사진 속, 공포로 얼어붙었던 그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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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전, 그의 손에 순직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후배 형사 민준의 얼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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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이놈 잡고 나면 제가 소고기 쏩니다. 그때까진 절대 끼니 거르지 마세요.’라며 환하게 웃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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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용암처럼 치밀었지만, 윤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냉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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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요청은 이미 30분 전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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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지구대에서 출발했어도 10분이면 도착했을 거리다. 폭우로 인해 교통이 마비된 것을 감안해도,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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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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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에게 되뇌며, 동시에 눈앞의 남자를 마지막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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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40대 초반의 평범한, 아니, 지극히 초라한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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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한 체격, 어눌한 말투,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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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마주쳤다면 누구도 그를 여섯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잔혹한 연쇄살인마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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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윤아는 그의 가면 뒤에 숨겨진, 벌벌 떠는 어린아이 같은 괴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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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열등감과 피해의식,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 세상에 대한 비틀린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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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범행은 증오의 표출이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끔찍한 서명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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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선은 완벽하게 예측됐어, 정태수. 인천항 전체가 봉쇄됐고, 이제 곧 경찰이 셔터 내리고 여기 쫙 깔릴 거야.”

​

윤아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무기는 심리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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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네년만 죽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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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손에 든 칼을 흔들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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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TV에 나와서 나에 대해 떠드는 거 봤어. 뭐? 내가 사회적으로 고립됐고, 여성을 혐오하며, 과시욕이 강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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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틀린 말은 아니더군. 근데 말이야,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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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불과 3미터. 금방이라도 달려들 수 있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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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등 뒤 컨테이너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마지막까지 저항할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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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발목에 찬 보조 권총은 아까 격투 중에 이미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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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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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네년의 후배 놈을 먼저 죽였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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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답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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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파랗게 어린 놈이 날 무시했거든. 취조실에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군. 내가 범인일 리가 없다고, 그렇게 안 생겼다고. 마치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처럼 보는 그 눈빛으로, 내 앞에서 비웃었어.”

“······그래서 죽인 거야? 단지 너를 무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김윤아. 넌 TV에 나와서 날 꿰뚫어 보는 것처럼 지껄였지. 마치 내가 네 손바닥 위에 있는 벌레인 것처럼!”

​

정태수가 말을 이어갔다.

​

“그 오만한 눈빛이, 날 멋대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그 눈빛을···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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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전형적인 과대망상과 피해의식의 발로였다.

​

윤아는 그의 심리를 정확히 짚었다. 그는 강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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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약하고 두려움에 차 있었기에,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공격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부류였다.

​

“날 봐, 정태수. 넌 지금도 떨고 있어. 손에 든 칼도, 네 목소리도. 넌 날 죽이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네가 저지른 짓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는 게 두려운 거지. 다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찮은 존재로 돌아갈까 봐 무서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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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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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로서, 그녀는 범죄자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법을 알았다. 그것이 그녀가 수많은 괴물들을 잡아넣은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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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닥치라고, 이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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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찔린 정태수가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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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옆으로 몸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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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이 그녀가 있던 자리의 컨테이너 벽을 ‘끼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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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나뒹구는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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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묵직한 감촉이 희미한 희망을 주었지만, 관 뚜껑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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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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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천근만근이었고,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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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오래된 TV의 전원이 꺼지듯, 세상이 가장자리부터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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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다시 칼을 고쳐 쥐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잔혹한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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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이해하는 척했지만, 결국 날 무시했잖아? 그러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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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쇠 파이프를 고쳐 잡고 자세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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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죽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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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잡아야 할 범죄자들이, 내 책상 위에 남겨진 그 수많은 사건 파일들이, 정의를 기다리는 그 얼굴들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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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의 복수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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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저녁에 주문해둔 신상 치킨도 먹어야 했다. 새로 나온 바질 페스토 맛 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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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리뷰가 아주 좋았단 말이다.

​

젠장, 죽기엔 너무나 시시한 이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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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생각이 고작 치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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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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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가 외쳤고, 윤아는 그를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파이프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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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피로와 부상으로 인해 엿가락처럼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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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가볍게 파이프를 피하고, 그대로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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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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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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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고, 살이 찢어지는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 복부를 파고드는 끔찍하고 뜨거운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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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은 차가운 거 아니었던가? 얼음 같은 불길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모든 감각을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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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과 내장을 헤집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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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의 손에서 쇠 파이프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에서 울컥, 하고 붉은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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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세우던 끈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힘이 빠진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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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용히 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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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칼을 비틀어 빼냈다. 다시 한번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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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감각이 멀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이제는 제법 가까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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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야 오는 건가. 너무 늦었잖아, 망할 멍청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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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굼벵이처럼 느려터져서 사람 속을 긁어대더니 이런 중요한 순간에도 그럴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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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속으로 동료들을 향해 욕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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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는 다급해진 듯, 창고의 어두운 구석으로 사라졌다. 어차피 멀리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이 창고는 이미 완벽하게 포위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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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이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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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핏물 위에 쓰러지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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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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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민준의 얼굴, 늘 식사 거르지 말라며 잔소리하던 어머니의 얼굴, 아직 미제로 남은 사건 파일 속 피해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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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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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다. 범죄자 잡는 일에 청춘을 다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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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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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조금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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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아직 쓰레기 같은 놈들이 너무 많은데. 그놈들의 심리를 파헤쳐 법정에 세우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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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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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아득해졌다. 차가운 빗물이 그녀의 뜨거워진 뺨을 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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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진짜 억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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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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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창고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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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 김윤아의 세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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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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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rain112/13/2026

워우 !!! 상황 묘사나 필체가... 술술 읽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