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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보다 먼저 오는 수치

거울면이 다시 서는 소리는 유리판이 세워지는 소리와 달랐다. 얕은 물이 안쪽으로 한 번 푹 꺼졌다가, 그 빈 자리 전체가 사람 키만 한 물막으로 되돌아오며 내는 소리였다. 뒤집힌 제단 뒤 협로 끝, 검은 뿌리가 천장처럼 엉킨 틈 아래서 그 물막이 솟자 바닥에 잠겨 있던 그림자들도 함께 떠올랐다. 얼굴은 늦었다. 먼저 보인 건 발이었다. 젖은 돌턱 위에 비스듬히 걸린 발, 물을 먹어 무거워진 바지자락 끝, 뒤를 향해 비껴 든 활, 낮게 숙인 어깨, 바닥 가까이 끌린 무언가의 무게였다.

리에트 손이 먼저 굳었다.

그녀는 화살을 걸어 둔 채 시위를 더 당기지 못했다. 활손이 떨리는 건 공포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 각을 이미 안다는 몸의 기억이 먼저 올라온 탓이었다. 나는 거울면보다 리에트 발끝을 봤다. 오른발이 반 치만 더 뒤로 밀리면 세라의 그림자가 만든 선이 갈라지고, 왼발이 안쪽 홈을 비우면 반사 홈의 물그림자가 다시 그 틈을 물 것이다. 뒤집힌 제단 앞 얕은 바닥은 보기보다 악질이었다. 발 하나만 물러나도 사람과 물이 같이 미끄러졌고, 미끄러진 자리에는 곧장 검은 뿌리 끝과 반사 홈의 각이 겹쳤다.

“발 고정.”

내가 짧게 말했다.

세라가 바로 리에트 오른편 반 보 뒤로 붙었다. 검을 뽑지 않았다. 검집 끝만 바닥에 눌러 물길과 협로 사이를 더 좁혔다. 보호하겠다는 자세라기보다, 무너지면 같은 줄에서 함께 무너지겠다는 자세였다. 검집 아래 금속 끝이 젖은 돌면을 누르자 얕은 물이 양옆으로 갈라졌고, 리에트 발앞에는 미끄럼 대신 버틸 만한 마른 선 하나가 생겼다.

나는 세라가 만든 선 안쪽에 발끝을 맞췄다. 왼쪽에는 낮은 홈 셋, 오른쪽에는 반사 홈 둘, 등 뒤에는 왕국 등불과 엘프 창끝이 서로를 밀고 있었다. 브론은 내 뒤꿈치보다 한 뼘 뒤에서 물턱을 보고 있었고, 미리엘은 젖은 위패함을 팔꿈치로 감싼 채 무릎을 낮췄다. 우리가 한 칸씩만 어긋나도 거울면은 리에트의 기억보다 먼저 우리 현재 위치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리에트를 붙들러 달려가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붙들어야 했다.

“뒤는 내가 막아.”

리에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숨이 한 번 꺾였다. 거울면 속 장면이 더 또렷해졌다. 누군가 둘을 먼저 아래로 넘긴다. 한 사람은 활을 비껴 들고 좁은 길목에 남는다. 마지막까지 뒤를 막는 팔꿈치 각이 보였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기려는 팔이 아니었다. 한 박자라도 더 벌어 보려는 팔이었다. 넘어가는 쪽이 사람인지 짐인지 분간되지 않던 흐린 실루엣도, 이번에는 허리와 어깨가 제각기 다른 높이로 흔들렸다. 한 명은 자기 발로 중심을 잡으려 했고, 다른 하나는 거의 끌리듯 밀려 내려갔다.

“저건…”

말이 끝까지 붙지 않았다.

브론은 낮은 물턱 쪽으로 몸을 틀어 발뒤꿈치 눌림과 끌림 자국부터 봤다. 그는 늘 그랬다. 사람 표정보다 먼저 하중을 읽었다. 미리엘은 위패함을 품에서 반쯤 빼낸 채 거울면 바로 밑 이름 홈만 읽고 있었다. 손끝에 묻은 물을 닦지도 않았다. 물과 수액이 섞인 흔적이 홈 가장자리 어디에서 끊기는지 보려는 얼굴이었다. 이솔데는 검은 뿌리 아래에서 손을 드러낸 채 우리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거울면이 올리는 순서를 보고 있었다.

“기억보다 먼저 올라오는 게 있지.”

이솔데가 낮게 말했다.

“수치 같은 것.”

리에트 턱이 더 굳었다. 반박도 못 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어떤 기억은 장면보다 먼저 몸이 부끄러움을 외운다. 누가 먼저 쓰러졌는지, 누가 끝까지 버텼는지, 어떤 말이 마지막이었는지보다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가 먼저 몸 안에서 칼날처럼 자리 잡는다. 리에트에겐 지금 그 칼날이 먼저 올라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엘프 강경파는 물가를 밟을 때마다 일부러 발뒤꿈치를 더 세게 찍었다. 왕국 사절 쪽은 말끝보다 장비 소리가 먼저 들렸다. 철 버클과 얇은 갑조각이 마른 나무와 부딪히는 소리였다. 둘 다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면서도, 자기 문장을 이 안에 먼저 밀어 넣고 싶어 했다.

“그 환영을 계속 두면 숲 기록이 더럽혀진다!”

“증언을 흐리는 오염이다. 지금 닫아야 한다!”

문장만 다르고 박자는 같았다. 하나를 찍어 닫자. 한 사람 얼굴에 죄를 몰아 넣고 끝내자. 세라는 뒤를 보지 않은 채 검집 각만 더 틀었다. 그녀 발목이 미끄럼을 막으려 약간 바깥으로 벌어졌고, 어깨는 협로 입구를 반쯤 가렸다.

“둘 다 조용히 해.”

그녀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안쪽 줄은 아직 안 끝났어.”

그 한마디가 바깥 소리를 잠깐 멈추게 했다. 세라는 늘 그렇게 했다. 설명보다 길목을 먼저 끊었다. 누가 맞는지 따지는 말보다, 누가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지부터 끊어 내는 사람이었다.

바깥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왕국 사절 쪽 서기가 장부 모서리를 앞세워 문턱을 재고, 엘프 강경파의 창수는 그 장부를 핑계 삼아 어깨를 밀었다. 둘은 서로를 경계하는 척했지만 발끝은 같은 곳을 노렸다. 우리가 리에트 하나에 시선을 묶는 순간, 안쪽 홈은 바깥 등불 그림자에 덮인다. 세라는 그걸 알고 검집 끝을 돌렸다. 젖은 돌조각 하나가 문턱 앞에 걸리며 두 세력의 발을 동시에 늦췄다. 말 대신 자리 하나를 바꾼 것이다.

그 사이 이솔데가 젖은 이름판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반쯤 썩은 목재 조각 위엔 엘프식 결 하나가 남아 있었고, 밑면엔 인간식 끝번호를 긁다 만 흔적이 얕게 박혀 있었다. 물을 오래 먹은 나무라 원래 나뭇결과 나중에 찍힌 상흔이 서로 다르게 번들거렸다.

그녀는 그 조각을 오른쪽 홈이 아니라 왼쪽 낮은 물턱 아래에 끼워 넣었다.

거울면 장면이 바뀌었다.

아까는 패주로 굳어 있던 동선이, 이번에는 길을 막는 버팀으로 다시 섰다. 먼저 아래로 넘어간 둘은 제 발로 튄 사람들이 아니라 밀려 나간 쪽으로 보였다. 뒤에 남은 한 사람은 앞으로 달리는 대신 옆으로 몸을 틀어 협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활을 쏘는 사람이라기보다, 넘어간 쪽을 향해 등을 열지 않으려고 끝까지 몸을 비튼 사람의 자세였다. 물 아래 그림자 하나가 뒤늦게 그 틈을 따라붙는 것도 보였다. 흩어져 달아나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같은 줄을 놓치지 않으려 뒤늦게 붙은 손 같았다.

미리엘이 거의 숨처럼 말했다.

“같은 장면인데, 홈이 바뀌니까 읽히는 순서도 바뀌네요.”

브론이 무릎을 굽혔다. 젖은 바닥의 끌림 자국 위에 손가락을 대 보더니, 이번에는 손톱으로 돌면 홈까지 한 번 긁었다. 표면에 남은 얕은 진흙과 물때가 어느 방향으로 얇아졌는지 보려는 손이었다.

“뛴 자국이 아니야. 하나는 몸무게가 실린 채 끌려갔어. 뒤꿈치가 길게 눌렸고, 옆에 밧줄이 한 번 스친 자국도 있어.”

그는 자리만 보고도 더 덧붙였다.

“그리고 남은 놈은 길목을 정면으로 막은 게 아니야. 비스듬히 섰어. 좁은 데서 둘이 한꺼번에 못 지나가게 하는 자세다.”

나는 거울면 속 아래쪽을 더 봤다. 정말 그랬다. 발만 급하게 흩어진 패주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급히 끌어 넘기거나, 몸을 붙들어 아래로 밀어 보낸 흔적처럼 보였다. 물막 아래 흐린 형체였지만 허리 한쪽이 유난히 낮게 꺾인 사람이 있었다. 자기 무게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손에 매달린 사람 특유의 꺾임이었다.

이솔데가 리에트를 향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네가 본 마지막은 어느 쪽이었느냐.”

리에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도망.”

한참 뒤에야 그녀가 겨우 뱉었다.

“그때는 그렇게 보였어.”

“아니.”

이솔데는 바로 잘랐다.

“그렇게 보이는 장면만 네게 남았지.”

리에트가 처음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분노라기보다 붙잡을 데 없는 사람이 겨우 시선을 세우는 눈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나는 남은 자리를 봤으니까.”

이솔데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파편 하나를 집어 물 위에 눕혔다. 이번엔 장례천 조각과 함께였다. 바랜 천끝에는 오래 말라붙은 수액 자국과 엘프식 매듭의 잘린 결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물에 닿자 거울면 아래쪽 한 구석이 조금 더 깊게 맑아졌다. 사람 하나의 허리께가 잠깐 선명해졌다. 허리띠처럼 보였던 건 밧줄이 아니었다. 성도 격리 태그와 닮은 얇은 표식끈이었다. 이름 대신 번호를 매길 때 쓰는 것과 같은 계열, 다만 더 거칠고 오래된 방식이었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강제 희생 표식이에요.”

그 말이 물막보다 먼저 우리 몸을 눌렀다. 성도 격리 태그와 닮은 끈이라는 말은 미리엘에게도 칼날이었다. 그녀는 한때 그런 표식이 적힌 문서를 신성한 절차라고 배웠다. 지금은 그 절차가 오래된 숲 안쪽에서 더 거친 모습으로 먼저 쓰였다는 걸 자기 손으로 짚고 있었다. 미리엘은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손톱 끝으로 끈이 지나간 홈 폭을 다시 재고, 위패함을 품에 더 단단히 끼웠다. 두려워서 감춘 게 아니라, 같은 잘못을 다시 봉함 문장으로 덮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확실해?”

세라가 짧게 물었다.

미리엘은 눈을 떼지 않았다. 눈빛이 흔들렸지만 손은 정확했다. 그녀는 왼편 홈 가장자리를 더듬고, 잘린 결과 덧댄 눌림을 차례로 짚었다.

“성도 쪽 완성품은 아니에요. 더 거칠고 오래됐어요. 끈을 꿰는 홈 폭도 다르고, 표식 간격도 일정하지 않아요. 그래도 같은 방향이에요. 사람 이름 대신 처리 번호를 붙이는 방식.”

브론이 바로 받았다.

“그럼 먼저 넘겨진 건 시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다는 거군.”

브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곧장 바닥을 바꿨다. 시체라면 들것 자국이 남는다. 관리 대상이라면 끌림과 밀림이 함께 남는다. 그는 돌턱 위 진흙을 손가락 마디로 눌러 보고, 옆으로 튄 물때가 어느 높이에서 끊겼는지 봤다. 무게가 한 번에 사라진 자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살아 있는 몸을 넘기며 끝까지 균형을 맞춘 자리였다.

그 말이 협로 안쪽 공기를 바꿨다. 패주였다면 분노만으로 끝난다. 하지만 살아 있는 누군가를 먼저 넘기고 한 사람이 남아 길목을 막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기엔 공포보다 배치가 먼저 있었다. 누가 빠져나가고 누가 끝에 남을지, 누가 이름으로 남고 누가 번호로 묶일지 가른 자리였다.

리에트는 활을 쥔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 눈은 거울면에 박혀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지금 앞 물막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 머릿속에서 너무 오래 굳어 버린 마지막 장면이겠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아주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왔고, 손등 힘줄은 활 손잡이를 쥔 채 마른 끈처럼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했어.”

그 고백은 화살보다 느리게 내려앉았다. 바깥 사람들은 저 한마디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버려졌다고 믿은 사람은 쉽게 증인이 아니라 상처 입은 당사자로 밀린다. 그러면 기록을 다시 읽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감정을 달래는 일로 좁혀진다. 나는 그래서 리에트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녀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녀를 불쌍한 사람 자리로 밀어 넣는 순간 바닥 홈을 놓치기 때문이다.

아무도 바로 위로하지 않았다. 이 안에서 어설픈 위로는 또 다른 덮개가 될 뿐이었다. 나는 리에트 대신 바닥 홈을 봤다. 왼편 낮은 홈 셋 중 둘은 이름 결이 중간에서 끊겨 있었고, 그 밑에 인간식 끝번호 같은 작은 눌림이 덧나 있었다. 엘프 이름을 잘라 내고 다른 체계로 다시 묶은 흔적이었다. 물은 홈 가장자리만 닳게 했지, 중간을 반듯하게 끊지는 못한다. 저 끊김은 손이 만든 것이었다.

“미리엘.”

내가 낮게 부르자, 그녀가 바로 왼쪽으로 한 칸 기었다. 손끝으로 홈 가장자리를 더듬고, 젖은 손등에 묻은 수액을 가볍게 털어 냈다. 미리엘 손은 떨렸지만 읽는 순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건 숲 안쪽 기록 결이에요. 이름을 통째로 지운 게 아니라, 가운데 결만 잘라서 더 못 읽게 만든 거예요.”

그녀는 두 번째 홈 아래를 가리켰다.

“그 밑에 덧댄 건 인간식 번호 흔적이고요. 숲 안에서는 이름을 끊고, 바깥으로 넘길 땐 번호로 다시 묶은 거예요. 같은 사람을 두 번 다른 방식으로 접은 거죠.”

브론은 끌림 자국 깊이를 다시 쟀다. 이번엔 돌턱 모서리와 발뒤꿈치 눌림, 옆으로 튄 물때까지 같이 봤다. 손가락 끝으로 돌 모서리를 짚더니 짧게 혀를 찼다.

“여기 남은 놈은 앞으로 도망친 게 아냐. 몸이 뒤를 향해 있었어. 한 손은 길목을 막고, 다른 쪽으론 밧줄이나 손목을 밀었겠지. 누군가를 먼저 아래로 넘기고 마지막까지 버틴 자리야.”

그는 오른쪽 아래 얕게 패인 홈도 가리켰다.

“이건 화살꽂이가 바닥에 한 번 박혔다가 빠진 자국이다. 싸우러 남은 게 아니라 시간 벌려고 남은 놈이 남기는 종류야.”

세라는 바깥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는 걸 듣고 한 발 더 문턱 쪽으로 옮겼다. 검집과 어깨로 협로 입구를 더 막았다. 그녀 시선은 뒤가 아니라 정면에 있었지만, 말은 바깥을 향했다.

“한 사람만 찍어서 닫고 싶으면 더 가까이 오지 마.”

왕국 사절이 헛기침 비슷한 숨을 냈다.

“기사 후보, 지금 그건 판단 미루기다.”

세라는 비웃지도 않았다.

“아니. 너희가 너무 빨리 끝내려는 거지.”

그 한마디가 다시 시간을 벌어 줬다. 바깥은 문장을 길게 세우고 싶어 했지만, 세라는 늘 가장 짧은 한마디로 그걸 부쉈다.

리에트가 그제야 거울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럼… 내가 본 건 뭐였지.”

이솔데가 대답했다.

“부끄러움이 먼저 고른 장면.”

잔인한 말이었지만 틀리진 않았다. 사람은 자기 수치와 잘 맞는 장면을 오래 붙든다. 사건 전체를 설명하지 못해도 스스로를 벌주기엔 그 한 장면이면 충분하니까. 하지만 그 한 장면이 누군가 손에 골라졌다면, 기억은 상처인 동시에 편집물이 된다.

나는 거울면 중앙을 다시 봤다. 뒤에 남은 사람의 등은 달아나는 등의 기울기가 아니었다. 좁은 길을 몸으로 막는 사람의 등이었다. 더 아래, 먼저 넘겨진 누군가의 허리엔 아까 본 강제 희생 표식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끈은 물에 젖어 허리뼈 아래로 처져 있었고, 끝의 작은 금속편이 돌턱에 한 번 부딪힌 흔적까지 번쩍였다. 그 위를 아주 늦게 스치는 그림자 하나. 여섯 번째 그림자였다. 겁에 질려 흩어진 사람보다, 먼저 빠져나간 이를 놓치지 않으려 뒤늦게 같은 줄에 붙는 손처럼 보였다.

리에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대장은… 도망친 게 아니었나.”

아무도 성급히 그렇다고 확정하지 않았다. 대신 물증이 하나씩 같은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리엘이 말했다.

“숲 기록 홈만 보면 이름이 중간에서 잘린 뒤에 다른 체계가 덧대어졌어요.”

브론이 이어서 말했다.

“바닥 자국만 보면 먼저 넘긴 사람 하나, 남아 막은 사람 하나, 늦게 따라붙은 손 하나다.”

세라는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바깥 놈들은 이걸 다시 배신자 하나로 닫고 싶어 해.”

그제야 리에트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오래 붙들어 온 결론이 무너질 때 나오는 흔들림이었다. 울음이 아니라, 자기 기억을 스스로 다시 의심해야 할 때의 흔들림.

이솔데는 그 틈을 찢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거두고 물막이 스스로 재생하게 두었다. 그녀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수액 한 방울이 낮은 홈 사이를 굴러가다 멈췄고, 그 멈춤에 맞춰 거울면도 한 번 숨을 골랐다.

“나는 네 수치를 없애 주지 않는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다만 그 수치 위에 덮인 다른 순서를 보여 줄 뿐이다.”

리에트는 한참 말을 못 했다. 손목 떨림이 완전히 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활시위를 놓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 도망치듯 무너지기보다, 자기 과거를 다시 보는 자리에 겨우 서 있었다. 세라가 바로 옆에서 검집 끝을 더 눌렀고, 브론은 미끄럼 자국과 돌 모서리 사이 병목을 지켰고, 미리엘은 위패함을 젖은 팔 사이에 끼워 넣은 채 홈 아래 잘린 결을 계속 짚었다. 누구도 리에트를 끌어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 자리에선 가장 큰 버팀이었다.

나는 그 틈에 오른쪽 끝 거울면 아래를 봤다. 아까는 여섯 번째 그림자만 눈에 걸렸는데, 이번엔 그 끝에서 아주 익숙한 어깨 기울기가 한 번 더 비쳤다. 뒤를 막던 사람과는 다른 키, 다른 걸음. 하지만 몸을 꺾는 방식만은 분명히 알았다. 앞으로 똑바로 빠지지 않고, 한 번 늦게 옆으로 틀어 우회로로 빠지는 사람의 동작. 로웬이 표식에 남기던 그 각이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실루엣은 또렷하지 않았다.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손이 낮게 내려가 바닥 쪽에 뭔가를 찍는 순간만 잠깐 살아났다. 길 하나만 고르라는 표식이 아니라, 이미 넘겨진 것과 남은 것을 함께 확인한 뒤 늦게 꺾으라는 우회 기호였다. 그 손끝이 찍은 자리는 제단 왼편 낮은 물턱 아래, 지금껏 검은 물막에 가려 있던 얕은 홈 줄과 맞닿아 있었다.

“로웬…”

내 입에서 거의 소리 없이 새어 나왔다.

세라가 바로 묻지 않았다. 리에트도 아직 자기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미리엘은 내가 보는 쪽을 따라 물 아래를 보았고, 브론은 받침 밑 발자리 하나를 더 짚었다. 그는 잠깐 후미를 돌아본 뒤, 낮게 말했다.

“아까 홈보다 안쪽이야. 물건 옮기는 길이 더 있다.”

이솔데가 그쪽을 흘끗 봤다.

“이제 배신자의 얼굴보다 늦게 남은 손을 먼저 보겠지.”

그녀 말과 함께 거울면 아래쪽 물이 한 번 더 안으로 꺼졌다. 제단 왼편 낮은 물턱 밑에서, 지금껏 막혀 있던 홈 하나가 짧게 열렸다. 이름 회랑으로 내려가는 입구 같았다. 완전히 열리진 않았다. 숨처럼 한 번 열렸다가 곧 닫혔다. 하지만 그 짧은 틈 사이로 안쪽 돌벽의 얕은 결 세 줄과, 그 아래 반쯤 잠긴 넓은 판 하나가 보였다. 장부나 위패가 아니라, 더 오래된 비교판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나는 바로 무릎을 낮췄다. 방금 열린 틈은 짧았지만, 물이 닫히기 직전 남긴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낮은 홈 둘은 바깥 숲 기록 홈과 같은 폭이었고, 그 아래 넓은 판이 닿는 자리만 유난히 매끈했다. 누군가 그 판을 자주 밀어 넣고 빼낸 흔적이었다. 물살도 이상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좁은 틈을 따라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단순 배수로가 아니라, 안쪽 손이 열고 닫는 길이었다.

브론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더 낮춘 채 손바닥으로 바닥 젖은 부분과 마른 부분 경계를 눌렀다.

“여기, 판 끝이 지나간 자리가 있어.”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돌에 남은 먹임이 한 줄이 아니야. 같은 판을 여러 번 끌었어. 게다가 사람 손으로 들고 뺀 게 아니라 밑에서 받쳐 밀어 올린 자국이다.”

미리엘은 이미 왼편 홈 아래를 더 짚고 있었다. 젖은 홈 벽을 손톱으로 살짝 건드리자, 위쪽 오래된 홈과 아래 덧댄 자리가 다른 소리를 냈다. 위쪽은 마른 돌이었고, 아래는 한 번 메웠다가 다시 판 자국이었다.

“윗결은 숲 안쪽 보관식이에요. 아래 덧댄 자리는 나중에 번호를 맞추려고 다시 판 거고요.”

그녀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안쪽에 있는 비교판이 먼저였고, 바깥에서 번호를 붙인 일은 나중이에요. 이름을 지운 다음 번호를 붙인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비교 줄 위를 덮어 버린 거예요.”

그 말은 컸다. 누군가 이름을 없앤 뒤 아무렇게나 숨긴 게 아니었다. 먼저 있던 기준판 자체를 덮어야 할 만큼 오래되고 불편한 기록이 안쪽에 남아 있었다.

세라는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앞줄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가만있지는 않았다. 왕국 사절 쪽에서 발 하나가 더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검집 끝을 돌려 물턱 앞 얕은 돌조각 하나를 툭 밀었다. 돌조각이 미끄러져 협로 입구 바로 앞에 걸렸다. 달려들려는 쪽은 발을 헛디디고, 우리 쪽은 미리 위치를 아는 사람만 발을 디딜 작은 턱이었다. 세라답게 말 대신 자리부터 바꾼 것이다.

바깥에서 누가 욕설 비슷한 숨을 삼켰다. 세라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음 발은 물러.”

짧은 경고였다. 그 말 뒤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잘 먹혔다.

리에트는 아직 거울면과 열린 자리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자기 기억에만 붙들려 있진 않았다. 그녀 시선은 이제 물막 아래 판 자국과, 뒤늦게 붙은 여섯 번째 그림자, 그리고 먼저 넘겨진 사람 허리의 표식끈 사이를 오갔다. 자기 수치 하나만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수치를 만든 자리 전체를 다시 보려는 눈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이솔데는 그 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손을 거두고도 완전히 물러서지 않은 채, 우리가 각자 무엇을 먼저 보는지만 지켜봤다. 공격한다면 지금이 더 쉬웠을 것이다. 리에트는 흔들렸고, 바깥 봉쇄는 가까웠고, 물막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솔데는 누구 하나를 찢는 대신 비교판 한 장과 잘린 홈 하나를 먼저 내보였다. 그게 이곳 방식이었다. 살해보다 편집, 공포보다 순서, 피보다 이름과 번호의 갈림.

미리엘이 먼저 반응했다.

“방금 안쪽 결은 여기랑 달라요. 숲 기록 홈보다 더 오래됐어요. 바깥 번호를 덧대기 전 바닥일지도 몰라요.”

브론도 즉시 이었다.

“입구 폭이 좁아. 사람보다 판을 먼저 밀어 넣는 길이다. 안쪽에 비교판이 눕혀져 있을 거야.”

리에트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아직 떨림이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조금 돌아와 있었다.

“내가 본 마지막을… 다시 맞춰 봐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맞추자. 네 기억, 숲 홈, 공식 보고. 셋 다 따로 놓고.”

리에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위로를 받아들인 고개가 아니었다. 다시 증언대에 서겠다는 고개였다. 자기 수치를 변명으로 밀어내지 않고, 그 수치가 어느 손에 의해 먼저 골라졌는지 보겠다는 선택이었다. 세라는 그 선택이 흔들리지 않도록 문턱을 더 좁혔고, 미리엘은 종이 조각을 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브론은 바닥 자국을 다시 한 번 긁어 같은 위치를 두 개로 표시했다. 누구도 말로 리에트를 구하지 않았다. 각자 맡은 자리로 그녀가 다시 볼 시간을 만들었다.

나는 말만 하지 않고 바로 손도 움직였다. 왼편 낮은 홈 앞 젖은 돌가루를 손등으로 쓸어 작은 표식을 하나 남겼다. 방금 열린 입구 위치를 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브론은 그 옆 돌턱에 짧게 못자국 같은 표시를 긁었고, 미리엘은 위패함 안쪽 종이 조각 하나를 뜯어 잘린 결 셋, 덧댄 번호 둘, 비교판 한 장만 적어 손바닥 안에 접어 넣었다. 지금 이 안에서 오래 머물 여지는 없었다. 누가 어떤 줄을 봤는지 바로 흩어 적어 두지 않으면, 바깥 압박이 들이닥치는 순간 또 다른 기억 하나로 뭉개진다. 리에트도 그걸 알았는지, 떨리는 손으로 숨을 한 번 고른 뒤 거울면 속 남은 사람의 서는 각과 먼저 넘겨진 사람 허리 위치를 눈으로 다시 짚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바깥 소리와 안쪽 물길을 같이 들었다. 바깥 봉쇄는 더 가까워졌고, 안쪽 물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누군가 위에서 급히 덮으려는 장면일수록 아래에서는 반대로 더 선명해지는 법이었다. 왕국 사절은 사람 하나를 골라 기록을 닫고 싶어 했고, 엘프 강경파는 숲 안쪽 이름들을 안쪽에서 끝내 접어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손에 잡힌 건 얼굴 하나가 아니라 줄 전체였다. 자른 이름, 덧댄 번호, 강제 희생 표식, 뒤늦게 붙은 여섯 번째 그림자, 그리고 로웬이 남긴 우회 각. 어느 하나만 떼어선 설명이 닫히지 않았다.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숲 기록 홈은 아직 더 남아 있어요. 방금 열린 길 아래에.”

브론도 말했다.

“바닥 자국도 한 번 더 이어질 거야. 여기서 끝난 끌림이 아니었어.”

세라는 짧게 정리했다.

“그럼 아직 안 나간다. 안쪽 줄부터 본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집 끝을 살짝 옮겨 협로 입구를 더 날카롭게 좁혔다. 뒤에서 들어오려는 발이 있으면 바로 막아 세울 각이었다. 바깥에서 누가 또 말을 올리려 했지만, 세라의 자리와 검집 금속음이 먼저 답했다.

이솔데는 우리 대답을 들은 뒤에도 웃지 않았다. 다만 처음보다 덜 말라 보이는 눈으로 낮게 말했다.

“배신자의 이름을 찾지 마라.”

그녀 손이 마지막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누가 무엇을 접어 옮겼는지 봐.”

그 말에 나는 바닥보다 먼저 우리 손들을 봤다. 미리엘 손에는 잘린 이름의 결과 덧댄 번호가 적힌 종이가 있었고, 브론 손에는 젖은 돌가루가 묻어 있었다. 세라 손은 검집을 붙든 채 문턱 발소리를 셌고, 리에트 손은 아직 떨리면서도 화살을 놓지 않았다. 이솔데가 요구한 건 비밀 문구 하나가 아니었다. 누구 손이 어떤 물건을 붙들고, 어떤 손이 어떤 사람을 먼저 넘겼는지, 살아 있는 손의 순서를 끝까지 보라는 요구였다.

물 아래에서 로웬의 실루엣이 다시 한 번 늦게, 망설이듯 꺾였다. 여섯 번째 그림자도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그 짧은 겹침 끝에서, 닫혔던 이름 회랑 입구가 숨처럼 다시 열렸다.

이번엔 나뿐 아니라 리에트도 그쪽을 봤다.

그녀 눈에 아직 수치는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 수치가 자기 기억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남겨 둔 부끄러운 장면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겨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더 무거운 일이었다. 자기 과거를 다시 증언해야 했으니까.

사당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깥 봉쇄 소리는 더 가까워졌고, 안쪽 물길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검은 뿌리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까지 분간될 만큼 또렷했다. 차가울 만큼. 우리는 누구도 위로하지 않은 채 제자리를 지켰다. 그게 지금 우리가 고를 최선이었다. 누군가를 불쌍하다고 감싸는 말보다, 틀린 줄을 다시 읽을 시간을 버는 일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누가 남았는가, 누가 먼저 넘겨졌는가, 누가 그 위에 번호를 덧댔는가를 한 줄씩 다시 묶어 두는 일도 같이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유예 끝에서, 로웬이 지나간 늦은 우회로가 다음 길의 얼굴을 조금 더 드러냈다.

나는 열린 틈 가장자리의 물살을 손등으로 막아 보았다. 찬물이 손목을 물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은 아니었다. 판이 지나갈 때 바깥 물을 잠깐 빌려 쓰는 흐름이었다. 안쪽 비교판은 그냥 놓인 기록이 아니라, 필요할 때 밀려 나와 바깥 기록과 맞물리는 장치였다. 누군가 오래전에 이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위에 번호를 덧대어 원래 맞물림을 흐렸다.

“다음엔 판을 봐야 해.”

내 말에 미리엘이 접은 종이를 위패함 안쪽에 넣었다. 브론은 돌가루 표시 위에 작은 나무 조각을 눌렀고, 세라는 바깥을 향해 검집을 한 번 더 세웠다. 리에트는 마지막으로 거울면 속 남은 사람의 등을 보았다. 그녀 눈에 남은 수치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수치 하나가 길 전체를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보았다.

바깥 봉쇄선이 다시 밀려왔다. 왕국 사절은 이 장면을 빨리 닫고 싶어 했고, 엘프 강경파는 사당 안쪽 이름들을 숲의 오점으로 묻고 싶어 했다. 우리는 어느 쪽 문장에도 몸을 맡기지 않았다. 세라는 길목을 막고, 브론은 판이 지나간 자리를 지키고, 미리엘은 이름의 결과 번호 자국을 따로 적고, 리에트는 자기 기억을 다시 증언할 준비를 했다. 나는 로웬의 늦은 우회로와 여섯 번째 그림자를 같은 물살 위에 놓았다.

그제야 다음 길이 조금 선명해졌다. 배신자의 얼굴을 찾는 길이 아니었다. 누가 이름을 접고, 누가 번호를 얹고, 누가 살아 있는 사람을 먼저 넘겼는지 따라가는 길이었다. 이름 회랑은 그 질문을 품은 채 다시 숨을 열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그 입구를 보았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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