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면의 거짓말
이름 회랑 입구는 뒤집힌 제단 왼편 낮은 물턱 아래에서 숨을 짧게 열었다 닫았다. 정면에는 검은 거울물이 사람 키만큼 솟아 있었고, 오른쪽 반사 홈에는 바깥 등불이 얇게 갈라져 들어왔다. 뒤쪽 협로에는 왕국 사절의 장부 모서리와 엘프 강경파의 창끝이 서로를 밀고 있었으며, 그 둘 사이에 세라가 검집 끝을 바닥에 박고 서 있었다. 세라의 오른발은 문턱 안쪽 반 치에 걸려 있었고, 왼쪽 어깨는 우리 쪽 낮은 홈을 가렸다. 누가 밀고 들어오면 먼저 세라의 발목과 검집에 걸려 속도를 잃을 자리였다.
브론은 내 왼편 물턱에 한쪽 무릎을 대고 있었다. 두꺼운 손가락은 젖은 돌과 마른 돌의 경계만 만졌고, 눈은 바닥을 보았다. 미리엘은 오른편에서 위패함을 팔꿈치로 고정한 채 젖은 종이 조각을 품에 넣었다 뺐다 했다. 리에트는 거울면과 낮은 홈 사이에 섰다. 활은 내려가지 않았지만 화살촉은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 자기 과거가 다시 올라오는 물막을 보면서도, 발끝만큼은 세라가 만들어 둔 마른 선 안쪽에 붙들고 있었다.
위험은 셋이었다. 바깥의 두 세력은 같은 좁은 문턱을 서로 다른 명분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거울면은 리에트의 수치를 다시 띄워 우리 시선을 한 사람에게 묶으려 했다. 그리고 제단 아래 물길은 열렸다 닫힐 때마다 안쪽 비교판의 위치를 바꾸며, 잘못 짚은 손을 그대로 물속으로 끌어 넣을 듯 차갑게 빨아들였다. 나는 그래서 얼굴보다 발을 먼저 세었다. 세라의 발, 리에트의 발, 브론의 무릎, 미리엘 손등, 그리고 내가 방금 표시해 둔 낮은 홈 앞 젖은 돌가루.
브론이 먼저 말했다.
“배수로가 아니야.”
브론은 손끝으로 물살을 눌렀다가 바로 뺐다. 물이 손톱 밑을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한 박자 늦게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면 이렇게 늦게 안 돌아와. 안쪽에서 뭔가가 움직여. 판이 받쳐 올라올 때 바깥 물을 잠깐 빌리는 식이야.”
미리엘이 낮은 홈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오래된 홈은 거칠게 마른 소리를 냈고, 그 아래 덧댄 자리에서는 젖은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윗결이 먼저예요. 숲 안쪽에서 이름을 눕혀 보관하던 홈이에요. 아래쪽은 나중에 다시 판 자리예요. 번호를 맞추려고.”
리에트 눈이 흔들렸다. 거울면을 보다가 낮은 홈을 보았고, 다시 자기 손에 남은 떨림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 기억은 한 장면으로만 굳어 있었다. 좁은 길, 사라진 대장, 뒤늦게 살아남은 자기 몸. 이제 바닥과 판과 표식이 그 장면 주변에 다른 자리를 세우고 있었다. 그게 구원처럼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더 잔인했다. 그동안 벌처럼 받아들여 온 기억이 사실은 누군가 고른 한 조각일지 모른다는 말이었으니까.
바깥에서 왕국 사절의 목소리가 밀려왔다.
“물증이면 바깥에서 입회하에 대조하면 된다. 지금 넘겨라.”
엘프 강경파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안쪽 잔향을 더 두면 숲 기록 전체가 더럽혀진다!”
세라는 대답보다 먼저 검집을 틀었다. 금속 끝이 문턱 돌조각 하나를 살짝 밀었다. 그 돌은 바깥 발이 들어오려는 바로 앞에 걸렸고, 안쪽에서만 피할 만한 낮은 턱이 되었다. 왕국 서기가 장부를 앞세운 채 한 걸음 들어오려다 발끝을 멈췄다. 엘프 창수도 같은 턱에 창대를 걸었다. 둘은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같은 입구를 같은 박자로 노렸다.
“아직 안 끝났어.”
세라의 말은 짧았다. 설명이 없어서 오히려 단단했다. 바깥이 논리를 늘어놓을 틈을 주지 않고, 지금 이 좁은 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먼저 고정하는 말이었다.
나는 젖은 돌가루 위에 손가락으로 세 줄을 그었다. 왼쪽 줄은 바깥 사절이 들이미는 공식 기록, 가운데 줄은 리에트가 몸으로 외운 기억, 오른쪽 줄은 사당 안쪽에 남은 홈과 판의 흔적이었다. 손끝에 묻은 물과 돌가루가 섞여 검은 선처럼 남았다.
“하나씩 놓자.”
리에트가 나를 보았다.
“뭘.”
“공식 기록. 네 기억. 사당에 남은 흔적.”
나는 세 줄 사이를 일부러 띄웠다. 서로 닿지 않게.
“한 줄만 붙들면 또 편한 죄인 하나로 끝나. 셋을 따로 놓고, 어디가 비는지 봐야 해.”
리에트 입술이 굳었다.
“내 기억이 비었다는 말이야?”
“아니.”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리에트를 위로하려고 얼굴을 보면, 우리도 또 한 사람 감정만 보게 된다.
“제일 아픈 장면이 제일 먼저 남았다는 말이야. 그게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 그 장면만 남기기 좋게 골랐다는 의심도 봐야 한다는 말.”
그때 검은 뿌리 아래 이솔데가 움직였다. 달려들지 않았다. 젖은 이름판 파편 하나를 들어 왼편 낮은 홈에 끼웠다. 파편 위에는 엘프식 이름 결이 반쯤 남아 있었고, 밑면에는 인간식 끝번호를 긁다 만 자국이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파편을 꽂은 뒤에도 손을 떼지 않고, 장례천 조각 하나를 그 옆에 눕혔다. 오래 말라붙은 수액과 끊어진 매듭이 물을 먹자, 거울면 아래쪽이 얕게 떨렸다.
패주처럼 보였던 장면이 다시 섰다.
먼저 아래로 넘어간 둘은 흩어져 달아나는 발걸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자기 몸으로 버티려 했고, 다른 하나는 거의 끌리듯 낮은 턱을 넘어갔다. 뒤에 남은 사람은 앞으로 달리지 않았다. 좁은 협로를 비스듬히 막았다. 활을 끝까지 쏠 자세가 아니라, 뒤따라오는 무언가가 한 번에 두 사람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게 몸 전체를 가로놓는 자세였다. 더 뒤에는 한 박자 늦은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었다. 겁먹은 도주자가 아니라, 먼저 넘어간 몸을 놓치지 않으려 낮게 손을 뻗는 사람처럼 보였다.
브론이 바닥을 짚었다.
“발자국 간격이 안 맞아.”
브론은 뒤꿈치 눌림과 끌림 자국을 차례로 손가락으로 연결했다.
“뛰면 이렇게 길게 눌리지 않는다. 하나는 무게가 실린 채 끌렸고, 하나는 옆으로 버텼어. 앞줄이 도망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먼저 넘기는 자리다.”
미리엘은 거울면 아래 허리께에 흔들리는 얇은 끈을 보았다. 숨을 삼켰다.
“강제 희생 표식 계열이에요.”
세라가 뒤를 막은 채 물었다.
“성도 쪽이야?”
“완성품은 아니에요. 더 오래되고 거칠어요. 그런데 뜻은 같아요. 이름보다 처리 번호를 먼저 매기는 방식.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어디로 넘길지부터 붙잡는 방식이에요.”
그 말이 우리 사이를 차갑게 눌렀다. 미리엘은 성도의 문장을 오래 배웠다. 그런 표식이 사람을 보호한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지금 미리엘은 그 말의 오래된 원형이 숲 안쪽 장례 자리에서 이미 더 거칠게 쓰였다는 사실을, 자기 손으로 짚고 있었다.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홈 폭을 다시 재고, 표식끈이 스친 물때의 높이를 눈으로 묶었다.
리에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나는 버려졌다고 생각했어.”
이번에도 아무도 바로 위로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선 위로가 또 다른 덮개가 된다. 세라는 입구를 막았고, 브론은 끌림 자국을 붙들었고, 미리엘은 표식끈을 읽었다. 나는 세 줄 사이 빈칸을 보았다. 리에트가 스스로 자기 기억을 말할 때까지, 그 빈칸을 다른 사람이 채우면 안 됐다.
“네가 본 순서만 말해 줘.”
나는 젖은 돌가루 위 가운데 줄을 두드렸다.
“판단 말고, 몸이 아직 외우는 자리 순서.”
리에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또 그 장면 하나만 남는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좁은 길. 앞에서 하나가 무너졌어. 나는 뒤를 봤고, 대장이 안 보였어.”
“안 보인 순간 네 시선은 어디였어.”
“넘어진 쪽.”
“대장이 사라진 쪽을 봤어?”
리에트는 대답을 바로 내지 못했다. 활을 쥔 손이 다시 떨렸다. 브론이 그 사이 바닥의 버팀 자국을 따라 손등을 밀었다.
“네 눈이 앞으로 쏠린 동안, 남은 사람은 옆으로 틀었어. 정면으로 빠진 발자국이 없어. 옆으로 몸을 세운 자국만 있어.”
미리엘도 낮은 홈을 가리켰다.
“사당에 남은 줄도 같아요. 먼저 넘어간 몸, 남아 막은 몸, 뒤늦게 붙은 손. 셋이 따로 남아 있어요.”
리에트가 거울면을 보았다. 눈빛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무릎은 꺾이지 않았다. 자기가 수치로 여긴 기억이 틀렸다는 말은 구원보다 더 무겁다. 스스로를 벌주며 버텨 온 세월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벌마저 누가 고른 것인지 다시 따져야 하니까.
거울면 아래쪽에서 낯익은 어깨 기울기가 짧게 살아났다. 앞으로 곧게 빠지지 않고, 한 번 늦게 옆으로 틀어 낮은 턱 아래를 확인하는 움직임. 로웬 헤일이 남기던 우회 표식의 몸짓이었다. 얼굴은 흐렸다. 손만 보였다. 손끝이 이미 넘어간 사람과 남은 사람의 사이를 찍고, 그 아래 북쪽으로 꺾이는 작은 잎맥 모양 홈을 눌렀다. 도망자 손이 아니었다. 어느 길로 빼내고, 어느 자리에 남은 증거를 나중에 맞출지 확인하는 손이었다.
“로웬.”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크게 나갔다.
세라가 뒤돌지 않은 채 물었다.
“확실해?”
“얼굴은 아니야.”
나는 물 아래 잎맥 홈을 보았다.
“손버릇이야. 먼저 넘긴 것과 남은 것을 함께 확인한 뒤, 북쪽으로 꺾으라고 남긴 손.”
브론이 판 끝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 손이 찍은 자리 아래에 판이 더 있어. 넓은 판.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밑에서 받쳐 올라오는 판이다.”
미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위 홈은 개별 이름을 눕히는 자리예요. 아래 판은 여러 줄을 한 번에 맞대 보게 만든 자리일지도 몰라요. 공식 기록과 개인 기억을 따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어긋난 부분을 찾게 만든 장치.”
바깥에서 왕국 사절이 다시 소리쳤다.
“외부 증언 하나가 숲 기록 전체를 흔들 수는 없다!”
엘프 강경파도 뒤따랐다.
“배신자 줄을 다시 열면 숲 전체가 흔들린다!”
이번엔 리에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직 말라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정말 배신자 하나면 왜 이름을 잘랐지.”
바깥 목소리가 잠깐 멎었다.
리에트는 활을 아주 조금 내렸다. 사람에게 겨누던 무기가 아니라, 자기 몸을 버티던 막대처럼 보였다.
“왜 번호를 덧댔고, 왜 살아 있는 사람한테 희생 표식을 먼저 붙였지. 왜 도망친 사람 이야기에 장례천이 남아 있지.”
엘프 강경파 쪽에서 창대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세라는 바로 검집을 눌렀다. 문턱 돌조각이 또 반 치 움직이며 입구를 좁혔다. 왕국 서기가 장부를 펼치려다 몸을 뒤로 빼야 했다.
“그래서 더 봐야 해.”
리에트가 말했다.
그 말은 우리에게 한 말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리에트는 ‘믿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지금 이 안에서 가능한 가장 큰 선택이었다.
나는 세 줄 옆에 짧은 표식을 남겼다. 공식 기록 옆에는 바깥 사절이 외우듯 들이민 말, 개인 기억 옆에는 리에트가 선 자리, 사당 흔적 옆에는 잘린 이름 결과 덧댄 번호. 그리고 세 줄 아래, 브론이 짚은 넓은 판의 가장자리를 표시했다.
“판을 열자.”
브론이 바로 몸을 낮췄다.
“한 뼘 정도밖에 못 올릴 거야. 오래 벌리면 받침이 깨진다.”
“한 뼘이면 충분해.”
세라가 입구를 막은 채 말했다.
“시간은 짧아. 바깥이 두 번째로 밀면 내가 한 번밖에 못 늦춰.”
미리엘은 위패함을 몸 안쪽으로 옮기고 젖은 천을 꺼냈다. 천 끝을 말아 판 가장자리에 끼웠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리에트는 화살을 다시 등에 걸고, 짧은 칼 손잡이로 오른쪽 홈 아래 젖은 돌가루를 쓸어 냈다. 나는 낮은 돌조각 둘을 옮겼다. 하나는 판 밑 받침으로, 하나는 브론 손이 들어갈 틈을 지키는 쐐기로 삼았다. 말이 길어지지 않았다. 각자 붙들 것이 분명해지자, 우리는 설명보다 손을 먼저 움직였다.
브론이 숨을 세 번 나눠 들이켰다.
“지금.”
브론이 판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물이 손목을 감았다. 나는 쐐기를 밀었고, 미리엘은 젖은 천을 더 눌렀다. 리에트는 오른쪽 홈에서 들어오는 검은 수액을 칼손잡이로 막았다. 세라는 바깥에서 밀려드는 첫 발을 검집으로 받아 냈다. 금속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얕은 물 위를 찢었다.
판이 한 뼘 올라왔다.
그 아래는 처형장이 아니었다.
먼저 보인 건 이름 없는 위패 홈이었다. 낮고 길게 이어진 홈들이 물 아래로 줄지어 있었고, 각 홈 가장자리에는 원래 이름을 눕히던 얕은 결이 남아 있었다. 어떤 결은 중간에서 잘렸고, 어떤 결은 번호가 먼저 눌렸다가 다시 긁혀 있었다. 이름을 지운 뒤 빈칸에 번호를 붙인 게 아니었다. 이름이 아직 남아 있는 자리 위로 번호를 덮으려다, 다 끝내지 못하고 급히 밀어 넣은 흔적이었다.
미리엘이 숨을 멈췄다.
“장례 자리예요.”
미리엘 손끝이 아래 홈 가장자리를 따라갔다.
“사람을 세워 벌주던 방이 아니에요. 위패나 관 조각을 밀어 넣고, 이름을 바로 읽히지 않게 눕혀 두던 자리예요. 그런데 나중에 번호가 들어왔어요. 애도하던 줄 위에 처리 번호를 덧댄 거예요.”
브론도 받침턱을 보았다.
“폭도 사람 체중용이 아니야. 무겁고 납작한 물건을 밀고 빼는 폭이야. 위패함, 얇은 관판, 장례판 같은 것.”
나는 아래쪽 물살을 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물과 함께 올라왔다. 피 냄새도, 썩은 냄새도 아니었다. 오래 접어 둔 나무와 젖은 천이 아직 이름을 붙들고 있는 냄새였다. 고요한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누군가 계속 손대고 다시 접어 넣은 자리의 냄새였다.
판 아래 오른쪽에는 더 낯선 흔적이 있었다. 엘프식 이름 결 옆에 인간식 날짜 모양 눌림이 억지로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같은 사건을 한 줄 연표처럼 맞추려는 가느다란 세로눈금이 남아 있었다. 숲의 장례 홈에는 원래 필요 없는 눈금이었다. 누가 어떤 날 죽었는지보다, 어느 순서로 애도되었는지가 중요한 자리였을 테니까. 그런데 나중의 손은 그 순서를 날짜와 번호로 눌러 맞추려 했다. 숲의 기억을 왕국 보고서에 맞춰 읽기 좋은 표로 고친 흔적이었다.
“여기.”
나는 세로눈금을 가리켰다.
“바깥 기록이 숲에 들어온 자국이 있어. 숲 이름을 지운 다음 왕국식 연표로 다시 누른 게 아니라, 장례 홈 위에 바로 날짜 줄을 얹었어.”
미리엘이 몸을 더 낮췄다.
“성도식 표식끈과도 이어져요. 번호 폭은 성도 격리 표식 계열보다 거칠지만, 한 사람을 이름에서 빼서 처리 줄로 옮기는 생각은 같아요. 숲 안에서 이름을 접고, 바깥에서 날짜와 번호로 다시 붙인 거예요.”
브론이 판 아랫면을 손톱으로 짚었다.
“그리고 판은 이 둘을 같이 보게 만들었어. 원래는 장례 홈과 바깥 기록을 비교하려고 있던 판일지도 몰라. 누군가 이 판을 덮은 뒤 위쪽에 배신자 이야기를 올렸고.”
나는 거울면을 보았다. 이솔데는 검은 뿌리 아래에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웃지 않았다.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답이 맞았다고 기뻐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아무도 보지 않았던 것을 겨우 다시 보게 만든 사람처럼, 손끝만 검은 수액 속에 담근 채 가만히 있었다.
바깥 사절단이 다시 밀었다. 이번엔 장부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왕국 부관 하나가 어깨로 엘프 창수의 팔을 밀어내며 문턱을 밟으려 했다. 세라는 검집을 빼지 않았다. 대신 몸을 반 걸음 낮춰 부관의 무게를 옆 돌벽으로 흘렸다. 부관 발목이 세라가 밀어 둔 돌조각에 걸렸고, 창수는 자기 창대를 빼느라 한 박자 늦었다. 말보다 몸이 먼저 부딪혔다. 물이 튀었다. 리에트가 반사적으로 활을 들려 하자, 세라가 짧게 말했다.
“화살 아껴.”
리에트는 바로 멈췄다. 예전 같으면 세라 말에 비웃음이 먼저 나왔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달랐다. 활을 사람에게 겨누지 않고, 오른쪽 홈으로 흘러드는 수액 줄을 막았다. 자기 과거를 다시 읽는 증언자가 동시에 현재 우리 판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왕국 사절이 문턱 밖에서 이를 악물었다.
“숲 내부 잔향에 인간 연표를 끼워 맞췄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그건 정치적 해석이다.”
나는 판 아래 세로눈금을 보며 대답했다.
“해석은 바깥에서 먼저 했어.”
사절의 숨이 멎었다.
“여긴 장례 홈이야. 그런데 날짜 눈금과 번호가 들어왔지. 누가 먼저 정치로 읽었는지는 이 돌이 말하고 있어.”
미리엘이 종이 조각에 세 가지를 적었다. 잘린 이름, 덧댄 날짜, 희생 표식. 각 단어 사이를 일부러 띄웠다. 한 줄로 붙이면 또 빠진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브론은 판을 너무 높이 들지 않으려고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손가락 하나로만 받쳤다. 세라는 입구를 막은 채 바깥 두 세력의 발소리를 세었다. 리에트는 아까 자신이 보았던 ‘대장 사라짐’의 순간과, 지금 판 아래에서 보이는 옆 버팀 자리를 계속 겹쳐 보았다.
“그럼.”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내가 본 마지막은 끝난 장면이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린 장면이었지.”
미리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번호가 덧씌워진 장면이에요.”
브론도 판을 붙든 채 말했다.
“남은 사람의 버팀을 도주처럼 보이게 만든 장면.”
셋의 말은 서로 같은 문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필요한 건 한 사람이 큰 진실을 선언하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가 자기 손에 붙든 것만 정확히 말하는 일. 손과 발과 홈과 표식이 서로 빈칸을 메우게 두는 일이었다.
거울면 아래 로웬의 손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북쪽으로 꺾이는 잎맥 홈 옆에서 아주 짧게 멈췄다. 그 손은 위패 홈 하나를 찍지 않았다. 세 줄이 만나는 낮은 턱을 찍었다. 공식 보고가 들어온 자리, 리에트 기억이 끊긴 자리, 사당 장례 홈이 살아남은 자리가 겹치는 낮은 턱. 로웬은 여기서 어느 한쪽을 완성하려 한 게 아니었다. 나중에 오는 사람이 셋을 다시 겹쳐 보도록, 찾기 어려운 곳에 멈춤 자리를 남긴 것이다.
“로웬은 배신자를 찾으라고 남긴 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장례가 어디서 잘렸는지 보라고 남겼어.”
이솔데가 그때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뿌리 사이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아까처럼 말라붙은 분노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배신자의 이름을 묻지 마라.”
이솔데의 목소리가 물막 아래에서 올라왔다.
“누가 애도를 접어 옮겼는지 보아라.”
그 말 뒤에 판 아래 물살이 한 번 더 떨렸다. 한 뼘 열린 틈 안쪽에서 더 깊은 홈 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이름 홈이 아니라 위패를 세웠다가 눕힌 자리였다. 엘프식 매듭 조각, 인간식 날짜 눈금, 성도 표식끈 계열의 낡은 금속편이 서로 닿지 않게 떨어져 있었다. 누가 서둘러 숨기며 완전히 섞지 못한 물건들처럼 보였다. 그 사이로 북쪽으로 꺾인 잎맥 홈이 이어졌다.
브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오래 못 버틴다.”
브론의 손목 힘줄이 물에 젖어 돋았다. 나는 쐐기를 한 번 더 밀어 넣고, 미리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엘은 젖은 종이를 새로 꺼내 아주 짧은 부호만 남겼다. 홈 위치, 날짜 눈금의 방향, 강제 희생 표식의 폭, 로웬 손이 찍은 북쪽 잎맥. 리에트는 자기 기억의 순서를 적지 않았다. 대신 판 아래 남은 사람의 몸이 어느 쪽으로 틀어졌는지만 짧게 말했다.
“옆. 앞이 아니라 옆.”
미리엘이 그 말을 종이에 적었다. 리에트의 증언을 위로가 아니라 물증 옆에 놓은 것이다. 리에트가 그것을 보고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편해진 숨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설명당한 숨도 아니었다. 자기 말이 한 줄 증거로 놓이는 걸 처음 본 사람의 숨이었다.
세라는 바깥을 향해 다시 말했다.
“안쪽 대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온다.”
왕국 사절이 낮게 웃었다.
“기사 후보 하나가 숲과 왕국의 기록 절차를 막겠다는 건가.”
세라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절차를 막는 건 너희야.”
검집 끝이 돌에 더 깊이 박혔다.
“지금 열려 있는 건 장례 자리야. 장례를 먼저 닫으려는 쪽이 절차를 말하지 마.”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바깥 두 세력의 숨을 동시에 막았다. 세라가 우리 편이라서가 아니라, 문턱을 몸으로 쥔 사람이 장례라는 말을 먼저 세웠기 때문이다. 왕국은 그 말을 정치적 공격으로 듣고, 엘프 강경파는 숲의 수치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쪽에서는 그 말이 판 아래 물살과 맞물렸다. 이곳은 배신자 처형장이 아니었다. 이름을 접어 숨긴 장례 자리였고, 누군가는 그 장례를 날짜와 번호와 보고서로 눌러 덮었다.
브론이 판을 천천히 낮췄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받침쐐기 덕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남았다. 브론은 그 틈에 작은 나무 조각을 끼워 넣고, 나무 끝에 젖은 돌가루를 묻혔다.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게 만든 표시였다. 미리엘은 종이를 위패함 안쪽 마른 틈에 넣었고, 그 위에 젖은 천을 다시 접어 덮었다. 리에트는 활을 다시 손에 들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을 벌주기 위해 쥔 무기가 아니었다. 문턱 밖에서 누가 판을 빼앗으려 들면 가장 먼저 줄을 끊을 사람의 손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면을 보았다. 아까까지 거울은 리에트가 가장 부끄러워한 장면을 먼저 띄웠다. 지금도 완전히 믿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거울은 언제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쪽으로 빛을 접는다. 하지만 바닥의 자국은 빛보다 느렸고, 판 아래 홈은 기억보다 더 오래 물을 먹었다. 거울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 거짓말도 혼자 만든 게 아니었다. 바깥 기록, 숲 내부의 두려움, 성도식 처리 표식, 살아남은 사람의 수치가 서로 다른 손으로 같은 장면을 좁혔다.
그래서 나는 거울을 부수지 않았다. 믿지도 않았다. 그 대신 세 줄을 다시 나눠 들었다. 미리엘에게는 잘린 이름과 덧댄 번호를 맡겼고, 브론에게는 판 받침과 끌림 자국을 맡겼다. 세라에게는 문턱과 바깥 두 세력의 발을 맡겼고, 리에트에게는 자기 기억의 옆으로 틀어진 자리를 맡겼다. 나는 로웬의 북쪽 잎맥 홈과 공식 보고의 빈칸을 같이 붙들었다. 물건 하나를 들고 답을 찾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 손이 흩어 붙든 조각이 서로를 놓치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이솔데는 검은 뿌리 아래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몸이 물러서자 거울면 아래 이름 회랑이 아주 조금 더 열렸다. 더 깊은 곳에서는 위패 홈들이 길게 이어졌고, 어떤 홈에는 아직 잘리지 않은 이름 끝이 남아 있었다. 읽을 만큼 또렷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워진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아직 장례가 남아 있었다. 다만 누군가 그것을 장례라고 부르지 못하게 눌렀을 뿐이다.
리에트가 그 깊은 홈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다시 말해야 해.”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숨지 않았다.
“내가 본 마지막을 그대로 믿지 않겠다고. 그렇다고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겠다고.”
“그게 증언이야.”
미리엘이 조용히 말했다.
브론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세라는 대답 대신 문턱 밖 발소리에 맞춰 검집을 더 세웠다. 나는 리에트가 남긴 ‘옆’이라는 한 글자를 머릿속에 다시 박았다. 앞이 아니라 옆. 도망이 아니라 버팀. 배신자가 아니라 장례를 지운 손.
이름 회랑은 죽은 자리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아직 누군가 이 장면을 빨리 닫으려 했고, 안쪽 물살은 판을 다시 열라고 낮게 울었다. 정면 거울물, 왼쪽 장례 홈, 오른쪽 반사 홈, 뒤쪽 문턱에서 밀려드는 압박이 한꺼번에 우리 몸을 붙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한 줄만 보지 않았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대조판이었다. 서로 다른 손에 나뉜 기억과 기록과 물증이, 같은 장면 안에서 겨우 한 번 겹쳤다.
나는 판 아래 남은 찬 공기를 손등으로 막아 보았다. 물은 더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다 북쪽 잎맥 홈에서 한 번 꺾였다. 로웬이 남긴 손길은 거기서 사라졌다. 대신 더 깊은 위패 줄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다음에 봐야 할 건 배신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워진 장례의 순서, 누가 이름을 접고, 누가 번호를 얹고, 누가 살아 있는 사람을 먼저 넘겼는지였다.
“판을 다시 열 때는.”
나는 낮게 말했다.
“장례 홈부터 본다. 사람 이름을 죄목보다 먼저 놓고.”
리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는 문턱을 막은 채 한 발 더 버텼다. 브론은 받침쐐기를 눌러 표시를 남겼고, 미리엘은 종이 조각이 젖지 않게 위패함 안쪽을 다시 접었다. 바깥 두 세력은 아직 문장을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장이 더 이상 우리 안쪽 줄을 혼자 덮지는 못한다.
사라진 장례 전체가, 물 아래에서 조금씩 자기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