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숲의 문턱
유리숲 안쪽 첫 공식 이동로는 길이라기보다 검인대 같았다. 발목 높이 얕은 수로에 거울수액이 엷게 흐르고, 그 위로 반투명한 회백색 돌판이 반 걸음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돌판 폭은 둘이 나란히 디딜 수 없을 만큼만 열려 있었다. 한 사람, 한 꾸러미, 한 박자씩만 통과하라는 소리였다. 양옆 흰 나무 줄기에는 세로 흠집이 길게 남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오래된 흉터였고, 가까이서 보면 누군가 글자와 사람 이름이 있던 자리만 골라 파낸 빈칸 같았다.
길 입구를 막은 엘프 경계병 둘은 창보다 장부를 먼저 들었다. 뒤쪽 둔덕에서는 왕국 사절단 불빛이 바람에 흔들렸고, 더 낮은 갈대 아래에는 성도 수거반 장대가 아직 안쪽에도 못 들어온 채 삐죽 서 있었다. 셋 다 같은 걸 보고 있었다. 누가 무슨 얼굴로 들어오는지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들고 어느 줄에 서는지.
“발판 밖으론 밟지 마라.”
엘프 기록 담당이 첫 돌판을 검 끝으로 가리켰다.
“짐도 그 줄 안에서만 옮긴다. 물 위에 그림자 두 겹이 겹치면 다시 뒤로 물린다.”
나는 대꾸 대신 말뚝 셋을 먼저 봤다. 허리, 가슴, 눈높이에 맞춘 얇은 말뚝이었다. 사람 키를 재는 눈금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더 보면 의도가 달랐다. 누가 꾸러미를 어깨에 거는지, 누가 검집을 몸 안쪽으로 돌리는지, 누가 장부를 허리보다 높이 드는지 한눈에 걸리게 만든 표식이었다. 말뚝 사이 낮은 홈에는 흙 대신 엷은 유리 가루가 깔려 있었다. 누가 발보다 짐을 먼저 들이밀었는지, 누가 몸을 틀어 빈손인 척했는지 금방 드러나게 하려는 자리였다.
브론이 내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발보다 손을 먼저 재네.”
그는 벌써 물증 꾸러미 매듭을 한 번 더 바꾸고 있었다. 목패 반쪽은 납작한 천 안쪽으로 더 밀고, 끝번호 꼬리표만 일부러 바깥에 얇게 걸쳤다. 숫자부터 좇는 손은 늘 먼저 그리로 간다. 그 한 박자 동안 진짜 물건은 살아남는다. 브론은 상대 손버릇부터 읽고 꾸러미를 만지는 사람이었다.
“목패는 안쪽.”
그가 내게만 들리게 덧붙였다.
“꼬리표는 바깥. 저쪽이 숫자부터 세면 우린 순서를 읽는다.”
미리엘은 피난민이 남기고 간 젖은 천끈 두 조각을 소매 안에서 다시 펼쳐 봤다. 하나는 안쪽으로 말렸고, 다른 하나는 손가락 기름이 묻은 방향이 반대로 눌려 있었다. 그녀는 말보다 손순서가 먼저 흐트러지는지 읽고 있었다. 천끈 끝에 남은 검은 때를 엄지로 문지른 뒤, 아예 두 조각의 겹침 순서를 바꿔 소매 속에 다시 접었다. 누가 먼저 그 조각을 꺼내 보더라도 원래 접힌 방향부터는 못 읽게 하려는 손놀림이었다.
리에트는 경계병 얼굴을 보지 않았다. 물거울 길 안쪽 그림자만 봤다. 가지 사이 화살각, 나무뿌리 아래 낮은 틈, 뒤쪽에서 누군가 한 걸음 다가왔다 멈춘 박자, 얕은 수로를 건너는 바람 결. 숲이 우리를 어디로 세우려는지부터 읽는 눈이었다. 활시위엔 손을 올리지 않았지만, 오른손 검지 첫마디가 이미 두 번 아주 짧게 움직였다. 활을 들어야 할 거리와 아직 들어선 안 되는 거리를 가르는 습관이었다.
세라는 말없이 앞줄에 섰다. 검집 끝만 젖은 돌판 위에 세워 길목 절반을 막았다. 벨로네 이름을 꺼내면 이 길은 조금 더 쉽게 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 아래 내 이름과 리에트 증언, 우리가 든 물증이 함께 묶여 올라갈 것이다. 세라는 아직 그 쉬운 길을 쓰지 않았다. 대신 자기 몸으로 길 폭을 좁혔다. 누가 먼저 들이밀든 그녀를 밀고 지나가야만 하게 만들었다.
엘프 기록 담당이 장부를 넘겼다.
“외부 관찰자는 뒤에서만 본다.”
왕국 사절이 곧장 끼어들었다.
“관찰권은 우리도—”
“뒤에서 봐.”
세라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잘랐다.
짧은 한마디였는데 길목이 잠깐 멎었다. 왕국이 더 밀면 엘프가 막을 것이고, 엘프가 먼저 막으면 왕국은 그걸 구실로 관찰권을 더 크게 불릴 것이다. 세라는 그 틈을 계산해 자기 몸으로 좁은 길을 채웠다.
엘프 기록 담당은 세라의 검집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부터 봤다. 왕국 사절은 세라 뒤로 보이는 내 꾸러미 모서리를 봤다. 서로 보는 곳이 달랐다. 그 차이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가 사람을 먼저 세고, 누가 물건을 먼저 세는지 길 입구부터 갈리고 있었다.
나는 첫 돌판에 발을 올렸다. 물 아래 비친 건 얼굴이 아니었다. 내 품의 꾸러미 윤곽, 세라 검집 그림자, 브론 손등, 리에트 활끝이 먼저 흔들렸다. 숲은 사람보다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들어가는지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수로 위 첫 세 돌판은 의외로 멀쩡했다. 네 번째부터가 달랐다. 발판 옆 가장자리에 얕은 미끄럼 방지 홈이 새겨져 있었고, 그 사이마다 짐이 한 번 걸렸다 다시 들린 자국이 촘촘히 남아 있었다. 사람 발보다 상자 바닥이 더 자주 스친 자리였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여기로 사람보다 물건을 더 자주 밀어 넣었다는 뜻이었다.
“걸음 늦춰.”
내가 작게 말하자 세라가 발을 반 박자 늦췄다. 브론은 곧장 꾸러미 높이를 낮췄고, 미리엘은 소매 속 천끈을 몸 안쪽으로 더 밀었다. 리에트는 뒤쪽 나무뿌리 그늘로 한 걸음만 비켜 섰다. 다들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미 이 길은 예절이 아니라 배치로 답해야 하는 장소라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물거울 길 중간쯤에서 수로 폭이 갑자기 넓어졌다. 바닥에는 유리 가루처럼 굳은 거울수액이 얇게 깔려 있었고, 돌 가장자리마다 같은 크기의 홈이 반복됐다. 하나, 둘, 셋.
나는 무심코 세다가 걸음을 멈췄다.
열세 개였다.
첫 던전 벽화의 빛 배열과 같은 수였다.
“세라.”
내가 낮게 부르자 그녀가 앞을 막은 채 고개만 돌렸다.
“왜.”
“발판 사이 홈. 열세 개씩 끊겨.”
세라는 곧장 앞을 비우지 않았다. 대신 검집 끝을 반 걸음 옮겨 뒤쪽 사절단과 엘프 기록 담당 사이 시선을 더 막았다. 그 사이 미리엘이 바로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수로 가장자리 홈 하나를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표면은 매끈했지만 안쪽은 날카롭게 멈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래 닳아 사라진 자리가 아니었다.
“자연 마모 아니에요.”
그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글자만 골라 지운 손이에요. 끝을 급하게 끊은 게 아니라… 읽는 순서를 바꾸려고 멈춘 자국이에요.”
그 말은 홈 하나만 두고도 너무 정확했다. 그냥 파낸 자국이었다면 이렇게 일정한 깊이로 끝이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 전체를 부순 게 아니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자리만 비워 두고 다음 손이 다른 순서로 읽게 만들었다.
브론은 위령석 받침 아래를 들여다보더니 돌 밑에서 얇은 금속심 하나를 손톱으로 밀어 올렸다. 금속은 거의 돌색으로 죽어 있었지만 잘린 못머리와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워 있던 걸 다시 눕힌 거다.”
그가 말했다.
“그냥 무너진 게 아니야. 한 번 옮겼다가 다시 붙들어 둔 거지.”
“옮긴 다음 숨겼다는 뜻이냐?”
세라가 물었다.
브론은 금속심을 손바닥 위에서 뒤집었다.
“완전히 숨길 거였으면 깨 버렸겠지. 이건 드러나 보이게 두되, 곧장 읽지는 못하게 눕혀 둔 거다.”
나는 수로 옆 비탈에 기대 누운 위령석들을 봤다. 큰 돌도 작은 돌도,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빈 홈이 남아 있었다. 어떤 홈은 얕아 금방 사라질 듯했고, 어떤 홈은 끝까지 파내다 만 것처럼 검게 남아 있었다. 숲은 이걸 완전히 덮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히 남겨 두지도 않았다. 비워 둔 채 버티게 만들었다.
수로 반대편 낮은 턱에는 같은 폭으로 닳은 미끄럼 자국이 여러 줄 남아 있었다. 사람 발보다는 널빤지나 작은 썰매 밑면이 더 자주 스친 자리였다. 위령석 하나를 세워 옮기기엔 비탈이 너무 급했고, 끌어 눕혀 옮기기엔 딱 맞는 경사였다. 브론도 그 자국을 봤는지 수로를 건너지 않은 채 눈으로만 거리를 재더니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둘이 앞에서 들고 하나가 뒤에서 눌렀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 크기면 사람 둘이 세우고 끝낼 돌이 아니야. 줄을 묶어 비탈 아래로 눕혀 내린 다음, 여기서 방향을 틀어 다시 눕혀 둔 거다.”
미리엘이 홈 둘레의 잔가루를 손톱 끝에 묻혀 냄새를 맡았다. 돌가루만이 아니었다. 오래 젖은 나무풀 냄새와 아주 약한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장부 상자 밑면을 오래 미끄러뜨릴 때 남는 냄새와 비슷했다. 숲은 죽은 자를 기리는 자리조차 사람 몸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기록과 표찰, 목패와 위패를 함께 옮기고 함께 고쳐 놓은 냄새였다.
세라는 위를 올려다봤다. 흰 나무 가지 끝마다 매달린 물방울이 바람도 없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수로를 때릴 때마다 같은 홈 근처에서만 한 번 더 흔들렸다. 누군가가 예전부터 이 길의 박자를 맞춰 두었다는 뜻 같았다. 세라는 검집을 살짝 돌려 물방울 떨어지는 박자와 자기 발 간격을 맞췄다.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이 장소가 요구하는 호흡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앞줄을 놓치지 않는 쪽으로 자리를 고정하는 중이었다.
리에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묘지가 아니야.”
그녀 시선은 위령석이 아니라 그 뒤 흰 나무껍질에 남은 얕은 긁힘 하나에 가 있었다.
“뭐지?”
내가 묻자 리에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아주 잠깐 떨렸다가 멈췄다. 활을 잡을 때는 흔들리지 않는 손이었다. 그녀는 그 흔적에서 표식 하나를 읽은 얼굴이 아니라, 오래전에 묻어 둔 대답이 제 발로 걸어 나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못 말해.”
평소의 마른 말투였지만 끝이 조금 갈라졌다. 그 한 점 떨림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표식은 단서이기 전에 상처였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위령 수로를 지나 좁은 쉼목으로 이동했다. 한쪽은 흰 나무뿌리가 낮은 벤치처럼 얽혔고, 반대쪽은 얕은 절벽 아래로 물거울이 길게 떨어졌다.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도 자연스럽게 셋으로 갈라졌다. 앞줄을 막는 자리, 뒤쪽에서 말을 밀어넣는 자리, 아래로 물건을 던져 빼돌릴 수 있는 자리. 숲은 쉼터조차 그대로 쉬게 두지 않았다.
왕국 사절이 바로 붙었다.
“방금 본 표식과 석재 상태는 우리도 기록해야 한다.”
엘프 강경파 경계병이 곧장 맞받았다.
“외부인은 눈만 빌린다. 손과 입은 안 빌려 준다.”
사절이 비웃듯 숨을 뱉었다.
“숲 안 기록이 그렇게 깨끗한 줄 아나.”
엘프 기록 담당은 그 말을 듣고도 사절을 보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의 꾸러미와 미리엘 소매, 브론 허리춤을 차례대로 봤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어느 손이 어디에 닿았는지를 먼저 적으려는 눈이었다. 왕국과 숲은 다른 말을 썼지만, 둘 다 줄 전체보다 자기 손에 남길 일부를 고르느라 바빴다.
세라가 그 말을 끊었다.
“둘 다 장부만 믿고 있네.”
왕국 사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뭘 믿나.”
세라는 위령석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돌은 너희 문장보다 오래 버텼어.”
그 말에 엘프 기록 담당 얼굴이 잠깐 굳었다. 숲 안쪽 역시 진실을 온전히 내놓을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왕국은 관찰권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가져가려 들고, 숲은 애도라는 이름으로 먼저 닫아 두려 든다. 둘 다 자기 순서를 먼저 지키고 있었다.
브론은 발밑 수로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던졌다. 가지는 곧장 흐르지 않고 한 번 비틀려 돌판 옆에 걸렸다.
“흐름도 틀어 놨네.”
그가 중얼거렸다.
“곧게 읽지 못하게.”
그 말에 로웬의 튜브가 떠올랐다. 한곳에 모이면 닫힌다. 흩어 놔야 산다. 숲도 같은 말을 구조로 하고 있었다. 글자도 사람도 한 번은 비틀리고 한 번은 돌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쉼목 끝 낮은 뿌리 아래에는 작은 나무패 세 개가 엎어져 있었다. 기록 글씨는 이미 지워졌지만, 못자국 방향이 달랐다. 하나는 위에서 내려 꽂았고, 하나는 옆으로 밀어 넣었고, 마지막 하나는 반대로 뽑혔다 다시 박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같은 표찰을 세 번 다른 뜻으로 써 왔다는 뜻 같았다. 숲은 한 번 적은 걸 그대로 믿지 못하는 장소였다.
뒤집힌 사당 바깥 원형 추모단에 이르렀을 때, 숲빛은 새벽보다 더 밝아졌는데 마음은 오히려 차가워졌다. 중앙에는 절반쯤 기울어진 넓은 위령석이 있었고, 둘레에는 이름이 깎여 나간 작은 석판들이 원을 이루고 있었다. 위쪽 가지 사이로 스며든 빛이 거울수액 위에서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열세 갈래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 갈래는 그냥 빛살이 아니었다. 위령석 가장 깊은 홈을 한 번 훑고, 그 옆 얕은 홈을 비껴 지나가고, 맨 끝 검게 남은 칸에서만 잠깐 더 오래 머물렀다. 숲은 빛조차 같은 자리를 다시 읽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위령석 앞에 무릎을 낮췄다. 가장 깊은 빈 홈 하나에 손끝을 댔다. 소금묘 광갱 석판의 열세 번째 빈 줄, 그때 손에 남았던 거친 멈춤 자국, 미리엘이 읽어 냈던 긁힌 끝. 전부 같은 폭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한 번 칼이 멈춘 것 같은 감각도 닮아 있었다.
“같아요.”
내가 작게 말했다.
세라가 곧장 내 옆으로 섰다.
“뭐가.”
“첫 던전 석판 빈 줄이랑.”
나는 홈 끝을 짚었다.
“여기 멈춘 자국.”
미리엘도 곁으로 와 홈 반대편을 더듬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만 홈 깊이를 재다가, 마지막에 엄지로 짧게 끊긴 자리를 눌렀다.
“이건 전부 지우려던 손이 아니에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먼저 보이는 자리만 비워 둔 거예요. 읽는 순서를 바꾸려고.”
브론은 비석 받침 아래에서 잘린 못 하나를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였다. 못 끝엔 유리 가루와 오래된 금속가루가 함께 달라붙어 있었다.
“옮긴 뒤에 다시 눕혔어.”
“숨겼다는 거네.”
세라가 말했다.
브론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숨길 거였으면 깨 버렸지.”
그는 비석과 빈 홈, 둘레 작은 석판들의 간격을 번갈아 봤다.
“이건 버티게 눕혀 둔 거다. 누가 다시 와서 읽을 수 있을 만큼만.”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숲은 이름을 버린 장소가 아니었다. 지워진 이름을 남이 다시 읽을 수 있을 만큼만 붙들어 둔 장소였다. 아름다워서 서늘한 게 아니었다. 끝내 지우지 못해 서늘한 장소였다.
“여긴 배신자를 묻은 자리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세라와 미리엘, 브론, 리에트가 모두 나를 봤다.
“지워진 이름을 버티게 한 자리야.”
말을 꺼낸 뒤에야 알았다. 그 문장은 숲을 향한 해석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누군가 하나를 골라 배신자라 부르면 편해진다. 그러면 나머지 줄은 금방 닫힌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한 사람의 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히기 직전의 줄 전체를 다시 읽기 위해서였다.
바람이 위쪽 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울수액 위 열세 갈래 빛이 비석 위 빈 홈들을 훑었다. 그중 한 홈만 끝까지 검게 남았다. 미리엘은 그 칸을 보고 숨을 들이켰고, 브론은 아무 말 없이 잘린 못을 다시 천에 감쌌다. 리에트는 위령석 뒤 흰 나무껍질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라는 검집 손잡이를 쥔 채 원로회가 서 있는 방향을 먼저 살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다들 붙잡는 책임 자리가 달랐다.
추모단 바닥 가장자리에는 작은 반원 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처음엔 빗물 빠짐 홈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끌차 바퀴를 잠깐 세우고 돌리기 좋은 폭이었다. 누군가 여기서 위패나 비석, 아니면 그와 함께 있던 장부 통을 원을 따라 옮기고 방향을 바꿨다는 뜻이었다. 브론은 발끝으로 그 반원 홈 하나를 짚더니, 사당 쪽과 위령 수로 쪽을 번갈아 봤다.
“묻은 자리보다 옮긴 자리가 더 많아.”
그가 말했다.
“처음부터 여기서 다 끝낸 게 아니야. 밖에서 읽고, 안으로 옮기고, 다시 밖으로 눕혀 둔 흔적이 남아 있어.”
미리엘은 작은 석판 하나의 옆면을 손톱으로 긁어 봤다. 표면은 오래 비바람을 맞은 돌이었지만 옆면은 생각보다 거칠지 않았다. 최근은 아니어도 한 번은 다른 자리에 기대어 있던 돌이라는 소리였다. 그녀는 손을 떼며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애도도 보관 순서 안에 있었네요.”
그 말은 비석보다도 여기 남은 사람들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죽은 이를 기리는 자리마저 `먼저 읽을 것`과 `나중에 남길 것`으로 갈랐다는 뜻이었으니까.
원로회는 그 추모단 바로 너머, 무너진 사당 입구 앞에서 우리를 멈춰 세웠다. 지붕 대신 아래로 드리운 뿌리와 유리수액 줄기가 문처럼 겹쳐 있었고, 안쪽 바닥은 어두운 거울면처럼 바깥 그림자를 뒤집어 비췄다. 문턱 양옆 위패 홈들은 손바닥 높이에서 줄지어 이어졌다. 어떤 홈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홈은 한 번 이름을 넣었다 다시 칼등으로 긁어 낸 듯 가장자리만 남아 있었다.
문턱 앞 바닥에는 발판이 없었다. 대신 뿌리 사이 얇은 돌줄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 줄은 사람 발 너비, 한 줄은 짐 상자 바닥 너비, 마지막 한 줄은 누군가 무릎을 꿇고 손을 짚기 좋은 폭이었다. 누가 어떤 자세로 들어오려 하는지부터 보겠다는 뜻 같았다.
원로 하나가 말했다.
“안으로 들이기 전에 확인할 게 있다.”
왕국 사절이 곧장 끼어들었다.
“관찰 기록 제출이 먼저다.”
이번에는 숲 안 강경파가 더 빠르게 받았다.
“외부인은 문턱도 넘기지 않는다.”
셋의 압박은 조금씩 결이 달랐다. 원로는 심문하듯 느렸고, 왕국은 적어 두려는 손처럼 빨랐고, 강경파는 지금 당장 밀어내고 싶은 얼굴이었다. 세 축이 같은 길목을 놓고 서로 다른 욕심을 드러냈다.
그 사이 뒤쪽 둔덕에서는 왕국 쪽 종이 한 장이 바람에 뒤집혔고, 성도 수거반 장대 끝 은방울이 아주 작게 울렸다. 여기까지는 못 들어왔어도, 밖에서 우리 걸음 수와 멈춘 자리만큼은 다 세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당 문턱은 숲 안쪽 시험이면서 동시에 바깥 세력이 덮쳐 올 시간을 재는 모래시계이기도 했다.
세라는 검집을 세운 채 한 걸음 앞에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장 순서를 바꿔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사당 자체가 먼저 대답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검집 끝을 문턱 왼쪽 돌줄에 걸쳤다. 누가 밀고 들어오든 검집을 치우지 않고는 앞으로 못 나가게 만드는 각도였다.
브론은 그 틈에 목패 꾸러미 위치를 한 번 더 바꿨다. 가장 바깥엔 끝번호 꼬리표가 얹힌 천을 두고, 진짜 목패 반쪽과 잘린 못, 위령석 금속심은 안쪽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미리엘은 젖은 천끈과 피난민 꼬리표를 같은 순서로 겹치지 않게 따로 접었다. 리에트는 활끝을 문턱 오른쪽 뿌리 홈과 맞추고, 내가 한 걸음만 더 가면 자기를 지나쳐 안쪽 그림자를 먼저 쏠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나도 꾸러미를 품 쪽으로 더 당겼다. 읽기 전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먼저 손에 남길 순서를 다시 정해야 했다. 그 짧은 손놀림만으로도 우리는 사당 앞에서 이미 하나의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누가 먼저 불리든, 물건과 사람을 따로 떼어 넘기지는 않겠다는 대답이었다.
원로는 우리 다섯을 천천히 훑었다.
“들어가려면 너희 이름이 먼저 버티는지 본다.”
그 말이 끝난 직후였다.
안쪽 어두운 거울면 아래에서 젖은 숨 같은 소리가 한 번 올라왔다.
“리에트.”
리에트 활이 반사적으로 들렸다. 그녀가 소리가 아니라 소리 뒤의 물결을 노려보는 게 보였다. 다음 소리는 오른쪽 위패 홈 아래에서 스며 나오듯 들렸다.
“세라.”
세라는 검집을 더 세웠다. 검집 끝이 돌을 긁으며 아주 낮은 마찰음을 냈다. 그녀는 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이 목소리가 먼저 누구를 앞으로 세우려 하는지 계산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보다 먼저 위패 홈들의 떨림을 봤다. 마지막 소리는 사람 입에서 나온 것보다 물 아래에서 먼저 밀려 올라온 것처럼 들렸다.
“에이드리언.”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브론이 목패 꾸러미를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 왕국 사절은 한 걸음 물러났고, 엘프 강경파는 창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런데 내 귀에는 그 환청보다 더 선명한 사실 하나가 먼저 들어왔다.
이 안쪽에는, 우리 이름을 이미 아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이름만 아는 게 아니었다. 리에트를 부를 때는 활을 들게 만들 자리를, 세라를 부를 때는 앞줄을 더 세우게 만들 자리를, 나를 부를 때는 내가 끝내 버리지 못할 꾸러미와 문턱 사이 거리를 정확히 찔렀다. 사당은 우리 이름을 외운 존재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지 못하는지까지 읽고 있는 장소 같았다.
나는 사당 문턱 아래 거울면을 내려다봤다. 다섯 그림자가 뒤집혀 서 있었다. 세라 검집 그림자, 리에트 활끝, 브론의 넓은 어깨, 미리엘 젖은 소매, 내 손의 꾸러미. 그 아래 보이지 않는 입 하나가 막 말을 마친 듯 물결만 늦게 퍼졌다. 물결은 사당 안쪽으로만 번지지 않았다. 문턱 바깥 우리가 선 돌줄까지 아주 천천히 핥고 올라왔다. 들어오라고 잡아끄는 게 아니라, 누가 어디에서 버티는지 재보는 움직임 같았다.
원로가 낮게 말했다.
“봤지.”
그는 사당 안을 보지 않고 우리 얼굴만 봤다.
“이곳은 배신자를 고르는 데 익숙한 자를 먼저 밀어낸다.”
왕국 사절이 뭐라 반박하려다 말을 삼켰다. 엘프 강경파도 창을 들이밀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셋 모두 같은 걸 봤기 때문이었다. 사당은 누구 문장도 먼저 받아 적지 않았다. 먼저 반응한 건 장부도 명령도 아니라 우리 이름이었다.
세라는 내 쪽을 아주 잠깐 돌아봤다. 리에트는 활을 내리지 않았고, 미리엘은 젖은 천끈 접힌 자리를 엄지로 누르고 있었고, 브론은 품 안 목패 매듭을 다시 확인했다. 나는 그 손순서들을 차례로 봤다. 누가 놀라고, 누가 버티고, 누가 숨기고, 누가 읽는지. 사당이 묻는 것도 결국 그거였다.
나는 문턱에 발을 올리지는 않았다. 대신 지워진 홈 하나를 오래 봤다. 로웬이 왜 줄 전체를 흩어 남겼는지, 세라가 왜 문장을 한 박자씩 늦췄는지, 리에트가 왜 자기 실패를 아직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지, 그 모든 게 이 문턱 앞에서 한 줄로 이어졌다. 홈 안쪽에는 오래 젖은 돌가루가 얇게 붙어 있었고, 그 위로 방금 번진 물결이 한 번 스쳤다 물러났다. 완전히 지운 자리가 아니라, 누가 다시 손끝을 대면 아직 읽힐 만큼만 남겨 둔 자리였다.
왕국은 공적을 앞줄에 세우려 하고, 성도는 비교 열람을 끊으려 하고, 숲은 애도 안에 감춰 두려 했다. 그런데 사당은 그 셋보다 먼저 묻고 있었다. 누가 어떤 이름으로 들어오느냐보다, 누가 끝내 손에서 놓지 않는 줄이 무엇이냐고. 뒤쪽 둔덕의 불빛이 한 번 더 흔들리자 물거울 아래 다섯 그림자도 같은 순서로 떨렸다. 세라의 검집이 먼저 서고, 브론의 품이 뒤를 막고, 미리엘 소매가 움츠러들고, 리에트 활끝이 마지막으로 멈췄다. 사당은 우리 대답을 말보다 먼저, 그런 손순서로 읽고 있었다.
이곳은 지워진 이름을 되찾으러 바로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먼저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 흔들리는지 버텨 내야 겨우 다음 줄을 읽게 되는 장소였다. 누구 하나만 내세워 안심하는 순간, 나머지 줄은 다시 물 아래로 가라앉을 곳이었다.
그리고 유리숲은 우리를 안으로 들이기 전에, 그 사실부터 몸에 새기려 들고 있었다. 한 줄이라도 놓치면 바로 닫히는 장소라는 사실까지. 뒤로 물러서도 같은 시험이 따라붙을 만큼, 집요하게. 끝까지 붙드는 자만 다음 줄을 보게 하겠다는 듯이, 아주 오래, 끝내.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