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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실패의 호출

뒤집힌 사당 바깥 마른 뜰은 비에 젖지 않은 무덤처럼 보였다. 문턱 위로 드리운 뿌리와 유리수액 줄기 아래쪽만 축축하게 어두웠고, 그 바깥 반원형 흙바닥은 회백색으로 바싹 말라 있었다. 젖는 자리와 마르는 자리를 누군가 칼로 가르듯 갈라 놓은 것 같았다. 왼쪽 비탈은 위령 수로로 흘러내렸고, 오른쪽은 흰 나무 셋이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좁은 우회길을 감쌌다. 뒤에서는 엘프 원로와 경계병이 숨을 죽인 채 서 있었고, 더 멀리서는 왕국 사절단 등이 낮은 불빛을 흔들었다. 누구도 문턱을 먼저 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미 안쪽에 한 발 들이민 사람들처럼 굳어 있었다.

환청은 멎었지만, 이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당 안쪽 거울면이 한 번 출렁일 때마다 방금 들은 소리가 물 아래로 내려앉는 것처럼 귓속에 남았다. 리에트, 세라, 에이드리언. 마지막 이름은 사람 입보다 물속 빈 항아리에서 먼저 올라온 듯 젖어 있었다. 내 이름인데도 내 목에서 나온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더 고개를 들면 또 불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문턱이 아니라 바닥을 봤다.

세라는 검집을 비스듬히 세운 채 문턱을 막고 있었다. 활을 반쯤 들었던 리에트는 지금도 시위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브론은 꾸러미를 발뒤꿈치 쪽으로 밀어 둔 채 바닥만 노려봤고, 미리엘은 소매 안에서 젖은 천끈을 한 번 더 감쌌다. 저마다 이름을 들었을 텐데, 누구도 그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다섯 사람의 귀를 한 번씩 건드린 소리보다 지금 어디에 무엇이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모두 알았다.

나는 문턱 앞 흙바닥부터 봤다.

사람 다섯이 우르르 밀린 자리가 아니었다. 마른 흙 위엔 발홈 셋이 뚜렷했고, 나머지는 스치듯 흐려졌다. 한 자리에 먼저 멈춘 사람 하나, 그 뒤를 돌아 우회한 둘, 더 뒤에서 짐을 돌려 세운 하나. 뒤엉켜 도망친 자국이 아니라, 누가 어디에 설지 먼저 정하고 버틴 자리였다. 문턱 양옆 위패 홈 높이와 바닥 끌림 자국까지 겹쳐 보니,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미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기다린 적이 있어.”

내가 낮게 말하자 세라가 고개만 틀었다.

“안쪽에?”

“문턱 바로 바깥.”

나는 손가락으로 마른 흙 위 끌림 자국을 짚었다.

“발보다 먼저 닿은 건 검집이나 상자 같은 거야. 사람을 부르기 전에 누가 어디에 설지 정해 뒀어.”

말을 뱉는 순간, 문턱 양옆에 박힌 낮은 홈 둘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사람 허벅지보다 조금 낮은 높이였다. 위패를 세우는 자리라기보다 짐을 잠깐 기대거나 손을 걸어 버티는 데 더 맞는 높이였다. 아래 흙은 다른 데보다 매끈했고, 수액이 한 번 흘렀다가 마른 흔적이 홈 아래에서만 얇게 번들거렸다. 누군가 숨을 죽인 채 오래 서 있었고, 그 사람이 손을 옮긴 자리마다 흙 결이 반대로 눕는다. 목소리보다 손순서가 먼저 남아 있는 현장이었다.

엘프 경계병 하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사당 문턱 앞에서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왕국 사절도 곧장 거들었다.

“방금 들은 음성과 현장 흔적은 바로 기록해야 합니다. 관찰권은 이미—”

“기록은 나중에 해.”

세라가 그 말을 잘랐다.

그녀는 벨로네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검집 끝을 반 걸음 더 옮겨, 사절이 문턱을 비껴 안쪽을 들여다보는 각을 끊었다. 길은 더 좁아졌고, 그 한 칸 때문에 왕국도 엘프도 동시에 앞으로 못 나왔다. 검집 끝이 흙을 누른 자리에 얇은 선이 남았다. 세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새로운 경계선을 그었다. 여기서부터는 네 장부가 먼저가 아니라는 뜻을, 검집 하나로 적어 둔 셈이었다.

리에트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사당 오른편 흰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우회길 초입의 가장 굵은 줄기였다. 그녀 손끝이 나무껍질 한 곳에서 멈췄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세 갈래 긁힘이 있었다. 오래 비바람을 맞아 거의 닳아 없어졌는데도 가운데 획만은 유난히 깊었다. 그 아래에는 조금 늦게 덧그은 듯한 꺾인 선 하나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오래된 긁힘은 껍질 결을 따라 거칠게 벌어졌고, 아래 꺾인 획은 더 짧고 더 눌려 있었다. 먼저 남은 사인 위에, 나중에 온 누군가가 뒤에서 읽을 사람만 알 수 있게 답을 단 흔적이었다.

리에트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 손끝이 활줄 위가 아니라 껍질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의 리에트라면 떨림조차 남에게 들키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손끝이 먼저 무너졌다.

“이거.”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원정대 표식이야.”

세라가 옆에서 물었다.

“무슨 뜻이지.”

리에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나무껍질에서 떼지 않은 채 마른 숨을 한 번 삼켰다.

“세 갈래는 사람 수가 아니야. 말하지 말고 지나가라는 표시도 아니고.”

그녀가 손톱으로 가운데 깊은 홈을 눌렀다.

“살아는 있는데 이름을 크게 부르지 말라는 사인이야. 기억이 흔들린 자가 있을 때, 혹은 뒤에서 듣는 귀가 있을 때 썼어.”

나는 그 말 아래로 덧그어진 꺾인 선을 봤다. 그 기호는 낯설지 않았다. 로웬이 남긴 기록 튜브 모서리, 수첩 가장자리, 왕도 지하에서 본 우회 표식. 방향을 바로 적지 않고, 한 번 꺾어 뒤에 오는 사람만 읽게 만드는 버릇.

“이건 로웬 기호야.”

내가 말하자 미리엘이 곧장 나무 가까이 무릎을 낮췄다. 그녀는 손끝으로 오래된 긁힘과 새 흔적의 깊이를 따로 더듬었다. 수액이 말라 붙은 자리와 껍질이 최근에 한 번 더 일어난 자리를 분리해 읽는 손이었다.

“한 손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먼저 있던 표식 위에 나중에 답을 단 거예요. 오래된 홈은 마르고 거칠고, 아래 꺾인 획은 한 번 더 눌러 지나간 흔적이 남았어요.”

브론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누가 여기다 답장을 남겼다는 거냐.”

나는 입술 안쪽을 씹었다. 리에트의 옛 원정대 표식. 그 위에 남은 로웬의 우회 기호. 둘 중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두 줄이 한 번은 같은 자리를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로웬이 숲 바깥에서 멀찍이 단서를 던진 게 아니라, 이 생존선 한가운데를 실제로 밟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갑자기 몸으로 와 닿았다.

리에트는 그 사실이 더 아픈 얼굴을 했다. 옛 실패가 끝난 자리가 아니라, 끝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이어졌다는 의미니까. 죽은 기억이면 마음속에서 접어 둘 수 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이 뒤에 와서 그 표식에 답장을 남겼다면, 그날 자기가 놓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줄기였다.

우회길 안쪽은 사람 둘이 비켜 서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발목 아래 마른 낙엽이 얇게 깔렸고, 그 밑으로 검은 뿌리가 사선으로 엉켜 있었다. 나무몸통 셋이 비스듬히 기울어 어깨를 자동으로 좁히게 만들었다. 누군가 큰 짐을 멘 채 지나가면 반드시 몸을 틀어야 하는 길이었다. 나뭇가지 낮은 데엔 천이 스친 듯 보풀 같은 섬유가 끼어 있었고, 한 몸통 밑동에는 활집 모서리가 반복해서 쓸고 간 것 같은 매끈한 자국도 남아 있었다. 길은 좁았지만, 한 번만 쓴 길은 아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허리 높이 납작한 돌턱 둘과 뒤집힌 위패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위패함은 반쯤 흙에 묻혀 있었고, 옆면엔 밧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끊긴 듯한 마찰선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화살깃을 일부러 꺾어 눌러 둔 흔적도 보였다. 돌턱 하나는 앞쪽 모서리만 닳아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윗면이 매끈했다. 한쪽은 사람이 버틴 자리, 다른 한쪽은 짐을 밀어 돌린 자리 같았다.

브론이 먼저 쪼그려 앉았다. 그는 돌턱 간격과 밧줄 자국, 흙이 밀린 방향을 빠르게 훑었다. 손을 댄 곳마다 먼지가 다른 결로 일어났다. 브론은 숫자를 세지 않아도 몸이 먼저 하중을 읽었다.

“여기서 막았네.”

그가 돌턱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한 명이 뒤를 붙잡고, 둘이 아래로 내렸다. 사람일 수도 있고 상자일 수도 있는데… 무게중심은 사람에 더 가깝다.”

“왜?”

세라가 묻자 브론은 마찰선 끊긴 자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상자면 줄이 더 곧게 남아. 이건 중간에 몸이 한 번 비틀린 자국이 있어. 버티는 놈 하나, 끌려 내려가는 놈 하나, 옆에서 받쳐 주는 놈 하나.”

그는 돌턱 아래 흙이 패인 모양과 위패함이 멈춘 각도까지 보여 줬다. 사람이 아래로 몸을 실으면 마찰선이 한 번 아래로 쏠렸다가 다시 튀는데, 상자는 무게가 일정해 그런 흔들림이 덜 남는다고 했다. 밧줄이 당겨지던 마지막 순간 누군가가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틀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아래로 보내는 쪽이 아니라, 뒤를 막던 쪽에서.

리에트가 그 말 위에 낮게 덧붙였다.

“우리 대장.”

그녀는 돌턱 뒤쪽 얕은 칼집 자국을 가리켰다.

“이 표시를 남기고 물러날 때가 있었어. 후퇴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남아 막는다는 뜻으로.”

말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

“난 그날 그 사람이 도망쳤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흰 나무 사이를 스칠 때마다 마른 잎 하나씩이 뒤집혔다. 저 소리만 들으면 평범한 숲인데, 발밑과 돌턱과 홈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버리고 갔느냐보다, 누가 마지막에 자리를 붙든 채 무엇을 먼저 넘겼느냐가 더 선명했다.

미리엘은 위패함을 조심스레 열었다. 안쪽에는 이름판 대신 얇은 홈이 여러 줄 나 있었다. 사람 이름을 세로로 꽂던 칸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니 깊이와 폭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홈은 두 손가락 폭보다 좁았고, 어떤 홈은 한쪽 끝이 더 깊었다. 모서리엔 물이 오래 고였다가 마른 자국이 아니라, 손톱 끝으로 급히 눌러 파낸 것 같은 짧은 흠도 보였다. 나는 그 배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이름만 적는 칸이 아니야.”

세라가 나를 봤다.

“그럼?”

“운반 순서일 수도 있어. 누가 먼저 나가고, 누가 마지막에 남는지.”

미리엘이 위패함 안쪽 끝의 얕은 홈을 문질렀다.

“장례가 아니라 인계판처럼 썼을 가능성도 있어요. 먼저 읽을 줄과 나중에 숨길 줄을 갈라 둔 방식이에요.”

그녀는 홈 깊이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사람 이름만 적는 칸이면 크기를 맞추려 했을 텐데, 여긴 끝을 더 깊게 파거나 중간에 한 번 끊어 놓은 곳이 많다고. 누군가를 오래 남기는 줄, 잠깐 적었다 지울 줄, 바깥 사람 눈에 먼저 보일 줄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었다. 위패함이라는 껍데기 안에 실제로는 순서를 감춘 셈이었다.

나는 홈 가운데 둘을 번갈아 눌러 봤다. 하나는 손가락이 반쯤 잠길 만큼 깊었고, 다른 하나는 입구만 남아 있었다. 그 얕은 줄은 일부러 빨리 지운 것처럼 모서리가 무너져 있었다. 누군가 여기서 이름 대신 순서를 적고, 그 순서를 다시 바꿨다. 먼저 내보낼 것과 끝까지 남길 것을 같은 판에 올려놓고 마지막까지 고쳤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날… 전멸한 게 아니라 누군가를 빼냈을 수도 있다는 거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살려 보냈다면, 그날 뒤에 이어진 침묵까지 전부 자기 몫처럼 남기 때문이다. 끝났다고 믿고 버텼던 죄책감보다,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 깊이 찔렀다.

뒤쪽 뜰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왕국 사절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발을 옮겼고, 엘프 강경파 경계병이 창대로 길을 막았다. 왕국은 표식과 위패함을 공식 기록 아래 먼저 눌러 자기 장부 문장으로 바꾸려 했고, 엘프 강경파는 외부 입과 외부 손을 끊어 숲 안 증언 자체를 안으로 접어 두려 했다. 문턱 하나를 두고도 두 세력은 다른 명분으로 같은 자리를 선점하려 들고 있었다. 하나는 먼저 적어 자기 것이 되게 만들려 하고, 다른 하나는 아예 밖에 못 나가게 만들어 자기 안에서 썩히려 했다.

세라는 몸을 돌렸다.

“시간 끝났어.”

그녀 말은 우리에게 한 경고이면서 바깥을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뜰로 나왔다. 왕국 사절은 위패함부터 보라고 손을 내밀었다. 저 홈을 먼저 장부 문장으로 옮기면 관찰권과 해석권도 왕국 쪽으로 기울 수 있었다. 반대로 엘프 강경파는 사당 접근 자체를 끊으려 날을 세웠다. 외부인이 눈으로 읽는 순간 숲 안 증언이 밖으로 새어나간다고 보는 얼굴이었다.

“그건 숲 안 물건이다.”

“그래서 먼저 적겠다는 겁니다.”

“외부인이 손대면 더럽혀진다.”

“손대기 전에 이미 이름이 다 긁혀 나갔는데?”

목소리들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세라는 그 사이에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칼도, 이름도 꺼내지 않았다. 검집과 어깨만으로 좁은 뜰 중앙을 가로막았다. 왕국 사절은 한 번 왼쪽으로 비껴 보려 했고, 세라는 그보다 먼저 몸을 반 칸 틀어 길을 닫았다. 엘프 경계병이 창 끝을 낮춰 문턱 쪽을 가리키자 세라는 검집 윗부분을 들썩여 창선이 더 안으로 미끄러지지 못하게 받았다. 아주 작은 동작들인데, 그 몇 번으로 뜰 중앙은 세라 몸을 지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지나갈 수 없는 형태가 됐다.

“지금 가져가면 적을 건 장부 문장뿐이야.”

그녀가 왕국 사절을 보며 말했다.

“표식은 지워지고, 홈은 닳고, 물 아래 환청만 남겠지.”

왕국 사절은 곧장 반박하지 못했다. 기록관답게 말을 고를 동안, 세라는 다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벨로네라는 이름을 붙이면 여기 있는 모두가 바로 계산을 바꿀 것이다. 그런데 세라는 그 이름을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가문 권위가 아니라, 이 몇 호흡을 버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엘프 강경파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외부인에게 더 넘기지 말자는 거다.”

“당신들도 지금까지 다 숨겼잖아.”

세라가 바로 받았다.

짧은 말이었는데, 원로들 표정이 한꺼번에 굳었다. 숲 안 증언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무엇을 얼마나 오래 감춰 왔는지, 그 한마디가 너무 정확히 찔렀다. 그 틈에 미리엘은 위패함 안쪽 홈에 깨끗한 천을 덮어 손기름이 더 묻지 않게 감쌌다. 홈 위에 천을 바로 얹지 않고 얇은 종이 조각을 먼저 끼워 가장자리만 닿게 하는 손놀림이었다. 브론은 반대로 가짜 꾸러미 하나를 바깥에서 잘 보이는 돌 위에 올려 시선을 빼냈다. 숫자부터 세는 눈은 늘 먼저 거기로 간다.

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리에트, 오른쪽 그림자 각.”

내가 말하자 리에트는 바로 문턱 옆 뿌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옮겨 섰다. 발을 디딘 자리가 마른 흙인지, 수액이 얇게 밴 자리인지 확인하고 나서야 활을 들었다. 그녀는 사당 안쪽보다 먼저 문턱 옆의 어둠 폭을 쟀다.

“브론, 눈에 띄는 거 하나 더 바깥.”

브론은 대꾸도 없이 가짜 꾸러미 매듭을 일부러 헐겁게 만들었다. 한 번만 잡아당기면 안쪽 내용물이 쏟아질 듯한 모양이었다. 훔치려는 손은 저런 걸 보면 참지 못한다. 겉으로는 허술한 짐 하나가, 안쪽의 진짜 위패함과 홈을 지키는 미끼가 되는 셈이었다.

“미리엘, 홈은 가리고 손은 안 보이게.”

그녀는 천 끝을 소매 아래로 숨겼다. 바깥에서 보면 그냥 소매를 여민 것처럼만 보였다.

“세라, 길목만 막아. 말은 길게 하지 마.”

세라는 대답 대신 검집 각도를 더 세웠다. 그 움직임 하나로 나와 리에트, 미리엘 사이에 얇은 가림막이 생겼다. 왕국이나 엘프 쪽 눈이 우리 손동작을 전부 읽지 못하게 하는 각도였다.

사람 증언, 길 증언, 물건 증언. 셋이 한 줄 안에 남아 있어야 했다. 지금 여기서 하나라도 따로 떼이면, 나중엔 장부 문장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다 누군가 편한 쪽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그 셋을 동시에 지키는 가장 짧은 순서를 머릿속에서 다시 세웠다. 세라는 앞줄, 리에트는 각, 브론은 미끼, 미리엘은 보전, 나는 읽는 순서. 이 배치가 흩어지면 방금 건진 표식도 홈도 의미를 잃는다.

그때 리에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문턱 오른쪽.”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뿌리와 유리수액 줄기 사이, 사람 손바닥 하나 들어갈 만한 홈이 있었다. 활시위를 오래 걸어 두거나 줄을 당긴 채 각을 재던 흔적처럼 얕고 매끈했다. 그 바로 앞 유리수액 면에는 가지 사이로 들어온 빛 한 줄이 걸렸다가, 문턱 안쪽 거울물에 닿으며 다시 비스듬히 튕겼다. 먼저 빛으로 서는 자리를 읽고, 그다음 같은 각으로 화살을 미는 장치였다. 직접 겨누는 활이 아니라 반사된 선으로 사람 위치를 찍는 활.

나는 한 걸음 비켜 그 선을 따라가 봤다. 빛은 흰 나무 줄기 사이에서 한 번 꺾이고, 문턱 아래 얕은 물막 위에서 한 번 더 눕는다. 안쪽에 숨어 있는 쪽은 우리 얼굴을 전부 볼 필요가 없었다. 누가 어느 뿌리 앞에 멈췄는지만 읽으면 됐다. 방금 리에트가 나무껍질에 손을 올린 자리, 세라가 검집을 세운 자리, 내가 흙 위 끌림 자국을 짚은 자리가 한 줄로 꿰였다. 환청이 이름을 부른 게 아니라, 이 반사선이 먼저 서는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리에트 눈이 가늘어졌다.

“반사궁.”

그녀 입에서 그 말이 빠져나온 순간, 문턱 안쪽 물거울이 다시 한 번 어둡게 떨렸다. 내가 로웬 기호와 리에트 표식이 한 자리에 남았다는 생각을 끝까지 밀어 올리기도 전에, 방금 빛이 튕긴 선을 따라 은빛 화살 하나가 번쩍 미끄러져 나왔다.

화살은 리에트 발앞 뿌리를 얇게 긁고 지나가 바깥 돌에 박혔다. 나무가루와 젖은 유리 조각이 동시에 튀었다. 경고였지만 빗나간 건 아니었다. 딱 멈추라는 자리 앞에 꽂혔다. 리에트가 한 치만 더 나갔으면 발등이 꿰였을 각도였다. 반사선은 이름을 아는 것보다 먼저, 지금 여기서 누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세라가 검집을 세우며 한 걸음 내밀었다. 이번엔 단순히 길목을 막는 게 아니었다. 리에트와 안쪽 사이에 몸을 반쯤 넣어, 두 번째 화살이 같은 각으로 오면 먼저 자신을 스치게 만드는 자세였다. 브론은 꾸러미를 발로 걷어 뒤로 보냈고, 미리엘은 위패함을 품 안으로 끌어안듯 붙잡았다. 리에트는 이미 활을 들었는데, 시위보다 먼저 화살 깃을 봤다. 나도 돌에 박힌 화살 쪽으로 다가갔다.

깃 아래에 표식이 둘 겹쳐 있었다.

세 갈래 긁힘.

그리고 그 아래, 한 번 꺾였다가 다시 이어지는 로웬의 우회 기호.

깃 끝은 일부러 짧게 잘려 있었고, 깃 묶는 실은 엘프식 매듭과 인간식 감기법이 섞여 있었다. 누가 봐도 한 손의 습관만으로 만든 화살이 아니었다. 오래된 표식과 나중에 덧댄 답장, 숲 안쪽 기술과 바깥 운반선 버릇이 화살 하나에 겹쳐 있었다. 돌에 박힌 그 한 발이 방금까지 우리가 읽어 낸 흔적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셈이었다.

리에트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 숨이 떨려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 손은 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장 표식이야.”

그녀 목소리가 처음으로 숨지 못했다.

“그런데… 로웬 답장이 같이 있어.”

그녀는 화살대 전체가 아니라 깃 아래 묶인 매듭을 봤다. 저 매듭은 옛 원정대 안에서 신호를 되돌려 보낼 때 쓰던 방식이라고 했다. 다만 그 위에 겹친 우회 기호는 숲 바깥 사람이 남긴 손이었다. 둘이 같은 줄 위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리에트의 옛 실패는 숲 안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게 됐다.

사당 안쪽은 조용했다. 오히려 조용해서 더 분명했다. 저 안에 있는 건 배신자의 무덤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이름을 내놓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각을 읽고 신호를 보내는 누군가였다. 화살을 날린 손이 사람인지, 장치인지, 둘을 겹쳐 둔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저쪽은 우리가 이름을 들었다는 사실보다, 우리가 흔적을 어떤 순서로 읽는지를 먼저 보고 있었다.

나는 화살대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물러서지 마.”

왕국 사절이 바로 소리쳤다.

“지금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저 화살은 적대 신호—”

“아니.”

내가 잘랐다.

“저건 밀어내는 화살이야. 아직 누굴 데려갈지 못 정했어.”

엘프 강경파 경계병이 눈썹을 세웠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나는 문턱 오른쪽 홈과 돌에 박힌 화살을 번갈아 가리켰다.

“죽일 생각이면 반사선을 두 번 꺾을 이유가 없어. 이름을 부르고, 자리를 재고, 멈추는 각에 꽂았다. 먼저 물러나는지, 버티는지 보려는 거야.”

세라가 짧게 물었다.

“들어가?”

“아니.”

나는 문턱 어두운 거울면을 봤다. 안쪽 그림자 다섯이 바깥보다 먼저 서 있는 것처럼 뒤집혀 흔들렸다. 우리를 불렀던 이름이 다시 올라오진 않았지만, 물은 아직 어느 자리가 비는지 보고 있었다.

“먼저 버틴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자리 배치를 다시 고쳤다. 세라는 문턱 정면이 아니라 반 걸음 왼쪽, 두 번째 화살이 오면 검집으로 튕길 수 있는 각. 리에트는 흰 나무와 문턱 홈을 동시에 보는 사선. 브론은 가짜 꾸러미 뒤에서 돌턱처럼 낮아진 자리. 미리엘은 위패함을 품은 채 빛이 바로 닿지 않는 그림자선. 나는 화살과 홈, 반사된 빛 사이를 읽을 수 있는 중앙 뒤.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는 대신 한 박자 더 버티자, 뜰의 공기까지 자리 배치를 따라 바뀌었다.

왕국 사절은 더는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고, 엘프 강경파도 창끝을 안으로 들이밀지 못했다. 세라 검집이 그 둘 사이에서 먼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엘은 소매 안에서 조용히 천을 한 번 더 조였고, 브론은 바깥 돌 위 가짜 꾸러미 매듭을 일부러 더 크게 풀어 놨다. 누가 먼저 달려들어도 우리 손에 남을 것과 바깥으로 보일 것이 다르게 배치됐다. 지금은 말보다 동선이 먼저였다.

나는 돌에 박힌 화살 끝과 문턱 오른편 홈 사이 거리를 다시 쟀다. 둘 사이는 세 걸음도 되지 않았다. 안쪽 손은 우리를 사당 밖으로 몰아내려 한 게 아니었다. 마른 뜰, 흰 나무, 장례턱, 문턱 그림자선 가운데 어디를 먼저 지키는지 본 뒤 다음 화살을 고르려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지금 가장 위험한 건 공포에 밀려 물러나는 일이었다. 한 번 뒤로 비면 저쪽은 우리가 버릴 자리를 곧장 배울 테니까.

문턱 아래 어두운 거울면엔 우리 발목 높이만 한 흔들림이 길게 남아 있었다. 사람 얼굴은 안 보여도, 누가 앞줄이고 누가 뒤줄인지 정도는 다 읽히는 높이였다. 나는 내 발끝을 반 뼘 옮겨 그 떨림 밖으로 빼냈다. 동시에 세라 검집 끝이 닿은 흙선, 리에트 활 끝, 미리엘 품 안 위패함 모서리, 브론 미끼 꾸러미의 느슨한 매듭이 같은 반원 안에 묶였다. 우리가 버티는 방식 자체를 저 안쪽에 보여 주는 배치였다.

리에트가 화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오래전에 놓친 문장을 다시 붙잡았을 때 나는 짧은 숨에 가까웠다.

“그 사람답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살 깃 아래 겹친 두 표식을 다시 봤다. 하나는 살아 있으나 이름을 크게 부르지 말라는 표식, 다른 하나는 뒤에 오는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우회 기호. 누군가는 오래전에 숨어 살아남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생존선 위에 답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 사당 안쪽 어둠은 그 답장을 우리 앞에 다시 꽂아 놓았다.

바람이 한 번 더 흰 나무를 스쳤다. 낙엽이 돌에 박힌 화살 주위를 둥글게 돌았다. 세라 검집 아래 눌린 흙선, 미리엘 품 안 위패함의 가벼운 흔들림, 브론 발끝이 미끼 꾸러미를 건드리는 작은 소리, 리에트 활시위가 조금 더 팽팽해지는 숨. 다섯 사람의 자세가 같은 박자로 맞물렸다.

그리고 사당 안쪽 어둠이, 아주 낮게 한 번 더 물결쳤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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