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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 통지서

새벽 안개가 왕립기사수련원 점호장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다.

젖은 돌바닥은 밤새 식은 물기를 품고 있었고, 훈련용 창과 목검에는 덜 닦인 기름 냄새가 밴 채로 줄이 맞춰져 있었다. 앞줄의 갑옷은 반들거렸고, 뒤줄의 장비는 닳은 자국을 숨기지 못했다. 상급반은 단상 가까이에, 하급반은 세 걸음 뒤에 세워졌다. 누구를 앞으로 밀고 누구를 뒤에 두는지, 이곳은 새벽마다 배치를 먼저 가르쳤다.

나는 뒤줄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섰다. 손에는 오래 쓴 가죽장갑을 쥐고 있었다. 새 장갑은 못 받았다. 어제 보급표에서 내 이름 옆 칸이 비어 있는 걸 봤을 때 이미 짐작했지만, 막상 이렇게 손이 비어 있으니 더 선명했다.

단상 위에 에드만 로세르 교관이 올라섰다.

짙은 회색 외투, 주름 하나 없는 장갑, 서류를 쥔 손끝까지 단정했다. 저 사람은 늘 공정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더 질이 나빴다. 누군가를 밀어낼 때도 꼭 규정처럼 보였으니까.

“전일 실전 대응 평가와 월말 분류 조정 결과를 발표한다.”

몇몇 이름이 먼저 불렸다. 상급반 둘은 외곽 경계 실습, 하나는 친위 시범단 평가권. 앞줄의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뒤줄은 자기 이름이 어떻게 불릴지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내 이름은 맨 뒤쪽에 가까워졌을 때 나왔다.

“에이드리언 베일.”

사람들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얇게 번졌다. 나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여기서 이름이 불린다고 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에드만이 서류를 읽었다.

“기록 및 보급 보조 능력은 기준 이상.”

잠깐 멈췄다가, 더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개인 전투 지속력 미달. 돌발 상황 대응력 미달. 실전 전력 외.”

뒤쪽에서 누군가 웃음을 삼켰다.

에드만은 고개를 들었다.

“전장에 설 수 없는 직업은 기사후보가 아니다.”

정면으로 꽂히는 문장이었다. 내 평가이면서 동시에 시범이었다. 저렇게 부르면, 다른 놈들은 자기 자리를 확인한다. 누가 올라가고 누가 정리되는지.

나는 손가락으로 장갑 안쪽의 헤진 솔기를 눌렀다. 익숙한 모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보다 먼저 다른 감각이 들었다.

너무 매끈했다.

어제 훈련 사고는 명분일 뿐이었다. 이 문장은 이미 써져 있었고, 사고는 거기에 끼워 넣기 좋았을 뿐이다.

점호가 끝나자 사람들은 금세 흩어졌다. 앞줄은 실습 이야기를 했고, 뒤줄은 누가 밀려났는지 확인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노골적인 비웃음보다 동정이 더 피곤했다.

나는 장비 창고 쪽 복도로 걸었다.

돌벽엔 습기가 배어 있었고, 나무 선반마다 낡은 가죽 냄새와 금속 녹내가 엉겨 있었다. 다른 후보생들은 새 팔보호대와 장화를 받았다. 내 앞에 놓인 건 닳은 손목 보호구 하나, 오래된 외투 안감 보강천, 끝이 풀린 허리끈이었다.

빠진 게 두 가지였다. 정강이 보호대와 응급 방어포.

초급 외곽 실습에도 넣는 물건들이다.

나는 묻지 않았다. 보급 담당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그가 내 장비 위에 봉투 하나를 올렸다.

“행정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늘 쓴 잉크였다.

나는 비어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아침빛이 비스듬히 드는 방이었다. 칠판엔 반쯤 지운 진형도가 남아 있었고, 먼지 낀 창틀 밖으로 복도 그림자가 길게 지나갔다. 문을 닫자 바깥 소리가 종이 한 장 너머로 밀려났다.

봉투를 뜯었다.

`봉인 외곽 조사 원정 보조 인력 배속.`

그 아래.

`생환 시 한시 유예 가능.`

나는 두 번째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유예 가능.

살아 돌아오면 남겨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살아 돌아와도 잠깐 미루겠다는 말이다. 정리 자체는 이미 끝나 있고, 다만 밖에서 한 번 더 쓸모를 증명하면 처리 시점을 늦출 수 있다는 뜻.

퇴소보다 더 차가운 표현이었다.

나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폈다. 봉인 외곽 조사. 이름만 보면 그럴듯하다. 하지만 실전 전력 외 판정을 받은 놈에게 축소 지급 장비를 쥐여 보내는 조사 원정은 조사라기보다 정리 수순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세라 벨로네가 들어왔다.

햇빛을 등진 채 문턱에 선 모습은 늘 그렇듯 빈틈없었다. 흰 훈련망토 끝은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검집은 정중앙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도 같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나는 봉투를 봤고, 세라도 내 시선을 따라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너도냐.”

세라가 문을 닫았다.

“배속 통지.”

“같은 원정?”

“봉인 외곽 조사.”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걸 듣는 순간 더 이상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세라는 기사후보 중에서도 앞줄에 서는 애였다. 성기사 후보, 벨로네 가문의 차녀, 실전 성적도 상위권. 그런 세라가 왜 하필 나와 같은 원정에 붙는지 설명이 안 됐다.

내 시선이 그녀의 봉투에서 손목으로 옮겨갔다. 주머니 안에 접힌 다른 문서의 모서리가 살짝 비쳐 있었다.

세라는 내가 그걸 본 걸 알았다.

“그건 뭐야?”

“별도 지시문.”

“원정 절차?”

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 감시하라는 거군.”

“단순 감시는 아니야.”

그 말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그럼 뭐지.”

세라는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내 통지서 아래 문장을 한 번 봤다.

“생환 시 한시 유예.”

그녀가 낮게 읽었다.

“이 문구, 이상해.”

“넌 처음 보는 문구가 아닌 얼굴인데.”

세라의 턱이 굳었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보고 항목이 있어.”

“어떤?”

“네가 임무 중 이탈하지 않는지. 특정 인장이나 유물에 반응하는지. 접촉한 물건은 회수 가능한지.”

문장이 짧을수록 더 차갑다. 사람 얘기가 아니라 관리 대상 얘기처럼 들리니까.

나는 손에 든 통지서를 내려다봤다.

“누가 내려 보냈어. 기사단? 성도?”

“둘 다 걸쳐 있어.”

세라는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내가 받은 건 감독 명령이고, 네가 받은 건 배속 통지야.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이어져 있어.”

이제 퍼즐 조각 몇 개가 맞았다. 공개 망신, 축소 지급, 유예 문구, 세라의 배정, 별도 감시 항목. 누군가가 나를 이 원정에 넣고, 밖에서 뭘 하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문제는 왜 나냐는 거였다.

세라가 먼저 말했다.

“교관실에서 네 이름이 들어간 문건을 봤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정리 대상.”

그 말은 아까 들은 어떤 조롱보다 정확하게 아팠다.

세라는 이어서 말을 아꼈다.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필요한 것만 잘랐다.

“그리고 전출. 봉인 외곽 조사 원정. 네 이름 아래에 감독 대상 표기가 따로 있었어.”

“그래서 넌 따라붙은 거고.”

세라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배정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사실이야.”

그건 변명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세라는 적처럼 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묶인 줄도 알고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건 들었다.

세라는 대신 한마디를 남겼다.

“그 원정, 초급 조사로 올라와 있어. 그런데 네게 붙은 감독 항목은 초급이 아니야.”

그녀가 돌아섰다.

문을 나가기 직전, 아주 짧게 멈췄다.

“조심해. 널 바깥으로 보내는 이유가 하나가 아닐 수 있어.”

문이 닫혔다.

교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곧장 보조성소로 갔다.

희고 차가운 복도엔 향 냄새가 얇게 깔려 있었고, 병상 구역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물그릇의 간격까지 똑같았다. 사람을 돌보는 곳이라기보다, 상태를 보관하는 창고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엘레나는 창가에서 담요를 무릎까지 끌어올린 채 앉아 있었다. 웃으려는 얼굴이 먼저 보였고, 그다음에 손등이 보였다.

붉은 금이 손목 쪽으로 더 올라와 있었다.

나는 곁으로 가서 천을 걷었다.

“언제부터야.”

“어제보다 조금.”

조금.

아픈 사람은 늘 그 말을 쓴다. 남을 안심시키려고.

옆에 있던 하급 성직자가 약병을 내려놓았다.

“정화선 재배정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남았죠?”

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눈을 내린 채 계산하듯 말했다.

“오늘 포함 열두 날입니다. 그 안에 백은 수액이나 대체 정화재가 확보되면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정식 의식은 승인과 후원이 먼저라서….”

그 뒤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열두 날.

엘레나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오빠, 표정 그렇게 하지 마.”

“안 하면 되냐.”

“나 괜찮아.”

“거짓말.”

말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몰린 상태인지 알았다. 엘레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오히려 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나는 통지서를 꺼내 보여 줬다.

엘레나보다 먼저 성직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주 짧았지만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 원정 이름을 알고 있다.

“봉인 외곽 조사 원정에 간다.”

엘레나가 종이를 보고 내 얼굴을 봤다.

“언제?”

“곧.”

성직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쪽 구역은… 관리 문서가 따로 있을 텐데.”

나는 그쪽을 돌아봤다.

“관리 문서?”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실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열두 날, 관리 문서, 감독 항목.

내가 가는 곳은 단순 외곽 조사가 아니다. 적어도 성도는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다.

엘레나가 힘을 주어 내 소매를 잡았다.

“오빠. 무리하지 마.”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리하지 않으면 열두 날이 끝난다.

성소를 나와 숙소동으로 걸었다.

로웬 헤일이 쓰던 방은 여전히 반쯤 비어 있었다. 작은 침대, 걸린 채 멈춘 지도끈, 등잔에 말라붙은 기름 자국. 사람이 사라진 방에는 이상한 침묵이 남는다. 늦게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 기다림까지 굳어 버린 침묵.

나는 서랍 밑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 늘 숨겨져 있던 물건들을 꺼냈다. 균열 난 성철 부적. 접힌 원정 기록. 가장자리까지 닳은 영웅 도표.

도표를 펼치자 아래쪽 한 줄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잉크를 지운 정도가 아니었다. 칼로 긁어 종이결 자체를 죽인 흔적. 숫자를 세 보니 열둘에서 끝나야 할 자리에, 지워진 공백이 하나 더 있었다.

열세 번째 줄.

로웬의 필체는 기록 첫 장에 남아 있었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그 밑.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나는 두 문장을 번갈아 봤다. 밖으로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경고였다.

영웅 도표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부적을 집었다. 로웬이 남긴 것 중 가장 이상한 물건이었다. 금속은 늘 차가웠고, 균열은 오래전부터 한복판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배정 통지서를 꺼냈다.

밀랍 인장이 부적 가까이 닿는 순간, 금속이 뜨거워졌다.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미세한 진동이 손바닥을 스쳤다. 착각이라고 넘길 만큼 약했지만, 한 번 더 갖다 대자 분명해졌다. 반응했다.

왕립기사수련원 인장만이 아니었다. 밀랍 가장자리에 얇게 눌린 보조 문양이 있었다. 성도 봉인국에서 쓰는 겹인장과 닮았다. 부적은 그쪽에 반응한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로웬 헤일의 부적이, 내가 받은 원정 배정서에 반응한다.

그것도 열세 번째 줄이 지워진 도표를 펼쳐 둔 자리에서.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정확했다.

나는 기록 뒷장을 더 넘겼다. 흐릿한 메모 한 줄이 더 나왔다.

`지워진 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바로 아래엔 방향 표시가 있었다. 북서.

원정 통지서에 적힌 출발 방위와 같았다.

문제는 이제 명확했다. 누군가가 나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런데 로웬은 이미 그 바깥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선이 같은 방향으로 겹친다.

나는 더 확인할 게 필요했다.

행정실 앞 복도는 정오의 햇빛 때문에 유난히 밝았다. 열린 창으로 마른 바람이 들고, 탁자 위 서류 모서리들이 가볍게 들썩였다. 사람들 발소리는 분주했지만, 내 이름을 찾는 순간 주변 소음이 멀어졌다.

서류 맨 위에 적혀 있었다.

`실전 전력 미달.`

그 아래.

`정리 대상.`

그리고.

`봉인 외곽 조사 원정 전출.`

작게 붙은 주석이 하나 더 있었다.

`반응 확인 필요.`

나는 눈을 좁혔다.

반응.

무슨 반응인지 이제 모를 수가 없었다. 인장, 유물, 혹은 봉인. 세라가 말한 감독 항목과 정확히 이어진다.

문서 끝엔 아까 본 문장이 다시 있었다.

`생환 시 한시 유예 가능.`

이건 그냥 내쫓는 게 아니었다. 밖으로 밀어 놓고, 살아남으면 다시 끌고 갈 손까지 붙여 둔 추방이었다. 죽으면 끝. 살아남아 반응을 보이면 그땐 다시 데려갈 놈으로 찍히는 거다.

내가 서류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봤으면 됐어.”

에드만 로세르였다.

나는 돌아섰다. 그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 문서를 볼 가능성까지 계산했다는 얼굴이었다.

“정리 대상이라.”

내가 먼저 말했다.

“직접 적으셨습니까.”

에드만은 내 질문을 흘리지 않았다.

“전력 평가에 맞는 배치를 했을 뿐이다.”

“축소 지급도 평가입니까?”

“보조 인력에 맞는 지급이다.”

“생환 시 유예는요.”

그는 잠깐 침묵했다.

“돌아와 증명하면 다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죠. 돌아오면 다시 쓰겠다는 뜻이겠죠.”

에드만의 시선이 아주 조금 식었다. 처음으로 교관의 말이 아니라 행정의 말이 들렸다.

“제도는 가능성을 남겨 둔다.”

“제도는 바깥에 버리고 반응을 확인하나 보군요.”

그 순간, 에드만의 눈에 스친 변화는 짧았지만 분명했다. 내가 너무 많이 맞췄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원정은 오늘 오후 출발이다. 준비해라.”

나는 그를 비켜 지나왔다. 더 말해 봐야 같은 문장을 다른 말투로 되돌려 받을 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우연히 밀려난 게 아니다.

성문 앞에는 이미 원정 수레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로 기운 빛이 성벽 아래 길게 늘어졌고, 말들은 코로 거친 숨을 뿜었다. 짐수레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갑옷 끈이 당겨지는 소리, 이름을 확인하는 짧은 호출이 뒤섞였다. 도시가 바로 등 뒤에 있는데도, 나는 이미 돌아갈 곳이 없다는 감각이 더 강했다.

세라는 말 옆에 서 있었다. 이번엔 훈련망토 대신 실전용 짧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안장 옆엔 봉인 관리함처럼 생긴 작은 금속 상자가 묶여 있었다.

감시만이 아니다.

회수 장비다.

세라는 내가 그 상자를 본 걸 알고도 숨기지 않았다. 더 감출 단계는 지났다는 듯했다.

“네가 맡은 감독이 그거냐.”

“반응 물품 보관함.”

“역시.”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에이드리언.”

내가 돌아보자 세라가 말했다.

“난 널 여기서 넘길 생각은 없어.”

그 말은 약속이라기보다 선 긋기였다. 아직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기 역할을 불편해한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대답 대신 통지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다른 손엔 로웬의 부적이 남아 있었다.

열기가 다시 살아났다. 북서쪽.

로웬의 메모, 지워진 열세 번째 줄, 성도 겹인장, 감독 항목, 엘레나에게 남은 열두 날. 따로 흩어져 있던 것들이 성문 앞에서 하나의 선으로 모였다.

남아 있으면 나는 지워진다.

남아 있으면 엘레나는 열두 날 뒤에 더 나빠진다.

남아 있으면 로웬이 왜 나를 이 선 위에 올려두었는지도 모른 채 끝난다.

나는 성벽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수련원 안쪽에서 살면 안전하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안다. 여기선 사람을 칼로 죽이지 않아도 지울 수 있다. 문서로, 유예로, 배속으로.

그래서 결심은 오히려 쉬웠다.

나는 쫓겨나는 게 아니다.

내가 직접 나간다.

엘레나를 살릴 방법이 바깥에 있다면 찾는다. 로웬이 남긴 열세 번째 줄이 이 원정 끝에 있다면 확인한다. 나를 회수하려고 내보낸 놈들이 있다면, 먼저 내가 그 이유를 본다.

짐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성문으로 걸었다. 돌바닥의 마지막 경계선을 넘기 직전, 품 안의 통지서가 살짝 구겨졌다. 손에 쥔 부적은 더 뜨거워졌다.

좋아.

누가 날 바깥으로 밀었든, 여기서부터는 내가 선택한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문을 넘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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