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 통지서
왕립기사수련원 북쪽 점호장은 새벽마다 사람의 자리를 먼저 갈랐다.
동쪽 숙소동에서 나온 하급반은 젖은 돌바닥을 밟아 단상에서 세 걸음 뒤로 밀려 섰고, 서쪽 장비 창고와 남쪽 성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북서쪽 봉인 외곽으로 나가는 성문 너머에는 심연 던전의 잔향이 남아 있다고 배웠다. 그쪽으로 배정받은 보조 인력은 늘 돌아오는 숫자보다 빠지는 숫자로 먼저 기록됐다.
나는 뒤줄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섰다. 앞줄에는 세라 벨로네와 상급반 후보들이 단상 가까이 정렬했고, 내 오른쪽에는 하급반 보급조 셋이 몸을 움츠렸다. 단상 위에는 에드만 로세르 교관이 서류철을 든 채 서 있었다. 젖은 가죽 냄새, 덜 닦인 창날의 기름 냄새, 차가운 철 난간 냄새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 안쪽에 붙었다.
처음부터 위험은 바깥에만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이 어떤 줄에서 불리는지만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씩 줄었다. 앞줄은 실전 후보였고, 뒤줄은 예비품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구분이 칼날처럼 더 가까웠다.
장갑 안쪽 솔기가 손가락 살을 긁었다. 새 장갑은 끝내 내 몫으로 오지 않았다. 어제 보급표에 빈 칸이 생겼을 때부터 짐작했다. 수련원은 뭔가를 빼앗을 때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급 목록에서 한 줄을 지우고, 누군가 알아서 자기 위치를 깨닫게 만들 뿐이었다.
에드만이 단상 난간 앞에 섰다. 짙은 회색 외투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서류철 모서리는 칼처럼 반듯했다. 그는 사람을 내려다볼 때도 화난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피곤했다. 감정으로 밀어내면 버틸 핑계라도 생기지만, 규정으로 밀어내는 얼굴 앞에서는 화를 내는 쪽만 더 초라해진다.
그가 서류를 펼쳤다.
“전일 평가와 월말 분류 조정 결과를 발표한다.”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점호장 끝의 깃발줄이 바람에 두 번 울렸다. 이름들이 먼저 지나갔다. 외곽 경계 실습. 왕궁 친위 시범단 평가권. 성기사 추천 심사. 앞줄의 어깨가 조금씩 펴졌고, 뒤줄의 목은 더 굳었다.
세라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흰 훈련망토 끝이 무릎 옆에서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그녀는 늘 앞줄에 서는 사람의 자세를 알고 있었다. 등은 곧고, 턱은 낮고, 눈은 정면.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멀었다.
내 이름은 거의 끝에 나왔다.
“에이드리언 베일.”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뒤쪽에서 얇게 퍼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들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수련원에서 내 이름은 단상 앞으로 불러 세우는 이름이 아니라, 뒤줄에 남겨 놓아도 되는 이름이었다.
에드만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록 및 보급 보조 능력은 기준 이상.”
점호장의 숨이 잠깐 멈췄다.
“개인 전투 지속력 미달. 돌발 상황 대응력 미달. 실전 전력 외.”
그 말은 차가운 공기보다 더 똑바로 들어왔다.
“전장에 설 수 없는 직업은 기사후보가 아니다.”
누군가 아주 작게 웃었다. 바로 옆의 하급반 보급조는 못 들은 척 눈을 내렸다. 나는 장갑 안쪽 해진 부분을 엄지로 눌렀다. 모욕은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만, 적어도 쓰러질 만큼 새롭지는 않았다.
이상한 건 그 말이 너무 매끈했다는 점이다.
어제 훈련 사고는 있었다. 하급반 셋째 조의 보급 순서가 꼬였고, 모의진형이 무너졌다. 나는 기록과 예비 보급 위치를 맡고 있었으니, 책임 일부를 뒤집어쓸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발표는 어제 사고를 보고 만든 문장이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 둔 판결문에 사고 기록만 끼워 넣은 것처럼, 문장들이 지나치게 잘 맞았다.
점호 해산 신호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빠르게 갈라졌다. 앞줄은 자기 배정 이야기로 성문 쪽을 보며 웃었고, 뒤줄은 누가 어디까지 밀려났는지 눈짓으로 확인했다.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후보 하나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기록은 잘하잖아. 어디든 쓸 데는 있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런 말에는 답을 해도 지고, 안 해도 진다. 대신 발끝을 서쪽 복도로 돌렸다.
장비 창고 앞 돌복도는 습기가 깊었다. 벽마다 오래된 가죽과 붕대, 녹슨 쇠 냄새가 붙어 있었다. 선반 위에는 후보생 이름표가 붙은 묶음들이 줄지어 놓였다. 팔보호대, 정강이 보호대, 두꺼운 장화, 응급 방어포, 짧은 밧줄, 비상 약분. 초급 외곽 실습용 기본 지급품이었다.
내 이름표 앞에는 세 가지만 놓여 있었다.
닳은 손목 보호구 하나. 외투 안감 보강천. 끝이 풀린 허리끈.
빠진 게 너무 분명해서 셀 필요도 없었다. 정강이 보호대가 없었다. 응급 방어포도 없었다. 장화는 내 예전 것을 그대로 쓰라는 뜻인지 아예 줄에도 없었다.
보급 담당은 장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그는 내게 미안한 얼굴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장부에 도장을 찍고, 목패를 옆으로 밀고, 내 몫의 낡은 장비를 한 번 더 손끝으로 정렬했다.
“기본 지급분이다.”
“기본에서 두 가지가 빠졌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의 손이 잠깐 멈췄다. 뒤쪽에서 장비를 기다리던 후보들이 귀를 세우는 게 느껴졌다. 보급 담당은 숨을 짧게 삼킨 뒤 낮게 말했다.
“보조 인력 배정 기준이 바뀌었다.”
“누가 바꿨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설명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이 장비는 실수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도 뺐다. 살아 돌아오라는 지급이 아니라, 돌아오더라도 혼자 메울 수 있는지 보겠다는 지급이었다.
나는 손목 보호구를 들어 무게를 쟀다. 가죽은 물을 먹어 무거웠고, 안쪽 철심은 한쪽이 약간 휘어 있었다. 허리끈은 두 번 묶으면 버틸 수 있겠지만, 한 번 크게 넘어지면 끊어질 수 있었다. 안감 보강천은 겨울바람을 막기엔 얇았다.
수치심보다 계산이 먼저 돌았다. 어느 구간에서 무너질지, 어떤 움직임을 줄여야 할지, 대신 어떤 거리를 확보해야 할지. 내가 늘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기분보다 구조를 먼저 보고, 자존심보다 빈 칸을 먼저 세는 것.
보급 담당이 장비 위에 종이 봉투 하나를 올렸다.
봉투 앞면에는 내 이름이 검은 잉크로 적혀 있었다. 아직 마른 지 오래되지 않은 글씨였다. 물기 찬 복도 공기 속에서도 선이 번지지 않을 만큼 새것이었다.
“행정실 하달분이다. 확인하고 출정 명부에 서명해.”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세라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장비 묶음을 받는 게 보였다. 그녀의 몫에는 새 정강이 보호대와 성도 문양이 새겨진 작은 약갑도 있었다. 세라는 내 장비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늘의 첫 번째 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빈 교실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아침빛이 먼지 낀 창을 지나 비스듬히 들어왔다. 칠판에는 전날 지운 진형도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누군가 놓고 간 목탄 조각이 굴러다녔다. 복도 밖은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이름 확인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문을 닫자 방 안은 종이 한 장 넘기는 소리만 크게 들릴 만큼 가라앉았다.
봉투를 뜯었다.
첫 줄은 굵은 글씨였다.
`봉인 외곽 조사 원정 보조 인력 배속.`
나는 바로 아래 줄로 시선을 내렸다.
`생환 시 한시 유예 가능.`
손끝이 종이를 더 세게 눌렀다.
유예 가능.
그 표현은 퇴소 통보보다 차가웠다. 쫓아낸다는 말에는 끝이라도 있다. 하지만 유예는 끝을 미루는 말이다. 살아 돌아오면 남겨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살아 돌아와도 잠깐 보류할 수는 있다는 뜻. 정리 자체는 이미 끝나 있고, 바깥에서 한 번 더 쓸모를 증명하면 처리 시점만 늦춰 주겠다는 문장.
실전 전력 외.
축소 지급.
봉인 외곽 조사.
생환 시 한시 유예 가능.
따로 읽으면 행정 문구였고, 한 줄로 이어 보면 거의 추방이었다. 아니, 단순 추방보다 질이 나빴다. 그냥 내보내는 게 아니라, 살아 돌아오는지 확인한 뒤 다시 판단하겠다는 뜻이니까.
창밖 점호장에서는 후보생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상급반 둘은 성문 쪽을 가리키며 웃었고, 하급반 하나는 자기 장화를 들고 뛰었다. 그 움직임 사이로 나는 내가 빠진 자리를 보았다. 누가 일부러 빈 칸을 만든 것도 아닌데, 이미 그 줄은 나 없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통지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가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었다.
보조성소는 수련원보다 더 희고, 더 조용했다. 동쪽 회랑 끝에 붙은 작은 성소는 병든 후보생과 보호생을 함께 관리했다. 긴 복도에는 향 연기와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고,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람을 쉬게 하는 곳이라기보다 상태를 정리해 두는 곳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엘레나는 창가 쪽 침상에 앉아 있었다.
먼저 보인 건 웃으려는 얼굴이었다. 그다음에 손등이 보였다. 얇은 천 아래로 붉은 결이 손목 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며칠 전보다 더 짙었다. 웃음은 그대로인데, 몸은 먼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침상 곁에 서서 천을 걷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올라왔어.”
엘레나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웃음을 조금 더 크게 만들었다.
“조금 전부터는 아니야. 오빠가 그런 얼굴 할 만큼도 아니고.”
“그런 얼굴 말고 뭘 해야 하는데.”
내 목소리가 거칠게 나갔다. 엘레나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옆에서 약병을 정리하던 하급 성직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어리고 피곤해 보였고, 책임질 수 있는 말보다 못 하는 말이 더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았다.
“정화 의식 일정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약병 마개를 한 번 더 눌렀다. 시간을 끄는 손짓이었다.
“재배정 승인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겁니다.”
성직자는 엘레나를 한 번 보고,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포함 열두 날입니다. 그 안에 백은 수액이나 대체 정화재를 확보하시면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습니다. 다만 정식 의식은 승인과 후원이 먼저라….”
뒤는 길게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열두 날.
숫자는 문장보다 빠르게 숨통을 조였다. 이곳에서 열두 날은 달력의 시간이 아니었다. 돈과 공적이 없으면 멈추는 치료의 끝이었다. 성도는 거절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절차가 늦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책임은 늘 기다리는 쪽에 남는다.
엘레나가 내 소매 끝을 잡았다.
“오빠,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마.”
그 말이 더 아팠다. 엘레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자기가 발목이 된다고. 자기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얼굴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나는 품에서 배정 통지서를 꺼내 침상 위에 놓았다.
“오늘 받았어.”
엘레나가 종이를 읽기 전에, 하급 성직자의 눈이 먼저 흔들렸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했다. 그는 이 원정명을 알고 있었다.
“봉인 외곽 조사 원정.”
엘레나가 천천히 물었다.
“언제 출발해?”
“오늘 안으로.”
성소 안의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하급 성직자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 구역은 관리 문서가 따로 있을 텐데….”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나는 바로 물었다.
“관리 문서가 뭡니까.”
“아닙니다. 절차가 복잡하다는 뜻입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더 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겁먹은 성직자 하나가 아니었다. 열두 날이라는 숫자였다. 엘레나의 손등 위 붉은 결이었다. 그리고 내가 품에 넣은 통지서였다.
엘레나는 통지서를 접어 내게 돌려주었다.
“돌아올 거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오겠다는 말은 쉬웠고, 쉬운 말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대신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가벼웠다.
“돌아오려고 가는 거야.”
엘레나는 그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성소를 나오자 회랑 끝 햇빛이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서쪽 숙소동으로 걸었다. 성소에서 숙소까지 이어지는 돌길은 점호장 가장자리를 지나갔다. 후보생 몇 명이 내 옆을 스쳤고, 그중 하나가 내 통지서 봉투를 보고 말을 낮췄다.
“베일도 출정 명부에 붙었다며?”
“보조라던데.”
“봉인 외곽이면 말이 보조지.”
그들은 내가 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크게 말하지 않았다. 크게 말하지 않는 잔인함도 있다. 소문은 늘 그렇게 적당히 낮은 소리로 사람을 따라붙는다.
로웬 헤일의 방은 숙소동 끝에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오래된 기름등 냄새가 먼저 났다. 작은 침대, 벽에 걸린 지도끈, 바닥 구석에 밀어 둔 상자, 손때가 묻은 서랍. 사람이 사라진 방은 늘 절반쯤 시간이 멎은 모양을 한다. 곧 돌아올 것 같기도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정적.
로웬은 내 후견인이었다. 기록관리병 출신답게 말보다 문서가 먼저였고, 잔소리보다 장부 정리가 더 길었다. 그래도 이 수련원에서 나를 사람 이름으로 부른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미완 기록과 부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서랍 밑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서 익숙한 것들이 나왔다.
균열난 성철 부적.
겹겹이 접힌 미완 원정 기록.
아래쪽 한 줄이 억지로 지워진 영웅 도표.
도표를 펼치자 긁힌 자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잉크를 지운 게 아니었다. 종이결 자체를 죽여, 애초에 줄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 한 흔적이었다. 열둘 다음에 있어야 할 줄이 비어 있었다.
열세 번째 줄.
기록 첫 장에는 로웬의 필체가 짧게 남아 있었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그 아래에는 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두 줄을 내려다보았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었다. 안에 남아 있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게 더 불길했다. 로웬이 날 지키려 했는지,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으려 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다만 저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성철 부적을 손바닥에 올렸다. 금속은 늘 차가웠고, 중앙의 균열은 오래된 흉터처럼 보였다. 그때 품 안의 통지서가 떠올랐다. 나는 배정서를 꺼내 부적 가까이 가져갔다.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금속이 뜨거워졌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손을 떼고 다시 가까이 대자 낮은 진동이 손바닥 밑을 스쳤다. 나는 곧장 통지서의 인장을 뒤집어 보았다. 왕립기사수련원 밀랍 인장 가장자리에, 아주 얇게 다른 문양이 눌려 있었다. 성도 봉인 관리부에서 쓰는 겹문양과 닮아 있었다.
숨이 얕아졌다.
로웬의 부적이 원정 배정서에 반응한다. 그것도 성도의 겹인장에.
나는 기록 뒷장을 넘겼다. 흐릿한 메모가 더 있었다.
`지워진 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그 아래에는 짧은 방향 표시가 있었다.
북서.
원정 통지서에 적힌 출발 방위와 같았다.
누군가는 나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런데 로웬도 오래전에 이미 그 바깥을 가리켜 두었다.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몰라도, 선은 같은 방향으로 겹쳤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확했다.
나는 부적을 오래 쥐고 있지 않았다. 오늘 필요한 건 물건 하나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었다. 부적이 가리킨 방향, 성도가 보인 반응, 성소의 열두 날, 장비 창고의 빈 칸, 점호장의 낙인. 모두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만 보면 이상한 물건이고, 전부 같이 보면 내가 놓인 판이었다.
행정실 앞 복도는 낮빛을 받아 지나치게 밝았다.
열린 창 사이로 건조한 바람이 들어와 문서대 위 종이 모서리를 들썩였다. 안쪽 방에서는 서기관들이 장부를 넘기는 소리가 일정하게 흘렀고, 바깥 중정에서는 훈련용 깃발이 바람에 얻어맞아 거칠게 울었다. 사람 발소리는 많았지만, 내가 문서대 앞에 멈추자 이상하게 그 자리가 비어 있는 듯했다.
내 이름은 찾기 쉬웠다.
맨 위 서류 한 장에 굵게 적혀 있었다.
`실전 전력 미달.`
그 아래.
`정리 대상.`
그리고.
`봉인 외곽 조사 원정 전출.`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눈으로만 읽었다. 그래도 글자는 충분히 차가웠다.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생환 시 유예 가능.`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반응 확인 필요.`
나는 그 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응.
무엇에 대한 반응인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선명했다. 인장, 유물, 봉인, 각인. 정확한 말만 빠져 있을 뿐, 나를 사람보다 확인 대상에 가깝게 적었다는 사실은 숨기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경멸은 감정이 아니었다. 행정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싫어해서 밀어낸 게 아니라, 필요한 절차에 맞게 분류했다. 죽으면 정리 완료. 살아 돌아와 뭔가를 건드리면 회수 가치 발생. 그래서 유예 가능.
“거기서 손 떼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에드만이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뛰어온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쉬지 않았다. 이미 내가 여기까지 올 걸 예상한 사람처럼, 딱 맞는 위치에서 멈춰 있었다.
나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
“정리 대상.”
에드만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전력 평가에 따른 배치다.”
“축소 지급도 평가입니까.”
“보조 인력에 맞는 지급이다.”
“생환 시 유예는요.”
그는 잠깐 침묵했다. 아주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틈이 오히려 대답이었다.
“돌아와 증명하면 다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지.”
“다시 판단.”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다시 회수하겠다는 뜻입니까.”
에드만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상상을 줄여라, 베일. 네게 필요한 건 임무 수행이다.”
“제게 필요한 건 살아남는 겁니다.”
“같은 말일 수도 있지.”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람을 제도 안에서만 보는 사람은 가끔 저런 얼굴을 한다. 악의가 없어서 덜 잔인한 게 아니라, 악의가 필요 없어서 더 위험한 얼굴.
나는 문서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필요한 건 봤다. 에드만에게 더 캐물어도 그는 규정을 말할 것이다. 규정 뒤에 숨어 있는 이름들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중정 가장자리로 나오자 햇빛은 밝았지만 돌바닥은 여전히 차가웠다. 훈련용 깃발이 바람을 맞아 크게 펄럭였다. 그 아래에 세라 벨로네가 서 있었다.
그녀는 흰 훈련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금발은 흐트러짐 없이 묶여 있었다. 한 손은 허리춤 검집 근처에, 다른 손은 서류 주머니 위에 얹혀 있었다. 늘 보던 자세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단단함이 평소와 달랐다.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걸 숨기려는 단단함이었다.
세라의 시선은 내 얼굴보다 먼저 내 손의 통지서를 훑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출발 시간 전달하러 왔나.”
세라가 짧게 답했다.
“그것도 있고.”
“나머지는?”
바람이 깃발을 한 번 더 때렸다.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원정 절차 확인.”
“절차.”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아니면 감독?”
세라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부정하지 못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내 배정도 선택은 아니야.”
“그래서 내 옆에 붙나.”
“그 원정은 이상해.”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예전처럼 날카롭게 끝나지 않았다. 세라는 품에서 얇은 접지 하나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보이려다 멈춘 손짓이었다. 숨긴다는 사실 자체를 숨길 수 없는 움직임.
“초급 조사 원정에 이런 문구는 잘 안 붙어.”
“생환 시 유예.”
“그것도.”
“또 뭐가 있지.”
세라는 잠깐 주위를 보았다. 중정 건너편에는 하급반 후보 둘이 장비를 묶고 있었고, 서기관 하나가 행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듣지 못할 만큼만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특정 인장이나 유물에 반응하는지 보고하라는 항목이 있어.”
품 안의 부적이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임무 중 이탈 여부. 접촉한 물건의 회수 가능성. 필요할 경우 별도 보관.”
사람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움직임을 보고, 닿은 것을 기록하고, 끝에는 보관한다. 오늘 하루 내내 들은 말들이 하나의 모양으로 붙었다. 보조 인력. 정리 대상. 반응 확인. 회수 가능성.
나는 세라를 똑바로 봤다.
“넌 그걸 읽고도 온 거군.”
“그래.”
변명 없는 인정이었다. 그래서 더 피곤했다. 차라리 몰랐다고 했다면 쉬웠을 것이다. 적으로 미워하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세라는 알고 있었고, 불편해했고, 그래도 여기 서 있었다.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세라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벨로네 가문의 차녀답게, 그녀는 늘 말보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의 침묵에는 계산 말고도 다른 게 있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해.”
“그게 전부야?”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편하네.”
세라의 턱선이 굳었다.
“편하지 않아.”
“나한테는 그렇게 보이는데.”
“내가 여기서 명령을 찢으면, 너는 지금보다 안전해져?”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감시자라는 건 부정 안 해. 하지만 적어도 네가 이 원정에서 조용히 사라졌다는 보고서가 올라가게 둘 생각은 없어.”
그 말은 사과도 약속도 아니었다. 자기 선 안에서 겨우 밀어낸 문장에 가까웠다. 그래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다.
“증인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면.”
감시자보다 증인이 더 무거운 말이었다. 감시는 움직임을 본다. 증인은 결과를 본다. 그녀가 어느 쪽으로 설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세라는 자기가 어떤 줄에 묶였는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통지서를 다시 접었다.
“그럼 잘 봐. 내가 왜 밖으로 나가는지.”
세라가 낮게 말했다.
“에이드리언.”
나는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밖으로 보내는 이유가 하나가 아닐 수 있어.”
“이미 알고 있어.”
그 말은 내게도, 그녀에게도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더 말하면 서로가 가진 줄만 더 드러날 뿐이었다. 나는 중정을 가로질러 성문 쪽으로 걸었다.
오후로 기운 성문 앞은 시끄러웠다.
짐수레 바퀴가 돌바닥을 긁었고, 말들이 코로 흰 숨을 뿜었다. 원정 인원을 확인하는 서기관은 목패를 하나씩 넘겼고, 병사 둘은 북서쪽 도로로 나갈 준비를 하며 쇠사슬 문을 풀었다. 성문 밖 길은 낮은 언덕 사이로 꺾여 숲 가장자리를 향했다. 그 너머가 봉인 외곽이었다.
수련원 안에서는 소문이 벌써 먼저 움직였다. 하급반 후보 몇이 멀찍이 서서 내 장비 묶음을 보았고, 보급 담당은 다시 창고 문을 닫았다. 성소 쪽 회랑에서는 하급 성직자가 누군가에게 서둘러 쪽지를 건네고 있었다. 에드만은 단상 아래 서기관과 짧게 말을 나누었다. 세라는 말 옆에 서서 안장 끈을 조였다.
각자의 자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 안장 옆에는 작은 금속 상자가 묶여 있었다. 성도 봉인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상자였다. 회수용 보관함.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라도 내가 알아봤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나는 원정 명부 앞에 섰다.
서기관이 내 이름을 확인했다.
“에이드리언 베일. 보조 기록 및 보급 지원.”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읽었다. 방금까지 내가 점호장에서 실전 전력 외 판정을 받았고, 장비 창고에서 빈 지급을 받았고, 행정 문서에서 정리 대상으로 적혀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그의 목소리에 없었다. 행정은 늘 그렇게 무표정했다. 사람 하나가 밀려나는 일도, 말 한 필을 옮기는 일도 같은 높이로 읽었다.
나는 목패를 받아 허리끈에 묶었다. 낡은 끈이 손끝에서 한 번 미끄러졌지만, 두 번 감아 단단히 조였다. 끊어질 수 있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움직임을 줄이면 된다. 정강이 보호대가 없으니 낮은 돌진을 피해야 한다. 응급 방어포가 없으니 첫 충격을 맞기 전에 거리를 벌려야 한다. 나는 다시 계산했다.
이번에는 혼자 살기 위한 계산만이 아니었다.
엘레나에게 남은 열두 날.
로웬의 지워진 열세 번째 줄.
성도의 겹인장.
문서대의 정리 대상.
세라의 감독 항목.
에드만의 침묵.
각각 따로 나를 밀어붙이던 것들이 성문 앞에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남아 있으면 나는 장부 속에서 먼저 지워진다. 남아 있으면 엘레나는 기다리다 더 나빠진다. 남아 있으면 로웬이 왜 사라졌는지 끝내 모른다. 남아 있으면 나를 바깥으로 밀어낸 놈들이 무엇을 확인하려는지도 평생 모른다.
품 안에서 통지서가 바스락거렸다. 왼손 안의 부적은 천천히 열을 올렸다.
북서쪽.
원정대가 향할 길과 같은 방향이었다.
나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흰 돌 위로 감시병 하나가 지나갔고, 그 뒤 더 높은 망루의 그늘이 움직였다. 누가 보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수련원인지, 성도인지, 아니면 로웬이 경고한 더 깊은 쪽인지.
중요한 건 내가 더는 모른 척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때는 수련원 안에 남아 있으면 적어도 안전하다고 믿었다. 틀렸다. 이곳에서는 칼로 찌르지 않아도 사람을 충분히 지울 수 있다. 평가표로, 지급표로, 치료 일정으로, 유예 조항으로. 그리고 그 모든 문서 끝에는 항상 누군가의 서명이 남는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긁고 내려갔다. 통증 덕분에 생각은 오히려 맑아졌다.
나는 쫓겨나서 가는 게 아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간다.
엘레나를 붙잡을 방법이 봉인 외곽에 있다면 가져온다. 로웬이 숨긴 열세 번째 줄이 이번 원정 끝에 있다면 읽는다. 나를 정리 대상으로 분류한 자들이 내 반응을 보려 한다면, 먼저 내가 그 이유를 본다.
짐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쇠사슬 문이 올라가고, 북서쪽 길로 이어지는 바깥바람이 성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말 한 마리가 불안하게 발굽을 굴렀고, 보조 인력 둘이 짐을 다시 묶었다. 세라는 말 옆에서 내 쪽을 한 번 보았다. 완전히 무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돌바닥의 마지막 경계선 앞에 섰다.
뒤에는 수련원과 성소와 로웬의 빈방이 있었다. 앞에는 봉인 외곽으로 꺾이는 길과, 누군가 준비한 확인 절차가 있었다.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쪽은 앞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문을 넘었다.
그 순간 성벽 위 그늘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한 번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발소리는 없었다. 망토 자락만 어둠 속으로 접혔다. 내가 성문을 넘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된 사람처럼.
좋다.
기다린 쪽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 이유를 본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