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과 봉인 반응
성문 밖 길은 도시보다 먼저 사람을 줄 세웠다.
아센포드 외벽을 따라 내려가는 돌길은 처음 몇 걸음만 넓었다. 성벽 그림자가 끊기는 지점부터는 수레 둘이 나란히 가지도 못할 만큼 폭이 줄었다. 왼쪽으로는 검은 배수로가 비탈 아래로 길게 패여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굳어 버린 진흙 자국 위에 마른 풀만 성기게 솟아 있었다. 앞에 선 보급 수레가 조금만 흔들려도 뒤 사람 어깨가 따라 흔들렸다.
나는 두 번째 수레 오른쪽 뒤를 걸었다.
수레에는 식량 자루, 말뚝, 접이식 방패판, 밧줄이 얹혀 있었다. 바퀴 축은 오래돼 삐걱거렸고, 말들은 성문 냄새가 아직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봤다. 나는 걸으면서 대열 간격을 먼저 쟀다. 앞 수레와 내 사이 넉 걸음. 오른쪽 비탈로 빠질 수 있는 틈 두 군데. 누가 일부러 대열을 멈추면 어디가 가장 먼저 막히는지도 금방 보였다.
자유를 얻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성문 안에서는 밀려났고, 성문 밖에서는 묶여 움직이는 중이었다. 공간만 바뀌었지 방식은 더 노골적이었다.
“뒤로 빠지지 마.”
세라가 반 걸음 앞에서 말했다.
흰 훈련망토 대신 짧은 실전용 외피를 걸친 채였다. 허리의 검집은 수레에 걸리지 않게 위로 올려 묶여 있었고, 등은 지나치게 반듯했다. 얼핏 보면 단순히 대열 정리를 하는 상급 후보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앞사람보다 내 위치를 더 자주 확인했다.
“대열은 맞추고 있어.”
“네 쪽이 흐트러지면 뒤가 다 꺾여.”
규정처럼 들렸지만, 규정치고는 대상이 너무 정확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해 봐야 얻는 건 없었다. 오늘 필요한 건 화풀이가 아니라 관찰이었다.
성문 소음은 내리막 중간쯤에서 완전히 얇아졌다. 마차 소리와 고함 대신 말 재갈 부딪히는 금속음, 바퀴가 돌을 긁는 소리, 장화 밑에서 마른 흙이 깨지는 소리가 커졌다. 돌아갈 수 없는 거리란 이런 식으로 생긴다. 문이 닫히는 장면을 보지 않아도, 어느 순간부터는 되돌아간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감이 없어졌다.
왼손 주머니 안에서 로웬의 부적은 잠잠했다.
어젯밤 배정서에 닿자 뜨거워지던 금속이 지금은 식은 쇳조각 같았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살아 있던 것이 갑자기 죽은 듯 고요해지면, 사람은 오히려 그 침묵을 의식하게 된다.
대열은 성문에서 반 시진쯤 떨어진 외곽 검문 막사 앞에서 멈췄다.
돌을 낮게 쌓고 천막을 덧댄 임시 막사였다. 젖은 짚 냄새, 말똥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얇게 섞인 향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도 보조성소에서 맡던 냄새였다. 사람을 치료하는 곳보다 분류하는 곳에 더 잘 어울리는 냄새.
천막 안에서 하급 사제가 나왔다.
잿빛 겉옷 위에 흰 띠를 둘렀고, 손에는 이미 펼친 명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앞선 인원 둘을 빠르게 넘기더니 내 앞에서만 속도를 늦췄다.
“에이드리언 베일.”
이름을 읽는다기보다, 맞는지 하나씩 대조하는 소리였다.
“맞나?”
“맞습니다.”
사제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멈추지 않았다. 목선, 손등, 허리춤 주머니로 짧게 세 번 흘렀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표식을 찾는 눈이었다.
그가 명부 끝을 눌렀다.
“보조 인력 배속, 별도 확인 항—”
“내 관리선 인원입니다.”
세라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 옆이 아니라 사제와 나 사이에 반쯤 몸을 넣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단정했다. 시비를 키우지 않으면서도 더 묻지 말라는 선을 정확히 긋는 톤이었다.
“지휘 쪽에서 이미 인계받았습니다. 대열 지체시키지 않겠습니다.”
사제의 눈이 세라 허리춤으로 한 번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그 순간 그녀가 서류 주머니를 더 깊게 눌러 감추는 걸 나는 봤다. 천 사이로 붉은 밀랍 가장자리가 아주 잠깐 드러났다. 배정 통지서에 눌려 있던 성도 보조 문양과 같은 결.
사제는 곧 표정을 정리했다.
“그저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
나는 그 말을 속으로 굴렸다. 보호도 확인, 치료도 확인, 출발도 확인. 사람을 돕는 말이 아니라 위치를 적는 말처럼 들렸다.
막사를 지나 대열이 다시 움직였을 때, 나는 일부러 반 걸음 늦췄다. 세라가 곧장 속도를 맞춰 내려왔다. 앞 수레와 우리 사이에 말 한 마리 분량의 간격이 생기자 뒤쪽 잡음이 멀어졌다.
“성도 명부에 내 이름 옆에 뭐가 붙어 있었지?”
세라는 정면만 본 채 걸었다.
“원정 전 검문은 원래 있어.”
“보조 인력 하나에 별도 확인 항목까지 붙는 검문도 흔해?”
이번엔 대답이 늦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옆 비탈의 돌을 한 번 밟아 흙을 털었다.
“기사단이랑 성도가 같이 줄을 잡고 있나 보네.”
“추측은 네 자유야.”
“자유.”
나는 피식 숨을 샜다. “내가 어디 서는지까지 정해 놓고 말이지.”
세라 턱선이 굳었다.
“지금 중요한 건 대열 유지야.”
“대열 유지냐, 이탈 금지냐.”
그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세라 걸음이 반 박자 어긋났다.
짧은 실수였다. 하지만 실수는 준비된 문장보다 정직하다.
그녀는 바로 걸음을 맞췄다.
“혼자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하는 말이야.”
“전원한테 해당하는 얘기지.”
“너는 더 그래.”
그 말이 불쾌하게 남았다. 노골적인 적의가 없어서 더 그랬다. 세라는 날 넘길 사람이면서, 동시에 날 잃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었다.
둘 중 하나만이면 차라리 단순했을 텐데.
해가 더 기울 무렵, 대열은 말라붙은 하천 둔덕 옆에서 짧게 쉬었다.
바닥은 오래전 물길이 갈라놓은 흙판으로 층층이 벌어져 있었고, 회색 자갈 사이로 마른 갈대만 남아 있었다. 북서쪽 바람이 둔덕을 타고 넘어오자 흙냄새 사이에 희미한 소금기 같은 냄새가 섞였다. 광갱 방향에서 부는 공기였다.
사람들이 물통을 채우고 말 고삐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두 번째 수레 그늘로 몸을 옮겼다. 바퀴 그림자 안은 서늘했고 나무축에서는 오래 묵은 기름 냄새가 났다.
주머니에서 로웬의 미완 지도와 부적을 꺼냈다.
지도는 여전히 불친절했다. 지명은 거의 없고, 꺾인 선과 빈칸, 이상하게 정교한 지형선 몇 개만 남아 있었다. 대충 덜 그린 문서가 아니었다. 일부러 잘라 남긴 문서였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비탈선과 마른 하천 굽이를 종이 위 선과 맞춰 봤다. 완전히 일치하진 않았다. 대신 어긋남의 방향이 일정했다. 공식 경로보다 조금 더 북서.
부적을 지도 위에 올려두자 금속이 서서히 미지근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향을 조금씩 틀었다. 원정대가 실제로 향하는 정면에서는 열이 약해졌고, 왼쪽 위로 기울이는 순간 균열 안쪽이 다시 뛰었다. 아주 미세한 반응인데도, 손바닥으로는 분명히 느껴졌다.
북서.
공식 경로에서 조금 벗어난 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둔덕 너머로 잡목이 드문 언덕이 이어졌고, 그 뒤편 능선 하나가 검게 파여 있었다. 대열은 그보다 남쪽으로 돌아가게 돼 있었다. 그런데 로웬의 공백선과 부적은 자꾸 바깥쪽 언덕을 더 세게 가리켰다.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처음 읽었을 땐 경고였다.
지금 다시 읽으니 지시였다.
도시만 떠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도시가 내어놓은 길을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뜻. 로웬은 내가 언젠가 이런 줄 위에 세워질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부적 반응만으로도 이 어긋남을 눈치채게 만들 수 있다고 본 걸까.
어느 쪽이든 이제 유품은 추억이 아니었다.
길이었다.
“뭘 보고 있지?”
나는 반사적으로 부적을 움켜쥐었다.
세라가 수레 반대편에서 돌아 나왔다. 장화 끝에 하얀 흙이 묻어 있었고, 그녀 시선은 내 손보다 펼쳐 둔 지도와 내가 올려다본 북서쪽 언덕을 먼저 훑었다.
“길.”
“보조 인력답지 않은 답이네.”
“짐 취급하더니, 이제는 길 보는 것도 문제야?”
세라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말다툼하려고 온 거 아니야.”
“나도 아니야.” 나는 지도를 접으며 일어섰다. “검문소에서 본 별도 표시. 네 허리 서류. 기사단 문서까지 붙어 있지?”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에 쥔 부적을 잠깐 봤다.
“네가 멋대로 사라지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너 하나는 아니야.”
“그 문장도 지시문에 써 있나?”
“에이드리언.”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를 내기 직전이 아니라, 더 말하면 선을 넘는다는 걸 알아서 누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난 네 적으로 오진 않았어.”
“그런데 네가 먼저 확인하는 건 항상 내 앞이 아니라 내가 새는 방향이야.”
짧은 정적이 생겼다.
수레 바깥에서 누군가 물통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세라는 허리춤 주머니 위에 손을 올렸다가 곧 떼었다. 꺼낼 수는 없고, 없던 척도 못 하는 손놀림이었다.
“혼자 벗어나지 마.”
결국 그녀가 고른 문장은 그거였다.
“그 말밖에 못 해?”
“지금은.”
나는 세라 얼굴을 잠깐 보았다.
거기엔 악의만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뢰를 줄 만큼 깨끗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줄의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그 줄이 목에 감기는 느낌도 함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귀찮았다. 적이라면 잘라내기 쉽다. 이런 쪽은 계산이 필요하다.
쉴 시간이 끝나고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협로로 들어서자 길은 더 좁아졌다. 오른쪽은 잡목 비탈, 왼쪽은 축축한 경사였다. 선두와 후미 목소리가 바위에 막혀 흐려지자 사람들은 자연히 더 가깝게 붙었다. 그 와중에도 세라는 내 앞 반 걸음, 옆 반 걸음의 애매한 위치를 유지했다. 동행이라기보다 경계선 같았다.
나는 걸으면서 오늘 확인한 것들을 정리했다.
수련원은 날 추방했다고 쓰지 않았다. 전출과 유예라고 썼다.
성도는 감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확인이라고 말했다.
세라는 구속이라고 하지 않았다. 위험하니 벗어나지 말라고 말했다.
문장만 부드럽게 바꿨을 뿐, 뜻은 하나였다.
나는 원정 인원이 아니라 관리선 위의 물건이었다.
밤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첫 야영지가 잡혔다.
낮은 능선 아래였다. 중앙엔 얕은 화덕 자리가 있고, 바깥 원에는 수레와 말이 둥글게 세워졌다. 더 바깥쪽으로는 키 큰 마른 풀과 반쯤 무너진 감시초소 잔해가 어둠 속에서 검게 서 있었다. 젖은 재 냄새, 말 숨 냄새, 끓는 수프 냄새가 겹쳤고 바람 방향이 바뀔 때마다 먼 광물 냄새가 한 번씩 스쳤다.
나는 배급받은 그릇을 들고 있다가, 보초 순서를 정하느라 시선이 흩어진 틈을 탔다.
야영지 바깥 원으로 걸어 나갔다.
가장자리 흙은 낮 동안 수레바퀴와 장화에 여러 번 짓이겨져 있었다. 그래도 섞인 흔적 안에서 다른 걸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거운 장화는 앞코가 깊고 넓다. 말 발굽은 가장자리 흙을 부순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가볍고 일정한 자국이 있었다.
발끝이 좁고 보폭은 흔들림이 없었다.
야영지 안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바깥을 한 바퀴 훑듯 돌았다가, 무너진 감시초소 쪽으로 빠지는 선. 우리 대열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오늘 본 장화들 중 저렇게 걷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몸을 숙였다.
흙 가장자리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았고, 낙엽도 반쯤만 걸쳐 있었다. 오래된 자국이 아니다. 우리보다 늦게, 혹은 가까이서 따라붙은 사람의 흔적이다.
그때 주머니 속 부적이 다시 반응했다.
낮처럼 서서히 뜨거워지는 감각이 아니었다. 금속 안쪽에서 짧은 박동이 두세 번 치고 지나갔다. 사람 체온처럼 가깝고, 맥처럼 빠른 반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감시초소는 야영지보다 한 단 높은 흙턱 위에 있었다. 반쯤 내려앉은 지붕, 틀어진 기둥, 불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저쪽에 서면 우리 불빛은 잘 보이고, 이쪽에선 저쪽이 잘 안 보인다.
좋은 관찰 자리였다.
“나도 봤어.”
뒤에서 세라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그랬듯, 그녀는 내가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시야 바깥 어딘가에 있었다.
세라는 불빛이 닿는 선 바로 뒤에 섰다. 한 손은 검집 끝에 가볍게 얹혀 있었지만, 칼을 뽑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 시선도 발자국에서 초소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 대열 사람 자국은 아니지.”
“그래.”
“기사단 쪽인가?”
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낮과 달랐다. 숨기는 침묵이라기보다, 어느 쪽으로 단정해도 틀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침묵이었다.
“모르겠어.”
그녀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내 쪽 보고 계통만 얽힌 일은 아닌 것 같아.”
그 말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벽 위에서 느꼈던 시선, 검문소에서 내 이름 앞에 멈춘 사제, 북서쪽으로 기운 부적, 그리고 지금 야영지를 한 바퀴 도는 제3자의 발자국.
서로 다른 줄 같던 것들이 한꺼번에 모여 왔다.
세라는 경계 종을 울리지 않았다. 보초를 더 세우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나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소란을 키워 봐야 누구를 향해 칼을 드는지조차 모르는데, 우리가 뭘 봤는지만 알려 주게 된다.
대신 침묵 덕분에 하나가 더 선명해졌다.
세라는 감시선 안에 있다.
그렇지만 그 감시선 전체를 믿고 움직이는 쪽은 아니다.
바람이 능선을 훑었다.
마른 풀끼리 긁히는 소리 뒤로 아주 짧게 돌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나와 세라가 동시에 초소 쪽을 올려다봤다. 이미 거긴 어둠뿐이었다. 형체는 남지 않았고, 부적만 마지막으로 한 번 짧게 뛰었다가 멎었다.
세라가 말했다.
“오늘 밤 혼자 움직이지 마.”
나는 초소를 보며 답했다.
“이제 그 말은 경고로 들려.”
“경고 맞아.”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상부에서만 오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손안의 부적을 더 세게 쥐었다.
로웬이 남긴 건 단순한 유품이 아니었다. 누가 나를 어디로 밀고 있는지 읽게 해 주는 장치였다. 공식 경로는 남쪽으로 돌아가고, 부적은 북서로 기운다. 세라는 내 이탈을 막아야 하지만, 누가 따라붙는지는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야영지 바깥에는 이미 제3자의 발이 찍혀 있다.
이제 확실했다.
성문 밖은 탈출로가 아니었다.
더 노골적인 관리 구간이었다.
능선 위 어둠이 아주 미세하게 한 번 이동했다. 사람 눈으로 붙잡기엔 짧았지만, 경계한 몸은 그런 어긋남을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가 우리 불빛을 끝까지 확인한 뒤,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기억해 뒀다.
오늘 밤은 쫓지 않는다.
대신 이제는 안다. 다음부터는 누가 누구 뒤를 밟는지, 나도 먼저 읽을 수 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