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과 봉인 반응
성문 밖 길은 바깥으로 열려 있지 않았다.
아센포드 외벽 아래로 내려가는 내리막은 멀리서 보면 한 번에 풀려나는 통로 같았다. 막상 발을 올리면 반대였다. 처음 몇 걸음만 넓고, 성벽 그림자가 길을 덮는 지점부터는 보급 수레 하나가 길 가운데를 먹었다. 왼쪽 배수로에는 검은 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오른쪽 비탈에는 바퀴가 파낸 홈마다 누런 흙이 굳어 있었다. 늦은 빛은 성벽 윗단에만 걸렸고, 길 위 사람들은 이미 돌과 흙이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두 번째 보급 수레 뒤를 따라 내려갔다. 앞쪽에는 말 두 필과 접이식 방패판을 실은 첫 수레가 있었고, 그 뒤에 상급반 후보 넷이 창을 세워 걸었다. 내 뒤로는 보조 인력 셋과 예비 밧줄을 든 하급병 둘이 길게 붙었다. 대열 왼편은 성벽 아래 배수로라 물러날 수 없었고, 오른쪽 비탈의 흙은 발목까지 빠질 만큼 물러 있었다. 멈추면 앞뒤가 막히고, 넘어지면 수레바퀴가 먼저 지나갈 길이었다.
수레 위에는 말뚝, 접이식 방패판, 식량 자루, 예비 밧줄, 봉인 외곽용 석회를 담은 가죽 포대가 겹겹이 묶여 있었다. 수레 폭은 넉 걸음 남짓. 오른쪽 비탈로 몸을 틀 수 있는 틈은 두 군데. 선두가 멈추면 가장 먼저 엉키는 건 내 앞의 보급조 막내였다. 발은 앞으로 가는데 눈은 자꾸 그런 데로 갔다. 성문을 등졌는데도 떠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안에서는 밀려났고, 밖에서는 줄을 맞춰 실려 가는 중이었다.
성문 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선은 남아 있었다. 누가 정면에서 노려보는 건 아닌데, 대열이 어느 굽이를 도는지, 누가 어느 수레 옆에 붙는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조용히 적어 두는 눈. 수련원 점호장에서 보던 눈과 달랐다. 그때의 시선은 비웃음과 평가였지만, 지금의 시선에서는 숫자를 맞추는 냄새가 더 짙었다. 하나가 빠지면 어느 칸에 적을지 이미 정해 둔 사람의 눈이었다.
세라는 내 오른쪽 앞에서 걸었다.
흰 훈련망토 대신 짧은 외피를 걸쳤고, 검집은 수레에 걸리지 않게 허리 위로 조금 끌어올려 묶어 두었다. 등은 지나치게 곧았고, 고개를 돌리는 횟수는 적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뭘 보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읽혔다. 앞사람 간격보다 내 위치를 더 자주 확인했다. 내가 비탈 쪽으로 반걸음만 흐르면 세라의 어깨도 아주 조금 그쪽으로 기울었다. 우연처럼 보일 만큼만. 그러나 우연은 같은 방향으로 세 번 반복되지 않는다.
“간격 벌리지 마.”
세라가 앞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도망갈 데라도 있어 보여?”
내가 낮게 내뱉자 세라가 짧게 답했다.
“있어 보이면 더 문제지.”
규정처럼 들리게 고른 말이었지만 내용은 달랐다. 대열 정리보다 이탈 가능성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의 대답이었다. 나는 더 받아치지 않았다. 괜히 부딪혀 봐야 오늘 하루가 편해질 리 없었다. 차라리 입 다물고 보는 편이 나았다. 누가 내 옆에 서는지, 누가 내 이름 앞에서 멈추는지, 누가 내가 놓친 줄을 대신 쥐고 있는지.
내 왼쪽에서 보급조 막내가 허리끈을 다시 고쳐 묶었다. 식량 자루 둘이 한쪽으로 쏠리며 수레 덮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묶음 아래쪽 고정못 하나가 흔들렸다. 수레꾼은 앞말 목줄만 보느라 아직 몰랐다. 나는 손을 뻗어 막내의 어깨끈을 잡아당겼다.
“오른쪽 말고 왼쪽으로 붙어.”
“왜요?”
막내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려 했다.
“묶음 빠지면 네 어깨로 떨어진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레가 돌턱을 밟았다. 덮개 밑에 있던, 석회를 담은 가죽 포대가 한 번 크게 흔들렸고, 고정못이 거의 빠질 듯 튀었다. 막내가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붙지 않았다면 포대가 그대로 목덜미를 찍었을 자리였다. 나는 손을 뻗어 포대 끈 끝을 잡아 수레 안쪽 고리에 한 바퀴 더 감았다. 낡은 장갑 안쪽 솔기가 손가락 살을 긁었지만 놓지 않았다. 수레가 다시 균형을 찾자 막내가 뒤늦게 숨을 삼켰다.
세라가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짐이 먼저 떨어질 뻔했어.”
“보고했어야지.”
“떨어진 다음에?”
내 대답에 세라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그녀는 수레 묶음을 훑고, 막내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내가 다시 감아 둔 끈을 보았다. 질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뒤쪽 하급병에게 짧게 손짓했다.
“두 번째 수레 오른쪽 끈 다시 봐. 고정못도 교체해.”
그 말은 수레를 향했지만, 시선은 다시 내게 왔다. 이번에는 감시보다 확인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어디로 튈지 보는 눈이 아니라, 방금 내가 뭘 먼저 봤는지 계산하는 눈. 그 차이는 작았고, 그래서 더 불편했다.
조금 더 내려가자 도시 소리가 얇게 벗겨졌다. 성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던 고함과 쇳소리는 비탈 중간쯤에서 끊겼고, 대신 수레축이 삐걱대는 소리와 말 재갈 부딪히는 소리, 마른 흙이 장화 밑에서 잘게 깨지는 소리만 남았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문이 닫히는 장면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뒤쪽이 더 이상 목적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주머니 안의 부적은 차갑게 잠잠했다.
어젯밤 배정서에 닿았을 때처럼 뜨겁지도, 미세하게 떨리지도 않았다. 한 번 반응을 보인 물건은 조용할수록 더 신경을 긁었다. 입을 다물고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일부러 손을 빼고 걸었다. 오늘 필요한 건 부적 하나만 붙잡고 겁먹는 일이 아니었다. 길, 사람, 짐, 문서, 시선. 전부 같이 봐야 했다.
대열은 성문에서 반 시진쯤 떨어진 외곽 검문 막사 앞에서 멈췄다.
돌을 허리 높이쯤까지만 쌓아 올리고 위에 천막을 덧댄 막사였다. 길 왼쪽에는 말 먹이통과 물통이 놓였고, 오른쪽에는 수레를 한 대씩 세울 수 있게 흙을 다져 놓은 넓은 자리 두 개가 있었다. 젖은 짚단 냄새와 말똥 냄새가 먼저 올라왔고, 그 아래로 향유 냄새가 얇게 섞여 있었다. 성도 보조성소 복도에서 맡던 냄새였다. 상처를 씻는 곳보다 사람을 분류하는 방에 더 어울리는 냄새.
천막 아래에는 명부판과 인장 상자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정리된 물건은 늘 사람을 편하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미 무얼 확인할지 정해 놓았다는 뜻이니까. 명부판은 셋이었다. 원정 인원, 보급 물품, 별도 확인. 가장 오른쪽 작은 판은 천으로 반쯤 덮여 있었지만, 덮은 천 위에 얹힌 은침과 붉은 밀랍 조각은 숨겨지지 않았다.
하급 성도 사제가 명부를 들고 나왔다.
젊은 얼굴인데도 눈 밑은 벌써 꺼져 있는 남자였다. 그는 선두 인원 둘을 거의 흘려보내듯 확인했다. 이름, 소속, 짧은 눈맞춤. 창끝, 장화, 목패. 그런데 내 앞에서는 손가락이 종이 위에 한 번 멈췄다. 멈춘 손가락 아래에 작은 검은 점이 보였다. 잉크가 번진 게 아니었다. 이름 옆에 일부러 찍은 표시였다.
“에이드리언 베일.”
읽는 소리라기보다 대조하는 소리였다.
“맞나?”
“맞습니다.”
사제의 눈길이 내 얼굴에서 손등, 허리 주머니, 목선으로 짧게 옮겨 갔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표식이 붙어 있는지, 반응이 드러나는지, 다른 문양과 맞춰 볼 수 있는지 살피는 눈이었다. 그의 손은 명부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오른쪽 작은 판 쪽으로 미끄러졌다. 천 아래 은침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가 명부 끝을 눌렀다.
“보조 인력 배속, 별도 확—”
“제가 맡은 인원입니다.”
세라가 바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내 옆이 아니라 사제와 나 사이로 반 칸 비집고 들어왔다. 말투는 낮고 딱딱했다. 시비를 키우지 않으면서도 선을 그을 줄 아는 목소리였다. 세라의 왼손은 검집에 닿지 않았다. 대신 허리 서류 주머니 위에 놓였다. 칼보다 문서가 먼저인 자리라는 걸 아는 손이었다.
“지휘 인계는 이미 끝났습니다. 대열 지체시키지 않겠습니다.”
사제의 시선이 세라 허리춤으로 잠깐 미끄러졌다가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 그녀가 서류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더 깊게 누르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천 가장자리 사이로 붉은 밀랍 끝이 잠깐 드러났다. 낯익은 눌림이었다. 배정서에 겹쳐 찍혀 있던 성도 문양과 비슷한 결. 다만 세라의 문서에는 성도 문양 옆에 기사단식 검날 표식이 겹쳐 있었다. 두 기관이 따로 찍은 게 아니라, 한 장 위에서 서로 눌러 놓은 흔적이었다.
“벨로네 후보생.”
사제가 아주 낮게 말했다.
“성도 확인 절차를 건너뛰면 나중에 책임 문제가 생깁니다.”
세라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현장 지휘 책임은 제가 맡았습니다. 확인이 필요하면 다음 중계소에서 하십시오.”
“다음 중계소에는 이 항목을 넘기라는 지시가 없습니다.”
“그럼 지금 여기서 원정대 전체를 세워 두겠습니까.”
막사 앞 공기가 조용해졌다. 앞쪽 후보 둘은 못 들은 척 말 고삐를 고쳐 잡았고, 수레꾼은 바퀴 쐐기를 다시 밀었다. 그러나 모두가 듣고 있었다. 성도 사제의 손가락은 아직 내 이름 옆 작은 검은 점 위에 있었다. 세라는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녀 등 뒤 근육은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오른쪽 작은 명부판을 보았다.
천이 바람에 아주 조금 들렸다. 짧은 단어 하나가 드러났다.
`반응.`
그 아래는 다시 가려졌다.
사제는 결국 물러섰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명부를 닫았다.
“절차상 확인입니다.”
절차.
확인.
인계.
오늘 하루 내내 나를 설명하는 말은 사람보다 물건에 더 잘 어울렸다.
막사를 지나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반 박자 늦췄다. 세라도 바로 속도를 낮췄다. 앞 수레와 우리 사이가 조금 벌어지자 주변 소음이 한 겹 꺼졌다. 뒤쪽 하급병이 끈을 고쳐 묶느라 시선을 내린 틈이었다.
“성도 명부에 뭐가 붙어 있었지?”
세라는 정면만 보고 걸었다.
“원정 전 검문은 원래 있어.”
“보조 인력 하나를 따로 짚는 것도?”
“별일 아닌 걸로 예민해지지 마.”
“그럼 별일 아닌 문서를 왜 그렇게 감춰.”
세라 턱선이 굳었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문장보다 솔직했다. 나는 비탈 쪽 굳은 흙을 장화 끝으로 한번 걷어냈다. 흙 밑에는 오래된 수레자국이 층처럼 겹쳐 있었다. 수많은 원정대가 같은 길을 나갔고, 누군가는 같은 막사에서 같은 식으로 확인을 받았을 것이다.
“기사단이랑 성도, 둘 다 붙었나 보네.”
“추측은 네 자유야.”
“자유.”
내 입에서 헛웃음 비슷한 숨이 샜다.
“내가 어느 줄 안에 서야 하는지도 정해 놓고?”
세라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중요한 건 네가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이탈 금지라고 적혀 있었어?”
세라 걸음이 잠깐 틀어졌다. 아주 짧았다. 하지만 준비된 설명은 흔들리지 않아도, 숨은 흔들린다. 그녀는 곧 속도를 되찾았다.
“혼자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건 전원한테 해당하지.”
“너는 더 그래.”
그 대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모욕으로만 읽히지 않아서 더 그랬다. 세라는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넘겨주기 위해서만 붙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날 잃어버리면 자기가 곤란해지는 사람, 동시에 내가 다치면 예상보다 더 불편해질 사람. 그런 쪽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해가 더 기울 무렵, 대열은 말라붙은 하천 둔덕 옆에서 쉬어 갔다.
바닥에는 오래전 물길이 찢어 놓은 흙판이 층층이 드러나 있었고, 둔덕 아래쪽에는 회색 자갈과 바짝 마른 갈대만 남아 있었다. 북서쪽에서 넘어오는 바람에는 흙냄새 말고도 묽은 소금기 같은 냄새가 실려 있었다. 광갱 방향에서만 올라오는 냄새였다. 공식 경로는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지만, 둔덕 위로 올라서면 낮은 잡목 언덕 너머에 더 짧은 길이 보였다. 수레는 못 지나가도 사람은 지나갈 만한 폭이었다.
사람들이 물통을 채우고 말 고삐를 손보는 동안 나는 두 번째 수레 뒤 그늘로 몸을 옮겼다. 바퀴 그림자 아래는 생각보다 서늘했고, 나무축에 밴 오래된 기름 냄새가 묵직했다. 나는 수레 가죽덮개가 바람에 들썩이는 박자에 맞춰 몸을 낮췄다. 누군가 멀리서 보면 짐끈을 확인하는 보조 인력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먼저 끈을 확인했다. 그다음에야 주머니에서 로웬의 미완 지도와 부적을 꺼냈다.
지도는 여전히 불친절했다. 지명은 거의 없고, 끊긴 선과 빈칸, 필요 이상으로 정교한 지형선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처음 보면 덜 그린 종이 같지만 오래 보면 오히려 반대였다. 다 지우고 남겨야 할 것만 남긴 종이. 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비탈선과 하천 굽이를 종이 위 선에 맞춰 봤다. 꼭 맞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긋나는 방식이 같았다. 공식 경로보다 조금 더 바깥, 조금 더 위, 북서쪽.
부적을 지도 위에 올려놓자 금속이 천천히 미지근해졌다.
손바닥 열이 옮은 줄 알고 한 번 떼었다가 다시 얹었다. 반응은 같았다. 가죽끈 끝이 먼저 따뜻해지고, 균열 안쪽이 뒤늦게 따라왔다. 나는 숨을 줄이고 방향을 조금씩 돌렸다. 지금 대열이 향하는 남쪽 굽이에서는 반응이 약했다. 왼쪽 위, 북서쪽으로 기울이자 금속 안쪽이 더 또렷하게 살아났다.
나는 지도 가장자리 빈칸에 손톱으로 아주 얕은 표시를 냈다. 잉크는 쓰지 않았다. 누가 종이를 빼앗아 보면 먼저 드러나는 건 잉크다. 종이결을 살짝 눌러 둔 자국은 내가 찾으려 할 때만 보인다. 로웬은 그런 식의 기록을 좋아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문장보다, 나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이 다시 읽을 수 있는 흔적.
둔덕 너머에는 잡목이 성기게 선 낮은 언덕이 있었고, 그 뒤로 검게 패인 능선이 길게 이어졌다. 대열은 그보다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종이와 부적은 자꾸 바깥 언덕 쪽을 더 세게 가리켰다.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달랐다. 도시를 벗어나라는 말이 아니라, 도시가 내민 길을 그대로 밟지 말라는 뜻. 누군가가 정해 준 이동 경로 바깥에 살아남는 길이 따로 있다는 뜻.
로웬은 내가 이런 대열 안에 세워질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부적 하나면 여기까지는 읽어 낼 거라고 믿은 걸까. 어느 쪽이든 속이 쓰렸다. 사라진 사람인데도, 아직도 내 발걸음 순서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건 또 뭔가.”
세라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부적을 움켜쥐었다. 세라가 수레 반대편에서 돌아 나와 서 있었다. 그녀 장화 끝에는 둔덕의 옅은 흰 흙이 묻어 있었고, 시선은 내 손보다 지도를, 지도보다 내가 올려다본 북서쪽을 먼저 훑었다. 그냥 감시만 했다면 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길을 아는 사람은 먼저 시선의 방향을 본다.
“길 찾는 중이야.”
“보조 인력이 할 일은 아니네.”
“짐 취급하더니, 이제는 길 보는 것도 문제야?”
세라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비꼬려고 온 거 아니야.”
“나도 아니야.” 나는 지도를 접었다. “검문 막사에서 본 표시. 네 허리 문서. 둘 다 우연은 아니지.”
세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레 바깥에서 물통 뚜껑 닫는 소리가 한 번 울렸다. 둔덕 아래에서는 보급조 막내가 아직도 방금 전 떨어질 뻔한 포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네가 멋대로 사라지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있어.”
“나 말고.”
“그래.”
“누구지. 기사단? 성도? 벨로네 가문?”
세라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굳었다.
“지금 네가 알 필요 없는 이름이야.”
“그럼 내가 알아야 할 건 뭐지.”
“혼자 빠지지 마.”
결국 또 그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낮에 들었을 때와 끝이 달랐다. 명령이라기보다 부탁이 되기 직전에서 멈춘 문장. 나는 그녀 얼굴을 가만히 봤다. 악의만 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세라는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문서를 품고 있는 사람, 그러나 그 문장들 전부를 믿지는 못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넌 어디까지 알고 있어?”
내가 묻자 세라 손이 허리 서류 주머니 위로 갔다가 멈췄다.
“전부는 아니야.”
그 말은 의외로 빨랐다.
“하지만 네 이름이 그냥 보조 인력 명단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알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정이었다.
나는 작게 숨을 뱉었다.
“그래서 날 지키는 척하면서 묶어 두는 거군.”
세라가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쉴 시간이 끝나고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협로로 들어서자 길은 더 좁아졌다. 오른쪽은 잡목 비탈, 왼쪽은 축축하게 꺼지는 흙 경사였다. 선두와 후미의 목소리가 나무와 바위에 가려지자 사람들은 자연히 가까워졌다. 수레가 한 번에 한 대씩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앞 수레가 돌턱을 넘을 때마다 뒤 수레는 기다려야 했고, 그때마다 대열 가운데가 주머니처럼 접혔다가 펴졌다.
나는 걸으면서 오늘 확인한 것들을 정리했다.
수련원은 퇴출이라고 쓰지 않았다. 유예와 전출이라고 썼다.
성도는 감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확인과 절차라고 말했다.
세라는 구속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위험하니 벗어나지 말라고 말했다.
문장을 부드럽게 바꿔도 뜻까지 달라지진 않는다. 남는 건 결국 하나였다. 나는 원정대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걸 끝까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앞 수레가 좁은 돌목에서 갑자기 멈췄다.
선두 쪽에서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났고, 뒤따르던 수레바퀴가 젖은 흙을 깊게 파고들었다. 두 번째 수레 오른쪽 바퀴가 조금씩 아래로 기울었다. 수레꾼이 욕을 삼키며 고삐를 당겼지만, 멈춘 수레 뒤로 사람이 밀려붙었다. 좁은 길에서는 작은 기울어짐도 곧 사고로 이어진다. 짐이 오른쪽으로 쏠리면 비탈 쪽 사람이 먼저 깔리고, 반대로 무리하게 밀면 왼쪽 흙 경사가 무너진다.
나는 앞을 보지 않았다. 바퀴 밑을 보았다.
오른쪽 홈 안쪽 흙은 물기를 먹어 검게 빛났고, 바퀴 바깥쪽에는 납작한 돌 하나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저 돌을 받침으로 쓰면 수레가 더 기울고, 빼내면 바퀴가 한 번 더 빠진다. 수레를 밀 사람이 아니라, 짐을 먼저 나눠야 했다.
“방패판 세 장만 내려.”
내 말에 뒤쪽 하급병이 눈을 치떴다.
“네가 뭔데 지시를—”
“오른쪽 포대는 그대로 두고 방패판만 왼쪽으로 내려. 말뚝 묶음은 풀지 말고. 그거 풀면 전체가 쏟아져.”
나는 이미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방패판을 묶은 가죽끈은 두 겹이었고, 위쪽 고리는 젖어 잘 풀리지 않았다. 칼로 자르면 다시 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끈 끝을 찾아 손목 보호구 안쪽 철심에 걸고 비틀었다. 낡은 보호구가 삐걱댔지만 끈은 풀렸다.
세라가 상황을 읽고 앞으로 나섰다.
“두 명은 왼쪽 흙경사 받쳐. 한 명은 말고삐 늦춰.”
이번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세라가 명령으로 받아 주자 내 말도 뒤따라 움직였다. 방패판 세 장이 내려가고, 짐의 중심이 조금 왼쪽으로 빠졌다. 나는 수레 아래로 몸을 낮춰 납작한 돌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흙과 물이 손등으로 튀었고, 바퀴가 한 번 더 내려앉으려 했다.
“지금 밀어.”
세라가 외쳤다.
수레꾼과 하급병 둘이 동시에 힘을 줬다. 바퀴가 진흙을 씹으며 올라왔다. 말이 앞발을 구르자 수레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지만, 이번에는 짐이 쏟아지지 않았다. 오른쪽 비탈에 붙어 있던 보급조 막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뒤로 물러났다.
나는 늦게야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진흙과 가죽 기름이 뒤섞여 있었다. 손목 보호구 안쪽 철심은 아까보다 더 휘어 있었다. 그래도 끊어지진 않았다.
세라가 내 손을 보았다.
“다쳤어?”
“장비가 먼저 다쳤지.”
“농담할 상황은 아니야.”
“그럼 제대로 말해. 내가 방금 뭘 했는지.”
세라는 주변을 한 번 보았다. 대열은 다시 정리되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아직 흩어진 짐을 줍느라 바빴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보급 수레를 살렸어.”
“사람도.”
“그래.”
짧은 인정이었다. 하지만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묵직했다. 수련원에서 나는 전투 지속력 미달, 실전 전력 외, 보조 기록 인력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런데 방금 나는 수레와 사람을 동시에 살렸다. 검을 들지 않고도. 앞줄에 서지 않고도. 내가 가진 건 칼이 아니라, 무게가 어디로 쏠리는지 먼저 보는 눈이었다.
그걸 세라도 보았다.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보이는 순간, 제도는 사람을 더 쉽게 잡아 둔다. 무쓸모라고 밀어낼 때와 쓸모 있다고 붙잡을 때, 쓰는 손만 다를 뿐 잡히는 건 같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했다. 내가 이 원정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짐이라는 평가는 틀렸다. 그 판단을 먼저 이용할 사람은 내가 되어야 했다.
밤이 거의 내려앉을 즈음 첫 야영지가 잡혔다.
낮은 능선 아래 움푹 패인 자리였다. 중앙에는 얕은 화덕 자리가 있고, 바깥쪽으로 수레와 말이 둥글게 둘러섰다. 더 바깥에는 키 큰 마른 풀이 섰고, 반쯤 무너진 감시초소 잔해가 어둠 속에서 검은 모서리만 드러냈다. 젖은 재 냄새와 끓는 수프 냄새, 말 숨 냄새가 섞여 있었고,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멀리서 광물 냄새가 얇게 스쳤다.
야영지 배치는 말끔하지 않았다. 첫 수레는 화덕 남쪽에, 두 번째 수레는 북동쪽에 섰고, 말은 바람을 피하려고 능선 아래쪽으로 몰렸다. 보초는 남쪽 길목과 서쪽 풀밭을 맡았지만, 북쪽 무너진 감시초소 쪽은 폐허라며 비워 두었다. 폐허라는 말은 편리하다.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은 곳에 붙이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나는 배급받은 그릇을 손에 든 채 한동안 불가에 섞여 있었다. 수프는 묽었고, 보리 알갱이는 덜 익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먹었다. 길에서 멈춘 뒤에는 맛보다 따뜻함이 먼저다. 나는 그릇을 비우지 않은 채 보초 순서를 들었다. 세라는 첫 교대가 아니었고, 나는 공식 보초 명단에 없었다. 보조 인력은 쉬어도 된다는 말이 나왔지만,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두겠다는 말일 때가 더 많았다.
나는 수레 밑에 남은 끈을 정리하는 척 가장자리 쪽으로 걸었다.
야영지 바깥 흙은 장화와 수레바퀴에 여러 번 짓이겨져 있었다. 그래도 다른 자국은 드러난다. 무거운 장화는 앞코가 넓고 깊다. 말 발굽은 가장자리를 부순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가볍고 일정한 자국이 하나 섞여 있었다. 발끝이 좁았다. 보폭은 흔들림이 없었다. 야영지 안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을 한 바퀴 훑듯 돌았다가, 무너진 감시초소 쪽으로 빠져 있었다. 우리 대열 사람 걸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본 장화들 중에 저런 자국을 남길 만한 건 없었다.
나는 몸을 낮췄다. 가장자리 흙이 아직 완전히 굳지 않았고, 낙엽도 절반만 덮인 상태였다. 우리보다 먼저 와 오래 숨은 게 아니다. 가까이 따라붙었다가 얼마 전에 물러난 흔적이었다. 발자국 옆에는 마른 풀대가 두 번 꺾여 있었다. 하나는 낮게, 하나는 허리 높이쯤. 낮은 풀은 지나가며 밟은 흔적이고, 높은 풀은 멈춰 서서 몸을 낮출 때 손이나 무릎이 닿은 흔적이다.
그때 주머니 속 부적이 뛰었다.
낮처럼 서서히 뜨거워지는 반응이 아니었다. 금속 안쪽에서 짧고 빠른 박동이 두어 번 울리고 지나갔다. 손안에 작은 심장이 잠깐 살아난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시초소는 야영지보다 한 단 높은 흙턱 위에 있었다. 기둥은 비뚤어졌고 지붕은 절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불빛은 닿지 않지만 이쪽 불씨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폐허라기보다 아직도 누군가 쓰기 좋은 눈높이였다. 초소 아래 흙에는 오래된 못과 부러진 가죽끈이 박혀 있었고, 그 위에 새로 앉은 흙먼지가 얇게 긁혀 나가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발을 디뎠다.
“나도 그 자국 봤어.”
세라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하루 내내 그랬듯, 내가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녀는 시야 바깥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세라는 불빛과 어둠의 경계에 멈춰 섰다. 손은 검집 끝에 닿아 있었지만 칼을 뽑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 시선도 발자국에서 초소 쪽으로 이어졌다.
“우리 사람 건 아니지.”
“아니야.”
“기사단 쪽이야?”
세라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낮에 보였던 침묵과는 조금 달랐다. 숨기는 침묵이라기보다, 어느 쪽으로 답해도 모자란다는 걸 아는 침묵.
“모르겠어.”
그녀가 작게 말했다.
“내 쪽 보고서에 적혀 있던 감시만은 아닌 것 같아.”
그 한마디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벽 위에서 느꼈던 감시, 검문 막사에서 내 이름 앞에 멈춘 손가락, 북서쪽으로 더 뜨거워진 부적, 협로에서 실제로 사람을 깔 뻔한 수레, 그리고 지금 야영지 외곽을 한 바퀴 돈 제3자의 발자국. 떨어져 있던 조각들이 한 군데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 원정은 퇴출자의 마지막 실습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내가 어디를 밟는지 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둘의 바깥에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세라는 경계 종을 울리지 않았다. 보초를 더 세우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나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소란을 키우면 우리가 뭘 봤는지만 알려 주게 된다. 누가 따라붙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게 더 나빴다.
대신 나는 발자국 옆의 마른 풀대를 아주 조금 세웠다. 완전히 원래대로 돌리진 않았다. 다음에 누군가 같은 길로 돌아오면, 풀대가 다시 꺾이는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내가 알아볼 수 있다.
세라가 내 손짓을 보았다.
“표시 남기는 거야?”
“보초도 모르게.”
“나한테는 말했고.”
“넌 이미 봤잖아.”
세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검집에서 손을 뗐다.
“내가 공식 보고를 안 하면, 넌 그걸 이용하려고 하겠지.”
“당연하지.”
“솔직하네.”
“오늘 들은 문장들보다 낫지 않아?”
세라의 입가가 웃음까지는 되지 못하고 아주 조금 움직였다. 피곤함 때문인지, 어이없음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경계 종을 울리지 않았다. 그 침묵 덕분에 하나가 분명해졌다.
세라는 감시망 안에 있다.
하지만 그 감시 전체를 믿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
바람이 능선을 훑었다.
마른 풀끼리 긁히는 소리 뒤로 작은 돌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나와 세라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초소 쪽 어둠은 이미 비어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부적이 한 번 더, 짧고 빠르게 뛰었다가 멎었다.
“오늘 밤 혼자 움직이지 마.”
세라가 낮게 말했다.
나는 초소 쪽을 보며 대답했다.
“이제 그 말은 협박보다 경고로 들려.”
“경고 맞아.”
세라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내 쪽에서만 오는 건 아닐 거야.”
야영지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 발끝까지 길게 번졌다가 줄어들었다. 나는 손안의 부적을 더 세게 쥐었다.
로웬이 남긴 건 추억이 아니었다. 누가 나를 어느 길로 밀고 있는지 읽게 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길을 읽는 일은 물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검문 막사의 사제, 세라의 서류, 사람을 깔 뻔하게 만든 진흙 홈, 초소로 이어진 가벼운 발자국. 전부 같은 판 위에 있었다.
공식 경로는 남쪽으로 휘고, 부적은 북서쪽으로 반응한다.
세라는 내 이탈을 막아야 하지만 누가 뒤를 밟는지는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야영지 밖에는 이미 다른 발자국이 찍혀 있다.
능선 위 어둠이 아주 미세하게 한 번 움직였다. 사람 눈으로 잡기엔 짧았지만, 경계하던 몸은 그런 어긋남을 기억한다. 누군가가 우리 불빛을 마지막까지 확인한 뒤, 조용히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머릿속에 새겼다.
오늘 밤은 쫓지 않는다. 지금 쫓으면 내가 불빛을 등지고 올라가야 하고, 상대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수레와 사람도 뒤에 남는다. 손에 쥔 건 낡은 손목 보호구와 균열난 부적뿐이다. 흥분해서 뛰면 내가 먼저 사라졌다는 보고서만 완성된다.
대신 아침에 길을 바꿀 순간을 찾는다. 공식 경로가 남쪽으로 휘기 전, 물통을 다시 채우는 지점. 말 두 필이 동시에 목을 낮추는 곳. 보초가 초소를 폐허라고 믿고 지나치는 틈. 그때 북서쪽을 먼저 본다.
쫓기는 쪽이 계속 나일 필요는 없다.
다음엔 누가 먼저 흔적을 남기는지, 내가 고른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