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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는 자와 증언하는 자

경고 화살은 길을 막으려고 박힌 게 아니었다. 누가 어디서 멈췄는지, 누가 먼저 입을 여는지 재려고 박혀 있었다.

버드나무 제방 끝의 흰 자갈밭은 비를 머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낮고 축축한 소리를 냈다. 정면으로는 유리숲 초입의 엷은 백안개가 허리 높이에서 얇게 풀렸고, 뒤를 돌아보면 피난민을 숨겨 둔 흙홈과 뒤집힌 손수레 가림막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둔덕 위에는 왕국 사절이 말고삐를 당긴 채 우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왼쪽 갈대 아래로는 성도 수거반 장대 끝이 줄기 사이를 밀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숲 안쪽 나무 사이에는 엘프 경계대의 활촉이 높낮이를 달리한 채 숨어 있었다. 사람 가슴이 아니라 길목 높이를 겨누는 각도였다. 지금은 경고지만, 한 걸음만 더 들면 판정은 끝난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목패 반쪽을 가슴 높이에서 더 들지 않았다. 젖은 나무 조각 한가운데에는 이름을 긁어 낸 매끈한 홈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외곽 구조선 표식 절반이 비에 젖어 어둡게 떠 있었다.

숲 안쪽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 표식을 어디서 얻었느냐.”

심문이라기보다 잘못 놓인 물건을 확인하는 목소리였다.

세라는 내 왼쪽 반걸음 앞에 섰다. 검은 뽑지 않았지만 둔덕 위 왕국 사절과 제방 아래 피난민 숨칸 사이를 몸 하나로 끊는 자리였다. 벨로네 이름을 크게 내세우면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대신 피난민과 우리, 숲 바깥에서 건져 올린 증언까지 한꺼번에 왕국 장부 위에 올라갈 것이다. 세라는 그걸 아는 얼굴로 화살과 말발굽 사이만 노려봤다.

브론은 이미 손을 다시 놀리고 있었다. 목패 반쪽, 젖은 구호 꼬리표, 부러진 경계목 조각을 품 안에서 꺼내기 쉬운 순서로 갈라 쥐었다. 누가 먼저 종이를 낚아챌지, 누가 먼저 나무를 가져갈지, 누가 먼저 사람 입을 틀어막을지까지 미리 재는 손이었다. 그는 끈 매듭도 아예 다르게 눌러 두었다. 목패는 한 손으로 바로 펼칠 수 있게 납작하게, 꼬리표는 소매 안으로 숨겨도 끝번호가 먼저 보이게 짧게, 경계목 조각은 흙 묻은 쪽이 바깥으로 돌게 헐겁게 감았다. 성도 손이 먼저 닿으면 종이부터 뒤질 것이고, 왕국 손이 먼저 오면 목패를 먼저 가져갈 것이다. 브론은 그 순서를 이미 몸 안에서 끝낸 얼굴이었다.

그는 자갈 위에 천 세 장을 얇게 깔았다. 첫째 천은 사람 입에서 나온 증언이 머무는 자리, 둘째 천은 장부와 꼬리표 같은 문서 증언이 눕는 자리, 셋째 천은 길목과 경계판처럼 말 없는 증언을 올리는 자리였다. 서로 다른 물건인데도 섞이지 않게 간격을 벌린 배치였다. 누가 이걸 뒤엎더라도 무엇이 먼저 사라졌는지 바로 알 수 있게 남기는 배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세 장의 간격을 눈으로만 익혔다. 나중에 달아나며 다시 묶어야 할 때, 설명 없이도 같은 순서를 되살릴 수 있도록.

미리엘은 뒤쪽 흙홈에 남긴 피난민 둘의 손목을 붙잡은 채 짧은 말만 남겼다.

“위길 말고 아래길. 이름 말하지 말고 손목 잡기.”

설명이 아니라 박자였다. 떨리는 몸이 한 번 더 흩어지지 않게 붙들어 두는 짧은 박자. 그녀는 말을 끝낸 뒤 피난민 손이 어디로 먼저 가는지도 봤다. 자기 가슴을 더듬는지, 옆사람 소매를 찾는지, 빈 허공의 칸을 접는지. 같은 공포라도 손이 향하는 곳이 다르면 오염이 눌러 앉은 자리도 달랐다. 미리엘은 그 차이를 치료보다 먼저 읽고 있었다.

리에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표식을 본 날, 내 원정대가 사라졌어.”

둔덕 위 말 한 필이 발을 바꾸며 자갈을 흩었다. 갈대 아래 장대 끝이 잠깐 멈췄다. 숲 안 화살각도 아주 조금 달라졌다. 밀어낼 대상을 보는 각도에서, 말을 들어야 할 대상을 보는 각도로.

나는 리에트 등 뒤 반걸음에서 멈췄다. 대신 설명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그녀 기억을 내가 대신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가 오래 숨겨 온 침묵을 이 자리의 물증들과 같은 높이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실종 처리됐지.”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길을 놓쳤고, 안개에 흩어졌고, 몇은 돌아오다 죽었다고. 숲 장부에도 그렇게 남았을 거야.”

숲 안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붙었다. 앞선 목소리보다 나이가 더 들고, 가지 마디처럼 마른 결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숲 장부에도 그 문장은 남아 있다.”

나무 사이로 엘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활은 내리지 않았지만 화살촉은 땅 쪽으로 더 기울어 있었다. 그는 리에트를 먼저 보지 않았다. 리에트 손의 목패, 세라가 선 자리, 브론 품 안의 천매듭, 미리엘이 붙든 피난민 손목까지 한 번에 훑고 나서야 리에트 눈을 마주봤다.

“경계 이탈. 후퇴 신호 지연. 실종.”

리에트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맞아. 내가 그 문장에 서명했어.”

그녀가 말했다.

“그때는 그게 남는 줄 알았으니까.”

그 말 뒤로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근데 그날 먼저 사라진 건 사람이 아니었어. 이름이었지. 누가 늦었는지보다 먼저, 누굴 어느 줄에 올릴지부터 정했어.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는 번호만 되뇌었고, 길을 묻던 애가 선을 접고 밀어 넣는 동작만 했어.”

나는 브론 쪽을 봤다. 브론은 말없이 천 하나를 펴 목패 반쪽을 올려놓았다. 미리엘도 젖은 꼬리표 둘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같은 끝번호, 다른 종이결, 다른 매듭 방향. 나는 경계목 조각을 자갈 위에 세웠다. 길을 가리키던 판인데 사람을 세는 칸폭이 같이 남아 있는 조각이었다.

“말만으로 끝나지 않아.”

내가 말했다.

나는 목패를 짚었다.

“못이 빠졌다 다시 박힌 자국. 이름 홈을 긁고 다시 건 흔적.”

꼬리표를 가리켰다.

“같은 끝번호를 다른 사람한테 돌려 쓴 종이.”

마지막으로 경계목 조각을 들어 보였다.

“길 분류판인데 사람 분류칸 간격이 같이 남아 있어.”

엘프 경계대장의 눈이 세 물건 위에서 잠깐 멈췄다. 리에트 말보다 먼저 저 셋의 간격이 너무 닮았다는 걸 읽는 눈이었다.

미리엘이 거의 속삭이듯 덧붙였다.

“뒤쪽 피난민 셋도 마찬가지였어요. `열 번째 줄`, `둘째 칸`, `서명칸`은 다르게 말했는데 손은 똑같이 움직였어요. 위로 올리고, 접고, 밀어 넣는 순서로.”

그녀는 손에 감긴 젖은 천끈을 펴 보였다. 한 번 꺾인 자리만 진하게 젖어 있었다.

“열병은 사람 기억을 이렇게 접지 않아요. 이건 통째로 지우는 쪽이 아니라 이름을 먼저 빼고 줄과 칸만 남기는 쪽에 가까워요. 같은 자리를 자꾸 접으면 종이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거든요.”

숲 안쪽 엘프 둘이 짧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뒤에서 나뭇잎이 젖은 소리를 냈다. 그때 둔덕 위 왕국 사절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물품은 왕도 사고 조사 대상이오! 숲 경계 밖 회수품을 임의로 들이는 건 협약 위반이오!”

갈대 아래 성도 수거반도 놓치지 않았다.

“기억 혼탁 구호 대상과 접촉 물품은 격리 회수해야 합니다!”

그 순간 세라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검은 여전히 뽑지 않았다. 대신 검집 끝으로 자갈밭 한가운데를 탁, 짚었다. 선을 긋듯.

“멈춰.”

왕국 쪽이든 성도 쪽이든 한 번에 듣게 하려는 높이였다.

“부상 민간인이 있다. 현장 물증은 임시 호위선 아래 둔다. 누구도 먼저 내려오지 마.”

왕국 사절이 비웃듯 되받았다.

“기사 후보가 경계 외부 조사권까지 가졌다는 말은 못 들었군.”

세라는 이름을 먼저 던지지 않았다. 대신 북방 전초에서 여러 번 입에 익힌 문장만 짧게 골라 썼다.

“조사권은 없지. 그래서 호위 조항으로 막는 거다.”

그녀 목소리는 더 낮아졌지만 더 단단해졌다.

“부상 민간인 분리 이송 여부, 현장 위험선 아래 물품 우선 보전, 접촉 순서 조정. 지금은 그 셋이 먼저다.”

성도 수거반 하나가 장대 끝 갈고리를 들어 보였다.

“오염 접촉 물품은 보전보다 격리가 우선입니다.”

“그래서 더 늦춘다.”

세라가 곧장 잘랐다.

“너희가 먼저 손대면 사람도 물건도 같은 자루에 들어가. 그건 구호가 아니라 수거지.”

성도 쪽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그녀는 몸을 반 걸음 옮겼다. 검집 끝은 갈고리 쪽으로, 어깨는 왕국 사절 쪽으로 돌렸다. 한쪽은 더 내려오지 못하게 걸고, 다른 한쪽은 먼저 말을 받게 만드는 자리였다. 왕국 사절이 아래로 내려오면 성도 손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고, 성도가 먼저 들이밀면 왕국은 자기 조사권이 밀린다고 여긴다. 세라는 둘의 경쟁심을 한 줄 위에 올려놓고 서로 먼저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버렸다.

문장도 문장이었지만 진짜로 움직인 건 자리였다. 세라는 왕국 쪽 시선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 성도 수거반이 내려오는 각은 망토 자락과 검집 끝으로 한 번 더 비틀어 버렸다. 누구를 이기느냐보다 누구 시간을 늦추느냐에 가까운 버팀이었다. 리에트가 증언을 꺼낼 틈, 브론이 물증 순서를 다시 묶을 틈, 미리엘이 피난민 손동작을 한 번 더 읽을 틈을 벌어 주는 서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브론이 내 귀 쪽으로만 낮게 말했다.

“왕국은 증언 방향부터 가져가려 해.”

그는 꼬리표가 든 천을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성도는 오염 분류째 덮고. 둘 다 사람보다 먼저 줄을 가져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방 아래 피난민도, 리에트 옛 원정대도, 지금 우리도 같은 데서 붙잡히고 있었다. 누가 먼저 죽느냐보다 누가 먼저 자기 줄을 남 손에 넘기느냐에서.

숲 안쪽 경계대장이 활을 반쯤 내렸다.

“인간 쪽은 거기서 멈춰.”

그가 둔덕과 갈대 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 표식은 숲 경계 안쪽 대조 없이 넘기지 않는다.”

왕국 사절이 말을 세게 당겼다.

“그건 우리 쪽—”

경계대장 화살끝이 이번에는 말가슴 앞 자갈에 꽂혔다. 깊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더 말하면 다음은 땅이 아닐 거라는 깊이였다. 성도 수거반도 장대를 내밀다 멈췄다.

“파티만 안으로.”

그가 말했다.

“나머지는 경계 밖.”

우리는 숲 경계 안쪽 좁은 자갈길로 들었다. 경계대 둘이 앞서고 하나가 뒤를 막았다. 발 하나만 어긋나도 젖은 흰 자갈이 미끄러졌고, 오른편 얕은 개울은 물빛보다 먼저 차가운 소리를 냈다. 버드나무 냄새 대신 젖은 껍질과 이끼 냄새, 깨진 유리 같은 냉기가 올라왔다.

길은 넓지 않았지만 그냥 좁은 게 아니었다. 일부러 둘씩은 못 서게 눌러 놓은 폭이었다. 앞사람 어깨를 지나 옆으로 빠질 틈이 없고, 뒤에서 누가 달려들어도 한 번에 둘 이상은 못 붙는 폭. 발밑 자갈도 고운 데와 날 선 데가 번갈아 깔려 있어, 익숙한 사람은 소리 없이 걷고 낯선 사람은 한 걸음마다 발목을 확인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엘프들이 왜 이 길을 심문터 앞까지 그대로 남겨 두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누가 조급한지, 누가 짐을 숨겼는지, 누가 몸 중심을 바깥으로 두는지 다 읽히는 통로였다.

개울 쪽 물비늘은 잔잔해 보였는데, 가까이 가면 바닥 모래보다 얇은 유리 조각 같은 알갱이가 섞여 빛을 부쉈다. 물은 얕아도 맨발로 밟으면 바로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숲이 사람을 밀어내는 방식은 울타리나 벽만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들여보내는 척하면서, 오래 머물 사람과 잠깐 지나갈 사람의 걸음새를 물과 자갈로 먼저 가르는 곳.

개울 옆 좁은 공터에는 이동말뚝 셋과 젖은 천막 반 장이 걸려 있었다. 사람을 오래 붙잡는 자리라기보다 뭔가를 잠깐 놓고 대조한 자리 같았다. 발자국보다 얇은 상자 모서리 자국이 더 많았고, 말뚝 앞 돌줄만 유난히 깨끗했다. 여기서도 사람보다 물건이 먼저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말뚝 끝 높이도 제각각이 아니었다. 허리, 가슴, 눈높이 가까운 순서로 잘려 있어, 작은 물건부터 긴 판, 마지막엔 얼굴까지 같은 축에 올려 보라는 식의 높이였다.

경계대장이 멈춰 섰다.

“다시 말해 봐.”

그는 리에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날 누가 먼저 사라졌나.”

리에트는 쪼그려 앉아 자갈 위에 손가락으로 짧은 선을 그었다. 사선 셋과 작은 원 하나. 제방 아래 피난민 아이가 그리던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이름.”

그녀가 말했다.

“처음엔 셋이었어. 표식 맡은 애 하나, 길 읽던 애 하나, 뒤쪽 짐줄 잡던 애 하나. 원래는 바깥 우회선 표시였는데 그날은 이 선이 계속 지워졌어. 누가 지운 게 아니야. 그 애가 자기가 그린 걸 자기 손으로 문질렀지.”

미리엘이 낮게 덧붙였다.

“지금 피난민 아이도 같았어요.”

리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엔 이름을 불러도 안 돌아봤어. 근데 `둘째 줄`, `아래 칸`, `접어` 같은 말엔 몸이 먼저 움직였지. 보고서엔 내가 후퇴 신호를 늦췄다고 적혔어. 맞아. 늦췄어. 그때까진 길을 잃은 줄 알았으니까. 근데 이제 알아. 길을 잃은 게 아니었어. 누가 우리를 번호랑 표식으로만 정리되는 자리로 밀고 있었지.”

뒤쪽 엘프 하나가 물었다.

“네가 가져온 목패도 그 원정대 것인가.”

리에트가 손 안의 반쪽을 펼쳐 보였다.

“같은 계열이야. 외곽 구조선 표식. 실종 처리된 묶음에 붙던 변형.”

그녀는 이름이 긁힌 홈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그냥 버려진 게 아니야. 뜯고, 긁고, 다시 숨긴 거야.”

브론이 목패 뒷면의 못 자국을 경계대장 쪽으로 기울였다.

“못이 빠졌다 다시 박혔어. 현장에서 바로 숨길 생각 아니면 이렇게 안 남아.”

미리엘은 꼬리표 둘을 옆에 붙였다.

“같은 끝번호를 다른 사람한테 돌려 썼고요.”

나는 경계목 조각을 뒤집어 사람 칸 간격이 남은 면을 보였다.

“길 분류판과 사람 분류칸을 한 목재에 같이 쓴 흔적도 있어.”

경계대장 시선이 비로소 종이와 목패, 경계목 조각, 리에트 얼굴을 한 줄로 훑었다. 다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네 가지가 너무 닮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숲 기록에도 빈칸이 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그날 돌아온 자 수와 남겨진 표식 수가 맞지 않는 줄이.”

리에트 눈썹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럼 알고 있었네.”

“의심은 했지.”

경계대장이 답했다.

“하지만 밖에서 가져온 물증 없이 열었다간, 그 빈칸도 우리 쪽 실수로만 덮였을 거다.”

그는 개울 건너 나무껍질에 남은 옛 칼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당시 경계 기록은 두 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원로회로 올라간 짧은 장부, 하나는 현장 순찰대가 붙들고 있던 거친 메모. 숫자는 같았는데 이름 줄 수가 달랐어. 우리는 누가 잘못 베꼈다고 우겼고, 위쪽은 젖은 장부가 불어 글자가 번졌다고 정리했다. 그런데 지금 네가 들고 온 목패와 저 끝번호 꼬리표를 보니, 그때도 누군가 이름칸을 먼저 비우고 있었던 거다.”

“이제는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꼬리표를 짚었다.

“숲 바깥 피난민이 같은 손동작을 반복해. 성도 구호선은 실제 사람 수보다 적은 끝번호를 돌려 쓰고.”

목패를 짚었다.

“옛 외곽 구조 표식은 현재 제방 경계석 틈에서 나왔어.”

경계목 조각을 들었다.

“길 분류판과 사람 분류칸이 같은 목재에 겹쳐 남아 있고.”

리에트가 내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날이 숲 안에서만 끝난 게 아니라는 거야.”

그녀는 더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나 혼자 실패한 일도 아니고.”

그 문장 뒤에는 변명도, 자기 연민도 붙지 않았다. 대신 누가 이 실패를 개인 수치로만 적어 놓았는지 드러내는 무게만 남았다. 경계대장도 그 무게를 피하지 못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활을 완전히 내리지 않은 이유 역시 분명했다. 우리를 못 믿어서만이 아니라, 지금 이 말을 인정하는 순간 숲 쪽 장부도 더는 깨끗한 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뒤쪽 경계병 하나가 발을 옮기며 젖은 천막 기둥에 손을 짚었다. 손등 힘이 잠깐 올라왔다가 이내 풀렸다. 말 한마디 잘못 보태면 원로회 앞에서 자기들도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아는 몸짓이었다. 숲은 인간 사절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기 안쪽 기록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도 겁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바로 밀어내지도, 바로 끌어안지도 못한 채 `외곽 증언 보유자`라는 어중간한 줄을 새로 만든 것이다. 그 어중간함 덕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들어왔고, 그 어중간함 때문에 다음 문턱은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경계대장은 말뚝에 걸린 조약끈을 끊었다. 젖은 끈이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새 끈을 꺼내 다른 매듭으로 묶었다. 오래된 규칙 하나를 잠시 풀고 다른 줄로 바꾸는 손이었다.

“너희는 `외곽 증언 보유자`로만 안에 든다.”

그가 말했다.

“피난민은 경계 바깥에 남긴다. 인간 사절은 더 못 붙는다.”

세라가 짧게 물었다.

“경계 안쪽에서 우리 물건도 다시 가져가려 들겠지.”

경계대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물건보다 먼저 말이 맞는지 볼 거다.”

브론이 코웃음 비슷한 숨을 흘렸다.

“그 말이 더 위험하지.”

하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목패 반쪽, 꼬리표, 경계목 조각을 다시 다른 순서로 묶었다. 도망칠 때 꺼내기 쉬운 순서가 아니라, 대조할 때 먼저 보여 줄 것과 끝까지 숨길 것을 가르는 순서였다. 목패는 허리 쪽, 꼬리표는 소매 안, 경계목 조각은 짐천 맨 아래. 사람 증언, 문서 증언, 길 증언의 순서를 또 한 번 갈라 놓는 손놀림이었다.

개울물 위로 안개가 낮게 밀렸다. 그 사이 숲 안쪽 깊은 데서 종 같기도 하고 금속판이 맞부딪히는 듯한 맑은 울림이 한 번 번졌다. 리에트가 그쪽을 바라봤다. 듣고 싶지 않은데 몸이 먼저 아는 소리처럼.

그때 뒤쪽 숲길에서 엘프 하나가 젖은 봉투를 들고 뛰어왔다. 경계대장에게 문서를 건네고 물러섰다. 경계대장은 끈을 풀어 읽더니 얼굴을 굳혔다. 종이를 접는 손은 깔끔했지만 마지막 한 번은 조금 더 세게 눌렀다.

“원로회 전달문이다.”

그가 말했다.

“경계 통과는 허가한다.”

세라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하지만 경계대장은 바로 다음 문장을 읽었다.

“뒤집힌 사당 접근과 원본 기록 열람은 금지한다.”

리에트가 먼저 웃지도 못하는 숨을 내뱉었다.

“결국 거기네.”

“이유는?”

내가 묻자 경계대장이 종이 아래쪽을 다시 봤다.

“`숲 내부 애도선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

미리엘이 그 문장을 입안에서 한 번 굴려 본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애도선.”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사당 안에 아직 이름을 못 덮은 줄이 남았단 소리군.”

나는 전달문 마지막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닫히지 않았다.` 열 수 없다는 말과는 결이 달랐다. 아직 남아 있다는 뜻에 더 가까웠다. 숲도 건드리기 싫은 이름과 기록이 그 안에 있다는 뜻.

세라는 왕국 쪽 둔덕을 한 번 돌아봤다. 저쪽은 아직 우리를 놓지 않았다. 성도 수거반도 제방 아래 피난민을 다 걷어 가기 전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사당 금지까지 걸리면 숲 안으로 겨우 들어와도 핵심 문턱 앞에서 또 다른 봉쇄선을 맞게 된다.

그런데 리에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게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왜 막는지 먼저 듣겠다는 거지.”

경계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전달문을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봉투 아랫면을 엄지로 한 번 문지르더니 내게 내밀었다.

“공식 문장은 끝났다.”

그가 말했다.

“밑을 봐.”

나는 봉투를 받았다. 젖은 섬유가 손끝에 살짝 붙었다. 뒷면 아래쪽, 봉합끈이 스친 자리 가까이에 아주 옅은 먹선이 숨어 있었다. 일부러 안 보이게 눌러 쓴 덧문장이었다.

`사당 길은 금지하되, 죽은 자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자는 내일 새벽 물거울 길로 오라.`

짧은 한 줄이었지만 공식 허가문보다 더 선명했다. 금지와 초대가 같은 종이 한 장에 같이 붙어 있었다. 봉투 겉면의 먹이 한 번 번진 자리까지 계산해 숨긴 글씨였다. 누군가는 이 문장을 공식 장부 바깥에서만 건네고 싶었던 것이다. 원로회가 한목소리로 막는 게 아니라, 안쪽 누군가는 다른 길을 남겨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브론이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말을 둘로 접었네.”

그는 봉투 가장자리 눌린 자국까지 흘겨보며 혀를 찼다.

“앞면은 막는 줄, 뒷면은 빼돌리는 줄. 종이 한 장으로도 사람을 나눠 세운다.”

미리엘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공식선은 막고, 안쪽 누군가는 열겠다는 뜻이에요.”

“애도선이 아직 남았다는 말도 같은 뜻일 거야.”

내가 말했다.

“이름을 못 덮은 자리가 있다는 거지. 숲도 그걸 함부로 건드리면 자기 장부가 같이 열린다는 걸 아는 거고.”

세라는 곧장 정리했다.

“오늘 밤은 숲 안 대기선. 내일 새벽 물거울 길 확인.”

그녀가 리에트를 봤다.

“넌?”

리에트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자기 과거를 꺼내던 얼굴 위로 다른 결이 떠올랐다. 숨는 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제는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할 이름을 다시 세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 시선은 봉투 글씨보다도 개울 너머 어두운 길목에 더 오래 머물렀다. 저 길을 따라가면 자기 원정대가 끝난 자리와 다시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걸 아는 눈이었다.

“간다.”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빠지지 않아.”

그 말은 용감하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예전에 자기가 놓쳤다고 믿어 온 이름들을 이번엔 끝까지 따라가 보겠다는, 훨씬 더 무거운 약속이었다. 나도 그걸 들으며 리에트 얼굴보다 손을 먼저 봤다. 떨림은 남아 있었지만, 목패를 쥔 손끝이 이제는 놓칠까 봐 오므라드는 쪽이 아니라 끝까지 들고 가겠다고 버티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울물은 여전히 차갑게 흘렀고, 숲 안쪽 금속음은 두 번 다시 울리지 않았다. 뒤쪽 둔덕에서는 왕국 말발굽이 자리를 바꾸는 소리가, 제방 아래에서는 성도 장대가 젖은 흙을 헤집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우리는 문턱 하나를 겨우 넘었다. 그런데 가장 원하는 입구는, 가까워진 만큼 더 노골적으로 닫혀 있었다.

그래도 달라진 건 분명했다. 리에트가 끝내 숨지 않았고, 그 증언이 숲 경계선을 열었다는 것. 유리숲은 아직 우리를 들인 게 아니었다. 대신 `누가 어떤 이름을 잃었는지부터 말하라`는 문턱 하나를 내어 줬다. 그 문턱은 길목이면서 장부였고, 심문터이면서 애도선이었다. 잘못 넘으면 우리도 같은 빈칸으로 접힐 것이고, 제대로 건너면 숲이 숨긴 이름과 인간이 지운 줄이 한꺼번에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누구도 `길을 잃었다` 한 줄로 이 일을 덮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공식 금지와 비공식 초대를 동시에 쥔 채, 유리숲 안 첫 밤으로 들어갔다. 누가 우리를 부르는지 모른 채, 그래도 그 이름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정확히, 똑똑히, 틀리지 않게 전부 꼭 다시 한번 듣기 위해서.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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