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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의 피난민

제방 아래 흙홈은 사람 하나를 숨기기엔 겨우 맞았고, 여럿을 버티게 하기엔 턱없이 얕았다. 버드나무 뿌리가 진흙을 움켜쥔 틈마다 젖은 담요와 부러진 손수레 판자가 비스듬히 끼어 있었고, 그 밑으로는 약 냄새와 눅은 흙 냄새, 오래 젖은 종이 냄새가 눌어붙어 있었다. 위쪽 둑길은 바람이 길게 훑고 지나가는데, 아래 홈은 공기가 막혀 소리만 오래 남았다. 왼쪽 얕은 수로에서는 물이 경계석을 핥았고, 오른쪽 갈대숲은 사람보다 먼저 떨렸다.

세라는 사람들을 한데 뭉치지 않았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버드나무 뿌리 안쪽으로 밀어 넣고,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은 손수레 판자 뒤에 눕혔다. 혼자 두면 같은 말을 더 크게 토해 낼 사람은 서로 등지게 앉혔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았다. 검집 끝과 망토 자락, 손바닥이 향하는 방향만으로 위쪽 둑길 시선을 떼어 냈다. 누가 보호받는지보다 누가 먼저 들키는지를 따지는 손이었다.

브론은 손수레 둘을 다시 세웠다. 하나는 완전히 눕혀 가림막처럼 비스듬히 세우고, 다른 하나는 바퀴를 반쯤 틀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안쪽 끝까지 닿지 않게 막았다. 물통 둘은 사람들 발치가 아니라 홈 바깥쪽에 굴려 놓았다. 물이 먼저 보이면 여길 임시 구호칸으로 읽는다. 사람보다 짐이 먼저 눈에 걸리면 그 반대로 착각한다. 브론은 그 차이를 몸으로 아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사람 숨는 줄하고 물건 숨는 줄부터 갈라.”

그가 낮게 말했다.

“뒤엉키면 나중엔 누가 사람이고 누가 짐인지부터 꼬여.”

그는 담요 두 장을 펼쳐 바닥 위에 짧은 선을 만들었다. 왼쪽 담요에는 쓸 수 있는 물통, 젖은 붕대, 꼬리표, 부러진 경계목 조각을 올렸다. 오른쪽에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셋을 앉혔다. 홈 바닥은 같은 진흙인데도, 한 칸은 보관용으로 보이고 한 칸은 은신용으로 보이게 나뉘었다.

미리엘은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크게 신음하는 사람부터 보지 않았다. 먼저 무너질 사람부터 골랐다. 열이 올라 눈꺼풀이 떨리는 아이 하나, 멀쩡히 서 있는데도 발목에 힘이 풀린 노인 하나, 숨은 고르는데 시선이 자꾸 허공으로 미끄러지는 사내 하나.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눈 밑을 보고, 손목 떨림을 짚었다. 치료보다 순서를 가르는 손놀림이었다.

“물 한 모금씩만.”

미리엘이 말했다.

“많이 마시면 바로 토해요. 입만 적시고, 삼킨 뒤에 눈이 어디로 가는지 먼저 봐요.”

세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물통 입구를 손가락으로 반쯤 막아 양을 줄였다. 브론은 노인이 허리를 숙일 자리에 수레판을 더 받쳤다. 누구 하나 길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은 곧장 같은 쪽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위로 올릴 사람도, 안으로 밀어 넣을 물건도, 따로 붙들 증언도 한 홈 안에서 동시에 굴러가고 있었다.

리에트는 둑 위를 읽고 있었다. 갈대 끝이 한 번 눌렸다가 다시 선 자리, 진흙 위 발자국 간격, 멀리서 잠깐 비쳤다가 사라지는 흰 띠, 그보다 더 먼 곳의 말발굽 진동. 그녀는 고개를 크게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성도 둘. 먼저 내려온 정찰.”

잠깐 뒤, 그녀가 왼쪽을 더 짚었다.

“왕국 쪽 말 셋. 느려. 사절이다.”

마지막으로 숲 쪽을 봤다. 잎 그림자 사이로 가는 빛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화살촉이었다.

“숲 경계도 보고 있어.”

나는 제방 홈 안쪽을 다시 훑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는 대신 저마다 다른 공포를 쥔 채 허공만 보고 있었다. 어떤 노파는 담요 끝을 접었다 폈고, 어떤 사내는 자기 손목을 붙든 채 같은 자리를 문질렀다. 아이 하나는 젖은 헝겊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면서 입술만 달싹였다.

“열 번째 줄은 비워 둬.”

아이 옆의 여자가 중얼거렸다.

“둘째 칸은 건드리지 마.”

조금 떨어진 노인이 전혀 다른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서명칸 비었잖아.”

말은 달랐다. 그런데 손은 같았다. 노파는 담요 끝을 들어 올렸다가 접고 무릎 밑으로 밀어 넣었고, 사내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칸을 올렸다가 접고 밀어 넣었다. 아이는 헝겊 끈을 위로 당겼다가 접고 손바닥 안으로 숨겼다. 셋 다 같은 순서를 몸에 남긴 사람처럼 움직였다.

나는 그 손 순서를 눈으로만 세지 않았다. 노파 손끝이 어느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지는지, 사내 팔꿈치가 접힐 때 어깨가 먼저 굳는지, 아이가 끈을 숨긴 뒤 손을 몇 박자 늦게 펴는지까지 봤다. 사람은 다 다른데 몸에 남은 박자는 같았다. 누군가가 같은 절차를 각자 다른 이름으로 눌러 넣은 흔적이었다.

“세라.”

내가 낮게 부르자 그녀는 둑길을 한 번 더 훑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왜.”

“저 셋만 따로 앉혀.”

나는 말끝으로 노인과 아이, 왼쪽 벽에 기대 앉은 사내를 짚었다.

“같은 걸 봤어.”

세라는 묻지 않았다. 노인의 어깨를 밀고 아이 손목에서 헝겊 끈을 빼내 손수레 판자 뒤쪽으로 옮겼다. 사내는 내 옷자락을 붙잡으려다 세라 손바닥에 시선이 눌리자 그대로 따라왔다. 그녀는 셋을 붙여 놓지 않고 반걸음씩 거리를 벌려 앉혔다. 같은 말을 서로 듣고 더 크게 따라 하지 않게 하려는 배치였다.

브론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기준인데.”

“말이 아니라 손.”

나는 셋을 가리켰다.

“먼저 올리고, 접고, 안으로 밀어 넣어. 순서가 똑같아.”

브론은 얼굴보다 손목과 팔꿈치 각도만 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는 짧게 말하고 수레판 위에 작은 선을 셋 그었다. 위쪽 선은 사람이 숨는 자리, 아래쪽 선은 물건이 눕는 자리, 그 사이의 빈 틈은 손이 오가는 자리. 그 선 위에 피난민 셋의 손동작을 겹쳐 보듯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혀를 차지 않고도 얼굴이 더 굳어졌다.

“저건 기억이 아니라 절차가 남은 손이다.”

미리엘은 젖은 꼬리표 몇 장을 펼쳐 놓고 있었다. 성도 구호 매듭이 달린 짧은 종이 조각들이었다. 그녀는 사람 수를 세지 않았다. 끝번호와 칸폭만 봤다. 같은 숫자, 같은 길이, 같은 접은 자국. 그러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거 봐요.”

그녀가 꼬리표 둘을 겹쳤다.

“같은 번호예요.”

“같은 사람 거 아냐?”

세라가 물었다.

“아니요.”

미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매듭 방향도 다르고 종이 결도 달라요. 다른 사람한테 같은 끝번호를 돌려 쓴 거예요.”

브론이 곧장 꼬리표를 받아 들었다. 그는 글자보다 귀퉁이와 못 자국을 먼저 만졌다.

“이건 현장에서 급히 쓴 꼬리표가 아니다.”

그가 말했다.

“한 번 달았던 걸 떼어 다시 묶었어. 접은 자국이 두 겹이야.”

나는 꼬리표 끝을 뒤집어 봤다. 물에 불어 가장자리가 벌어진 종이 밑으로 더 옅은 먹선이 남아 있었다. 처음 적힌 이름칸이나 순번칸을 지우고 다른 손이 다른 사람한테 다시 붙였다는 뜻이었다. 구호가 아니라 분류. 치료가 아니라 회수. 같은 끝번호를 사람마다 돌려 썼다면, 이들은 애초에 각각의 이름으로 관리된 적도 없었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도 사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공에 없는 판을 들어 올리고, 접고, 가슴 쪽으로 밀어 넣었다.

“왜 위로 올렸지.”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었는데… 왜 위에…”

목소리는 끊겼지만 손은 끊기지 않았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다가 접혔고, 손가락 끝은 누가 없는 칸 가장자리를 더듬듯 떨렸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떠올리지 못하게 눌린 동작만 몸으로 다시 밟고 있었다.

리에트가 홈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아까부터 말없이 흙을 긁던 소년 하나가 손가락으로 사선 셋과 작은 원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린 뒤엔 꼭 원 바깥을 손바닥으로 한 번 문질렀다. 지우려는 것처럼. 감추려는 것처럼.

리에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 그림.”

그녀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누가 가르쳤어?”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원 옆을 두 번 두드렸다.

“뒤집어.”

아이가 중얼거렸다.

“안 그러면 안 맞아.”

리에트는 숨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로 땅에 그려진 사선 하나를 천천히 따라갔다.

“숲 바깥 우회 표시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외곽 구조선에서만 써.”

세라가 짧게 물었다.

“피난민이 우연히 흉내 낸 건 아니고?”

리에트는 고개를 저었다.

“선 길이가 달라. 본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못 지워.”

나는 소년 손톱 밑을 봤다. 진흙 사이에 유리 가루처럼 얇은 반짝임이 끼어 있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꼭 손끝을 옷에 닦았다. 흔적을 몸에서 떼어 내려는 사람처럼. 손등에는 얕은 긁힘도 있었다. 누군가 풀숲이 아니라 깨진 돌과 마른 판 사이를 기어 빠져나왔을 때 남는 상처였다.

그때 제방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명단을 정리할 때 쓰는, 끝을 올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기억 혼탁 구호 대상은 아래쪽부터 확인한다.”

성도 수거반이었다.

잠깐 뒤 다른 쪽에서 더 딱딱한 말이 덧붙었다.

“문서고 사고 연루자 접촉 금지. 현장 인원 정지.”

왕국 사절 쪽이었다.

둘은 다른 명분을 들었지만, 향하는 곳은 같았다.

세라가 입술을 한 번 적셨다. 벨로네 이름을 들이밀면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대신 피난민과 우리를 한 묶음으로 세우는 이름표가 될 것이다. 그녀는 결국 이름 대신 망토 끝을 들어 제방 홈 바깥 가장자리에 걸쳤다. 멀리서 보면 이 안에 사람이 더 적어 보이게, 그림자를 더 깊게 누르는 쪽을 골랐다.

“이름 쓰면 다 같이 묶여.”

브론은 손수레 판자를 한 번 더 세우며 콧숨을 뱉었다.

“위에서는 사람 수 세고, 아래서는 짐 수 세고, 숲은 누가 경계 넘는지 센다.”

말을 하며 그가 발끝으로 흙에 찍힌 못 자국을 문질렀다. 그러다 경계목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겉으로는 부러진 말뚝 조각 같았지만 안쪽 한 면이 이상하게 평평했다.

“봐.”

그가 내게 건넸다.

거기엔 오래된 밑못 자국 두 개와 얕은 홈이 남아 있었다.

“임시 표식이면 이렇게 안 깎여. 다른 데서 떼어 온 분류판이 섞인 거다.”

미리엘이 꼬리표 하나를 그 위에 겹쳐 댔다. 칸폭이 비슷했다. 정확히 같진 않아도 같은 손이 같은 자리를 나눌 때 생기는 간격이었다.

“사람을 세는 말이랑 길을 나누는 판이 한 자리에서 돌았던 거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구호가 아니라 분류예요.”

나는 제방 위쪽을 올려다봤다. 성도 수거반은 아직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긴 장대를 든 그림자가 갈대머리 사이로 한번씩 걸렸다. 왕국 사절 쪽에서는 말이 둔덕을 타고 비켜 서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우리를 바로 덮치기보다 자리를 닫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아래 숨칸에서 누가 먼저 튀어나오는지, 누가 먼저 물건을 챙기는지, 누가 먼저 이름을 대는지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성도 쪽 그림자는 들것보다 가벼운 갈고리봉을 먼저 들고 있었다. 사람을 부축하러 온 손이라기보다, 누운 사람 곁의 천과 끈부터 끌어당겨 안쪽 구조를 뒤집어 보는 손처럼 보였다. 왕국 사절 쪽은 그 반대였다. 말에서 바로 내리지 않고 둔덕 위에서 고삐를 반쯤 세운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누가 어디에 앉았는지, 누가 먼저 반응하는지, 우리 파티가 피난민과 얼마나 가까운지부터 재는 자세였다. 둘은 다른 얼굴을 들고 왔는데, 아래 홈을 읽는 방식만큼은 닮아 있었다.

숲 쪽은 더 노골적이었다. 화살촉 셋은 사람 가슴이 아니라 길목 높이에 걸려 있었다. 지금 쏘겠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더 안쪽으로 한 걸음만 들이면 경계 넘은 걸로 치겠다는 각도였다. 엘프들은 우리를 돕지도, 바로 몰아내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가 어떤 이유로 피난민과 함께 숲으로 기어들려는지, 누구 입에서 먼저 진실이 나오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오히려 성도와 왕국보다 더 숨 막혔다.

그때 아까 그 사내가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 줄은 위로 올리면 안 된다!”

목소리가 제방 위까지 튀었다. 둑길 쪽 갈대가 한 번 흔들렸고, 숲 쪽 화살촉도 더 선명하게 번뜩였다.

리에트가 사내 손이 가리킨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경계석 아래쪽 틈이었다.

“거기.”

나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경계석 틈에는 젖은 흙과 가는 뿌리, 유리처럼 굳은 흰 막이 엉겨 있었다. 손가락을 밀어 넣자 나무 조각 하나가 걸렸다. 꺼내 보니 부러진 경계목이 아니라 목패 반쪽이었다. 한쪽은 이름을 긁어 낸 듯 매끈했고, 다른 쪽에는 리에트가 그려 낸 것과 같은 외곽 구조 표식 절반이 남아 있었다.

목패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오래 젖었다 마른 나무 특유의 단단함이 있었고, 긁힌 이름 홈에는 손톱 끝이 걸릴 만큼 얕은 결이 남아 있었다. 누가 급히 부러뜨린 게 아니라, 한 번 걸어 두었던 걸 떼어 내고 다시 숨긴 물건 같았다. 이름을 없애는 데는 시간이 들고, 숨기는 데는 더 적은 시간이 든다. 그 차이가 그대로 표면에 남아 있었다.

리에트는 그걸 보는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차갑게 읽던 눈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안 보려 버티다가 결국 다시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같은 계열이야.”

그녀가 겨우 말했다.

“우리 원정대 외곽 구조선 표식. 실종 처리된 사람들 묶을 때 쓰던 변형이랑 같아.”

나는 그녀를 봤다. 리에트는 목패의 긁힌 이름 홈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너무 빨리 사라질까 봐 망설이는 손이었다.

“실종 처리?”

내가 묻자 그녀는 쓰게 웃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엔 그렇게 적혔지. 숲 안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몇은 사라지고, 몇은 돌아오다 죽었다고.”

그녀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지막 어절에서만 아주 조금 마찰이 났다. 그건 말보다 먼저 몸이 기억하는 소리였다. 리에트는 목패를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못이 빠졌다 다시 박힌 자국, 눌린 끈 자리, 가장자리의 얇은 녹색 얼룩. 그녀는 그 자국을 읽으며, 지금 손안의 반쪽이 자기 과거를 증명하는 물건이 아니라 자기 과거를 다시 끌어오려는 손의 흔적이라는 걸 알게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리엘이 목패와 피난민들을 번갈아 봤다.

“그런데 저 사람들 말투는…”

“같다.”

리에트가 이번엔 끊지 않고 말했다.

“이건 내가 실패했던 그날이랑 같은 방식이야.”

홈 안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누가 울지도 않았는데 울음 직전 같은 압박이 내려앉았다.

미리엘은 피난민 아이 손목을 다시 짚었다. 열보다, 상처보다, 같은 문장을 어느 박자로 잃고 어느 박자로 붙드는지 더 먼저 보는 눈이었다.

“열병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기억이 통째로 지워진 것도 아니고, 한 줄씩 접혀요. 같은 말만 남게.”

그녀는 사내 쪽을 가리켰다.

“왜 위로 올렸냐는 말도, 저 아이가 선을 그리고 지우는 것도, 다 같은 방향이에요. 자기 기억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누가 눌러 둔 순서를 몸이 따라 하는 거예요.”

미리엘은 말을 거기서 끊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살짝 펴서 손바닥 안쪽에 남은 눌림 자국을 보여 주고, 사내 손목 안쪽의 붉은 문지름 자국도 짚었다. 같은 자리를 자꾸 접고 쥐면 피부가 먼저 기억한다. 그녀는 그걸 말로 증명하기보다 손으로 보여 줬다. 아이가 손을 펴는 박자, 사내가 손목을 움켜쥐는 박자, 노파가 담요 끝을 접는 박자가 모두 같은 지점에서 한 번씩 멈춘다는 것도 그제야 보였다.

브론은 목패 반쪽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물 먹은 나뭇결 사이로 못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박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것도 뜯어냈다가 다시 쓴 거야.”

그가 말했다.

“이름 홈 긁어 내고 표식만 남겨 다시 박았지.”

그는 곧장 천 세 장을 펼쳤다. 첫째 천에는 목패 반쪽을, 둘째 천에는 젖은 꼬리표를, 셋째 천에는 경계목 조각을 올렸다. 같은 사건에서 나온 물건인데도 섞지 않았다. 사람 입에서 나온 증언과 종이에 남은 증언과 길 위에 남은 증언은 잡는 손부터 달라야 한다는 식이었다. 끈을 묶는 모양도 셋 다 달랐다. 하나는 두 번 접어 납작하게, 하나는 당기면 바로 풀리게, 하나는 손목에 감아도 헷갈리지 않게.

세라는 위쪽 둑길을 다시 확인했다. 성도 수거반 둘은 아직 직접 내려오진 않았지만 말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왕국 쪽 말발굽도 흙을 울렸다. 그때 숲 쪽에서 얇은 선 하나가 날아와 제방 위 흙에 박혔다.

푹.

경고 화살이었다. 깊지 않게 박혔지만, 발 하나만 더 내디디면 다음은 얕지 않겠다는 각도였다.

세라가 곧장 사람들 앞쪽으로 몸을 틀었다. 검을 뽑지 않고도 막아 서는 자세였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둘 다 묶여.”

그녀가 말했다.

“피난민도 우리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 사실이 혀보다 먼저 배를 눌렀다. 그래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순 없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급히 움직임 순서를 다시 짰다. 걸을 수 있는 둘은 버드나무 뿌리 바깥쪽 얕은 홈으로, 말을 반복하는 셋은 수레판 뒤 가장 어두운 쪽으로, 아이 둘은 미리엘 손이 바로 닿는 자리로. 브론은 수레 바퀴 하나를 더 굴려 놓아 둑길에서 보면 홈이 더 짧아 보이게 만들었다. 세라는 위에서 내려오는 시선이 먼저 걸릴 각도마다 몸을 옮겼다. 리에트는 숲 화살각이 어느 선을 넘으면 곧바로 쏠지 눈으로 재고 있었다. 나는 피난민 중 누가 짧은 지시를 이해하고 누가 이해하지 못하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브론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목패 반쪽, 구호 꼬리표, 경계목 조각을 천 세 장에 따로 감쌌다. 하나는 얇게, 하나는 짧게, 하나는 손만 넣어도 구분되게 매듭을 비틀었다.

“사람 증언, 문서 증언, 길 증언.”

그가 툭툭 끊어 말했다.

“섞이면 또 빼앗긴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문서고에서 한 번 겪은 일이었다. 사람만 빼앗기는 게 아니다. 말도, 이름도, 표식도, 나중엔 누가 뭘 봤는지 설명할 순서까지 빼앗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설명이 아니라, 무엇을 어느 손으로 남길지 정하는 일이었다.

미리엘은 피난민 둘에게 몸을 바짝 기울였다. 같은 말을 길게 되풀이하지 않았다.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짧은 말만 골랐다.

“위길 말고 아래길.”

그녀가 속삭였다.

“이름 말하지 말고 손목 잡기. 멈추면 눈감고 숨부터.”

이번 반복은 해설이 아니었다. 떨리는 몸에 박자를 다시 넣는 말이었다. 아이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자기 이름 대신 옆사람 손목을 먼저 찾았다. 노인은 담요 끝을 접던 손을 멈추고, 이번엔 미리엘 손가락을 따라 아래쪽 수로를 한 번 봤다. 지시가 길면 기억이 끊긴다. 짧은 말 두세 개만 몸에 남으면 그걸로 한 칸은 더 움직일 수 있다.

세라는 제방 바깥 흙에 발자국 둘을 일부러 더 남겼다. 아직 사람이 위에 더 있는 것처럼. 브론은 손수레 하나를 눕혀 제방 홈 앞을 막고, 다른 하나는 반쯤 세워 시야를 끊었다. 나는 아까 내 옷자락을 붙잡았던 사내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브론은 그 사이 물건 숨는 줄을 한 번 더 손봤다. 꼬리표를 감싼 천은 가장 안쪽에, 목패 반쪽은 허리 높이에서 바로 꺼낼 수 있는 자리에, 경계목 조각은 흙 묻은 장화 밑에 한 번 더 눌러 숨겼다. 성도 손이 먼저 뒤지면 종이부터 찾을 것이고, 왕국 손이 먼저 닿으면 목패를 먼저 낚아챌 것이다. 브론은 그 순서까지 계산한 얼굴이었다. 세라도 그 배치를 힐끗 보고는, 피난민 셋을 그 앞에 일부러 한 겹 더 겹쳐 앉혔다. 사람 그림자 뒤에 물건 그림자를 숨기는 식이었다.

그는 아직도 허공에 없는 칸을 접고 있었다.

나는 그 손가락을 천천히 아래로 눌렀다.

“위로 안 올린다.”

그에게만 들릴 만큼 말했다.

“지금은 아래로 숨긴다.”

사내 손끝 떨림이 아주 조금 약해졌다.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말을 더 크게 토해 내지는 않았다. 옆의 아이도 담요 끝을 움켜쥔 채 이번엔 선을 그리지 않고 미리엘 소매만 붙잡고 있었다.

그 작은 변화가 무슨 치료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정도면 됐다. 기억을 되돌리지 못해도, 다음 손이 끌고 가기 전에 한 박자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게 남는 증언이 된다.

리에트가 둑 위 흙에 박힌 경고 화살을 봤다. 그리고 숲 쪽 어둠을 향해 한 걸음 나갔다. 세라가 막으려 했지만 리에트는 손으로만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멈춰.”

숲 쪽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인간 말이었지만 결이 달랐다. 낱말 사이가 짧고, 경고보다 판정처럼 잘라 말했다.

리에트는 경고 화살 앞에서 멈췄다. 활을 겨눈 실루엣 셋이 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모습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화살 각도는 분명했다. 우리를 쏘기보다 피난민과 우리가 숲으로 더 들어오는지 재는 각도였다.

“그 표식을 어디서 얻었느냐.”

숲 쪽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리에트 손 안의 목패 반쪽이 젖은 빛을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사이로 뒤쪽에서는 성도 수거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고, 왕국 쪽 말발굽은 둔덕 위에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어느 쪽도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세라가 아주 낮게 말했다.

“리에트.”

더 재촉하지는 않았다. 리에트가 지금 넘어야 하는 게 숲 경계선 하나가 아니라 자기 과거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침묵이라는 걸 안 얼굴이었다. 그녀 손은 아직 검집에 머물렀지만, 몸은 반걸음 앞서 있었다. 숲이 활을 더 들면 막아설 준비를, 성도 수거반이 제방 아래를 먼저 뒤지면 곧장 내려꽂을 준비를 동시에 한 자세였다. 누구 편도 아닌 척 서 있으면서, 실제로는 우리 쪽 시간을 억지로 한 호흡 더 벌어 주는 서 있는 방식이었다.

미리엘은 피난민 둘의 손목을 서로 쥐게 했고, 브론은 마지막으로 손수레 바퀴를 발끝으로 밀어 제방 홈 그림자를 더 눌렀다. 나는 품 안쪽의 기록 튜브를 한 번 눌렀다. 로웬이 남긴 문장, 피난민이 남긴 끝번호, 목패에서 지워진 이름, 같은 손동작을 되풀이하는 몸, 숲 바깥까지 밀려난 오염선이 이제 따로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무얼 숨겼는지보다 먼저, 누가 누구를 어떤 줄로 묶어 옮겼는지가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리에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 표식을 마지막으로 본 날, 내 원정대가 사라졌어.”

숲 쪽 화살각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경계에서 증언으로 넘어가는 각도였다.

리에트는 목패를 더 높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가까이 끌어안듯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니까 들어야 해.”

그녀가 말했다.

“이건 숲 안에서만 끝난 일이 아니야.”

버드나무 아래 피난민들이 낮게 숨을 삼켰다. 성도 수거반 발소리는 더 또렷해졌고, 왕국 말은 둔덕 위에서 고삐를 당기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아직 유리숲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숲은 벌써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허가보다 먼저,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부터 말하라고.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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