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수된 연표
서명실 안쪽 낮은 문턱을 넘자 물이 허리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다. 방은 앞칸보다 길고 좁았다. 정면에는 둥근 축 두 개가 천장에 박힌 못에 매달린 채 반쯤 잠겨 있었고, 그 사이로 젖은 연표 막이 겹겹이 늘어졌다. 왼쪽 벽에는 원형 보관통이 세로로 박혀 있었고, 오른쪽에는 발췌본을 눌러 말리던 철판대가 비스듬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중앙 바닥은 겉으로는 넓어 보였지만, 물 밖으로 드러난 돌은 세 군데뿐이었다. 왼쪽 보관통 앞, 가운데 축 아래, 오른쪽 철판대 뒤. 나머지에는 물 아래 홈과 꺾인 턱이 숨어 있었다. 위에서 회수용 상자를 내려보내면 중앙 축 아래로 떨어질 테고, 안쪽 사람이 종이 묶음을 들고 빠져나가려면 오른쪽 철판대 뒤를 비집고 나와야 했다. 우리는 방을 읽기 전부터 두 길 사이에 끼어 있었다.
뒤에서는 왕궁 기록관과 성도 서기가 아직 서로 다른 명령을 외쳤다. 대표 응답, 입회 열람, 봉함 보전, 치료 봉사단 복귀 명령. 말은 위에서 내려왔지만 먼저 닿는 건 말이 아니었다. 천장 못에 감긴 낡은 끈이 당겨지는 소리, 금속 고리가 사다리 살을 긁는 소리, 젖은 종이 끝이 물 위를 스치며 떨리는 소리. 누군가 이미 이 방을 다시 접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턱에서 한 걸음만 들어간 뒤 멈췄다.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면 중앙 열람 자리를 막고, 좌우로 먼저 갈라지면 물 아래 홈에 발이 걸린다. 물살도 앞뒤로 흐르지 않았다. 왼쪽 보관통에서 중앙 축을 스치고, 다시 오른쪽 철판대로 비스듬히 빠졌다. 원형에서 발췌로, 발췌에서 삭제로 넘어가는 순서를 방 자체가 그리고 있었다.
"세라는 중앙 돌. 브론은 왼쪽 보관통. 미리엘은 축 아래 연표. 리에트는 오른쪽 철판대 뒤."
넷이 바로 흩어졌다. 세라는 중앙 돌에 발을 올리되 완전히 올라타지는 않았다. 검집 끝을 물 아래 홈에 반쯤 끼우고, 다른 발은 뒤 문턱 쪽에 남겨 뒀다. 위에서 뭐가 내려오든 그녀를 먼저 밀어야 하고, 그녀를 밀어도 홈에 걸린 검집 때문에 한 박자 더 늦어질 자리였다.
브론은 왼쪽 보관통에 바로 손을 넣지 않았다. 먼저 통 입구와 벽 사이 좁은 틈을 주먹등으로 눌렀다. 물이 어디로 먼저 빨려 들어가는지, 어느 고리가 젖은 종이를 붙들고 있는지부터 보았다. 리에트는 오른쪽 철판대 뒤에 몸을 낮추고 사다리 그림자와 물결을 함께 읽었다. 활을 크게 당길 자리는 없었다. 대신 어디서 금속이 먼저 울리는지 듣기엔 가장 좋은 사각지대였다.
미리엘은 축 아래에서 굳었다. 젖은 막 세 장이 한 축에 걸려 있었다. 앞장은 `정화 완료 연표`, 둘째 장은 `실종 및 봉함 전환표`, 셋째 장은 원형 대조 연표처럼 보였다. 표제는 익숙한 교본 말투였지만 칸 간격이 맞지 않았다. 열두 칸으로 맞춰 읽으면 가운데 한 자리만 손바닥 두 개쯤 비어 있었다.
그녀가 막 끝을 들어 올리다 말고 숨을 삼켰다.
"빈칸이 아니에요."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래도 손은 물러서지 않았다.
"있던 칸을 잘라 냈어요. 앞장만이 아니라, 셋 다 같은 폭이에요."
나는 막 가장자리를 따라 먹 번짐을 보았다. 한 장만 찢긴 자국이 아니었다. 앞장, 둘째 장, 셋째 장에 같은 너비로 세로로 잘려 나간 자리가 있었다. 누군가 이름 한 줄을 급히 지운 게 아니었다. 여러 장을 겹쳐 놓고 같은 틀로 한 칸 전체를 도려낸 흔적이었다.
브론이 철판대 아래에서 납작한 받침을 들었다. 물이 흘러내리자 안쪽 눌림 자국이 드러났다. 칼날이 미끄러진 흔적보다 같은 모양이 여러 번 눌린 자리가 더 또렷했다. 그는 손톱으로 눌림 가장자리를 긁어 젖은 종이 섬유를 떼어 냈다.
"급히 찢은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젖은 장을 겹쳐 눌러 놓고, 같은 틀로 천천히 뗀 자국이다. 절차를 아는 손이야."
그 말이 물보다 차갑게 들러붙었다. 이 방에서 사라진 건 실수나 혼란이 아니었다. 정해 둔 방식대로 여러 장을 겹치고, 같은 폭으로 눌러, 같은 자리를 통째로 비워 왔다.
미리엘은 앞장 표제 부분을 조금 더 걷었다. `열두 영웅 정화 완료 연표`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목보다 결손 폭이 먼저 보였다. `정화 실패`, `실종 전환`, `봉함 보류` 항목 아래에도 같은 세로칸이 빠져 있었다. 정화된 자, 사라진 자, 보류된 자를 서로 다른 장에 적어 두고, 가운데 같은 자리를 한꺼번에 잘라 낸 셈이었다.
셋째 장 가장자리에는 글자가 거의 죽어 있었다. 그래도 먹선 하나가 살아남았다. `13`이라는 숫자는 사라졌지만, 그 옆에 붙어 있었을 `계승`의 첫 획과 끝 삐침이 물결 사이에서 희미하게 버텼다.
나는 그 자리를 보는 순간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열세 번째 자리. 로웬이 남긴 조각, 엘레나 치료 명단에서 보인 이상한 지연, 내 직업이 반응할 때마다 나타나던 잔문양.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던 작은 어긋남이 같은 빈칸 아래로 모였다.
위쪽에서 금속 고리가 다시 부딪혔다. 이번엔 말보다 가까웠다. 왕궁 쪽은 대표 후보 확보를 외쳤고, 성도 쪽은 해석 입회 후 봉함을 외쳤다. 서로 다른 권한처럼 들렸지만 내려오는 물건은 같았다. 젖은 장을 낚아채기 좋은 얇은 고리와 끈.
세라는 고개만 들었다.
"온다."
그녀는 검집을 돌판 홈에 더 세게 밀었다. 얕은 바닥이 긁히며 맑던 물이 탁하게 뒤집혔다. 위에서 상자를 내려도 한 번에 앉히기 힘든 자리로 바뀌었다. 싸움이 칼끝이 아니라 발판과 종이 쪽으로 흐른다는 걸 세라는 누구보다 빨리 읽었다.
리에트가 철판대 뒤에서 손가락 둘을 폈다. 이어 세 번째 손가락을 반만 세웠다.
"둘은 위. 하나는 안쪽."
그녀는 사다리를 보지 않고 물결을 읽었다.
"위는 회수 상자. 안쪽은 손놀림이 가벼워. 묶음을 들고 빠지는 쪽은 아니야. 끝 장만 떼고 있어."
그 말에 나는 오른쪽 철판대 아래를 보았다. 물살이 거기서 아주 가늘게 갈라졌다. 누군가 방 안쪽에서 연표 한쪽 끝을 당겼다가 놓은 흔적이었다. 위쪽은 현장을 다시 접으러 오고, 안쪽은 필요한 줄만 먼저 빼내려 한다. 둘이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박자는 맞았다.
미리엘은 연표 막을 놓지 않은 채 세 장의 끝 번호를 맞췄다. 손끝이 떨렸지만 순서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성도 표제부터 읽었을 것이다. 지금은 표제보다 칸 폭, 끝 번호, 눌림 깊이를 먼저 봤다.
"셋 다 끝이 같아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정화 완료, 실종 전환, 원형 대조가 같은 자리예요. 말만 다르게 붙였어요."
그 말이 방 모양을 바꿔 놓았다. 여긴 기록 보관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여러 이름으로 접어 넣는 방이었다. 어떤 장에는 정화된 자로 남기고, 어떤 장에는 사라진 자로 빼고, 어떤 장에는 봉함 보류로 밀어 넣는다. 끝 번호는 같고 얼굴만 다르다.
물살도 그 사실을 거들었다. 왼쪽 보관통에서 들어온 물이 중앙 축 아래에서 한 번 멈칫하다가, 오른쪽 철판대 앞에서 가늘게 갈라졌다. 원형을 세우고, 일부만 발췌하고, 남은 것을 다시 눌러 다른 이름으로 넘기는 손놀림이 물길 속에 남아 있었다. 이 방을 만든 자들은 문서만 줄 세우지 않았다. 물과 발판과 사람 손이 움직이는 순서까지 맞춰 두었다.
브론은 보관통 안쪽에 손을 넣더니 작은 뼈단추 셋을 떼어 냈다. 단추 끝에는 오래된 칠이 남아 있었다. 하나에는 왕궁식 납빛, 하나에는 성도식 붉은 먹점, 마지막 하나에는 둘이 뒤섞인 갈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원형 막 하나만 빼는 통이 아니네."
그가 단추 간격을 재며 말했다.
"세 장을 겹친 채 돌려 읽게 만든 장치야. 밖으로 한 줄만 빼가려면 겹친 순서를 알아야 해."
그는 단추 하나를 다시 구멍에 끼웠다가 비틀어 빼 보였다. 앞에서는 그냥 묶는 장치였지만 안쪽 홈은 서로 다른 높이로 파여 있었다. 첫 홈에 걸면 원형 막이 먼저 돌고, 둘째 홈에 걸면 발췌 막이 반 박자 늦게 따라온다. 셋째 홈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얕았다. 그런데 그 얕은 홈에 걸린 줄만 가장 오래 남아 있었다. 누군가 마지막 보류 기록을 끝까지 붙잡아 두려 했다는 흔적이었다.
로웬 헤일이 떠올랐다. 서명실에서 건진 첫 장 조각. 북하단 비교 열람, 공동 서명 보류. 그는 밖에서 어림짐작으로 경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방을 실제로 읽고, 그중 먼저 살려야 할 한 줄을 떼어 밖으로 내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오른쪽 철판대 아래에서 리에트가 젖은 종이 조각 하나를 건져 올렸다. 얇고 작아서 금방 풀어질 것 같았지만, 번진 먹 한가운데 살아남은 문장 첫머리가 있었다.
"여기."
나는 품 안의 첫 장과 그녀가 내민 조각을 맞댔다. 끊겨 있던 끝 번호가 이어지고, 죽어 있던 문장이 다시 숨을 얻었다.
`북하단 비교 열람 후 상행 금지`
`현장 보류`
미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교 열람자는 위로 바로 못 올라갔어요."
그녀는 조각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보고 대상이 아니라 현장에 묶인 사람이에요. 위로 올리면 안 되는 줄에 있었어요."
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곧장 바꿔 읽었다. 로웬은 표 전체를 훔쳐 달아난 사람이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면 다시 접힐 한 줄을 현장에 붙들어 두려 한 사람. 그래서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고 했고, 그래서 엘레나의 치료 명단과 내 봉인 문양을 같은 위험 속에 놓았다.
조각 가장자리에는 물에 불은 섬유가 한쪽으로만 눌려 있었다. 밖에서 떠내려온 파편이 아니었다. 원래 긴 장의 옆구리였던 부분이 억지로 뜯겨 나온 자국이었다. 리에트는 그 결을 보고 철판대 아래 물높이를 가리켰다.
"숨기려면 더 깊이 밀었을 거야. 이건 놓친 거야. 아니면 일부러 눈에 띄게 눌렀거나."
세라가 위쪽 사다리를 보며 짧게 물었다.
"로웬이?"
"아마도."
나는 조각을 품 안 첫 장 사이에 끼우며 답했다.
"전부 들고 나갈 수 없으니, 나중에 누가 줄을 다시 잇도록 남긴 거겠지."
세라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그녀는 왕궁이 부르는 대표 후보였다. 위로 올라가면 밝은 방에서 이름을 얻는다. 여기에 남으면 젖은 방에서 공동으로 삭제한 흔적을 본 목격자가 된다.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는 너무 분명했다. 그런데 세라는 검집을 빼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이름 하나만 챙기고 나가면 안 되겠네."
말투는 담담했지만 중앙 돌에 얹은 발이 더 깊이 박혔다. 그녀는 위쪽에서 내세울 얼굴이 되는 길을 스스로 늦췄다. 그 선택 하나로 파티 전체가 다시 한 줄에 묶였다.
이번에는 위에서 상자 끄는 소리가 먼저 내려왔다. 젖은 나무가 계단 턱을 긁는 소리, 금속 고리가 사다리 살을 때리는 소리. 회수대는 설득하러 오는 게 아니었다. 다시 분류하러 오고 있었다.
브론이 보관통 단추 셋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한쪽이 이 방을 혼자 썼으면 칠이 이렇게 섞이지 않아. 왕궁 통에 성도 단추가 박히고, 성도 막에 왕궁식 납빛이 묻었어."
그는 단추를 얕은 홈에 하나씩 다시 꽂았다.
"저 위가 말로는 서로 싸우지만, 여기 아래 손놀림은 서로 박자를 맞췄다."
미리엘은 그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앞장 성도 표제를 다시 보았다. 눈은 흔들렸지만 읽는 순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성도 문장이 진짜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진짜 문장 하나만 먼저 보여 주면, 다른 손들은 빠져나가요. 여기서는 누가 썼는지만이 아니라, 누가 같은 줄을 눌렀는지도 봐야 해요."
그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반박이기도 했다. 미리엘은 성도 문장이 나오면 가장 먼저 자기 죄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반응을 멈추고, 문장이 걸린 틀을 보았다. 믿음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믿음을 더는 남의 손에 맡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리에트가 오른쪽 철판대 위로 살짝 올라온 고리를 겨눴다. 화살촉은 사람 목이 아니라 고리와 끈 사이를 향했다. 위쪽 손이 문서를 낚아채려는 순간 끈을 끊으면, 상자는 중앙 돌 위에 바로 앉지 못한다.
"한 번만 늦출게."
"죽이지 마."
내 말에 리에트가 짧게 콧숨을 뺐다.
"사람을 맞힐 자리도 없어. 끈이 더 시끄러워."
화살이 물 위를 낮게 갈랐다. 고리와 끈을 잇던 부분이 끊기며 위쪽 상자가 사다리 턱에 걸렸다. 나무가 비틀리고 금속이 크게 울렸다. 곧바로 위에서 욕설이 터졌지만, 우리에게는 그 한 박자면 충분했다.
세라는 검집으로 중앙 물살을 비틀어 상자 바닥이 내려앉을 자리 주변을 더 탁하게 만들었다. 브론은 보관통 단추를 원형, 발췌, 보류 순으로 다시 걸었다. 힘으로 뜯으면 먼저 발췌 막이 찢기고, 원형과 보류 쪽 줄은 잠깐 더 남는 순서였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포기해야 하는지 저들에게 강제로 묻는 잠금이었다.
나는 미리엘 옆으로 붙었다. 세 장의 결손은 같은 폭이었지만, 아래쪽 먹 번짐은 미세하게 달랐다. 앞장은 지운 뒤 말린 흔적이 많았고, 둘째 장은 물에 한 번 더 담근 흔적이 있었다. 셋째 장은 끝부분만 거칠게 눌려 있었다. 원형은 남겼고, 발췌는 다시 적셨고, 보류는 급히 붙잡았다. 로웬이 손댄 건 마지막 쪽일 가능성이 컸다.
"미리엘. 끝 번호만 따로 외워. 표제는 버려."
그녀가 나를 보았다.
"표제를 버리면, 제가 배운 분류가 다 흔들려요."
"그래도 끝 번호는 남아."
나는 물 아래 홈을 가리켰다.
"저들이 이름을 바꿔도 끝 번호는 같은 자리로 내려와. 네가 지금 붙들 건 교본 문구가 아니라 같은 끝 번호야."
미리엘은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가가 붉었지만 대답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화 완료. 실종 전환. 봉함 보류. 원형 대조. 끝 번호 H-13."
그녀는 한 번 더 반복했다. 이번에는 더 낮고 또렷했다.
"H-13. 잘린 열세 번째 칸."
그 순간 내 봉인 문양이 손목 안쪽에서 미세하게 따끔거렸다. 빛이 터진 건 아니었다. 물속 차가운 돌에 손을 댔을 때처럼 얇은 통증이 올라왔다. 문양은 방금 전까지 잿빛 첫 장에만 반응했지만, 이번엔 연표 막과 바닥 홈 사이에서 동시에 울었다.
브론이 바로 눈치챘다.
"또 반응하냐?"
나는 손목을 물속에 눌러 넣어 감췄다.
"크진 않아. 하지만 같은 번호에 닿았어."
세라가 위쪽을 노려보던 눈을 아주 조금 돌렸다.
"그럼 더 빨리 움직여. 저들이 네 손목까지 보면 줄이 아니라 사람부터 가져가려 할 거다."
그 말은 정확했다. 왕궁은 세라를 얼굴로 세우려 하고, 성도는 미리엘을 복귀시켜 입을 막으려 한다. 내 문양이 여기서 반응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 나는 보호 인계라는 말로 따로 묶일 것이다. 파티가 찢기면 이 방은 다시 한쪽 조각만 남긴 채 조용해진다.
나는 숨을 짧게 끊었다.
"따로 뛰지 않는다."
브론이 단추를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미리엘은 끝 번호 위에서 손을 멈췄고, 리에트는 끊어진 고리 너머 두 번째 끈을 겨눴다. 세라는 중앙 돌에서 반 걸음만 뒤로 물러나 통로를 만들었다.
"브론은 잠금. 미리엘은 끝 번호. 리에트는 안쪽 손. 세라는 위쪽 상자. 나는 잘린 칸과 문틀을 본다. 한 명이 장을 들고 뛰면 저들이 원하는 그림이 돼. 우리는 줄 전체를 움직인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네 사람은 이미 움직였다.
브론은 보관통을 완전히 닫지 않고 반쯤만 잠갔다. 위쪽 회수대가 뜯으려면 힘을 두 번 써야 하는 상태였다. 미리엘은 젖은 끝 번호를 소리 내지 않고 입 안에서 굴리며 첫 장 조각을 품 안의 방수천 사이에 끼웠다. 리에트는 오른쪽 세로 홈 안쪽 어둠을 겨눴다. 누군가 종이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다시 나면, 손이 아니라 종이 끝을 끊을 각도였다.
세라는 중앙에서 검집을 빼지 않고 나를 보았다. 그 눈에는 질문이 있었다. 조각을 지키고 물러날지, 더 안쪽으로 들어갈지.
위쪽 상자는 이미 턱 하나를 넘어왔다. 성도 서기는 미리엘을 부르는 말투를 명령형으로 바꾸었고, 왕궁 기록관은 세라를 대표 후보가 아니라 벨로네 경이라고 불렀다. 예우가 한 단계 높아질수록 붙잡는 손도 가까워졌다.
나는 잘린 열세 번째 칸을 다시 보았다. 정화, 실종, 봉함, 원형. 네 가지 말이 같은 끝 번호 아래로 모이고, 그 가운데 계승이라는 말의 첫 획만 남았다. 엘레나의 치료 명단도, 로웬의 보류 조각도, 내 손목 문양도 이제 같은 칸을 가리켰다. 한 장만 들고 나가면 한쪽만 범인으로 몰린다. 표 전체를 봐야 했다.
철판대 아래에는 아직 읽지 않은 작은 흔적들이 더 남아 있었다. 물이 빠지는 홈 바닥에 엷은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고, 그 위로 희미한 흰 가루가 엉겨 있었다. 미리엘이 손끝으로 가루를 떠 물 위에 풀었다. 성도 치료실에서 붕대 끝을 굳힐 때 쓰는 말린 잎가루였다. 전투 기록 방에 있을 냄새가 아니었다. 치료 명단이 이 연표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엘레나 같은 환자 명단도 여기로 내려왔을 거예요."
미리엘은 그 말을 할 때 나를 보지 않았다. 나를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약초 가루, 끝 번호, 잘린 칸을 한꺼번에 읽어 낸 결론이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치료 대기라고 적힌 사람이, 다른 장에서는 실종 전환으로 접힐 수 있어요. 보호라는 말도 같은 끝 번호 아래로 내려가면, 밖에서는 아무도 못 알아봐요."
나는 품 안의 첫 장을 더 세게 눌렀다. 엘레나를 떠올리면 곧장 뛰고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 뛰면 앞에 있는 사람은 놓치고, 뒤에 남은 표는 회수 상자에 들어간다. 동생을 구하는 길과 방금 본 줄 전체를 붙드는 길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같은 방향이었다. 한쪽 이름만 붙잡으면 엘레나도 다시 다른 이름 아래 접힐 테니까.
브론은 철판대 옆 작은 홈에 단추 하나를 더 끼웠다. 그것은 잠금이 아니라 표식이었다. 위쪽 손이 상자를 내려도 그 단추가 먼저 걸려, 발췌 막 가장자리에 새로운 긁힘을 남긴다. 누가 힘으로 뜯었는지 나중에라도 알 수 있게 만드는 작은 장치였다.
"전부 못 지키면 흔적이라도 남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리에트는 안쪽 문틀 너머로 화살촉을 낮췄다. 그녀가 겨누는 곳은 사람 다리도, 문 손잡이도 아니었다. 원문 통을 안고 지나가려면 반드시 닿는 둥근 돌턱이었다. 화살 하나가 거기 박히면 통을 든 사람은 몸을 비틀어야 하고, 그 틈에 젖은 막 끝이 돌에 쓸린다. 우리는 적을 잡기보다 빠져나가는 원문에 새로운 흔적을 남길 방법까지 생각해야 했다.
세라는 위쪽 사다리 그림자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왕궁이 그녀에게 던지는 예우는 점점 부드러워졌고, 부드러운 말일수록 더 질겼다. 벨로네 경, 대표 후보, 안전한 상층 입회. 그녀는 그 말을 모두 뒤에 둔 채 중앙 돌에서 빠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위로 올라갈 명분이 많은 사람이, 가장 젖은 자리에서 우리 발판을 붙들었다.
그제야 결정이 선명해졌다. 이 방에서 우리가 고를 건 문서 한 장이 아니었다. 누가 자기 이름을 어디에 두고, 누구의 이름을 물속에 남길 것인가였다.
"안쪽으로 간다."
내가 말했다.
"로웬이 현장에 묶은 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누가 보류를 걸었는지, 왜 열세 번째 칸을 같은 폭으로 잘랐는지, 그 답이 다음 칸에 남아 있을 거야."
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은 그대로였지만, 눈동자가 도망치지 않았다.
"제가 끝 번호를 들고 갈게요. 장을 전부 들고 가는 건 무리예요. 대신 같은 번호가 다음 표에 나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어요."
브론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을 덜어 내는 소리였다.
"좋아. 종이는 여기서 버티게 하고, 사람은 번호를 들고 가자."
세라는 그 말을 듣고 중앙 돌에서 몸을 낮췄다. 검집 끝으로 물 아래 홈을 한 번 더 긁자 검은 먹 찌꺼기가 위로 떠올랐다. 상자 바닥이 닿을 자리 주변이 더 미끄럽게 변했다. 그녀는 우리 앞을 막아 주는 방패가 아니라, 위쪽 회수대가 가장 빨리 내려올 길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앞줄이었다.
리에트가 오른쪽으로 먼저 미끄러졌다. 몸이 물을 가르는데도 소리는 작았다. 그녀는 사각 끝에서 안쪽 문틀을 가리켰다. 금속 문고리가 두 번 울었다. 사람 손이 문을 닫은 소리가 아니라, 젖은 원문 통이 문턱에 부딪힌 소리였다.
"안쪽 손, 아직 멀리 못 갔어."
"쫓지 마."
나는 바로 말했다.
"길을 끊어. 원문을 들고 도망치게 두면 끝이다. 하지만 사람만 잡아도 표가 찢기면 끝이야."
리에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틀 오른쪽 낮은 홈으로 들어갔다. 몸을 낮춰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원문 통이 지나가는 높이를 먼저 막았다. 활이 아니라 어깨와 무릎으로 홈을 좁히는 움직임이었다.
브론은 마지막으로 뼈단추 셋을 눌러 보았다. 단추는 잘 버텼다. 하지만 위쪽에서 상자에 두 번만 더 힘을 주면 발췌 막은 뜯겨 나갈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손을 떼었다.
"여기 남으면 다 잃어. 들어가."
미리엘은 끝 번호를 한 번 더 낮게 되뇌었다. H-13. 북하단 비교 열람. 상행 금지. 현장 보류. 이제 그 말들은 한 사람의 죄를 가리키는 문장이 아니라, 우리 다섯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줄이었다.
나는 손목의 통증을 눌러 삼켰다. 문양이 알려 주는 건 길이 아니라 위험이었다. 위험이 한쪽으로 몰릴 때마다 우리는 같이 움직여야 한다. 누구 하나가 대표 후보가 되고, 누구 하나가 복귀 대상이 되고, 누구 하나가 보호 인계 대상이 되는 순간, 표 전체는 다시 물속으로 접힐 것이다.
위에서 상자가 떨어지듯 내려왔다. 세라가 검집을 들어 상자 모서리를 직접 치는 대신, 물 아래 홈의 물살을 비틀었다. 상자는 중앙 돌에 반듯하게 앉지 못하고 옆으로 밀렸다. 금속 고리가 물속으로 빠지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위쪽 발들이 순간 멈췄다.
그 한 박자에 우리는 움직였다. 리에트가 오른쪽 홈을 열고, 브론이 왼쪽 보관통에서 손을 떼며 뒤를 막고, 미리엘이 끝 번호를 품고, 세라가 중앙에서 위쪽 시선을 묶었다. 나는 잘린 열세 번째 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안쪽 낮은 문틀로 몸을 숙였다.
문틀 바로 앞, 물 아래에는 다른 곳보다 거친 돌턱이 있었다. 발을 빨리 빼면 발목을 잡고, 천천히 넘으면 뒤에서 상자가 닿는다. 나는 먼저 손바닥으로 턱을 짚어 깊이를 재고, 미리엘이 밟을 자리만 발끝으로 긁어 표시했다. 브론은 내 어깨 뒤에서 보관통 잠금이 버티는 소리를 세었고, 리에트는 안쪽 그림자에 꽂힌 화살이 원문 통을 비켜 가는지 확인했다. 세라는 마지막까지 중앙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방을 떠나는 순간에도 위쪽 손이 누구 이름부터 부르는지 듣고, 그 부름이 어느 쪽으로 바뀌는지 기억하려는 자세였다.
오늘 우리가 들고 나가는 건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정화된 사람, 사라진 사람, 격리된 사람, 보류된 사람이 같은 끝 번호 아래로 내려왔다는 사실. 그리고 로웬이 그 줄을 완전히 훔친 게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 다시 잇도록 현장에 붙들어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뒤에서 상자 고리가 다시 끌렸다. 앞에서는 금속 문고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위는 현장을 접으려 하고, 안쪽은 원문을 빼내려 한다. 우리는 그 틈으로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한 박자씩 빼앗아 들어갔다.
나는 물을 가르며 더 안쪽 칸으로 몸을 낮췄다. 반쪽 얼굴만 남기는 방을 뒤에 두고, 같은 줄을 끝까지 눌렀던 손을 찾으러.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