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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범인

침수 연표실 안쪽 목을 지나자 물 냄새가 한 번 더 짙어졌다. 바로 앞칸이 젖은 사슬과 썩은 나무 냄새를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눌러 둔 잉크가 다시 불어 오른 비린내가 먼저 올라왔다. 통로는 더 비좁았다. 왼쪽에는 무릎 높이에서 어깨 높이까지 낮은 선반이 층층이 박혀 있었고, 그 위에 반쯤 젖은 원문 막과 금속 눌림자가 비뚤게 기대어 있었다. 오른쪽 세로 홈들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검은 먹물을 고여 두고 있었다. 정면 바닥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날 폭으로 솟았다가 두 걸음 앞에서 다시 꺼졌다. 위에서 끌차를 밀고 내려오려면 그 등성이를 밟아야 했고, 안쪽에서 원문 통을 안고 빠져나가려면 오른쪽 세로 홈을 비집고 나와야 했다.

선반마다 홈 깊이가 조금씩 달랐다. 아래칸은 두꺼운 원문 통을 눕혀 재우는 자리였고, 눈높이쯤 되는 칸은 펼친 막을 잠깐 걸어 말리거나 끝번호를 맞춰 보는 자리처럼 보였다. 선반 귀퉁이마다 젖은 종이를 밀어 넣다 남은 섬유가 엉겨 붙어 있었고, 몇몇 홈에는 같은 폭으로 문질린 납빛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세로 홈도 그냥 숨칸이 아니었다. 안쪽 돌벽에 가는 긁힘이 세로로 겹쳐 있어, 누군가 원문 통을 몸에 붙인 채 여러 번 빠져나간 길이라는 게 한눈에 읽혔다. 물은 바닥 전체에 고인 게 아니라 등성이 양옆 얕은 홈을 따라 느리게 돌았다. 종이를 젖게만 두는 물길이 아니라, 떨어진 먹과 잘린 섬유를 한쪽으로 몰아 보내는 물길이었다.

이 칸은 장부를 읽는 방이 아니었다. 위로 올릴 줄과 안쪽으로 감출 줄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병목이었다.

나는 입구에서 길을 훑었다.

"세라는 중앙 등성이. 리에트는 오른쪽 홈. 브론은 왼쪽 선반. 미리엘은 정면 표제부터."

말이 떨어지자 네 사람이 흩어졌다. 세라는 중앙 등성이 위로 올라가 검집 끝을 낮게 세웠다. 사람 배를 겨누는 높이가 아니라 바퀴와 상자 바닥을 비틀기 좋은 높이였다. 브론은 왼쪽 선반으로 붙어 물에 잠긴 눌림자와 봉함판부터 손등으로 밀어 봤다. 리에트는 오른쪽 세로 홈 앞에 몸을 낮추고 귀를 먼저 기울였다. 미리엘만 정면 쇠못에 걸린 젖은 막 둘을 보다가 잠깐 숨을 멈췄다.

위에서는 여전히 사람 말이 내려왔다. 대표 응답, 복귀 의무, 상층 보관, 현장 입회. 그런데 먼저 닿는 건 말이 아니었다. 금속 고리가 사다리 살을 긁는 소리, 봉함 상자 끈이 젖은 돌을 스치는 소리, 끌차 바퀴가 턱을 넘다 한 번 걸리는 둔탁한 박자. 살아남은 사람을 찾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어떤 장을 먼저 다시 접어 갈지 정해 놓은 손놀림이었다.

더 안쪽에서는 사람 발보다 먼저 종이 한 장이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짧고 얇았다. 누군가 젖은 원문 끝을 급히 말아 쥐었다 놓는 소리였다.

리에트가 곧장 속삭였다.

"안쪽에 아직 있다. 사람보다 문서 먼저 움직여."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정면 막 끝을 들어 올렸다. 앞장 표제는 번졌는데도 읽혔다.

`봉인국 삭제 명령 원문`

그 아래 둘째 장에는 `정화 실패자 격리 지침`이 남아 있었다. 두 표제는 다른 문장인데 끝번호 칸은 같은 높이에 매달려 있었다. 미리엘은 막 아랫부분을 조금 더 들춰 같은 줄 아래 눌린 숫자까지 확인했다. 첫 장 끝번호는 `H-13-보류`, 둘째 장은 `G-7-격리`처럼 보였지만, 눌림 간격과 칸 폭은 오히려 같은 틀에서 뽑힌 것처럼 같았다. 다른 문서를 같은 받침에 걸어 같은 높이로 보관했다는 뜻이었다. 미리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래도 놓지는 않았다.

쇠못 옆 얇은 돌판에는 상행 허가칸과 현장 보류칸이 같은 높이로 파여 있었다. 허가칸 쪽은 여러 번 뽑혔다 다시 꽂힌 듯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고, 보류칸 쪽은 젖은 종이가 오래 눌려 생긴 섬유막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문장을 읽기 전에 먼저 어느 칸에 걸렸는지를 보고 분류했을 터였다. 같은 죄라도 어느 칸에 먼저 걸리느냐에 따라 살아남는 얼굴이 달라지는 자리였다.

그 순간 오른쪽 물웅덩이에서 검은 번짐이 둥글게 모였다. 불에 그을린 장부 조각이 먼저 떠올랐고, 젖은 먹선이 그 조각들을 묶어 잠깐 사람 윤곽을 만들었다. 어깨선쯤 되는 잉크막, 반쯤 젖은 서명란, 물 위에서 기울어지는 종잇조각 몇 장. 세드릭 베인이었다. 완전한 사람 형상이 아니었다. 물과 잉크와 젖은 기록이 억지로 한 목소리를 흉내 내는 모양새였다.

"늦었군."

낮고 느린 소리였다. 설명보다 유도에 가까운 목소리. 그는 우리를 보는 척하면서도, 우리가 무엇부터 보게 될지 먼저 골라 놓은 얼굴이었다.

세드릭은 물 위 장부 조각 하나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 붉은 먹점이 먼저 눈에 띄었다. 성도 봉인국 검인. 그 아래에는 `삭제 집행 후 상층 재기안`, `정화 실패자 격리 우선`, `기록 봉함 후 외부 차단` 같은 줄이 남아 있었다. 성도 책임으로 읽히기 좋은 문장들만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또렷한 줄 주위가 오히려 수상했다. 검인 아래 빈 여백은 물을 먹어 번졌는데, 문제의 문장들만 누군가 손톱으로 문질러 막 새로 드러낸 것처럼 먹빛이 선명했다. 잘 보이라고 남겨 둔 줄이었다. 반대로 아래쪽 세부 집행칸과 오른편 귀속 여백은 젖은 종잇조각이 일부러 달라붙은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읽는 눈이 자연스럽게 성도 검인과 봉인국 문장만 따라가게 만든 셈이었다.

미리엘이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저 표현들은 그녀가 교본과 실무 장부에서 여러 번 본 말들이었다. 낯선 위조가 아니었다. 진짜였다. 그래서 더 깊게 찔렀다.

세드릭은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장부를 한 번 더 기울였다.

"너희가 찾는 죄는 이미 적혀 있다. 살린다던 손이 지웠지. 더 묻을 게 남았나?"

너무 쉬운 문장이었다. 한쪽을 붙잡으면 바로 분노할 수 있는 말. 나는 장부보다 장부가 걸린 자리를 먼저 봤다. `봉인국 삭제 명령 원문`의 집행 칸은 남아 있는데, 상행 최종 승인칸만 유독 비어 있었다. `정화 실패자 격리 지침`은 성도 문체가 맞는데 종이 폭은 왕궁 보관함 규격과 더 잘 맞았다. 누군가 읽는 방향을 한쪽으로 꺾어 둔 냄새가 짙었다.

미리엘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장부를 더 읽고도 분노보다 먼저 미간을 좁혔다.

"문장은 맞아요."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너무 곧바로 읽혀요. 누가 지웠는지는 보이는데, 누가 이걸 써먹었는지는 비어 있어요."

세드릭 형상이 조금 흔들렸다. 물 위로 묶여 있던 먹선 한 줄이 풀리다가 다시 조각 둘레를 감았다. 그는 다른 조각을 밀어 올렸다. 이번에는 `격리 대상 상층 재분류`, `정화 실패자 외부 차단`, `보류 기록 봉함`이 보였다. 여전히 한쪽으로 기운 줄만 먼저 살아 있었다.

세라는 중앙 등성이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한쪽만 들고 나가면, 뒤쪽 줄은 또 잠긴다."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방 안 공기가 다시 정리됐다. 위에서는 상자 끌리는 소리가 한 계단 더 가까워졌고, 안쪽 세로 홈에서는 종이 마찰이 다시 났다. 누군가는 여기서 우리가 성도 탓만 붙잡고 멈추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줄은 안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리에트가 오른쪽 세로 홈 안쪽 어둠을 읽고 말했다.

"숨은 멈췄는데 종이는 안 멈춰. 안쪽 손이 아직 정리 중이야."

그제야 브론이 선반 위 젖은 귀퉁이 하나를 떼어 냈다. 그냥 잘린 종이처럼 보였지만, 그는 안쪽 둥근 눌림부터 봤다. 이어 금속 눌림자를 하나 들어 막 가장자리에 맞춰 보았다. 눌림자 폭이 성도 문서 폭보다 미묘하게 넓었다. 브론은 젖은 귀퉁이를 선반 턱에 세우고, 눌림자를 그 위에 얹은 뒤, 손톱으로 섬유 눌린 결을 따라 천천히 밀었다. 그러자 찢긴 가장자리 안쪽에서 둥근 먹 자국이 반 칸쯤 더 이어졌다. 처음에는 성도 검인 하나가 눌렸다가, 그 위를 더 넓은 틀이 덮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그는 아예 선반 아래 박힌 쇠못 간격까지 재듯 훑었다. 왼쪽 두 못 사이는 성도 문서 한 장 폭과 맞았지만, 세 번째 못부터는 반 칸이 더 벌어져 있었다. 장 하나를 걸어 두는 선반이 아니라 잘라 낸 장을 다시 넓은 틀에 받쳐 눌러 두는 선반이었다. 브론 손끝이 젖은 철판을 한 번 두드리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얇은 막을 눌러 말리는 판이 아니라 압인을 받을 때 바닥을 받치는 금속턱이었다.

"이거, 성도 절단만으로 안 끝났네."

그가 낮게 말했다.

"한 번 잘라 놓고 나중에 다른 틀에 다시 끼웠어. 왕가식 압인 받침 폭이야. 승인칸 통째로 덮기 좋게 생겼다."

나는 EP56에서 본 반쪽 압흔을 떠올렸다. 왕가 인장 반원과 성도 검인 반달이 같은 줄 양끝에 남아 있던 흔적. 그때는 함께 눌렀다는 사실만 보였다면, 지금은 역할까지 읽혔다. 성도 문장으로 줄을 정리한 다음, 왕가 보관 규격으로 최종 귀속을 눌러 덮는 손. 하나가 쓰고 다른 하나가 잠근다.

세드릭은 그 지점에서 말을 비틀려 했다.

"왕은 늘 늦는다. 지우는 손은 여기 있었지."

그는 성도 검인이 또렷한 장만 앞으로 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조급함이 더 드러났다. 우리가 봐야 할 줄에서 다시 시선을 떼어 놓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미리엘이 처음으로 세드릭을 똑바로 봤다. 두려움이 사라진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를 믿고 읽지 않았다. 틀린 문서를 내미는 자가 아니라, 맞는 조각만 먼저 내미는 자로 보고 있었다.

"여기 적힌 죄가 거짓이라는 말은 안 해요."

미리엘이 젖은 막을 붙든 채 말했다.

"하지만 이 장부만 보면 누가 마지막에 이득을 챙겼는지가 싹 빠져 있어요. 당신은 그 빈칸을 안 보여 줘요."

세드릭 형상의 어깨가 물 위에서 천천히 퍼졌다. 그는 웃는지 번지는지 구분되지 않는 얼굴로 침묵했다. 대신 물 위 장부 조각 하나가 뒤집히며 아래쪽 비워진 칸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집행 손, 격리 손, 보류 손이 따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최종 귀속 칸만 텅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칸 주위는 오히려 너무 잘 보존돼 있었다. 젖은 종이라면 먼저 뭉개져야 할 모서리가 얇게 눌린 채 살아 있었고, 그 위로 아주 가는 납빛 가루가 눌어붙어 있었다. 누군가 그 자리를 비워 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올려 둔 채 오래 눌렀다가 마지막에만 떼어 냈다는 뜻이었다. 세드릭이 굳이 그 칸을 뒤집어 보여 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성도 줄만 쫓는 눈에는 `비어 있다`로 보이겠지만, 틀을 읽는 눈에는 `마지막 손이 일부러 지워졌다`로 보이게 만드는 자리. 그는 여전히 우리를 속이는 대신 방향만 틀어 놓고 있었다.

브론이 그 빈칸 가장자리를 손등으로 눌렀다.

"비운 게 아니라 가린 거다."

그는 선반에 박힌 금속턱을 가리켰다.

"이 폭이면 절단 뒤 바로 다시 받쳐 끼울 수 있어. 성도 문서 위에 왕가식 보관 규격을 씌운 거야. 문장만 읽으면 성도 짓이고, 틀까지 읽으면 둘이 같이 눌렀다."

위쪽 사다리에서는 끌차 바퀴가 중앙 등성이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세라는 검집 끝으로 얕은 물을 비틀었다. 맑게 가라앉아 있던 바닥이 한순간 검게 뒤집혔다. 상자를 안정적으로 세우려면 한 박자 더 걸릴 자리로 바뀌었다.

그 틈을 벌린 뒤에야 리에트가 다시 몸을 기울였다. 오른쪽 세로 홈 끝을 더 깊게 읽고, 반 박자 늦춰 말했다.

"안쪽 손 하나. 무게는 가볍다. 통 하나만 들었어. 위랑 엇갈려 빠질 생각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세로 홈 입구 돌기둥과 위쪽 등성이 사이 거리를 다시 재듯 봤다. 사람이 맨손으로 달아나면 등성이를 돌아 나와야 하지만, 원문 통 하나만 안고 있으면 오른쪽 홈 안에서 몸을 반쯤 틀어 돌기둥을 스치며 빠질 수 있었다. 대신 그 길은 어깨가 아니라 팔꿈치와 손목이 먼저 나가야 했다. 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속도를 내지 못한다. 세라는 위쪽을 반 박자만 더 늦추면 되고, 리에트는 안쪽 손이 몸을 비트는 순간 소리로 먼저 잡을 수 있다. 브론이 들고 있는 귀퉁이 조각과 미리엘이 읽은 끝번호만 붙들면, 우리는 말보다 물증을 먼저 다음 칸으로 넘길 수 있었다.

이 칸의 병목이 눈앞에서 또렷해졌다. 위쪽은 우리가 붙잡은 성도 장부를 다시 회수하려 하고, 안쪽은 공동 줄을 증명할 원문 통을 들고 빠져나가려 한다. 다른 길을 쓰는 것처럼 보여도 결과는 같았다. 한 장짜리 범인만 남기고 줄 전체는 없애는 것.

나는 브론이 건넨 귀퉁이 조각을 받아 물에 번진 결을 봤다. 절단선 안쪽 종이섬유가 둥글게 눌려 있었다. 먼저 잘리고, 그다음 다른 틀에 다시 끼워진 자국이었다. 거기에 남은 희미한 납빛이 EP56 반쪽 압흔의 방향과 맞았다. 왕가 인장 반원은 위로 들려 나가기 좋은 쪽에, 성도 검인 반달은 아래에서 눌러 남기기 좋은 쪽에 찍혀 있었다.

한쪽이 앞면을 만들고, 다른 한쪽이 그 앞면이 마지막 얼굴이 되게 잠갔다.

"반쪽짜리 범인으로 끝내려는 거야."

내가 낮게 말했다.

말이 방 안을 가로지르자 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세라는 중앙 등성이 위에서 위쪽 회수대를 막고 있었고, 브론은 선반 귀퉁이를 손아귀에 감쌌고, 리에트는 세로 홈 끝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각자 다른 줄을 붙잡고 있었는데도 이번에는 같은 결론으로 모였다.

"성도는 죄인이야."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성도만 죄인인 것처럼 남기게 만든 손이 따로 있어. 우리가 한 장만 챙기면 저 위 뜻대로 끝난다."

내 시선은 방 안 물건들을 한 번씩 다시 훑었다. 위쪽 끌차 길에는 봉함 상자 끈이 먼저 내려와 있었고, 중앙 등성이 바닥에는 바퀴가 미끄러지며 남긴 반원 흠이 여러 겹 겹쳐 있었다. 그 반원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만 찍히지 않았다. 어떤 자국은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려 올라간 흔적이었고, 어떤 자국은 다시 위로 회수되다 등성이 턱에서 비틀린 흔적이었다. 삭제와 보관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안쪽에서 잘라 내고, 위에서 공식 보관으로 덮고, 다시 필요할 때 일부만 끌어다 얼굴처럼 내미는 절차가 같은 바닥 위를 오래 오갔다.

왼쪽 선반 위에는 같은 폭의 눌림자 셋이 포개져 있었는데, 맨 아래 것은 성도 검인 폭에 맞고 위 두 개는 그보다 넓었다. 오른쪽 세로 홈 입구 돌기둥에는 손바닥이 아니라 팔꿈치 높이에서 번진 먹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문서를 숨기는 사람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것처럼 통을 끌어안고 비틀어 나갔을 것이다. 정면 막 아래 허가칸과 보류칸이 같은 높이에 파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죄를 정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느 얼굴을 먼저 위로 올릴지 고르는 자리. 그걸 보고 나니 세드릭이 왜 성도 줄만 먼저 건졌는지도 더 또렷해졌다.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여기서 분노의 방향까지 관리해 왔다.

미리엘이 숨을 한 번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지는 사람의 끄덕임이 아니었다. 자기 조직의 죄를 인정한 채, 그 죄를 누가 어떻게 덮어 썼는지까지 보겠다는 끄덕임이었다.

그녀는 젖은 막 끝을 다시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끝번호 칸 네 모서리를 차례로 눌렀다. 종이가 물을 먹어 흐물거렸는데도, 눌린 자리마다 미세하게 다른 높이가 잡혔다. 한쪽은 성도식 검인 손이 눌러 납작했고, 다른 한쪽은 더 넓은 받침이 깔렸다가 뽑힌 자국처럼 살짝 살아 있었다. 미리엘은 그 높이 차를 읽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다음 말을 거의 확신처럼 내놓았다.

"공동 서명 보류 첫 장이랑 번호가 이어져요."

그녀가 브론 손의 귀퉁이를 가리켰다.

"로웬이 남긴 줄이에요. 다음 칸에 남은 건 성도 죄 설명이 아니라, 같이 눌린 원문일 거예요."

브론은 귀퉁이를 접지 않고 손바닥 위에 평평하게 올렸다. 손등과 젖은 종이 사이로 금속 눌림자 하나가 반쯤 비쳤다.

"이건 내가 든다. 위에서 낚아채도 승인칸 끝은 못 가리게."

세라는 중앙에서 반 걸음만 물러섰다. 후퇴가 아니라 길을 다시 나누는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검집을 완전히 빼지 않은 채 위쪽 끌차가 바로 내려앉지 못할 각도를 남겼고, 동시에 우리가 안쪽 세로 홈으로 파고들 틈도 열었다. 사람을 막는 방패가 아니라 통로를 정하는 앞줄이었다.

리에트는 이미 오른쪽 어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통 든 놈, 아직 멀리 못 갔어."

사람을 죽이려는 발걸음이 아니라 증거를 빼돌리려는 발걸음. 그게 더 급했다.

위에서는 대표 응답을 다시 외쳤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는 아예 다른 말처럼 들렸다. 응답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한쪽 얼굴만 공식 답으로 굳히려는 소리였다.

나는 미리엘이 읽은 성도 원문, 브론이 찾아낸 왕가식 받침, EP56에서 본 반쪽 압흔을 머릿속에서 한 줄로 겹쳤다. 누구 죄가 더 크냐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같은 죄를 완성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간다."

내 말에 리에트가 먼저 오른쪽 세로 홈으로 미끄러졌다. 세라는 중앙에서 검집 끝으로 바퀴 길을 한 번 더 틀어 위쪽 회수대 박자를 늦췄다. 브론은 왕가식 압인 패턴이 남은 귀퉁이와 눌림자를 움켜쥐고 내 뒤를 붙었다. 미리엘은 젖은 원문 표제 끝번호를 입 안에서 작게 되뇌며 바로 뒤를 따랐다.

세라가 물러선 반 걸음은 그대로 길표가 됐다. 그녀가 등성이 끝을 비켜 준 순간 오른쪽 세로 홈 입구와 중앙 바닥 사이에 사람 하나가 비집고 지날 폭이 딱 생겼다. 반대로 위쪽 끌차는 그 폭 때문에 더는 곧장 내려오지 못했다. 바퀴가 틀어진 채 한 번 더 물을 헛디뎌야 했다. 세라는 칼을 뽑지 않고도 위쪽 줄의 박자를 붙들고 있었다. 뒤를 막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만 잘라 내는 식이었다.

브론은 귀퉁이 조각을 젖은 천 대신 자기 손바닥과 금속 눌림자 사이에 끼워 눌렀다. 종이가 더 퍼지지 않게 하려는 손놀림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선반 턱을 짚고 몸을 틀 때마다 눌림자 모서리가 귀퉁이 끝을 지켜 주는 게 보였다. 미리엘은 그런 브론 옆에서 끝번호를 낮게 이어 읽었다. `보류`, `격리`, `상행`, `귀속`. 그녀는 뜻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칸이 어느 줄과 이어지는지만 계속 확인했다. 지금 필요한 건 분노의 해설이 아니라 다음 칸에서 무엇을 먼저 낚아채야 하는지 아는 일이었다.

우리는 뛰지 않았다. 이 좁은 칸에서는 먼저 줄을 놓치는 쪽이 끝장이었다. 리에트가 앞에서 어둠을 열고, 세라가 뒤 박자를 묶고, 브론이 물리 증거를 붙들고, 미리엘이 번호를 잇고, 나는 그 줄들을 한 방향으로 몰았다.

세드릭은 더는 길을 막지 않았다. 그는 물 위에 반쯤 퍼진 채 우리가 안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도 한 장에 분노하고 끝내는 대신, 그 분노를 누가 어떻게 설계했는지까지 쫓아가는 선택. 그 길이 그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의 형상 가장자리에서는 젖은 장부 조각 몇 장이 다시 느리게 풀리고 있었다. 얼굴처럼 보이던 먹선이 무너지자 아래에 깔린 조각 배열이 잠깐 드러났다. 성도 검인 쪽 조각이 위에, 빈 귀속칸 쪽 조각이 아래에 놓여 있었다. 우연히 떠오른 배치가 아니었다. 세드릭조차 자기 몸을 만들 때 어느 줄을 먼저 보이게 할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더 확신했다. 이 방의 모든 것은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보다 먼저, 어떤 얼굴을 먼저 믿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위에서 내려온 끌차 바퀴가 다시 한 번 헛돌았다. 금속 테가 젖은 등성이 끝을 긁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 끊겼고, 누군가 짧게 욕설을 삼키는 숨이 섞였다. 세라가 벌어 준 반 박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 틈이 닫히기 전에 안쪽 칸으로 밀어 넣어야 할 건 단순한 사람 몸이 아니었다. 브론 손의 귀퉁이, 미리엘 머릿속 끝번호, 내가 읽은 압흔 방향, 리에트가 붙든 소리의 거리. 흩어지면 아무 의미 없는 조각들이지만, 다음 칸까지 함께 들고 가면 한 줄로 맞물릴 증거들이었다.

안쪽 세로 홈 끝에서 원문 통이 돌기둥을 한 번 더 스쳤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 마찰음에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단단히 잠근 나무통이라면 그렇게 얇게 울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급히 감은 원문 막을 통 안에 밀어 넣은 뒤 봉함끈도 제대로 죄지 못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돌기둥을 스칠 때마다 통 속에서 젖은 종이가 한 번 더 뒤집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안쪽 손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는지를 먼저 읽었다. 완성된 보관품이 아니라, 막 숨기려다 우리 때문에 급히 뽑아 든 물건. 그렇다면 다음 칸에 닿기 전 다시 눌러 맞추는 짧은 멈춤이 반드시 생긴다.

세로 홈 바닥에는 물이 깊지 않았지만, 발을 잘못 디디면 소리가 길게 이어질 만큼 끈적했다. 리에트는 그걸 알았는지 가장 마른 돌기둥 그늘만 밟아 나갔다. 나는 그 발뒤꿈치가 만드는 거의 들리지 않는 박자를 따라 몸을 낮췄다. 뒤에서는 브론이 금속 눌림자를 서로 부딪치지 않게 손가락 마디 사이에 끼웠고, 미리엘은 젖은 막 끝에서 본 끝번호를 숨처럼 잘게 끊어 되뇌었다. 세라는 한 번 더 위쪽 사다리 쪽 물을 틀어,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바퀴가 같은 자리를 헛돌게 만들었다. 다섯 사람이 각자 다른 물건을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지키는 건 하나였다. 누가 죄를 지었는지의 설명이 아니라, 그 죄가 어떻게 한 줄로 묶여 살아남았는지 보여 줄 원문.

나는 젖은 돌벽을 스치며 몸을 낮췄다.

돌벽 표면에도 같은 손버릇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 세 마디 간격으로 번진 먹자국, 봉함끈이 스치며 남긴 가는 선, 통을 벽에 한 번 기대고 다시 들어 올릴 때 생긴 둥근 눌림. 안쪽 손은 이 길을 처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문서를 숨기고, 같은 방식으로 위쪽 회수대와 박자를 맞춰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칸에는 우연히 쌓인 혼란이 아니라, 공동 줄을 다시 눌러 맞추는 자리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다.

오늘 붙잡아야 할 건 성도의 죄를 증명하는 한 장이 아니었다. 성도의 죄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는 공동 서명을 접어 감추던 한 줄 전체였다. 로웬이 끝내 놓치지 않으려 했던 줄도 아마 그 한가운데 있을 터였다.

그 줄이 남아 있는 다음 칸으로, 우리는 한 박자씩 빼앗으며 들어갔다.

뒤에서는 아직도 대표 응답을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이제 그 말은 우리 등을 붙잡지 못했다. 앞에서 리에트가 잡는 소리, 옆에서 미리엘이 잇는 번호, 뒤에서 세라가 끊는 박자, 손안에서 브론이 지켜 내는 귀퉁이가 더 믿을 만했다. 말보다 물건이 먼저 진실을 드러내는 곳에서, 우리는 그 물건들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칸을 선점하러 갔다. 다음 칸 문턱에 닿기만 하면, 반쪽짜리 범인으로는 더는 이 줄을 덮지 못할 터였다. 이제 남은 건 먼저 손을 거는 일이었다. 딱 그뿐이었다. 그래서 더 서둘렀다. 숨도 아꼈다. 끝까지 밀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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