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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엘의 맹목이 깨질 때

둘째 대체열을 빠져나온 뒤의 오름칸은 계단이라기보다 물과 발소리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틈 같았다. 왼쪽 벽엔 검은 수위선이 칸마다 다른 높이로 끊겨 있었고, 오른쪽엔 손바닥만 한 점검 홈과 잘린 인장초 자국이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위쪽에선 종이 뭉치를 옮기는 마른 마찰음과 금속 장식이 난간을 스치는 소리가 얇게 내려왔고, 아래쪽에선 아직도 물이 돌턱을 핥듯 올라왔다. 한 번만 멈춰도 발등이 젖을 자리였다.

계단 폭은 넓지 않았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없고, 둘이 어깨를 붙이면 셋째는 난간 밖으로 반쯤 걸쳐야 했다. 왼쪽 벽 수위선은 셋째 칸에서 한 번 꺾였고 일곱째 칸 아래에서 다시 얇아졌다. 물이 한 번에 차오른 게 아니라,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오래 걸렸다는 뜻이었다. 오른쪽 점검 홈은 높이가 제각각이었지만 끝번호처럼 보이는 얕은 홈만은 모두 같은 각도로 깎여 있었다.

미리엘은 셋째 칸에서 몸을 낮췄다. 성도 교본을 읽을 때 보던 차분한 손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 손끝은 큰분류를 찾지 않았다. 맨 아래 끝번호가 찍힌 홈, 안쪽 줄을 숨긴 작은 점, 그다음 눌림칸부터 더듬었다. 내가 보기엔 순서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그런데 그 거꾸로가 아니면 손이 맞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교본을 떠올리는 얼굴이 아니라, 머릿속에 박힌 순서를 스스로 뜯어내는 얼굴이었다. 첫 홈을 짚을 때는 손끝이 망설였지만 둘째 홈에서부터는 오히려 빨라졌다. 잘못 배운 사람이 아니라, 너무 오래 같은 틀에 갇혀 있다가 이제서야 진짜 모양을 다시 읽기 시작한 사람 같았다.

"여기예요."

그녀가 거의 숨처럼 말했다.

"큰분류부터 읽으면 계속 바깥만 돌아요. 끝번호부터 잡아야 안쪽 검인칸으로 이어져요."

브론이 한 칸 아래에서 코로 짧게 숨을 뱉었다.

"배운 대로 하면 길이 막히고, 거꾸로 읽어야 들어간다?"

"길을 숨긴 게 아니에요. 읽는 사람을 바깥에 세워 둔 거죠."

미리엘은 마지막 홈을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돌벽 안쪽에서 아주 얇은 걸림 하나가 풀렸다. 눈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계단 옆 눌린 틈이 손톱 두께만큼 벌어졌고, 그 안에서 탁한 공기가 한 번 밀려 나왔다.

위쪽에선 발소리가 세 갈래로 겹쳤다. 리에트가 뒤를 보지 않은 채 손가락 둘을 펼쳤다. 둘째 줄, 셋째 줄. 왕궁 기록관과 성도 서기, 그 뒤를 따르는 기사단 부관. 누가 먼저 아래까지 내려오느냐보다, 누가 먼저 자기 순서를 들이밀 것이냐가 더 중요했다.

"기록관은 바깥 모서리 밟아."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성도 쪽은 젖기 싫어해서 안쪽 난간만 타. 기사단은 두 칸씩 짧게 내려와."

"누가 제일 먼저 소리치지?"

내가 물었다.

"성도."

리에트는 바로 답했다.

"기록관은 이름부터 챙겨. 성도는 줄부터 닫아."

그 말은 곧 우리가 어느 소리를 먼저 이용할 수 있는지를 뜻했다. 성도는 규정을 앞세워 미리엘을 붙들 것이고, 기록관은 대표 후보를 핑계 삼아 세라를 위로 끌어올릴 것이다. 둘이 서로 먼저라고 다투는 동안만 우리가 안쪽 줄을 읽을 시간이 생긴다.

세라는 우리보다 두 칸 위에 서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기면 가장 먼저 걸릴 자리를 일부러 고른 것이다. 접견, 대표 후보, 응답. 위쪽 절차가 다시 세라 이름부터 부르는 순간, 그 박자를 늦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검집 끈을 한 번 더 조여 매고 발끝 위치를 바꿨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오른발은 마른 돌 모서리에, 왼발은 젖은 난간 가까이에 뒀다. 위쪽에서 누가 내려와도 한 손으로 검집을 걸고 다른 손으로 난간을 잡을 수 있는 자세였다. 막겠다는 말보다 훨씬 믿을 만한 준비였다.

"내가 여기서 끊어 줄게."

그녀는 앞을 본 채 말했다.

"너희는 안쪽만 봐."

덧붙는 설명은 없었다. 그래서 더 실무 같았다. 누가 누구를 믿느냐보다, 누가 어느 줄을 먼저 막느냐만 남은 말이었다.

나는 오름칸 오른쪽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눌린 틈 안쪽엔 좁은 검인칸이 숨어 있었다. 정면엔 가로로 긴 철살 장부걸이가 있고, 왼편엔 얇은 목패 수십 장이 끈에 묶인 채 걸려 있었다. 오른편엔 납작한 검인대와 봉함침 상자가 있었고, 벽 아래엔 회색 종루 보관함에서 보던 흐린 약호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이 칸은 오래 머무는 사람보다 오래 지우는 손이 더 자주 드나든 자리처럼 보였다. 장부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너무 자주 갈아 끼워 흔적이 얇아진 자리였다.

장부걸이는 셋줄이었다. 바깥줄엔 굵은 제목이 붙은 표장들이 가지런했고, 안쪽 둘째 줄부터는 제목보다 번호가 먼저 박혀 있었다. 가장 안쪽 쇠살 밑엔 물에 불어 모서리가 휘어진 종잇조각들이 들러붙어 있었는데, 손으로 떼면 바로 부서질 만큼 얇아졌다. 정리하던 사람이 일부러 남긴 찌꺼기가 아니라, 급히 뜯어낸 뒤 제대로 쓸어내지 못한 흔적 같았다.

검인대 앞쪽엔 봉함침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넓적한 납추 둘, 반쯤 녹아 뭉친 검은 밀랍 덩어리, 인장이 찍히기 전 줄을 맞추는 얇은 목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브론은 그걸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단순 검인만 한 게 아니네. 줄 맞추고 눌러 옮겼어."

그는 목자를 뒤집어 끝면을 살폈다.

"이 끝 눌림 봐. 상자 안에서 맞춘 게 아니라, 밖에서 이미 섞인 문서를 여기로 가져와 다시 같은 줄로 묶었단 소리야."

브론이 목패 묶음을 먼저 만졌다. 손톱 끝으로 끈 묶인 자리를 두 번 훑더니 작은 홈 하나를 가리켰다.

"보이지?"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회색 종루 보관함이랑 같은 손이다. 끈 눌러 묶고, 마지막에 오른쪽으로 한 번 비껴 긁어. 정리만 한 게 아니야. 여기까지 같은 손이 내려왔어."

나는 검인대 위 젖은 장을 펼쳤다. 머리글보다 굵은 금지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봉인 서고 접근 금지.`

그 아래엔 더 촘촘한 줄이 이어졌다.

`회색 종루 계열 비교 열람 금지.`

`내부 대조 미승인 사본 즉시 소거.`

`하층 보관군 원본 열람은 지정 입회자 동반 시에만 허용.`

문장은 짧았지만 배치가 묘했다. 위험한 물건을 막는 느낌보다, 서로 닿는 순간 이어지는 줄을 안쪽 사람이 먼저 알지 못하게 자르는 문장처럼 보였다. 금지는 서고 전체에 걸리지 않았다. `비교 열람`에 걸려 있었다. 한 장씩 보는 건 놔두되, 둘을 같은 눈앞에 두는 순간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문장 오른편엔 작은 원표가 세 줄로 이어져 있었다. 첫 줄엔 성도 검인, 둘째 줄엔 왕궁 열람 허가, 셋째 줄엔 `외부 반응자 입회 불가`라는 짧은 부호. 서로 다른 기관 도장이 차례로 눌린 자국이 아니라, 처음부터 빈칸을 셋 마련해 놓고 각 줄이 빠짐없이 채워져야만 내려보낼 수 있게 만든 양식이었다. 위험해서 봉인한 문서가 아니라, 어디까지 누구 손을 거쳐야 안전하게 묻히는지 계산해 둔 문서였다.

미리엘이 그 줄 아래 찍힌 작은 부호를 보고 손을 멈췄다.

"여기 봐요."

그녀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더 낮았다.

"정화, 치유, 해석. 항목은 갈라 놨는데 검인 줄은 하나예요."

정말 그랬다. 왼쪽엔 `정화 집행`, 오른쪽엔 `치유 협조`, 맨 끝엔 `해석 입회`라 따로 적혀 있었지만, 그 아래 받침선은 끊기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보기 좋게 나눈 항목이 아니라, 같은 손이 이름표만 갈아 끼울 수 있게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리에트가 검인칸 문 밖 돌바닥을 한 번 짚었다. 젖지 않은 발자국이 있었다. 다른 발은 없었다. 같은 자리를 세 번 밟고 돌아간 흔적.

"확인하러 내려오는 발이야."

그녀가 말했다.

"찾는 발이 아니라, 지워야 할 장이 그대로 있는지 보는 발."

그 한마디로 방 공기가 더 탁해졌다. 성도가 무얼 숨기느냐보다, 얼마나 자주 여기까지 내려와 그 숨김을 손으로 다시 눌렀느냐가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리에트는 그 흔적 옆에 남은 마른 흙가루를 손끝으로 비볐다.

"위쪽 회랑 먼지랑 달라."

그녀는 손끝을 코 가까이 가져갔다가 바로 털어 냈다.

"한 번은 바깥에서 내려왔고, 두 번은 안쪽에서 올라왔다. 정리하러 오는 놈이 안쪽 줄도 안다는 뜻이야."

브론은 검인칸 오른쪽 상자를 뒤졌다. 봉함침 아래 깔린 얇은 목패 두 장이 더 나왔다. 하나엔 `회색 종루 계열`, 다른 하나엔 `외부 반응 문서군`이라 적혀 있었는데 둘 다 끝번호가 같았다.

"끝번호가 같아."

그가 혀를 찼다.

"종루, 외부 반응, 하층 대조. 이름은 셋인데 보관칸은 하나라는 뜻이지."

그는 목패를 겹쳐 보더니 더 작은 홈을 찾아냈다. 겉면이 아니라 목패 모서리 안쪽에 세로 흠집이 하나씩 나 있었다. 같은 문서군을 다른 이름으로 나눠 보관할 때 안쪽 사람이 다시 맞춰 볼 표식이었다.

"겉으론 갈라 놓고 안쪽에선 다시 붙인다."

브론이 말했다.

"처음부터 섞였다는 걸 아는 놈들만 읽게 해 둔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검인칸 뒤 반원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벽에 세 갈래 홈이 파여 있었다. 왼쪽엔 `치유 집행`, 오른쪽엔 `격리 대기`, 정면엔 `해석 입회`. 서로 다른 방으로 보내는 표지처럼 써 놨지만 발밑 받침판은 한 장의 돌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만 갈라 보이는 길이었다.

우린 반원실로 몸을 옮겼다. 중앙엔 허벅지 높이 열람대가 있고, 왼쪽 홈엔 젖은 띠장부가 끼워져 있었고, 오른쪽엔 사슬로 묶인 얇은 봉서 두 장이 걸려 있었다. 정면 좁은 칸표엔 문장보다 번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원실은 생각보다 정교했다. 세 갈래 홈 깊이는 모두 달랐는데, 사람이 서서 읽기 편한 높이는 정면 해석 홈뿐이었다. 왼쪽 치유 집행 홈은 허리를 굽혀야 했고, 오른쪽 격리 대기 홈은 몸을 비틀어야만 내용이 보였다. 겉으론 세 절차가 나란한 듯해도, 실제로는 해석 입회가 가장 먼저 내용을 확인하도록 짜여 있었다.

열람대 윗면엔 물때 말고도 작은 눌림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장부 한 권을 펼칠 자리, 봉서를 얹어 둘 자리, 그리고 오른손 엄지로 종이 모서리를 누르던 습관 자리. 같은 사람이 오래 앉아 같은 자세로 읽은 흔적이었다. 한 번 검인하고 지나간 방이 아니라, 반복해서 같은 번호대를 대조하던 방이었다.

미리엘이 왼쪽 띠장부를 뽑아 펼쳤다. 종이는 물을 먹었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정화 실패자 임시 격리.`

`직계 보호 대상 동반 금지.`

`해석 입회자 없는 치유 집행 보류.`

`문장 왜독자 동일 대기선 편입.`

마지막 줄에서 미리엘 손이 굳었다. `정화 실패자`와 `문장 왜독자`가 같은 번호대 아래 묶여 있었다. 몸이 병든 사람과 문장을 틀리게 읽은 사람을 같은 대기선에 넣는 장부였다.

세라가 세 갈래 홈을 한 번에 훑었다.

"말은 셋인데 바닥은 하나네."

그녀가 말했다.

"치유도, 격리도, 해석도 결국 같은 판 위에서 굴렸다는 거지."

브론은 오른쪽 봉서를 들춰 보더니 표정을 더 찌푸렸다.

"여기도 비슷해. `입회 없는 가족 면담 불허.` `대표 응답 확보 후 집행.` 사람 살리는 줄이 아니라 사람을 순서대로 접는 줄이야."

그는 봉서 뒤쪽 얇은 종이까지 펼쳐 보였다. 앞면엔 `보호`와 `협조` 같은 말만 있었는데, 뒤쪽엔 누가 먼저 대답하고 누가 끝까지 곁에 남지 못하는지가 더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후보 대표 응답 미확보 시 집행 연기`, `외부 증언자 입실 제한`, `직계 보호 대상 단독 이송 대비`. 생명을 살리는 절차가 아니라, 사람과 증언과 물건을 따로 떼어 옮길 순서를 정한 표였다.

엘레나 이름이 적힌 장부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더 끔찍했다. 이름이 없어도, 어떤 사람을 어디까지 끌어당길 수 있는지는 이미 구조로 완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나 얼굴이 떠오른 건 그 뒤였다. 성도 접견실에서 손등을 소매 안으로 감추고 괜찮다고 웃던 얼굴. 저 장부는 그 웃음을 먼저 읽고 쓰인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열람대 가장자리의 눌린 홈을 문질렀다. 왕궁 족쇄 문장에서 보던 손버릇과 같았다. 조항을 길게 적지 않아도 어느 줄을 먼저 잡아야 사람이 움직이는지 아는 손. 왕궁은 후원이라 쓰고, 성도는 협조라 쓰고, 귀족은 명예라 썼다. 하지만 이 아래로 내려오면 전부 같은 돌판 위에 놓였다.

정면 해석 홈 아래엔 더 작은 숫자 틀이 있었다. `입회`, `대조`, `보류`, `재기록`. 칼로 긁어 덧쓴 자국이 많았다. 누가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를 정한 뒤, 다시 누가 그 읽은 내용을 정본으로 적을 수 있는지까지 여기서 갈랐다는 뜻이었다. 문서를 숨긴 것만이 아니었다. 누가 진실을 입에 올릴 권리를 얻는지까지 번호로 잘라 놓고 있었다.

미리엘은 그 돌판 앞에 앉은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장부를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오래 붙어 있던 문장 하나를 떼어 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미리엘은 늘 성도와 교리를 따로 떼어 말하지 않았다. 불만은 품어도, 해석이 어긋났다고 여겨도, 끝내 어디엔가 사람을 살리려는 뜻은 남아 있다고 믿는 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 손끝은 그 믿음이 머무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교본엔 이런 줄이 없어요."

그녀가 겨우 말했다.

"정화 실패자와 왜독자를 같이 묶는 번호 이동선도, 끝번호를 먼저 잡는 부호도, 전부 없어요."

"생략한 거냐?"

브론이 물었다.

미리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생략이면 빈칸이 보여야 해요. 이건 빈칸이 아니에요."

그녀는 문장 아래 숫자 홈을 차례로 짚었다.

"읽는 순서를 바꿔 놓은 거예요. 큰분류부터 내려오게. 그러면 위쪽 열람선에서 정리문만 돌고, 안쪽 원본군으로 이어지는 끝번호 줄은 못 봐요. 저는 그걸... 그냥 해독 방식이라고 배웠어요."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젖은 장부를 다시 덮고, 정면 칸표와 오른쪽 봉서, 왼쪽 띠장부 번호를 한 줄씩 맞춰 봤다. 셋은 겉제목이 달랐지만 끝자리 두 칸이 같았다. 치유와 격리와 해석이 같은 곳으로 흘러간다는 건 문장만이 아니었다. 번호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었다.

"봐요."

미리엘이 떨리는 손으로 세 장을 나란히 놓았다.

"교본엔 먼저 큰분류를 읽고 그다음 세부분류를 따라가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이 끝번호가 맨 마지막에 나와요. 그런데 실제 장부는 반대예요. 끝번호를 먼저 알아야 같은 줄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어요."

그녀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처음부터 못 보게 만들었어요. 틀리게 외우게 해서, 같은 줄을 같은 줄로 읽지 못하게."

말끝을 흐렸다. 부끄러움과 분노 사이에 걸린 목소리였다.

위쪽에서 성도 서기가 난간을 한 번 쳤다. 금속이 울리며 오름칸 아래까지 쏟아졌다.

"미리엘 하센! 복귀 순서 위반이다!"

그 뒤에 기록관 목소리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대표 후보 응답이 먼저입니다. 접견 기록이 비면 전체 절차가 미뤄집니다."

둘 다 자기 말이 먼저여야 한다고 외쳤다. 그래서 오히려 같은 바닥 위에 서 있다는 게 더 잘 들렸다. 미리엘은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위쪽 소리를 들은 채 손을 다시 장부 위에 올렸다. 이제 그녀는 도망치고 싶어서 떨리는 게 아니었다. 이미 본 걸 못 본 척할 수 없어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열람대 옆 물막이 문을 봤다. 문틀엔 `침수 구역 1회 개방`을 뜻하는 듯한 가는 눈금이 빼곡했고, 문 아래로는 얇은 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미리엘은 그 앞으로 기어가듯 다가갔다. 한 사람이 문을 읽으면 다른 둘이 뒤를 막아 줘야 할 만큼 좁았다.

문틀 왼쪽엔 얇은 홈이 넷, 오른쪽엔 굵은 눈금이 셋 남아 있었다. 겉보기엔 단순한 수위 표시 같았지만, 가운데 하나만 유독 닳아 있었다. 브론은 그걸 보고 곧바로 회색 종루 보관함 바닥에 남은 매듭 박자를 떠올렸는지 검은 밀랍 자국을 손톱으로 긁어 냈다.

"같은 박자야."

그가 말했다.

"문 열리는 시간도 줄로 맞췄어. 너무 오래 열리면 안 되고, 안쪽 사람이 먼저 손 대고 나올 틈만 남겨 둔 거지."

미리엘은 문틀 아래 가는 눈금을 세 손가락으로 짚어 내렸다. 첫째는 끝번호, 둘째는 안쪽 줄, 셋째는 큰분류 확인. 교본을 외우던 손놀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 그녀는 책에 적힌 순서가 아니라 눈앞 돌문이 요구하는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교본대로면 이 문은 안 열려요."

그녀가 눈금을 따라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큰분류, 세부분류, 끝번호. 그 순서로는 계속 바깥 눈금만 돌아요. 끝번호부터 잡고, 안쪽 줄을 읽고, 마지막에 큰분류를 확인해야 해요."

브론도 옆에 붙어 문틀 아랫부분을 살폈다. 그는 물막이 철판 옆에 남은 붉은 긁힘과 회색 종루 삭제 코드를 번갈아 봤다.

"박자까지 맞춰 놨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맞는 순서를 알아도 오래 못 버티게 해 놨어. 원본군이 먼저 열리는 시간이 너무 짧아."

"문 열리면 몇 호흡?"

내가 물었다.

브론은 눈금을 다시 재고, 문턱 밑으로 새는 물을 한 번 짚어 봤다.

"셋이 들어가고 하나가 문 쐐기 박을 정도. 길어야 다섯 호흡. 그 이상 버티면 위쪽 수압이 바뀐다."

"그럼 순서 다시 잡아야 해."

나는 바로 말했다.

"세라는 위에서 시선 끌고, 리에트는 뒤 발소리 갈라지는 순간 알려 줘. 브론은 쐐기. 미리엘은 첫 줄 읽고, 난 안쪽 선반 번호 먼저 맞춘다."

세라는 대답 대신 검집 끝으로 계단 난간을 툭 눌렀다. 위를 보는 시선을 자기 쪽으로 더 끌겠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고개만 한 번 까딱했고, 브론은 봉함침 대신 허리춤 얇은 쐐기 두 개를 빼 들었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파티가 어디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누가 앞장설지, 누가 뒤를 막을지, 누가 길을 읽고 누가 시간을 벌지. 말로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자리를 찾아갔다.

위쪽에서 다시 성도 쪽 목소리가 내려왔다. 이번엔 더 날이 서 있었다.

"미리엘 하센 즉시 복귀. 입회 없는 하층 이동 금지."

왕궁 기록관의 얇은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붙었다.

"대표 후보 응답이 먼저입니다. 접견 순서를 더 늦출 수 없습니다."

세라가 계단 쪽에서 짧게 웃었다. 기쁜 웃음이 아니라, 저 둘이 서로 먼저라고 다투는 동안 아직 우리가 한 칸 더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아챈 사람 웃음이었다.

그녀는 한 발 위로 올라가 난간을 일부러 울렸다. 금속이 가볍게 울리자 위쪽 발소리 셋이 동시에 잠깐 멈췄다. 누가 먼저 세라에게 말을 걸지 고르는 틈이 생겼다. 바로 그 틈이 우리가 살 길이었다.

나는 미리엘 옆으로 몸을 낮췄다.

"지금 네가 믿을 건 저 위 명령이 아니라 이 문이야."

내가 말했다.

"성도와 신앙을 한 줄에 묶어 붙들려 하지 마. 적어도 지금은. 네가 방금 읽은 사실부터 믿어."

미리엘은 문틀에 댄 손을 떼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눈은 흔들렸지만 도망가진 않았다. 오늘 여기서 필요한 건 배교 선언도 긴 고백도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배운 순서가 틀리게 가르쳐졌다는 걸 인정하고, 그래도 다음 줄을 읽겠다고 버티는 것. 그 한 칸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끝번호 홈을 먼저 눌렀다. 그다음 안쪽 줄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렸고, 마지막에 큰분류 눈금에 닿았다. 문 아래 물이 한 번 뒤로 빨려 들어갔다. 철판 안쪽에서 걸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아주 짧게 났다.

브론이 기다렸다는 듯 쐐기 하나를 문 하단 벌어진 틈에 박아 넣었다. 금속이 짧게 갈리는 소리가 났고, 물줄기 방향이 순간 바뀌었다. 리에트는 뒤를 본 채 손가락 셋을 펼쳤다가 둘로 접었다. 셋이던 발소리 중 둘은 아직 위쪽에서 다투고 있고, 하나만 이쪽으로 내려온다는 뜻이었다.

"열려요."

미리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다.

"한 번뿐이에요. 지금 놓치면 정리선이 다시 덮어요."

리에트가 뒤쪽을 보며 말했다.

"발소리 셋. 갈라졌어. 하나는 이쪽으로 내려온다."

시간은 끝까지 친절하지 않았다. 우린 말보다 몸을 먼저 옮겼다. 세라가 가장 위 칸에 남아 계단 시야를 붙잡았고, 리에트는 문 안쪽 첫 마른 돌을 확인했다. 브론은 쐐기 하나를 더 끼워 넣고 손등으로 문틀을 버텼다. 완전히 닫히는 시간을 한 박자라도 늦추려는 손이었다.

나는 문턱 안쪽 첫 선반이 놓인 방향을 먼저 훑었다. 물에 잠긴 높이, 남은 마른 디딤돌 간격, 선반 기둥이 기대는 벽면 홈. 만약 안쪽 첫 선반까지 곧장 못 가면 둘째 돌에서 몸을 틀어야 했다. 그 자리에선 장부를 꺼내는 사람 하나와 뒤를 막는 사람 하나만 설 수 있다. 셋이 한꺼번에 몰리면 물에 빠질 가능성이 더 컸다.

"안쪽 둘째 돌까진 내가 간다."

내가 말했다.

"미리엘은 첫 선반 번호만 읽어. 브론은 꺼내고, 리에트는 뒤 소리. 세라는 문 닫히면 바로 들어와."

세라는 계단 위에서 짧게 대답했다.

"내가 마지막이다."

그 말엔 망설임이 없었다. 위쪽 시선을 붙잡는 사람은 언제나 제일 늦게 빠진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다.

문 너머 침수 회랑은 도시 밑이 아니라 오래전 던전 속처럼 보였다. 천장 가까이까지 올라온 수위선, 양쪽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잉크 자국, 반쯤 잠긴 사슬 선반과 흔들리는 등잔 고리.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마른 디딤돌 몇 칸만 어둠 안쪽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 물은 숨이 있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위에선 왕이 부르고, 성도가 복귀를 명하고, 기록관이 순서를 따지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길은 언제나 그렇듯 아래에서 먼저 열렸다.

가장 가까운 선반은 반쯤 기울어 있었다. 윗칸엔 빈 틀이 두 개, 아랫칸엔 검게 불은 장부 뭉치가 사슬에 묶인 채 잠겨 있었다. 물이 닿지 않은 좁은 턱엔 아주 얇은 백색 가루가 남아 있었는데, 브론은 한 번 보고도 그게 봉함을 뜯은 뒤 남는 석분이라고 알아봤다. 누군가 최근까지 이 안쪽 선반도 열어 봤다는 뜻이었다.

미리엘은 문턱에 선 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상처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까 반원실에서 멈췄던 눈과는 달랐다. 이제 그녀는 성도 전체를 버리겠다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는 그 둘을 같은 말로 붙들 수 없다는 걸 안 사람 눈이었다.

"안쪽 첫 선반부터요."

그녀가 말했다.

"회색 종루 삭제 코드 원문이랑, 정화 실패자 원형 장부가 같이 있을 가능성이 커요. 위쪽 정리문보다 먼저 그걸 잡아야 해요."

그녀는 거기서 한 문장을 더 보탰다.

"겉표지는 속일 수 있어도 끝번호는 못 속여요. 원형 장부면 아래 두 칸이 같을 거예요."

브론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럼 잡고 돌아나오면 된다."

"아니."

세라가 계단 위에서 짧게 잘랐다. 그녀는 아래를 보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조금 더 틀어 위쪽 시선을 버텼다.

"이번엔 먼저 읽고 나간다."

그 말이 묘하게 파티답게 들렸다. 누가 우리를 영웅 후보라 부르든, 외부 증언자라 부르든, 군수 협력 인원이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지금 우린 이름표보다 줄을 먼저 붙드는 사람들 쪽에 서 있었다.

위쪽에서 누군가 성급하게 계단 난간을 쳤다. 성도 서기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미리엘 하센! 복귀 명령이다!"

세라는 이번엔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대표 후보 응답을 먼저 정리하시죠."

기록관이 바로 그 말에 물렸다. 성도 서기가 다시 자기 순서를 주장하는 소리가 겹쳤다. 위쪽 말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동안, 아래에선 물소리와 장부 냄새, 젖은 돌의 차가움만 더 또렷해졌다. 저 위가 질서라면, 그 질서는 지금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식으로만 쓸모가 있었다.

미리엘은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물막이 문턱을 넘으며 아주 짧게 대답했다.

"지금은 안 돌아가요."

작은 말이었다. 화도, 선언도, 과장도 없었다. 그래서 더 또렷했다. 저 위 질서가 그녀 손에 쥐여 준 문장을 처음으로 놓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첫 디딤돌에 발을 올렸다. 물이 장화 옆면을 스치며 지나갔다. 차가웠다. 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브론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문 닫히기 전에 셋째 칸 넘겨. 물살 바뀐다."

리에트는 이미 다음 돌 위로 몸을 실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 내려온다. 둘은 아직 위에서 붙잡혔어. 서둘러."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는 로웬 헤일의 경고는 또 한 번 맞았다. 이번엔 성벽 바깥이 아니라 왕궁과 성도 한복판에서.

그리고 우리는 그 위험의 밑바닥으로, 저들이 일부러 늦게 닿게 만든 줄의 안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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