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맥 아래로
물막이 문 안쪽 첫 회랑은 사람보다 물과 잉크가 먼저 길을 외운 자리였다. 뒤쪽 문짝은 브론이 박아 둔 쐐기 덕에 겨우 버티고 있었고, 앞쪽으로는 마른 디딤돌 다섯 칸이 검은 물 위에 듬성듬성 이어졌다. 왼벽 사슬 선반은 절반쯤 잠겨 있었고, 선반 끝마다 끊어진 장부끈이 젖은 해초처럼 늘어졌다. 오른벽에는 오래된 수위선 위로 검은 잉크 자국이 한 겹 더 번져 내려와 있었다. 물은 멎은 것처럼 잔잔했지만, 위쪽 어딘가에서 개폐문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떨림이 먼저 닿았다.
뒤에 남아 시선을 붙잡을 세라와 브론, 앞 발판을 읽을 나와 미리엘, 문턱을 등진 채 발소리를 가르는 리에트. 우리가 선 자리는 좁았고, 위에서는 더 좁은 시간이 내려오고 있었다. 왕은 접견을 미룰 수 없다고 부를 테고, 성도는 미리엘 복귀를 강요할 테고, 이 아래 침수선은 한 번 내려앉으면 같은 높이로 다시 늦게 열릴 것이다. 말은 다 달랐다. 그래도 우리를 각자 다른 칸에 가두려 든다는 점만은 완전히 같았다.
나는 둘째 디딤돌까지만 먼저 밟았다. 돌끝이 물에 젖어 미끄러웠다. 셋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더 깊은 선반 앞에서 서로 발을 묶게 된다. 누가 읽고, 누가 꺼내고, 누가 뒤를 막을지 여기서 갈라야 했다.
"안쪽 첫 선반은 내가 자리 잡을게."
나는 물결 너머 선반 높이를 재며 말했다.
"미리엘은 끝번호부터 봐. 브론은 꺼내는 손. 리에트는 뒤 소리. 세라는 문 닫히면 마지막으로 들어와."
세라는 대답 대신 위쪽 계단 쪽으로 몸을 반쯤 틀었다. 난간을 붙잡은 손이 조금 올라갔다. 시선과 말이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걸릴 자리를 스스로 고른 것이다. 검집 끝이 난간 쇠를 스칠 각도까지 이미 정해 둔 몸이었다.
"내가 끝까지 붙잡아."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맹세가 아니라, 어느 칸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뿐이었다.
미리엘은 내 옆에서 첫 선반 턱을 바라보다가 낮게 숨을 골랐다.
"겉표지부터 보면 또 속아요. 끝번호를 먼저 볼게요."
그녀 손끝은 아직 떨렸지만, 떨림의 방향은 바뀌어 있었다. 성도 교본이 자기 머릿속에 박아 둔 순서를 밀어내고 눈앞 부호를 먼저 믿기로 한 사람의 떨림이었다.
우리는 한 칸씩 안으로 들어섰다. 물이 장화 옆면을 스치며 지나갔다. 차갑긴 했지만 흐름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람 발을 피해 퍼지는 물결이 아니라, 위쪽 개폐문 박자에 맞춰 회랑 전체가 안쪽으로 한 번씩 숨을 들이쉬는 느낌이었다. 왼벽 아래 잠긴 사슬이 그 박자마다 아주 약하게 떨렸고, 선반에 걸린 끈들은 한 번 늦게 따라 흔들렸다.
둘째 굽이로 접어들자 바닥 감촉이 바뀌었다. 마른 돌이라기보다 오래 닳은 판 위를 밟는 느낌이었다. 왼쪽 물길은 하수로처럼 보였지만, 가운데 한 줄만 유난히 반듯하고 매끈했다. 오른쪽엔 나중에 덧댄 나무 선반과 철제 보강대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물건을 오래 두려 짠 모양이 아니었다. 원래 있던 돌줄을 가리려고 억지로 세운 외피 같았다.
그때 지하 깊은 곳에서 금속이 아니라 돌이 되받는 짧은 공명음이 올라왔다. 첫 던전 수문장 앞에서 들었던 박자와 비슷했다. 짧고 마른 울림인데, 듣는 순간 발 위치를 다시 재게 만드는 소리. 발바닥 밑 판이 그 울림을 한 박자 늦게 되받아 내 쪽으로 밀었다.
세라 검집이 허리에서 한 번 울렸다. 내 팔 안쪽도 미세하게 저렸다. 둘이 완전히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줄기를 스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왕궁 밑바닥과 첫 던전 판정선이 멀리 떨어진 다른 장소가 아니라, 한 설계에서 갈라진 자식처럼 느껴졌다.
브론이 나무 선반 밑 못자국을 훑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선반이 먼저가 아니야."
그는 물에 젖은 철제 보강대를 손등으로 밀어 봤다.
"돌줄 위에 덮었어. 보관하려고 세운 게 아니라 가리려고 박은 거다. 누가 하수로처럼 보이게 만들었네."
브론은 한 걸음 더 옆으로 비켜 섰다. 그가 부츠 앞코로 물에 잠긴 받침목을 건드리자 썩은 나무 조각이 아니라 얇은 덧판 하나가 떠올랐다. 덧판 뒷면엔 번호를 긁어 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보강이 아니라 표식 감추기였다.
미리엘도 바닥의 매끈한 줄과 벽 아래 번호 홈을 번갈아 봤다.
"성도 서고에서 쓰는 간격이 아니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서고 안에서 만든 길이 아니라, 먼저 있던 줄에 보관 구조를 얹은 거예요."
도시 밑바닥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왕궁, 성도, 문서고, 회랑. 위에 붙은 이름들이 전부 나중에 단 표지처럼 느껴졌다. 먼저 있던 건 이 공명과 돌줄, 그리고 그 위를 덮어 기록 보관이라 부르게 만든 손이었다. 오래된 유적을 숨긴 게 아니라, 유적 위에 절차를 쌓아 사람들이 아래를 보지 않게 만든 것이다.
세 번째 굽이 옆 측실에서 리에트가 손을 들었다. 말 대신 멈추라는 신호였다. 정면엔 납작한 장부 선반 셋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엔 원래 문틀이었던 듯한 돌 아치가 반쯤 판자로 막혀 있었다. 왼쪽 바닥엔 끊어진 쇠사슬과 밀랍 찌꺼기가, 오른쪽엔 반쯤 젖은 운반표와 왕궁 쪽 수송 표식이 엎어진 채 붙어 있었다. 서고 보관칸처럼 꾸미기엔 너무 낮았고, 문이라고 보기엔 가구와 절차가 지나치게 촘촘했다.
브론은 판자 못자국과 쇠사슬 눌림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문 위에 선반을 얹었군."
그가 손등으로 돌 아치 가장자리를 쓸었다.
"열고 닫는 자국을 가리려고 장부칸처럼 꾸민 거야. 보기엔 보관실인데, 실제론 통과문이다."
그는 판자 틈 사이에 손톱을 넣어 한 번 비틀었다. 판자가 안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바깥쪽으로 약간 떴다. 자주 열어야 하는 문을 막아 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금방 떼어 낼 가짜 벽이었다. 못 머리 하나는 새것이었고, 그 옆 두 개는 오래된 녹 위에 다시 박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미리엘은 젖은 운반표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먹이 번졌는데도 끝번호 둘은 또렷했다. 하층 대체열에서 봤던 번호와 같은 줄이었다. 왕궁 수송선이 위에서만 문서를 받은 게 아니라, 이 안쪽 문까지 직접 내려왔다는 뜻이었다.
운반표 아래에는 물에 불은 얇은 끈표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상행 전 대조`라는 글자가 반쯤 풀려 있었고, 그 아래 잘린 숫자 끝만 남아 있었다. 미리엘이 그 숫자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위에서 정리해서 내린 게 아니에요. 안에서 맞춘 뒤 다시 위로 올린 거예요."
나는 돌 아치 쪽으로 한 발 더 다가갔다. 그 순간 안쪽에서 아주 얇은 떨림이 올라왔다. 닫혀 있던 문이 내가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듯한 반응이었다. 세라 검집이 뒤쪽에서 짧게 한 번 더 울렸다.
"봤지?"
브론이 숨을 죽인 채 말했다.
"둘 다 같은 자리에서 반응해."
그보다 먼저 리에트가 물 위를 가리켰다. 검은 잉크막이 방 한가운데서 흩어진 게 아니라, 안쪽으로 가늘게 끌려가고 있었다. 물살이 센 방향이 아니라 누군가 젖은 천이나 장부 끝을 급히 끌고 지나간 모양새였다. 잉크막 끝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한 줄로 합쳐져 있었다. 혼자 달아난 손이 아니라, 앞뒤로 물건을 나눠 들고 비껴 지나간 둘의 흔적 같았다.
리에트는 측실 바닥에 남은 젖은 손자국과 사슬 고리 높이를 번갈아 봤다.
"오래된 게 아냐."
그녀가 낮게 말했다.
"둘. 많아야 셋. 방금 안으로 물러났어."
그 말이 끝나자 회랑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숨겨진 문서를 찾는 게 아니라, 방금 숨긴 손끝을 바로 뒤쫓고 있다는 뜻이니까. 오래전에 봉인된 자리가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 내려와 순서를 바꾸고 지워 버리는 길이었다.
우린 측실 뒤 낮은 연결 회랑으로 몸을 비틀어 넣었다. 천장이 내려와 허리를 세울 수 없었다. 벽 아래엔 사슬 고리가 일정 간격으로 박혀 있었고, 물 위엔 잉크막이 얇게 뜬 채 안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바닥에 남은 손자국은 물에 씻겨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검은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 몸을 짚은 흔적이라기보다, 젖은 장부나 묶음을 받쳐 들고 서둘러 지나간 손 높이였다.
나는 사슬 고리 간격과 디딤돌 폭을 재듯 훑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걷기엔 어색하고, 상자 하나를 들고 비껴 지나기엔 딱 맞는 폭이었다. 고리마다 녹슨 방향도 같지 않았다. 바깥으로 당긴 자국보다 안쪽으로 비껴 잡아끈 자국이 많았다.
"사람 길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문서 묶음 옮기는 줄이네."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슬도 묶는 용도보다 끌어 고정하는 용도에 가깝다. 물건 먼저. 사람은 나중."
그는 가장 낮은 고리 아래를 손등으로 훑더니 젖은 쇳가루를 보여 줬다. 방금 마찰 난 금속에서만 나는 색이었다. 안쪽에서 무거운 상자나 선반을 움직였다는 뜻이 더 짙어졌다.
미리엘은 손자국 옆 약호를 읽다가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
"첫 선반이 아니에요."
그녀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원형 장부랑 삭제 코드는 이 다음 침잠칸일 가능성이 커요. 안쪽 보관군 표기가 바뀌었어요."
그녀는 벽 아래 물먹은 홈 세 개를 차례로 짚었다. 첫째 홈은 둥글고, 둘째는 얕았고, 셋째는 모서리가 안쪽으로 더 닳아 있었다. 같은 번호를 쓴 칸이라면 생길 수 없는 차이였다. 미리엘은 손끝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겉표지는 앞칸에 남겨요. 진짜 줄은 안으로 밀어요. 비교 열람 금지랑 같은 방식이에요. 같이 봐야 이어지는 걸, 서로 다른 칸에 쪼개 두는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위쪽에서 세라 이름을 부르는 왕궁 쪽 고함이 더 가까워졌다. 성도 쪽 목소리도 곧 겹쳤다. 접견 순서, 복귀 의무, 입회 없는 이동 금지. 위에서는 누가 먼저 우리를 끌어올릴지를 두고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세라는 아직 합류하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금속이 한 번 울렸다. 난간을 일부러 쳤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위 말들이 다시 서로를 향하도록 박자를 틀어 놓는 소리였다. 우리 쪽으로 내려와야 할 다리가 잠깐 멎었다.
뒤이어 두 번째 울림이 더 짧게 왔다. 세라는 경고를 길게 주지 않았다. 한 번은 왕궁 쪽 시선을 끌기 위해, 두 번째는 성도 쪽 말머리를 끊기 위해. 말 대신 금속을 울리는 편이 훨씬 싸고 빠르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리에트는 귀를 세운 채 속삭였다.
"한 줄 묶였어. 아직 둘은 위에서 붙잡혔어."
"누가 더 가까워?"
"성도 쪽이 먼저 입을 열어. 왕궁 쪽은 이름표 찾느라 늦어."
그 차이면 충분했다. 위에서는 서로 먼저 권한을 들이밀고, 우리는 그 틈으로 아래 줄을 더 읽는다. 세라는 그 싸움이 오래가게 만들고, 리에트는 누가 먼저 발을 떼는지 잡아 준다. 브론은 물건을 보고, 미리엘은 번호를 보고, 나는 배치를 정한다. 우리가 이 아래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 역할들이 정확히 맞물리는 만큼 늘어났다.
그 사이 안쪽 물살이 한 번 낮아졌다. 회랑 끝 어둠에서 첫 침잠칸 입구가 드러났다. 왼쪽엔 물에 잠긴 낮은 열람대, 정면엔 사슬이 매달린 선반, 오른쪽엔 물높이에 따라 열리는 듯한 번호 홈이 파인 벽면. 천장 틈에선 맑은 물이 아니라 검은 잉크 섞인 물방울이 떨어지고, 쇳소리는 늦게 되받아쳤다. 바로 앞이 아니라 더 안쪽에서.
입구 앞 바닥은 반듯한 돌 네 장으로 끊겨 있었는데, 세 번째 돌만 유난히 닳아 있었다. 가장 많이 밟힌 자리가 아니라, 서서 멈춰 무언가를 넘기던 자리라는 느낌이 강했다. 열람대 앞 물빛도 달랐다. 그냥 검은 물이 아니라, 얇은 먹빛이 겹겹이 풀린 물이었다. 종이와 천, 손과 금속이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젖었다가 말랐다는 흔적이었다.
브론이 사슬 끝 젖은 금속을 손등으로 건드렸다가 곧바로 나를 봤다.
"미지근해."
그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방금 움직였어. 오래된 물차가 아니야."
그가 사슬 끝 매듭을 뒤집자 안쪽에 작은 검은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먹이 아니라 녹과 잉크가 섞여 굳은 덩어리였다. 선반을 당긴 손이 젖은 장부를 쥔 채 그대로 사슬을 잡았을 때 남는 색이었다.
미리엘은 번호 홈을 훑으며 말했다.
"여기서 같이 묶였을 거예요. 삭제 코드 원문이랑 정화 실패자 원형 장부. 겉표지는 갈라도 끝번호는 같이 남겨요."
그녀는 오른쪽 벽 가장 낮은 홈과 그 위 두 번째 홈을 번갈아 짚었다.
"첫 칸은 낮은 물에서, 둘째 칸은 물이 더 찼을 때 열어요. 같은 장을 다른 높이에서 빼게 만든 거예요. 들고 나가는 손을 나누려고."
문서 보관보다 사람을 갈라 놓는 일이 먼저였던 자리였다. 누가 어느 시간에 어느 줄을 만지는지까지 갈라 놓아야, 나중에 책임을 흩뿌릴 수 있다. 위에서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방식과 아래 구조가 똑같았다. 도시가 위아래로 같은 거짓말을 쓰고 있었다.
세라는 그 말을 들었는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뒤를 막고 있으면서도 귀는 분명 이쪽으로 와 있었다. 그녀는 난간을 비스듬히 눌러 뒤쪽 빈틈을 더 좁혔다. 위에서 누가 성급하게 뛰어내려오면 한 번에 둘은 못 내려오게 만드는 각도였다. 검집 끝이 쇠를 스칠 때마다 아주 약한 떨림이 침잠칸 번호 홈 쪽으로 따라 흘렀다. 공명은 사람 목소리보다 솔직했다. 누가 거짓 이름표를 들이밀든, 이 아래 구조는 세라와 나를 같은 줄기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브론은 사슬 선반 맨 아래 칸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물에 잠겨 있던 쇠틀 아래에서 얇은 나무 받침 두 장이 더 나왔다. 둘 다 윗면보다 옆면이 더 닳아 있었다. 장부를 오래 꽂아 둔 받침이 아니라, 젖은 묶음을 미끄러뜨려 옆칸으로 넘길 때 쓰는 받침이었다.
"보관칸처럼 보이게만 해 둔 거야."
브론이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웃었다.
"실제론 분류보다 이송이 먼저다. 아래서 맞추고, 위에서 공인 문장 붙이고, 다시 올려보내."
미리엘은 벽 아래 두 번째 홈을 손톱으로 눌렀다. 손톱 끝에 검은 찌꺼기가 묻어 나왔다. 잉크만은 아니었다. 밀랍 가루와 마른 종이 부스러기가 섞여 있었다.
"여기서 봉함을 다시 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장부를 젖은 채 들고 와서 말리기 전에 번호부터 다시 맞춘 거예요. 물이 닿은 흔적보다 밀랍이 위에 있어요. 순서가 거꾸로예요."
거꾸로 맞다. 원래라면 보관하고, 봉함하고, 올린다. 그런데 이 아래에선 먼저 빼내고, 다시 맞추고, 다시 묶은 뒤에야 위로 올린다. 진실을 남기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진실을 다시 다듬어 올리기 위한 절차였다.
나는 침잠칸 문턱 왼편 열람대를 한번 쓸어 보았다. 손바닥 밑으로 물먹은 홈이 세 줄 지나갔다. 책을 펼쳐 읽던 자리보다, 장부를 잠깐 눕혀 끝번호와 인장 줄만 맞추던 자리라는 느낌이 강했다. 열람대 끝엔 손바닥만 한 네모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봉함함 바닥 모양과 딱 맞았다. 위에서 내려온 문서가 여기서 한 번 더 눌리고, 여기서 빠진 장이 다시 골라졌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침잠칸 오른쪽 벽에서 몸을 낮췄다. 그녀 손끝이 젖은 돌 모서리를 한 번 문지르더니, 곧바로 내 쪽으로 짧은 신호를 보냈다. 두 번 짧게, 한 번 길게. 뒤에서 내려온 발이 아니라 안쪽으로 비켜 선 발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피하려고 급히 숨은 게 아니라, 어느 칸 뒤에서 우리가 어느 줄을 읽는지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쪽에 귀 세운 놈 있어."
리에트가 입술만 움직였다.
"멀리 안 갔어. 물 안 튀기고 선다. 익숙한 발이야."
세라는 그 말을 듣자 뒤를 완전히 닫지 않고 반 걸음만 더 들어왔다. 뒤쪽 길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내가 한 발 물러서면 곧바로 앞줄로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그녀가 아래로 내려온 뒤 회랑 공명은 더 또렷해졌다. 위쪽 난간과 안쪽 번호 홈이 한 박자 안에서 같이 울렸다. 누군가가 이 구조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엔 우리 다섯을 정확히 서로 다른 자리로 눌러 넣고 있었다.
나는 입구 앞 디딤돌 배치를 다시 봤다. 세라가 들어오면 뒤를 닫고, 리에트가 후미 소리를 듣고, 브론은 사슬 선반을 먼저 붙들고, 미리엘은 번호 홈을 읽는다. 나는 안쪽 첫 배치를 잡아야 했다. 첫 던전과 비슷했다. 이번엔 몬스터보다 문장과 절차가 먼저 이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세라 합류하면 바로 재배치한다."
내가 낮게 말했다.
"브론은 선반. 미리엘은 번호. 리에트는 뒤 소리 계속. 난 안쪽 칸 먼저 본다. 누가 나오면 문서보다 손부터 본다."
리에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시선은 이미 우리보다 뒤를 보고 있었다. 위쪽 발소리 셋, 안쪽 물러난 발 둘, 어쩌면 그 사이를 잇는 숨소리 하나까지 다 머릿속에 올려 둔 얼굴이었다.
그때 침잠칸 안쪽 어둠에서 잉크 먹은 사슬 하나가 아주 천천히 흔들리다 멈췄다. 물살만으로는 그렇게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조금 전까지 그 선반을 당겼거나, 우리가 들어오길 알고 손을 놓았다는 뜻이었다. 사슬 끝이 멈춘 자리 아래로 검은 물방울 하나가 늦게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저 위에 장부가 하나 걸려 있었다는 것처럼.
리에트는 활대를 더 단단히 쥐었다.
"우리가 뒤쫓는 것만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저쪽도 우리가 내려오는 걸 알고 물러나."
바로 그 순간 뒤쪽에서 세라가 물막이 문을 넘는 발소리가 났다. 그녀는 숨을 고르지도 않고 곧장 난간 옆 가장 좁은 돌에 발을 올렸다. 위쪽 이름표는 아직 저 위에 남아 있고, 진짜 줄은 이제 우리 발아래로 더 깊게 이어지고 있었다.
세라는 검집 끝으로 뒤쪽 사슬 하나를 살짝 밀어 우리 뒤 동선을 비워 뒀다. 돌아설 길을 열어 둔 동작이면서도, 동시에 누가 내려오면 가장 먼저 부딪힐 자리를 스스로 차지한 배치였다. 나는 그 한 걸음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브론은 정면 사슬 선반의 가운데 칸부터 손을 넣었다. 젖은 장부를 함부로 꺼내면 풀어질 걸 알기에, 먼저 선반 옆 받침의 균형부터 확인했다. 그의 손등이 선반 아래로 들어갔다 나오자 검은 가루와 잿빛 종이섬유가 함께 묻어 나왔다.
"겉칸은 비었어."
브론이 숨죽여 말했다.
"비어 있는 척만 하지. 안쪽에 한 번 더 밀어 넣은 자국이 있어."
그는 선반 아랫목을 살짝 들어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자 뒤에 숨어 있던 얇은 나무 틀이 한 칸 더 드러났다. 겉에서 보면 선반 셋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뒤에 반 칸이 더 붙어 있었다. 정식 보관칸이 아니라 눈을 속이는 숨칸이었다.
미리엘은 그 숨칸 옆 벽에 남은 작은 눌림을 짚었다.
"여기요."
그녀 손끝이 멈춘 곳엔 세 줄이 아주 얇게 긁혀 있었다.
"정화, 치유, 해석. 겉표지에선 갈라지는데 안쪽에선 다시 같은 줄로 모여요. 이 칸이 합치는 자리예요."
나는 숨칸 안쪽을 들여다봤다. 종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물먹은 목패 조각 둘, 검은 실 한 가닥, 반쯤 떼어진 봉함초 자국이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누군가 조금 전까지 여기서 무언가를 골라 내고, 남는 부스러기만 뒤에 밀어 넣은 모양새였다.
리에트는 활을 겨누지 않은 채 몸만 틀었다. 시선은 우리보다 더 깊은 어둠을 읽고 있었다.
"방금 나간 손 둘 중 하나는 오른발을 끌어."
그녀가 속삭였다.
"뒤꿈치가 아니라 발가락으로 버텨. 물 안 튀기려고 익힌 걸음이야. 여길 자주 드나든다."
그 말이 끝나자 안쪽 어둠 저편에서 아주 낮은 마찰음이 한 번 더 났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검을 뽑는 소리도 아니었다. 젖은 끈을 조심스럽게 당겨 묶음을 들어 올릴 때 나는 소리였다. 우리를 보고 도망치는 적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챙겨 들고 빠지려는 손이 아직 앞에 있다는 뜻이었다.
위쪽에서도 소리가 더 내려왔다. 왕궁 쪽은 접견 순서를 들먹였고, 성도 쪽은 입회 없는 이동을 문제 삼았다. 둘 다 세라 이름을 먼저 올렸지만 서로 양보할 뜻은 없었다. 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검집 끝으로 난간을 한 번 더 눌렀다. 금속 울림이 위로 짧게 튀어 올라가자, 곧바로 성도 쪽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녀는 칼을 뽑지 않고도 저 위 싸움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열람대 아래를 더듬었다. 돌받침 밑엔 손가락 두 마디쯤 들어가는 홈이 있었고, 안쪽엔 물에 젖지 않은 얇은 종이 막 하나가 접힌 채 끼어 있었다. 꺼내 보니 장 전체가 아니라 제목줄만 남긴 잘린 표지였다.
`원형 보관 대조표`
글자는 그것뿐이었다. 아래는 통째로 찢겨 나갔다. 대조표 자체를 숨긴 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대조했는지 적힌 줄만 떼어 낸 것이다. 누군가는 이 아래에서 원본을 지운 게 아니라 비교 기준부터 찢어 버리고 있었다.
미리엘은 그 잘린 표지를 보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교본에 없는 이름이에요."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원형 장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원형끼리 맞춰 보는 표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걸 빼면 남은 기록은 전부 제각각으로 보여요."
브론은 숨칸 바닥을 다시 긁었다. 그의 손끝이 멈춘 자리에 물에 불은 작은 금속편 하나가 끼어 있었다. 못대가리만 한 조각이었는데, 윗면엔 왕궁 수송 상자에서 보던 세모 홈이, 아랫면엔 성도 검인 틀에서 보던 얕은 동그라미가 같이 찍혀 있었다.
"위 상자랑 아래 상자를 같은 틀에서 맞춘 거다."
브론이 말했다.
"왕궁 쪽 운반선하고 여기 숨칸이 따로 논 적이 없어."
그 사실이 확인되자 침잠칸 공기가 더 눅눅하게 눌러앉았다. 왕궁은 위에서 부르고, 성도는 위에서 막고, 진짜 손은 그 둘이 닿는 이 아래에서 줄을 갈아 끼운다. 위쪽 질서와 아래쪽 삭제선이 같은 몸통이라는 감각이 더는 의심이 아니었다.
세라는 검집 끈을 한 번 더 조여 묶었다.
"빨리 정해."
그녀는 짧게만 말했다.
"저 위 소리, 오래 못 끌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숨칸이 있다는 것, 대조표 제목이 잘려 나갔다는 것, 왕궁 수송선 틀과 성도 검인 틀이 같은 손이라는 것. 여기서 이미 얻은 것만으로도 아래 줄의 성격은 드러났다. 이제 필요한 건 첫 묶음을 손에 넣는 일과, 안쪽에서 물러난 손이 무엇을 마지막으로 들고 빠지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첫 침잠칸 안쪽 어둠을 보며 숨을 골랐다. 왕의 접견도, 성도의 복귀 명령도, 대표 후보 응답도 전부 위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진실은 늘 위쪽 밝은 방에 있지 않았다. 더 낮은 자리, 먼저 젖고 먼저 지워지는 줄의 안쪽으로만 달아났다. 누군가는 그 줄을 지키려고 방금까지 이 아래를 오갔고, 우리는 그 손과 거의 같은 박자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번엔 늦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대신 늦으면 어디서 놓치는지만은 또렷했다. 이 사슬 선반, 번호 홈, 가짜 장부칸, 미지근한 금속, 위로 다시 올려 보낸 운반표. 어느 하나라도 손에서 놓치면 위쪽 사람들은 그걸 곧바로 이름과 절차 속에 다시 묻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는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들어간다."
낮게 말한 뒤, 첫 침잠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우리는 도망친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방금 접어 넣은 손끝을 붙들기 위해 더 아래로 내려갔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