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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는 검, 선택하는 기사

북벽 아래 첫 말뚝선은 아침볕을 받아도 끝내 따뜻해지지 않았다. 감시탑 그림자가 비스듬히 내려앉은 돌턱과 판석 통로 입구 사이로 밤새 얼었다 녹은 물이 얇게 번들거렸다. 나는 첫 말뚝에서 통로 입구까지 걸음을 다시 셌다. 여덟 걸음. 거기서 왼쪽 반 걸음. 숨을 멈춘 채 버틸 자리까지 하나.

뒤로는 병사 셋만 남겼다. 왕실 사절의 답을 기다린다는 소문은 벌써 전초를 한 바퀴 돌았지만, 이 자리만큼은 아직 입보다 손이 앞섰다. 브론은 못판 조각과 쇠고리 하나를 쥔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미리엘은 세라 손목을 보기 좋은 각도로 섰다. 리에트는 말뚝선보다 한 칸 위 눈턱에 기대 주변을 훑었다. 북벽에 기대 세운 창 두 자루, 회수대에서 가져온 밧줄, 어젯밤 쓰다 만 횃대 하나까지 전부 같은 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읽어야 할 건 검 하나가 아니라 자리를 고르는 습관 전체였다.

"여기서 한 번."

세라가 검집 끝을 돌턱에 가볍게 눌렀다.

짧았다.

귀에 또렷이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금속 안쪽 어딘가가 한 번 울고, 그 울림이 손바닥으로 되밀려 오는 느낌이 퍼졌다. 세라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 한 번 더 눌러 보고 나서야 나를 봤다.

"정문 앞 빈 터에서도 같은 각도로 해 봐."

우리는 말뚝선에서 물러나 정문 앞 넓은 터로 자리를 옮겼다.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였다. 왕국 전령들이 좋아할, 누가 봐도 앞줄처럼 보이는 공간. 세라는 같은 발로 서고 같은 쪽 손으로 검집을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

브론이 코끝으로 숨을 뱉었다.

"사람 보라고 붙은 물건이면 여기서도 울었겠지."

미리엘이 세라 손등을 살폈다.

"저림은요?"

"없어."

세라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얼굴을 더 굳혔다. 반응이 있다는 사실보다 반응이 자리를 고른다는 사실이 더 거슬리는 눈치였다. 넓고 밝은 앞마당에선 잠잠한데, 북벽 말뚝선과 축축한 통로 입구에서만 손바닥이 저민다. 누가 이 물건을 쥐어 주며 무슨 이름을 붙였든, 적어도 이 반응만큼은 사람 체면보다 바닥 결을 먼저 본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은 감시탑 아래 판석 통로 입구였다. 돌바닥 틈에 습기가 오래 밴 자리라 아침에도 축축한 냄새가 올라왔다. 내가 왼발 반 걸음 뒤를 가리켰다.

"여기. 검집 끝은 바닥 말고 벽선 쪽. 숨 멈추고."

세라가 그대로 섰다.

이번 울림은 더 낮고 길었다. 칼이 빠지는 소리도, 금속끼리 긁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검집 깊은 데서 짧은 숨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세라 손목 안쪽 핏줄이 순간 움찔했고, 미리엘이 바로 그 손목을 잡았다.

"위로 안 올라와요."

"뭐가."

"성성력 흐름이요. 축복이면 손목에서 팔 쪽으로 감싸 올라오는데, 이건 반대로 아래로 파고들어요. 사람보다 자리와 금속 결을 먼저 찾는 쪽이에요."

브론이 쇠고리와 검집 끝을 나란히 맞대 보며 중얼거렸다.

"절단 전에 박자부터 잡는 계열이군."

세라가 돌아봤다.

"알아듣게 말해."

브론은 검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힘으로 밀어 자르는 물건이면 하중 먹는 자리부터 찾아. 그런데 이건 아니야. 먼저 맞는 자리를 읽고, 그다음에 박자를 맞추고, 끝에 끊는 쪽이지. 왕실 장식이면 사람 눈부터 끌 텐데, 이건 바닥하고 벽선을 더 좋아하잖아."

나는 돌턱, 바닥 틈, 검집 끝이 겹치는 자리를 다시 봤다. 왕국이 붙이려는 이름은 공인 영웅 후보였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름보다 훨씬 오래된 작업 방식이었다. 누군가를 앞줄에 세우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를 열고 버티게 하려고 만든 도구. 사람이 도구를 드는 게 아니라, 그 도구가 맞는 사람과 자리를 골라 세우는 물건 같았다.

세라가 낮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축복이 아니라는 건가."

미리엘은 곧장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세라 손목에 남은 떨림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축복이 아니라고 단정하긴 일러요. 다만 왕실이 말하는 종류는 아닐 거예요. 사람을 높이는 힘이라기보다 구조를 열거나 끊는 데 먼저 반응하는 쪽."

눈턱 위에서 내려온 리에트가 짧게 말했다.

"그럼 더 불쾌하지."

세라가 힐끗 올려다봤다.

"뭐가."

"사람들은 네가 선택받았다고 떠들겠지. 그런데 실제론 네가 어디에 세워질지만 미리 정해 둔 채 부르는 거잖아."

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돌턱에 한 번 더 눌렀다가 바로 떼었다. 아주 짧은 울림이 돌아왔고, 이번엔 그녀가 먼저 손을 거둬들였다. 손아귀를 편 채 한 번 쥐었다 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가 천천히 풀렸다.

"한 번 더는 안 해."

"왜?"

"이상해서."

그 짧은 말이 오히려 정확했다. 자랑보다 거부감이 먼저 드는 반응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기사단 전령이었다. 벨로네 가문 문장이 찍힌 붉은 봉서를 들고 왔지만, 그는 세라 얼굴보다 검집을 먼저 봤다.

"세라 벨로네 경. 왕실 사절 쪽과 기사단 쪽 모두 같은 요청입니다. 반응 무구 점검 절차를—"

세라 눈썹이 즉시 올라갔다.

"경?"

전령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자세를 고쳤다.

"공인 영웅 후보단 예비 편입 문안이 이미 내려왔습니다. 왕국은 승전의 상징과 관련 자료를 정식 점검하려 하고—"

브론이 비웃듯 코를 울렸다.

"아침에 한 번 울린 걸로 벌써 상징이 됐군."

전령은 그 말을 무시하고 봉서를 펼쳤다. 위쪽 줄엔 `왕실 자산 임시 확인`, `가문 검계 반응 무구 재검`, `상급 기사 확인 우선`이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아래 작은 줄엔 `단독 보관 금지`, `현장 기록과 분리 검수`, `반응 재현 시 증인 제한`이 붙어 있었다.

나는 맨 아래 줄에서 시선을 멈췄다. 결국 하려는 일은 하나였다. 세라와 이 자리, 그리고 우리가 읽어 낸 반응을 떼어 놓는 일.

"세라. 밑줄 셋 봐."

그녀는 서류를 받아 아래쪽을 훑었다.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증인 제한?"

"반응 무구는 왕실 보관 절차를—"

전령이 다 말하기도 전에 세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검집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고, 세라는 그 손이 닿기 전에 검집을 직접 들어 자기 허리 옆으로 빼 버렸다.

"이건 내 가문의 장식도 아니고, 왕실 표지도 아니다."

뒤에 서 있던 병사 둘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세라가 자기 이름값을 버린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이름이 무엇 위에 올라탈지를 남이 정하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전령이 억지 웃음을 걸었다.

"영애, 절차를 거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호를 위한—"

"보호라면 왜 자리랑 사람을 떼려 하지?"

세라는 서류 끝 작은 줄을 검집 끝으로 톡 쳤다.

"현장 기록과 분리 검수. 증인 제한. 이게 보호야?"

전령은 이번엔 바로 답을 못 했다. 큰 줄은 빨리 읽어도 이런 질문엔 늘 느려진다. 리에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남 손으로 울리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겠지. 그래야 네 이름을 붙일 수 있으니까."

브론도 거들었다.

"그리고 우리 손은 빼겠지. 나중에 계열 이름도 자기들 식으로 적으려면."

전령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

감시탑 아래 장비 적치칸은 전초 안에서도 가장 꾸밈이 없는 자리였다. 벽엔 오래된 고정구가 드문드문 박혀 있고, 바닥엔 손질하다 만 못판과 철편이 굴러다녔다. 보기 좋은 곳이 아니라서 오히려 진짜 결이 잘 남았다. 문턱 안쪽 왼편엔 기름 먹인 천이 덮인 상자 셋이 낮게 포개져 있었고, 오른편엔 부러진 창자루와 꺾인 쇠갈고리가 정리도 덜 된 채 쓸려 모여 있었다. 가운데 작업대는 비어 있었지만, 누군가 오래전부터 같은 길이의 물건들을 같은 방향으로만 내려놓아 왔다는 습관이 바닥 긁힘에 남아 있었다.

브론은 검집과 못판 조각, 고정구 철편 셋을 바닥에 길게 늘어놓고 쪼그려 앉았다. 손놀림은 거칠어 보여도 맞춰 볼 땐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한 번 틀리면 바로 떼고 다시 잡았다. 세라는 그 옆에서 말없이 내려다봤다.

"봐."

브론이 고정구를 뒤집어 안쪽 홈을 드러냈다.

"왕실 문양 쪽은 겉장식이야. 진짜 결은 안쪽이지."

그는 검집 안쪽 금속선을 그 홈 위에 맞춰 보였다. 닳은 폭이 거의 같았다.

"북방 고정선 잔해도 이쪽하고 닿아. 자르기 전에 줄 맞추고 버티는 쪽을 살짝 비틀어 놓는 방식. 들고 뽐내는 물건이라기보다, 맞는 자리에서만 말을 거는 작업 도구에 가깝다."

브론은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못판 조각을 검집 아래 깔고 쇠고리를 세 번째 홈에 올린 뒤 손끝으로 밀었다. 삐걱, 하는 짧은 마찰음이 난 뒤 세 물건이 한 박자 늦게 멈췄다. 엇갈려야 할 조각들이 억지로 맞는 게 아니라, 오래 같이 굴러 본 것처럼 같은 자리에서 걸렸다.

"이 간격 봐." 브론이 말했다. "한 칸, 반 칸, 긴 칸. 말뚝선에서 네가 짚은 걸음하고도 닮았어."

나는 적치칸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분필을 꺼냈다. 북벽 첫 말뚝선, 판석 통로 입구, 적치칸, 기록칸. 직선으로 잇자 길이보다 박자감이 먼저 살아났다. 한 줄로 곧게 뻗는 도면이 아니라, 멈추고 비켜 서고 다시 맞춰 들어가는 작업 순서였다. 전초 안쪽 물건 동선과 북벽 바깥 접근선이 같은 습관으로 묶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리엘이 촛불을 가까이 끌어와 검집 그림자를 살폈다.

"울릴 때마다 빛이 퍼지지 않아요. 아래로 모여요."

"아래로 모인다는 게 뭔데."

내가 묻자 그녀가 검집 끝과 바닥 틈 사이를 가리켰다.

"사람 몸을 감싸는 쪽이면 손에서 팔로 올라와야 해요. 그런데 이건 바닥 틈을 먼저 더듬어요. 사람을 거쳐 구조선으로 가는 쪽이에요."

미리엘은 자기 손으로 세라 손등을 덮고, 다른 손으론 촛불 그림자 끝을 짚었다.

"손목 안쪽 떨림도 똑같아요. 몸을 밀어 올리는 반응이 아니라, 아래 박자를 맞추려는 반응이에요. 누군가를 축복해 올려세우는 힘이면 이렇게 내려가지 않아요."

세라는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조금 더 줬다. 그러다 문득 놓칠 뻔한 듯 손끝이 미끄러졌고, 그녀는 검집 입구를 다시 움켜쥐며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럼 나한테 붙은 힘이 아니라, 내가 서는 자리를 고르는 힘이라는 소리네."

"그렇게 볼 수 있죠."

미리엘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더 위험해요. 누가 자리를 대신 정해 주면 반응도 그 사람 손으로 넘어가니까."

리에트가 벽에 기대며 말했다.

"네 이름이 앞줄에서 쓰일수록 더 위험하겠군."

세라는 대꾸 대신 검집 끝을 바닥 틈 옆에 다시 가져다 댔다. 이번엔 울림이 오기 직전 손을 멈췄다. 반응을 기다린 게 아니라, 반응이 돌아오기 좋은 각도를 자기 몸으로 먼저 찾는 느낌이었다. 아주 짧은 떨림이 올라오자 그녀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기분 더럽네."

리듬을 읽는 도구라는 말보다 그 한마디가 먼저 맞았다. 왕실 사절이 붙인 칭호는 목에 걸 수 있지만, 손바닥에서 되돌아오는 울림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적치칸 바닥에 그은 분필선 위에 손가락을 하나씩 놓았다.

"반응 있는 자리가 다 이 축 안에 있어."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방 고정선 잔해하고도 겹친다."

미리엘이 덧붙였다.

"성도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이 잡는 방향하고도 안 어긋나고요."

리에트는 밖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돌아섰다.

"그럼 다음 문턱은 세라 혼자 서서 열릴 문이 아니군."

나는 분필선 한복판, 적치칸과 기록칸이 겹치는 자리에 네 줄을 적었다.

`세라 반응 / 브론 판독 / 미리엘 해독 / 에이드리언 배치`

세라는 그 글씨를 한참 내려다봤다. 검집을 쥔 손이 조금 떨렸지만 이번엔 숨기지 않았다. 떨림을 억지로 누르기보다 작업대 가장자리에 손등을 가볍게 붙여 버텼다.

"선택받는 기사라는 말은 참 편하겠네."

브론이 올려다봤다.

"뭐가."

"혼자 잘난 줄로 보이잖아. 그런데 실제론 다 같이 맞춰야 겨우 한 번 울리는 거면, 그건 영웅담보다 작업 순서지."

나는 선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줄 아래 작은 글씨를 하나 더 붙였다.

`앞줄은 빌려도, 열쇠는 넘기지 않는다.`

세라는 그 문장을 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왕국이 이름 붙이기 전에, 이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부터 내가 알아야 한다."

그 한마디가 오늘 처음 나온 진짜 대답이었다. 거절도 수락도 아니고, 자기 자리를 남보다 먼저 자기가 읽겠다는 말.

***

적치칸 바깥에서 먼저 들린 건 발소리보다 종이 마찰음이었다.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들어온 건 기사단 전령이 아니라 성도 봉함 인원이었다. 회색 띠를 두른 사내 하나와 서기 둘. 그들은 적치칸 물건들을 한 바퀴 훑더니 세라와 검집, 브론 앞 철편, 바닥 분필 자국 순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눈이 아니라 손이 먼저 분류 순서를 세우고 있었다.

"절단 계열 성성력 반응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꺼낸 사내는 미리엘을 보고 있었지만, 손은 이미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확인하러 온 얼굴이 아니라 먼저 분류 이름을 고르러 온 손이었다. 서기 하나는 작업대 왼쪽 빈칸을 훑더니 펜촉을 올려 둔 채 세라 검집 길이와 철편 수를 먼저 재고 있었다. 사람보다 물건 개수가 먼저 적히는 순간이었다.

미리엘이 차갑게 되물었다.

"누가 그 말을 썼다고 하던가요."

"전초 내 보고선에서—"

"그럼 보고선부터 가져오세요. 남이 한 말에 이름 붙이는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사내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 틈에 브론이 서류 가장자리를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종이 끝이 바스락거리며 접혔다.

"어디 보자."

그가 눈을 훑다 한 줄에서 멈췄다.

`전초 방어 자산 재검인 / 공동 관리 장비 계열 확인 / 무구 반응 관련 부품 즉시 인계`

브론 얼굴이 천천히 식었다.

"공동 관리 장비 계열?"

나는 그가 걸린 단어를 바로 알아챘다.

"왜."

브론은 종이를 내 쪽으로 돌려 주며 말했다.

"이 표현, 내가 오늘 처음 쓴 말이 아냐. 적어도 군수선 누군가는 이 계열을 이미 알고 있었단 뜻이지. 이름은 다 안 적어 놨지만 방향은 알고 있어."

세라가 곧바로 물었다.

"왕국이?"

"왕국 혼자겠어."

미리엘이 낮게 말했다.

"성도 봉함선이 같이 묻어 있는 걸 보면."

봉함 인원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서기 하나가 세라 검집 쪽으로 한 걸음 더 들이밀었다. 세라는 검집을 작업대에서 떼어 허리 옆으로 옮기며 그 손을 막았다. 짧은 동작이었지만 말보다 빠르고 분명했다. 이건 아직 네 장부 줄에 올라갈 물건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나는 적치칸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둡고 좁은 복도 끝엔 왕국 전령 둘이 이미 서 있었다. 성도 봉함 인원이 들어오기 전부터 같은 문간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른 옷을 입었지만 기다리는 자리는 하나였다. 누가 먼저 이름을 붙이느냐 경쟁하는 척, 같은 물건을 같은 줄로 가져가려는 손들.

"질문 하나." 내가 말했다. "지금 확인하려는 게 반응인가, 계열 이름인가, 아니면 인계 순서인가."

회색 띠를 두른 사내가 입꼬리를 눌렀다.

"현장 질서를 위한 절차입니다."

"그럼 셋 다군."

그는 대답 대신 문서 아래칸을 접어 감췄다. 감출수록 더 분명해졌다. 큰 줄에는 반응 무구, 작은 줄에는 관련 부품, 더 작은 줄에는 현장 기록과 증인 제한. 이름은 세라를 앞세우지만 실제로 가져가려는 건 검집과 철편, 분필선 위에 올라온 해석 순서였다.

세라는 검집 끝으로 작업대 모서리를 톡 두드렸다.

"내 검이 울린 자리는 여기야."

그녀는 북벽 말뚝선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걸 떼어 가져가서 다른 데서 울리면 그때 가져가."

봉함 인원 둘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반박은 못 했다. 이미 정문 앞 빈 터에서 울리지 않았다는 말을 누군가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조급해진 얼굴이었다. 자리와 증인을 떼기 전까진 자기들 문장이 힘을 못 얻으니까.

브론이 종이를 다시 훑으며 투덜거렸다.

"웃기는 줄이네. 반응 무구, 관련 부품, 보조 판독 자료. 셋을 한 묶음처럼 적어 놨어."

"뭐가 웃겨?" 리에트가 물었다.

"셋 중 하나라도 남 손에 먼저 넘어가면 나머지 둘도 따라간다는 뜻이거든.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나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바로 뒤집었다. 세라 검집을 왕실 자산으로 묶고, 브론 자료를 공동 관리 계열로 묶고, 미리엘 해석을 교리 검증으로 묶으면 남는 건 무엇인가. 현장에 먼저 서 있었던 사람과 판단 순서가 통째로 지워진다. 결국 에이드리언 베일이 한 일도, 파티가 어떤 줄을 지켰는지도 기록 아래쪽으로 밀려난다.

봉함 인원이 물러난 뒤, 정문 쪽에서 다시 문건이 들어왔다. 이번엔 북방 군수실 서기관이었다. 그는 성도 쪽보다 더 말이 짧았다. 상자 뚜껑을 열지 않고도 안의 수량을 다 적어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작업대 빈칸을 보고, 세라 검집을 보고, 브론 손의 철편을 보고, 마지막으로 내 분필선을 봤다. 판단보다 수거 순서를 세우러 온 눈이었다.

"공식 요구서입니다."

그가 내민 종이엔 첫 줄부터 냄새가 달랐다. 칭찬도 축복도 없었다. 대신 재검인, 공동 관리, 즉시 인계, 중앙 검인, 제출 시한 같은 단어만 촘촘히 붙어 있었다.

`전초 방어 자산 재검인 / 왕국 공동 관리 장비 계열 확인 / 무구 반응 관련 부품 즉시 인계`

맨 앞엔 세라 반응 무구가 올라 있었다. 그다음 줄엔 브론 판독 자료와 고정선 잔해가, 마지막 줄엔 우리 파티가 `동행 협조 인원`이라는 식으로 묶여 있었다. 사람보다 물건과 문장이 먼저 정리돼 있었다.

나는 종이를 아래에서부터 다시 읽었다. 세라를 앞줄에 세운다. 그 아래 브론 자료를 묶는다. 마지막엔 파티를 협조 인원으로 내린다. 영웅 브랜딩과 자료 탈취가 한 장 안에서 같이 돈다. 게다가 줄 사이사이에 작은 글씨로 `현장 기록 사본 우선 제출`, `무구 반응 재현 시 지정 참관인 입회`, `판독 문구 임의 기입 금지`까지 달려 있었다. 이건 단순한 검사표가 아니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본 걸 적을 수 있는지부터 가르는 서류였다.

"답은 내일 1각 전입니다."

군수실 서기관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연 시 중앙 검인 절차가 우선됩니다."

세라는 요구서 사본 한 장을 손가락으로 끌어 자기 쪽으로 빼놓았다.

"원본은 가져가. 사본은 남겨."

서기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를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릴 무엇부터 자르려는지 읽어야 하니까."

그녀는 더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서기관은 마지못해 사본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성도 봉함 인원도 더 캐묻지 못했다. 여기서 말을 늘일수록 자기들이 반응 무구보다 관련 부품과 판독 자료를 더 탐낸다는 사실만 드러난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이 더 조용해졌다. 바깥 전초는 벌써 `공인 영웅 후보` 소문으로 들끓을 텐데, 안쪽 작업대 위엔 다른 이름들이 먼저 눌러앉았다. 검집. 잔해. 판독. 해석. 증인. 공적. 누가 무엇을 먼저 가져가면 나머지가 어떻게 흔들릴지 뻔히 보이는 배열이었다.

브론이 사본 끝 약호를 손톱으로 긁었다.

"이거 낯익다."

"어디서."

"북방 전초 옛 정비표에서. 정확히 같진 않은데 같은 줄기야. 누가 내 앞에서 먼저 이름을 반쯤 알아본 셈이지."

브론은 약호 아래의 짧은 숫자 배열까지 가리켰다. 세 칸 건너 하나, 짧은 선 둘, 다시 긴 선 하나. 그는 오늘 아침 말뚝선에서 내가 걸음 셌던 박자와 닮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세라 검집이 어디에 쓰이는지 겨우 읽기 시작한 순간, 브론 자료도 이미 누군가 장부 위에서 같은 줄로 묶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미리엘이 사본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성도 쪽 질문지도 똑같아요. 축복인지 묻는 척하면서, 실제론 절단 계열인지부터 독점하려 해요. 이름을 먼저 정하면 풀이 주도권도 가져갈 수 있으니까."

리에트는 문틈 밖 어둠을 한 번 보고 돌아섰다.

"밖에선 벌써 영웅 후보 소문이 돌고 있어. 안쪽에선 공동 관리 장비 계열이 돈다. 오늘 밤 지나면 둘 다 더 커질 거다."

세라는 사본 첫 줄을 다시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왕국 공동 관리`라는 문구에서 잠깐 멈췄다. 그녀는 그 줄을 손톱으로 눌렀다가 천천히 떼었다. 정문 앞에서 보여 준 분노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되, 지금은 버티는 순서를 정하겠다는 쪽이었다.

"내 이름을 세우고, 그 밑에 이걸 다 달겠다는 거지."

그 말에 누구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 같은 걸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작업탁 위에 사본, 검집, 못판 조각, 브론 메모를 나란히 놓았다. 다른 손이 남긴 자국인데도 한 줄처럼 보였다. 적은 우리를 더 안쪽으로 밀고, 왕국과 성도는 우리가 딛는 줄을 장부로 옮기려 한다. 라그나드 쪽 시험은 칼끝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읽은 박자를 누가 자기 이름으로 적느냐 싸움으로 그대로 넘어왔다.

세라가 사본 맨 위를 눌렀다.

"내일 아침 전까지 이 서류가 먼저 가져가려는 게 뭔지 정리한다."

미리엘이 곧장 받았다.

"반응 무구, 관련 부품, 판독 자료, 현장 증인. 넷을 떼는 순서부터요."

브론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내가 뭘 더 숨겨야 하는지도."

리에트는 복도 끝을 가리켰다.

"면담 줄도 올 거다. 세라 단독으로 부르겠지."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으로 검집 끝을 한 번 감쌌다. 아주 짧게, 북벽 말뚝선에서처럼. 울림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녀 표정이 더 단단해졌다. 반응이 없는 자리에서까지 남 손 말에 흔들릴 생각은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요구서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동행 협조 인원은 지시 시 즉시 대기할 것.`

결국 저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남겨 두는 척하면서 문장 아래 대기 줄로 묶으려 한다. 북방 심연 문턱보다 먼저 다가온 건 칼이 아니었다. 누가 주인인지 미리 적어 두려는 장부였다.

세라는 검집을 들어 작업탁 한가운데에 가로로 내려놓았다. 왕실 사절 앞에서보다 더 조용한 손놀림이었다.

"이건 안 넘겨."

브론이 못판 조각을 그 옆에 놓았다.

"이것도."

미리엘이 사본 위에 자기 메모를 덮었다.

"해석도요."

리에트는 문간 가까운 빈 상자를 끌어다 입구를 반쯤 막았다.

"사람도 함부로 못 데려가게."

나는 빈 종이 한 장을 끌어당겨 맨 위에 적었다.

`무엇을 먼저 가져가려 하는가.`

그리고 그 아래 줄을 나눴다.

반응.

자료.

사람.

공적.

네 줄이 종이 위에 놓이자 내일 부딪칠 순서도 또렷해졌다. 누가 검을 쥐는가만의 싸움이 아니다. 누가 이름을 붙이고, 누가 자료를 들고, 누가 앞줄을 차지하느냐의 싸움이다. 그 순서가 고정되면 다음 문턱을 여는 열쇠도 남 손으로 넘어간다.

북벽 아래서 세라 검집이 울렸을 때보다도, 지금 이 장부가 더 거슬렸다.

울림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류는 늘 가장 먼저 거짓말을 한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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