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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는 검, 선택하는 기사

북벽 아래 첫 말뚝선은 새벽빛을 받아도 차가웠다. 감시탑 그림자가 오른쪽 판석 통로까지 길게 누워 있었고, 왼쪽 눈 둔덕 아래에는 밤새 녹은 물이 얇은 얼룩으로 남았다. 정문 앞 빈 터는 그보다 넓고 밝았다. 누가 봐도 사람을 세워 보여 주기 좋은 자리. 반대로 말뚝선과 판석 통로 입구는 젖은 돌 냄새와 쇠 냄새가 엉킨, 자랑보다 작업이 먼저 떠오르는 자리였다.

나는 세 자리를 한눈에 넣고 걸음을 다시 셌다. 말뚝선에서 판석 입구까지 여덟 걸음, 거기서 왼쪽 반 걸음, 통로 벽선에 검집 끝이 닿을 높이까지 손 하나. 뒤쪽에는 병사 셋만 남겼다. 그들 너머 정문 쪽에는 왕실 사절의 푸른 깃발이 낮은 바람에 흔들렸고, 기사단 전령 둘이 말안장 끈을 풀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전초는 이미 세라가 ‘공인 영웅 후보’가 되었다는 소문으로 술렁였지만, 이 자리에선 아직 이름보다 발끝이 먼저였다.

세라는 말뚝선 앞에 섰다. 검은 검집은 왼손에, 오른손은 허리띠 위에 두었다. 브론은 못판 조각과 쇠고리를 안고 말뚝 아래로 쭈그려 앉았고, 미리엘은 세라 손목 안쪽을 볼 수 있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리에트는 눈턱 위에 올라 정문과 감시탑 계단을 번갈아 살폈다. 내가 손을 올리자 남은 병사들도 자연스럽게 숨을 죽였다.

"여기서 한 번. 검집 끝은 돌턱. 힘은 주지 말고."

세라가 검집 끝을 돌에 대었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대신 금속 안쪽에서 짧은 울림이 한 번 돌아왔다. 검집이 떨렸다기보다, 돌과 쇠 사이에 숨어 있던 박자가 손바닥으로 되밀려 온 느낌이었다. 세라 눈꺼풀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녀는 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 한 번 더 같은 각도로 눌렀다가, 그제야 손가락을 폈다.

"손목."

미리엘이 짧게 말했다. 세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목을 내밀었다. 미리엘의 손끝이 살에 닿자 세라가 턱을 굳혔다.

"위로 번지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은 뒤에서 해."

나는 정문 앞 빈 터를 가리켰다.

"같은 발, 같은 손, 같은 각도. 사람들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에서 해 보자."

세라는 대꾸 없이 걸었다. 병사 셋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정문 앞 빈 터는 밝았다. 왕국 전령들이 좋아할 자리였다. 승전 보고를 읽고, 후보자 이름을 부르고, 박수를 붙이기 좋은 곳. 세라는 그 한가운데에서 검집 끝을 같은 높이로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만 지나갔다. 말뚝선에서 느꼈던 짧은 되밀림도, 손목 안쪽 저림도 없었다. 세라는 검집을 떼어 들고 잠시 바닥을 내려다봤다.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안심보다 불쾌감이 먼저 얼굴을 스쳤다.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 보라고 만든 장식이면 여기서 먼저 울었겠지."

세라는 고개만 돌렸다.

"웃겨?"

"아니. 더 기분 나쁘다고."

그는 못판 조각을 손바닥에서 굴렸다.

"사람 눈은 안 보고 바닥 결을 본다는 뜻이니까."

마지막은 감시탑 아래 판석 통로 입구였다. 통로 벽은 물기 때문에 검게 젖어 있었고, 바닥 틈에는 오래된 흙과 기름이 끼어 있었다. 나는 왼발 반 걸음 뒤, 벽선 아래 낮은 홈을 짚었다. 세라는 그대로 섰다. 이번에는 검집 끝을 바닥이 아니라 벽과 바닥이 만나는 선에 붙였다.

낮고 긴 울림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깊었다. 검이 빠지는 소리도, 쇠가 긁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젖은 돌 안에서 누군가 짧게 숨을 내쉰 듯했다. 세라 손목 안쪽 핏줄이 순간 움찔했고, 미리엘이 곧장 그 손목을 잡았다.

"아래로 가요."

"성성력이?"

"네. 손에서 팔로 올라오지 않아요. 사람 몸을 감싸는 힘이면 위로 퍼져야 하는데, 이건 검집 끝에서 바닥 틈을 먼저 더듬어요. 축복을 증폭한다기보다, 구조를 확인하려는 반응이에요."

세라가 짧게 숨을 삼켰다.

"구조를 확인한다. 내가 아니라?"

미리엘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세라 님 손을 거치긴 해요. 하지만 목적지는 세라 님 몸이 아니에요. 자리예요."

리에트가 눈턱 위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정문 쪽을 한 번 보고 나서야 말했다.

"사람들은 네가 선택받았다고 떠들 거다. 그런데 실제 반응은 네가 어디에 세워질지를 먼저 읽는군."

세라는 말하지 않았다. 검집 끝을 벽선에서 떼어 들고 손아귀를 한 번 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가 천천히 혈색을 되찾았다.

"한 번 더 해 볼까?" 내가 물었다.

"아니."

그녀가 바로 잘랐다.

"이상해. 그리고 이 이상함을 남들 앞에서 더 키울 필요는 없어."

좋은 판단이었다. 반응은 이미 충분했다. 그 반응은 세라 개인의 혈통이나 왕실 칭호보다 위치, 각도, 박자에 민감했다. 정문 앞 빈 터에서는 침묵하고 북벽 말뚝선과 판석 통로에서만 대답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왕국이 붙이려는 ‘영웅 후보’라는 이름은 반쯤 빗나갔다.

그때 감시탑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기사단 전령이었다. 벨로네 가문 문장이 찍힌 봉서를 들고 왔지만, 그의 눈은 세라 얼굴보다 검집에 먼저 닿았다. 그 순서 하나만으로도 용건은 뻔했다.

"세라 벨로네 경. 왕실 사절단과 기사단 양쪽에서 같은 요청이 내려왔습니다. 반응 무구의 정식 점검 절차를—"

세라 눈썹이 올라갔다.

"경?"

전령은 순간 말을 멈췄다. 하지만 곧 훈련받은 얼굴로 돌아왔다.

"공인 영웅 후보단 예비 편입 문안이 이미 전달됐습니다. 북방 전초 승전 상징과 관련 자료를 정식 확인해야 한다는—"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침에 두 번 울렸더니 벌써 상징이군. 빠르기도 하지."

전령은 못 들은 척 봉서를 펼쳤다. 위쪽 큰 글씨에는 ‘왕실 자산 임시 확인’, ‘가문 검계 반응 무구 재검’, ‘상급 기사 확인 우선’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는 더 중요했다. ‘단독 보관 금지’, ‘현장 기록과 분리 검수’, ‘반응 재현 시 증인 제한’.

나는 아래 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세라. 밑줄 세 개."

세라는 서류를 받아 읽었다. 얼굴에서 불쾌함이 사라졌다. 사라진 게 아니라 더 차가워졌다.

"증인 제한?"

"보호 절차입니다." 전령이 말했다.

"보호라면 왜 사람과 자리를 떼지?"

세라는 검집을 자기 허리 옆으로 옮겼다. 전령 손이 무의식적으로 검집 쪽으로 따라가다가 멈췄다. 세라가 그 손보다 한 박자 빨랐다.

"이건 내 가문의 장식도 아니고, 왕실 표지도 아니다."

뒤쪽 병사 둘이 숨을 삼켰다. 세라가 벨로네라는 이름을 버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으로 그 이름을 자기가 고른 쪽에 세웠다. 왕실이 편한 자리에 놓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자기 손의 선을 정한 것이다.

전령은 억지 웃음을 얹었다.

"영애, 절차를 거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점검 뒤 다시—"

"다시 돌려준다는 말을 서류엔 왜 안 썼지?"

세라가 봉서 끝을 검집으로 톡 쳤다.

"현장 기록과 분리 검수. 증인 제한. 단독 보관 금지. 이 셋을 쓰면서 보호라고 부르면, 보호받는 사람은 누군데? 나야, 검이야, 아니면 네가 가져가려는 보고서야?"

전령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큰 글씨는 빨리 읽혀도 이런 질문 앞에선 대답이 늘 느려진다. 그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나는 전령에게 봉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사본을 요구했다. 그가 망설이자 리에트가 계단 쪽을 막아섰고, 병사 셋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발 물러났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왕실 봉서 앞에서 몸을 바로 세웠을 것이다. 지금은 세라 검집의 침묵과 울림을 직접 봤다. 그 차이가 작게나마 우리 쪽으로 무게를 옮겼다.

전령은 결국 사본 한 장을 남기고 물러났다. 정문 쪽으로 돌아가는 그의 등 뒤에서 왕실 사절 깃발이 다시 흔들렸다. 바람은 같았지만 깃발의 의미는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세라를 높이 세우려는 게 아니라, 세라를 세운 자리를 먼저 가져가려 했다.

우리는 곧장 감시탑 아래 장비 적치칸으로 들어갔다.

적치칸은 전초 안에서도 가장 꾸밈없는 방이었다. 왼쪽 벽에는 오래된 고정구가 드문드문 박혀 있었고, 오른쪽에는 부러진 창자루와 꺾인 쇠갈고리가 낮게 쌓여 있었다. 바닥엔 기름이 밴 천이 남긴 자국과 못판에 긁힌 흔적이 겹쳐 있었다. 가운데 작업대는 비어 있었지만, 누군가 오래전부터 같은 길이의 물건을 같은 방향으로만 내려놓은 습관이 바닥 흠집에 남아 있었다.

브론은 검집과 못판 조각, 고정구 철편을 바닥에 나란히 놓았다. 손놀림은 거칠었지만 맞춰 볼 때는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한 번 틀리면 바로 떼고 다시 잡았다. 세라는 그 옆에 서서 내려다봤고, 미리엘은 촛불을 낮게 끌어와 그림자 방향을 맞췄다.

"겉문양 말고 안쪽을 봐."

브론이 고정구를 뒤집었다. 안쪽 홈이 드러났다. 닳은 폭이 검집 안쪽 금속선과 거의 같았다. 그는 못판 조각을 검집 아래에 깔고, 쇠고리를 세 번째 홈에 세운 뒤 손끝으로 천천히 밀었다.

삐걱.

세 물건이 한 박자 늦게 멈췄다. 억지로 맞춘 게 아니라, 오래 같이 쓰였던 물건처럼 같은 자리에서 걸렸다.

"한 칸, 반 칸, 긴 칸." 브론이 말했다. "네가 아까 걸음 센 박자하고 닮았어. 말뚝선에서 통로까지 여덟 걸음, 왼쪽 반 걸음, 벽선 하나. 우연으로 보기엔 습관이 너무 닮았지."

나는 분필을 꺼내 바닥에 그었다. 북벽 말뚝선, 정문 앞 빈 터, 판석 통로 입구, 적치칸, 안쪽 기록칸. 직선 지도가 아니라 작업 순서가 나왔다. 서고, 멈추고, 비켜 서고, 맞춰 들어간다. 전초의 물건 동선과 북벽 바깥 접근선이 같은 박자를 쓰고 있었다.

미리엘이 검집 그림자에 손을 얹었다.

"성도 문서고 하층에서 봤던 대체 분류열과도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거긴 사람을 칸에 넣는 쪽이었고, 여긴 구조를 여는 쪽이에요."

"그럼 성도 쪽이 탐낼 만하네." 리에트가 문간에서 말했다.

"이미 탐내고 있어요."

미리엘은 전령이 남긴 봉서 아래칸을 손끝으로 눌렀다.

"축복인지 묻는 척할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는 이 반응을 어느 계열의 이름으로 먼저 부를지 정하려 들겠죠. 이름을 먼저 정하면 해석의 주도권도 가져가니까."

세라는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조금 더 줬다. 그러다 검집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하자, 그녀는 놀란 듯 다시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받았다는 말보다, 내가 어느 자리에 세워질지가 문제라는 거네."

"그리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 정하느냐가 문제지." 내가 말했다.

방 안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나는 분필선 한복판에 네 가지를 적었다.

세라의 반응.

브론의 판독.

미리엘의 해독.

내 배치.

그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앞줄은 빌려도, 열쇠는 넘기지 않는다.

세라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검집을 쥔 손이 조금 떨렸지만 숨기지 않았다. 손등을 작업대 가장자리에 붙여 버티며 말했다.

"선택받는 기사라는 말은 편하겠네."

브론이 올려다봤다.

"뭐가."

"혼자 잘난 줄로 보이잖아. 그런데 실제론 다 같이 맞춰야 겨우 한 번 울리는 거라면, 그건 영웅담이 아니라 작업 순서야."

그 말이 정확했다. 왕국은 한 사람을 앞줄에 세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음 문턱은 혼자 잘난 얼굴로 열리지 않는다. 세라가 자리를 지키고, 브론이 물건의 홈을 읽고, 미리엘이 성성력의 흐름을 갈라 보고, 내가 그 요소들을 한 장에 배치해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남의 서류에 먼저 넘어가면 전체 박자가 바뀐다.

"그럼 우리도 순서를 정하자." 내가 말했다.

브론은 못판 조각을 천에 싸서 자기 허리 안쪽에 넣었다. 미리엘은 봉서 사본 아래의 작은 글씨를 베껴 적고, 그 종이를 따로 접었다. 리에트는 적치칸 문간에 빈 상자를 끌어다 놓아 밖에서 방 안을 한눈에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라는 검집을 작업대 한가운데에 두지 않았다. 허리 옆, 자기 손이 가장 빨리 닿는 자리에 다시 묶었다.

그 순간 적치칸 바깥 복도에서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성도 봉함 쪽 사람들이었다. 회색 띠를 두른 사내와 서기 둘이 문간에 섰다. 그들은 방 안을 한 바퀴 훑었다. 세라 검집, 브론 손의 철편, 미리엘의 메모, 바닥 분필선. 사람 얼굴보다 물건과 글씨를 먼저 세는 눈이었다.

"절단 계열 성성력 반응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회색 띠 사내는 미리엘을 보고 있었지만, 손은 이미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서기 하나는 작업대 왼쪽 빈 곳에서 펜을 든 채 검집 길이를 재고 철편 개수를 세고 있었다.

미리엘이 차갑게 물었다.

"누가 그 말을 썼다고 하던가요."

"전초 내 보고에서—"

"그럼 보고부터 가져오세요. 남이 한 말을 떼어 와서 이름 붙이는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 틈에 브론이 서류 아래쪽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종이 끝이 바스락거리며 접혔다.

"어디 보자."

그는 한 줄에서 멈췄다.

전초 방어 자산 재검인. 왕국 공동 관리 장비 계열 확인. 무구 반응 관련 부품 즉시 인계.

브론 표정이 식었다.

"공동 관리 장비 계열?"

나는 그가 걸린 단어를 알아챘다.

"왜."

"이 표현, 내가 오늘 만든 말이 아니야. 누군가 이미 이 계열을 반쯤 알고 있어. 이름은 덜 적었는데 방향은 잡았어."

세라가 곧장 물었다.

"왕국이?"

브론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왕국 혼자였으면 성도 쪽 질문지가 이렇게 빨리 안 왔겠지."

미리엘이 서류의 회색 봉함 표시를 보았다.

"성도 봉함 쪽과 군수실 쪽이 같은 단어를 나눠 쓰고 있어요. 서로 다른 척하지만, 가져가려는 자리는 같아요."

봉함 인원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서기 하나가 검집 쪽으로 한 발을 들이밀었다. 세라는 검자루 위에 손을 얹고 그 앞으로 반 걸음 섰다. 큰 소리도 없고 위협도 없었다. 하지만 서기는 더 들어오지 못했다. 방금 전 정문 앞에서 아무 반응이 없던 검집이, 이 좁은 적치칸에서는 어떤 박자로 대답하는지 모두 봤기 때문이다.

나는 문간 밖을 보았다. 복도 끝엔 왕국 전령 둘이 서 있었다. 성도 봉함 인원이 들어오기 전부터 같은 문 앞에 서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옷, 다른 말, 같은 손. 누가 먼저 이름을 붙이느냐 다투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같은 물건을 같은 줄로 끌고 가려는 손들.

"질문 하나." 내가 말했다. "지금 확인하려는 게 반응인가, 계열 이름인가, 아니면 인계 순서인가."

회색 띠 사내가 입꼬리를 눌렀다.

"현장 질서를 위한 절차입니다."

"그럼 셋 다군."

그는 서류 아래칸을 접어 감췄다. 감출수록 더 분명했다. 큰 줄에는 반응 무구, 작은 줄에는 관련 부품, 더 작은 줄에는 현장 기록과 증인 제한. 이름은 세라를 앞세우지만 실제로 가져가려는 건 검집과 철편, 미리엘의 말, 그리고 우리가 본 순서였다.

세라는 검집 끝으로 작업대 모서리를 두드렸다.

"내 검이 울린 자리는 여기야. 북벽 말뚝선과 저 통로. 정문 앞 빈 터에선 조용했지."

그녀는 문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걸 떼어 가서 다른 데서 울리면 그때 말해. 지금은 못 넘겨."

회색 띠 사내는 잠깐 서기 둘을 보았다. 반박은 못 했다. 정문 앞 빈 터에서 침묵했다는 말은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얼굴에 조급함이 더 번졌다. 자리와 증인을 떼기 전까진 자기들 문장이 힘을 못 얻는다.

봉함 인원은 물러났지만 복도는 비지 않았다. 조금 뒤 북방 군수실 서기관이 들어왔다. 그는 성도 쪽보다 더 말이 짧았다. 상자 뚜껑을 열지 않고도 안에 든 수량을 적어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세라 검집, 브론의 철편, 미리엘의 메모, 내 분필선을 차례로 보고 마지막으로 빈 상자에 막힌 문간을 봤다. 판단이 아니라 수거 순서를 세우러 온 눈이었다.

"공식 요구서입니다."

종이에는 칭찬도 축복도 없었다. 대신 재검인, 공동 관리, 즉시 인계, 중앙 검인, 제출 시한 같은 단어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전초 방어 자산 재검인.

왕국 공동 관리 장비 계열 확인.

무구 반응 관련 부품 즉시 인계.

맨 앞엔 세라의 반응 무구가 올라 있었다. 그다음 줄에는 브론의 판독 자료와 고정선 잔해가, 마지막 줄에는 우리 파티가 ‘동행 협조 인원’이라는 식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보다 물건과 문장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종이를 아래에서부터 다시 읽었다. 세라를 앞줄에 세운다. 그 아래 브론 자료를 묶는다. 마지막엔 우리를 협조 인원으로 내린다. 영웅으로 포장하는 일과 자료를 빼앗으려는 일이 한 장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줄 사이 작은 글씨는 더 노골적이었다. 현장 기록 사본 우선 제출. 반응 재현 시 지정 참관인 입회. 판독 문구 임의 기입 금지.

"답은 내일 1각 전입니다." 서기관이 말했다. "지연 시 중앙 검인이 먼저 진행됩니다."

세라는 요구서 사본 한 장을 손가락으로 끌어 자기 쪽에 빼놓았다.

"원본은 가져가. 사본은 남겨."

"이유를 들을 수 있습니까."

"우릴 무엇부터 자르려는지 읽어야 하니까."

그녀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서기관은 마지못해 사본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성도 봉함 인원도 더 캐묻지 못했다. 말을 길게 할수록 자기들이 반응보다 인계 순서를 더 탐낸다는 사실만 드러난다.

문이 닫히자 적치칸 안이 더 좁아졌다. 바깥 전초는 이제 영웅 후보 소문으로 들끓을 것이다. 안쪽 작업대 위엔 다른 단어들이 먼저 눌러앉았다. 검집. 잔해. 판독. 해석. 증인. 공적. 누가 무엇을 먼저 가져가느냐에 따라 나머지가 어떻게 흔들릴지 보이는 배열이었다.

브론은 사본 끝의 약호를 손톱으로 긁었다.

"이거 낯익다."

"어디서 봤어?"

"북방 전초 옛 정비표. 정확히 같진 않은데 줄기는 같아. 누가 나보다 먼저 이름을 반쯤 붙여 둔 셈이지."

그는 약호 아래의 숫자 배열을 가리켰다. 세 칸 건너 하나, 짧은 선 둘, 다시 긴 선 하나. 오늘 아침 내가 센 걸음과 닮은 박자였다. 세라 검집의 쓰임을 겨우 읽기 시작한 순간, 브론 자료도 이미 누군가의 장부 위에서 같은 줄로 묶여 있었다.

미리엘은 성도 질문지를 사본 옆에 놓았다.

"여기서도 같아요. 축복인지 묻는 척하지만 실제 질문은 따로 있어요. ‘절단 전 확인 반응인가’, ‘계열명은 누가 적을 것인가’, ‘현장 증언자는 제한 가능한가’. 단어가 다를 뿐 손의 순서는 같아요."

리에트는 문틈 밖 어둠을 보고 돌아섰다.

"밖에선 영웅 후보 소문이 돌고, 안쪽에선 공동 관리 장비 계열이라는 말이 돈다. 오늘 밤 지나면 둘 다 더 커진다."

세라는 사본 첫 줄을 눌렀다. 손톱이 ‘왕국 공동 관리’라는 글자 위에 잠깐 머물렀다. 정문 앞에서 보여 준 분노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지금은 화를 내기보다 버티는 순서를 정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내 이름을 세우고 그 밑에 이걸 다 달겠다는 거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작업대 위에 사본, 검집, 못판 조각, 미리엘의 메모, 브론의 낡은 정비표 조각을 나란히 놓았다. 다른 손이 남긴 자국인데도 한 줄처럼 보였다. 라그나드 쪽 시험은 칼끝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읽은 박자를 누가 자기 이름으로 적느냐의 싸움으로 넘어왔다.

"오늘 밤 안에 네 가지를 갈라 둔다." 내가 말했다.

빈 종이 맨 위에 적었다.

무엇을 먼저 가져가려 하는가.

그 아래 줄을 나눴다.

반응.

자료.

사람.

공적.

세라가 검집을 첫 줄 옆에 놓았다.

"반응은 내가 지킨다. 단독 면담 요청이 오면, 혼자 들어가지 않아."

브론은 못판 조각을 두 번째 줄 옆에 두었다.

"자료는 내가 둘로 나눈다. 보여 줄 것과 숨길 것. 그리고 저 약호가 어디서 왔는지 오늘 안에 더 찾아본다."

미리엘은 자기 메모를 세 번째 줄 위에 덮었다.

"사람과 해석은 제가 지킬게요. 성도 쪽 질문엔 원문을 보지 않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먼저 확인시킬 겁니다."

리에트는 문간 가까운 빈 상자를 더 끌어다 막았다.

"공적 줄은 네가 맡아, 에이드리언. 기록이 어디서부터 사람을 아래칸으로 밀어 넣는지 네가 제일 빨리 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왕실 사절에게 줄 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먼저 남길 기록이었다. 누가 무엇을 들고 있었고, 어느 자리에서 반응이 돌아왔고, 누가 그 반응을 자기 이름으로 가져가려 했는지. 한 장이라도 먼저 써 둬야 했다. 왕국 문서가 우리를 협조 인원으로 내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 손으로 목격 순서를 박아야 했다.

세라는 검집을 허리 옆에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 전까지 저 서류보다 먼저 우리 기록을 만든다."

브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약호도."

"그것도."

미리엘이 촛불을 하나 더 켰다. 리에트는 문간을 지키며 복도 발소리를 들었다. 나는 첫 줄을 썼다.

북벽 말뚝선에서 울림이 돌아왔다.

그 아래 두 번째 줄을 적었다.

정문 앞 빈 터에서는 침묵했다.

세라가 그 문장을 보더니 작게 웃었다. 기쁜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까보다 얼굴이 단단했다.

"좋네."

"뭐가."

"울림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나는 펜끝을 멈췄다. 바깥 복도에서는 누군가 다시 발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왕실 사절일 수도 있고, 기사단 전령일 수도 있고, 군수실의 다른 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같았다. 저들은 내일 1각 전까지 우리를 각자의 문장 안으로 끌고 가려 할 것이다.

나는 세라의 말을 이어 마지막 줄을 쓰려다 멈췄다. 빈칸을 바로 채우기 전에 방 안 배치를 먼저 바꿔야 했다. 기록은 말로만 남기면 다시 빼앗긴다. 누가 어느 물건을 쥐고, 누가 어느 문을 막고, 누가 어느 줄을 보았는지까지 같은 자리에서 기록해야 했다.

"병사 둘 불러." 내가 리에트에게 말했다. "아침 말뚝선에서 본 사람만."

리에트가 문을 조금 열어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까지 우리 뒤에서 숨만 죽이던 병사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왕실 봉서를 보자 어깨를 굳혔지만, 세라가 검집을 허리에 찬 채 고개를 끄덕이자 겨우 발을 옮겼다. 나는 그들을 작업대 오른쪽에 세웠다. 문간이 아니라 안쪽. 나중에 누가 이 방을 그리더라도, 증인이 방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자리였다.

"본 것만 말해." 내가 말했다. "해석은 하지 말고."

첫 병사는 말뚝선에서 짧은 울림을 들었다고 했다. 둘째는 정문 앞 빈 터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었다고 했다. 미리엘은 두 사람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고, 자기 판단은 따로 아래칸에 붙였다. 축복인지 아닌지 단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감싸는 상승 반응이 아니라 검집 끝과 바닥 틈으로 내려가는 반응’이라고 적었다. 그 한 줄만으로도 성도 쪽이 나중에 마음대로 이름 붙일 틈이 줄었다.

브론은 약호 옆에 낡은 정비표 조각을 겹쳐 대고 얇은 종이를 올렸다. 숯가루를 묻힌 손가락이 홈 위를 지나가자 짧은 선, 긴 선, 끊어진 점이 떠올랐다. 그는 원본을 내놓지 않고도 대조본을 만들었다. 숨길 것과 보여 줄 것을 나누겠다는 말이 비로소 손놀림으로 바뀌었다.

세라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검집을 작업대 가운데에 내려놓지 않았다. 전령이 문밖에서 다시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그녀는 몸을 조금씩 문 쪽으로 돌렸다. 검을 빼려는 자세가 아니라, 누가 안쪽으로 들어오면 먼저 길을 막겠다는 자세였다. 병사 둘도 그제야 자기들이 보고 있는 게 무구 점검이 아니라 사람을 어디에 세울지 정하는 싸움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나는 마지막 줄을 썼다.

서류는 가장 먼저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증인 두 명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거짓말보다 먼저 마르는 잉크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문밖에서 세라와의 단독 면담을 청하는 전령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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