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시험 뒤의 침묵

새벽의 북방 전초에는 승전보다 젖은 쇠 냄새가 먼저 남아 있었다. 밤새 북벽 아래서 건져 올린 눈이 회수대 앞에 둔덕처럼 밀려 있었고, 긴 탁자 위에는 끊어진 쇠고리 둘, 못판 조각 하나, 얼어붙은 밧줄 끝, 젖은 기록지가 차례로 놓여 있었다. 병사들은 떠들지 않았다. 누가 적을 베었는지보다 왜 저 물건들이 저 자리에서 나왔는지를 더 신경 쓰는 얼굴이었다.

나는 회수대 끝에서 어젯밤 걸음을 다시 세고 있었다. 북벽 첫 말뚝에서 중턱 횃불 자리까지 일곱 걸음. 거기서 오른쪽 둘. 다시 아래로 셋. 회수병 둘이 물건만 건져 돌아온 길이다. 도망친 적이 남긴 흔적치곤 너무 반듯했다. 누군가 급히 버린 줄이 아니라, 여기까지는 읽었냐고 떠보며 놓고 간 듯했다.

브론이 못판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보더니 낮게 말했다.

"간격 그대로네."

"어제 본 판석 통로랑?"

"한 치도 안 달라."

그는 쇠고리 하나를 들어 못판 옆에 세웠다. 금속 질감은 달랐다. 쇠고리는 거칠고, 못판은 오래 닳아 기름 먹은 회색이었다. 그런데 각도를 맞춰 붙이자 닳은 홈이 한 박자에 이어졌다.

"이건 흘린 게 아냐. 보라는 거지. 여기까지는 읽었냐고."

미리엘은 못판 안쪽 긁힘에 손톱을 대고 마른 진흙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회백색 막 아래에서 흐린 획이 다시 살아났다.

"기도문 같다가도 아니에요."

리에트가 난간에 기대 중얼거렸다.

"오늘도 그 말이군."

"오늘은 더 확실해요. 일부러 뒤집어 썼어요. 성도 쪽이 읽는 방향이 아니라 반대로."

그 말이 해설로 길어지지 않은 게 오히려 나았다. 지금 필요한 건 결론보다 손의 습관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조금 떨어져 선 병사 셋도 그 손길을 보고 있었고, 그중 둘은 벌써 성도 봉함선보다 이 젖은 못판을 더 경계하는 눈치였다.

나는 회수대 아래 눌린 눈을 다시 훑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은 아니었다. 얕게 얼어 표면만 미끄러운 사면. 어젯밤 그림자 다섯이 왜 더 들어오지 않았는지, 왜 저 거리에서 멈춰 섰는지 그제야 더 선명해졌다. 저 자리는 죽이기 좋은 자리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먼저 건지나` 보기 좋은 자리였다.

정문 쪽에서 부관 하나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문서통이 허리판을 퍽퍽 쳤다.

"에이드리언! 북방 지휘부 전령이 도착했다. 즉시 추격 승전 보고 올리란다."

나는 그 말보다 그의 손에 들린 문건 끝을 먼저 봤다. 멀리서도 붉은 밀랍줄과 왕국 인장 크기가 보였다. 전투는 밤에 끝났는데 문장은 새벽보다 빨랐다.

세라가 회수대 쪽으로 걸어왔다. 견갑 가장자리에는 얇은 서리가 붙어 있었지만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문으로 가자."

그녀는 회수대에 병사 둘을 남기고 나머지를 돌렸다.

"여긴 내 사람만 둬. 물건 손대는 줄이랑 보고 줄 섞지 마."

짧은 지시였지만 병사들은 알아들었다. 사람 동선과 물건 동선을 갈라 세우는 일. 어젯밤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

정문 앞 보고탁에는 아침 햇빛이 먼저 닿고 있었다. 감시탑 아래에서도 가장 밝은 자리였다. 왕국 전령은 그 한복판에 문서를 펼쳐 두었고, 북방 부관 둘은 양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편에는 밤새 버틴 병사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밝은 쪽에는 세라가 설 자리와 왕국 문건이 놓였고, 북벽에서 건져 온 쇠고리와 못판 조각, 젖은 기록지는 탁자 끝 그림자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누가 앞줄 얼굴이 되고 누가 안쪽 해석을 맡을지, 자리 배치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

전령은 세라를 보자마자 웃음을 걸었다.

"벨로네 영애. 북방 전초를 지킨 승전 보고를 즉시 올리겠습니다."

그는 가장 위쪽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세라 벨로네, 북방 방어선 유지 공로 확인.`

그 아래에는 `반응 무구 확인`, `적 전위 철수 유도`, `추격 공 사전 배정 검토` 같은 말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반면 내 이름과 파티 나머지는 몇 줄 아래 `현장 협조 인원`이라는 마른 표현 밑에 묻혀 있었다. 이름은 살아 있는데 역할은 죽어 있었다.

"이 줄만 먼저 서명하시면 됩니다." 전령이 말했다. "추격 공도, 후속 지원도, 상부 보고선도 우리 쪽에서 정리하죠."

나는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탁자 끝을 봤다. 못판 조각은 일부러 햇빛에서 비켜나 있었다. 세라 얼굴과 왕국 문건은 병사들이 보는 쪽에, 해석에 필요한 물건은 손 닿기 불편한 쪽에 놓였다. 보고가 아니라 분배였다. 얼굴값은 앞으로, 읽어야 할 자리는 안쪽으로.

세라는 곧장 손을 뻗지 않았다. 먼저 뒤 병사들 얼굴을 훑고 나서 말했다.

"어젯밤 추격선은 열지 않았다."

전령 눈꺼풀이 아주 잠깐 떨렸다.

"예?"

"승전 문장에 그걸 먼저 적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뒤 병사 몇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다들 봤기 때문이다. 어젯밤 전초를 살린 건 적을 멀리 쫓아낸 일이 아니라, 쫓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골라 낸 일이었다.

북방 부관 하나가 곧장 끼어들었다.

"영애, 적을 놓친 건 설명이 필요합니다. 왕국 보고선엔 흐름이—"

"그래서 적으라는 거다. 추격보다 회수가 먼저였다고."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변명이 아니라 우선순위 선언이었다. 저 말이 들어가는 순간 어젯밤 전초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를 왕국 문장 혼자 정할 수는 없어진다.

나는 문건을 끌어다 끝 몇 줄을 내려다보았다. 포상과 지원 약속 사이사이에 작은 줄이 붙어 있었다. `후속 조치 협조`, `현장 판단 일시 보고`, `재검토 시 동행 필수`. 큰 줄은 사람을 세우고, 작은 줄은 손발을 묶는다.

"세라 이름을 그렇게 앞줄에 놓고 싶으면," 내가 말했다. "어젯밤 실제 판단도 같이 적어야죠. 누가 추격을 멈추고 건지러 가는 길만 짧게 열었는지."

전령이 나를 돌아봤다.

"자네 이름은 아래에도 들어간다. 현장 협조—"

"협조로 끝난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문장을 가리켰다.

"적이 물러난 자리를 승전으로 쓸지, 시험으로 읽을지부터 갈렸으니까요."

부관이 비웃듯 코웃음을 흘렸다.

"시험이라. 떠나 준 걸 그렇게 거창하게—"

"떠나 준 게 아닙니다."

이번엔 리에트가 잘랐다. 그녀는 햇빛이 덜 닿는 기둥 그림자에 기대 서 있었다.

"등을 보이면서도 끝까지 허리를 안 돌렸어. 패주가 아니었지."

브론도 이어받았다.

"쇠고리 간격까지 맞춰 놓고 갔는데, 그걸 우연이라 부르면 장비 보는 눈이 없는 거고."

전령은 대꾸 대신 문건을 접었다 폈다. 말이 밀리면 종이를 만지는 부류였다. 손끝이 조금 더 빨라졌다. 세라를 앞줄에 세우는 건 단순한 치하가 아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북방 전초에서 먼저 입을 여는 자리도 같이 미끄러진다.

그때 정문 밖에서 마차 바퀴가 짧게 돌을 긁는 소리가 났다. 성도 봉함선이었다. 회색 띠를 두른 인원 셋이 낮은 상자 둘을 들고 들어왔다. 제일 앞의 사내는 왕국 전령보다도 회수대 쪽을 먼저 봤다. 사람보다 물건부터 찾는 눈이었다.

"상위 확인 전 임시 봉함 목록 전달하겠습니다. 반응 무구, 관련 부품, 반응 기록은 오늘 안에 분리 보전해야 합니다."

브론이 웃음기 없이 말했다.

"아침부터 손 빠르네."

사내는 그 말을 흘리고 세라 검집과 내 손의 문건, 회수대 방향을 차례로 훑었다. 사람을 보지 않았다. 자산과 기록, 증인을 보는 순서였다.

세라가 그 눈길을 가로막듯 한 발 앞으로 섰다.

"내 검은 여기서 울었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도 여기 있다. 둘을 따로 떼진 않는다."

말은 짧았지만 효과는 컸다. 성도 하급 인원 하나가 무심코 상자 위치를 바꿔 잡았다. 반응 무구와 증인을 한 줄로 묶어 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는 뜻이었다. 대사보다 손이 먼저 진실을 드러냈다.

"회수대 물건부터 다시 나눠 보죠."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보고탁에서 이겨 봐야 남는 건 말싸움뿐이다. 손이 움직이면 병사들 눈도 같이 움직인다.

***

감시탑 아래 복도는 바깥보다 서늘했다. 회수대에서 가져온 물건을 천 위에 다시 벌리자 젖은 금속 냄새가 더 짙어졌다. 나는 못판, 쇠고리, 밧줄 끝, 긁힘 묻은 기록지를 차례로 놓고 일부러 손을 멈췄다.

"젖은 금속은 왼쪽. 기록 묻은 금속은 가운데. 반응 흔적 없는 건 오른쪽."

북방 병사 둘이 내 말대로 움직였다. 성도 인원은 처음엔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다가, 가운데 줄에 세라 검집 기록지와 못판 조각이 같이 놓이자 눈빛이 달라졌다. 저들이 먼저 챙기려는 건 사람이 아니라 `같은 줄로 묶이는 물건`이었다.

미리엘은 봉함판 끝 배열과 왕국 문건 하단 숫자를 나란히 옮겨 적었다. 세 번째 칸 아래 짧은 꺾임 하나를 손톱으로 눌러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뭐가."

"현장 표기가 아니에요. 문서고 하층에서 원본 줄을 잠깐 다른 선으로 돌릴 때 남는 대체 표시예요. 전초 장부에서 막 쓰는 손이 아니라, 하층 분류열을 익힌 손이 찍은 거예요."

성도 사내 입가가 굳었다. 브론이 그 표정을 보고 짧게 웃었다.

"찔리나 보네."

사내가 곧장 쏘아붙였다.

"지금은 추측보다 보전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묻는 거다." 내가 말했다. "무엇을 보전하려는지.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에 붙일 이름인가."

브론이 못판 조각을 살짝 들어 빛에 비췄다.

"이건 봉함천에 싸 두면 결이 죽어. 박자 보고 살아 있는 쪽이야."

북방 부관이 비꼬듯 중얼거렸다.

"또 박자군."

브론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래. 네가 못 읽는 걸 난 읽는다는 뜻이지."

싸움이 커질 기세였지만 세라는 오래 끌지 않았다. 그녀는 회수대 쪽 병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누가 아침부터 물건보다 사람을 먼저 봤나."

병사 하나가 성도 인원 쪽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저쪽은... 못판이랑 기록지부터 집으려 했습니다."

다른 병사도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왕국 쪽은 영애님 서명부터 재촉했고요."

그걸로 충분했다. 누가 무슨 언어를 쓰는지 길게 풀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이 직접 본 손순서가 모든 걸 끝냈다.

미리엘이 젖은 기록지 가장자리를 다시 눌렀다.

"현장 물건이 이미 문서고 쪽 선행 분류랑 맞물려 있어요. 여기서 떼어 가면, 다음부터는 우리도 남이 옮긴 줄만 읽게 됩니다."

그 말이 나한테도 무겁게 꽂혔다. 북방 심연 문턱을 여는 데 필요한 건 현장 반응선만이 아니다. 성도 문서고 하층 원본 분류열 없이는 끝까지 못 간다. 반대로 현장 물건을 잃으면 문서고에서 뭘 찾아도 실제 자리를 잃는다.

현장선과 해독선.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뺏기면, 나머지 하나는 남이 붙인 문장 밑에서만 살아남는다.

그때 리에트가 바깥에서 돌아왔다. 망토 끝에는 북벽 눈가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적, 오늘 아침까지도 보고 있었어."

"어디서."

"북벽 바깥 반사 거울 자리. 눈사면 위쪽 턱. 발자국이 얕아. 오래 선 게 아니라 위치만 바꿔 가며 같은 곳을 본 선이야. 회수대, 정문, 네가 물건 나누는 자리까지."

그녀는 말만 하지 않고 바닥에 눈가루를 떨궈 작은 선 세 개를 그었다. 첫째는 회수대, 둘째는 정문 보고탁, 셋째는 우리가 서 있는 작업탁. 그리고 그 셋을 비스듬히 잇는 가는 선 하나를 더 긋고 손톱으로 북벽 바깥쪽을 툭 찍었다.

"저쪽에서 보면 이 셋이 한 번에 잡혀. 누가 물건을 먼저 들고, 누가 이름을 먼저 받고, 누가 안쪽으로 빠지는지 다 읽혀."

세라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어젯밤으로 끝난 게 아니란 거군."

"끝났으면 시체나 남겼겠지." 리에트가 말했다. "근데 저쪽은 간격만 남겼어."

나는 못판 위에 손을 올렸다. 금속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번엔 의미 없는 냉기가 아니었다. 우리 선택을 재고 있는 차가움이었다.

***

정오가 지나 바람이 더 세졌을 때, 우리는 북벽 아래 첫 말뚝까지 다시 내려갔다. 병사 둘만 데려갔다. 많이 움직일수록 흔적보다 사람 그림자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눈사면은 밤보다 더 또렷했다. 어제 횃불이 꽂혔던 자리는 작은 재와 눌린 눈으로만 남아 있었고, 첫 말뚝 옆 돌턱은 검은 줄처럼 마른 흙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린 흔적은 없었다. 피 자국도, 질질 끌린 자국도 없다. 대신 멈춘 자리만 있었다.

나는 첫 말뚝 앞에 쪼그려 앉아 눌린 눈을 짚었다. 회수 동선이 꺾인 위치를 손바닥으로 재고, 고개를 들어 감시탑 아래 판석 통로 쪽을 본 뒤, 다시 기록칸에서 외워 둔 북사면 첫 진동선 위치를 머릿속에 겹쳤다. 말뚝 하나, 돌턱 하나, 중턱 횃불 하나가 따로 놓인 게 아니었다. 셋이 한 줄로 꿰어졌다. 성문 안쪽 바닥 틈에서 시작한 선이 판석 통로를 지나 북벽 아래 첫 말뚝으로 올라오고, 거기서 다시 눈사면 횃불 자리로 뻗었다.

"여기였네."

세라가 내 옆에 섰다.

"뭐가."

"공격선이 아니라 진동선이랑 만나는 자리. 어젯밤 적은 전초 바깥을 두드린 게 아니라 안쪽 축을 우리한테 보인 거야."

브론도 곧 옆에 주저앉았다. 그는 쇠고리 하나를 돌턱 눌린 자국 위에 대 보고 낮게 툭 뱉었다.

"문 부수는 손이면 이 간격 안 남겨. 이건 맞춰 보는 손이지."

세라는 검집 끝을 돌턱 위에 아주 살짝 눌렀다. 금속이 돌을 스치는 소리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짧은 울림이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그녀 손등이 순간 굳었다. 돌턱 안쪽에 숨어 있던 미세한 떨림이 검집 결을 타고 손목까지 올라가는 모양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축복이라면 이렇게 자리를 가려 울지 않는다.

"들렸어?" 내가 물었다.

세라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여기서만 그래. 위에서도, 정문에서도 아니고."

왕실 축복이라면 장소를 가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반응은 너무 노골적으로 자리를 가렸다. 구조 반응이다. 왜곡 봉인과 닿는 자리에서만 울리는, 축복보다 훨씬 차가운 종류의 답이었다.

리에트가 눈사면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 발자국 봐."

겉보기엔 눈이 살짝 쓸린 정도였지만 그녀가 짚자 박자가 보였다. 한 사람이 쭉 달린 흔적이 아니라 둘, 혹은 셋이 거리를 유지한 채 위치만 바꿔 가며 내려다본 선이었다. 죽이기 위해 거리를 재는 발걸음과 달랐다.

"패주가 아니었네." 세라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거지." 리에트가 받았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먼저 건지고, 어떤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는지 보려던 거야."

그 순간 어젯밤 그림자 다섯의 자세가 다시 떠올랐다. 등을 보이면서도 허리를 완전히 돌리지 않았던 박자. 적이 아니라 시험관이라는 말이 점점 더 구체적인 모양을 갖췄다.

나는 눈더미 가장자리에서 반쯤 박힌 작은 금속편 하나를 더 건졌다. 못판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였다. 미리엘이 닦아 보더니 말없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닳은 글줄 한 토막이 더 남아 있었다.

`위.`

어젯밤 읽은 문장과 이어지는 조각이었다.

원본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 남긴다.

브론이 턱을 만지며 낮게 웃었다.

"성도 해석선 비웃는 것도 맞고... 우리더러 전초 바닥만 파지 말란 뜻도 맞겠군."

나는 북벽 위 성문 탑을 올려다봤다. 위. 단순히 층위를 말하는 건지, 물리적 상층을 말하는 건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누군가는 우리를 더 안쪽으로, 동시에 더 위쪽으로 밀고 있다.

라그나드.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도 다들 같은 얼굴이었다. 저 적은 지금 우리를 죽이는 대신 읽게 두고 있다. 그게 선의라서가 아니다. 우리를 해석 주체로 남겨 두는 편이 자기한테도 더 쓸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역겨웠다.

북벽 위에서 종이 울렸다. 한 번, 짧게.

성문 위 병사가 몸을 내밀고 외쳤다.

"왕실 직속 사절 도착!"

세라가 먼저 일어섰다. 그녀는 검집을 옆구리에 눌러 넣고 성문 위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빨리?"

"어젯밤 문장이 새벽보다 빨랐잖아." 내가 말했다. "이젠 마차가 사람보다 먼저 오는 거지."

***

전초 중앙 회의실은 저녁이 되어 오히려 더 밝았다. 바깥에서는 병사 몇이 어젯밤 승전 이야기를 반쯤 꾸며 떠들고 있었고, 안쪽에서는 왕실 사절이 초를 세 개나 켜 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이런 밝음도 의도다. 사람 눈을 끌고 좋은 소식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절은 정문에서 본 전령과 달랐다. 목소리를 일부러 낮게 깔고, 웃을 때도 이가 보이지 않게 조심하는 부류였다. 그는 세라 앞에 짙은 청색 표지 문서를 펼쳤다.

"성왕 알베른 폐하의 임시 제안입니다."

문서 첫 줄엔 `북방 전초 승전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그 아래 `세라 벨로네`, `왕국 직속 보호`, `공인 영웅 후보단 예비 편입`이 이어졌다. 그보다 조금 아래엔 나와 나머지 파티가 `동행 전력`, `보조 조사원` 비슷한 표현으로 묶여 있었다.

사절은 일부러 큰 줄만 읽었다.

"왕국은 귀대 즉시 보급과 안전을 보장합니다. 북방 전초의 승리를 중심으로 공인된 영웅 후보단을 꾸리고, 그 첫 앞줄에 세라 벨로네 경을 세우려 합니다."

세라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아직 경도 아니면서 벌써 경이라 부른다. 이름을 앞당겨 붙여 사람을 묶는 방식이다.

나는 사절이 읽지 않은 아래쪽을 넘겼다. 작은 줄이 보였다. `후속 조사 동선 사전 승인`, `반응 물품 단독 보관 금지`, `외부 세력 접촉 시 즉시 보고`, `치유·봉인 관련 문건은 왕국 지정 검인 하 보관`. 포상처럼 쓰인 문장 아래 숨겨 둔 족쇄였다.

"좋은 제안처럼 보이네요." 내가 말했다.

사절이 미소를 지었다.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길을 누가 고르죠?"

세라가 대신 물었다.

"우릴 보호한다는 건, 우리가 갈 길도 왕국이 고른다는 뜻인가."

사절은 준비한 답을 꺼냈다.

"위험한 시기일수록 질서 있는 길이 안전합니다."

브론이 옆에서 코웃음을 흘렸다. 아주 짧았지만 충분히 들렸다.

미리엘은 문서를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채 마지막 쪽 부속 조항만 보고 있었다. 거기엔 `봉인 관련 사안은 성도와 공동 검인`이 붙어 있었다. 왕국과 성도가 다른 얼굴을 한 채 같은 줄을 쥐겠다는 뜻이었다.

세라는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앞줄에 세우는 대신, 안쪽 길은 묶겠다는 거네."

사절은 웃고 있었지만 이번엔 눈빛이 얇아졌다.

"그렇게까지 삭막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 말 좋은 쪽부터 믿을 이유가 없어요."

차갑지만 짧은 말이었다. 길게 비난하지 않으니 오히려 되받아칠 틈이 줄었다.

사절은 곧장 흐름을 바꿨다.

"내일 아침까지만 답을 주십시오. 정식 편입 전 단계입니다. 거절하더라도 다시 논의는 가능하겠지요. 다만 북방 승전 뒤에 왕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남는 건 사실이 아니라 남기고 싶은 문장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짧은 접견이 끝난 뒤 우리는 회의실 뒤 좁은 보관칸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선 병사들이 벌써 `영웅 후보`라는 말을 낮게 흘리기 시작했다. 말은 참 빠르게 퍼진다. 누군가 그 말을 퍼지게 해 두었을 때는 더 그렇다.

보관칸 안은 어두웠다. 창대 둘, 빈 상자 하나, 젖은 망토 냄새가 전부였다. 이런 곳이 오히려 좋다. 큰말이 줄고 무엇을 지킬지만 남으니까.

브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거 받으면 다음은 뻔해. 내 판독은 군수선으로, 세라 반응은 왕국 얼굴로, 미리엘 해독은 성도 검인 아래로 찢어 놓겠지."

미리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고 하층 원본 분류열도 왕국 손 아래서 보게 만들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읽는 것도 결국 그쪽 문장 안으로 들어가고요."

리에트는 문틈 바깥 소리를 한 번 듣고 말했다.

"라그나드는 우릴 남겨 두고 읽게 만들고, 왕국과 성도는 우릴 묶어 두고 대신 읽으려 해. 둘 다 달라 보여도 끝은 비슷하네."

세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손에 쥔 제안서를 접었다 폈다 하지 않았다. 한 번 보고, 접고, 끝이었다. 망설임을 종이에 오래 남기지 않는 방식이다.

"지금 답은 안 한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안쪽 방침은 더 분명히 해야 해."

나는 작은 상자 뚜껑을 뒤집어 임시 탁자처럼 세우고, 아까 읽은 조항들을 짧게 적었다.

`조사 동선 사전 승인.`

`반응 물품 단독 보관 금지.`

`외부 접촉 즉시 보고.`

`공동 검인.`

그 아래 새 줄을 만들었다.

`둘 다 먼저 넘기지 않는다.`

브론이 내 어깨 너머로 보고 투덜거렸다.

"둘 다라."

"북방 심연 현장선이랑 성도 문서고 해독선." 내가 말했다. "어느 쪽이 먼저 묶여도 나머지 한쪽은 끝까지 남의 문장 밑으로 들어가."

미리엘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세라는 내 손에서 펜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줄 아래 짧게 적었다.

`앞줄은 빌려도, 길은 안 넘긴다.`

그 글씨를 보자 숨이 조금 가벼워졌다. 완벽한 답이 있어서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누가 앞에 서고 누가 안쪽에서 읽는지를 우리가 고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리에트가 문틈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섰다.

"내일 아침까지 답 달라 했지? 그 전에 저쪽도 다시 움직일 거야. 성도 봉함선은 물건 목록부터 재촉할 테고, 왕국은 후보 소문 더 퍼뜨리겠지."

브론이 씹듯 말했다.

"좋네. 그럼 우리도 순서 빨리 정하자. 북방 심연부터 더 안쪽으로 밀지, 아니면 문서고 원본 줄부터 먼저 낚아채지."

나는 제안서 맨 끝 작은 조항을 다시 펼쳐 보았다.

`후속 조사 동선은 지정선 승인 후 개시할 것.`

문장은 작았지만, 오늘 하루 내내 본 모든 손동작의 결말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북방 심연보다 먼저 다가온 건 적의 칼이 아니라 제도 문장이었다. 그래서 더 늦출 수 없었다.

누가 우리를 같은 줄에 남겨 둘 것인가.

그걸 먼저 정하지 못하면, 다음 문턱은 어디를 밟든 남이 고른 박자로 열릴 것이다.

보관칸 바깥에서 종이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엔 저녁 점호가 아니라 답을 재촉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못판 조각과 제안서를 나란히 내려놓고 둘 사이 간격을 눈으로 쟀다. 하나는 라그나드가 남긴 시험지였고, 다른 하나는 왕국이 건네온 족쇄였다. 작업탁 위에는 세라가 눌러 둔 예비 보고서, 브론이 남긴 절차문, 미리엘이 그린 꺾임 표식, 리에트가 젖은 장갑 끝으로 털어 낸 눈가루가 한데 놓여 있었다. 서로 다른 손이 남긴 자국인데도 이상하게 한 줄처럼 보였다.

둘 다 우리를 앞으로 밀고 있었다.

하나는 적의 손으로 남긴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발목에 먼저 채우려는 이름표였다. 둘 다 서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다만 어느 길이 우리 발로 여는 길인지는, 아직 우리가 고를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