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사당
뒤집힌 사당 안쪽 첫 그림자선은 문턱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바깥 뜰과 전혀 달랐다. 등 뒤로는 흰 나무 세 그루와 장례턱, 엘프 경계병들의 창끝, 왕국 사절단의 낮은 등불이 아직 보였다. 정면에는 얕은 거울물 위로 검은 뿌리가 천장에서 내려와 있고, 그 사이에 뒤집힌 제단 잔해가 매달려 있었다. 오른쪽 낮은 홈에서 튄 빛은 물막을 가늘게 훑어 왼쪽 벽의 이름 홈까지 이어졌다. 조금 전 화살이 박힌 자리와 같은 각이었다.
나는 발을 바로 들이지 않았다. 문턱 안 바닥은 흙이 아니라 얇은 물막이었다. 장화 밑창이 닿자 물이 찰칵 하고 달라붙었고, 발끝 그림자가 실제 발보다 반 박자 먼저 흔들렸다. 세라는 내 왼쪽 앞줄에 서 있었고, 리에트는 오른쪽 흰 나무와 문턱 홈을 함께 볼 수 있는 사선에 몸을 낮췄다. 브론은 가짜 꾸러미를 발뒤꿈치 뒤에 두고 허리를 숙였고, 미리엘은 천으로 감싼 위패함을 품에 붙였다. 뒤쪽 왕국 사절은 장부를 든 채 문턱을 넘어오려 했고, 엘프 강경파는 창대를 낮춰 우리 후퇴 길과 진입 길을 동시에 재고 있었다.
위험은 안쪽 손 하나만이 아니었다. 바깥은 우리가 무엇을 들고 나오는지 보려 했고, 사당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비우는지 보려 했다. 이름을 부른 환청은 멎었지만, 물막 위 반사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 저 안쪽은 얼굴이 아니라 자리를 읽었다. 누가 앞으로 나서고, 누가 물건을 품고, 누가 뒤를 막는지. 하나라도 비면 그 빈칸이 곧 다음 화살의 표적이 될 터였다.
“세라, 정면 한가운데서 빠져. 왼쪽 반 걸음.”
세라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검집 끝을 중앙에서 빼 왼쪽 돌틈에 세웠다. 금속이 젖은 돌을 누르자 짧은 긁힘이 났고, 문턱 중앙의 반사선은 비지 않은 채 세라의 검집에 걸렸다.
“리에트는 흰 나무 표식과 안쪽 홈을 한 번에 봐.”
리에트도 활을 높이지 않았다. 그녀는 발끝으로 수액 막이 마른 자리와 젖은 자리를 가르고, 오른쪽 사선으로 몸을 눕혔다. 활촉은 안쪽을 향했지만 눈은 화살길보다 반사선을 먼저 따라갔다.
브론은 바깥에서 들고 온 가짜 꾸러미를 발로 툭 밀었다. 꾸러미는 문턱 안에 반쯤 걸쳤다. 다음 화살이 오면 사람을 먼저 읽는지, 물건을 먼저 읽는지 확인할 기준점이었다. 미리엘은 위패함을 더 끌어안고 소매 끝으로 천 가장자리를 한 번 눌렀다. 손기름도 빛도 홈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손이었다.
뒤에서 왕국 사절이 말했다.
“현장 보전을 위해 물러나십시오. 방금 음성과 화살은 공식 관찰 기록으로—”
말이 끝나기 전 세라의 검집이 흙과 돌 사이를 다시 눌렀다. 검집 하나가 장부 끝을 가렸다. 엘프 창대가 더 들어오려는 길도 같은 선에서 막혔다. 세라는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몸을 반 칸 틀어 왕국과 엘프가 서로를 먼저 보게 만들었다. 둘 중 하나가 더 밀면 다른 쪽 문서나 창끝에 부딪치는 자리였다.
“기록은 살아서 나간 뒤에 해.”
짧았다. 그래서 더 막혔다.
나는 문턱 안 물막을 내려다봤다. 우리 그림자 다섯이 길게 찢어졌다. 세라의 검집 끝, 리에트 활끝, 브론의 낮은 어깨, 미리엘 품 안 위패함, 내 발끝. 그런데 내 그림자만 끝이 매끈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 모양은 있는데 이름표를 떼어 낸 자리처럼 흐렸다. 물막은 내 얼굴을 지운 게 아니라, 내가 어느 줄에 놓였는지를 먼저 읽는 것 같았다.
미리엘이 숨처럼 말했다.
“비는 줄을 먼저 봐요.”
그 말과 함께 안쪽 회랑이 또렷해졌다. 좌우 벽에는 이름판을 꽂던 홈들이 빗금처럼 이어졌다. 일부 홈은 돌에 남아 있었고, 일부는 물막에만 떠올랐다. 반사광이 얇게 서는 칸은 한 사람씩만 밟을 만큼 좁았다. 폐허가 아니었다. 누가 어떤 순서로 들어오고, 어느 칸에서 멈추고, 어떤 줄은 바로 보이게 두고 어떤 줄은 물 아래 숨길지 정해 놓은 길이었다.
“방금 들은 이름부터 맞추지 마.”
내가 낮게 말했다.
세라가 시선만 돌렸다.
“다들 다르게 들었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더더욱. 보이는 것, 들은 것 말고 밟는 칸만 말해.”
우리는 한 칸씩 들어갔다. 물은 얕았지만 냉기가 발목으로 파고들었다. 위쪽에 매달린 제단 파편에서는 오래 젖은 나무 냄새가 났고, 아래 물막에는 그 파편들이 정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비쳤다. 위와 아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쪽이 우리 발을 먼저 속이는지가 중요했다.
두 번째 반사선에서 리에트가 멎었다. 내가 보는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리에트가 바라보는 물막 아래에는 그림자 셋이 스친 듯했다. 한 사람은 뒤돌아 활을 들고, 두 사람은 더 낮은 길로 내려가는 모습. 그녀의 손이 활자루를 더 세게 쥐었다.
세라도 한 번 숨을 끊었다. 그녀 쪽 물막엔 벨로네 가문 깃발과 왕궁에서 공적을 치하하는 장면 같은 것이 번져 보인 모양이었다. 미리엘은 자기 손이 붉은 검인이 찍힌 장부를 덮는 장면을 본 듯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봤다. 사람 얼굴이 아니라 빈 줄. 이름 대신 기능만 남은 분류. 보관자, 확인 전 분리, 먼저 읽힌 사람.
사당은 다르게 보여 주면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는 편해진다고. 배신자 하나를 세우면 줄 전체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브론.”
“셋째 칸 미끄럽다.”
브론이 바로 답했다. 그는 자기 앞 물막이 어떤 기억을 띄웠는지 말하지 않았다. 발끝으로 칸의 감촉만 재고 있었다.
“미리엘.”
“왼쪽 넷째 홈 밑이 비어 있어요. 무게 실으면 빠집니다.”
“리에트.”
리에트는 눈을 감았다 뜨고 나서야 말했다.
“오른쪽 사선 열려. 그런데 빛이 한 번 죽는 칸이 있어.”
그 한마디가 길을 열었다. 다른 반사선은 물 위에서 번져 벽 홈으로 이어졌는데, 리에트가 가리킨 칸은 가운데서 색이 뚝 꺼졌다. 누군가 일부러 반사를 죽여 숨은 발판을 남긴 자리처럼 보였다. 나는 발끝만 올려 무게를 시험했다. 물막은 내려앉았지만 밑이 빨려 들어가진 않았다.
“여기다.”
세라가 먼저 따라붙었다. 검집은 앞을 지키되 너무 벽에 붙지 않았다. 브론은 가짜 꾸러미를 그 죽은 빛 칸 바깥에 남겼다. 안쪽이 물건을 쫓는지 사람을 쫓는지 보려는 미끼였다. 미리엘은 위패함을 품은 채 천이 물빛을 바로 받지 않는 그림자로 몸을 낮췄다. 리에트는 끝까지 뒤쪽 문턱과 흰 나무를 확인하고 마지막에 같은 칸으로 미끄러졌다.
우리 다섯이 같은 줄에 붙는 순간 벽면의 환영들이 조금 흐려졌다. 사당은 각자의 부끄러운 장면을 띄웠지만, 우리가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현재 좌표만 주고받자 물막 파문이 잦아들었다.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 우리 발을 끌고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회랑 중간의 검은 홈 앞에서 브론이 돌조각 하나를 던졌다. 돌은 물에 닿은 뒤 바로 가라앉지 않았다. 소리가 늦게 울렸다. 아래 빈 통로를 한 번 치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바닥 밑이 비었어. 발목 꺾이면 빨린다.”
세라가 검집 끝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금속이 닿은 뒤 한 박자 늦게 물 밑에서 얇은 떨림이 따라왔다. 그녀는 바로 검집을 뺐다.
“발로 재지 마. 소리부터 튀어.”
“그럼 소리도 먹는 칸을 찾아야겠네.”
나는 리에트를 봤다. 리에트는 활촉 대신 빈손 검지로 공중 각을 재더니 왼쪽 뒤집힌 기둥 그림자와 오른쪽 물빛이 겹치는 좁은 띠를 짚었다.
“저기. 빛만 죽는 게 아니라 소리도 낮아.”
그녀가 말한 칸으로 브론이 가죽끈을 낮게 띄웠다. 끈은 곧게 펴지지 않고 중간에서 한 번 처졌다. 그 처진 지점에 작은 돌을 놓자 반사선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오래 쓰며 감춘 길이었다. 나는 그 위로 발을 옮겼다. 발끝이 물을 밀었고, 아래에서 찬 공기가 올라왔다. 무너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 좁은 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회랑 끝에는 낮은 반원실이 있었다. 허리 높이 돌판이 둘러서 있고, 가운데엔 얕은 수반처럼 파인 거울면이 있었다. 오른쪽 벽의 이름 홈은 세 겹이었다. 바깥 줄은 얕고 고르게 남았지만, 가장 안쪽 줄만 유난히 깊었다. 나는 그 홈 가까이 다가갔다.
두 걸음 남았을 때 물 아래 줄들이 한 박자 늦게 떠올랐다.
첫 던전에서 봤던 열세 번째 빈 줄과 같은 폭이었다. 끝까지 긁어 지웠지만 가장자리만 남은 깊이. 내 발끝 아래 물빛이 번지자, 오른쪽 깊은 홈 밑에서 리에트 원정대의 세 갈래 표식과 로웬의 꺾인 우회 기호가 겹쳐 떠올랐다. 돌에는 거의 남지 않고 물에만 남은 줄이었다.
미리엘이 무릎을 낮췄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로 홈을 만지지 않았다. 천 조각을 돌판 끝에 살짝 대고, 물에만 떠오른 줄과 돌에 새겨진 줄의 높이를 번갈아 봤다.
“벽에 남긴 줄과 물에 남긴 줄이 달라요.”
“왜 갈라?”
세라가 물었다.
“먼저 보게 할 이름과, 바로 읽히면 안 되는 이름을 나눈 거예요. 바깥 눈에는 벽 줄만 보이고, 안쪽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야 물 줄이 떠오르게.”
브론은 돌거치대 밑을 더듬었다. 손끝이 먼지와 눌림 결을 훑다가 한쪽 모서리에서 멎었다.
“세워 둔 자리 아니야.”
“이름판을?”
“자주 뺐다 다시 눕혔어. 눌린 자국과 들린 자국이 번갈아 있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는 돌판 아래 하중 자국을 손등으로 쓸어 보여 줬다. 한쪽은 판이 세워졌을 때 생기는 곧은 눌림이고, 다른 한쪽은 누운 것을 급히 빼내며 모서리가 긁힌 흔적이었다. 같은 무게의 물건 하나를 보관한 자리가 아니었다. 필요한 줄만 꺼내고, 다시 덮고, 순서를 바꾸고, 때로는 완전히 숨기는 손이 반복해서 지나간 자리였다.
나는 벽 홈과 물 홈을 번갈아 봤다. 배신자 이름 하나를 걸어 두는 처형장이라면 읽는 순서를 이렇게 비틀 이유가 없다. 죄를 드러내려면 더 크게 새기면 된다. 그런데 이곳은 반대로 숨겼다. 일부는 바깥에 보여 주고, 일부는 물 아래에 묻고, 같은 이름도 누가 먼저 보느냐를 갈라 놓았다.
“처형장이 아니야.”
내 말에 세라가 바로 받았다.
“그럼.”
“임시 보관소. 바로 읽히면 죽는 이름을 숨긴 자리.”
미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도하는 모양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인계 순서표예요. 누가 먼저 나가고, 누가 마지막에 남고, 누가 바깥 기록에는 보이면 안 되는지를 나눈 곳.”
리에트는 그 말을 듣고도 물 아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원실 왼편 바닥에는 짧은 칼집 자국 셋이 사선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엔 돌이 갈라진 금인 줄 알았지만, 리에트가 무릎을 낮추자 표정이 달라졌다.
“저건 우리 대장 표시야.”
그녀는 손가락을 칼집 자국 끝에 잠깐 대고 바로 떼었다.
“후퇴하라는 뜻이 아니야. 자기가 남아 막겠다는 표시였어.”
아무도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물막 위로 마른 먼지가 한 겹 밀려오고, 위쪽 뿌리에서는 오래된 수액 냄새가 났다. 그 조용한 냄새 속에서 돌턱, 홈, 물자국이 말을 바꾸고 있었다. 누가 버렸느냐보다 누가 끝까지 남아 무엇을 먼저 내보냈느냐가 선명해졌다.
“나는 그날 그 사람이 도망쳤다고 생각했어.”
리에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렇게 믿어야 내가 살아남은 이유가 하나라도 남는다고 생각했어.”
세라가 리에트 쪽으로 한 발 붙었다. 위로하려는 걸음이 아니었다. 바깥 왕국 사절의 시선과 안쪽 거울벽 사이에서 리에트가 혼자 노출되지 않게 같은 줄에 서는 걸음이었다.
“지금은 그 이유를 저 안쪽이 쓰게 두지 마.”
리에트가 짧게 웃을 뻔하다가 말았다.
“말 예쁘게 못 하네.”
“예쁘게 하면 늦어.”
그 말에 리에트의 떨림이 아주 조금 줄었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다만 죄책감이 입으로 흘러나오기 전에, 지금 발을 딛는 사람이 돌아왔다.
나는 깊은 홈 아래 떠오른 로웬 기호를 다시 봤다. 로웬이 숲 바깥에서 멀찍이 단서를 던진 사람이 아니라, 이 생존선 한가운데를 실제로 밟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커졌다. 리에트 원정대의 옛 신호 위에 로웬의 답이 붙어 있다면, 실패는 끝난 과거가 아니었다. 누군가 뒤에 와서 읽었고, 답했고, 그 뒤 다시 숨겼다.
“누군가를 빼냈을 수도 있다는 거네.”
리에트가 말했다.
그 말은 희망처럼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살아 나갔다면, 그 뒤 침묵도 살아 있다. 그 침묵을 누가 붙잡았고 누가 눌렀는지 이제 찾아야 한다. 끝난 실패보다 이어진 실패가 더 무겁다.
반원실 뒤 협로로 들어서자 거울벽이 얼굴 높이까지 올라왔다. 왼쪽은 매끈한 물빛 벽이고, 오른쪽은 중간마다 물 빠진 홈이 있어 사람이 몸을 기대면 다른 사람 그림자가 그쪽으로 끌려갔다. 바깥 사절단의 불빛은 멀리서 흔들렸고, 엘프 강경파 둘의 그림자는 문턱 밖에서만 어른거렸다. 안과 밖이 모두 거울에 묻히자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배신자 하나를 고르라.
이번엔 귀가 아니라 벽에서 왔다.
리에트 쪽 거울엔 옛 대장의 등이 달아나는 모습이 떴다. 다음 순간 같은 그림자가 뒤돌아 활을 드는 자세로 겹쳤다. 세라 쪽에는 그녀의 이름이 크게 박힌 공적식 장면이 번지고, 그 뒤에 나와 미리엘, 브론, 리에트의 이름이 작은 칸으로 밀려났다. 미리엘 쪽 거울에는 삭제 장부를 먼저 덮는 자기 손이 스쳤다.
나도 봤다. 빈 줄. 이름 대신 기능만 적힌 줄. 보관자. 확인 전 분리. 사람보다 먼저 읽힌 줄.
이 안쪽 질문은 바깥 질문과 같았다. 왕국은 장부로 한 이름을 먼저 잡으려 했고, 엘프 강경파는 숲의 침묵으로 한 입을 먼저 막으려 했다. 사당은 기억으로 같은 일을 했다. 누구 하나만 골라 죄를 몰아 주면 나머지는 편해질 거라고 속삭였다.
리에트 손이 활자루 위에서 떨렸다. 세라는 검집 끝을 앞에 둔 채 리에트와 같은 줄로 반 걸음 더 붙었다.
“밖도 안도 다 똑같네.”
그 짧은 문장 하나로 충분했다. 세라는 왕국과 엘프, 그리고 사당이 서로 다른 말을 쓰면서도 같은 결론을 요구한다는 걸 몸으로 받아 냈다. 하나의 배신자. 하나의 공적. 하나의 봉쇄. 그렇게 줄 전체를 덮는 방식.
“이름 말하지 마.”
나는 거울벽을 보지 않고 바닥 선만 봤다.
미리엘이 먼저 호흡을 고쳤다.
“둘째 칸 안전.”
브론이 받았다.
“왼쪽 받침 살아 있어.”
세라는 짧게 말했다.
“앞줄 유지.”
리에트는 아주 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오른쪽 윗각 열림.”
우리가 하나씩 현재 자리를 말하자 거울벽 속 장면들이 물결 아래로 가라앉았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밀려났을 뿐이다. 기억을 이긴 게 아니라, 기억이 현재 발을 대신 딛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협로 바닥에는 짧은 직선 흠집이 반복해서 남았다. 활촉으로 긁은 자국 같기도 했고, 신발 밑창으로 버티며 몸을 돌린 자국 같기도 했다. 리에트는 그중 두 줄을 보고 숨을 멈췄다.
“화살 올리기 전 버릇이야.”
“누구?”
세라가 묻자 리에트가 입술 안쪽을 눌렀다.
“그 사람.”
직접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았다. 옛 대장. 두 줄은 앞뒤 간격이 유난히 짧고 끝이 약간 위로 들려 있었다. 길게 도망친 흔적이 아니라, 마지막에 한 번 더 몸을 틀어 뒤를 본 흔적이었다. 누군가를 보내고 혼자 남아 쏘던 자리. 반원실에서 본 돌턱의 버팀이 협로 바닥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안쪽은 리에트를 더 세게 흔들었다. 처음엔 배신당한 기억을 띄웠고, 이제는 그 기억이 틀렸을 가능성을 보여 줬다. 배신보다 더 아픈 건, 자신이 배신으로 믿어 버린 버팀이었다.
“발.”
내가 짧게 끊었다.
리에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답했다.
“셋째 눌림칸 비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녀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협로 끝에 뒤집힌 제단 문턱이 나왔다. 위에 있어야 할 제단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아래 거울면엔 그 제단이 정상으로 서 있었다. 검은 뿌리 사이에는 사람 손 하나가 스칠 만큼의 틈이 있었고, 그 아래 물빛은 다른 데보다 짙었다. 우리가 멈추자 안쪽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화살은 오지 않았다.
대신 손이 나왔다.
검은 뿌리 사이로 사람 손 하나가 천천히 물 위를 스쳤다. 괴물 손은 아니었다. 오래 젖어 빛을 거의 먹지 못하지만, 손등의 뼈와 손톱 끝은 분명히 살아 있는 살결이었다. 그 손은 우리를 덮치지 않았다. 벽 홈 하나를 더듬어 찾더니, 위에서 찍어 누르지 않고 옆으로 밀듯 눌렀다. 이미 여러 번 만져 본 줄의 끝을 다시 찾는 손놀림이었다.
홈 하나가 짧게 반짝였다. 거울면 아래 묻혀 있던 줄이 물 위로 올라왔다가 곧 가라앉았다.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고, 누군가 직접 눌러 알려 준 셈이었다.
브론이 한 발 나서려다 멈췄다. 세라 검집이 젖은 돌을 더 깊게 눌렀고, 미리엘은 위패함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리에트는 활을 겨누지 않았다. 그녀는 손끝이 누른 홈의 순서를 보려 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도 이름 대신 영웅담을 고를 건가.”
목소리는 낮았다. 젖은 뿌리 속에 오래 묻혀 있다가 겨우 나온 사람처럼 갈라졌지만, 질문은 또렷했다. 배신자 하나를 골라 쉬운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 지워진 이름 전체를 끝까지 들고 갈 것인지 묻고 있었다.
나는 반사선의 각을 먼저 봤다. 지금 곧장 우리 목을 겨누는 선은 없었다. 위협보다 심문이 먼저였다. 안쪽 손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버릴지 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왕국과 엘프가 우리를 갈라 세운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손은 덮으려 하지 않고, 우리가 덮는지 보려 했다.
나는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갔다. 더 가면 다음 반사선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딱 한 걸음이었다. 발끝 아래 물이 흔들렸고, 내 흐린 그림자 가장자리가 잠깐 밝아졌다.
“아니.”
목은 말랐지만 소리는 곧게 나갔다.
“지워진 이름을 찾으러 왔어.”
정적이 흘렀다.
곧 거울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발목 아래 얕은 물이 바깥쪽으로 밀렸다가 안쪽으로 되감기듯 끌려왔다. 우리 다섯 그림자가 먼저 길게 번지고, 그 뒤를 따라 늦은 잔상 하나가 바닥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처음엔 물결 얼룩으로 보였다. 곧 활을 든 어깨선, 뒤돌아보는 목선, 이름판을 눕히는 팔 각도가 드러났다.
여섯 번째 그림자였다.
다른 그림자보다 꼭 한 박자 늦었다. 누가 먼저 뛰고 누가 남았는지, 누구 손이 끝까지 판을 눌렀는지 그 차이가 보일 만큼 늦었다. 물 아래 갇혀 있던 오래된 버팀이 현재 박자에 겹쳐 올라왔다. 장례턱의 밧줄 자국, 흰 나무 표식, 반원실 깊은 홈, 협로 바닥의 화살 버팀 자국이 한 장면으로 포개졌다.
늦게 떠오른 그림자는 달아나는 잔상이 아니었다. 먼저 빠져나가는 그림자 셋과 달리, 그 하나만은 제단 쪽을 향해 반 걸음 남아 있었다. 물 아래 팔 각도는 이름판을 누르는 손과 활을 드는 손 사이에서 갈라지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막을지 마지막까지 계산하던 자세였다. 리에트가 평생 패주라고 믿었던 장면은, 남는 사람이 등으로 막아 낸 장면일지도 몰랐다.
리에트가 떨리는 숨을 그대로 내보냈다.
“저건…”
그녀가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안쪽 손이 다시 물 위를 스쳤다. 이번엔 벽 홈이 아니라 제단 아래 가장 깊은 줄을 따라갔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빛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밝아졌다. 이름을 읽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어떤 순서로 버티고, 어떤 순서로 숨기고, 어떤 순서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맡겼는지를 되짚는 손이었다.
사당 전체가 다음 문장을 들려주기 직전처럼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바깥 문턱 쪽 물막이 먼저 흔들렸다. 실제 등 뒤에서는 아무도 크게 움직이지 않았는데, 거울 속에서는 왕국 사절의 손이 장부를 내밀고 엘프 강경파의 창끝이 더 길게 뻗어 왔다. 물은 바깥 세력의 욕심까지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장부 끝이 닿는 그림자는 벽 홈을 덮으려 했고, 창끝 그림자는 여섯 번째 그림자의 어깨를 찌르려 했다. 진짜 손이 아니라 비친 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비친 손도 흔적을 더럽힐 수 있었다.
“뒤쪽 반사.”
리에트가 먼저 알아차렸다. 그녀는 활을 쏘지 않고 활등을 낮춰 물 위 그림자만 끊었다. 화살촉이 아니라 그림자를 가르는 동작이었다. 세라는 곧장 검집을 바닥에 눕혀 장부 그림자가 들어오는 길을 막았다. 브론은 미끼 꾸러미를 발끝으로 당겨 창끝 그림자 앞에 놓았다. 가짜 무게가 먼저 잡히자 물막 위 창그림자가 그쪽으로 휘었다. 미리엘은 위패함을 품은 팔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천 가장자리를 조금 열어 홈이 있는 쪽을 자기 몸 안쪽으로 돌렸다. 빼앗기지 않으려 숨기는 게 아니라, 어느 쪽이 진짜 보전선인지 우리끼리 확인할 수 있게 돌려 둔 손이었다.
나는 그 짧은 재배치가 여섯 번째 그림자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봤다. 그림자는 우리 쪽으로 덤비지 않았다. 대신 늦은 팔을 조금 낮췄다. 물 아래 이름판 하나가 제단 쪽에서 빠져나와, 누군가의 품으로 들어간 듯한 잔상이 스쳤다. 그다음 다른 손 둘이 뒤에서 빈 홈을 덮었다. 한 사람의 영웅담이 아니었다. 누가 앞줄에 남고, 누가 물건을 품고, 누가 뒤의 추격을 틀어막고, 누가 나중에 온 사람에게 알아볼 표식을 남겼는지까지 나뉜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뜨자 리에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장이 혼자 남았다는 사실보다, 그 곁에 이름 없는 손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세게 눌렀다. 누가 배신자인지 고르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각자 한 조각씩 맡았고, 그중 누군가는 살아남은 뒤에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서 침묵이 생겼다. 영웅담으로 포장하면 그 침묵은 한 사람의 공적으로 사라지고, 배신담으로 묶으면 한 사람의 죄로 사라진다. 두 방식 모두 줄을 지운다.
“미리엘, 홈 순서만.”
내가 말했다.
미리엘은 손을 떨지 않으려 위패함 천끈을 손가락에 한 번 감았다. 그런 뒤 수반 가장자리와 벽 홈, 물 아래 떠오른 잔상의 높이를 빠르게 맞췄다.
“벽 첫 줄은 바깥 공개용이에요. 물 둘째 줄은 실제 이동 순서. 가장 깊은 안쪽 줄은 마지막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같은 이름이 세 줄에 다르게 들어간 게 아니라, 같은 사건을 세 쪽이 서로 다르게 보게 만든 겁니다.”
“그러면 밖에서 읽은 배신자 명단은.”
세라가 짧게 물었다.
“공개용 첫 줄만 떼어 간 겁니다.”
그 답이 나오자 왕국 사절의 그림자가 물 위에서 더 크게 일그러졌다. 장부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장부에 없는 줄들이 장부를 밀어내는 모양이었다. 엘프 강경파 창그림자도 잠깐 멎었다. 숲 안에서 지워 온 이야기와 왕국이 적어 온 이야기가 동시에 같은 빠진 칸을 들킨 것이다.
브론은 그 틈에 제단 받침 아래를 봤다. 그는 손가락만한 금속 조각을 발견하고도 바로 집지 않았다. 주변 물살을 먼저 훑고, 그 조각이 움직였던 방향을 눈으로 따라갔다.
“여기 걸쇠가 있었어. 이름판을 잠그는 게 아니라, 눕힌 판이 다시 서지 않게 눌러 두는 걸쇠야.”
“왜 세우지 못하게 해?”
“세우면 바깥 줄이 먼저 읽히니까.”
브론의 대답은 거칠었지만 정확했다. 이름은 세워 놓으면 누군가 가져간다. 눕혀 놓으면 옮겨야 할 사람이 알맞은 각도에서만 읽는다. 이 사당은 기억을 기념하기보다 빼앗기지 않게 눕혀 둔 곳이었다.
우리는 아직 아무도 활을 쏘지 않았다. 세라는 왼쪽 앞줄에서 검집을 더 세웠고, 리에트는 사선을 유지했다. 브론은 낮은 받침처럼 몸을 낮춰 미끼 꾸러미와 진짜 위패함 사이 길을 막았다. 미리엘은 이름 홈과 위패함 사이에서 천이 젖지 않게 품을 다시 고쳤다. 나는 비는 줄 앞에 서서 손을 뻗지 않았다. 먼저 만지면 우리가 또 하나의 이름을 빼앗는 손이 된다.
밖에서는 왕국 사절의 등불이 흔들리고, 엘프 강경파의 그림자가 문턱을 넘보았다. 안쪽에서는 이름 없는 손이 기다렸다. 둘 다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하나의 배신자를 골라 밖으로 나갈 것인지, 지워진 줄 전체를 붙든 채 더 안으로 들어올 것인지.
나는 물 아래 여섯 번째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리 유지.”
내 말에 네 사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지가 대답이었다. 사당은 말보다 발을 먼저 받았다. 뒤집힌 제단 아래, 늦게 따라붙은 그림자가 우리 다섯 그림자 뒤에서 아주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배신자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