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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의 이름

감시탑 아래 숙영칸 뒤편은 아직 해가 닿지 않았다. 남쪽 마당에서는 병사들이 말뚝줄을 따라 말뚝을 다시 박고 있었고, 북쪽 판석 통로에서는 밤새 식은 바람이 낮게 흘러나왔다. 그 사이, 천막 뒤 작업탁 위에는 얼다 만 먹물 자국과 금속 가루, 세라의 검집 반응을 적은 메모, 그리고 판석문 틈에서 굴러나온 작은 고정편이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세라는 작업탁 맞은편에 서 있었다. 검집은 왼쪽 허리에 걸려 있었지만, 그녀의 손은 자꾸 그 금속 가까이로 내려갔다가 멈췄다. 브론은 탁자 오른쪽 끝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고정편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미리엘은 탁자 왼쪽에서 잔향 기록지를 펴고 있었고, 리에트는 천막 뒤 기둥에 기대어 바깥 마당과 적치칸을 번갈아 보았다.

위험은 탁자 위 금속 조각만이 아니었다. 남쪽의 장부 탁자에서는 왕국 쪽 서기가 세라의 이름을 승전 보고 첫 줄에 올릴 준비를 했고, 북쪽의 성도 쪽 천막에서는 봉함천이 새로 펼쳐졌다. 바깥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물건 하나가 아니라, 그 물건을 설명할 입과 그 설명에 붙을 이름이었다.

나는 어젯밤 메모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세라 공명.`

`판석문 반응.`

`고정편 회수.`

`공식 보고에는 아직 쓰지 않음.`

그리고 잠깐 망설인 뒤 한 줄을 더했다.

`이름 보류.`

거짓말은 아니었다. 모르는 이름을 보류한 게 아니라, 빼앗길 자리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브론은 그 줄을 보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고정편의 얕은 홈을 엄지로 문질렀다. 금속 조각은 손톱만큼 작았지만, 눌렸다가 비껴 나간 자국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었다. 베어 낸 자국이 아니라, 어디엔가 물려 떨림을 넘기던 흔적이었다.

“이건 혼자 떠드는 금속이 아니야.”

브론이 낮게 말했다.

세라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말은 어젯밤에도 했어.”

“어젯밤엔 느낌이었고, 지금은 결이 보여.” 브론은 고정편을 작업탁 위에 세웠다. “잡아당기면 버티는 금속이 아니야. 맞물린 채 떨림을 받아 넘기는 쪽이지. 자리가 틀리면 죽고, 자리가 맞으면 살아.”

나는 그 말을 적었다. `자리 맞춤.` 적고 나서 브론을 봤다.

“이름도 보여?”

브론의 손이 멈췄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럴듯한 농담으로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오늘은 웃지도 않았다. 눈은 고정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목울대만 한 번 움직였다.

“닮았어.”

“무엇과.”

“우리 집에서 마지막까지 안 넘기려 했던 줄기.”

세라의 손이 검집에서 떨어졌다. 미리엘도 붓끝을 멈췄다.

브론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사람처럼 고정편을 뒤집었다. “아직 이름은 쓰지 마.”

“겁나서?” 세라가 물었다.

브론은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깐 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마디가 작업탁 위를 무겁게 눌렀다. 브론이 겁을 인정하는 건 처음이었다. 술집에서의 허세도, 거래 자리에서의 능청도, 장비값을 올릴 때 쓰는 거친 웃음도 없었다. 금속 하나가 자기 집안이 부서지던 날의 문을 다시 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바깥에서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군수병 하나가 천막 자락을 들고 숨을 몰아쉬었다.

“기사단 군수 담당 서기가 적치칸을 다시 검인하러 들어온답니다. 병참 담당도 같이 옵니다.”

그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말을 덧붙였다.

“성도 쪽도 움직였습니다. 봉함 대상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리에트가 기둥에서 몸을 떼었다. “둘이 같이?”

“같은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목적지는 적치칸 같습니다.”

나는 메모를 접어 소매 안쪽에 넣었다. 세라는 검집 고리를 고쳐 잡았고, 미리엘은 잔향 기록지를 반으로 접어 품에 넣었다. 브론은 고정편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손수건 위에 올린 채, 모두가 보는 가운데 들었다.

“저쪽 앞에서 이름 부르지 마.” 세라가 말했다.

브론이 짧게 답했다. “나도 알아.”

그의 목소리는 아침보다 더 낮았다. 이름을 숨기는 일은 이제 개인적인 두려움으로만 그칠 일이 아니었다.

적치칸은 감시탑 오른편 낮은 지붕 아래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눈과 진흙이 엉긴 고철 더미였지만, 가까이 서면 층이 보였다. 부러진 고정환은 위쪽 선반에 걸렸고, 물먹은 운반틀 옆판은 아래에 눕혀졌고, 검게 죽은 금속띠는 안쪽 벽에 따로 세워졌다. 급히 버린 잔해가 아니었다. 누군가 종류를 알고 밀어 넣은 흔적이었다.

기사단 군수 담당 서기는 적치칸 앞 임시 탁자에 장부를 펼쳤다. 그의 왼쪽에는 병참 담당이, 뒤에는 병사 둘이 섰다. 성도 현장 사제는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봉함천과 납추를 든 보조원을 데리고 있었다. 왕국 사람들은 부품을 보려는 얼굴이었고, 성도 사람들은 물증을 봉하려는 얼굴이었다. 다르지만 닮은 얼굴이었다.

“어젯밤 회수된 잔해는 오늘 안으로 재검인합니다.”

서기가 먼저 말했다.

“북방 전초의 방어 자산으로 남길 물건과 폐기할 물건을 갈라야 합니다.”

현장 사제가 바로 이어받았다.

“반응 금속, 비공식 통로와 맞물린 부품, 봉인 표식이 남은 물건은 상위 확인 전 임시 봉함으로 돌립니다.”

브론이 낮게 웃었다. 웃음보다 새어 나온 숨에 더 가까운 소리였다.

“둘 다 같은 물건 보고 다른 말만 붙이네.”

서기가 장부 모서리를 눌렀다. “판독은 군수 쪽에서 다시 하면 됩니다.”

브론은 적치칸 바닥의 금속띠를 발끝으로 밀었다. “그렇게 손대면 결이 죽어. 홈에 손 한 번 잘못 넣으면 떨림이 끊긴다. 끊기면 남는 건 고철뿐이야.”

사제의 보조원이 봉함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봉함이 필요합니다.” 현장 사제가 말했다.

“봉함하면 더 빨리 죽지.” 브론은 그를 보지 않고 대꾸했다. “마른 천으로 감싸 둔다고 다 살아남는 줄 알아?”

나는 그들이 말싸움하는 동안 바닥을 봤다. 병사들은 사람보다 물건을 먼저 좇았다. 서기는 장부 칸을 먼저 보았고, 사제는 봉함천이 덮을 자리를 보았다. 물건이 움직이는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틈에서 움직여야 했다.

“세라.”

그녀가 내 쪽을 봤다.

나는 적치칸 바깥 말뚝줄을 턱으로 가리켰다. 세라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병사 둘이 서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 마당 쪽 말뚝줄을 짚었다.

“정면 둘째 줄 간격이 벌어졌습니다. 어젯밤처럼 바람목이 비면 또 뚫립니다.”

병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다른 병사도 따라 움직였다. 세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둘씩 끊어 다시 서세요. 물건을 옮기는 사람은 병사들 안쪽으로 들이지 말고. 누가 상자 쪽으로 들어오면 먼저 멈춰 세워요.”

병사들은 그녀 말을 들었다. 어젯밤 세라가 앞에 서서 버틴 것을 본 사람들이었다. 왕국 서기가 장부를 들고 있어도, 당장 바람목을 막으라는 지시는 장부보다 현장에 더 가까웠다. 둘이 적치칸 앞에서 비켜섰다.

나는 그 틈에 임시 탁자 끝의 작은 고정구 둘을 작업천 아래로 옮겼다. 숨긴 건 아니었다. 장부에 오르기 전에 탁자 안쪽에 먼저 놓았을 뿐이다. 동시에 브론은 적치칸 더미를 무너뜨리는 척하며 바닥 깊숙이 박힌 납작한 못판 조각을 발끝으로 끌어냈다.

리에트가 우리 뒤를 막았다. 그녀는 활을 들지 않았다. 다만 병참 담당과 사제 보조원 사이에 서서, 어느 쪽도 브론의 손을 곧장 붙잡지 못하게 어깨 각도를 맞췄다. 미리엘은 봉함천 앞으로 조용히 움직여 천이 바닥에 닿을 자리를 가렸다.

사제가 눈치챘지만 늦었다.

“지금 뭘—”

브론이 먼저 못판 조각을 들어 올렸다.

“이건 건드리면 안 돼.”

그 목소리가 바뀌었다. 농담도, 비웃음도, 거래자의 거친 허세도 사라졌다. 장인이 자기 손으로 먼저 알아본 상처 앞에서만 내는 목소리였다.

서기가 다가오려 했다. “보여 주십시오.”

브론은 조각을 내주지 않았다. 손바닥 위에서만 뒤집어 보여 주었다. 납작한 못판 가장자리에는 홈 둘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세 줄의 눌린 결이 비스듬히 지나갔다. 어젯밤 고정편에서 본 박자와 닮았다. 칼날처럼 끊는 자국이 아니라, 어디엔가 끼워져 버티던 흔적이었다.

“이걸 지금 장부 번호부터 붙이거나 봉함천에 말아 넣으면 끝장이야.”

“이유를 말하십시오.” 서기가 말했다.

브론은 그를 보았다. “이름을 아는 손이 먼저 봐야 하니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저들이 잡으려는 건 못판 조각이 아니라 브론의 입이었다.

세라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이 들을 만큼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이 부품은 전초 실전 점검에 필요한 물건으로 남겨 둡니다.”

서기의 얼굴이 굳었다. “그 판단은 군수 담당이 합니다.”

“제 이름을 전초 방어 보고 첫 줄에 쓰려는 건 괜찮고, 제 이름으로 안쪽 점검 시간을 버는 건 안 됩니까?”

말이 높지는 않았지만, 막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병사들 눈앞에서 세라는 이미 전초를 버틴 기사였다. 그 얼굴이 지금은 안쪽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서기는 그것을 바로 자를 명분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현장 사제는 봉함천을 조금 접었다. “기록은 남기겠습니다.”

“남기세요.” 세라가 말했다. “다만 물건은 아직 우리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확인합니다. 어느 한쪽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그 말은 왕국과 성도까지 포함하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는 파티가 먼저 보는 시간을 벌기 위한 말이었다. 나는 세라가 만든 그 짧은 틈을 따라 작업천 안쪽으로 못판 조각과 고정구를 옮겼다.

작업탁 안쪽은 바깥보다 서늘했다. 천막 지붕 아래 걸린 횃불은 낮게 흔들렸고, 금속 조각들의 그림자는 탁자 위에서 길게 겹쳤다. 우리는 고정편, 못판 조각, 고정구 둘, 미리엘의 잔향 기록지를 같은 높이에 놓았다. 바깥에서는 서기와 사제가 서로 다른 장부를 펴느라 잠깐 시간을 잃었다.

브론은 못판 조각과 고정편을 맞대 놓고 오래 말이 없었다. 미리엘이 먼저 손을 뻗었다. 그녀는 금속에 직접 닿지 않고, 손등을 가까이 대었다.

“고정편은 두 번 울린 뒤 짧게 남아요. 못판 쪽은 혼자 있을 때 거의 안 남고요. 둘이 맞을 때 살아나는 쪽이에요.”

브론이 낮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목소리가 약하지.”

그는 못판 조각을 뒤집어 홈을 짚었다.

“이 줄기는 날 세우는 쪽이 아니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자리 맞추고, 버티고, 끊어야 할 때만 정확히 끊는 쪽이지.”

세라가 물었다. “성검 계열이야?”

“지금 붙은 이름은 다를 수 있어.” 브론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래도 원래 줄기는 이어져 있다.”

나는 그 말을 정리했다.

“세라의 검집, 판석문의 고정편, 전초 적치칸의 못판. 셋은 같은 전쟁 장비의 줄기에 속했다.”

브론은 나를 보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집이 마지막에 안 넘기려 했던 줄기.”

세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 넘기려 했다는 건, 이미 누군가 넘기라고 했다는 뜻이네.”

브론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카르트 가문이 망한 이유를 다들 빚이나 술이나 장사 실패로 말하지. 편하거든. 망한 집을 웃음거리로 만들면, 뭘 거부했는지는 아무도 안 묻는다.”

그는 못판 조각을 손수건 위에 다시 놓았다.

“더 세게 베는 설계였다면 차라리 편했을 거야. 왕국도 좋아하고, 군수 귀족도 좋아하고, 성도도 축복 이름만 붙이면 됐겠지.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미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하는 장비였나요?”

브론은 단어를 골랐다.

“왜곡된 봉인 앞에서 자리를 잡게 하는 장비. 봉인을 깨부수는 게 아니라, 틀어진 구조가 사람을 먼저 삼키지 못하도록 버텨 주고, 잘못 맞물린 곳만 끊는 쪽.”

세라가 자기 검집을 보았다. “그래서 문이 나를 부른 게 아니라, 내게 설 자리를 물은 거군.”

“그럴 가능성이 크다.” 브론은 습관처럼 조심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있어. 네 검집은 왕국 장식으로만 남을 물건이 아니고, 저 고정편은 성도 봉함 상자 안에서 잠들 물건도 아니야.”

나는 메모 종이를 끌어당겼다.

`카르트 계열.`

`절단보다 자리 맞춤.`

`구조에 대응하는 장비.`

적고 나서도 손이 멈췄다. 마지막 한 줄을 쓰려면 이름이 필요했다. 브론은 내 손끝을 보고 말했다.

“아직 쓰지 마.”

“이름을?”

“응.”

“아직?”

“아직.”

그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바깥에서 서기의 목소리와 사제의 낮은 항의가 겹쳤다. 두 사람은 서로 다투는 듯했지만, 우리가 무슨 이름을 찾았는지 궁금해한다는 점만은 같았다.

리에트가 천막 틈을 살피며 말했다. “군수 담당이 병참 사람 하나를 창고 쪽으로 보냈어. 사제 쪽 보조원도 따라갔고.”

“창고?”

“안쪽 보급 창고. 둘이 서로 싫어하는 얼굴을 한 채 같은 문으로 간다.”

나는 탁자 위 물건을 정리했다. “그럼 여기서만 볼 시간이 없어. 장부를 봐야 해.”

브론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장부는 더 위험해.”

“그래서 지금 가야지. 저쪽이 먼저 번호를 붙이면, 우리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랑 싸워야 해.”

세라가 검집을 고쳐 찼다. “나는 바깥을 붙잡을게.”

“혼자 서지 마.” 나는 리에트를 봤다. “세라 뒤가 아니라, 옆 그늘에서 누가 빠지는지 봐. 병사와 보조원이 어느 쪽으로 신호 주는지 순서가 중요해.”

리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활보다 눈이 먼저인 자리네.”

“미리엘은 봉함천 쪽 절차 용어를 기억해 둬. 창고 장부랑 맞춰야 해.”

“네.”

브론은 못판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나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 대신, 손버릇을 봐. 이게 네 집 설계판과 닮았는지, 아니면 누가 흉내 냈는지.”

브론은 한숨을 뱉었다. “더 싫은 쪽이네.”

“그래서 네가 봐야 해.”

우리는 천막에서 갈라져 나갔다. 세라는 마당 중앙, 병사들과 장부 탁자 사이로 걸어갔다. 그녀가 움직이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왕국 서기에게는 승전의 얼굴이었고, 성도 사제에게는 반응 무구 보유자였다. 세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 시선이 우리 쪽으로 흐르지 않게 자기 앞에서 묶었다.

나는 브론과 미리엘을 데리고 창고 안쪽 문으로 들어갔다. 리에트는 문턱 바깥 그늘에 남았다. 그녀의 시선은 우리 등 쪽이 아니라 마당을 향했다. 누가 따라오는지를 보는 자리였다.

보급 창고 안쪽은 군량보다 종이 냄새가 짙었다. 젖은 나무, 묵은 밀랍, 마른 금속 가루가 섞여 있었다. 오른쪽 벽 낮은 선반에는 작은 궤짝들이 줄지어 놓였고, 왼쪽 분류대에는 재검인 장부와 옛 정비표 묶음이 따로 쌓였다. 바닥에는 사람 발자국보다 상자 바퀴가 지나간 홈이 더 또렷했다.

나는 먼저 바닥을 봤다. 분류대에서 바깥 문까지 회색 가루가 가느다랗게 이어졌고, 그 선 위에 작은 상자 셋이 같은 방향으로 눕혀 있었다. 맨 앞 상자에는 `현장 발췌`, 둘째 상자에는 `반응 계열`, 마지막 좁은 궤짝에는 `상행 전 대기`라는 글씨가 흐리게 남았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이 아니었다. 물건을 위로 올리기 전 잠깐 묶어 두는 말이었다.

선반 높이도 이상했다. 병사가 서서 장비를 꺼내기에는 낮고, 무릎을 굽혀 상자를 밀어 넣기에는 딱 맞았다. 이 창고는 사람이 오래 머물도록 만든 곳이 아니라, 물건과 문서를 빠르게 갈라 위로 넘기도록 만든 곳이었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여긴 사람 살리려고 만든 창고가 아니야.”

그는 분류대, 선반, 문턱 바닥을 차례로 가리켰다.

“사람은 바깥에서 붙들고, 물건은 안에서 먼저 갈랐겠지. 장비, 반응 물품, 기록. 그다음에야 누구 손에 뭘 얹을지 정했을 거다.”

미리엘은 장부 묶음 앞에 멈췄다. “남부 종루랑 비슷해요. 사람을 보지 않고 절차부터 나누는 냄새가 납니다.”

나는 재검인 장부를 펼쳤다. 첫 장은 평범했다. 못, 말뚝, 운반틀, 낡은 밧줄. 그런데 세 장을 넘기자 적힌 말이 달라졌다. 장비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이름 대신 짧은 절차 용어가 들어갔다.

`상행 전 보전.`

`반응 계열 별도 검인.`

`외부 보고 분리.`

미리엘이 입술을 다물었다. 브론은 정비표 귀퉁이로 손을 뻗었다. 어느 줄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여기.”

그가 짚은 것은 숫자가 아니라 약호였다. 짧은 선 하나, 비스듬한 점 둘, 아래쪽으로 눌린 갈고리 모양. 글자라고 하기엔 작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반복되어 있었다.

“아는 표기야?”

브론은 웃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남들이 보면 장부를 쓰는 버릇 같겠지. 그런데 장인들은 이런 데서 손을 숨겨.”

그는 못판 조각의 홈을 정비표 옆에 댔다.

“우리 공방 설계판에서 쓰던 묶음표기야. 납품 번호가 아니라 결 맞춰 보는 표시. 서로 다른 부품이 어느 박자에서 버티는지 보는 표식.”

미리엘이 물었다. “그러면 이 전초가 카르트 가문 장비를 받은 건가요?”

브론은 고개를 저었다. “받았다기보다 더 나빠. 시험한 거야.”

그는 장부 아래쪽을 짚었다.

`서사면 말뚝줄 보강.`

`기록 인계 통로 고정구.`

`반응자 동행 시 별도 검인.`

전장 보수 장비, 기록 통로 부품, 반응자를 다루는 절차가 한 묶음으로 붙어 있었다. 부러진 쇠붙이의 이름만 숨긴 게 아니었다. 어디에 박고, 누구 옆에 세우고, 어떤 문서와 함께 올릴지까지 처음부터 같이 관리했다.

“왕국과 성도가 같이 쓴 장부네.” 내가 말했다.

브론은 턱을 굳혔다. “우리 집이 그냥 납품 상인이었다면 이름이 남아. 장비명도, 공방 이름도, 돈 받은 줄도. 그런데 여기는 이름을 지우고 손버릇만 남겼어. 나중에 장부 보는 놈은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어디에 써먹을지는 아는 방식이지.”

미리엘이 조용히 덧붙였다. “사람 다루는 방식과 같네요.”

나는 그 말에 장부를 더 넘기지 못했다. 남부 종루에서 봤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사람을 치료 대상이라고 부르고, 실은 격리했다. 기록을 보전한다고 말하고, 실은 원본과 발췌본을 갈랐다. 여기서는 장비가 같은 손에 걸려 있었다. 이름을 지우고 절차만 남긴다. 그렇게 하면 사람도 물건도 주인 없이 위로 올라간다.

세라가 문턱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얼굴에는 뒤쪽 마당에서 일부러 천천히 걸어온 기색이 남아 있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아직 그녀의 등에 따라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와 장부 위의 약호와 브론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확실해?”

브론이 답했다. “우리 집 손이 닿은 줄기라는 건 확실해.”

“거래?”

브론은 고개를 저었다.

세라는 장부 한쪽을 눌렀다. “거부였군.”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브론 카르트는 떠돌이 장비공만이 아니었다. 어떤 설계를 끝내 넘기지 않으려다 부서진 집안의 남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설계는 지금 세라의 검집, 판석문 고정편, 북방 전초의 창고 장부와 같은 줄에서 다시 올라왔다.

세라는 `외부 보고 분리`라는 문장을 오래 봤다. 그녀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내 검이 왕국 상징으로만 남는 건 싫어.”

그녀는 장부 끝을 더 세게 눌렀다.

“이 줄기 이름도 저쪽 장부 안에서만 살게 둘 생각은 없어.”

리에트가 문 바깥에서 낮게 알렸다. “왕국 전달병 하나가 들어왔다. 성도 봉함 인원 둘도 같은 창고 문으로 온다.”

“같은 편처럼?” 미리엘이 물었다.

“아니. 서로 싫어하는 얼굴이야. 그런데 걸음은 같은 쪽.”

나는 장부를 덮었다. 서로 다른 말로 같은 이름을 묻으러 오는 발소리였다.

해가 기울 무렵, 우리는 다시 숙영칸 뒤 작업탁에 모였다. 바깥 마당은 일부러 평온한 척했다. 병사들은 말뚝줄 수치를 다시 읽었고, 군수 담당은 장부 칸을 비워 둔 채 대기했고, 성도 보조원은 봉함천 끈을 매만졌다. 겉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 탁자 위에는 이미 다른 줄이 생겼다.

가운데에는 판석문 고정편이 놓였다. 오른쪽에는 적치칸 못판 조각, 왼쪽에는 미리엘의 잔향 기록, 아래쪽에는 브론이 급히 그린 결 스케치,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정리한 비등재 메모가 놓였다. 물건 하나에 매달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람, 위치, 장부, 세력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보게 만드는 자리였다.

브론은 그 배열을 오래 내려다봤다. 바깥 말발굽 소리가 한 번씩 가까워졌고, 천막 천은 바람에 얇게 떨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름 말해 줄게.”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세라는 검집에서 손을 떼고, 미리엘은 펜을 내려놓고, 리에트는 천막 틈에서 바깥을 보던 시선을 잠깐 우리 쪽으로 돌렸다. 그 이름이 기술 분류만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북방 고정선.”

짧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작업탁 위 공기를 바꿨다. 금속 조각들이 갑자기 물건에서 문장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브론은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집에선 그렇게 불렀어. 칼날 이름이 아니라 자리를 맞추는 줄기. 봉인 왜곡이 밀고 들어올 때 버티게 하거나, 잘못 맞물린 곳만 끊어 내는 쪽. 완성품으로 넘기면 전장에서 영웅을 세우는 데도 쓰이고, 사람을 분류해 묶는 데도 쓰였을 거야.”

그는 이를 악문 채 고정편을 보았다.

“우리 집은 거기서 멈추려 했고. 그래서 밀렸지.”

세라는 아주 천천히 자기 검집 끝을 쓸었다.

“내 무구가 그 줄기에서 갈라졌다면, 저쪽이 내 이름으로 뭘 하려는지도 더 분명해지네.”

미리엘은 기록지 귀퉁이에 짧게 적었다. `성도 강경파는 계열 이름이 살아나는 걸 막으려 할 것.`

리에트는 바깥 마당을 보며 말했다. “왕국 안쪽 반대파도 세라와 브론을 따로 떼어 쓰려 하겠지. 하나는 상징으로, 하나는 설명하는 입으로.”

나는 새 종이를 꺼냈다. 오늘 결론은 네 줄이면 됐다. 더 길게 쓰면 저쪽이 훔쳐 갈 말이 늘어난다.

`브론 판독 확보.`

`카르트 가문이 거부한 계열 확인.`

`북방 전초 시험 운용 흔적 확인.`

`공식 보고에는 올리지 않음.`

브론이 네 줄을 보고 말했다. “너무 딱딱해.”

“딱딱해야 오래 버텨.”

“부드럽게 쓰면?”

“누가 가져가.”

브론은 욕을 삼키듯 웃었다. “그건 맞다.”

나는 빈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제 역할을 나눠야 해. 저쪽이 들어오면 우리에게서 먼저 떼려는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일 거다.”

세라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앞에 세우겠지.”

“응. 왕국은 널 북방 승전의 얼굴로, 성도는 반응 무구 보유자로 세울 거야. 그러니 네가 먼저 말해야 해. ‘내 이름은 앞줄에서만 쓰고, 안쪽 판단은 파티 공동 확인으로 남긴다’고.”

세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브론은 이름을 말하고 결 스케치를 설명하되, 장부 원본은 직접 들고 있지 마. 네 손에 있으면 저들은 물건 보관 책임을 걸어 네 입을 묶을 거야.”

브론은 불쾌한 얼굴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미리엘은 공명 기록과 종루 절차 용어를 붙여. 성도 사람에게는 성도 쪽 용어로 시간을 벌어야 해. 봉함이 아니라 현장 보전이 먼저라는 식으로.”

미리엘은 펜을 쥔 손을 조금 더 세웠다. “할게요.”

“리에트는 접근 순서를 봐. 전달병이 장부 탁자로 붙는지, 봉함 인원이 기록칸으로 꺾는지, 누가 서로에게 신호를 주는지.”

“이미 보고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내 줄을 적었다.

`에이드리언: 정본 메모 / 원본 분리 / 움직임 순서 기록.`

세라는 내 펜을 가져가 빈칸 아래에 또박또박 적었다.

`이름은 우리가 고른 자리에서만 부른다.`

그녀는 그 문장만 쓰고 멈추지 않았다. 위쪽 네 줄과 자신이 쓴 문장을 같은 괄호로 묶었다. 바깥 보고와 안쪽 정본을 처음부터 갈라 두겠다는 표시였다.

브론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아침의 얼굴과 달랐다. 두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혼자 들고 있던 이름을 이제 파티 가운데 내려놓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바깥에서 말발굽이 겹쳐 울렸다. 하나가 아니라 둘, 곧 셋으로 늘었다. 병사 목소리가 천막 너머로 터졌다.

“왕국 전달병 도착!”

거의 이어서 다른 소리가 겹쳤다.

“성도 봉함 수레도 들어옵니다!”

리에트가 천막 틈으로 바깥을 보았다. “왔네.”

미리엘은 기록지를 접었다. “너무 빨라요.”

브론은 고정편을 손수건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름을 안 꺼냈으면 더 늦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국 왔을 거다. 라그나드가 길을 보여 줬고, 왕국과 성도는 그 길에 붙을 이름을 먼저 가져가려 해. 우리가 늦게 부르면, 저쪽이 먼저 불렀을 뿐이야.”

세라는 검집 고리를 채웠다. “그럼 이번엔 우리가 먼저 고르자.”

그녀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젯밤 판석문 앞에서 두 번 울린 금속이 이제 사람의 선택으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나는 작업탁 위 메모를 접지 않았다. 모두가 한 번씩 볼 수 있게 그대로 둔 채 천막 자락을 젖혔다.

마당 중앙에는 왕국 전달병의 말이 서 있었다. 오른편에는 봉함 상자를 실은 성도 수레가 멈춰 있었다. 서로 다른 색의 깃이 같은 바람에 흔들렸다. 지휘관은 말 옆에서 장부를 들었고, 현장 사제는 수레 쪽 봉함 끈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웃지 않았다. 그런데 둘 다 같은 곳을 보았다. 세라의 검집, 브론의 손, 그리고 우리가 막 나온 천막.

저들은 각자 다른 말을 들고 왔다. 왕국은 승전과 자산을, 성도는 봉함과 상위 확인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왕국과 성도의 말은 모두 우리에게서 사람과 이름을 떼어 가려는 방향으로 모일 것이다.

나는 천막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 먼저 마당 구조를 봤다. 왼쪽에는 말, 오른쪽에는 봉함 수레, 중앙에는 장부 탁자, 그 사이로 병사들이 반원을 만들었다. 우리가 설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세라는 중앙 앞줄에, 브론은 내 오른쪽 반 걸음 뒤에, 미리엘은 봉함 수레 쪽 절차를 살필 수 있는 거리에, 리에트는 감시탑 기둥 그늘에 섰다.

물건 하나를 지키는 일이 아니었다. 물건에 붙는 이름, 그 이름이 닿는 사람, 그리고 그 이름을 어느 줄에 남길지 고르는 권한까지 한꺼번에 지켜야 했다.

브론이 내 옆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이번엔 안 뺏긴다.”

나는 고정편을 보지 않았다. 브론의 손, 세라의 어깨, 미리엘의 접힌 기록지, 리에트가 기둥 그늘에서 바꾼 발 위치를 보았다. 물건만 보다가 사람을 놓치면, 저들이 원하는 싸움이 된다.

“응.” 내가 말했다. “물건만이 아니라, 네 입도.”

브론이 숨을 멈췄다. 세라는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이미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왕국 전달병과 성도 수레 사이에 섰다. 검을 뽑지 않고, 자기 이름을 먼저 내밀지도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앞줄에 세우려는 두 손 사이에서, 우리 쪽이 고른 첫 자리에 섰다.

나는 메모의 마지막 줄을 마음속으로 다시 읽었다.

누가 이 이름을 다시 묻히려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 이름을 어디서 살려 둘 것인가.

바람이 천막 뒤 작업탁의 종이를 흔들었다. 북방 고정선이라는 이름은 이제 파티 안쪽에서 살아났다. 밖에서는 아직 아무도 그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 간격이 오늘 우리가 가진 가장 좁고도 가장 단단한 방패였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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