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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의 얼굴이 아닌 증언자의 등

마지막 거울실 안쪽 공기는 장례 회랑보다 더 차갑지 않았다. 대신 더 오래 젖어 있었다. 검은 거울면 아래 얕은 물턱에는 방금 열린 인계 홈과 젖은 위패 조각이 반쯤 잠겨 있었고, 세 추도 홈 빛은 한 줄로 이어진 채 바닥을 얇게 울렸다. 뒤 갈림칸은 세라가 막고 있었다. 검집 끝은 돌틈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고, 한쪽 어깨는 바깥을 향했다. 누가 내려오든 먼저 금속과 뼈에 부딪쳐야 하는 자리였다. 세라 발끝 앞에는 방금 잘린 젖은 뿌리와 부서진 위패 가루가 가늘게 흩어져 있었고, 그 위를 지나려면 발목부터 소리를 냈다.

브론은 오른편 받침턱에 손을 얹은 채 낮게 숨을 골랐다. 하중이 한 사람에게 몰리지 않게 문턱 전체를 붙드는 자세였다. 왼무릎은 낮은 물턱 바깥 돌에, 오른발은 반쯤 갈라진 받침 아래 홈에 걸쳐 있었다. 미리엘은 젖은 명단 부호와 위패 밑면 표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위패 밑에 남은 닳은 결을 손톱으로 더듬다가, 바깥에서 나중에 눌러 찍은 인간식 끝번호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리에트는 검은 거울면 바로 앞까지 가지 못한 채 비어 있는 깊은 홈 하나와 세워 둔 위패 줄 사이에 서 있었다. 이솔데는 그 너머, 검은 뿌리 사이 물빛과 그림자가 섞이는 자리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녀 뒤로는 뒤집힌 사당 안쪽 장례 회랑이 검은 수맥처럼 더 깊이 꺾여 들어갔다.

거울면 한가운데의 검은 선이 세로로 길게 벌어졌다.

처음 보인 건 얼굴이 아니었다.

등이었다.

젖은 어깨 둘이 같은 줄 위에 잠깐 나란히 잡혔다. 하나는 무겁게 숙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뒤를 돌아볼 준비가 된 등처럼 비틀려 있었다. 그 그림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 말고 손부터.”

다들 바로 시선을 고정했다.

“누가 뭘 들었는지, 누가 먼저 갈랐는지부터 보자.”

이솔데가 낮게 말했다.

“죄인을 고르려는 눈에는 여기서도 얼굴만 남는다.”

검은 뿌리 사이로 젖은 손 하나가 천천히 들렸다. 손끝이 거울면 아래 물턱을 스쳤다.

“남은 자의 순서를 읽는 눈에만 등이 남는다.”

바깥에서 왕국 사절 목소리가 다시 밀려 들어왔다.

“반응이 열렸으면 봉함부터 해라! 명단 조각과 위패만 먼저 넘겨!”

엘프 반대파 목소리도 곧바로 겹쳤다.

“더 열면 숲 안쪽 수치가 전부 밖으로 쏟아진다! 지금 닫아!”

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반 치 더 깊이 눌렀다. 돌과 금속이 짧게 갈리는 소리가 갈림칸을 긁고 지나갔다. 검집 날등이 문턱에 더 비스듬히 물리자 위쪽 협로에서 내려오던 그림자 둘이 저절로 한 발씩 물러났다.

“그러니까 또 하나만 들고 가겠다는 거겠지.”

바깥이 잠깐 잠잠해졌다. 브론이 입가를 굳힌 채 물었다.

“버틸 테니, 너는 읽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거울면 안쪽 장면이 더 또렷해졌다.

젖은 수로 갈림목이었다. 왼편으로는 낮은 수맥 홈이 이어졌고, 오른편으로는 좁은 장례 회랑과 바깥 숲 비탈이 갈라졌다. 바닥엔 작은 관이나 목함을 끌던 것 같은 하중선이 진흙처럼 눌려 있었다. 물은 얕았지만 발목을 덮을 만큼 차 있었고, 갈림목 중앙에는 누군가 여러 번 멈춰 서며 발뒤꿈치로 돌가루를 긁은 둥근 먹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위를 두 사람이 가로질렀다.

한 사람은 로웬 헤일이었다.

등을 굽혀 명단통과 작은 목함을 묶어 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허리선과 어깨 기울기, 급하게 방향을 틀 때 왼발이 먼저 안쪽으로 먹는 버릇까지 낯익었다. 다른 한 사람은 리에트의 옛 대장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업은 게 아니었다. 대신 피가 번진 생존자 한 사람을 양팔로 밀어 낮은 수로 쪽으로 먼저 넘기고 있었다. 젖은 소매가 물을 먹어 팔에 달라붙은 채였고, 활은 이미 다른 손으로 돌려 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둘은 함께 달아나지 않았다.

그 장면은 그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보여 줬다. 로웬은 등에 진 명단통과 목함을 붙들고 안쪽 회랑을 스쳤고, 옛 대장은 마지막으로 생존자 몸을 낮은 수맥 홈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몸을 틀어 바깥을 봤다. 같은 줄에 서 있었지만, 같은 방향으로 달아날 생각을 하는 몸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남길 것을 등에 묶었고, 한 사람은 남겨 보낼 사람을 손으로 밀었다. 짐의 성질부터 달랐다.

미리엘이 숨을 빨아들였다.

“저 표기.”

그녀 손끝이 거울면 아래로 떠오른 얇은 부호를 가리켰다.

“도주가 아니에요. 인계 뒤 분기예요. 장례 줄에서 사람과 물건을 갈라 넘길 때 쓰는 부호에 더 가까워요.”

브론은 바닥 물턱 아래를 손톱으로 짧게 긁었다. 젖은 하중선이 더 선명해졌다. 하나는 짧고 굵었고, 다른 하나는 길고 얕았다. 브론 시선이 그 둘 사이를 몇 번 오갔다.

“검보다 무거운 게 먼저 실렸어.”

그가 낮게 말했다.

“사람이 싸우다 빠진 자국이면 이렇게 안 남아. 문서통, 위패함, 그런 게 먼저 실린 선이야. 그리고 여기.”

그는 갈림목 중앙의 둥근 먹힘 자국을 짚었다.

“한 번 내려놨다가 다시 멘 자리다. 급해서 버린 놈 발자국이 아니고, 뭘 누구 손으로 넘길지 고른 자국이야.”

리에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빛 머리카락 끝에서 물기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녀는 거울면 속 옛 대장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던 ‘패주’의 등과 달랐다. 달아나는 사람은 어깨를 앞으로 말아쥔다. 하지만 저 등은 아니었다. 남은 활 한 발과 자기 몸 한 칸을 어디에 둘지 끝까지 재는 사람의 등이었다. 리에트 목젖이 한번 크게 움직였다. 말보다 오래된 후회가 먼저 목을 막는 모양이었다.

거울면 속 옛 대장이 몸을 더 틀었다. 낮은 수로 쪽으로 밀려 들어간 생존자를 한 번만 확인하고 곧바로 활을 들었다. 추격 그림자 셋이 위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좁은 갈림목 한가운데를 골라 옆으로 섰다. 길을 열어 주는 몸이 아니라, 길을 자기 몸으로 접는 자세였다. 수로 안쪽으로 밀려간 사람과 로웬이 지나는 안쪽 회랑 사이를 자신 몸 하나로 막아 선 자세였다.

리에트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아냐.”

그녀가 거의 숨처럼 말했다.

“저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기억 오염이 덮쳤다.

거울물 위로 같은 장면이 다른 결로 겹쳐졌다. 젖은 등 하나가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 넘어지는 그림자, 뒤늦게 살기 위해 동료를 버린 사람의 뒷모습처럼 보이게 만드는 빠른 번짐. 거울실 바닥 물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리에트 무릎이 풀릴 듯 휘청했다. 얕은 물턱 안쪽에서는 방금 떠오른 운반 부호가 지워지고, 대신 길게 끊긴 검은 획 하나가 바깥 번호처럼 덮이려 했다.

나도 등 뒤가 서늘해졌다. 잘못 읽으면 다시 한 사람만 죄인으로 남길 거라는 공포가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이름을 복원하겠다며 또 다른 편집을 하는 건 아닌지, 여기서도 같은 손이 되는 건 아닌지 식은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첫 던전 반원실에서 빈 줄을 처음 봤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줄은 있는데 이름이 없고, 이름이 없으니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 대신 판정문만 남던 그 감각.

세라가 검집을 더 비틀어 넣었다. 갈림칸 위쪽에서 내려오던 발소리 둘이 동시에 멎었다.

“앞 봐.”

짧은 말이었다.

“뒤는 내가 막아.”

브론도 받침턱에 몸을 더 실었다. 물기가 밴 돌이 뚝 하고 짧게 울렸다.

“하중 몰리면 말해. 한 사람 무너지게 안 둔다.”

그 두 마디가 거울실 안 공포를 잘랐다. 읽는 자리, 버티는 자리, 뒤를 막는 자리. 문턱이 요구한 셋이 지금 우리 안에서도 그대로 맞물리고 있었다. 미리엘은 이미 젖은 천 조각을 접어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부호가 다시 덮이지 않게 눈으로 순서를 세고 있었다. 누구도 리에트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지금 붙들어야 하는 건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장면의 순서였으니까.

나는 리에트를 봤다.

“언제 갈랐지.”

최대한 짧게 물었다.

“누가 먼저 내려갔고, 누가 남았고, 마지막에 어느 손이 붙었는지만 말해.”

리에트 눈동자가 한 번 크게 떨렸다. 하지만 그대로 깨지진 않았다. 그녀는 거울면이 강요하는 얼굴 대신 갈림목 바닥과 등, 손, 하중선을 다시 보려 했다. 숨이 고르지 못해도 시선은 조금씩 돌아왔다.

“먼저…”

마른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먼저 아래로 간 건 사람이야. 명단이 아니고.”

그녀 시선이 거울물 아래 낮은 수로 쪽을 붙들었다.

“로웬이 그다음. 등에 통을 졌어. 그리고 대장은—”

기억 오염이 다시 얼굴을 밀어 넣으려 했다. 리에트는 이를 악물었다.

“대장은 달아난 게 아니야. 길을 막았어.”

그 말이 떨어지자 거울면 속 형상이 다시 뒤집혔다. 앞으로 도망치는 등처럼 보였던 그림이 멈추더니, 화살을 먹인 채 좁은 길목을 틀어막는 후위 엄호 자세로 바로 섰다. 리에트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을 듯했지만 끝내 버텼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장면 하나를 자기 손으로 다시 붙잡아 세운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섰다.

“내가…”

그녀가 말을 삼키다가 다시 냈다.

“내가 끝까지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미리엘이 재빨리 두 번째 위패 밑면 부호를 뒤집어 읽었다. 바깥 끝번호처럼 보였던 표기가 안쪽 결에 맞추자 전혀 다른 순서로 이어졌다.

“도주 표기가 아니에요.”

이번엔 그녀 목소리가 더 단단했다.

“누가 먼저 들려 나갔는지 적는 운반 순서예요. 장례 줄이 끊길 때, 사람과 이름표를 어떤 차례로 나눴는지 적어 두는 쪽에 가까워요.”

브론도 물턱 아래 남은 끌림 자국을 짚었다.

“여기 봐. 목함 한 번 내려놨다가 다시 멘 자국이다. 급해서 버린 선이 아니라, 넘길 걸 넘기고 몸을 돌린 선이야.”

그는 손가락을 한 칸 옮겨 짧은 긁힘 하나를 더 가리켰다.

“그리고 활걸이 금속이 여기 닿았어. 남은 놈이 뒤를 막으려고 몸을 틀 때 난 자국이다.”

나는 그 둘 말을 한 줄로 붙들었다. `배신자 한 명의 도주`가 아니라 `희생 명단과 살아남은 사람의 길을 나눠 든 분기`. 여기서 잘린 건 사람 하나의 양심이 아니라, 남은 이들이 서로에게 넘긴 순서였을 가능성이 점점 또렷해졌다. 첫 던전에서 줄을 통째로 비우던 방식, 회색 종루에서 기록축과 병막을 일부러 갈라 올리던 방식, 왕도 문서고에서 원본과 발췌본을 서로 다른 칸에 묶던 습관이 한꺼번에 겹쳐 보였다. 장면을 접을 때는 늘 먼저 순서를 끊었다. 순서가 끊기면 얼굴 하나만 남았고, 얼굴 하나만 남으면 죄인 하나만 만들면 됐다.

그 순간 왼편 낮은 물턱 밑에서 젖은 명단 조각 몇 줄이 떠올랐다. 잘린 이름 결, 인간식 끝번호, 성도 격리 태그와 닮은 얇은 끈, 엘프식 장례 부호가 같은 젖은 줄에 얽혀 있었다. 미리엘이 거의 즉시 그 조각을 읽기 시작했다. 손끝은 떨렸지만 멈추진 않았다. 그녀는 끝번호를 먼저 세지 않고, 끈이 묶인 방향과 장례 부호의 닳은 결을 먼저 따라갔다.

“강제 희생 명단 일부예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숲 안쪽 이름 줄이 바깥 번호 체계랑 같은 칸으로 묶였어요. 누군가 장례를 접고, 관리용 끝번호로 다시 덮었어요.”

명단 조각은 한 장짜리가 아니었다. 물 아래에서 겹쳐 붙은 얇은 섬유 셋이 다른 박자로 들썩였다. 가장 위 조각에는 젖은 번호 둘과 짧은 봉함선이 남아 있었고, 그 아래 조각에는 이름 결 옆으로 손바닥만 한 빈칸이 패여 있었다. 마지막 조각은 글씨보다 묶는 방식이 먼저 보였다. 끈을 한 번 감고 끝을 안쪽으로 숨긴 다음, 다시 바깥에서 다른 색 실로 눌러 묶은 흔적. 장례 줄 하나를 보관용 줄로 바꿀 때나 남는 꼴이었다.

미리엘은 그 끈 매듭을 손톱으로 가리켰다.

“이건 급히 묶은 매듭이 아니에요. 안쪽 줄을 먼저 감추고, 바깥 판정표를 다시 붙일 때 쓰는 식이에요.”

브론도 고개를 숙였다. 그는 글을 읽기보다 젖은 종이 두께와 눌린 자국을 봤다.

“명단도 한 번에 접은 게 아니군.”

그가 중얼거렸다.

“두께가 달라. 안쪽 건 오래 젖었다 말랐고, 바깥 건 나중에 덧댔다. 같은 날 만든 묶음이 아니야.”

나는 조각 가장자리의 결을 눈으로 따라갔다. 첫 던전의 석판처럼 아예 지워 버린 게 아니었다. 이름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 장례 줄 위에 관리 줄을 겹쳐 누른 뒤 바깥 사람이 보기에 쉬운 표기만 남겨 둔 방식이었다. 누군가 나중에도 원본을 다시 열 수 있으리라 믿고 접은 흔적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틈까지 막기 위해 바깥 번호를 더 진하게 눌러 찍은 흔적이었다. 여기에도 손이 하나가 아니었다.

엘프 반대파가 위에서 격하게 외쳤다.

“그 줄은 다시 묻어야 한다! 숲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다!”

왕국 사절 쪽도 곧바로 받았다.

“명단 조각만 넘겨라! 검증은 바깥 봉함 아래서 다시 하면 된다!”

세라가 마침내 뒤를 반쯤 돌아봤다. 하지만 시선보다 먼저 움직인 건 몸이었다. 그녀는 검집과 무릎으로 갈림칸을 더 접어 위쪽 손이 아래 홈 하나만 따로 집지 못하게 막았다. 어깨로는 내려오는 방향을 눌러 두고, 무릎으로는 낮은 틈을 먼저 닫았다.

“또 같은 짓을 하겠다는 거네.”

브론도 한쪽 위패 받침을 살짝 옮겼다. 물턱 아래 홈과 위패 줄이 어긋나지 않되, 바깥에서 손 하나 넣어 조각만 빼갈 수는 없게 만드는 움직임이었다. 받침 아래 돌이 움직이며 젖은 홈 둘이 한 번에 맞물렸다. 한 조각만 억지로 빼면 위패 셋이 같이 쓰러질 모양새가 됐다.

“하나만 떼면 또 편한 줄만 남지.”

미리엘은 명단 조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숲 밖이든 안쪽이든, 다들 같은 식으로 겁내고 있어요. 이름 전체가 드러나는 걸.”

리에트는 아직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제 거울면이 아니라 현재의 명단 조각과 인계 홈을 보고 있었다. 그녀 입술이 떨렸다.

“그래서…”

한 박자 뒤에야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배신이라고 믿는 쪽이 쉬웠어.”

아무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말 끝을 고르나 보는 편이 더 중요했다.

“한 사람 얼굴에 다 몰아넣으면,”

리에트가 마른 숨을 삼켰다.

“내가 못 본 줄도, 숲이 접은 줄도, 바깥이 덧댄 줄도 안 봐도 되니까.”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수치의 방향을 바로 가리키는 문장이었다. 자기 대장을 잘못 본 죄책감만이 아니라, 그렇게 보는 편이 숲 전체와 자기 자신에게 더 쉬웠다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이 떨어지자 검은 거울면 아래로 퍼지던 잘못된 번짐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솔데가 그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오래 젖은 장례 담당자 같은 가는 실루엣이 검은 뿌리 사이에서 조금 더 또렷해졌다. 그녀는 괴물이라기보다, 물에 잠긴 말을 끝까지 붙드는 증언자처럼 보였다. 거울면 아래 남은 명단 조각과 리에트의 손, 그리고 바깥을 막은 세라의 검집을 차례로 보고 말했다.

“숲의 배신자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거울면 아래 선 하나가 다시 넓어졌다.

“배신자라는 말이 증언의 줄을 덮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다음 문장은 분명해야 했다.

“우리가 찾을 건 배신자 얼굴이 아니야.”

나는 명단 조각과 인계 홈, 거울면 속 갈림목을 한 번에 가리켰다.

“누가 이 줄을 잘라 저 말 하나로 접었는지, 그 순서야.”

미리엘이 곧바로 받았다.

“이름을 지운 손.”

브론이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손이 뭘 남기고 뭘 가져갔는지.”

그때 거울실 바닥이 한 번 더 울렸다. 세 추도 홈 빛이 서로 다른 박자로 흔들리다가 다시 한 줄로 이어졌다. 방금까지는 갈림목 장면만 보여 주던 물빛이 이번엔 그 주변 실무까지 조금 더 넓게 밀어 올렸다.

낮은 수로 쪽으로 먼저 넘겨진 생존자 옆에는 젖은 천으로 묶은 작은 약포 둘이 있었다. 로웬이 멘 명단통 아래쪽에는 목함 말고도 얇은 판 두 장이 덧대어 있었는데, 그 판 모서리엔 장례 결을 따라 긁은 표시가 남아 있었다. 옛 대장이 길목을 막아 선 자리 뒤 돌벽엔 화살깃이 스친 선이 세 줄, 그 아래엔 사람 손이 젖은 벽을 더듬다가 남긴 넓은 손바닥 자국 하나가 있었다. 도주라면 굳이 남기지 않을 선들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이 길을 잘못 잡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남긴 표식처럼 보였다.

브론이 그걸 먼저 짚었다.

“봐.”

그는 거울면 아래 돌가루가 눌린 방향을 가리켰다.

“활 쏜 놈은 저기서 한 번 물러난 게 아니라, 뒤로 붙는 길을 벽에 남겼어. 사람 하나쯤은 나중에 더 따라오라고.”

미리엘도 약포와 장례 부호를 번갈아 봤다.

“장례를 끝낸 자리가 아니에요. 넘기고, 살리고, 다음 손이 이어 붙게 만든 자리예요.”

나는 낮은 수로 쪽 약포 둘, 로웬이 멘 명단통 밑 판 두 장, 벽의 손자국을 한 줄로 엮어 봤다. 이름을 보관한 손, 생존자를 밀어 넣은 손, 뒤따를 사람을 위해 벽에 선을 남긴 손. 어느 것도 `배신자 한 명`으로 접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장면을 얼굴 하나의 패주로 다시 편집해야만 했을 것이다.

바깥에서 왕국 사절이 다시 외쳤다.

“그 아래서 읽은 건 입회 전 효력이 없다! 조각부터 넘겨!”

엘프 반대파도 뒤질세라 소리를 올렸다.

“숲 장례 줄은 숲 안에서 닫는다! 외부 기록 아래 두면 끝이다!”

세라는 이번엔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희 둘 다 밖으로만 들고 나가려는 거겠지.”

그 말은 짧았지만 충분했다. 왕국은 조각만 떼어 자기 봉함 아래 두고 싶어 했고, 엘프 반대파는 전체를 다시 묻어 버리고 싶어 했다. 방향은 달라도 결과는 같았다. 순서를 잃는다. 이름보다 판정문이 먼저 남는다.

브론이 위패 받침을 한 번 더 조정했다. 이번엔 세운 위패 셋이 얕은 물턱, 비어 있는 깊은 홈, 뒤 갈림칸과 더 정확히 물렸다. 마치 장례실 자체가 지금 우리 손에서 다시 조립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하나만 떼면 셋 다 무너진다.”

그가 말했다.

“가져가려면 전부 들고 가야 하는데, 그러면 저 위 좁은 길로는 못 지나.”

실무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확실했다. 지금 이 장면을 지키는 건 명분보다 먼저, 물건의 배치와 몸의 버팀이었다.

나는 바닥을 한번 더 훑었다. 세운 위패 셋 아래에는 각기 다른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오래 잠겼다 말라 나무결이 벌어진 자국, 하나는 바깥 끝번호를 새로 눌러 찍으며 잉크가 번진 자국, 마지막 하나는 누군가 급히 세워 놓고 손바닥으로 눌러 버틴 둥근 얼룩이었다. 세 자국이 같은 날 남은 게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장례 줄이 한 번에 망가진 게 아니라 여러 차례 접히고 다시 눌렸다는 게 보였다. 누군가는 숨기려 했고, 누군가는 숨긴 걸 다시 맞춰 놓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 싸움의 마지막 남은 홈이었다.

위 갈림칸에서는 봉함용 갈고리 끝이 돌에 한 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세라가 몸을 더 눌러 길목을 막지 않았다면, 저 손은 이미 아래로 내려와 명단 조각부터 낚아챘을 것이다. 반대편에선 엘프 반대파 발목 장식이 젖은 돌을 스치는 소리가 잦아졌다. 묻겠다는 쪽과 가져가겠다는 쪽이 같은 문턱에서 같은 조각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둘 다 전체 줄을 감당할 생각은 없었다. 밖으로 들고 나가 각자 다루기 쉬운 모양으로 다시 접는 데만 익숙한 손들이었다.

갈고리 끝이 두 번째로 내려왔다. 이번엔 명단 조각이 아니라 브론이 옮겨 둔 받침 뒤쪽을 긁었다. 받침이 반 치만 빠져도 위패 셋의 각도가 틀어지고, 거울면 아래 줄이 다시 얼굴 하나로 접힐 터였다. 브론은 욕을 삼키며 망치 자루를 받침 밑으로 밀어 넣었다. 돌과 나무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손은 하나인데 위쪽 명령은 둘이다.”

그가 이를 드러내듯 말했다.

“왕국 놈은 봉함 상자부터 보고, 숲 놈은 덮개부터 본다. 둘 다 아래 배치엔 관심이 없어.”

세라는 갈고리 끝을 검집 옆면으로 밀어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자 장갑 가죽이 젖은 돌에 긁혔다. 그녀는 바깥을 향해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발끝을 뒤로 빼며 갈림칸 폭을 더 줄였다. 왕국 사절이 앞으로 밀고 들어오면 어깨에 부딪히고, 엘프 반대파가 옆 틈을 타면 검집 끝에 막히는 각도였다.

“에이드리언.”

세라가 내 이름만 불렀다. 경고도 재촉도 아니었다. 지금 읽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디까지 막을지 정하는 짧은 확인이었다.

나는 명단 조각 위로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닿으면 읽기가 아니라 소유가 된다. 대신 무릎을 낮춰 조각과 수로 홈과 빈 깊은 홈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이까지 시선을 맞췄다. 미리엘은 내 옆으로 반걸음 내려와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만지려는 게 아니라, 젖은 공기에서 잉크 냄새와 정화 잔향을 가르려는 손놀림이었다.

“봉함 끈 냄새가 서로 달라요.”

그녀가 말했다.

“성도에서 쓰는 정화 밀랍이 하나, 숲 안쪽 보관 향이 하나. 그런데 둘 다 원래 장례천 위에 덧댄 거예요. 먼저 있던 건 이름 결이에요.”

리에트의 숨이 거기서 한 번 끊겼다. 그녀는 아직 울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대신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옛 대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튼 자리와 현재의 위패 줄을 함께 봤다. 자기 기억만 붙들던 눈이, 이제는 다른 사람 손이 남긴 물성까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리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조각이 아니라 배치를 지켜야 해요.”

그녀 손끝이 명단 조각, 위패 받침, 비어 있는 깊은 홈을 차례로 짚었다.

“이 셋이 흩어지면 다시 같은 장면으로 못 돌아와요. 그러면 저 손이 뭘 지웠는지도 또 끝번호 밑으로 내려가요.”

브론은 대답 대신 받침 아래 고인 물을 한 번 쓸어냈다. 물길이 바뀌자 젖은 조각 셋이 다시 같은 쪽으로 붙었다. 떨어지려던 줄이 겨우 버티는 걸 보며, 나는 우리가 지금 지키는 게 단순한 증거품이 아니라 `같이 놓여 있어야만 읽히는 순서`라는 걸 더 또렷하게 실감했다. 조각 하나는 이름을, 하나는 운반 표기를, 하나는 바깥에서 덧댄 판정 흔적을 물고 있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남는 건 또 얼굴 하나와 죄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이 문턱은 조각보다 배열을 먼저 지키라고 우리를 붙들고 있었다. 순서를 잃으면 진실도 바로 잃었다. 이름도 같이.

리에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비어 있는 깊은 홈 앞에 한 발 더 들어섰다. 활을 쥔 손이 아니라 빈손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거울면 속 옛 대장 등을 똑바로 봤다. 손끝은 떨렸지만, 이번에는 활시위를 찾지 않았다. 증언자로 서려면 쏘는 손보다 남은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는 걸 몸이 먼저 아는 것처럼.

“나는 이제 달아난 얼굴 말고.”

그녀 목소리는 아직 마르고 갈라져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남은 등을 말할 거야.”

세 추도 홈 빛이 그 말에 다시 한 줄로 맞물렸다. 검은 거울면 안쪽에서, 이름 홈 위로 내려오는 손 하나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칼을 든 손이 아니었다. 문서 도구 같기도 하고, 젖은 장례 결을 눌러 지우는 손 같기도 한 가는 그림자였다. 그 손은 이름 결 위에서 멈췄다. 잘라 내기 직전 망설이는 손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같은 동작을 해 본 손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미리엘이 숨을 죽였다.

“저건…”

그녀는 끝까지 단정하지 않았다. 대신 손 그림자 아래 홈 가장자리를 읽었다. 이름 홈 가장자리엔 눌린 자국이 세 번 겹쳐 있었다. 첫 번째는 원래 결을 따라 얕게 훑은 흔적, 두 번째는 그 결을 죽이듯 넓게 문질러 평평하게 만든 흔적, 마지막 하나는 그 위에 다른 표기를 얹으려 짧게 눌러 찍은 흔적이었다. 한 번의 삭제가 아니라, `남은 결을 죽이고 새 줄을 덮는` 절차가 눈앞에서 그대로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장례 담당 손이 아니에요. 눌러 찍는 순서가 달라요. 이름 위를 눌러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줄을 얹는 손이에요.”

브론도 그 손 그림자 아래 남은 먹힘을 봤다.

“칼보다 평평한 도구다. 자른다기보다 결을 죽여. 이름 홈을 메우고 번호를 눌러 얹기 좋게.”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또 다른 얼굴을 찾게 될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저 손목의 각도와 힘 방향, 그리고 누가 먼저 이름을 감췄는지였다. 저 손이 실제 한 사람의 손이든, 여러 손의 습관이 겹쳐 남은 그림이든 상관없었다. 이제 질문은 분명했다. 누가 배신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장례를 접고 관리용 줄로 다시 눌렀는가.

이솔데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엔 저 장면을 본다.”

그녀 젖은 손끝이 거울면 아래를 한번 눌렀다.

“배신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름을 지운 장면을.”

거울면 속 갈림목은 꺼졌다. 대신 이름 홈 위로 멈춘 손 그림자만 더 선명해졌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봉함과 회수를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지금 우리 앞에 남은 건 그보다 더 분명한 문턱이었다.

누가 남았는가.

누가 넘겼는가.

누가 잘랐는가.

이제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줄은 그 셋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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