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추도식
장례 회랑의 끝은 막힌 벽이 아니라 낮은 문턱이었다. 정면에는 검은 물을 채운 거울면이 서 있었고, 그 앞 바닥에는 둥근 추도 홈 세 개가 삼각형처럼 패여 있었다. 왼쪽 홈은 위패를 눕힐 만큼 길었고, 오른쪽 홈은 사람 무릎이 오래 닳은 듯 매끈했다. 중앙 홈은 더 얕았지만 그 주위 물길이 검은 거울 쪽으로 모였다. 뒤쪽 협로에서는 왕국 사절단의 등불과 엘프 강경파의 창끝이 함께 흔들렸고, 세라는 그 좁은 길목을 검집과 어깨로 막아 선 채 우리 등 뒤를 가렸다.
나는 중앙 홈 앞에 섰다. 왼쪽에는 미리엘이 젖은 천 조각과 위패 부호를 펼쳤고, 오른쪽 낮은 받침턱에는 브론이 한쪽 무릎을 박고 손바닥으로 돌의 하중을 재고 있었다. 리에트는 위패 셋 뒤, 아직 이름이 없는 깊은 홈 앞에서 활을 낮췄다. 화살을 쏠 자리라기보다 자기 발밑에서 올라오는 기억을 버틸 자리였다. 이솔데는 검은 뿌리와 거울물 사이에 반쯤 잠겨 서 있었다. 누구를 찌르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잘못 읽는 순간 누구를 먼저 밀어낼지 기다리는 심문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위험은 검은 거울만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내려오는 손들이 조금만 더 밀고 들어오면, 위패 하나나 목패 반쪽을 먼저 빼앗아 갈 수 있었다. 왕국은 그것을 “배신 줄”이라 부를 것이고, 엘프 강경파는 “숲의 수치”라 부를 것이다. 이름 전체와 장례 순서는 사라지고, 들고 나가기 쉬운 죄목 하나만 남는다. 우리는 바로 그걸 막아야 했다. 증거 하나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이름을 자르던 방식을 다시 일으키지 않는 일이었다.
브론이 추도 홈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젖은 돌가루가 손끝에 묻었다.
“셋이 따로 노는 게 아니야.”
그가 왼쪽 긴 홈, 오른쪽 매끈한 홈, 중앙 얕은 홈을 차례로 짚었다.
“한 사람은 읽고, 한 사람은 버티고, 한 사람은 뒤를 막는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거울이 한쪽으로 기운다.”
미리엘은 천 조각을 펴서 성도식 끝번호와 위패 밑면의 옛 결을 나란히 놓았다. 젖은 천 위에서 번호는 또렷했지만, 이름 결은 잘린 나무껍질처럼 흐릿했다. 그녀는 일부러 번호 쪽을 덮고 이름 결만 드러냈다.
“성도 장부와 반대예요. 장부는 번호를 먼저 세우고, 이름은 나중에 덧붙이죠. 여긴 이름이 먼저예요. 번호를 앞세우면 이 홈이 닫힐 거예요.”
검은 거울면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물빛이 살아 있었다. 아주 얇은 선이었다. 눈꺼풀 틈처럼 닫힌 물빛이 우리 발밑 세 홈의 물결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이솔데가 그 선 너머에서 입을 열었다.
“배신자의 이름을 찾으러 온 자는 문턱에서 밀려난다.”
그 말이 끝나자 왼쪽 추도 홈 둘레가 먼저 떨렸다. 내가 들고 있던 위패 끝에서도 작은 물방울이 미끄러졌다.
“장례 순서를 바로 세운 자만 안으로 들어간다.”
뒤쪽 협로가 곧바로 시끄러워졌다.
“그 아래서 더 손대지 마라!”
왕국 사절의 목소리였다.
“목패와 위패만 올려 보내라. 왕국 입회 아래 대조하면 된다!”
엘프 강경파의 목소리도 겹쳤다.
“숲 장례 원본은 외부인 손에 열리지 않는다. 배신 줄만 확인하고 판을 닫아라!”
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검집 끝을 돌틈에 더 깊이 밀어 넣었을 뿐이다. 쇠가 젖은 돌을 긁는 소리가 협로를 가로질렀다. 내려오던 발소리 둘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세라의 왼쪽 어깨가 조금 기울자 길목은 사람 하나가 겨우 비켜 설 폭으로 줄었다.
“하나만 들고 나가고 싶은 사람은,”
세라가 낮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막힌다.”
그 말은 위로나 명령이 아니었다. 길목에 박힌 실제 계산이었다. 바깥 손이 무리하게 밀고 들어오면 검집에 다리가 걸리고, 돌턱에 발이 미끄러지고, 그 틈에 브론이 받침을 틀어 중앙 홈을 닫을 수 있었다. 세라는 화려하게 막는 대신 들어올 비용을 먼저 세워 놓았다.
나는 위패 셋을 다시 보았다. 젖은 목패 끝에는 잘린 엘프식 이름 결이 남았고, 그 아래에는 나중에 눌러 박은 인간식 번호가 있었다. 번호는 반듯했다. 이름 결은 부서져 있었다. 바로 그래서 더 먼저 읽어야 했다. 반듯한 것부터 읽으면, 부서진 것은 또 빠진다.
첫 던전 반원실의 빈 줄이 떠올랐다. 열세 번째 자리를 통째로 비운 채 칸과 순서만 남기던 벽. 그때 나는 내가 왜 그 빈칸에 반응하는지 몰라서 끌려 들어갔다. 지금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쓰는 방향이 달라졌다. 누군가 나를 열쇠처럼 세웠다면, 이번엔 그 반응을 지워진 이름을 다시 세우는 데 써야 했다.
“첫 이름 결부터 간다.”
내가 말하자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번호를 눌러 둘게요. 에이드리언은 결 방향만 따라가요.”
브론은 오른쪽 받침턱 아래에 목편 하나를 끼웠다.
“중앙이 기울면 말한다. 빨리 하지 마. 여기 돌은 슬퍼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순서가 틀리면 무너져.”
리에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비어 있는 깊은 홈 안쪽으로 한 발을 들였다. 그녀의 발끝이 떨렸지만 뒤로 빠지진 않았다. 옛 대장이 도망쳤다고 믿었던 기억이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올라올 것이다. 그걸 아는 얼굴이었다.
나는 첫 위패를 왼쪽 홈에 맞췄다.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남은 건 이름의 끝 결뿐이었다. 곡선 한 조각, 끊긴 획 하나, 뒤집어 보면 잎맥처럼 보이는 짧은 선. 그러나 그 폭은 낯설지 않았다. 소금묘 광갱 반원실에서 열세 번째 빈 줄이 차지하던 자리와 같았다. 이름이 지워진 뒤에도 자리만큼은 같은 폭으로 남긴 손버릇이었다.
나는 번호를 보지 않았다. 미리엘이 손바닥으로 덧댄 번호를 가렸다. 나는 잘린 결의 첫 음을 아주 낮게 불렀다. 완전한 이름이 아니었다. 복원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했다. 그래도 그 결이 가리키는 원래 자리만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검은 거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먼저 세 홈의 물방울이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왼쪽 홈에서 중앙으로, 오른쪽 홈에서 중앙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검은 거울 아래로. 세 물길이 거의 같은 박자로 만나는 순간, 거울면 한가운데의 물빛 선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넓어졌다. 물 아래 묻혀 있던 얕은 판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 판에는 죄목도 번호도 없었다. 얕은 인계 홈 하나가 있었다. 무언가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길 때, 받는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파 둔 작은 홈이었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처리 줄보다 장례 줄이 먼저예요.”
그녀의 손끝이 인계 홈 가장자리를 따라갔다.
“번호가 원본을 설명한 게 아니에요. 번호가 원본을 덮었어요.”
브론도 받침턱을 더 눌렀다. 나무 목편이 삐걱였다.
“방어가 풀린 건 잠깐이다. 더 읽을 거면 지금 읽어.”
그 순간 거울실 좌우 벽에 얕은 반사면이 세워졌다. 물 위로 장례 행렬이 비쳤다. 머리를 숙인 사람들, 짐을 든 손, 뒤에서 누군가를 밀어내는 어깨. 하지만 그 장면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곧바로 다른 그림자가 덧씌워졌다.
리에트의 옛 대장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장면.
젖은 길목에서 넘어지는 엘프들.
혼자 살아 돌아온 리에트의 숨.
거울은 그녀가 가장 오래 믿어 온 수치만 골라 밝게 띄웠다. 장례 행렬은 흐려지고, 패주 장면은 또렷해졌다. 하나만 남기려는 방식이었다. 바깥 장부가 하던 일을 거울 안쪽 기억 오염이 똑같이 하고 있었다.
리에트의 어깨가 굳었다.
“또 저 장면이…”
말끝이 끊겼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발끝이 홈 안쪽 물을 건드리자 검은 거울 아래 인계 홈이 다시 닫히려 했다. 한 사람의 기억이 한 사람의 죄목으로 접히면, 장례 순서도 같이 닫히는 장치였다.
내 등도 차가워졌다. 이름을 잘못 붙들면 또 누군가를 지우는 손이 되는 건 아닐까. 반응자라는 이름 아래 늘 남이 정한 자리에 세워졌던 공포가 여기서도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읽는 장치와 내가 읽는 장치의 차이가 한순간 흐려졌다.
세라가 그 순간 검집을 비스듬히 틀었다. 뒤 협로에서 내려오던 창끝 하나가 검집 옆면에 걸려 미끄러졌다. 세라는 창을 쳐내지 않았다. 발이 물턱을 밟기 전에 각도만 바꿔, 내려오는 사람이 자기 무게로 멈추게 만들었다.
“앞만 봐.”
세라의 말은 짧았다.
“뒤는 내가 막아.”
브론도 오른쪽 받침턱에 몸을 더 실었다. 팔뚝 근육이 굳고 목편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하중은 내가 나눠. 리에트, 네 숨이 흔들려도 중앙으로 다 쏠리게 안 둔다.”
미리엘은 번호를 덮은 손을 떼지 않은 채 리에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을 보지 말아요. 순서만 말해요.”
그 세 문장이 거울실의 압박을 잘랐다. 위로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었다. 세라는 뒤를 막고, 브론은 돌의 기울기를 나누고, 미리엘은 읽는 순서를 붙잡았다. 그러자 리에트가 해야 할 일도 선명해졌다. 그녀는 감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장면의 순서를 다시 말하면 됐다.
리에트는 거울 속 도망치는 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신 그 등 앞뒤의 빈칸을 보려 애썼다.
“얼굴 말고… 순서.”
그녀가 낮게 말했다.
“먼저 넘겨진 사람. 길목에 남은 사람. 늦게 같은 줄에 붙은 손.”
거울물 속 뒷모습이 흔들렸다. 앞으로 달아나던 등처럼 보이던 형상이 멈췄다. 등 뒤에 있던 좁은 길목이 또렷해졌고, 발밑 물살이 한쪽으로 틀어졌다. 도망처럼 보이던 자세는 사실 뒤를 막기 위해 몸을 비스듬히 세운 자세였다. 기억 오염이 강요하던 패주 장면이 처음으로 금이 갔다.
미리엘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위패 밑면을 뒤집어, 덧댄 끝번호 아래쪽을 반대로 읽었다. 바깥 장부식으로는 죄인 표기처럼 보이던 숫자열이, 안쪽 결에 맞추자 전혀 다른 높이로 이어졌다.
“이건 도주 표기가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넘겨진 순서예요. 누가 먼저 들려 나갔고, 누가 뒤에서 받쳤는지 적는 줄이에요.”
브론은 바닥 물길 아래 남은 자국을 손톱으로 긁었다. 검은 물 아래에서 말린 두루마리통 같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 옆에는 작은 목함이 끌린 자국이 있었고, 더 안쪽에는 어깨에 무언가를 멘 사람이 급히 방향을 튼 하중선이 남아 있었다.
“칼집이 먼저가 아니야.”
브론이 말했다.
“문서통이나 위패함 같은 게 먼저다. 싸우다 빠진 자국이 아니라, 뭔가를 젖지 않게 들고 빠진 자국이야.”
나는 미리엘이 읽은 운반 순서와 브론이 짚은 하중선을 한 줄로 묶었다. 배신자 한 명의 도주가 아니었다. 희생 명단과 이름 줄을 옮기던 실무선. 장례를 지키려던 누군가가, 나중에 가장 쉬운 이름으로 접힌 것이다.
이솔데는 거울 앞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우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 추도 홈 가장자리에 손끝을 얹었다. 젖은 홈 둘레의 빛이 한 단계 넓어졌다. 계속 읽으라는 허락이었다.
“끝까지 읽어라.”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면 또 하나만 남긴다.”
뒤쪽 협로에서 왕국 사절이 급히 소리쳤다.
“거울 반응은 봉함하고, 목패와 위패를 먼저 올려 보내라! 배신 줄만 확보하면 충분하다!”
세라가 그 말을 잘랐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겠지.”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검집 끝만 더 눌렀다.
“하나만 들고 나가는 식으로.”
엘프 강경파의 목소리도 거칠어졌다.
“숲 안쪽 줄을 전부 열면 우리 책임까지 같이 드러난다!”
그 말에 리에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깊은 홈 앞에서 한 발을 더 들였다. 이제는 거울이 보여 주는 등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등이 왜 돌아섰는지 보려는 자세였다.
“그래서 침묵했지.”
리에트가 말했다.
“배신이라고 믿어야 내가 덜 비겁해 보였고, 숲도 덜 망가졌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도 위로하지 않았다. 세라가 뒤를 막고 있었고, 브론이 돌을 버티고 있었고, 미리엘이 번호를 덮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말로 상처를 덮는 일이 아니라 리에트가 어느 자리에 설지 보는 일이었다.
리에트가 깊은 홈 안쪽으로 한 발을 더 넣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남았는지부터 다시 말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꺾이지 않았다.
“누가 먼저 넘겨졌는지. 누가 막았는지. 누가 늦게 붙었는지.”
세 홈 둘레의 물빛이 한 줄로 이어졌다. 세라 검집 끝, 브론이 눌러 둔 받침턱, 리에트가 선 깊은 홈, 그리고 내가 무릎을 낮춘 중앙 홈 아래에서 같은 박자의 진동이 올라왔다. 거울실이 처음으로 우리 자리 전체를 하나의 의식처럼 받아들였다.
브론이 바닥을 짚었다.
“추도식이다.”
그는 둥근 홈과 세운 위패, 깊은 홈을 번갈아 가리켰다.
“위패 보관선이 아니야. 누가 읽고, 누가 버티고, 누가 뒤를 막는지까지 맞춰야 장례가 열린다.”
미리엘도 숨구멍과 끝번호 배열을 다시 보았다.
“이름을 바로 읽는 자리는 위험했을 거예요. 그래서 접어 숨긴 거죠. 순서를 잃지 않게 남기되, 아무나 하나만 떼어 읽지 못하게.”
나는 세운 위패 둘과 아직 남은 하나, 리에트가 선 깊은 홈, 세라가 막는 협로를 차례로 보았다. 슬픔을 보여 주는 방이 아니었다. 이름을 감추면서도 버리지 않기 위해 만든 마지막 절차였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도 바뀌었다. 위패 몇 개를 들고 나가 누군가의 입회 아래 대조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먼저 줄 전체를 맞춰야 했다.
“밖으로 들고 나가면 또 잘린다.”
내가 말했다.
브론이 바로 받았다.
“줄 모양부터 잃겠지. 위패 하나, 번호 하나, 죄목 하나만 남을 거다.”
미리엘은 손바닥 아래 번호를 더 눌렀다.
“끝번호가 먼저 살아남을 거예요.”
리에트가 깊은 홈을 보며 덧붙였다.
“그럼 이름보다 판정문이 먼저 남겠지.”
검은 거울면 안쪽이 그 말에 반응했다. 세 추도 홈이 맞물린 가운데, 물 아래 짧은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이번엔 패주 장면이 아니었다.
리에트의 옛 대장과 로웬 헤일이 같은 줄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은 말린 명단통 같은 것을 안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사람 하나를 옆구리에 기대게 한 채 좁은 길로 몸을 틀었다. 둘은 같은 방향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한 줄에서 갈라져 서로 다른 길로 흩어졌다. 한쪽은 이름과 명단을, 다른 한쪽은 살아 있는 사람과 우회선을 나눠 짊어진 것처럼.
리에트의 숨이 거칠게 흔들렸다.
“저건…”
“도망이 아니야.”
나는 반사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눠 든 거야.”
미리엘은 천 조각 위 부호를 다시 짚었다.
“희생 명단 운반자.”
브론도 물 아래 끌림 자국을 가리켰다.
“문서통이 먼저였어. 칼보다.”
거울 속 두 등은 반대 방향으로 갈라지기 직전 잠깐 같은 박자로 멈췄다. 그 멈춤은 배신이 아니라 합의된 분기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이름 줄을 옮기고, 누군가는 살아 있는 사람을 밀어 보내기 위해 뒤를 맡는 분기.
그러나 거울실은 그 장면만 보여 주고 끝내지 않았다. 열린 인계 홈 아래로 가느다란 다른 홈 둘이 겹쳐 드러났다. 하나는 짐을 내려놓는 자리처럼 짧았고, 다른 하나는 손등이나 손목이 오래 스치며 닳은 자리처럼 길었다.
브론이 곧장 몸을 낮췄다.
“같은 사람이 두 번 선 게 아니야.”
그는 두 홈의 길이를 손가락 두 마디로 나눠 쟀다.
“먼저 든 사람과 나중에 받친 사람이 달라. 짐을 놓는 쪽은 짧고, 버티는 쪽은 길다. 내려놓고 바로 빠진 게 아니라, 누군가는 끝까지 여기 남았어.”
미리엘도 위패 밑면의 작은 결들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거의 지워진 얕은 점 셋과 짧은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성도 장부식 구분으로는 읽히지 않는 표기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국을 따라가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넘긴 순서만 적은 게 아니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누가 손에서 손으로 받았는지도 남겨 놨어요. 바깥 번호 체계가 제일 먼저 지운 게 이 줄이에요. 이게 남아 있으면 누가 배신자가 아니라 전달자였는지 바로 드러나니까.”
나는 얕은 홈과 위패 아래 닳은 결, 브론이 짚은 길고 짧은 자국을 한 줄로 묶었다. 첫 던전의 빈 줄, 성도 하층 끝번호, 북방 전초의 분리 장부, 왕도 지하 공동 서명. 장소는 달랐지만 손버릇은 같았다. 이름을 지우고, 순서를 접고, 마지막에는 책임 하나만 남긴다. 그러니 이 거울실이 요구하는 건 슬픔이 아니라 추적이었다. 어느 손이 무엇을 지우려 했는지 끝까지 따라가라는 일.
바깥 손들도 그걸 눈치챘다. 협로 쪽 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금속 장식이 돌에 부딪혔고, 젖은 발바닥이 물턱에서 미끄러졌다. 왕국 사절은 나라 기록을 흔든다고 외쳤고, 엘프 강경파는 숲 안쪽 책임을 외부에 넘길 수 없다고 맞받았다. 서로 다른 말처럼 들렸지만 실제 목적은 같았다. 전체 줄을 보지 말고 하나만 고르라는 뜻이었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검집 끝을 아주 천천히 비틀었다. 쇠끝이 돌틈을 한 층 더 파고들며 길목 한복판에 걸렸다. 발을 옮기지 않았는데도 바깥에서 내려오던 발소리 둘이 동시에 멈췄다.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 자기 다리부터 미끄러질 각이었다.
“들어오면 다 같이 본다.”
세라가 말했다.
“하나만 들고 못 나간다.”
그 말 뒤 침묵이 길어졌다. 세라가 막는 건 사람 몇이 아니었다. 한 줄 전체를 읽는 시간이었다.
리에트는 그 침묵 사이에서도 거울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흔들리는 숨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물 아래 명단통 그림자가 멈춘 자리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자기 옛 대장과 로웬이 갈라지는 장면이 이제는 도망이 아니라 전달과 버팀의 분기로 보이고 있었다.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등이 돌아서는 모습이었어.”
리에트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도망이라고 믿었지.”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등을 돌린 게 아니라, 등을 나눠 세운 거였어. 하나는 밖으로 나가게 하고, 하나는 길을 막는 쪽으로.”
브론이 곧장 말했다.
“그러면 네 옛 대장은 뒤를 막은 거다.”
미리엘은 젖은 위패 가장자리를 따라갔다.
“로웬은 줄을 들고 빠졌겠죠. 둘 다 같은 쪽을 버린 게 아니라, 다른 걸 살리려고 갈라진 거예요.”
나는 리에트의 얼굴보다 그녀가 선 자리를 보았다. 세라가 막는 자리, 브론이 버티는 자리, 미리엘이 읽는 자리도 함께 보았다. 거울실이 보여 주는 옛 장면과 지금 우리의 자리가 겹치고 있었다. 누가 읽고, 누가 버티고, 누가 뒤를 막는지. 오래전에도 누군가는 같은 방식으로 이름과 사람을 나눠 살리려 했다.
“그래서 추도식이구나.”
내가 말했다.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를 읽는 의식이면서, 잘린 줄을 다시 잇는 의식이지.”
미리엘도 말을 이었다.
“잘못 읽으면 또 한 사람만 남게 돼요. 배신자 한 명, 죄인 한 명, 영웅 한 명. 그렇게요.”
이솔데가 왼쪽 추도 홈에서 손을 뗐다. 대신 가운데 얕은 받침 위로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렸다. 물방울은 퍼지지 않고 세 갈래 얇은 선을 따라 각각 다른 홈으로 미끄러졌다. 읽는 자리, 버티는 자리, 뒤를 막는 자리로 흐르는 길이었다.
“이름 하나를 바로 세우면,”
이솔데가 말했다.
“다음엔 그 이름이 누구 손에서 잘렸는지도 읽어야 한다.”
검은 거울면 안쪽 물빛이 더 깊어졌다. 방금 본 기억 조각 뒤로 아직 열리지 않은 층이 남아 있었다. 누가 명단통을 들었는지보다, 누가 그 명단을 나중에 잘라 배신자 줄로 다시 묶었는지 묻는 층.
왕국 사절이 다시 소리쳤다.
“잔향 하나로 나라 기록을 흔들 수는 없다!”
엘프 강경파도 거의 동시에 외쳤다.
“숲 장례 원본을 숲 밖 손에 넘길 순 없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더 분명해졌다. 나라 기록이든 숲 원본이든, 저들은 모두 자기 쪽 장부를 먼저 지키려 했다. 장례 회랑과 거울실은 그런 장부 바깥에 남은 자리였다. 누가 먼저 죽었는지보다 누가 누구를 넘겼는지, 누가 그걸 나중에 어떻게 접었는지 남아 있는 자리.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도 문장 하나가 아니라 문장을 자른 손의 순서였다.
리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전보다 또렷했다.
“이번엔 끝까지 말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누가 먼저 넘겨졌는지. 누가 막았는지. 누가 늦게 붙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배신으로 바꿨는지.”
세라는 뒤를 막은 채 짧게 덧붙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온다.”
브론은 받침턱에 끼운 목편을 다시 눌렀다.
“무너져도 안 되고, 기울어도 안 돼. 줄이 틀어지면 또 편한 쪽으로 읽힌다.”
미리엘은 천 조각을 접지 않고 펼쳐 둔 채 새로 드러난 얕은 결까지 눈으로 더듬었다.
“이제부터는 이름만 읽는 게 아니에요. 이름을 자른 순서도 읽어야 해요.”
나는 검은 거울면 앞에 남은 물빛 선을 보며 숨을 골랐다. 다음 문턱은 분명했다. 배신자를 고르는 일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리에트의 옛 대장과 로웬이 무엇을 나눠 들고 어디서 갈라졌는지, 그리고 그 증언선 전체를 누가 어떤 장부 아래 다시 접었는지 보는 일이다.
그 일을 하려면 우리 자리부터 흐트러지면 안 됐다. 세라는 협로 입구에서 검집 끝을 더 박아 넣고 왼발을 반 치 옮겼다. 위 협로에서 내려오는 손이 바로 추도 홈 쪽을 보지 못하게 시야를 비틀었다. 브론은 오른편 받침턱 옆에 젖은 목편 두 장을 더 끼워 하중이 중앙 홈으로 쏠리지 않게 만들었다. 미리엘은 천 조각 위에 “이름 결”, “넘겨진 순서”, “손에서 손으로 옮겨진 표기”를 세 줄로 나눠 적었다. 나는 거울면 앞 바닥의 얕은 물길이 어느 홈과 이어지는지 발끝으로 더듬어 외웠다. 리에트는 비어 있는 깊은 홈 앞에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방금 본 두 등의 갈라짐을 자기 기억 속 도망 장면과 다시 맞추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장례를 슬퍼하는 일이 아니었다. 장례를 지킨 순서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누가 이름을 먼저 세우고, 누가 그 이름이 잘리지 않게 버티고, 누가 살아 있는 사람과 명단통을 서로 다른 길로 나눠 들었는지. 그 순서가 다시 살아나야 다음 기억 조각도 배신담이 아니라 증언선으로 열린다.
그래서 바깥 손들이 더 다급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서 줄 전체가 살아나면 왕국은 배신자 하나의 도주만 남긴 보고를 더 밀어붙이지 못한다. 엘프 강경파도 숲의 수치 한 명으로 죄를 몰아 닫지 못한다. 장례가 복원되는 순간, 누가 이름을 잘랐는지가 같이 드러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이름 하나가 아니라 잘린 순서와 남은 손까지 같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저 기억 조각이다.”
내가 말했다.
리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흔들림이 없었다.
“끝까지 볼게.”
미리엘은 젖은 천 조각을 접어 품에 넣었다.
“줄은 제가 맞출게요. 이름 먼저, 번호는 나중.”
브론은 오른편 받침턱에 목편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무너지게 안 둔다.”
세라는 검집 끝을 조금 더 눌렀다.
“길목은 계속 내가 붙든다.”
네 문장으로 충분했다. 긴 맹세는 필요 없었다. 각자 맡을 자리가 이미 선명했다.
검은 거울면 한가운데 물빛 선이 더 길어졌다. 안쪽에 숨어 있던 다음 기억 문턱이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리에트는 그 문 앞에 선 채, 더는 도망 장면을 보지 않았다.
같은 줄 위에서 갈라지던 두 등을 끝까지 바라봤다.
하나는 이름을 들고, 하나는 사람을 들고.
갈라졌어도 같은 증언선 위에 남은 등이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