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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 싫은 고향

북쪽 산길은 해보다 먼저 재 냄새를 올려 보냈다. 정면으로는 검은 능선이 낮게 엎드렸고, 왼편에는 재가 낀 침엽수 줄기가 허리 높이로 이어졌다. 오른편 아래에는 물이 마른 수로와 오래된 운반 홈이 비스듬히 내려가며 검은 용광 심연 쪽으로 사라졌다. 길은 사람 다섯이 나란히 설 폭이 아니었다. 앞에서 밀리면 수로로 떨어지고, 뒤에서 쫓기면 왼편 나무 그늘에 몸을 눕혀야 했다.

세라는 앞줄에서 길 폭 절반을 먹었다. 검집 끝은 바깥 낭떠러지 쪽으로, 어깨는 안쪽 바위턱으로 붙였다. 브론은 내 왼편 두 걸음 뒤에서 손을 비운 채 걸었다. 쇠붙이 하나만 잡아도 그쪽으로 눈이 끌릴 걸 알아서 일부러 빈손을 만들고 있는 얼굴이었다. 미리엘은 젖은 장례 줄 꾸러미를 품 안으로 당겨 배낭끈과 한 번 더 묶었고, 리에트는 왼편 사면의 검은 나무 사이를 한 번 훑고 다시 위쪽으로 사라졌다.

아래 수로에서 금속이 긁히는 냄새가 올라왔다. 뜨거운 쇠 냄새가 아니라, 오래 닫혔던 홈을 마른 받침으로 다시 문지를 때 나는 차갑고 매캐한 냄새였다. 위험은 앞문에만 있지 않았다. 이 길은 브론을 혼자 부르기 위해 뚫린 길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우리 다섯의 자리와 짐을 한 줄씩 재려는 통로에 가까웠다.

리에트가 위쪽 사면에서 내려오며 손가락 두 개를 세웠다.

“왼쪽 나무 그늘 뒤에 발자국이 있어. 큰 짐은 아니야. 작은 쇠붙이 몇 개만 들고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간격.”

나는 길 폭과 발자국 방향을 맞췄다. 정면은 너무 좁고, 오른쪽 수로는 소리가 멀리 울렸다. 왼편으로 붙으면 위에서 먼저 안 보이지만, 아래 박자를 더 또렷하게 듣게 된다.

“세라는 앞줄 그대로. 브론은 가운데. 미리엘은 꾸러미가 바깥으로 돌지 않게 잡아. 리에트는 위쪽 각만 본다.”

브론이 코로 짧게 숨을 뱉었다.

“고향 가는 길에 내 자리를 굳이 가운데 두네.”

“혼자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브론은 대꾸하지 않았다. 턱을 한 번 문지른 뒤 내 보폭에 걸음을 맞췄다. 고마움도 불만도 아니었다. 도망칠 자리를 미리 막아 둔 사람의 침묵이었다.

수로 돌턱 사이에 검은 금속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다. 브론이 먼저 멈췄다. 그는 진흙 속에서 얇은 조각을 집어 들고 모서리부터 봤다. 손등에 묻은 재는 털지도 않았다.

“세 갈래 보정 각.”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최근에 부딪혀 떨어졌다. 일부러 흘린 전시품은 아니야.”

미리엘은 장례 줄 꾸러미를 더 단단히 감쌌다.

“누가 먼저 아래를 훑고 갔다는 뜻이군요.”

브론은 금속편 뒷면의 얕은 홈 두 줄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 손이 한순간 멈췄다.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린 게 아니야. 위에서 내려가 확인하고 다시 비켜 간 자국이다. 누군가 내 집 규격이 살아 있는지 보러 왔어.”

세라가 앞에서 검집 위치를 낮췄다.

“그럼 종이보다 먼저 가야겠네.”

왕국 사절과 북방 연맹 사람이 뒤쪽 산길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걸음은 늦추지 않았다. 종이와 봉함을 든 사람들은 언제나 현장을 늦게 보고도, 문장만은 먼저 세우려 했다.

산길이 한 번 크게 꺾이자 재심 전초가 드러났다. 낮은 철문 앞에 좁은 뜰이 있었고, 왼편 벽에는 출석 목패를 거는 검은 판이 걸려 있었다. 오른편 돌탁자에는 봉함 통과 분리 상자가 놓였고, 정문 안쪽 복도는 사람 둘이 나란히 걷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바닥 운반 홈은 세 줄이었다. 사람 발자국이 닳은 홈, 받침이 밀린 홈, 작은 금속과 문서를 급히 들이는 홈. 그 세 줄은 검은 문 앞에서 하나로 붙었다.

철문 안에서 나온 드워프 실무자는 브론 얼굴을 보자마자 다른 넷은 지웠다.

“카르트 직계면 단독 입회가 먼저다.”

그의 손은 검은 판 아래 빈 못구멍 쪽으로 향했다. 브론을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재검은 이름 있는 손 하나로 연다. 나머지는 뜰 밖에서 기다린다.”

왕국 사절이 곧바로 봉함 통을 들어 올렸다.

“병기 기록과 금속편은 왕국 검증물입니다. 직계 입회 전이라도 우선 제출해야 합니다.”

엘프 원로회 쪽 실무자는 장례 줄 꾸러미를 보며 눈을 가늘게 했다.

“숲 안쪽 증언물은 공개 범위를 먼저 정해야 한다. 외부인의 눈앞에 오래 두면 증언 순서가 흐려진다.”

말은 서로 달랐다. 왕국은 먼저 가져가겠다고 했고, 숲은 먼저 가리겠다고 했다. 북방 연맹은 브론 혼자 문 안으로 세우려 했다. 셋 다 한 사람만, 한 물건만, 한 문장만 떼어 가려는 손이었다.

세라가 정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철문과 뜰, 검은 판과 돌탁자 사이가 그녀의 어깨와 검집 하나로 갈렸다.

“브론 혼자 안 들어가.”

왕국 사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세라가 덧붙였다.

“검증이든 공개든, 반 토막씩 떼 가는 것도 안 돼.”

뜰 안 공기가 잠깐 멎었다. 북방 실무자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세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발끝을 검은 판과 돌탁자 사이 반 뼘 남짓한 자리에 고정했다. 브론을 문 안으로 따로 밀어 넣으려면 반드시 그 발끝을 넘어야 했다.

나는 바닥의 세 홈을 먼저 봤다. 왼쪽 홈에는 오래 마른 진흙이 남아 있었고, 가운데 홈에는 무거운 받침이 여러 해 밀린 자국이 깊게 패였다. 오른쪽 홈은 얕고 잔 흠집이 길었다. 종이나 금속표처럼 작은 걸 급히 넘길 때 남는 상처였다. 복도 안쪽으로 갈수록 세 줄은 조금씩 붙었다. 사람을 걷게 하는 길이 아니라, 사람과 짐과 보고를 따로 세운 뒤 한 문장으로 합치는 절차였다.

“여긴 사람보다 절차를 먼저 세우는 곳이군.”

내가 말하자 브론은 검은 판 아래 못구멍을 손가락 두 마디로 쟀다. 얼굴이 더 굳었다.

“우리 집 안쪽 규격이 맞아.”

미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투 병기 치수입니까?”

브론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덜 역겨웠겠지.”

그는 바닥 운반 홈을 발끝으로 훑었다.

“사람이나 짐을 칸에 눕히고, 위에서 번호를 훑어 읽을 때 쓰는 폭이다.”

검은 판에는 카르트 가문 죄목이 적혀 있었다. 탐욕. 무단 거래. 북방 규격 오염. 문장은 짧았다. 너무 매끈했다. 욕을 하려는 글도 아니고, 사실을 따지려는 글도 아니었다. 누가 읽어도 바로 고개 끄덕이게 만들려고 오래 문질러 둔 문장이었다.

나는 판이 아니라 판 앞 바닥을 봤다. 먼지 위로 최근에 한 번 더 쓸린 자국이 겹쳐 있었다. 누가 문장을 닦은 게 아니라, 그 앞에 다시 사람을 세운 흔적이었다. 보기 좋은 죄목도 결국 발과 손으로 계속 관리된다.

미리엘이 판 가장자리에 손톱을 세우고 멈췄다.

“여기요.”

판 아래 옅은 부호였다. 그녀는 손끝에 천을 감아 빛을 가리고, 획 끝을 살폈다.

“성도식 재검 부호를 흉내 냈어요. 한 줄을 지우고 다시 눌렀습니다. 완전히 다른 문서를 새로 쓴 게 아니라, 있던 줄을 다듬어 보기 좋게 만든 쪽이에요.”

브론은 한동안 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리 집이 정말 탐욕만 부리다 망했다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매끈하게 손질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 말에는 변명보다 구역질이 많았다. 자기 집 이름이 더럽혀진 것보다, 그 더러움이 누군가 손에 알맞게 다듬어졌다는 사실이 그를 더 세게 찔렀다.

미리엘은 검은 판 맨 아래를 가리켰다. 다른 못구멍은 녹이 얇게 눌어붙어 있었는데, 맨 끝 구멍 하나만 가장자리가 새것처럼 살아 있었다. 오래 비어 있던 구멍이 아니었다. 최근에 뭔가를 떼어 낸 자리였다. 그 아래 돌에는 쇳가루가 가늘게 눌려 있었고, 누가 발끝으로 한 번 문질러 흐리게 만든 흔적까지 남았다.

“지운 이름표를 다시 걸지 않은 자리예요.”

미리엘이 말했다.

“죄목은 남기고, 끝에서 한 조각만 뽑아 갔습니다.”

그 순간 왕국 사절의 손이 돌탁자 위 빈 상자 쪽으로 슬그머니 갔다. 세라의 검집 끝이 그의 손목 앞을 가로막았다.

“손부터 움직이면 손자국부터 남아.”

사절의 입술이 굳었다. 북방 실무자도 눈길을 돌렸지만, 리에트가 이미 위쪽 낮은 지붕 위에서 그 손의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는 돌탁자 위 빈 상자 뚜껑을 뒤집었다. 안쪽에는 물건 크기를 가늠하려 찍은 먹선 네 줄이 있었다. 첫 줄은 짧고, 둘째와 셋째는 길이가 같았고, 넷째는 가장자리만 닳아 있었다. 문서를 세워 넣는 선이 아니었다. 길이 다른 물건을 눕혀 나누는 기준이었다.

“왕국은 금속편부터 달라고 하고, 숲은 장례 줄 공개 범위를 먼저 줄이려고 한다.”

나는 뚜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북방은 브론 하나만 문 안에 세우려 하고.”

브론이 검은 판에서 손을 뗐다.

“셋 다 편한 칸만 가져가고 싶은 거지.”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거칠었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재심 전초 뒤편 기록 마당으로 들어서자 냄새가 더 거칠어졌다. 부서진 작업대, 비에 젖었다 마른 장부 상자 뚜껑, 죄목 석판 조각, 반쯤 기울어 선 공방 문짝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문턱 앞 돌바닥만 최근에 쓸렸다. 발로 먼지를 밀어낸 자국이 아니었다. 낮은 바퀴나 받침이 재와 붉은 광분을 한꺼번에 밀고 간 자국이었다.

리에트가 지붕 그림자와 높은 배수턱 사이를 번갈아 보더니 손가락을 세웠다.

“지붕 밑에서 내려온 손은 하나. 문턱 앞에서는 둘로 갈라졌어. 사람을 데려온 발폭은 아니야. 작은 쇠붙이만 먼저 확인하고 비킨 손이야.”

그녀는 배수턱 쪽에 몸을 낮췄다.

“돌아갈 때 발이 덜 잠겨. 안쪽이 비어 있었다는 뜻이고, 들고 나온 물건은 가벼웠어.”

미리엘은 장부 상자 뚜껑 안쪽에서 낡은 먹줄 하나를 찾아냈다. `재검 전 임시 보전`. 그 아래에는 끝이 잘린 부호가 있었다. 성도 문서고에서 봤던 숨기는 말투였다.

“왕국이 죄목을 세우고, 성도가 줄을 닫고, 연맹이 문을 지킨 겁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서로 다른 문장이지만 한 자리에서 고쳐 쓴 흔적이에요.”

브론은 공방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턱 밑에는 최근에 갈아 낀 듯한 짧은 받침쇠가 박혀 있었고, 그 옆에는 번호판 못자국 간격이 일정하게 남았다. 사람 없는 폐공방에 이런 손질이 다시 들어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안쪽 규격이 아직 쓰인다는 뜻이었다.

나는 문턱 아래로 손등을 넣어 받침쇠 높이를 쟀다. 안쪽이 바깥보다 손가락 한 마디쯤 높았다. 사람 발을 편히 들이는 문턱이 아니라 낮은 들것이나 상자 밑판이 긁히지 않고 넘어갈 정도의 턱이었다. 오른쪽 기둥 안쪽에는 오래된 못구멍 세 줄이 남아 있었고, 가장 아래 줄에만 최근 광분이 다시 끼었다. 번호판을 다시 박았거나, 같은 자리에 다른 칸 표식을 갈아 끼운 흔적이었다.

브론이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전투용 장입장이면 위로 박아.”

그가 말했다.

“눈에 잘 띄게. 그런데 이건 아래로 내려. 눕힌 걸 위에서 훑어 읽는 높이다.”

미리엘은 공방 문짝 안쪽 검은 먹번짐을 문지르지 않고 빛만 비스듬히 댔다. 손바닥 폭만 한 네모 흔적이 떠올랐다.

“표찰을 잠깐 붙였다 떼면 이런 모양이 납니다. 이름을 길게 적는 방식이 아니라, 번호를 갈아 끼우는 방식에 익숙한 자리예요.”

세라는 뒤에서 따라오던 북방 실무자의 발을 봤다. 그는 공방 문턱보다 장부 상자 쪽을 먼저 보고 있었다. 자기가 지키는 문보다 떼어 갈 조각이 어디 있는지 먼저 보는 사람의 발이었다.

“브론.”

세라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들어갈 수 있나.”

브론은 한참 문턱을 보고 나서야 답했다.

“문부터 봐야 해.”

그는 손바닥을 문턱 옆 기둥에 붙였다.

“사람 얼굴보다 문턱이 더 솔직할 때가 있다.”

그 말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이 아니었다. 돌아가기 싫은 곳을 다시 보겠다는 말이었다.

기록 마당 아래로 내려가자 폐공방 장입장이 드러났다. 낮게 무너진 적치대, 반쯤 파묻힌 운반틀 바퀴, 번호판 못자국이 남은 기둥, 뒤집힌 병기 잔해가 한 줄로 어긋나 있었다. 멀리 검은 용광 심연 쪽으로는 검붉은 연기 기둥이 얇게 섰고, 발밑에서는 열기보다 눌린 숨 같은 진동이 간헐적으로 올라왔다.

처음 보면 병기 잔해가 먼저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칼날도, 포신도, 방패를 찢는 톱니도 아니었다. 사람이나 짐을 미는 낮은 운반틀 받침, 번호판을 박던 기둥, 적치대를 붙들던 쇠갈퀴가 남아 있었다. 전장을 향한 물건보다 줄을 세우는 물건이 더 많았다.

브론은 곧장 무릎을 굽혔다. 그는 뒤집힌 틀 바퀴가 아니라 짧은 번호판 하나를 먼저 들어 올렸다. 모서리 끝 홈 각이 산길에서 주운 금속편과 정확히 맞았다.

“여기도 우리 집 손이네.”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나는 기둥 못자국 간격과 적치대 폭을 눈으로 맞췄다. 사람 둘이 어깨를 맞대기에는 좁고, 낮은 들것이나 상자를 밀어 넣기에는 딱 맞는 너비였다. 세라는 왕국 사절과 연맹 실무자가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비스듬히 길목을 잠갔다. 검집 끝이 번호판과 장례 줄 꾸러미 사이를 가로질러, 손 하나만 들어와도 먼저 걸리게 되는 각도였다.

미리엘은 장례 줄 끝번호가 눌린 조각과 잔해 번호판을 같은 빛 아래로 맞춰 보다가 숨을 낮췄다.

“눌린 방향이 같습니다.”

브론은 적치대 아래 숨은 받침쇠를 더듬었다. 손끝이 한 번 멈췄다.

“줄을 먼저 눕히고.”

그가 말했다.

“나중에 바깥 번호를 얹은 손이다.”

그 말이 장입장 위를 가로질렀다. 큰 폭로처럼 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브론이 만지는 건 금속 하나가 아니라, 자기 집 이름 아래 눌린 사람들의 자리였다. 그는 번호판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바람이 재를 밀었고, 못자국과 받침 높이와 운반틀 폭만 더 또렷해졌다.

왕국 사절이 그 틈을 타 한 발 더 들어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왕국 검증물로—”

세라가 이번에는 시선을 들고 잘랐다.

“왕국은 가져갈 말부터 찾고.”

그녀는 엘프 실무자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숲은 안쪽을 얼마나 보여 줄지부터 따지고. 북방은 브론 하나를 문 안에 세우려 하지. 다들 지금 손이 너무 빠르네.”

사절은 멈췄다. 세라가 비난을 길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게 말하면 항의할 수 있지만, 발 앞에 검집이 있으면 먼저 발을 빼야 했다.

나는 적치대 옆 돌면에 짧은 선 세 줄을 그었다. 왼편에는 장례 줄 꾸러미와 끝번호 조각, 가운데에는 번호판과 금속편, 오른편에는 재심 전초에서 본 부호를 적은 종잇조각을 두었다. 서로 닿지 않도록 칸을 나누고, 사이 폭은 손바닥 하나 조금 넘게 남겼다. 누가 급히 손을 넣으면 어느 칸을 먼저 건드렸는지 바로 남을 자리였다.

미리엘은 칸 사이에 마른 헝겊을 덧댔다.

“번호를 먼저 건드린 손과 줄을 먼저 건드린 손은 가루 방향이 달라요. 아래에서 다시 맞춰 보면 어느 쪽이 더 조급했는지 드러납니다.”

브론은 금속편을 번호판 옆에 놓고 홈 끝 각을 다시 쟀다.

“완전히 같은 판은 아니야.”

그가 한참 뒤에 말했다.

“그래도 같은 공방 손이 두세 번 보정하며 맞춘 자국이 남아 있어. 줄을 먼저 재고, 번호를 얹고, 나중에 바깥 표식을 갈아 끼우게 만든 쪽.”

리에트는 난간 쪽 낮은 쇠기둥에 실 한 가닥을 걸었다. 바람결이 아니라 몸이 스치면 방향이 달라질 작은 실이었다. 세라는 길목을 좁혔고, 미리엘은 장례 줄 꾸러미의 매듭을 서로 다르게 묶었다. 브론은 번호판을 가죽주머니에 넣기 전 안쪽에 마른 재를 얇게 뿌렸다. 새 물기가 배면 흔적이 바로 뜨게 하려는 손이었다.

누구도 따로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한 일은 분명했다. 죄목을 읽기 전에 물증을 어떻게 눕힐지 정했고, 문장을 고치기 전에 손이 남는 순서를 막았다. 브론 집안의 몰락이 부끄러운 전설인지 아닌지는 나중에도 따질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누가 지금 그 규격을 다시 쓰는지는 지금 잡아야 했다.

브론은 한동안 적치대 기둥을 보고 있었다. 짧은 번호판, 금속편, 장례 줄 끝번호, 문턱 받침쇠가 그의 시야 안에서 한 줄로 맞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내 이름 때문에 문이 닫힌 곳이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이어진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내 이름으로 다시 열어야 한다.”

그 말 뒤에는 위로도 칭찬도 붙지 않았다. 세라는 길목을 더 좁혔고, 미리엘은 꾸러미를 눌렀고, 리에트는 난간 아래를 보았다. 나는 브론이 이름을 말한 자리에 빈틈이 생기지 않게 물증 칸을 한 번 더 갈랐다. 결심은 말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말 직후 손과 발이 어디로 가는지로 남았다.

그때 장입장 아래 검은 환기구 쪽에서 금속음이 울렸다.

망치 한 번.

짧은 멈춤 둘.

그리고 억지로 긴 것을 끌어당기는 마찰음.

리에트가 제일 먼저 몸을 굳혔다. 그녀는 난간 옆 자갈 하나를 발끝으로 밀어 아래로 떨어뜨리고, 소리가 되받아오는 박자를 들었다.

“아래 빈칸이 길어.”

그녀가 말했다.

“넓은 작업장보다 복도에 가까워. 물건이나 사람을 잠깐 세워 두고 한 칸씩 넘기는 구조야.”

브론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카르트 정식 박자가 아니야.”

그가 씹어 내듯 말했다.

“남 손이 배운 흉내다.”

같은 박자가 아래에서 한 번 더 울렸다. 오래된 규격이 다시 사람 자리 위에 올라가고 있었다. 완성된 병기를 만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멈췄던 절차를 시험 삼아 다시 돌리는 소리였다.

나는 환기구 난간 바깥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연기 대신 올라오는 건 뜨거운 숨이 아니라 눌린 금속 냄새였다. 정식 용광로라면 열이 먼저 차야 하는데, 지금은 차갑게 깎인 쇠가 한 번씩 부딪힐 때 나는 마른 냄새가 더 강했다. 난간 바로 아래 돌벽에는 오래전 물이 흘렀던 세 줄 홈이 남아 있었다. 그중 가운데 홈만 최근에 밝게 닳았다. 위에서 아래로 낮은 틀을 미끄러뜨리며 보냈을 때 생기는 마모였다.

미리엘도 돌벽을 내려다봤다.

“장례 줄 끝번호가 눌린 방향과 같습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수평으로 눕힌 걸 한 칸씩 넘기는 쪽이에요. 세워 보관하는 게 아니라, 눕혀 재고 다시 보내는 절차입니다.”

브론은 난간 모서리에 번호판을 대 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더 빨리 끊어야 해.”

그가 말했다.

“저 아래서 아직도 사람 자리를 맞추는 중이면, 이름은 맨 나중에 붙어.”

그때 북방 서기가 철필을 들고 작은 금속판에 문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판 첫 줄에는 이미 `카르트 직계 단독 확인`이라는 말이 반쯤 새겨져 있었다. 세라가 바로 몸을 돌렸다. 검을 뽑지 않았는데도 서기의 팔꿈치가 멈췄다.

“단독이라고 쓰지 마.”

서기는 철필을 든 손을 숨기지 못했다.

“직계 손이 번호를 읽었으니 절차상—”

“브론이 번호를 읽었지.”

나는 장입장 바닥의 세 칸을 차례로 짚었다.

“미리엘이 장례 줄 눌림을 읽었고, 리에트가 발폭을 읽었고, 세라가 손을 막았다. 나는 어느 손이 무엇을 먼저 떼려는지 봤다. 지금 이 판단을 한 손 이름으로 올리면, 위에서 또 편한 문장만 남는다.”

브론이 서기 쪽으로 다가갔다. 키가 낮아도 걸음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안감 속 번호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빈손을 금속판 위에 얹었다. 문장을 지우려는 손이 아니라, 더는 혼자 끌려가지 않겠다는 손이었다.

“카르트 손질 확인.”

그가 한 단어씩 눌렀다.

“외부 증언과 원본 장례 줄 대조 중. 보고 누락 의심. 분리 제출 금지. 그리고 재검 종료 아님.”

서기의 철필 끝이 공중에서 멎었다. 왕국 사절은 금속편 쪽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고, 엘프 실무자는 장례 줄 꾸러미가 왜 이 자리까지 내려왔는지 뒤늦게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북방 실무자의 턱은 굳었지만, 그도 이제 브론 하나만 안으로 들여보내는 말로 장입장 전체를 덮지 못했다.

미리엘은 서기가 새로 새기는 문장 옆에 얇은 천 조각을 얹었다.

“이 판도 같이 보전합니다. 나중에 누가 단독이라는 말을 다시 끼워 넣으면, 눌림 차이가 남을 겁니다.”

리에트가 난간 위에서 짧게 말했다.

“뒤쪽 발 셋 중 둘이 멈췄어. 하나는 아직 돌탁자 쪽으로 눈이 가.”

세라가 그쪽으로 반 걸음만 옮겼다. 그 반 걸음 때문에 돌탁자와 환기구 사이 길이 더 좁아졌다.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도, 위쪽에서 누가 조각 하나를 챙겨 달아나려면 세라의 어깨와 리에트의 눈을 동시에 지나야 했다.

북방 실무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허가 없이 하강하면 재심 방해다.”

나는 그를 보지 않고 장입장 바닥의 칸을 가리켰다. 장례 줄과 번호판과 부호 메모가 서로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세라의 검집 그림자가 비스듬히 걸렸다.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누가 또 칸을 닦으면 그게 재심 방해야.”

세라가 앞에서 짧게 숨을 뱉었다.

“내 앞에서 손 뻗는 놈은 못 지나간다.”

브론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번호판과 금속편을 같은 주머니에 넣지 않고, 양쪽 안감에 따로 밀어 넣었다. 과거 흔적과 새 호출을 섞지 않겠다는 손이었다. 미리엘은 장례 줄과 끝번호 기록을 같은 높이에서 대조하려고 작은 판을 꺼냈다. 리에트는 환기구 왼편 옆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면으로 내려가면 우리 소리가 먼저 닿아.”

그녀가 말했다.

“왼쪽 옆홈으로 돌면 늦지만 위에서 보는 각이 가려져. 아래에서 올라오는 박자도 더 갈라져 들려.”

나는 환기구 입구 돌턱과 왼쪽 옆홈 높이를 손끝으로 한 번 더 짚었다. 정면은 발을 세우고 내려가야 해서 쇠붙이 한 번만 스쳐도 크게 울렸다. 옆홈은 몸을 비스듬히 눕혀야 하지만 발목 아래 마른 홈이 소리를 먹었다. 한 사람씩만 미끄러져 내려갈 폭이었다.

“세라는 앞줄.”

세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려가는 좁은 길 앞에 서며 누가 뒤따라와도 먼저 자기 어깨와 검집에 걸리게 자리를 잠갔다.

“브론은 규격과 번호판.”

브론은 양쪽 안감에 나눠 넣은 쇠붙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안 맞는 각부터 잡아낸다.”

“미리엘은 장례 줄과 끝번호 대조.”

미리엘은 꾸러미를 품 안으로 더 당겼다.

“줄을 바꾼 자리를 먼저 찾겠습니다.”

“리에트는 위쪽 각.”

리에트는 이미 난간 밖 사면을 읽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은 셋. 왕국 하나, 연맹 하나, 숲 쪽 하나. 전부 속도가 달라. 먼저 조급해지는 손도 갈라 볼게.”

나는 마지막으로 장입장과 재심 전초, 환기구 아래 어둠을 한눈에 넣었다. 위로 답하면 문장만 남는다. 아래를 먼저 보면 실물이 남는다. 지금 병목은 분명했다. 재심 답변보다 현장 선점이 먼저였다.

“순서 바꾸지 마.”

내가 낮게 말했다.

“아래가 복도면 첫 칸에서 우리를 다시 세우려 들 거다. 우리가 먼저 자리 잡기 전에는 아무것도 넘기지 않는다.”

브론이 고개를 한 번만 끄덕였다. 세라는 이미 들은 얼굴이었고, 미리엘은 꾸러미 매듭을 쥔 손을 바꿔 누가 낚아채면 천째 함께 끌려오게 만들었다. 리에트는 위쪽 사면에서 추가 발소리가 어느 쪽으로 꺾이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래에서는 불빛이 아니라 짧은 붉은 반사 하나가 번쩍였다. 새로 갈아 낀 금속 가장자리가 빛을 튕기고 사라질 때 나는 색이었다. 그 반사 바로 옆 돌벽 안쪽에는 누군가 최근에 신발 앞코로만 긁어 만든 짧은 대기 자국도 남아 있었다. 아래에서 일하는 손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올 쪽을 기다리던 손의 자리였다.

브론은 그 자국을 본 뒤에야 소환장을 안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숨기려는 손이 아니었다. 챙겨 들고 내려갈 손이었다. 돌아가기 싫은 고향은 아직 저 아래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브론은 혼자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라의 어깨, 미리엘의 꾸러미, 리에트의 높은 시야, 내 발끝이 모두 같은 좁은 옆홈을 향했다.

검은 환기구 아래에서 망치 소리가 다시 울렸다. 우리는 그 박자가 세 번째 멈춤으로 넘어가기 전에 몸을 낮췄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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