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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으로 남은 호출

사당이 무너진 뒤 숲 바깥으로 빠져나왔는데도 젖은 냄새는 한동안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장례 줄을 적신 물비린내와 검은 뿌리 썩는 냄새가 아직 팔꿈치 안쪽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데 유리숲 북변의 낮은 돌받침 위에 올라서자 그 사이로 전혀 다른 결 하나가 얇게 스며들었다. 젖은 나무보다 마르고, 피비린내보다 거칠고, 오래 식은 화덕 바닥을 뒤집을 때 올라오는 재 냄새.

북쪽 바람이었다.

우리가 물증을 펼쳐 놓은 편마암은 한쪽이 평평하고 한쪽이 낮게 기울어 있었다. 뒤로는 막 빠져나온 수로와 흰 뿌리 잔해가 아직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앞으로는 숲이 갑자기 끊기며 바위와 짧은 관목만 남은 사면길이 열려 있었다. 그 아래 바람길에서 재 냄새가 꾸준히 올라왔다. 유리숲의 물기와는 맞지 않는 냄새였다. 불이 너무 오래 꺼지지 않은 땅에서만 나는 냄새.

나는 젖은 장례 줄 조각과 어린 왕자 이동표, 좌표 조각, 제작 번호 금속편을 편마암 위에 차례로 올렸다. 먼저 물 먹은 천을 깔고, 그 위에 종이와 금속이 서로 닿지 않게 간격을 벌렸다. 한 조각만 잘 집어 올리면 또 누군가 자기에게 편한 말로 접어 갈 것 같았다. 이젠 한 벌로 묶인 상태를 먼저 지켜야 했다.

“사람부터.”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위쪽 좁은 길목의 절반쯤을 몸으로 막은 채였다. 칼을 뽑지 않았는데도, 누가 먼저 내려오면 어디가 걸리는지 이미 정해 둔 자세였다.

“그다음 장례 줄.”

“이동표, 좌표, 금속.”

미리엘이 내 말을 이어 받았다. 그녀는 장례 줄이 바람에 너무 빨리 말라 결이 뜯기지 않게 천 끝을 살짝 접어 덮었다. 손놀림은 느렸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어느 줄이 먼저 뒤집히면 섬유가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 손이었다.

브론은 아직 말이 없었다. 그는 제작 번호 금속편 하나를 집어 들고 뒤집어 보고, 다시 손바닥 위에 눕혀 보았다. 금속편은 손바닥 두 마디쯤 되는 얇은 판이었는데 표면엔 번호가 찍히다 만 홈과 세 갈래로 갈라진 보정 각이 남아 있었다. 젖은 빛이 마를수록 그 각이 더 또렷해졌다. 브론의 시선은 사람보다 그 모서리부터 재고 있었다.

사면 위쪽에서 발소리가 미끄러졌다. 왕국 사절이 먼저 내려왔고, 조금 뒤엔 엘프 원로회 실무자가 물증 밖 선을 재듯 멈춰 섰다. 둘 다 표정은 달랐지만 눈이 먼저 간 자리는 같았다. 어린 왕자 이동표와 금속편. 전체 줄보다 따로 떼어 들기 쉬운 조각들.

“그 표식은 왕실 검증물이다.”

왕국 사절이 손을 뻗었다.

“즉시 분리 인계하라. 봉함 확인은 왕국 쪽에서 먼저—”

세라 검집 끝이 먼저 그 손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반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길은 더 좁아졌다. 검집과 무릎, 젖은 돌턱이 한 줄이 되자 손 하나만 억지로 들이미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부분만 떼 가면 또 잘립니다.”

세라가 말했다.

왕국 사절 얼굴이 굳었다.

엘프 실무자도 곧바로 말을 얹었다.

“숲 안쪽 장례 줄 전체를 바깥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공개 범위는 원로회가 정한다.”

“공개는 나중 일이지.”

세라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금은 누가 뭘 먼저 떼어 가려 하느냐가 중요해.”

나는 굳이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대신 장례 줄 조각과 금속편을 같은 빛 아래로 나란히 밀어 놓았다. 이동표는 그 사이에 끼우지 않고 조금 떨어뜨렸다. 미리엘이 바로 손끝으로 눌림 방향을 짚었다.

“이동표는 나중 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장례 줄 결 위로 찍힌 방향이 다릅니다. 먼저 눌린 줄 위에 덮인 표식이에요.”

미리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장례 줄 끝을 손톱으로 아주 조금만 들어 올려 젖은 섬유 결이 눕는 방향을 보여 줬다. 바깥에서 눌린 쪽은 물을 먹고도 평평하게 죽어 있었고, 안쪽 오래된 결은 물을 머금은 채 비스듬히 일어나 있었다. 그 위에 올린 이동표 가장자리에는 장례 줄의 물이 아니라 마른 흙가루가 얇게 남아 있었다. 숲 안쪽에서 한 번 젖은 물건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묻은 먼지를 달고 와 그 위에 눌러 얹었다는 뜻이었다.

“원본 줄은 물을 먹고 부풀었는데, 이 표식은 눌린 자국만 남기고 결을 덜 끊었어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날 눌렀으면 이렇게 안 남습니다.”

미리엘이 다시 말했다.

“누군가 먼저 남은 이름 줄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바깥 확인표를 덧댄 거예요. 순서를 바꿔 놓으려고.”

나는 이동표를 조금 더 바깥으로 밀고 좌표 조각은 내 앞에 세워 뒀다. 장례 줄과 금속편이 같은 줄기라는 사실은 보여 줘도, 이동표와 좌표를 바로 포개 읽히게 해선 안 됐다. 먼저 지워진 이름, 그 위에 덧댄 번호, 나중에 붙인 이동 경로. 세 손이 한곳에서 섞인 게 아니라 순서대로 내려앉은 흔적이라는 게 지금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이었다.

왕국 사절이 다시 뭐라 하려는 순간 브론이 낮게 숨을 뱉었다. 짧은 소리였는데도 모두가 멈췄다. 그는 금속편 모서리를 엄지로 쓸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각, 우리 집 거다.”

말을 꺼낸 뒤에도 브론은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선은 끝까지 금속편 위에 붙어 있었다.

“카르트 공방 말고는 저 세 갈래 보정 각 안 쓴다. 숫자 홈이 조금만 틀어져도 모서리를 세 번 깨먹고 다시 맞추는 버릇이 있었거든.”

미리엘이 장례 줄과 금속편 사이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놀람보다 계산이 먼저 떠오른 눈이었다.

“그러면 숲 안쪽 이름 말소 줄과 이 번호 금속이 같은 제작선에서 닿았을 가능성이 더 높아져요.”

브론은 대답 대신 금속편을 뒤집었다. 뒷면엔 짧은 홈이 두 줄 더 남아 있었다. 손등 핏줄이 지나치게 도드라져 있었다. 분노라고만 하기엔 모자라고, 당황이라고만 하기에도 너무 오래된 느낌이었다. 자기 이름이 올라간 쇠를 처음 보는 손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 결을 너무 잘 알아서 더 싫어하게 된 손이었다.

“전투 병기에 찍는 표식은 아니야.”

브론이 겨우 말했다.

“번호를 찍는 데 쓰는 쇠붙이다. 사람이든 짐이든 규격 칸에 밀어 넣을 때 쓰는 쪽.”

브론은 금속편을 다시 뒤집어 뒷면 짧은 홈 두 줄을 보여 줬다. 한 줄은 번호가 삐뚤어졌을 때 되돌려 맞추는 보정선이고, 다른 한 줄은 같은 규격판 위에 여러 번 얹힐 때 모서리가 밀리지 않게 버티는 받침 흔적이라고 했다. 그는 손끝으로 세 갈래 각과 뒤집힌 홈 사이 거리를 재더니, 장례 줄 위에 눌린 끝번호의 간격과 거의 같은 박자로 맞물린다고 낮게 덧붙였다. 금속을 보는 사람 말투였다. 사람 사정이 아니라 폭, 홈 깊이, 모서리 닳은 순서를 먼저 세는 사람 말투.

“이건 현장에서 급히 들고다니는 표찰이 아니다. 받침에 눕혀 놓고 하나씩 같은 높이로 찍도록 손질한 거야. 줄을 재고, 순서를 맞추고, 나중에 바꿔 끼워도 겉으로는 티 안 나게 만드는 쪽.”

세라 턱이 아주 조금 굳었다. 왕국 사절은 한 발 물러난 척하면서도 계속 금속편만 보고 있었다. 엘프 실무자는 장례 줄 쪽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둘 다 자기 쪽에 유리한 조각을 고르는 데만 급했다.

나는 브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 줄부터 네 집 냄새가 나지.”

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더 세게 불어와 젖은 천 끝을 들췄다. 북쪽 재 냄새가 편마암 위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브론은 그 냄새를 맡은 사람처럼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감 표식보다 보정 각이 먼저다.”

그가 말했다.

“겉에 찍힌 번호보다 안쪽 손질. 공방 안쪽 사람 손이야.”

그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변명할 자리부터 먼저 잘라 내는 식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해가 더 기울기 전에 숲 바깥 첫 바람길까지 내려갔다. 왕국 쪽도 엘프 쪽도 끝까지 따라붙으려 했지만, 세라가 길을 너무 잘 골랐다. 사람이 둘씩 나란히 서지 못하는 바위 턱만 밟고 내려가자 뒤에서 끼어드는 손은 매번 검집이나 어깨에 먼저 걸렸다. 리에트는 말없이 앞 사면과 아래 관목 사이를 먼저 훑었다. 숲에서 빠져나왔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부턴 누가 우리를 쫓느냐보다, 누가 북쪽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바람을 등질 수 있는 폐초소는 생각보다 작았다. 낮은 지붕 아래 돌받침 하나가 길게 놓여 있었고, 문턱 안쪽 마른 자리엔 장례 줄 꾸러미를 펼쳐 말릴 수 있을 만큼만 공간이 남아 있었다. 왼쪽 벽 밑엔 미리엘이 작은 숯받침을 두어 물기만 천천히 걷게 했고, 그 맞은편 좁은 받침엔 소환장을 올릴 자리처럼 빈 돌판이 드러나 있었다. 가운데엔 사람 네 명이 비켜 앉아도 어깨가 닿을 만큼 좁은 통로가 났다. 누가 어디에 앉느냐만으로도 이 초소 안 힘의 흐름이 달라질 자리였다.

미리엘은 원본 장례 줄을 왼쪽 마른 천 위에 먼저 펴고, 그보다 작은 이동표는 한 뼘쯤 떨어진 자리에 눕혔다. 좌표 조각은 그 둘 사이가 아니라 내 앞에 따로 놓였다. 다시 읽을 때 섞이면 안 되는 순서였다. 브론은 오른쪽 벽에 등을 기대지 않고 문턱 쪽 사선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누가 오면 먼저 일어나야 하는 위치였다. 세라는 입구와 안쪽을 함께 볼 수 있게 문턱 오른편에 선 채 그대로 남았다. 리에트는 바람이 드는 문틈 반대편, 북쪽 냄새가 어디서 세지는지 읽기 좋은 자리에 멈췄다.

나는 마른 돌면 위에 짧은 칼집 하나를 가로로 눕혀 경계를 만들고 그 안쪽에만 원본 줄과 좌표 조각이 머무르게 했다. 장례 줄은 불기운을 너무 받으면 섬유가 바로 일어나니 숯받침과 한 팔 반쯤 거리를 뒀고, 이동표는 가장자리의 먹물이 번지지 않게 돌 조각 두 개로 눌러 고정했다. 미리엘은 그 사이사이에 작은 천쪼가리를 끼워 물기만 빨아들이게 했고, 나는 좌표 조각 뒤에 빈 물통을 세워 바람을 반쯤 막았다. 브론은 그걸 보더니 말없이 금속편 옆에 납작한 받침돌을 하나 더 끌어다 놓았다. 번호 홈이 젖은 채 바닥에 닿아 닳지 않게 하려는 손이었다.

이 작은 배치만으로도 각자 뭘 먼저 지키는지가 선명해졌다. 세라는 사람 손을 막고, 미리엘은 결이 일어나는 속도를 보고, 브론은 금속 모서리부터 눕히고, 리에트는 바깥 냄새와 발자국 박자를 읽는다. 나는 그 네 줄이 서로 엉키지 않게 가운데 빈 폭을 남겼다. 누군가 급히 들어오거나 나가야 할 때 장례 줄 위를 넘지 않게 하려면 그 빈 길이 반드시 필요했다.

브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장식용 번호가 아니다.”

나는 고개만 들었다.

“사람이나 짐을 규격 칸에 밀어 넣을 때 줄 안 바뀌게 찍는 쇠다. 공방 안쪽에서만 다뤘어. 바깥 손님이 볼 일도 없는 물건이지.”

그는 금속편 끝을 손톱으로 툭 쳤다.

“우리 집이 돈 되는 무기만 만들었다면 차라리 단순했을 거다. 망할 땐 망하더라도 말이 되니까.”

여기서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이어 붙일 말을 고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더 붙이지 않으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 이건 다르다.”

짧게 잘린 말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미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제 이송, 보호 대상 표기, 희생자에게 번호를 붙이는 절차… 그런 줄과 맞물린다는 말이군요.”

브론은 웃지도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사람 줄 위에 찍을 쇠를 만들라 한 거지.”

나는 젖은 좌표 조각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검은 용광 심연으로 이어지는 방향선은 이미 숲의 애도 바깥으로 몸을 끌고 있었다. 이름을 지운 손 위에 바깥 번호를 덧댄 절차. 그 절차에 북방 공방 냄새가 묻어 있었다면 다음 길은 장례 줄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쇠와 실제 풀무까지 가 봐야 했다.

그 판단을 내리자 사람들 움직임도 갈라졌다. 왕국 사절은 이동표만 따로 보관하겠다고 다시 손을 폈고, 엘프 실무자는 장례 줄이 숲 밖으로 나가는 순간 증언이 팔려 나갈 거라며 원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둘 다 틀린 말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왕국이 가져가면 어린 왕자 이동표만 남고, 숲이 접으면 남은 이름 줄만 사라진다. 그 사이에 브론의 금속편이 빠지면 누가 사람에게 번호를 덧댔는가 하는 질문은 다시 허공으로 흩어진다.

나는 네 물건을 손으로 가리키지 않고, 사람 자리를 먼저 바꿨다. 세라를 사절과 물증 사이에 세우고, 미리엘은 원본 장례 줄 가까이 앉혔다. 브론은 금속편을 들고도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내 오른편에 뒀다. 리에트에게는 숲 안쪽 실무자가 추가 인원을 부르러 움직이는지 봐 달라고 눈짓했다. 물건을 지키는 일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각 세력이 어디서 말을 끊고 어디서 손을 뻗는지 보는 자리였다.

“누가 먼저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빼고 말하려 하느냐를 봐.”

나는 낮게 말했다. 세라는 대답하지 않고 검집 끝을 한 치 내렸다. 사절 손등 바로 앞에 그림자가 생겼다. 미리엘은 원본 줄 위에 젖은 천을 한 장 더 덮었고, 브론은 금속편을 손바닥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 짧은 재배치만으로도 사절과 실무자 눈빛이 바뀌었다. 이제 조각 하나를 집어 갈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세라가 위쪽 사면을 다시 보고 내려왔다. 아래쪽보다 위쪽을 먼저 확인한 사람 얼굴이었다.

“뒤는 아직 버텨.”

그녀가 짧게 말했다.

“왕국은 계속 검증물 타령이고, 숲 안쪽은 공개 범위부터 줄이겠다고 난리야. 둘 다 우리가 오래 머무는 건 원치 않아.”

“좋아.”

나는 장례 줄과 금속편을 다시 감쌌다.

“그럼 머무는 이유도 줄이자.”

세라는 내 손을 한 번 보고 브론 쪽을 봤다. 위로하는 말은 없었다. 대신 더 쓸모 있는 질문만 남겼다.

“북쪽으로 가면, 네가 읽을 수 있나.”

브론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읽긴 읽을 거다.”

그가 말했다.

“보고 싶은 줄은 아니지만.”

나는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론이 무너지는 쪽이 아니라 움직이는 쪽으로 말을 골랐으니까. 곧바로 짐을 나눴다. 세라는 사람 동선을 맡고, 리에트는 숲 안쪽 추격 냄새를 맡고, 미리엘은 장례 줄과 이동표를 젖은 천으로 한 번 더 나눠 감쌌다. 나는 좌표 조각을 내 속주머니 안쪽에 넣지 않고 허리끈 바깥 작은 통에 묶었다. 숨긴 증거가 아니라, 필요할 때 모두 앞에서 다시 꺼낼 증거로 남겨야 했다.

왕국 사절은 그 배치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엘프 실무자는 숲 안쪽으로 사람을 보낼 듯 손을 들었다가 리에트 시선과 마주치자 멈췄다. 세라는 그 둘 사이를 지나가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북쪽으로 가는 동안 누구든 원본을 따로 떼려 들면, 그 사실부터 다음 증언에 붙일 겁니다.”

협박이라기보다 길 표시였다. 저들이 우리를 막으면 막은 자리까지 기록으로 남는다. 숲 밖 사면의 바람이 그 말을 얇게 끌고 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길이 단순한 추적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느꼈다. 북방으로 가는 일은 브론의 집안을 캐는 일만이 아니었다. 왕국과 숲이 서로 숨기려는 빈칸을 우리가 걷는 발걸음으로 연결하는 일이었다.

해가 더 내려앉을 즈음, 숲 경계말뚝 쪽에서 짧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화살이 아니라 짧은 쇠못이 박힐 때 나는 소리였다. 리에트가 먼저 몸을 돌렸고, 세라가 바로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나와 브론이 뒤따라 말뚝 쪽에 도착했을 때, 납작한 드워프식 봉함통 하나가 경계목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둥근 통이 아니었다. 망치 자루보다 짧고 손목 한 번 돌려 쥐기 좋은 금속통이었다. 뚜껑엔 북방 연맹 봉함이 찍혀 있었고, 그 아래엔 카르트 가문 문장 위로 가느다란 재심 각인이 겹쳐 눌려 있었다.

브론 손이 그 통 위에서 멈췄다.

왕국 사절이 뒤늦게 따라붙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같이 열어 봐야 한다. 북방 연맹 문서라면 왕국도 확인권이—”

세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길을 끊었다. 이번엔 검집이 아니라 어깨가 먼저였다. 누가 먼저 닿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정해 버리는 차단이었다.

“브론 앞으로 온 거야.”

사절이 입을 열려 하자 리에트가 위쪽 바람을 읽던 시선으로 툭 잘랐다.

“숲 경계에 꽂아 넣은 것도 일부러지. 남 손 먼저 대라고 보낸 문서면 저렇게 안 던져.”

브론은 한참 통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 브론의 손은 보통 무거운 받침을 들 때도 덜 망설인다. 그런데 작은 봉함 하나를 앞에 두고는 아예 힘을 어디에 줘야 할지 고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통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섰다.

“열지 말 거면 그대로 쥐고 있어도 된다.”

브론이 나를 봤다.

“다만 북쪽에서 이미 먼저 부르고 있다는 뜻만은 잊지 말자.”

그 말 뒤에야 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봉함 가장자리를 엄지로 눌렀다. 납작한 뚜껑이 조금 비틀리더니 딱 하고 풀렸다.

안쪽 문서는 짧았다. 드워프식 문장은 늘 그렇듯 필요한 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잘라 낸 것처럼 건조했다.

카르트 가문 죄목 재심.

규격 확인 출석.

검은 용광 심연 하부 진동 재개.

즉시 북상.

문장 아래엔 한 줄이 더 있었다.

번호를 찍는 옛 쇠가 다시 올라온다.

그 아래에는 짧은 부기 세 줄이 더 눌려 있었다. 하부 운반선 3구간 봉함 파손. 보정 각 불일치 보고 누락. 공방 직계 입회 없이는 재검 금지. 드워프식 문서답게 필요 없는 수식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세 줄만으로도 북방이 지금 원하는 게 브론 개인 사과가 아니라 현장 판독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났다. 누군가 이미 아래쪽에서 규격이 어긋난 흔적을 봤고, 그걸 덮은 손도 있었고, 이제는 카르트 이름이 아니면 열어 볼 수 없는 자리가 다시 생긴 셈이었다.

브론은 문서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봤다. 재심 문구보다 보정 각 불일치라는 말에서 먼저 눈이 멎는 게 보였다. 그건 죄목보다 기술자 말에 더 가까웠다. 누가 무얼 훔쳤느냐보다, 어디서 어떤 각이 틀어졌고 그걸 누가 보고도 넘겼는가를 먼저 묻는 줄이었다. 브론 손가락이 그 줄 위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가 멈췄다. 차마 눌러 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접어 버리지도 못하는 손이었다.

브론 눈이 거기서 멈췄다. 이번에는 오래 침묵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돈 때문에만 망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바람이 불어 문서 끝을 들췄다.

“마지막에 만들라는 게 있었을 거야. 사람 줄에 찍는 쇠. 아니면 그 보정 각이 붙는 기준판.”

그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더 늘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은 말은 오히려 더 많이 들렸다. 그걸 넘기지 못해 공방이 깨졌을 수도 있다는 말, 북방에서 누군가 그 마지막 작업을 다시 꺼냈다는 말, 자기 집 이름이 이제 장비가 아니라 사람 줄 옆에서 다시 불릴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는 그 문장을 듣고도 바로 브론을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좌표 조각 옆에 세워 둔 금속편을 다시 눕혀, 번호 홈과 장례 줄 끝이 같은 방향으로 보이게 맞춰 놓았다. 미리엘도 말없이 원본 줄을 반 치쯤 더 끌어당겨 두 자국이 한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브론은 그 배열을 한 번 보고는, 자기 집 손이 닿았다는 사실보다 아직 끝까지 읽히지 않았다는 쪽을 먼저 받아들였다. 수치가 사람을 주저앉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장까지 끌고 가는 모양새였다.

세라는 왕국 쪽을 한 번, 숲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그럼 더 늦출 이유가 없네.”

미리엘은 이미 젖은 장례 줄과 이동표를 다시 싸고 있었다. 손은 이번에도 순서를 틀리지 않았다. 원본 줄, 이동표, 좌표 조각, 금속편. 섞이면 안 되는 것끼리 붙지 않게, 나중에도 다시 같은 높이로 펼칠 수 있게 묶는 손이었다.

리에트는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냄새만 나는 게 아니야.”

우리가 같이 고개를 들자 숲 바깥 먼 하늘 한쪽에 아주 가느다란 붉은 기둥이 서 있었다. 불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꺼진 뒤 남는 연기보다 더 무겁고 더 검은 줄기였다. 땅속에서 오래 눌러 둔 열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때 올라오는 색.

브론이 그걸 보다가 문서를 더 세게 쥐었다. 하지만 이번엔 접지 않았다. 구기지도 않았다. 그냥 펼친 채 두 손 사이에 놓았다. 숨기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붉은 기둥이 선 방향을 따라 리에트가 짧게 사면을 짚었다. 북쪽으로 곧장 치고 올라가면 바람길은 빠르지만 눈에 너무 잘 띄고, 서쪽으로 조금 감아 돌면 물 마른 계곡이 하나 있어 흔적을 씻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세라는 그 말을 들으며 초소 바깥 모래바닥에 검집 끝으로 짧은 선을 세 개 그었다. 정면 오름길, 우회 계곡, 뒤따라오는 사람을 끊을 자리. 그녀는 병력 배치도가 아니라 사람 네댓이 밤새 안 들키고 지나갈 수 있는 폭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미리엘은 장례 줄을 싸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북쪽으로 옮겨도 원본 줄과 금속편을 한 자루에 넣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기 남은 섬유와 젖은 금속이 서로 닿으면 눌림이 바뀌고, 그 한 번의 비틀림만으로도 나중엔 어느 손이 먼저였는지 흐려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원본 줄은 천 둘, 이동표는 얇은 판 사이, 금속편은 마른 가죽주머니 안에 따로 나누자고 했다. 이 일이 끝나도 물증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이었다.

브론은 그 말에 고개를 한 번만 끄덕이고, 자기 허리띠 안쪽 작은 주머니를 비워 금속편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대충 챙겨 넣는 손이 아니었다. 모서리 닳는 방향, 몸에 닿아 나는 열, 걷다가 서로 부딪힐 각도까지 미리 재는 손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브론이 지금 붙드는 건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북방에 도착했을 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가를 실물 규격이라는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세라는 그 옆에서 소환장 겉면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훑어 보고, 젖은 먹이 번지지 않은 자리가 어디인지까지 확인했다. 왕국이나 엘프 쪽 손이 뒤늦게 자기들이 먼저 봤다고 우겨도, 어떤 줄이 처음부터 안쪽에 있었는지 곧바로 반박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리에트도 초소 바깥 모래를 발끝으로 한 번 문질러 새 발자국이 겹치면 바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누구도 말로 맹세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북방까지 가져가야 할 게 사람만이 아니라 증거의 상태라는 걸 이미 같은 속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초소 안 배치를 다시 정리했다. 입구 오른편 짧은 벽엔 세라 자리를, 왼쪽 장례 줄 맞은편엔 브론 자리를, 마른 천과 좌표 조각 사이엔 미리엘 자리를 남겼다. 리에트는 문턱 밖 북쪽 사면을 끊어 읽을 수 있는 끝자리로 빼 두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결심이 아니라 재배치였다. 누가 무엇을 맡고 북쪽으로 올라갈지 자리부터 고정해야 다음 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세라는 앞줄.”

세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턱 오른편 짧은 벽으로 반 걸음 옮겨 서며, 누가 안으로 들이닥쳐도 먼저 자기 어깨와 검집에 걸리게 자리를 다시 잠갔다.

“브론은 규격과 쇠.”

브론이 문서를 내려다본 채 대답했다.

“안 맞는 각부터 잡아낼게.”

그는 금속편을 오른손에, 소환장을 왼손에 나눠 들었다. 과거 흔적과 새 호출을 같은 자루에 넣지 않겠다는 태도가 그 짧은 동작 안에 남았다.

“미리엘은 번호와 장례 줄 대조.”

미리엘이 젖은 꾸러미를 다시 눌러 고정한 뒤 짧게 답했다.

“같은 손이 어디서 줄을 바꿨는지 먼저 보겠습니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례 줄 바깥 천 끝을 한 번 더 접어 물이 아래로만 빠지게 만들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에서도 이 줄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북방으로 들어가는 길.”

리에트는 이미 몸을 돌린 채였다.

“숲 바깥 추적선보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손부터 읽어 둘게.”

그녀는 말과 함께 초소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북쪽 사면 바람을 다시 맡았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길이 어디서 꺾이고, 누가 먼저 매복해 있을지 그 자리에서 이미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장례 줄 꾸러미를 들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종이와 천이 손바닥 안에서 차갑게 붙었다. 유리숲에서 건져 올린 건 슬픔만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살아 나갔고, 누가 남아 이름을 눕혔고, 누가 그 위에 바깥 번호를 덧댔는지에 대한 줄기였다. 이제 그 줄은 북방의 불과 쇠를 지나가야 했다.

“브론.”

그가 나를 봤다.

“네 이름 때문에 닫힌 문이면, 이번엔 네 이름으로만 들어가진 않을 거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금속편과 소환장을 끝내 같은 자루에 넣지 않았다. 하나는 오른손, 하나는 왼손에 따로 들었다. 과거와 호출을 아직 한 줄로 묶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북쪽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재 냄새가 더 선명해졌다. 폐초소 문턱을 넘어 나가려 하자 봉함을 뜯은 소환장 끝이 바람에 한 번 크게 들렸다. 검은 용광 심연 하부 진동 재개. 번호를 찍는 옛 쇠가 다시 올라온다.

세라는 앞줄로 먼저 나가고, 리에트는 한 걸음 더 넓게 바깥 사면을 잡았다. 미리엘은 젖은 꾸러미가 흔들리지 않게 내 배낭끈 길이까지 다시 맞췄고, 브론은 소환장을 겉주머니가 아니라 안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누구 하나 말은 길게 하지 않았지만, 출발 직전 손들이 먼저 같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유리숲에서 건져 올린 애도는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고, 북방에서 다시 올라온 쇠 냄새도 외면할 수 없었다.

문턱을 넘기 직전 나는 한 번 더 뒤를 돌아 초소 안 돌받침을 봤다. 조금 전까지 젖은 장례 줄과 금속편이 놓였던 자리에 얇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누가 먼저 손댔는지, 어떤 줄이 안쪽이었는지, 무엇이 나중에 덧붙었는지. 방금까지 손으로 짚어 본 질서가 이제는 우리 발걸음 속으로 옮겨 붙은 셈이었다. 북방에 가서 다시 펼칠 때도 그 순서만은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는 그 문장을 접지 않은 채 북쪽으로 걸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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