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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나드의 첫 시험

새벽의 북방 전초는 밤사이 얼어붙은 숨을 다시 풀어 놓는 짐승 같았다.

감시탑 아래 마당엔 젖은 밧줄이 반쯤 얼어 굳어 있었고, 서사면 쪽 낮은 방책선에는 어젯밤 덧댄 받침목이 아직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고 뒤 경사는 눈 아래가 비어 있어 사람 둘만 한꺼번에 잘못 디뎌도 바로 주저앉을 것처럼 울었고, 기록 인계 통로 쪽 돌계단엔 밤새 옮겨 놓은 봉함 상자 대신 빈 짚자루와 깨진 못통이 먼저 세워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내가 메모에 그려 둔 순서대로 보면 전부 자리였다.

병사 후송선은 왼쪽 고랑 뒤.

원본은 벽 안쪽에 숨긴다.

반응 칸은 가운데를 비우되 둘째 끝을 먼저 본다.

나는 감시탑 그림자가 닿는 선까지 걸어가 서사면 아래를 다시 훑었다. 눈발은 잠깐 멎어 있었다. 그 덕에 우리가 비워 둔 자리와 일부러 채운 자리가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면 말뚝선은 어제보다 반 뼘 뒤로 물러난 대신 더 두껍게 보였고, 진짜 손을 넣어야 하는 창고 뒤 경사와 기록 인계 통로는 짐짝과 빈 통, 젖은 천 자루로 한 번 꺾이게 해 두었다. 누가 처음 보면 허술한 수선이다. 하지만 적이 어제처럼 `어디를 건드리면 우리가 어떻게 뛸지`를 재러 온다면, 오늘은 최소한 한 번은 헛발을 딛게 만들 수 있다.

브론이 안쪽 받침목을 발등으로 툭 차 보며 중얼거렸다.

“겉말뚝은 멀쩡한 척만 시키면 된다. 밑이 빠질 자리를 옆으로 넘겨 놨으니, 오늘은 여기로 바로 꺼지진 않을 거다.”

미리엘은 돌계단 끝 세 칸에 젖은 천 조각을 하나씩 눌러 두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듯 잠깐 눈을 감았다가 가운데 칸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둘째 끝이 먼저 울릴 거예요. 어제보다 짧게, 두 번.”

“확실해?”

“확실해요. 밑이 비는 소리가 달라요.”

리에트는 이미 감시탑 절반쯤 올라간 상태였다. 그녀는 위에서 내려다보다 말고 활시위를 한 번 당겼다가 놓았다.

“관측 손이 또 오면 오늘은 더 뒤에 붙을 거야. 어제 우리 화살이 어디를 보는지도 봤으니까.”

세라는 마당 한복판에서 병사 둘의 방패 높이를 고쳐 세우고 있었다. 어제 보고실 창가에 세워졌던 얼굴과 지금 눈발 아래 서 있는 등은 전혀 달라 보였다. 병사들 눈엔 여전히 앞줄 기사 후보였지만, 방패를 드는 각도만 보면 이미 내가 비워 둔 안쪽 홈을 건드리지 않도록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파견 지휘관이 감시탑 아래로 걸어왔다. 밤새 한 번도 벗지 않은 듯한 망토 끝엔 얼어붙은 진창이 붙어 있었다.

“전열 간격이 들쭉날쭉하군.”

그는 말뚝선보다 창고 뒤에 세워 둔 빈 짚자루부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봤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앞에 세우지 마시오.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선을 따라 섭니다. 선을 흐리면 겁부터 먹어요.”

세라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정면 선은 유지됩니다.”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유지되어야 해요.”

그는 일부러 마당에 선 병사들까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넓혔다.

“오늘 올라올 놈들이 어제와 같으리란 보장은 없소. 전면 돌파로 오면 자질구레한 재배치 따윈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대꾸 대신 돌계단 끝 빈 칸을 한 번 더 눈으로 셌다. 저 사람은 여전히 `어디를 어떻게 지키느냐`보다 `어떻게 보이느냐`를 먼저 본다. 어제는 그게 보고실 문장 순서였다면, 오늘은 병사들이 보는 전열 모양이었다.

세라는 그걸 알면서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전면은 더 단순하게 보이게 두겠습니다.”

그녀가 병사 둘을 손짓해 앞줄로 세웠다.

“대신 뒤는 제가 정리하죠.”

파견 지휘관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적어도 겉으로는 자기 명령이 먹혔다고 여긴 얼굴로 돌아섰다. 그가 떠나자 브론이 혀를 찼다.

“잘도 먹히는 척하네.”

세라는 말뚝선 쪽을 보며 짧게 답했다.

“먹히는 척은 저 사람 몫이고, 비워 두는 건 우리 몫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감시탑 위에서 리에트의 휘파람이 짧게 찢어졌다.

하나, 둘, 잠깐 끊기고 또 하나.

정면 둘.

뒤 둘.

더 바깥 하나.

어제보다 더 넓게 벌어진 배치였다.

나는 눈사면 아래를 올려다봤다. 흐린 흰빛 사이로 검은 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정면 말뚝선 앞으론 방패를 든 듯 부피를 부풀린 둘이 내려왔고, 창고 뒤 경사 쪽 눈등성이를 타고는 허리를 낮춘 둘이 길게 돌아붙었다. 마지막 하나는 더 위, 감시탑과 마주 보는 능선 턱 아래 멈춰 서 있었다. 창도 칼도 들지 않은 채, 다른 넷의 간격만 재는 자세였다.

“온다.”

내 말이 끝나자 서사면 아래 눈이 먼저 꺼졌다.

정면이 아니었다. 창고 뒤 경사 밑, 어제 미리엘이 둘째 끝이라고 짚었던 그 아래가 푹 내려앉으며 눈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동시에 정면 말뚝선 바깥의 검은 둘이 일부러 더 크게 발을 굴렀다. 소리는 앞에서 울리고, 붕괴는 뒤에서 시작됐다.

“세라, 앞줄 고정! 가운데 비워!”

세라가 방패를 들며 병사 셋을 반 뼘씩 갈랐다.

“내 쪽 본다! 오른쪽 둘, 발만 맞춰!”

병사들 시선이 그녀에게 묶이는 동안 브론이 빈 썰매 하나를 걷어차 경사 초입에 눕혔다. 썰매 옆 날이 눈에 박히며 길이 한 번 꺾였다.

“한 번은 이쪽으로 흐른다!”

미리엘이 돌계단 둘째 끝을 밟고 있던 젖은 천을 걷어 내며 소리쳤다.

“지금이에요. 두 번 울려요!”

나는 기록 인계 통로 앞에 세워 둔 짚자루를 한 자루 쓰러뜨렸다. 적이 보기엔 당황해서 치운 걸로 보일 자리였다. 실제론 그 뒤 빈 칸이 병사 발이 아니라 상자 발이 들어갈 자리였다.

정면의 검은 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게 흔들었다. 말뚝이 부러질 듯 휘며 병사들 몸이 잠깐 앞쪽으로 쏠렸다. 바로 그 순간, 경사 쪽으로 붙은 둘 가운데 하나가 허리춤에서 짧은 편날을 꺼내 들었다. 칼날보단 갈고리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어제 본 것보다 더 짧고, 더 가벼워 보였다. 놈은 사람을 겨누지 않았다. 짚자루 뒤로 옮겨 둔 봉함 상자 쪽 빈 칸을 향해 손목만 틀었다.

“리에트, 손!”

화살은 놈의 팔뚝이 아니라 손목 앞 눈바닥을 먼저 긁었다. 검은 그림자가 반 박자 늦게 몸을 비트는 동안 브론이 썰매 옆을 발로 차 경사 흐름을 더 옆 고랑으로 밀었다. 눈 아래가 무너지며 상자 쪽이 아니라 빈 통 쪽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적도 한 번 더 읽고 들어왔다. 정면 흔들기 둘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말뚝선에서 물러나는 척하며 병사 둘 사이에 작은 쇳조각을 던졌다. 반짝이는 금속이 돌계단 앞에 튕겨 떨어졌다. 뒤 병사 하나가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끼였다.

진짜 손은 그 순간 기록 인계 통로 벽을 스치듯 붙어 내려왔다. 관측 손이 아니라 안쪽 회수 손이었다. 놈은 벽에 검은 재를 짧게 문지르고 그대로 통로 안쪽 빈 칸을 향해 몸을 눕혔다.

“사람 말고 벽!”

나는 가장 가까운 병사의 어깨를 밀어 통로가 아니라 벽 앞에 세웠다. 병사는 칼끝을 적이 아니라 돌벽 쪽으로 세웠다. 그 찰나, 놈의 손이 벽을 더듬듯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 목을 노린 손이 아니었다. 어디가 울리고, 어디가 비는지 확인하는 손이었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둘째 끝 다음이 바로 안쪽이에요!”

그 말과 함께 돌계단 셋째 칸 아래에서 짧은 공명이 튀었다.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둘째 끝을 보고 빠졌고, 오늘은 둘째 끝을 울린 뒤 바로 안쪽 칸까지 이어 봤다. 놈들은 우리가 메모한 순서까지 훑고 있었다.

세라가 방패를 반 걸음 더 비틀어 통로 앞을 막았다. 그녀 뒤 병사 둘이 자연스럽게 그 각을 따라 붙었다. 이제 병사들은 파견 지휘관의 정면 고함이 아니라 세라 방패의 기울기와 내가 손으로 그은 빈 칸을 먼저 따르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듯, 능선 위 관측 손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높은 곳에 서 있던 검은 실루엣이 창 끝으로 눈을 두 번 찍었다.

톡.

톡.

둘째 끝 박자와 같은 간격이었다.

소름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놈은 멀리서 우리 배치만 본 게 아니었다. 미리엘이 읽은 칸, 브론이 틀어 놓은 하중, 세라가 비워 둔 각, 내가 병사와 상자 발을 갈라 세운 순서까지 하나의 답안처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경사 밑이 더 크게 내려앉았다. 무너진 눈과 짚자루 아래에서 돌이 드러났고, 창고 뒤 경사와 기록 인계 통로 사이 묻혀 있던 낮은 계단 입구가 비죽 튀어나왔다. 돌에 묻은 서리는 오래돼 하얗게 굳어 있었고, 맨 위 두 칸엔 최근에 누군가 신발로 문지른 듯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감시탑 밑 중계 계단.

전초 장부엔 없는 자리였다.

안쪽 회수 손 하나가 그 입구 바로 앞에서 몸을 돌렸다. 내 칼끝 거리 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세라와 내가 동시에 눌러 죽일 수 있었다. 놈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방패 빈 틈을 향해 찌르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병사 허벅지와 상자 끈이 같은 선에 있었는데, 손끝은 거길 스치고도 멈췄다. 살을 가르면 끝날 자리를 비껴, 반쯤 등을 보인 채 계단 아래 어둠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보라는 말이었다.

“에이드리언!”

세라가 부르는 목소리엔 막으라는 뜻과 가 보라는 뜻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봉함 상자 하나를 낚아채 병사 둘에게 던졌다.

“이건 벽 안쪽으로! 사람은 왼쪽 고랑 뒤! 브론, 경사 더 옆으로 흘려!”

브론이 대답 대신 받침목 하나를 더 걷어차며 아래를 내려앉혔다. 무너진 눈이 계단 앞을 절반쯤 막아 주었다. 미리엘은 돌계단 둘째 끝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지금 안 들어가면 다시 닫혀요!”

나는 병사 둘과 함께 중계 계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계단 아래 공기는 바깥보다 차갑고, 오래 잠겨 있던 돌냄새가 짙었다.

첫 굽이를 돌자 감시탑 아래가 아니라 더 오래된 배수 통로처럼 생긴 좁은 복도가 나왔다. 오른쪽 벽엔 쇠고리가 두 개 박혀 있었고, 왼쪽 바닥엔 썩은 나무 상자 부스러기와 오래된 밀랍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위 전초에서 쓰는 최신 봉함 방식과는 달랐다. 더 거칠고, 더 오래된 손이었다.

병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런 길이 있었습니까?”

“장부엔 없었어.”

나는 벽 가까이 다가가 검은 자국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이 익숙했다. 남부 종루 기록띠 바깥 줄에서 본 것과 비슷한 표기였다. 짧은 세 획, 끊긴 원 하나, 그리고 아래로 눌러 찍은 검은 점.

`남문식 표기 준용`

복도 끝에서 짧은 금속음이 울렸다.

챙.

우리가 들어온 걸 확인시켜 주려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칼을 세우고 복도 끝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반쯤 열린 돌문 하나와, 그 아래 눕혀 둔 얇은 판석이 있었다. 판석엔 감시탑 아래 중계 계단에서 북쪽 깊은 선으로 꺾여 들어가는 가는 통로와, 중간중간 눌러 찍힌 작은 칸만 남아 있었다.

둘째 끝 박자 칸과 닮았다.

돌문 왼편 벽감엔 얇은 목패 세 장과 납으로 봉한 종이띠 토막이 눕혀 있었다. 하나엔 `상행`, 하나엔 `임시 보전`, 마지막 하나엔 `현장 발췌`라는 글자가 거의 지워진 채 남아 있었다. 북방 전초 위 장부에서 보던 거친 획과는 달랐다. 여기 글씨는 물건을 나누기 전에 문장을 먼저 나누는 손이었다. 누가 원본을 붙들고, 누가 잘라 적은 발췌본만 들고 올라가는지까지 미리 짜 둔 자리. 남부 종루에서 봤던 분류 논리가 이 전초 아래에서도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판석 아래 눌림칸도 사람 발보다는 상자 모서리와 문서통 바닥이 번갈아 맞게 파여 있었다. 물건을 세워 두고, 내용과 표기를 갈라 적고, 다시 위로 밀어 올리는 자리였다. 라그나드가 우리를 이 계단으로 밀어 넣은 건 단순히 숨은 길 하나를 보여 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람과 상자 중 무엇을 먼저 붙드는지, 원본과 발췌본 가운데 어느 쪽을 살리는지까지 다시 읽게 하려는 의도가 더 짙었다.

뒤 병사가 상자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적이 숨은 겁니까?”

“아니.”

나는 돌문 안쪽 어둠을 보며 말했다.

“숨었다면 발을 지웠겠지.”

실제로 복도 끝 바닥엔 가볍게 밟고 물러난 발자국이 일부러 남아 있었다. 하나. 둘. 그리고 더 안쪽으론 없다.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거기까지만 보여 주고 사라진 흔적이었다.

놈은 우리를 죽이려 들지 않았다. 훔치지도, 막지도 않았다. 대신 이 길과 표식을 보게 만들고 물러났다.

위쪽에서 세라의 방패가 돌 긁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녀가 병사 둘을 더 데리고 계단 입구에 섰다. 파견 지휘관의 후퇴 명령 따위는 따라오지 않은 얼굴이었다.

“살아 있지?”

“아직은.”

세라는 복도 안쪽 표식을 보자마자 눈빛이 바뀌었다.

“저건 뭐지.”

“전초 장부엔 없는 길.”

브론도 뒤따라 들어와 판석을 내려다봤다. 그는 손등으로 선을 따라가다가 혀를 찼다.

“중계선이네. 물건만 옮기는 길이 아니라, 신호도 넘기는 길이야. 여기 쇠고리 간격 봐. 썰매든 상자든 고정해서 미는 구조다.”

미리엘은 복도 문턱에 선 채 숨을 죽였다.

“밑이 울려요. 위 서사면이랑 다른 박자로.”

“살아 있다는 뜻이야?” 세라가 물었다.

“죽은 길이면 이렇게 안 울려요.”

리에트는 끝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계단 입구 위에서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놈들 빠진다. 하지만 달아나는 속도가 아냐. 우리가 여기 머무는지 듣고 가는 속도야.”

그 말이 더 소름 끼쳤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올지, 이 길을 잡을지, 공식 전열을 버릴 만큼 이 표식에 마음이 움직이는지까지 듣고 간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판석 한쪽에 붙은 젖지 않은 밀랍천 조각을 발견했다. 이런 눈밭과 얼음 속에서 저만큼 멀쩡하게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돌못 아래 끼워 둔 자리까지 너무 얌전했다. 흘린 게 아니라 끼워 둔 물건이었다.

“세라.”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밀랍천을 들어 보였다.

“이건 전리품이 아니야.”

천을 펼치자 거친 선이 드러났다. 감시탑 아래 중계 계단, 서사면 아래 배수 홈, 그리고 북쪽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가는 통로 하나. 전초 공식 지도엔 없는 선이었다. 끝쪽엔 검게 눌러 찍은 짧은 표식 하나가 있었는데, 아까 능선 위 관측 손이 창끝으로 눈을 두 번 찍던 간격과 이상하게 겹쳐 보였다.

세라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따라오라는 거네.”

“응.”

“그리고 우리가 따라올 걸 안다는 뜻이고.”

브론이 복도 벽을 한 번 툭 쳤다.

“젠장. 파괴자가 아니라 시험관이군.”

미리엘은 밀랍천보다 그 아래 판석 선에 더 오래 시선을 두었다.

“이 길, 위에서 막아 버리면 끝나는 통로가 아니에요. 더 깊은 곳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드는 우리를 전초 밖으로 쫓아내려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는 건 자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위쪽에서 또다시 파견 지휘관의 고함이 들렸다.

“안쪽 인원 즉시 철수! 추격대 편성 먼저다!”

세라는 복도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내 손의 지도를 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추격대는 헛발질하겠지.”

나는 웃지 못했다.

“우리가 뭘 봤는지도 모른 채.”

***

중계 계단 입구를 다시 정리할 때쯤엔 오전 빛이 더 흐려져 있었다.

서사면 바깥은 잠깐 잠잠해졌지만, 그 잠잠함은 전투가 끝난 뒤의 고요가 아니었다. 읽을 건 읽고 한 걸음 물러난 손들이 아직 멀리서 숨을 고르고 있다는 정적 같았다. 정면 말뚝선 바깥엔 병사 둘이 다시 자리를 잡았고, 왼쪽 고랑 뒤에선 다친 병사 셋이 붕대를 갈고 있었다. 창고 뒤 경사엔 브론이 눕혀 둔 썰매와 새 받침목이 버텨 주고 있었고, 기록 인계 통로 앞엔 세라가 직접 비워 둔 한 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한 칸이 오늘 우리를 살렸다.

파견 지휘관은 마당 한복판에서 병사들에게 `전초 방어 성공`과 `적 후퇴`를 이미 외치고 있었다. 그의 말은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절반뿐이었다. 적은 후퇴한 게 아니라 답안을 걷어 갔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문제를 풀러 오길 바라는 지도까지 남기고 갔다.

군수병이 젖은 장부를 안고 뛰어왔다.

“지휘관님은 추격대를 꾸리겠다는데, 저 중계 계단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파견 지휘관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나중 문제요. 지금 병사들 눈엔 물러난 적과 버틴 전열이 먼저 남아야 해.”

세라가 그 말을 옆에서 받아냈다.

“병사들 눈에 남길 건 제가 정합니다.”

지휘관 눈썹이 홱 올라갔다.

“벨로네 양.”

“방금 전초를 무너뜨릴 뻔한 건 정면이 아니었습니다. 서사면 뒤 겹침선이었어요.”

그녀는 마당 모두가 들을 만큼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앞줄은 제가 붙잡겠습니다. 대신 안쪽 배치는 에이드리언이 정합니다.”

병사들 시선이 한순간 우리 쪽으로 모였다. 전투 한가운데서 이미 몸으로 안 사실을, 세라가 이제야 말로 붙인 셈이었다. 파견 지휘관은 반박하려다 말고, 병사들 얼굴을 한번 훑었다. 방금 전 다친 병사를 끌어낸 손도, 상자와 사람 발을 갈라 세운 손도 다 누구 지시를 따랐는지 그들 표정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억지로 말을 눌렀다.

“좋소. 하지만 공식 보고는 내 선에서 정리합니다.”

세라가 차갑게 답했다.

“공식 보고는 그러시고, 현장 배치는 이 선에서 끝까지 갑니다.”

그 말이 끝난 뒤 병사 하나가 자연스럽게 내게 물었다.

“안쪽 통로 빈 칸은 계속 남겨 둡니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제 저들은 세라를 통해 내 지시를 받는다. 겉으론 앞줄 기사 후보, 실제론 파티 전열. 어젯밤 메모에 적어 둔 짜임이 말이 아니라 현장 습관으로 굳기 시작한 것이다.

브론은 중계 계단 입구에 판자 하나를 세워 두며 말했다.

“여길 막아 버리면 편하긴 하다.”

“대신 다시 찾을 때 늦어지죠.”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그리고 적이 우리가 못 읽는다고 판단하겠지.” 리에트가 감시탑 아래로 내려오며 덧붙였다.

나는 밀랍천 지도를 접어 소매 안쪽에 넣었다.

“막지는 말자. 다만 누구 눈에도 길처럼 보이진 않게.”

브론이 판자를 비스듬히 돌려 세웠다.

“무너진 흔적처럼?”

“응. 우리가 본 건 남기되, 가져갔다는 티는 덜 나게.”

세라는 내 손이 지도를 넣는 걸 보고 조용히 말했다.

“공식 보고엔 안 올린다.”

나는 그녀를 봤다.

“네 이름으로도?”

“내 이름이 올라갈수록 더더욱.”

그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제까진 얼굴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아 가는 중이었다면, 오늘은 이미 쓸 자리를 정한 얼굴이었다.

***

해가 기울기 전 짧은 정리 시간, 우리는 숙영칸 안쪽 좁은 탁자에 다시 모였다.

젖은 장갑 둘, 말리지 못한 붕대 묶음, 밀랍이 벗겨진 봉함 조각, 그리고 오늘 가져온 밀랍천 지도가 탁자 위를 차지했다. 장갑 끝에 밴 찬물이 손목까지 스며 있었고, 브론은 한쪽 어깨를 몇 번이나 돌려야 했다. 리에트는 활끈의 물기를 마른 천으로 눌러 빼고, 미리엘은 굳은 피가 남은 붕대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뜯어 내고 있었다. 공식 보고 초안도 옆에 놓여 있었지만, 이번엔 누구도 그걸 먼저 보지 않았다. 파견 지휘관 쪽 문장엔 이미 어떤 줄이 올라갈지 다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젖은 봉함 조각과 군수병에게서 잠깐 넘겨받은 손상 장부 한 장을 탁자 끝에 펼쳤다. 번진 먹 아래로 `북심도 중계선`, `외부 보고 전 분류`, `현장 발췌 우선` 같은 토막 글자가 겨우 남아 있었다. 오늘 전초를 버티게 한 건 정면 전열만이 아니었다. 사람 다니는 길과 물건 오가는 길을 갈라 세우고, 원본과 보고 문장을 한 줄에 올리지 않은 판단이 더 컸다.

나는 탁자 위를 손등으로 훑어 세 칸을 만들었다. 병사 보고, 군수 기록, 파티 정본. 젖은 장갑 옆엔 붕대와 화살촉을, 봉함 조각 옆엔 번진 장부와 밀랍천 지도를 밀어 놓았다. 무엇을 먼저 숨기고 무엇을 먼저 보여 줄지까지 여기서 정해야 했다. 공식선은 버틴 전열과 물러난 적을 첫 줄로 올릴 것이다. 우리는 그 아래 감춰질 통로, 박자, 표식, 그리고 남겨진 길의 의도를 먼저 붙들어야 했다.

나는 지도를 펼쳐 중앙에 눌러 놓았다. 거친 선이 탁자 결 위에서 더 또렷해졌다. 전초 아래 중계 계단, 북쪽 깊은 선, 중간중간 찍힌 짧은 박자 칸, 끝에 눌러 찍은 검은 표식.

리에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퇴선이 너무 깨끗했어. 오늘 저건 도주가 아니라 전달이었다.”

브론이 갈고리 편날을 옆에 내려놓았다.

“장비도 마찬가지다. 죽일 생각이면 더 무겁고 더 긴 걸 썼겠지. 오늘 건 읽고 걸고 표시하는 손 세팅이야.”

미리엘은 지도 중간 칸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여기서 한 번 더 울릴 거예요. 위 전초 둘째 끝이랑 아래 길 박자가 이어져요.”

세라는 지도의 끝 표식을 오래 봤다.

“라그나드는 우리가 이걸 해독할 만큼은 된다고 본 거네.”

“그리고 죽일 만큼은 아직 아니라고도.” 내가 말했다.

말은 짧았지만 방 안 공기가 잠깐 더 차가워졌다.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았다. 그건 안심할 이유가 아니라, 더 안쪽에 써먹을 값어치가 있다고 본다는 뜻이었다.

나는 메모 종이를 새로 펼쳤다.

`적 편제: 정면 흔들기 둘, 경사 붕괴 유도 둘, 관측 하나.`

`적 목표: 전초 점령보다 경사 / 기록 통로 / 둘째 끝 박자 칸 동시 압박.`

`확인 사실: 감시탑 아래 옛 중계 계단 존재. 공식 장부 미기재.`

`획득 물증: 북방 전초 아래 중계선 일부가 그려진 밀랍천 지도.`

`판정: 실수로 흘린 전리품 아님. 의도적 전달.`

`의미: 라그나드 측은 우리를 죽이기보다 더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함.`

세라는 내가 쓰는 걸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줄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공식 승전보다 파티 정본 보관 우선.`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이젠 승전 문장도 쓸모가 있긴 하군. 적어도 뭘 숨기려는지는 알려 주니까.”

“그 문장만 믿고 움직이면 우린 또 읽혀.” 리에트가 말했다.

미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위를 지키는 척하면서 아래를 열어야 해요.”

나는 메모 맨 아래에 마지막으로 적었다.

`다음 우선: 지도 해독 / 중계 계단 봉합 위장 / 공식 추격 명령 견제.`

그리고 그 아래 더 짧게 한 줄을 남겼다.

`적이 남긴 길을, 적이 원하는 속도대로 밟지 말 것.`

세라는 그 문장을 읽고 손끝으로 탁자를 한 번 눌렀다.

“좋아.”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오늘 하루를 통틀어 가장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게 첫 시험이면, 다음엔 답안지까지 뺏으러 오겠네.”

나는 지도를 접어 다시 소매 안쪽에 넣었다.

밖에선 야경 교대 준비 소리와 멀리서 끌어 오는 판자 마찰음이 겹쳐 들렸다. 누군가 문밖에서 젖은 기침을 짧게 삼켰고, 탁자 모서리에 고인 물이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전초는 겉으론 버텨 냈고, 보고는 곧 승전 쪽으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실제로 얻은 건 승리감이 아니었다.

라그나드는 우리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우리가 읽어 낼 수 있을 만큼의 길을 의도적으로 남겼다.

이제 북방 전초의 전투는 정면 방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사와 통로, 원본과 박자, 앞줄 얼굴과 안쪽 지휘를 한꺼번에 붙들 수 있는 쪽만 다음 장면을 고를 수 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감시탑 창문 틈으로 들어온 흰 빛이 탁자 위 젖은 밀랍천 가장자리를 잠깐 번들거리게 했다. 나는 그 반짝임을 보며 마지막으로 확신했다.

저 지도는 패주 중 떨어진 실수가 아니다.

라그나드가 남긴 다음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을 결국 따라 읽을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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