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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승전 보고

다섯 그림자는 이번엔 숨을 아끼지 않았다.

서사면 말뚝선 바깥 눈사면에서 검은 점 다섯이 벌어질 때, 가장 먼저 흔들린 건 나무가 아니라 길이었다. 앞의 둘은 말뚝 아래 얇게 언 흙을 다시 밟아 우리 시선을 정면으로 붙들려 했고, 뒤의 둘은 창고 뒤 경사를 크게 돌아 기록 인계 통로와 맞물리는 쪽으로 퍼졌다. 가운데 하나는 능선 턱 바로 아래서 한 발도 더 내려오지 않았다. 칼을 들러 온 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먼저 막는지 세는 눈이었다.

눈발이 잠깐 잦아든 덕에 배치는 더 또렷하게 보였다. 정면 말뚝선은 흔들리는 척했고, 진짜 취약점은 그 뒤 좁은 홈이었다. 못통, 병막 보강천 자루, 기록띠를 담은 봉함 상자, 후송 병사가 지나갈 낮은 계단. 저 넷이 한 홈에 몰리는 순간 전초는 성벽보다 절차가 먼저 무너진다.

“세라, 앞줄 고정. 가운데 더 비워.”

세라는 이미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방패를 들었다.

“내 쪽 보고 서. 오른쪽 셋, 한 칸만 물러.”

병사들 몸이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겉으론 전열 유지였다. 실제론 가운데 홈을 비워 브론이 하중을 바꿀 자리를 만드는 움직임이었다. 브론은 못통 하나를 발등으로 밀어 경사 초입에 걸어 두고, 겉말뚝보다 안쪽 받침목부터 손댔다.

“놈들, 또 길부터 재는군.”

“그러니까 길부터 바꿔.”

브론이 코웃음을 치며 짧은 받침목을 뽑아 반 뼘 옆으로 박았다. 겉으로 보면 보수였다. 실제론 힘이 아래로 쏠리던 선을 옆 고랑으로 흘려 보내는 손질이었다. 미리엘은 보강재 더미 그림자 안에서 흙 위를 내려다보다가 발끝으로 칸 하나를 짚었다.

“둘째 끝이에요.”

“셋째가 아니라?”

“아까는 셋째였는데, 이번엔 더 빨라졌어요. 바깥에서 치기 전에 밑이 먼저 울어요.”

놈들이 우리 반응 속도를 읽고 박자를 당겼다는 뜻이었다.

감시탑 위 리에트의 낮은 휘파람이 끊겼다. 짧게 둘, 길게 하나. 왼쪽 아래 둘. 안쪽 둘. 가운데 눈 하나.

나는 창고 뒤 경사면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반쯤 드러난 갈고리를 짧게 세웠다. 사람 목을 따기엔 어정쩡한 길이였다. 봉함 끈을 낚고 기록띠를 걸어채기엔 딱 맞는 길이였다.

“리에트, 손부터.”

“알고 있어.”

화살은 적 몸이 아니라 손끝 앞 눈바닥을 긁었다. 검은 그림자가 발을 비트는 동안 브론이 못통을 더 세게 밀어 길을 좁혔다. 세라는 방패를 비스듬히 세워 기록 인계 통로 앞을 반쯤 닫았다. 병사들 눈엔 다친 동료를 보호하려는 전진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론 누구든 안쪽으로 손을 넣으려면 먼저 세라 방패에 걸리게 만드는 각이었다.

다른 그림자 둘은 정면 말뚝을 흉내만 내고 빠르게 흩어졌다. 적은 말뚝이 부러지는 소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정면으로 시선을 모으는지, 안쪽 통로를 비우는지 확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오른쪽 자루 들어. 가운데 두지 마.”

내가 크게 부르자 병사 셋이 동시에 돌아봤다. 일부러였다. 그 순간 안쪽 그림자 하나가 봉함 상자 쪽으로 몸을 낮췄다. 예상한 대로였다.

“브론, 아래.”

“막는다.”

브론이 보강재 다발을 옆으로 무너뜨리듯 밀어 길목 폭을 확 줄였다. 그림자는 세라 방패와 보강재 사이에 몸이 끼며 반 박자 늦었다. 리에트의 두 번째 화살이 갈고리를 튕겨 냈고, 금속은 돌계단 끝을 울리며 굴렀다. 미리엘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숨을 삼켰다.

“거기 밑이에요.”

갈고리가 떨어진 자리 아래였다. 기록 인계 통로와 경사면이 맞물리는 돌 밑에서 얇은 공명이 올라왔다. 적은 우연히 손을 뻗은 게 아니었다. 어디가 울리는 축인지 알고 그 자리에 봉함 상자와 기록띠가 겹치길 기다렸다.

세라가 방패를 눌러 밀었다. 그림자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균형을 잃었다. 병사 하나가 칼을 들이밀려는 찰나, 나는 먼저 통로를 가리켰다.

“사람 쫓지 마. 이 선부터 막아.”

그 병사는 내 얼굴과 세라 방패를 번갈아 본 뒤 칼끝을 적이 아니라 통로 쪽으로 돌렸다. 뒤늦게 파견 지휘관 쪽에서 정면 유지라는 고함이 날아왔지만, 이미 늦었다. 병사 둘이 다른 둘을 끌어 통로 앞에 섰고, 상자 든 손과 사람 발을 갈라 세우기 시작했다.

정면 말뚝선 앞에선 다른 그림자 둘이 짧게 흔들고 물러났다. 지나치게 깨끗했다. 놈들은 말뚝 하나를 뽑거나 병사를 눕히는 데 관심이 없었다. 어디를 흔들면 우리가 어떤 순서로 뛰는지 보기만 하면 됐다.

나는 넘어지려던 봉함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안에는 붉은 끈으로 감은 기록띠와 얇은 납패, 서로 다른 손의 밀랍 셋이 칸을 나눠 붙어 있었다. 군수 창고 검인, 현장 사제 봉함, 중앙 인계 대기. 물건 하나가 어디서 어떻게 말을 갈아입는지 보여 주는 줄이었다.

“놈들, 이 전초를 무너뜨리러 온 게 아니네.” 브론이 못통 위에 발을 올린 채 말했다. “누가 뭘 숨기는지 읽으러 왔지.”

세라는 방패 끝을 눈바닥에 내려 꽂았다.

“그리고 우리가 뭘 먼저 지키는지도.”

나는 대답 대신 납패 바깥 줄을 읽었다.

`서사면 3차`

`개방 전`

북방 전초도 남부 종루와 같은 절차 언어로 이 흔들림을 적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어난 작은 교전이 아니라 이미 앞선 반응 둘과 같은 줄에 묶어 두는 말투였다. 전초의 겉모습은 요새였지만, 안쪽은 여전히 문장과 물건을 같이 가르는 분류소였다.

***

임시 보고실은 감시탑 아래 빈 보급칸을 급히 비워 만든 곳이었다.

젖은 외투 냄새와 밀랍 냄새, 얼다 녹은 물자국, 급하게 닦은 긴 책상 결이 뒤엉켜 있었다. 창가 쪽 밝은 자리 중앙엔 세라가 세워졌고, 파견 지휘관은 그녀 오른편에 섰다. 현장 사제는 왼쪽 끝에서 봉함 상자와 기록띠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군수병은 젖은 장부를 펼치려다 자꾸만 사제 손에 막혔다. 나는 그 바깥, 벽 쪽 반그늘에 서 있었다.

그 자리 배치만으로도 첫 줄이 어떻게 써질지 보였다.

세라는 전초를 지켜 낸 기사단의 얼굴.

파견 지휘관은 그 얼굴을 운영한 현장 책임자.

사제는 원본 접근을 허락하거나 막는 손.

군수병은 파손과 수량을 아는 손이지만 가장 약한 자리.

나는 그 아래로 밀어 넣기 쉬운 보조 인력.

“우선 병사 사기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파견 지휘관이 서기에게 말했다. “전초 병사들이 기억해야 할 건 누가 앞줄에 섰는가예요. 벨로네 양 이름이 첫 줄에 올라가야 다음 증원도, 다음 보고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일부러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북방 병사들이 세라 이름 아래 모이면 공적 줄은 기사단 쪽에 남고, 현장 책임도 결국 자기 손아귀로 들어온다. 저 사람은 진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떤 진실이 위로 올라가야 자기 권한이 덜 흔들리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방책선 전열 유지, 벨로네 양의 전면 대응, 북방 병력 이탈 없음.”

그가 붓끝을 따라 천천히 덧붙였다.

“그 줄부터 적으시오.”

군수병이 곧장 반발했다.

“이탈 없음이 아니라, 창고 뒤 경사와 기록 인계 통로 재배치가 있었기 때문에—”

“세부 실무는 다음 줄.”

사제는 더 노골적이었다.

“`개방 전` 표식과 원본 분리 여부는 여기서 적지 마십시오. 상위 확인 전 문장 노출은 규정 위반입니다.”

나는 책상 위 초안을 내려다봤다.

`벨로네 기사후보의 전면 유지 아래 서사면 방책선 안정 확보.`

`파견 지휘선의 즉시 재정비 명령으로 전초 방어 성공.`

`보조 인력 및 군수 병력 협조 하 경미 손실.`

보조 인력.

방금 전까지 병사 셋이 어디를 비워야 하는지 내 쪽을 보고 물었다. 누가 어떤 상자를 세우고 어떤 칸을 비워야 하는지, 누구 발을 먼저 멈춰야 하는지, 모두 내 입을 기다렸다. 그런데 종이 위에선 그게 전부 협조 아래 들어간다.

세라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턱이 굳었다.

“이 문장,” 세라가 낮게 말했다. “안쪽 통로 재배치가 빠졌습니다.”

파견 지휘관은 곧장 부드러운 말투를 꺼냈다.

“그건 내부 운용 사항이오. 북방 병사들 앞에선 그림이 단순해야 합니다. 누가 버텼는지, 누가 서 있었는지, 누가 전초를 붙잡았는지. 복잡한 말은 사기를 깎을 뿐이오.”

그는 세라가 선 창가 쪽 밝은 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두드렸다. 창문 밖 마당에선 아직도 젖은 망토를 짠 병사들이 그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 사람 계산은 단순했다. 북방 병사들 눈에 먼저 남을 이름이 벨로네여야 기사단 줄이 흔들리지 않고, 그 아래 붙는 보고권도 자기 손에 남는다. 창고 뒤 경사, 기록 인계 통로, 반응선 박자 같은 말은 전초를 실제로 살렸어도 바깥 병사들 앞에선 얼굴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지휘관은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사실 가운데 어떤 줄을 위로 올려야 자기 권한과 다음 증원선이 덜 흔들리는지 고르고 있었다.

서기는 그 계산을 너무 익숙하게 따랐다. 붓끝은 세라 이름을 적을 때만 잠깐 멈췄고, `보조 인력`이라는 말을 적을 때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벽에 기대 선 병사 하나가 그 줄을 읽다 말고 고개를 돌렸지만, 누구도 그 작은 망설임을 붙잡지 않았다. 보고실 안에선 이미 싸운 순서가 아니라 적을 문장 순서가 우선이었다. 저 한 줄이 올라가면 북방 전초를 지킨 얼굴은 세라로 고정되고, 안쪽 배치와 반응선 판독은 다음부터 설명이 필요한 부차 항목이 된다. 파견 지휘관은 바로 그 지점을 노리고 있었다.

“단순하게 적으면 틀린 보고가 됩니다.”

현장 사제가 눈을 들었다.

“틀렸다는 표현은 과합니다. 핵심은 전초가 버텼다는 사실 아닙니까.”

군수병이 젖은 장부를 두드렸다.

“버틴 이유가 있는데 그걸 빼면 다음엔 같은 자리 또 뚫립니다.”

“그 다음 판단은 상위에서 합니다.” 사제가 잘랐다.

브론이 벽에 기대선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 또 상위에서 사라지겠지.”

사제 눈이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들릴 만큼 했는데.”

긴장선이 당겨졌다. 그러나 전장 같은 긴장은 아니었다. 여기선 칼보다 문장이 먼저 사람을 자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리치고 싶었다. 누가 길을 읽었는지, 누가 병사 발과 상자 발을 갈랐는지, 누가 `개방 전` 표식을 먼저 집어냈는지 전부 적으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 봐야 결과는 뻔했다. 공적에 집착하는 하위 보조. 반응자 특이성으로 판단 흐림. 영웅 서사에 비협조적 태도. 나한테 붙일 이름만 늘어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책상 가장자리 초안에서 빠진 줄을 눈으로 먼저 외웠다. 안쪽 통로 재배치. 반응선 판독. 물건과 사람 동선 분리. 저 셋이 빠진 채 올라간 보고는 나중에 조사권 제한과 인계 명령의 근거가 된다. 오늘의 승전 문장이 내일의 족쇄가 된다.

승전 보고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저 종이 한 장이면 누가 다음 조사선에 동행할 수 있는지, 누가 기록칸 문턱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지, 어떤 상자가 `현장 보전`으로 남고 어떤 상자가 `중앙 인계`로 바로 올라가는지가 함께 정해진다. 내 이름이 `보조 인력 협조` 아래로 눌린 채 올라가면, 다음엔 내가 줄을 읽을 자리에 서 있어도 공식 문장 하나로 밀려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보다, 나중에 저 문장을 뒤집을 증거 순서를 먼저 손에 쥐는 일이었다.

세라는 그걸 이미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보고서를 뒤엎지 않았다. 대신 한 줄을 비틀어 넣었다.

“적어도 `기록 인계 통로 유지`는 들어가야 합니다.”

파견 지휘관이 미간을 좁혔다.

“벗어난 세부입니다.”

“제가 본 핵심입니다.”

잠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라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지만 한 줄은 남겼다. 얼굴로 세워진 사람이 어떤 단어를 허락하느냐에 따라 뒤 문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녀도 이제 알고 있었다.

***

보고실 옆에서 물건을 다시 나눠 적는 탁자는 더 추웠다.

문이 반쯤 열린 탓에 바람이 들이쳤고, 젖은 장갑과 풀린 붕대, 다시 봉함해야 할 상자들이 좁은 탁자 둘레에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멀리선 다친 병사 교대 소리와 못통 끌리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방 안 문장은 이미 승전 쪽으로 굳어 가는데, 바깥 실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리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밀랍 배열을 보고 있었다. 브론은 갈고리 편날이 놓인 상자 곁으로 몸을 기울였고, 리에트는 창문 틈으로 바깥 눈밭을 훑었다.

“빠졌네.”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뭐가.”

“발자국 무게.”

그녀는 창문 밖 사면을 턱짓했다.

“다섯이었는데 눈 눌림이 가벼워. 전투 장비 다 갖춘 놈들 무게가 아니야. 오래 버티는 편제도 아니고.”

브론이 갈고리를 뒤집었다.

“이 합금도 이상해. 날은 단단한데 손잡이 매듭이 얇아. 오래 들고 싸우는 물건이 아니라 짧게 걸고 끊고 빠지는 용도다.”

미리엘이 밀랍 가장자리의 검은 재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것도 훼손용이 아니에요. 반응 자리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데 쓰는 종류예요. 상처보다 울림 확인 쪽에 가까워요.”

나는 그 셋 말을 한 줄로 묶었다. 가벼운 발자국. 경량 회수 도구. 흔적 증폭재. 다섯 그림자는 전초를 먹으러 온 부대가 아니었다. 짧게 치고, 우리가 무엇을 먼저 지키는지 읽고, 다음에 더 큰 손이 어디를 찌르면 되는지 기록하는 시험 부대였다.

세라도 결국 보고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갑게 걸어 나왔다.

“내 이름이 너무 크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이름은 너무 작고.”

“종이에서 싸워 봐야 지금은 이겨도 진다.”

“알아.”

이번엔 세라도 바로 인정했다.

“내가 저 자리에서 더 밀면, 다음부터는 널 기록칸 근처에도 못 오게 막을 거야. 내 이름은 남고 네 줄은 끊기겠지.”

나는 봉함 상자 안쪽에서 기록띠 하나를 더 꺼냈다. 사본으로 돌리기 전 잠깐 흘러나온 줄이었다.

`냉각 지연`

`인계 보류`

`원본 별도`

`남문식 표기 준용`

남부 종루의 말투가 북방 전초 기록 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겨야 할 건 따로 남겨.” 세라가 내 손의 기록띠를 보며 말했다. “저 문장, 저 표식, 저 손 순서. 공식 보고에 못 쓰면 우리 메모에라도.”

브론이 갈고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나도 한 줄 추가하지. 이 장비, 본대 물건 아니다. 짧게 걸고 읽고 빠지는 놈들 세팅이야.”

“후퇴 폭도 이상해.” 리에트가 바로 받았다. “본대를 숨긴 게 아니야. 애초에 본대가 아니었어.”

미리엘은 젖은 붕대를 접어 한쪽으로 밀어 두며 말했다.

“그럼 다음엔 더 정확히 들어오겠네요. 오늘 우리 반응을 봤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뚝선만 건드리진 않을 거야. 통로랑 경사를 같이 흔들겠지. 그리고 우리가 원본부터 챙긴다는 것도 알았을 거고.”

세라가 문턱에 기대 둔 방패를 바로 세웠다.

“좋아. 그럼 내 이름이 위에 올라가는 동안 네 줄은 밑에서 먼저 남겨.”

체념이 아니었다. 분노를 쓸 자리를 바꿔 잡는 말이었다.

***

해 질 녘 마지막 조사선은 짧고 차가웠다.

우리는 서사면 아래 눈사면까지 직접 내려가 보진 못했다. 대신 리에트가 시야를 잡고, 브론이 끊어진 갈고리 끈과 눈 눌림을 보고, 미리엘이 검은 재가 흩어진 방향을 짚었다. 나는 셋이 가져온 결과를 다시 겹쳐 봤다.

발자국 간격은 짧았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오래 싸우는 병력의 간격이 아니었다. 눈 눌림은 깊지 않았고, 선회 폭은 이상할 만큼 일정했다. 다섯이 모두 같은 지점까지 내려와 싸운 게 아니라, 둘은 정면을 흔들고 둘은 안쪽 길을 읽고 하나는 끝까지 뒤에서 관측만 했다는 뜻이었다.

브론이 갈고리 날을 손등에 대 보이며 말했다.

“날만 세고 손잡이는 오래 못 버텨. 전투 장비면 이런 식으로 안 만든다. 끊고 버리는 공구야.”

“흔적도 일부러 남겼어.” 리에트가 덧붙였다. “숨을 생각이 없는 후퇴선이야. 우리가 따라 읽는지까지 보겠다는 거지.”

미리엘은 검은 재를 담은 천 조각을 펼쳤다.

“반응선 주위에서만 더 짙어요. 무너뜨리려고 뿌린 게 아니라, 어디서 울림이 커지는지 확인하려고 쓴 거예요.”

나는 그 세 줄을 조용히 이어 붙였다.

“본대가 아니야.”

아무도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라그나드가 전초를 먹으려고 보낸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줄을 바꾸는지 보려고 보낸 손이야. 다섯이면 충분했겠지. 병사를 죽일 필요도 없고, 상자 하나 훔칠 필요도 없어. 우리가 병사부터 지키는지, 물건부터 감추는지, 원본부터 챙기는지만 읽어 가면 되니까.”

세라가 눈밭 아래 어두워지는 능선을 보며 말했다.

“그럼 오늘 승전 보고는 더 웃기네.”

“왜.” 브론이 물었다.

“이겼다고 적는 순간, 우린 적이 원한 대로 행동한 것까지 지워 버리잖아.”

맞는 말이었다. 공식 보고는 `전초 방어 성공`이란 한 줄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이긴 만큼 읽혔다. 저 다섯 손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지키고, 누구 목소리에 병사가 먼저 몸을 돌리고, 어느 칸을 비우기 위해 누굴 앞으로 세우는지 전부 보고 갔다.

더 골치 아픈 건 북방 전초 안에서도 그 읽힘이 이미 다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병사들은 세라가 선 앞줄을 먼저 기억할 테고, 군수병은 상자와 수량표가 어디서 흔들렸는지 기억할 것이며, 사제는 원본을 누구 손에서 떼어 냈는지만 기억하려 들 것이다. 같은 교전이 셋으로 갈라진 채 위로 올라가면, 다음 공격 때 각 줄은 또 제일 자기 것부터 지키려 든다. 그래서 우리가 별도 메모를 만드는 건 기분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충돌에서 모두가 같은 순서를 떠올리게 만들 최소한의 정본을 붙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필요한 건 분노보다 정본이었다.

***

숙영칸 가장 안쪽 좁은 탁자 위에 공식 보고 사본과 우리 메모가 나란히 놓였다.

왼쪽 종이엔 `서사면 방책선 안정 확보`, `벨로네 기사후보 전면 유지`, `파견 지휘선 즉시 재정비`, `보조 인력 협조`가 적혀 있었다. 오른쪽 종이엔 내가 새로 적은 줄이 놓였다.

`적 목표: 사람 살상 우선 아님. 기록 인계 통로 / 봉함 상자 / 반응선 겹침 확인 우선.`

`적 편제: 다섯. 정면 흔들기 둘, 안쪽 회수 둘, 관측 하나.`

`우리 반응: 세라 시선 고정, 브론 하중 전환, 미리엘 박자 비움, 리에트 도구 손 절단, 중앙 통로 비움.`

`획득 표식: 서사면 3차 / 개방 전 / 남문식 표기 준용.`

`판정: 본대 아님. 소규모 시험 부대.`

`다음 대응: 세라 앞줄은 병사 시선 고정, 브론은 경사 하중 전환 유지, 미리엘은 둘째 끝 박자 칸 선비움, 리에트는 도구 든 손 우선 절단.`

`보전 원칙: 병사 후송선 / 기록 보전선 / 반응 칸을 한 홈에 겹치지 말 것.`

`우선순위: 사람 이동 / 원본 보전 / 반응 박자 순서 고정.`

세라는 공식 보고 첫 줄에 박힌 자기 이름을 한참 내려다봤다.

“좋아.”

그녀가 결국 말했다.

“다음엔 저 이름을 그냥 안 쓰진 못할 거야. 하지만 저 이름 뒤로 뭘 숨길지는 내가 고른다.”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얼굴값도 그렇게 쓰면 조금 낫지.”

미리엘은 공명 칸을 그려 둔 작은 지도를 옆에 덧붙였다.

“다음엔 둘째 끝부터 비워야 해요. 오늘은 그걸 확인당했으니까.”

리에트는 적 후퇴선을 표시한 사선 둘을 그었다.

“그리고 저 가운데 관측 손. 다음에도 올 거야. 아마 더 뒤에서.”

나는 그 메모 아래 마지막 줄을 더 적었다.

`다음 충돌 예상: 말뚝선 단독 교란 아님. 경사 / 기록 통로 / 둘째 끝 박자 칸 동시 압박.`

펜끝이 잠깐 멈췄다. 그 아래엔 더 짧은 문장을 남겼다.

`공식 보고보다 파티 기록을 우선 보관.`

나는 메모 아래에 작은 도식까지 덧붙였다. 서사면 말뚝선 앞엔 세라 방패 표식 하나, 창고 뒤 경사엔 브론의 짧은 받침 둘, 기록 통로 모서리엔 미리엘의 박자 칸 셋, 감시탑 아래엔 리에트 시야선 하나.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화살표를 그려 병사 후송선은 왼쪽 고랑 뒤로, 봉함 상자는 벽 안쪽으로, 원본 표식은 가운데 홈을 건너지 않게 적었다. 글만 남기면 다음 교대 병사가 또 자기 식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리와 순서를 함께 남기면, 적어도 누가 무엇을 먼저 막아야 하는지는 덜 흔들린다. 다음 공격은 힘보다 정밀함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우리 대응도 용감함보다 순서가 먼저였다.

세라는 그 도식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기 이름이 적힌 공식 보고 쪽을 접어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파티 메모 맨 끝에 짧게 한 줄을 덧붙였다. `앞줄은 보여 주되, 안쪽 줄은 빼앗기지 말 것.` 병사들이 저 말을 그대로 읽을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다섯은 다음 충돌 직전에 다시 같은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그 아래에 `둘째 끝이 울리면 사람보다 상자를 먼저 벽으로 세우고, 기록 통로엔 빈 칸 하나를 반드시 남길 것`이라고 한 줄 더 적었다. `같은 줄을 두 번 설명하지 말고 바로 자리부터 바꿀 것`이라는 메모도 덧붙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거짓 승전 보고 위에라도, 우리가 먼저 붙인 이름 하나는 남는 셈이었으니까.

밖에선 야경 교대 발소리와 못통 끌리는 마찰음이 서사면 쪽으로 흩어졌다. 젖은 장갑에서 녹은 물이 탁자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졌고, 방금 붕대를 갈아 맨 병사가 문턱 밖에서 짧게 신음했다. 오늘 이 메모는 조용한 방에서 정리한 글이 아니었다. 피로와 젖은 천, 밀랍 냄새와 늦은 교대 속에서 간신히 붙여 둔 정본이었다.

북방 전초가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내 이름이 빠진 보고서를 보는 순간 배 안쪽이 서늘하게 비어 갔으니까. 하지만 그 비어 있는 자리를 감정으로만 채우면 결국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름을 빼앗긴 분노를 그대로 내보이는 순간, 다음엔 기록칸 출입부터 막힐 것이다.

그러니 삼켜야 했다.

삼키되 잊지 않는 쪽으로.

나는 적 표식이 적힌 납패와 공식 승전 초안을 나란히 놓고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왼쪽은 우리가 이겼다는 문장.

오른쪽은 적이 무엇을 읽고 갔는지 남긴 흔적.

둘을 겹쳐 보자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라그나드 본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올라온 건 전초를 무너뜨릴 부대가 아니라, 우리 전열의 박자와 우선순위를 읽어 갈 소규모 시험 부대였다.

즉, 다음엔 더 깊게 들어온다.

우리가 오늘 숨긴 줄, 오늘 비운 칸, 오늘 끝내 놓치지 않은 원본을 정확히 겨냥해서.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메모를 접어 소매 안쪽에 넣었다. 공식 보고가 내 이름을 지우더라도, 다음엔 적어도 우리가 우리 줄 이름을 먼저 붙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북방 전초도, 라그나드의 손도, 중앙으로 올라갈 승전 문장도 전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다시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붙은 거짓 이름은, 칼보다 오래 사람을 묶는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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