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검은 용광 아래로

두 번째 하강 문턱 아래는 불꽃보다 검인의 박자가 먼저 살아 있었다.

정면 아래로 둥글게 휘어 내려간 사다리형 레일이 보였다. 왼쪽 벽에는 사람 어깨 높이마다 잘린 표찰 못구멍이 줄지어 있었고, 오른쪽 바닥에는 짐받침 홈과 목패 홈이 서로 다른 깊이로 겹쳐 있었다. 아래쪽 공기는 뜨겁기 전에 눅눅했다. 젖은 쇳가루, 눌린 피, 오래 말리지 못한 장부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용광로가 살아난 냄새가 아니었다. 사람을 세우고, 짐을 붙이고, 문장을 늦게 얹던 절차가 아직 식지 않은 냄새였다.

문턱 뒤에는 왕국 사절과 북방 실무자가 같이 멈춰 섰다. 둘 다 아래를 본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챙길지 보고 있었다. 세라는 이미 그 사이를 잘랐다. 왼발은 바깥 턱, 오른발은 안쪽 좁은 홈에 걸고, 검은 칼집을 비스듬히 세워 뒤에서 내려오는 손이 먼저 허락을 구하게 만들었다. 브론은 레일 왼편으로 몸을 낮췄고, 미리엘은 가슴 앞의 젖은 장례 줄 조각과 끝번호 목패 줄을 서로 닿지 않게 다시 갈랐다. 리에트는 불빛이 아니라 레일 아래 빈틈을 듣고 있었다.

나는 손을 짧게 들었다.

"세라, 뒤 문턱. 브론은 기준판. 미리엘은 문구와 장부. 리에트는 아래 박자. 나는 병목 본다."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발끝만 한 치 더 안으로 밀었다. 뒤에서 내려오던 사절의 숨이 한 번 끊겼다. 북방 실무자는 가죽통을 품 쪽으로 당겼다. 둘 다 이 아래에서 사람이 다치기 전에 자기 문장이 먼저 살아날지 재고 있었다. 세라가 등을 돌린 채 그 계산을 끊어 놓았다.

브론은 레일 안쪽의 얇은 눈금 앞에서 멈췄다. 검댕 밑에 가려진 결은 숨지 않았다. 금속을 읽는 손은 글자보다 눌림을 먼저 안다. 그는 무릎을 굽혀 손등으로 눈금 가장자리를 훑었다. 한 칸마다 끝이 다르게 잘려 있었다. 바깥 작업선에서 쓰는 멈춤각이 아니었다. 한 번 잡은 높이를 다시 재고, 다시 맞추고, 다시 넘기는 중심 규격선이었다.

"카르트 계열이다."

말은 짧았다.

"끝에서 비틀어 멈추는 쪽이 아니라... 중심 규격을 다시 재는 눈금이 남아 있어."

브론의 목소리가 끝에서 낮아졌다. 바깥에 남은 부산물이 아니었다. 이 심연 중심부까지 자기 집 규격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손을 떼지 못했다. 떼면 쇳조각 하나였다. 붙들면 자기 가문 이름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리에트는 레일보다 더 아래를 듣고 있었다. 활은 올리지 않았다. 고개만 아주 조금 기울인 채 귀끝을 떨었다.

"망치가 아니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세 번 재고 한 번 넘긴다. 올리는 줄보다 다시 맞추는 줄이 먼저 돌아가."

그 말이 끝나자 아래에서 넷째 박자가 억지로 끊겼다. 누군가 자기 손을 감추려 멈칫하는 소리였다. 리에트는 활을 들지 않고도 그 멈춤이 난 방향을 표시했다. 오른쪽 아래, 보고 철편 승강 홈 쪽이었다.

미리엘은 손안 물증을 다시 나눴다. 젖은 종이는 먼저, 단단한 목패는 뒤, 부서지는 출입표 껍질은 맨 바깥. 그녀는 눈앞의 어둠보다 손안의 순서를 먼저 지켰다. 물증을 모으는 손이 아니라, 물증끼리 서로를 망치지 않게 살리는 손이었다.

"아래에서 맞대면 더 잘 읽힐 거예요."

레일은 원형으로 휘어 중심 작업대로 이어졌다. 첫 꺾임에서 허리를 접자, 잘린 표찰 못구멍이 바로 얼굴 옆으로 지나갔다. 못을 뽑은 자국은 둥글지 않았다. 서둘러 비틀어 뜯은 자리처럼 가장자리가 바깥으로 일어 있었다. 오른쪽 목패 홈은 발끝이 아니라 무릎 앞까지 닿아 있었다. 사람을 세우고 고개를 숙이게 해야만 읽히는 높이였다. 길이 사람을 위해 놓인 게 아니었다. 몸을 어느 높이로 꺾어야 손바닥 홈과 번호판이 한 번에 맞는지 먼저 정한 길이었다.

중심 작업대가 드러났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검은 봉함판이었다. 둥근 받침 위에 놓인 판은 쇳덩이처럼 무거워 보였지만, 가장자리만 유난히 더 닳아 있었다. 그 옆에는 허리 높이 지지틀, 뒤집힌 운반차, 젖은 장부 판, 족쇄 고리, 반쯤 눌린 가죽 완충대가 반원형으로 흩어져 있었다. 병기 공방이라면 망치와 모루가 먼저 보여야 했다. 여기서는 달랐다. 사람을 어디에 세우고, 짐을 어느 높이에 받치고, 이름 없는 표를 어느 칸으로 밀어 넣을지가 중심이었다.

둥근 받침 둘레에는 반달형 닳음이 남아 있었다. 발을 반걸음 비틀어 세웠을 때만 생기는 자국이었다. 지지틀 안쪽에는 허리끈이 여러 번 스쳐 지나간 매끈한 선이 있었다. 작업 손이 서는 자리보다 붙잡힌 사람이 버티던 높이가 더 또렷했다.

작업대 뒤 벽에는 얕은 선반 셋이 박혀 있었다. 맨 위 선반은 손이 닿기 어렵게 높았고, 아래 둘은 허리와 무릎 높이에 걸쳤다. 위쪽에는 마른 먹가루가 많이 남아 있었고, 아래 둘에는 젖은 종이를 여러 번 올렸다 뗀 눌림이 겹쳤다. 보고 철편은 위에, 사람 손에서 바로 옮겨 온 장부와 목패는 아래에. 심연 아래 작업선은 사람을 세우는 칸과 기록을 눕히는 칸을 같은 벽에 붙여 놓고 돌렸다.

선반 사이엔 손바닥 너비만 한 작은 나무턱도 남아 있었다. 누가 서둘러 보고 철편을 빼 가도 아래 장부와 목패가 같이 따라오지 않게 막는 턱이었다. 위쪽 세력은 그 턱을 보면 보고서만 들고 빠져나갈 길을 찾을 것이고, 북방은 아래 장부만 빼내 재심표를 붙이려 할 것이다. 둘 다 사람 이름을 다시 뒤로 미루는 길이었다. 나는 그 턱과 세라가 막은 문턱을 한 번에 보았다. 우리가 지금 막는 건 적 한 명이 아니라, 증거를 둘로 갈라 자기 문장에 붙이는 손들이었다.

바닥의 배수 홈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물만 빠진 홈이 아니었다. 검은 먹이 한 번, 붉게 마른 자국이 한 번, 회빛 쇳가루가 한 번 층으로 남아 있었다. 피를 닦고, 먹을 덮고, 그 위에 쇳가루를 흩어 순서를 감춘 자리였다. 미리엘이 그 층을 보자 손안 목패 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기록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네요."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사람을 묶는 칸 옆에서 바로 줄을 다시 적었어요."

세라는 그 말을 듣고 작업대와 뒤 통로 사이 빈칸을 다시 재었다. 검을 뽑지 않고도 어느 길이 가장 위험한지 먼저 보았다. 발끝이 둥근 받침 바깥 둘레를 훑었다. 반걸음만 잘못 디디면 배수 홈에 미끄러지고, 그러면 봉함판 앞에서 몸이 열린다. 세라는 바로 그 홈 바깥에 발을 박았다. 누가 달려들든 미끄러지는 쪽은 그녀 뒤가 아니라 상대가 되도록 만드는 자리였다.

브론은 봉함판보다 지지틀 밑면과 받침 옆 고정못을 먼저 훑었다. 손에 쥔 도장 절반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반쪽이 어디까지 같은 규격으로 이어지는지 읽고 있었다. 그는 검게 잠긴 못머리 하나를 손톱으로 긁고 낮게 혀를 찼다.

"못도 카르트식이야. 물건 납품만 한 게 아니었어. 설치 기준까지 들어왔어."

그 말엔 자랑도 변명도 없었다. 자기 집 이름이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더는 숨겨 말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못머리 아래 얕게 벌어진 틈을 보고 멈췄다. 누군가 한 번 이 고정을 풀려다 끝까지 못 풀었다는 자국이었다. 박은 손과 빼려던 손이 같은 자리에서 다퉜다.

작업대 바깥 적치칸으로 내려서자 바닥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발뒤꿈치만 깊게 눌린 자리, 허리를 접고 물건을 받칠 때 닿는 무릎 자국, 목패 줄이 젖은 채 끌린 가는 선, 쇳가루보다 검은 먹이 오래 남은 틈. 병기보다 사람부터 갈아 넣은 현장은 언제나 바닥이 먼저 안다. 바닥에는 짐 무게가 만든 넓은 끌림보다 좁은 발목 간격이 여러 번 겹친 자국이 더 많았다. 끌고 간 자리가 아니라 서 있는 사람을 같은 간격으로 다시 세웠던 자리였다.

운반차 두 대가 뒤집혀 있었다. 바퀴 하나는 부러져 옆으로 누웠고, 다른 하나는 차축째 검게 눌어붙었다. 안쪽 가죽 완충대에는 사람 옆구리 높이와 비슷한 눌림이 여러 겹 겹쳤다. 리에트가 활끝으로 가죽 가장자리를 살짝 들췄다. 쇠판 마찰 자국보다 손톱으로 긁은 얕은 선이 더 많았다. 버티는 동안 생긴 흔적이었다.

"병기 운반이면 하중이 아래로만 눌러."

그녀가 말했다.

"이건 옆을 받쳤어. 몸이 흔들리지 않게 세우던 자국이야."

운반차 바닥에는 쇠사슬보다 얇은 끈 자국도 남아 있었다. 발목 하나, 손목 하나, 허리 하나. 사람을 짐처럼 묶되 죽이지 않고 다음 칸으로 넘기기 좋은 높이였다. 묶는 사람은 달라도 규격은 같았다.

미리엘은 젖은 장부 판을 뒤집었다. 표면은 검게 번졌지만 안쪽에는 아직 읽히는 줄이 남아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대신 `출신 공방`, `작업 줄`, `남은 손 수`가 반듯했다. 그 밑칸에는 `지지틀 대기`, `검인 이동`, `끝번호 재기입` 같은 짧은 실무 칸도 끊긴 채 박혀 있었다. 사람 이름을 적는 칸은 먹이 먼저 번져 사라졌는데, 줄과 손 수를 적는 칸은 이상할 만큼 끝까지 남아 있었다.

"동원 명단이에요."

미리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름을 쓰기 전에 줄을 적었어요. 아니, 이름을 지운 뒤 줄만 남긴 쪽에 가까워요."

그녀는 장부 귀퉁이를 손톱으로 아주 조금 들췄다. 마른 먹 아래로 더 오래된 획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있었다. 나중에 그 위를 눌러 죽였다.

"여긴 사람을 숨긴 게 아니에요. 순서를 바꾼 거예요. 누구인지보다 어느 칸에 세울지가 먼저였어요."

장부 맨 아래는 먹이 번져 거의 사라졌지만 한 줄은 끝까지 남았다. `카르트 작업열 직계 보류.`

브론의 손이 거기서 멈췄다.

그는 장부를 잡지 않았다. 대신 뒤집힌 차축 아래로 손을 넣었다. 검은 쇳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고, 그 틈에서 금지 봉인 합금 찌꺼기와 둥근 금속 조각 하나가 함께 미끄러져 나왔다. 금속 조각 표면에는 반쯤 깎인 도장이 남아 있었다. 카르트 가문 도장 절반이었다. 가장자리는 깨끗하게 부러진 게 아니었다. 억지로 찍으려다 비틀린 흔적과, 찍히기 전에 떼어 낸 흔적이 한 번에 남아 있었다.

브론은 그 조각을 쥔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금속편이 손안에서 작게 떨렸다. 분노인지 쇳가루인지, 아니면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인지 구분되지 않는 떨림이었다.

"완성품 납품이면 이게 여기 남을 리 없어."

그가 겨우 말했다.

"이건... 끝에서 막으려던 줄이야. 적어도 한 번은."

말을 뱉고도 브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기 집 이름을 변명으로 쓰고 싶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도장을 숨기고 싶은 마음과 더 늦기 전에 읽어야 한다는 마음이 같은 손에서 싸우고 있었다.

위 문턱에서 왕국 사절이 한 발 내려오려 했다. 세라가 검집 끝으로 바닥 홈을 눌렀다. 쇠가 짧게 울렸다. 사절의 발이 멎었다. 북방 실무자는 가죽통 마개를 엄지로 밀었다가 다시 닫았다. 둘 다 브론의 손안 조각을 봤다. 누구의 증거로 부를지 먼저 정하려는 눈이었다.

"아직 가져가지 않는다."

내가 위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먼저 어디서 떨어졌는지 본다."

세라는 그 한마디에 더 좁아진 각으로 몸을 틀었다.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벌어 주는 선택이었다. 브론이 이걸 읽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장부와 운반차, 가죽 완충대, 족쇄 고리를 한 줄로 묶어 봤다. 병기가 사람을 잡아먹은 게 아니었다. 사람을 먼저 규격에 맞추고, 그 뒤에 병기를 붙였다. 병기 한 덩이가 아니라 줄 하나가 범죄였다. 누가 어느 칸에 서고, 어떤 번호로 바뀌고, 어떤 손이 마지막에 도장을 찍었는지까지 이어지는 줄이었다.

"증거는 부품보다 이쪽이다."

내가 말했다.

"병기 하나 들고 나가면 변명거리가 생겨. 이건 순서를 못 바꿔."

미리엘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트는 활끝을 내리지 않은 채 운반차 아래와 검은 봉함판 사이 빈칸을 재고 있었다. 세라는 브론의 숨이 달라진 걸 듣고 발 간격을 더 좁혔다. 같은 결론을 각자 다른 감각으로 붙들고 있었다.

중심 작업대 정중앙으로 다가가자 검은 봉함판이 또렷해졌다. 둥근 받침 위의 판 가장자리에는 손바닥이 여러 번 눌린 자국이 있었고, 그 옆에는 인장을 맞추기 좋은 얕은 끼움홈 하나가 파여 있었다. 판 아래 말라붙은 피는 한 점으로 굳지 않았다. 손바닥 홈에서 바깥 홈으로 한 번 흘렀다가 누군가 닦아 낸 듯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한 사람 피만 받은 판이 아니었다.

브론이 손을 올렸다.

봉함판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문구 몇 줄이 미세하게 살아났다. 검은 표면 밑에 눌려 있던 금속 결이 한 줄씩 빛을 받아 떠올랐다.

`직계 봉인열 입회.`

`대체 규격 금지.`

`혈입 전 임시 열람 불가.`

문구는 단정하지 않았다. 첫 줄과 둘째 줄의 깊이가 달랐고, 셋째 줄은 중간 획이 다른 금속으로 메워진 흔적이 있었다. 같은 시기 같은 손이 새긴 글이 아니었다.

미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놀라서가 아니라 겹친 필체를 가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브론 손과 봉함판 경계, 문구 눌림 깊이, 피 자국이 말라붙은 층을 차례로 봤다. 손바닥 홈 가장자리와 끼움홈 안쪽에는 다른 시대의 먹이 두 번 스며 있었다. 하나는 북방 공방식 검은 먹, 다른 하나는 성도 재검 계열의 회빛 먹이었다.

"위에 덧씌운 손이 있어요."

그녀가 손바닥 홈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오래된 북방 작업 문장 위에 뒤늦게 덧댄 손이 겹쳤어요. 여기 마모가 안쪽으로만 몰렸죠. 도장을 찍는 손이 아니라, 억지로 맞춘 뒤 오래 누르던 손이에요. 직계를 감독자로 세우고, 이름을 뺀 줄만 위로 올린 거예요."

브론은 손을 떼지 못했다. 봉함판에 닿은 손바닥 아래에서 자기 가문 도장 절반과 맞는 결이 살아 있었다. 탐욕의 납품 도장이라면 이렇게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다시 이 자리에 세우기 위한 도장, 혹은 끝까지 찍히지 않으려 버틴 손의 흔적이었다. 브론은 이를 악물지 않았다. 대신 손등 힘줄이 하나씩 선명해졌다. 참는 사람의 몸은 입보다 손이 먼저 말한다.

나는 브론에게 설명을 더 요구하지 않았다.

"세라, 더 좁혀. 리에트, 오른쪽 그늘."

세라는 곧바로 한 발 옮겨 판과 뒤 통로 사이를 잘랐다. 바깥턱에 둔 발을 반 치 더 안으로 밀어, 올라오는 사람이 어깨로 밀면 바로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각이었다. 리에트는 활끝을 오른쪽 어둠으로 돌렸다. 첫 시선이 올라오는 자리를 노리는 각이었다. 미리엘은 장부 판과 도장 조각, 목패 줄을 발치에 두지 않고 가슴 가까이 끌어올렸다. 젖은 장부가 쇳가루를 더 먹지 않도록 소매 안쪽 천으로 감쌌다.

그때 아래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병기고를 보러 왔나."

낮고 눌린 목소리였다. 사람 귀보다 금속판이 먼저 진동하는 목소리였다.

"아니면 네 집 이름이 어디서 잘렸는지 보러 왔나, 브론 카르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높낮이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더 아래 작업심 어딘가에 있었다. 직접 올라와 작업대를 빼앗으러 오지 않았다. 우리가 어느 쪽을 먼저 살리는지 끝까지 보겠다는 태도였다. 그의 말은 조롱이라기보다 재는 소리였다. 어떤 증거에 먼저 손을 뻗는지, 누구를 먼저 지키는지, 누가 자기 이름 앞에서 무너지는지 하나씩 재겠다는 소리였다.

도리안의 말이 끝나자 작업대 아래 세 갈래 통로에서 짧은 움직임이 났다. 병기 틀 잔해가 쌓인 왼쪽이 아니었다. 가운데 검인 레일과 오른쪽 보고 철편 승강 홈 쪽이었다. 정찰하던 손 둘이 그림자처럼 스쳤다. 병기 틀 쪽은 일부러 비워 두고, 손바닥 홈과 보고 철편이 놓일 자리만 먼저 가리려는 움직임이었다.

리에트가 곧장 말했다.

"저쪽도 병기보다 문판을 숨겨."

그녀 활끝이 가운데로 움직였다.

"혈입이랑 도장 붙는 관문이 진짜 병목이야."

가운데 통로 끝에는 검은 문판이 서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비껴 지나갈 폭의 레일 끝, 허리 높이에 맞는 손바닥 홈 하나와 그 옆 얕은 끼움홈 하나가 나란히 파여 있었다. 문판 아래에는 이름칸이 비워진 채 끝번호만 기다리는 좁은 홈 셋이 세워져 있었다. 홈 아래쪽에는 잘린 표찰 못구멍 네 개와 숫자판을 뺐다 끼운 자국이 사선으로 겹쳤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는 둥근 마모가 하나 더 있었다. 누군가 무릎을 세우고 버티지 않으면 생기기 어려운 높이였다. 왼쪽 바닥에는 쇠끝으로 눌러 그은 짧은 세로선 셋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깊고, 두 번째는 얕고, 세 번째는 중간쯤에서 끊겼다. 사람을 세우고, 손바닥을 누르게 하고, 인장을 맞추고, 그다음 번호를 다시 세우는 순서가 문판 하나에 다 적혀 있었다.

브론은 손안 도장 절반을 문판 쪽으로 들어 보았다. 크기가 맞았다. 더 기분 나쁜 건 결까지 맞는다는 점이었다. 억지로 끼우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래 비어 있던 홈이 자기 짝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그 순간 뒤 문턱에서 가죽통 마개가 아주 작게 긁혔다. 북방 실무자가 손가락 하나만 움직인 소리였다. 세라는 보지 않고도 검집 끝을 뒤로 반 치 돌렸다. 마개를 여는 손은 멈췄지만 시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장 홈과 장부 아래줄을 번갈아 봤다. 왕국 사절은 그보다 조금 늦게 위 선반의 보고 철편 홈을 봤다. 둘 다 같은 현장을 보면서 서로 다른 출구를 찾고 있었다.

"둘 다 손 내리지 마."

내가 뒤쪽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한 조각이라도 먼저 빠지면, 나머지는 모두 변명으로 바뀐다."

세라는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한 걸음 더 비스듬히 섰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그녀 어깨와 배수 홈 사이를 지나야 했다. 미리엘은 장부 모서리를 천 안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고, 리에트는 아래 그늘을 겨눈 채 화살깃만 살짝 눌렀다. 우리는 한 물건을 지키는 게 아니었다. 각자가 맡은 칸에서 같은 순서를 지키고 있었다.

세라는 문판 바로 앞, 반걸음 뒤에 붙었다. 브론이 가까이 가면 먼저 맞을 칸은 그녀가 받아내겠다는 자리였다. 리에트는 아래 그늘에서 올라오는 다음 시선을 잡기 위해 왼쪽 허공 한 칸을 비워 두었다. 누가 고개만 내밀어도 화살선이 바로 지나갈 자리였다. 미리엘은 손바닥 홈 안쪽을 살폈다. 마른 자국은 오래된 피와 최근 덧댄 검인 먹이 섞여 생긴 층이었다. 피가 닿는 순서와 번호가 올라가는 순서가 서로 다른 때의 손으로 겹쳐 있었다.

"혈통 자물쇠가 아니에요."

미리엘이 말했다.

"직계를 세워 입회시키는 강제 절차예요. 피만 필요한 것도, 이름만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책임질 손을 판 위에 묶어 놓는 쪽이에요."

그녀는 손바닥 홈 아래를 가리켰다. 아주 얕은 긁힘이 세 줄 나 있었다.

"여기, 손바닥이 닿는 자리 아래로 끈이 당겨졌던 홈이 있어요. 도망 못 가게 잡아 둔 흔적이에요."

브론이 웃지 못한 채 숨을 뱉었다.

"끝까지 안 찍으려 했으면 왜 이런 걸 남겨."

도리안 목소리가 다시 올라왔다.

"안 찍으려 버틴 손이 있었으니까. 다시 잡아다 앉힌 거지."

그 말은 브론보다 먼저 내 피를 식혔다. 위에서는 이름을 지우고, 아래에서는 직계를 세워 피와 도장을 함께 받는다. 거부한 손을 없애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핏줄을 다시 끌고 와 절차를 이어 붙이게 만든다. 장부에서 이름을 죽인 다음, 관문 앞에서는 책임질 몸을 다시 세운다. 여기서 돌아가면 문장 하나는 남길 수 있어도, 저 문판이 어떻게 사람을 붙잡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병기보다 사람을 먼저 굽히는 장치가 여기 있었다.

브론이 물러나면 왕국은 `직계 불응`이라는 말을 붙일 것이다. 북방은 `재심 증거 훼손 우려`를 들고 목패와 장부를 떼어 가려 할 것이다. 도리안은 그 틈에 아래 작업심을 닫고, 이 방을 또 한 번 불탄 잔해로 만들 것이다. 어느 쪽도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조금씩 맞는 말을 따로 들고 나가면, 전체 순서는 사라진다. 나는 그 가능성을 한꺼번에 계산하고 브론 앞에 섰다. 그의 선택을 대신하려는 게 아니었다. 선택이 끝난 뒤 도망칠 길을 내가 먼저 막아야 했다.

위쪽 사절이 다시 입을 열려 했다. 이번에는 세라가 말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검집 끝이 문턱 아래 홈을 탁 눌렀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아래쪽 보고 철편 홈이 같은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사절도 본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공식 입회자는 나중에 부르죠."

사절이 낮게 말했다.

세라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나중이라는 말로 먼저 손대지 마."

북방 실무자는 그 말에 입술을 굳혔다. 그도 불리해졌다. 왕국이 입회를 들고 내려오면 북방은 재심표를 붙이고 싶어질 테고, 둘이 싸우는 동안 사람 이름은 또 맨 뒤로 밀릴 것이다. 미리엘은 그 사이에 목패 줄을 가슴 앞에서 왼쪽 허리 안쪽으로 옮겼다. 치유사 가방 끈을 한 번 더 돌려 물증 위를 덮었다. 겉으로는 붕대와 수약이 먼저 보였다. 위쪽 눈들이 무엇을 빼앗아야 하는지 알아채는 데 한 박자 늦었다.

나는 문판과 브론 손, 미리엘 손안 장부, 세라의 차단선, 리에트의 활끝을 한꺼번에 봤다. 먼저 읽어야 할 건 문을 열지 말지가 아니었다. 왜 피와 인장을 같이 요구했는지, 이 관문이 누구를 어떤 이름으로 다시 묶으려 했는지였다. 브론 한 사람의 수치로 덮기에는 너무 넓고, 나라 하나의 변명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손에 잡히는 자리였다.

"선택은 네가 해."

내가 브론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유는 우리가 같이 붙든다."

브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카르트 가문 도장 절반을 끼움홈 위에 조심스럽게 맞댔다. 금속이 딱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너무 잘 맞아서 오히려 끔찍했다. 오래 기다린 자리처럼, 다시 이 손이 올라오길 알고 있었던 자리처럼 맞았다.

브론은 멈췄다. 손을 뗄 수 있었다. 도장을 주머니에 넣고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문판은 또 다른 누군가의 피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뒤를 보지 않았다. 위쪽 사절도, 북방 실무자도, 아래 어둠 속 도리안도 보지 않았다. 자기 손과 문판 사이 얕은 홈만 보았다.

브론 엄지 끝이 거친 가장자리에 스쳤다. 피부가 얇게 찢어졌다. 피 한 방울이 느리게 맺혔다가 문판 위로 떨어졌다.

붉은 점은 손바닥 홈으로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도장 홈과 손바닥 홈 사이를 잇는 아주 얕은 선을 따라 흘렀다. 누군가 오래전에 칼끝으로만 긁어 둔 것 같은 선이었다. 그 선은 한 번 반원으로 꺾인 뒤 아래쪽 좁은 홈 셋을 스치듯 돌아갔다. 번호를 세우는 홈과 피를 받는 홈이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 피가 그 선을 따라 움직이자 문판 안쪽에서 잠들어 있던 잠금 하나가 짧게 울렸다.

딱.

불꽃보다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모두가 들었다.

세라는 더 앞으로 나섰고, 리에트는 아래 그늘을 겨눴다. 미리엘은 숨을 삼킨 채 문판 안쪽 새겨진 두 번째 줄을 읽으려 눈을 좁혔다. 브론은 손을 떼지 않았다. 도장만이 아니라 자기 피까지 같은 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검은 문판 안쪽 어둠에서 오래 닫혀 있던 틈 하나가 머리카락만큼 벌어졌다. 그 사이로 젖은 설계지 끝처럼 얇은 금속 결이 스쳤다. 틈 안쪽에는 글자라기보다 배치표에 가까운 눌림이 잠깐 떠올랐다. `안쪽 설계열`, `입회 손 수`, `대기 줄 재편`처럼 읽히는 조각들이 번쩍였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문 하나 여는 소리가 아니었다. 안쪽 설계실이 아직 살아 있고, 거기서도 사람 줄을 다시 짜려 했다는 증거였다.

도리안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래 박자가 바뀌었다. 세 번 재고 한 번 넘기던 리듬이 두 번 재고 잠깐 멈추는 쪽으로 달라졌다. 우리가 이 관문을 건드렸다는 걸 아래 작업심이 알아차린 것이다.

보고 철편을 빼 올리던 홈에서 금속이 짧게 긁히고, 왼쪽 병기 틀 잔해 쪽에서는 일부러 소리를 죽인 발 하나가 멈췄다. 도리안 쪽 손들도 이 관문이 단순 잠금이 아니라 안쪽 줄 전체를 다시 여는 열쇠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라는 칼집 끝을 조금 올렸고, 리에트는 화살 한 대를 시위에만 얹은 채 놓지 않았다. 미리엘은 문판 틈에서 떠오른 조각 문구를 입 안으로만 다시 짚고, 문판 안쪽에 새겨진 두 번째 줄을 읽으려 눈을 좁혔다.

브론은 피가 번지는 선을 끝까지 보았다. 그 선이 손바닥 홈에서 끝번호 홈을 스치고 다시 안쪽 설계열 표식 쪽으로 꺾이는 순간, 이 심연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같은 모양으로 다시 깎는 곳이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더는 숨겨지지 않았다.

나는 그 멈춤을 듣고 알았다. 우리가 깨운 건 문 하나가 아니었다. 지워진 이름을 다시 같은 손에 묶는 줄, 그 줄의 첫 매듭이었다.

검은 용광 아래 첫 관문이, 카르트 가문 이름과 브론의 피를 함께 기억해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