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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얼굴과 닫힌 장부

북방 전초는 성문보다 사람을 줄 세우는 손이 먼저 뻗어 오는 곳이었다.

새벽빛은 낮은 성책 위에서 멈춰 있었다. 정면에는 반쯤 열린 목책문, 왼쪽에는 얼어붙은 깃발을 단 감시탑, 오른쪽에는 세 겹 쇠사슬이 걸린 보급 창고가 있었다. 그 사이, 지휘막사 앞 널판으로 된 지도판과 창문 없는 돌집 하나가 서로 마주 보듯 비켜 서 있었다. 수레 바퀴 자국은 성문에서 곧장 창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문턱 앞에서 한 번 멈추고, 기록칸 쪽으로 얕게 꺾인 뒤, 다시 창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그 꺾인 자국을 봤다.

감시탑 아래 지도판.

창고 문 앞 대조 자리.

창문 없는 기록칸.

북방 전초의 중심은 성문이 아니었다. 저 셋이 사람과 물건의 순서를 갈랐다.

우리를 맞으러 나온 병사들도 그걸 숨기지 않았다. 세라 앞쪽 길은 비웠고, 우리 뒤쪽 수레에는 곧장 손을 뻗었다. 종루에서 끌고 온 회수 자루와 천으로 감싼 상자, 브론이 끝까지 묶어 둔 공구 꾸러미, 미리엘이 품에서 떼지 않은 병막 분획 조각을 세라와 같은 줄에 세우지 않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앞줄엔 세라.

뒤줄엔 우리와 짐.

그 사이엔 장부를 든 손.

환대가 아니라 배치였다.

세라는 내리자마자 방패를 왼팔에 붙였다. 쉬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였다. 브론은 수레 손잡이를 놓지 않았고, 미리엘은 얼어붙은 숨을 한 번 삼킨 뒤 창고 표식부터 읽었다. 리에트는 고삐를 넘기면서도 감시탑 위 둘, 창고 처마 밑 둘, 기록칸 문 앞 하나를 차례로 세었다.

“탑 위는 우리 도착 전부터 보고 있었어.”

리에트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낮았다.

“창고 앞 둘은 병사라기보다 문지기야. 검보다 장부로 먼저 막는 쪽.”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전초가 아니라 저울이군. 누구를 앞접시에 올리고 누구를 뒤접시에 숨길지 벌써 재고 있어.”

병사 하나가 세라 쪽으로 다가왔다. 털옷 깃은 가지런했고, 말투는 더 가지런했다. 오래 전부터 외워 둔 문장을 꺼내는 사람 같았다.

“벨로네 경. 파견 지휘관께서 설명실에서 기다리십니다. 먼저 안내를—”

“짐부터 둔다.”

세라가 바로 잘랐다.

병사는 눈을 한 번 굴렸다. 세라가 방패를 내리지 않은 걸 봤고, 우리 쪽 수레가 아직 성문 안쪽 진흙에 멈춰 있는 것도 봤다. 잠깐 굳은 표정 뒤에 다른 문장이 나왔다.

“외부 회수품은 전초 절차상 보급 창고에서 재분류합니다. 상위 확인 전까지 임시 보관입니다.”

재분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눈은 병사 입이 아니라 창고 문 위 표식으로 갔다. 낡은 왕국 군수 표식 옆에 반원 세 개와 짧은 사선이 찍혀 있었다. 종루 안쪽 분획칸에서 본 표기와 닮았다. 크기만 더 컸고, 붓질은 더 거칠었다. 이곳이 북방 군량만 쌓아 두는 창고였다면 저런 표식은 필요 없었다.

미리엘도 같은 쪽을 봤다. 창고 처마 밑 작은 나무상자에 얼룩진 표찰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안정화 전 임시 격리`

미리엘의 손가락이 망토 끝을 말아 쥐었다.

“북방까지 와서도 같은 말이에요.”

치료가 아니라 격리.

안정이 아니라 묶어 두기.

브론이 수레 손잡이를 더 세게 당겼다. 바퀴가 진흙 안에서 짧게 울었다.

“안으로 넣기 전에 뭐부터 바꿀 건데. 수량이냐, 이름이냐, 아니면 주인이냐.”

그때 창고 안쪽에서 군수 서기가 나왔다. 털외투에 잉크 얼룩이 묻어 있었고, 손끝은 장부를 오래 넘긴 사람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허리엔 짧은 칼도 있었지만, 그 칼보다 서류판 끈이 더 닳아 있었다. 북방 전초에서 가장 먼저 사람을 재는 건 검이 아니었다. 장부를 넘기는 손이었다.

“회색 종루 생환 물품 인계 확인입니다.”

그는 우리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제목부터 읽었다.

“파견 지휘관 명의로 재분류 후 보급 창고 보관, 필요 품목은 현장 대응용으로 재배정—”

브론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받아 들었다기보다 끌어내렸다.

“수량표부터.”

“큰 항목만 먼저 보셔도 됩니다.”

“큰 항목에 묻혀 사라지는 게 제일 비싸지.”

브론은 한 줄 훑더니 창고 납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문 위 표기는 반원 셋인데 종이엔 이중 고리로 적혀 있군. 다른 창고 항목을 먼저 끼워 넣은 거냐, 아니면 여기서 이름표를 갈아 붙일 거냐.”

서기의 손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창고 앞 병사 둘도 동시에 멈췄다. 브론은 수량 하나를 두고 버틴 게 아니었다. 저들이 짜 둔 흐름을 늦췄다. 수레가 문턱을 넘기 전, 우리는 아직 물건의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장부 아래쪽을 읽었다.

`외부 반응 물품`

`상위 확인 전 개봉 금지`

`현장 기록 연동 품목 별도 관리`

보급 장부에 기록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창고와 문서가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건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 물건을 본 사람의 말도 같이 묶인다.

창고 문턱 오른쪽에는 못이 세 줄로 박혀 있었다. 위쪽 줄엔 끊긴 봉함끈 섬유가 말라붙었고, 아래쪽 줄엔 새 밀랍이 얇게 번졌다. 안에 들인 상자를 그대로 쌓아 두는 창고라면 저 못은 필요 없었다. 문턱 앞에서 자루를 열고, 줄을 갈고, 표기를 다시 붙인 뒤 들여보낸 흔적이었다. 진흙 바닥도 같은 말을 했다. 말굽 자국보다 장화 앞코 자국이 더 많았다. 수레는 지나간 게 아니라 멈춰 세워졌고, 사람들은 운반보다 대조를 먼저 했다.

미리엘이 서기의 손등에 반쯤 가려진 작은 글씨를 읽었다.

“여기요.”

서기가 종이를 접으려 했지만 늦었다.

“`성흔열 유사 안정화 관련 품목은 임시 격리 후 별도 보고.`”

그 단어가 얼음바람보다 차갑게 들어왔다. 성흔열. 엘레나의 병명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같은 계열로 묶으려는 말이었다. 남부 종루에서 겨우 건져 낸 안정화 문장이 북방 보급 장부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성도 확인 절차가 여기까지 내려왔네요.”

미리엘의 말은 조용했지만 서기의 눈꺼풀이 떨렸다.

브론이 비웃었다.

“군량창고라더니. 사람 병명까지 군수칸에 넣어 두나.”

나는 서기보다 병사들 발을 봤다. 창고 앞 둘은 우리 수레를 보는 척하면서도 기록칸 쪽을 자꾸 곁눈질했다. 저들은 물건을 들이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문턱 앞에서 이름을 갈고, 기록칸 안에서 문장을 고쳐야 비로소 전초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세라도 그걸 읽었다. 그녀는 지휘막사 쪽으로 가지 않았다. 일부러 창고 문 앞 진흙 위에 섰다. 흰 망토 끝이 젖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세라를 밝은 설명실에 세우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라가 가장 지저분한 문턱 앞에 서자, 세라를 앞줄의 얼굴로 쓰려던 계산이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줬다.

“대조 끝나기 전엔 들이지 마.”

세라의 말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충분했다. 병사들 손이 멈췄다.

세라를 북방의 얼굴로 세우고 싶다면, 그 얼굴이 하는 말도 잠깐은 받아야 한다. 저들이 만든 족쇄가 한순간 우리 방패가 됐다.

나는 그 틈을 타 기록칸 쪽으로 걸었다. 문지기 병사가 팔을 뻗었다.

“안은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도착 진술을 적어야 하잖아.”

나는 지휘막사 앞 널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접촉 시각, 회수 경위, 추격 위치. 지금 안 적으면 나중엔 다 다른 시간으로 올라간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먼저 보고 싶은 건 진술서가 아니라 안쪽 벽에 걸린 원본 지도였다.

미리엘이 바로 옆에 붙었다.

“생환 직후 기록은 늦게 쓰면 위에서 순서를 바꿔요. 성도 쪽도 같은 실수를 싫어하죠.”

성도.

생환 기록.

상위 보고.

문지기는 세 단어를 한꺼번에 듣고 팔을 완전히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막지도 못했다. 나는 그 반 박자에 안으로 들어갔다.

기록칸 안은 좁고 어두웠다. 돌벽엔 습기가 맺혔고, 못마다 지도와 출동표, 발췌본 묶음이 겹겹이 걸려 있었다. 책상에는 얼었다 녹은 먹물병과 굳은 깃펜, 반쯤 탄 초가 놓여 있었다. 방 오른쪽 큰 지도에는 북방 능선과 순찰로, 보급로가 붉은 실과 검은 먹선으로 얽혀 있었는데, 가까이서 볼수록 군대 이동을 그린 지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표식이 둥글었다.

적이 내려오는 길이라면 화살표가 먼저 온다. 여기엔 반원, 사선 묶음, 겹친 점선이 많았다. 그 표식의 결이 종루와 광갱에서 보던 반응 표기와 닮았다. 누군가 북방 땅을 적의 길이 아니라 울림의 자리로 읽고 있었다.

미리엘이 지도 아래쪽의 보고 항목을 짚었다.

`북사면 3초 간격 진동`

`공명 후 병막 냉각`

`서사면 봉인선 흔들림 추정`

나는 날짜부터 읽었다. 사흘 전엔 북사면. 어제는 북동쪽 냉각 지점. 오늘 새벽엔 서사면. 먹물이 아직 덜 마른 표식 옆에는 오래된 긁힘도 있었다. 오늘 처음 생긴 일이 아니었다.

적 수를 세는 표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줄이 어느 자리에서 어떤 순서로 울렸는지 적은 표였다.

지도 가장자리에도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 일반 순찰로라면 굳이 그려 넣지 않을 바위지대 옆, 희미한 반원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위에는 검은 먹을 덧발라 지우려 한 흔적이 있었고, 아래쪽엔 손톱으로 긁은 세로 홈이 남았다. 지우려다 못 지운 자리였다.

나는 발췌본 겉장을 넘겼다. 제목은 `서쪽 능선 잡음 보고 요약`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 원본 줄은 달랐다.

`공명 지속`

`냉각 편차`

`반응 후 지연`

공명이라 남기면 봉인 문제다.

잡음이라 적으면 전장 문제처럼 들린다.

말이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병사들이 칼을 뽑기 전, 장부가 먼저 전장을 바꾸고 있었다.

미리엘이 낮게 말했다.

“북방도 같은 말을 쓰고 있었어요. 안정화, 격리, 확인 절차, 발췌 공유.”

나는 다음 줄을 읽었다.

`남부 생환 반응자 도착 시 원본 열람 제한`

`지휘관 대조 후 발췌본만 공유`

우리가 오기 전부터 내려온 문장이었다.

내 이름은 없었다. 대신 기능이 있었다. 남부 생환 반응자. 필요할 때는 원본을 읽게 하고, 필요 없을 때는 발췌본 뒤로 밀어 넣기 쉬운 이름이었다.

종루 안쪽 분획칸 아래에서 보았던 줄과 광갱 벽에 남은 반응 표식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남부에서 건진 회수품과 북방에서 울리는 흔들림은 이 장부 안에서 이미 한 덩어리로 묶여 있었다. 우리가 북방으로 온 건 단순 증원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살아 돌아오기 전부터 우리를 이 장부의 빈칸에 맞춰 세우려 했다.

미리엘이 다른 줄을 더 읽었다.

“`현장 사제 확인 후 병막 접촉 허용.`”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치료실이 아니라 확인 절차실이에요. 환자도, 회수품도, 반응자도 먼저 기다리게 만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사면 반원 셋, 북동 냉각, 서사면 흔들림. 그리고 `공명`을 `잡음`으로 바꾸는 손. 원본을 챙길 수는 없었다. 대신 순서를 외웠다. 지도에서 눈을 떼기 전,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북사면에서 북동으로, 다시 서사면으로. 적이 걸어 내려온 길이 아니라, 땅속에서 눌린 줄이 차례로 튄 자국 같았다.

문밖에서 리에트가 기침했다. 짧고 낮았다. 더 머뭇거리면 세라의 이름이 통하기 전에 문지기의 의심부터 커진다.

나는 발췌본을 제자리에 놓았다. 손끝에 묻은 먹 냄새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창고 앞 대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브론은 수레 앞에 장화를 박아 두고 있었다. 서기는 두 번째 장부를 들고 있었고, 세라는 그 장부와 병사들 사이에 서 있었다. 세라가 앞줄의 얼굴로 밀려난 게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세라가 앞줄을 잡고 있었다.

그때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설명실로 오십시오. 파견 지휘관께서 기다리십니다.”

설명실은 따뜻하지 않았다. 벽난로가 있었지만 불길은 낮았고, 짐승 가죽 냄새와 젖은 철 냄새가 더 강했다. 정면 벽엔 북방 능선도와 출동 깃발이 걸려 있었다. 긴 탁자 끝에 앉은 사내는 외투를 벗지 않은 채 지도 귀퉁이를 누르고 있었다. 사람을 맞이하는 눈이 아니었다. 어느 자리에 세우면 어떤 문장이 먼저 보일지 재는 눈이었다.

그는 세라를 보자마자 일어섰다.

“벨로네 경. 종루 생환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북방 병사들에게 큰 힘이 되겠군요.”

세라는 짧게 답했다.

“우린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지휘관은 망설이지 않았다.

“피로가 남은 생환자는 더 잘 보입니다. 왕국은 지금 북방에 필요한 얼굴을 얻었습니다.”

얼굴.

그는 전력보다 먼저 그 단어를 골랐다.

나는 탁자 위 문서보다 문서가 놓인 자리를 봤다. 창가 쪽 빈 의자 하나는 햇빛을 바로 받았다. 누가 앉아도 얼굴이 밝게 드러나는 자리였다. 오른쪽 끝 그림자에는 발췌본과 보조 서판이 낮게 쌓여 있었다. 바깥 마당과 같은 배치였다. 앞줄엔 세라, 뒤쪽엔 문서와 우리.

탁자 위 제목도 숨기지 않았다.

`영웅 후보 현장 배치`

`임시 직속 전력 편입`

`현지 조사권 지휘관 승인 필요`

종루 바깥에서 본 줄이 북방식 말만 걸친 채 다시 놓여 있었다.

지휘관이 문서를 세라 앞으로 밀었다.

“당분간 파티는 제 지휘 아래 움직입니다. 이상 징후 대응, 민심 안정, 현장 시연. 세 가지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브론이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사람 부리겠다는 말을 참 곱게 접었군.”

지휘관은 브론을 오래 보지 않았다. 사람이 화낼 틈이 생기면 곧장 다른 항목으로 덮었다.

“종루 회수물은 전초 보관 아래 검인 후 재배정. 현장 진술은 기록칸 대조 뒤 필요한 부분만 공유. 외부 접촉과 개별 이동은 허가제로 갑니다. 북방은 혼선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혼선.

저들이 말하는 혼선은 늘 우리 입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본 것을 우리가 먼저 말하면 혼선이고, 저들이 고른 문장만 남기면 질서였다.

나는 일부러 화내지 않았다. 지금 목소리를 높이면 저들은 세라와 나를 갈라 세우고, 브론을 군수 방해로 묶고, 미리엘을 성도 확인 절차 아래 밀어 넣을 것이다. 먼저 캐야 할 건 저들이 어느 시각에 무엇을 옮길지였다.

“보급 재배치 시각은 언제입니까.”

그때 지휘관의 시선이 처음 제대로 내게 닿았다. 앞줄의 얼굴 뒤에 선 배경이 왜 말을 하느냐는 눈이었다.

“왜 묻지.”

“서쪽 능선 보강이 먼저인지, 북사면 순찰이 먼저인지에 따라 장비가 달라집니다. 창고를 언제 여는지 모르면 병사도 물건도 엇갈립니다.”

짧은 침묵.

“정오 전 1차 재배치다.”

충분했다. 정오 전 창고가 열린다. 그 전에 장부 이름이 바뀌고 원본은 더 깊이 들어간다.

“지도 열람은요.”

“발췌본만.”

“원본은 누가 봅니까.”

“지휘관 승인 아래 필요한 인원만.”

필요한 인원.

그 말속엔 이미 우리가 빠져 있었다.

세라가 입을 열었다.

“앞줄에 세울 거면 현장은 같이 돈다.”

지휘관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벨로네 경의 의욕은 높이 삽니다. 다만 조사 권한은 체계대로—”

“권한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라가 끊었다.

“내 이름을 병사들 앞에 내세울 거면, 내가 본 것과 다른 문장을 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방 안 공기가 낮아졌다. 노골적인 반발보다 더 불편한 말이었다. 세라는 지휘관의 문장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그 문장 옆에 자기 눈을 박아 넣었다. 얼굴로 쓰려면 눈도 같이 데려가라는 말이었다.

지휘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 손가락이 지도 귀퉁이를 한 번 눌렀다. 창가 쪽 의자가 비어 있었고, 바깥 병사들은 이미 세라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저쪽도 계산이 끝났다.

“좋습니다. 현장 동행은 조정하겠습니다.”

완전히 내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작은 틈은 생겼다. 세라는 앞줄에 묶였지만, 그 앞줄을 우리 쪽 시간으로 끌어왔다. 브론이 창고 문턱을 붙잡을 시간, 미리엘이 원본 줄을 더 읽을 시간, 리에트가 감시탑 교대 박자를 잴 시간, 내가 지도 순서를 외울 시간. 세라는 그 시간을 앞줄에서 벌어 냈다.

문밖에서 급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첫 울림에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고, 둘째 울림에 창고 앞 손들이 멈췄고, 셋째 울림에 설명실 문이 열렸다. 감시병 하나가 눈발을 묻힌 채 들어왔다. 숨이 하얗게 터졌다.

“서쪽 능선 연기 신호 확인!”

지휘관이 몸을 돌렸다.

“규모는.”

“정확한 수는 아직 모릅니다. 검은 깃이 섞였습니다.”

검은 깃.

말 하나로 방 안 물건들의 무게가 바뀌었다. 지도는 전장 지도가 됐고, 창고 장부는 병참 명령이 됐고, 기록칸 원본은 더 깊이 잠길 핑계를 얻었다. 병사들은 적을 떠올렸지만, 나는 장부를 쥔 손을 먼저 떠올렸다. 전투가 터지는 순간 가장 빨리 바뀌는 건 진실의 이름이었다.

리에트가 문틀 옆에서 낮게 말했다.

“너무 때를 맞춰 왔어.”

나는 그 말뜻을 알았다. 우리가 도착하고, 회수품이 문턱에 걸리고, 세라를 앞줄에 세우는 문서가 펼쳐진 바로 그때. 검은 깃이 떴다. 우연이라기엔 순서가 너무 고왔다.

지휘관은 우리를 다시 훑었다. 조금 전까진 영웅 얼굴과 통제 대상을 보던 눈이었다. 이제는 급한 틈에 어느 칸부터 써먹을지 재는 눈이었다. 세라는 병사들 앞에 세울 깃발. 브론은 창고 물자 대조에 쓸 손. 미리엘은 성도 쪽 확인 절차에 붙일 사제. 리에트는 바깥 감시. 나는 원본을 읽되 이름 없이 남을 반응자.

“숙영칸에서 대기하시오.”

지휘관이 말했다.

“추가 명령 전까지 임의 이동은 금지다. 벨로네 경은 잠시 뒤 현장 시찰에 동행한다.”

세라가 바로 물었다.

“파티는.”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그럼 늦습니다.”

세라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잘 들렸다.

“검은 깃이면 병사들 눈은 서쪽으로 쏠립니다. 그 사이 창고와 기록칸이 닫히면, 현장에 나가도 속 빈 발췌본만 보게 됩니다.”

지휘관 얼굴에 처음으로 불쾌한 기색이 지나갔다. 하지만 바깥에서 두 번째 고함이 올라왔다. 서쪽 능선 쪽 병사들이 이미 뛰고 있었다. 지휘관은 둘을 동시에 붙들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나눴다.

“벨로네 경은 나와 서쪽 마당으로. 나머지는 숙영칸 대기. 창고 대조는 군수 서기가 계속한다.”

분리.

예상대로였다.

세라는 나를 보지 않았다. 대신 방패끈을 한 번 고쳐 잡았다. 금속 고리가 짧게 울렸다. 그 소리 하나로 충분했다. 앞줄은 내가 붙잡을 테니, 안쪽은 네가 읽어라. 종루에서부터 세라가 해 온 말없는 배치였다.

우리는 설명실을 나와 성책 안쪽 모서리의 숙영칸으로 밀려났다. 이동하는 동안 마당은 바뀌어 있었다. 창고 앞 병사 둘은 검은 깃이 떴다는 보고를 듣고도 수레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감시탑 위 병사는 서쪽을 보면서도 기록칸 문지기에게 손짓을 보냈다. 급보가 오면 전초는 밖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안쪽부터 잠갔다.

숙영칸은 바람이 덜 들었지만 따뜻하진 않았다. 왼쪽 벽엔 젖은 장갑을 말리던 못 세 개가 남았고, 오른쪽엔 작은 창 하나가 감시탑 아래 그림자를 향해 뚫려 있었다. 문에는 안쪽 걸쇠보다 바깥 고리가 더 굵었다. 바닥에는 누군가 먼저 들어와 훑고 나간 듯한 발자국이 곧게 남아 있었다. 쉬라는 방이 아니었다. 사람을 잠깐 세워 두고, 필요한 때 다시 꺼내 쓰는 칸이었다.

브론이 문을 닫자마자 어깨로 벽을 밀었다.

“쉬게 하는 칸치곤 잠금이 아주 친절하군.”

리에트는 창가에 붙어 감시탑 쪽을 봤다.

“첫 교대 뒤에 탑 바깥 감시가 십이 분 정도 끊긴다. 기록칸은 그보다 짧아. 창고는 계속 사람이 붙어.”

미리엘은 방금 외운 장부 문장을 양피 조각 가장자리에 아주 작게 눌러 적었다. 글씨가 아니라 위치 표시처럼 보였다. 눈에 띄면 곧장 빼앗길 테니, 문장이 아니라 순서를 숨기는 손이었다.

“성흔열 유사 안정화. 임시 격리. 별도 보고.”

그녀가 낮게 말했다.

“엘레나 이름은 없지만, 같은 칸이에요. 이 사람들이 이미 분류명을 갖고 있어요.”

나는 방 한가운데에 웅크려 바닥 먼지 위에 선을 그었다. 성문, 감시탑, 창고, 기록칸, 지휘막사. 그리고 세라가 끌려간 서쪽 마당.

“우릴 쉬게 하려는 게 아니야.”

바닥에 다시 칸을 나눴다.

“세라는 밖에서 얼굴. 브론은 창고 앞에서 물건 이름을 붙잡는 손. 미리엘은 병막과 안정화 문장을 잃지 않는 눈. 리에트는 감시탑과 교대 사이 빈 박자. 나는 원본 지도와 발췌본의 차이를 외운 반응자.”

브론이 바로 받았다.

“그럼 난 창고부터 다시 붙잡는다. 납인 번호, 수량표, 문턱에 박힌 못, 끊긴 봉함끈. 그 넷이면 안에 넣기 전에 뭘 갈아 끼웠는지 읽을 수 있어.”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기록칸이에요. `공명`이 `잡음`으로 바뀐 흔적, 냉각 편차, 병막 접촉 허용 순서를 봐야 해요. 성도 확인 절차가 어느 줄에서 붙었는지도요.”

리에트는 창틀을 손끝으로 짚었다.

“교대 사각은 내가 맡아. 탑 위 왼쪽 병사는 서쪽만 보고, 오른쪽 병사는 창고를 더 많이 봐. 기록칸 문지기는 고함이 두 번 나면 꼭 지휘막사 쪽을 본다. 그때가 짧아.”

나는 바닥 선을 하나 더 그었다. 지도판에서 기록칸으로, 기록칸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지휘막사로 이어지는 순서였다. 그 위에 서쪽 능선에서 올라온 검은 깃 표시를 작게 찍었다.

“저들이 `라그나드 전위`라고 외치는 순간, 지도는 전장 지도처럼 보이고 창고는 병참 창고처럼 보여. 그 틈에 원본에서 `공명`이 사라지고 발췌본엔 `잡음`만 남는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적이 온다니까 문서부터 숨기는 전초라. 북방답군.”

“적이 정말 먼저 움직였는지도 아직 몰라.”

나는 검은 깃 표시를 손끝으로 눌렀다.

“북사면 진동, 북동 냉각, 서사면 흔들림. 그 순서가 맞다면 검은 깃은 원인일 수도 있고, 덮개일 수도 있어. 라그나드 쪽이 흔들림을 보고 움직였는지, 흔들림을 만들고 이름을 씌우는 건지 아직 갈려.”

미리엘이 손을 멈췄다.

“그래서 먼저 이름을 붙이면 안 돼요.”

“맞아.”

나는 세라가 나간 문 쪽을 봤다.

“전초는 지금 우리한테 칼을 빼앗는 게 아니야. 첫 문장을 빼앗으려는 거다. `공명`인지 `잡음`인지, `봉인선 흔들림`인지 `라그나드 접근`인지, `생환자 증언`인지 `반응자 확인 전 진술`인지. 첫 줄이 바뀌면 병사도 물자도 사람도 다 다른 자리로 간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달려왔다. 이번엔 망설임 없는 발이었다. 누군가 숙영칸 앞에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급보!”

우리 넷의 시선이 한꺼번에 문으로 갔다.

“서쪽 능선 전위 확인! 검은 깃을 들고 붉은 투구를 쓴 대열입니다. 라그나드 부대 전위로 추정됩니다!”

문 안은 잠깐 고요해졌다.

하지만 먼저 떠오른 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지휘관은 우리를 더 세게 묶으려 들 것이다. 창고와 기록칸은 더 빨리 닫힐 것이다. 병사들은 검은 깃을 보고 칼을 잡겠지만, 장부를 든 손은 그 틈에 말을 바꿀 것이다. `공명`은 `잡음`이 되고, `봉인선 흔들림`은 `소규모 출몰`이 되고, 우리가 본 순서는 지휘관 허가 뒤로 밀린다.

라그나드 전위라는 말도 단순한 적 이름으로 들리지 않았다. 북방은 전장이고, 전장은 늘 사람을 빨리 죽인다. 하지만 이 전초는 죽는 방식보다 먼저 죽음을 적는 방식을 고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칼을 뽑느냐보다 누가 먼저 이름을 붙이느냐가 더 급했다. 그 이름 하나가 오늘 북방에서 병사들이 어디로 뛰는지, 회수품이 어느 창고로 들어가는지, 세라가 어떤 얼굴로 남는지까지 바꿀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그어 둔 선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눌러 그었다.

“창고, 기록칸, 지도판.”

브론이 수레 손잡이를 잡던 손으로 망치 자루를 고쳐 잡았다. 미리엘은 양피를 접어 장갑 안쪽에 숨겼고, 리에트는 창밖 감시탑 병사가 고개 돌리는 박자를 다시 세었다. 세라는 바깥에서 시선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세라가 바깥에서 버티는 만큼이었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쉬는 게 먼저가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어느 칸에 세울지, 그 배치권을 빼앗아 오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 배치표의 첫 줄을 우리가 읽은 이름으로 남기는 게, 북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 전투였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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