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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참호의 암호

계류장 뒤 계근장은 반쯤 버려진 자리 같았다. 강변 안개는 앞마당에선 거의 걷혔는데, 이쪽은 수레와 창고 벽에 막혀 습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왼쪽엔 군수 상자를 재던 낡은 저울대가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저울판 아래엔 깨진 목제 표찰함이 한쪽 모서리만 남은 채 처박혀 있었다. 오른쪽 좁은 배수로로는 검은 물이 천천히 흘렀다. 정면엔 북방에서 끌고 온 짐수레 둘이 멈춰 있었고, 젖은 덮개천 끝이 바닥을 끌며 진흙을 먹고 있었다.

사람 목소리보다 물건 냄새가 먼저 닿는 자리였다.

젖은 마대에서 올라오는 썩은 삼베 냄새, 쇠고리에 밴 오래된 녹 냄새, 배수로에서 스민 비린 물내가 층층이 겹쳐 있었다. 저울대 추는 한쪽으로 기운 채 멈춰 있었고, 판 위엔 누가 급히 닦다 만 회색 분가루가 얇게 들러붙어 있었다. 짐수레 바퀴는 흙을 말린 채 굳어 있었는데, 북방 사면에서 보던 붉은 흙과 왕궁 안뜰의 노란 자갈흙이 한 바퀴에 함께 붙어 있었다. 누가 어디를 거쳐 왔는지 말보다 먼저 바닥이 떠벌리고 있었다.

나는 저울판 위를 빈 손으로 쓸어 물기를 걷어 냈다. 그 위에 어젯밤 챙긴 것들을 차례로 올렸다. 기사단 부속 지시 끝에 찍혀 있던 붉은 점 셋과 빗금 하나. 왕궁 이동표 마지막 칸에서 베껴 온 얇은 화살표. 성도 별첨의 `H-13B/대체열-2/내부대조` 부호. 북방식 매듭을 잘라 숨겨 둔 끈. 그리고 첫 던전 봉인문 앞에서 급히 그려 둔 열세 빛 스케치 한 장.

세라는 계근장 입구를 막아 선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왕궁 사절이 한 번, 기사단 부관이 한 번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그녀 눈을 보고 발을 돌렸다. 리에트는 배수로와 수레 바퀴 자국 사이를 오가며 누가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살폈다. 미리엘은 차양막 쪽에서 끌어온 얇은 양피판을 펼쳐 내 옆에 내려놓았다. 브론은 말없이 짐수레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젖은 덮개천 한 귀를 찢어 임시 천으로 만들었다. 저울판 끝에 남아 있던 분가루를 긁어 모아 선을 긋는 데 썼다. 붉은 점이 찍힌 종이는 왼쪽 끝, 성도 부호는 저울추 바로 아래, 첫 던전 스케치는 정면에 두었다. 물건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으면 또 조각으로 흩어진다. 같은 작업판에서 같은 손이 옮긴 것처럼 보여야 했다. 나는 왕궁 이동표 끝칸을 길게 눕히고, 그 옆에 북방식 매듭 끈을 반쯤 풀어 화살표와 같은 방향으로 놓았다. 그러자 그냥 부호 같던 것들이 갑자기 한 줄의 명령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엘은 양피판 귀를 손톱으로 눌러 펼침을 고정했다. 브론이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성도 별첨 아래 작은 기호만 따로 베껴 두고 있었다. 동그라미 둘, 짧은 세로획, 눌린 먹 번짐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성도는 글보다 부호를 더 숨긴다. 문장을 들키면 둘러댈 수 있어도, 줄과 점의 순서는 한 번 드러나면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둘러."

세라가 낮게 말했다.

"저쪽도 바보는 아니야."

"알아."

나는 붉은 점 셋을 먼저 가리켰다.

"이게 숫자인지, 순서인지부터 봐야 해."

브론이 수레 밑에서 툭 소리를 냈다. 잠시 뒤 그가 널판 하나를 들고 기어나왔다. 밑면엔 손바닥 두 개쯤 되는 길이의 홈이 세 줄 나 있었고, 끝엔 짧은 빗금이 하나 더 파여 있었다.

"이거 봐. 광갱 운반 상자 밑면이랑 같은 방식이야."

그가 널판을 저울판 옆에 세웠다.

"짐칸 위치 표시가 아니라, 올리는 순서 맞출 때 쓰는 거다. 앞, 안, 아래. 마지막 빗금은 한 줄 비껴 싣는다는 뜻."

나는 붉은 점 셋과 널판 홈 파임을 나란히 놓았다. 간격도, 끊기는 박자도 너무 닮아 있었다.

미리엘이 성도 별첨을 펴며 말했다.

"`대체열-2`도 비슷해요. 정면 열람 줄이 아니라 안쪽 우회선 두 번째 줄. 겉으로는 번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들어가는 순서예요."

리에트가 저울판에 올려 둔 첫 던전 스케치를 손끝으로 눌렀다.

"여기."

그녀가 열세 빛 가운데 긁혀 나간 셋을 짚었다.

"그때도 이상했어. 왜 하필 셋만 도려냈는지."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북방 전초 참호, 광갱 운반 상자, 성도 대체열, 첫 던전 열세 빛의 빠진 셋. 따로 보면 전혀 다른 자리인데, 저울판 위에선 한 줄씩 맞물리기 시작했다.

나는 분가루를 손가락 끝에 묻혀 저울판 위에 직접 선을 그었다. 붉은 점 셋 아래엔 북방 전초 참호 간격을, 홈 파임 옆엔 광갱 수레 적재 칸을, 성도 부호 아래엔 하층 열람선이 비껴 내려가는 짧은 화살을 표시했다. 그 위에 첫 던전 스케치를 겹치자 빠진 셋이 정확히 비어야만 연결되는 빈자리처럼 드러났다. 셋 중 첫째는 앞줄에서 사람 시선을 잡는 자리, 둘째는 안쪽에서 물건을 옮기는 자리, 셋째는 아래로 내리며 원본을 감추는 자리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사건이 전부 그 세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북방 전초에선 세라가 앞줄을 붙잡는 동안 안쪽 상자와 기록띠가 옮겨졌다. 회색 종루에선 상층 고리를 뜯어 사람보다 병과 기록을 먼저 위로 넘겼다. 광갱에선 공식 진입로보다 우회선이 먼저 살아 있었다. 첫 던전에선 열세 빛 중 셋만 지워 두어, 모르는 자는 상징으로 보고 아는 자만 작업 순서로 읽게 만들었다. 누군가 같은 손버릇으로 네 장소를 찍고 지나간 셈이었다.

브론이 낡은 표찰함을 발끝으로 뒤집었다. 바닥판 하나가 덜컥 빠지더니, 얇은 판자 조각이 안쪽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는 손등으로 먼지를 털고 판자를 내게 내밀었다. 거기엔 거의 닳아 사라진 글이 남아 있었다.

`열 자를 모아야 길이 열린다.`

그 밑으로 짧은 획 열 개가 서로 다른 길이로 새겨져 있었다. 반쯤 지워진 획 셋에는 유난히 붉은 먼지가 끼어 있었고, 가장 끝 두 획 사이엔 누가 못끝으로 다시 긁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판자를 비스듬히 세워 빛을 받게 했다. 그제야 눌린 결 속에서 희미한 옆주름이 드러났다. 누군가 이 판자를 그냥 표찰함 바닥으로 쓴 게 아니라, 본래 있던 작업 도식을 숨기려고 뒤집어 박아 넣은 흔적이었다.

세라가 입구에서 고개를 돌렸다.

"사람 열 명?"

"아니."

브론이 먼저 잘랐다.

"작업 자리다. 각자 맡은 칸. 다 모여야 한 줄이 되는 거지."

나는 판자 조각을 저울판 한가운데 두고 이미 확보한 표기를 세었다. 북방 전초의 붉은 점. 광갱 운반 홈. 회색 종루 상층 쇠고리 간격. 첫 던전 봉인문 열세 빛 중 빠진 셋. 왕궁 이동표 끝칸. 성도 대체열-2 부호.

여섯 자리였다.

아직 네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빈칸이 막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잡힌 여섯 줄이 모두 같은 버릇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에서 보면 이동, 보관, 열람, 복귀, 확인처럼 제각각 다른 명목인데, 실제 손놀림은 늘 같았다. 사람보다 먼저 물건을 옮긴다. 정면보다 안쪽 줄을 먼저 튼다. 큰 문장보다 끝칸 기호를 먼저 감춘다. 이름을 앞세워 시선을 묶고, 진짜 작업 줄은 옆으로 뺀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같은 일을 해 왔고, 왕궁이든 성도든 북방 전초든 그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굴리고 있었다.

나는 첫 던전 스케치 위에 왕궁 이동표를 반쯤 겹쳤다. 열세 빛 중 비어 있던 셋이 이동표 끝칸에서 갈라진 세 화살표와 거의 같은 간격으로 들어맞았다. 거기에 브론이 들고 온 널판 홈까지 올리자 안쪽 줄이 한 번 비껴 꺾이는 자리도 겹쳤다. 우연으로 넘기기엔 너무 정확했다. 첫 던전의 빠진 셋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 운반선 표기였고, 누군가는 그걸 유적 벽화에까지 옮겨 적어 같은 작업 자리를 기억하게 만든 셈이었다.

미리엘이 양피판에 빠르게 선을 그었다.

"보세요. 전초 기록 누락부랑 하층 대체열 번호가 같은 순서대로 밀렸어요. 정면 열람선이 끊기면 우회선이 열리고, 우회선이 막히면 침잠선으로 내려가요."

"침잠선?"

세라가 물었다.

"물이 차오르는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에요."

미리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문서고 하층은 물이 먼저 먹는 구간일수록 감추기 쉬워요. 그래서 정면 출입보다 안쪽 줄이 먼저 열릴 때가 있어요."

리에트는 배수로 끝에 웅크려 있다가 돌아왔다. 손가락 끝엔 붉은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이 색, 북사면 참호랑 같아."

그녀가 짧게 말했다.

"물러난 손이 그냥 물러난 게 아니야. 인간 기관 수송선에 표식을 섞어 넣었고, 여기까지 같은 흙을 끌고 왔어. 보라고 남긴 거지."

"누구한테?"

세라가 묻자 리에트는 나를 한 번 봤다.

"읽을 줄 아는 쪽한테."

그 순간 계근장 입구 바깥에서 장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왕궁 사절이었다. 그 뒤엔 성도 서기 하나와 기사단 부관이 따라왔다. 셋 다 같은 자리로 왔는데, 보는 방향은 서로 달랐다.

사절이 가장 먼저 본 건 저울판 왼쪽, 북방 전초 표기와 붉은 점을 겹쳐 놓은 종이였다. 성도 서기는 저울판 전체를 훑지도 않고 미리엘 손끝 아래 눌린 `대체열-2` 줄만 골라 바라봤다. 기사단 부관은 애초에 표기엔 관심도 없었다. 세라 허리끈 안쪽, 대표 서명판이 들어 있는 자리만 노골적으로 확인했다. 셋이 같은 진실을 막으러 온 게 아니었다. 각자 자기 쪽에서 새면 끝장나는 줄 하나씩만 붙들러 온 얼굴이었다.

"그 문서는 이 자리에서 다룰 대상이 아닙니다."

성도 서기는 미리엘 양피판만 노려봤다.

"하센 수녀. 내부 부호 해석은 봉인국 입회 하에만 허가됩니다."

기사단 부관은 세라 허리끈 안쪽 서명판부터 확인했다.

"후보님. 더 미루면 복귀 절차도—"

세라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계근장 문턱이 좁아 셋이 동시에 못 들어오게 딱 막히는 자리였다.

"복귀 절차보다 먼저 할 게 있어."

사절 눈썹이 꿈틀했다.

"무엇입니까?"

"임시 대조."

세라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이름으로 허가한다. 피난선 혼선이 왕궁 수송선까지 닿았는지, 북방 표기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 본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선 손 위치는 더 분명했다. 왼손은 문기둥 안쪽에, 오른손은 검집머리 가까이에 얹혀 있었다. 누가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 검을 뽑지 않고도 어깨와 손목만으로 한 사람씩 막아 세울 수 있는 자세였다. 병사 둘도 그걸 알아봤는지 발끝을 문턱에 들이밀지 못했다. 세라는 앞줄 얼굴로 서 있었지만, 지금 그 얼굴값은 왕궁이나 기사단 명분이 아니라 우리 작업판 시간을 사는 데 쓰이고 있었다.

기사단 부관이 낮게 숨을 삼켰다.

"후보님, 대표 서명 없이 그런 승인은—"

"대표 서명은 더 안 할 거니까 잘 들었네."

성도 서기가 한 걸음 내밀었다.

"하층 관련 부호는 즉시 회수해야 합니다."

"왜요?"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뜻이 드러날까 봐요, 아니면 연결 줄이 드러날까 봐요?"

서기는 답하지 못했다. 대신 시선이 `대체열-2` 적힌 양피판 끝에 오래 걸렸다.

왕궁 사절은 북방 전초 표기가 놓인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브론이 그 위에 널판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사 운용 자료입니다."

사절이 이를 다문 채 말했다. 말끝에 실린 다급함은 자료를 지키려는 사람보다, 이미 들킨 줄을 얼른 덮으려는 사람 쪽이었다. 북방 전초 병력 배치가 새는 게 겁난다면 저울판 전체를 거둬야 맞았다. 그런데 사절은 붉은 점과 참호 표기가 맞닿은 종이만 노리고 있었다. 저게 왕궁 쪽 입구 조각이었다.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왜 왕궁 군수 표기가 아니라 북방 참호 보급꾼 표기랑 같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기사단 부관은 여전히 세라만 보고 있었다. 저울판 위 표기보다 그녀 허리끈 안쪽 서명판이 더 급한 사람 눈이었다.

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 왕궁은 입구 쪽 조각을, 성도는 하층 우회선을, 기사단은 세라 이름을 먼저 붙잡으려 했다.

무엇이 중요한지보다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가 더 잘 보였다.

"세라."

내가 불렀다.

"조금만 더 막아 줘."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문턱에 검집 끝을 가볍게 세웠다. 병사 둘이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는 다시 저울판으로 몸을 숙였다. 브론이 널판 홈 파임과 붉은 점 간격을 맞추고, 미리엘이 대체열 번호를 아래에 적었다. 리에트는 첫 던전 스케치 가장자리를 눌러 빠진 셋 위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을 더했다.

선은 점점 많아졌지만 이상하게 복잡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굵어졌다.

나는 저울판에 놓인 물건 사이 간격까지 다시 맞췄다. 북방 전초 참호 종이는 맨 앞. 그 뒤에 광갱 홈 파임. 아래쪽으로 회색 종루 고리 간격. 오른편 끝에 왕궁 이동표. 가장 안쪽 아래엔 성도 `대체열-2`. 첫 던전 스케치는 그 다섯 줄을 한꺼번에 덮는 바닥처럼 깔렸다. 배열을 그렇게 바꾸고 보니 각 표기는 장소 이름보다 손 순서를 먼저 설명하고 있었다. 앞에서 시선을 묶고, 안에서 물건을 고르고, 아래로 내리며, 이름으로 덮고, 우회선으로 숨긴다. 북방과 왕궁과 성도와 첫 던전이 하나의 작업반처럼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북방 전초에서 파견 지휘관이 세라를 밝은 자리로 세운 것도, 왕궁 계류장에서 에이드리언 단독 호송 수레를 따로 뺀 것도, 성도가 미리엘을 입회용 차양막 아래로만 밀어 넣은 것도 같은 줄로 읽혔다. 사람을 갈라 세우는 일과 물건을 갈라 싣는 일이 따로가 아니었다. 같은 표기판에서 함께 움직였다. 나는 그 사실이 서늘하게 반가웠다. 저쪽이 오래 숨겼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한 번만 읽는 법을 잡으면 앞으로도 같은 버릇을 따라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북방 전초에서 사람보다 상자를 먼저 옮긴 손.

광갱에서 우회선을 먼저 남긴 손.

회색 종루에서 상층 고리를 뜯어 낸 손.

첫 던전에서 열세 빛 중 셋을 지운 손.

왕궁 계류장에서 대표 서명을 먼저 빼앗으려는 손.

문서고 하층에서 정면이 아니라 대체열을 먼저 여는 손.

브론이 판자 조각 밑 열 개 획을 세며 말했다.

"여섯 자린 잡았어. 남은 넷은 궁 안쪽, 아니면 문서고 하층 쪽이겠지."

그는 말하면서도 획 네 개를 따로 눌렀다. 완전히 빈 게 아니었다. 하나는 왕궁 안쪽 깊은 칸에 붙는 보관 줄, 하나는 문서고 하층 침수선, 하나는 그 둘 사이를 잇는 운반선, 마지막 하나는 아직 누구 손에 있는지조차 모를 바깥 고리일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저 넷이 어디 있느냐보다 어느 순서로 붙느냐였다. 지금까지 잡은 여섯 자리도 모두 같은 장소를 가리킨 게 아니라 같은 순번을 가리켰다. 먼저 열고, 안으로 넣고, 아래로 빼고, 이름으로 덮고, 우회선으로 감추고, 다시 운반한다. 누가 이 봉인선을 만들었든 장소보다 손순서를 먼저 남겼다.

"둘 다일 수도 있어요."

미리엘이 곧바로 받았다.

"하층 침잠 시간표가 오늘 밤 한 번 비어요. 정면 열람선 닫히고 대체열 두 번째 줄만 잠깐 열릴 때가 있어요."

미리엘은 양피판 옆에 짧은 칸표까지 덧그렸다. 첫 칸엔 종이 묶음, 둘째 칸엔 봉함 통, 셋째 칸엔 사람 하나가 비껴 선 모양, 마지막 칸엔 물결 두 줄이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그 순서를 짚으며 설명했다.

"문서고는 밤마다 물 높이가 달라져요. 물이 가장 차오를 때는 정면 열람대가 잠기고, 대신 벽쪽 대체열이 먼저 떠요. 그래서 기록을 숨기려는 쪽은 그때 움직이고, 들키지 않으려는 쪽도 그때 움직였어요. `내부대조` 표기가 붙은 줄은 물이 허리 아래까지만 찰 때 지나갈 수 있어요. 더 차면 종이도 사람도 못 건너요. 반대로 물이 너무 빠지면 바닥 긁힌 흔적이 드러나서 야간 점검이 붙고요. 오늘 밤 비는 틈은 그 둘 사이예요. 숨기기엔 좋고, 찾기엔 더 좋은 높이."

그녀는 양피 끝에 작은 네모 셋을 더 그렸다. 첫째는 문서 묶음을 잠깐 세워 두는 받침칸, 둘째는 봉함 통을 옆으로 미끄러뜨리는 얕은 수로, 셋째는 사람이 물을 밟지 않고 비껴 설 수 있는 돌턱이었다. 정면 열람대가 잠기면 저 셋만 남는다. 종이와 물건과 사람이 같은 높이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가야만 안쪽 줄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세라가 문턱을 지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

"지금 표기를 맞춘 게 맞다면요."

미리엘이 저울판 위 선 하나를 톡 눌렀다.

"왕궁은 편입 제안으로 우릴 안쪽에 묶으려 들 거예요. 성도는 입회 핑계로 제 입을 자르려 들겠죠. 그런데 저 둘이 먼저 붙잡는 줄이 다르다는 건, 아직 틈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 틈에 하층으로 내려가야 해요."

리에트가 통풍창 아래서 잘라 온 매듭 끈을 저울판 한쪽에 올려놓았다.

"궁 안쪽 수송선에 같은 매듭이 더 있을 거야. 내가 그 줄을 볼게."

브론은 붉은 점 표기와 널판 홈을 새 양피에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난 사본 만든다. 뺏겨도 손 안 비게."

세라는 천천히 허리끈 안쪽 서명판을 눌렀다. 바깥에선 여전히 왕궁 사절 목소리와 성도 서기 불만이 얽혀 있었지만, 그녀 표정은 아까보다 더 또렷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얼굴이 아니라, 두려워할 대상을 골라낸 얼굴이었다.

"정면으론 못 가겠네."

"응."

나는 저울판 위 여섯 자리를 다시 봤다.

"정면은 저쪽이 이름부터 가져가. 우린 줄부터 가져가야 해."

세라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한 번 꺾였다.

"그 말, 이제 좀 마음에 든다."

바깥에서 왕궁 종이 한 번 울렸다. 오전 절차가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시간이 길지 않았다.

나는 표기들을 순서대로 접어 나눴다. 붉은 점과 빗금은 브론에게. 대체열 부호와 침잠 시간표는 미리엘에게. 매듭 추적은 리에트에게. 세라에겐 서명 지연과 편입 제안 응대. 그리고 내 몫은 이 여섯 자리를 한 장 지도처럼 기억해 다음 줄을 먼저 읽는 일이었다.

양피를 접는 순서도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다. 브론 사본엔 붉은 점 셋과 홈 파임만 남겼다. 길을 여는 박자는 알 수 있어도 어느 장소와 이어지는지는 바로 드러나지 않게. 미리엘 몫 양피엔 `대체열-2`와 침잠 시간만 남겼다. 하층으로 들어갈 문은 보여도 그 문이 무엇과 맞물리는지는 그녀 머릿속에만 남게. 리에트에게 넘긴 매듭 끈엔 북방식 묶음 세 군데를 다시 짧게 표시했다. 수송선을 따라가도 저쪽이 어느 표기와 같은 줄인지 알아채기 어렵게 하려면, 각자 한 조각만 들고 움직여야 했다. 다섯이 함께 있을 때만 온전한 지도가 되게. 그게 지금 우리가 저쪽보다 먼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정리하자."

내가 말했다.

"왕궁은 입구 조각을 숨기려 하고, 성도는 하층 우회선을 막으려 하고, 기사단은 세라 이름으로 우리를 떼어 놓으려 해. 그럼 우린 반대로 간다. 편입 제안은 받는 척하고, 오늘 밤 문서고 하층 대체열부터 본다. 궁 안쪽에 남은 조각은 리에트가 추적하고, 브론은 표기 사본을 만든다."

나는 말만 하지 않고 저울판 위 물건도 그 순서대로 밀었다. 왕궁 이동표는 맨 겉으로 빼 두었다. 저쪽이 가장 먼저 확인해도 이상하지 않은 미끼였다. 붉은 점 사본은 그 아래 숨겼다. 성도 부호는 미리엘 양피 뒤로 넘겼다. 첫 던전 스케치는 내가 접어 품었다. 네 장 가운데 하나만 빼앗겨도 전체 줄이 안 읽히게 하려면, 어디를 보여 주고 어디를 가릴지부터 정해야 했다. 다섯이 함께 움직이는 이유도 그거였다. 저쪽은 계속 갈라 놓으려 들고, 우리는 계속 나눠 들되 하나로만 읽히게 버텨야 했다.

브론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좋네. 누가 먼저 막는지 알면 어디부터 비껴 들어갈지도 보이니까."

미리엘도 짧게 끄덕였다.

"하층으로 들어갈 수만 있으면, 남은 네 자리 중 하나는 바로 찾을 수 있어요."

세라는 문턱 밖 셋을 잠깐 돌아봤다. 왕궁 사절은 여전히 붉은 점 표기가 놓였던 자리만 노리고 있었고, 성도 서기는 미리엘 양피판을, 기사단 부관은 세라 허리끈 안쪽만 보고 있었다. 뒤편 병사 둘은 누구 명령을 먼저 들어야 할지 몰라 발만 바꾸고 있었고, 배수로 쪽에 선 군수병 하나는 브론 사본이 손 안으로 들어오는지 아닌지만 힐끔거렸다. 저쪽도 이미 제각기 다른 우선순위로 갈라져 있었다. 우리는 그 틈만 잘 밟으면 됐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 이름을 미끼로 쓰자. 대신 저쪽이 원하는 데 찍어 주진 않아."

리에트가 매듭 끈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궁 안쪽부터 돈다. 수송선 바뀌기 전에."

브론은 사본을 접어 장갑 안쪽에 찔러 넣었다.

"난 점 셋이랑 홈 파임 더 맞춰 볼게. 이거 완전히 풀리면 길뿐 아니라 닫는 순서도 읽힐 거다."

그는 말하며 장갑 끈을 두 번 감아 묶었다. 한 장은 겉주머니, 한 장은 안감 사이, 마지막 한 장은 등판 널판 틈에 얇게 밀어 넣었다. 하나를 빼앗겨도 둘은 남게 하려는 손놀림이었다. 브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리엘은 양피판 귀를 접어 소매 안쪽에 숨겼고, 리에트는 매듭 끈을 허리칼집 뒤로 넘겼다. 세라는 서명판을 허리끈 안쪽 더 깊은 칸으로 밀어 넣었다. 다들 이미 다음 습격을 대비한 배치로 몸을 바꾸고 있었다. 지도는 저울판 위에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절반은 우리 손과 옷 안쪽과 걸음 순서 속으로 옮겨졌다.

미리엘은 양피판 가장자리를 접으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오늘 밤, 하층 대체열이 한 번 열려요. 오래는 아니에요."

그 말에 계근장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막막해서가 아니었다. 다음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 다섯이 같은 방향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울판 위에 남은 마지막 선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직 비어 있는 네 자리 중 첫 번째가 어디인지, 이제는 감이 잡혔다.

왕궁 안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급한 쪽은 다른 데였다.

물이 먼저 차오르는 자리.

정면 문보다 먼저 열리는 줄.

문서보다 오래 남는 흔적이 가라앉아 있는 곳.

문서고 하층 침수 구역.

그곳은 단지 물이 고인 지하가 아니었다. 정면 문장으로는 지워 버린 걸 바닥 높이와 운반 순서로만 남겨 두는 자리, 앞줄 이름이 닿지 않는 대신 끝칸 기호가 더 또렷해지는 자리, 누가 먼저 들고 들어왔는지가 글보다 오래 남는 자리였다. 왕궁이 입구를 숨기고 성도가 우회선을 숨기려 드는 이유도 결국 거기서 하나로 만날 게 분명했다. 물 밑에 잠긴 건 종이가 아니라, 저들이 같은 손으로 이어 왔다는 증거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음 줄은 거기야."

미리엘이 내 말을 받아 낮게 말했다.

"들어갈 수 있어요. 이번 한 번은."

세라는 문턱에서 검집을 거두며 길을 비켜 섰다. 바깥엔 아직 왕궁과 성도와 기사단이 각자 다른 손으로 우리를 갈라 놓을 생각뿐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계근장 안에선 먼저 이어진 줄이 있었다.

우린 더는 사건을 하나씩 주워 담는 쪽이 아니었다.

하나의 봉인선을 서로 다른 손으로 나눠 옮기고 있었다.

그 줄이 어디서 끊기고 어디서 다시 묶이는지, 이제는 저쪽보다 먼저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엔 이름보다 순서를, 명분보다 손버릇을 먼저 붙잡았다.

그래서 저쪽이 다시 덮으려 들어도 어디서부터 뜯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손이 남긴 반복까지.

그리고 오늘 밤, 그 줄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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